주체 91(2002)년 9월 12일(목)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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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위와 위증민

서정욱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불후의 고전적 노작 ≪세기와 더불어≫에서 빛나는 수령님의 혁명동지에 대한 해설강좌 시간입니다.

오늘은 그 여섯 번째 시간으로 국제당파견원 반성위와 중국공산당원 위증민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반성위와 위증민, 두 동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연구하면서 위대한 수령님의 위인적 풍모와 함께 참된 공산주의자의 자세에 대하여 깊이 사색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국제당파견원 리기동(반경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1933년 동만유격구에서 처음으로 반성위를 만나시었습니다.

≪우리가 유격근거지에서 좌경과의 투쟁을 한창 벌이고 있던 1933년 4월경에 동장영은 다부산자 차림을 한 중년 손님 한 사람을 데리고 나를 찾아왔다. 차림새와 행동거지가 퍽이나 점잖고 세련된 중년의 그 사나이는 나를 보자 멀리서부터 미소를 짓고 인사의 표식으로 머리 위에 한쪽 손을 들어올렸다 내렸다. 내가 알고 있는 구면 손님일 것이라고 잘못 판단할 만큼 다가오는 사나이의 눈동자는 반가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국제당 파견원, 3권)

≪이 수수께끼같은 손님이 바로 국제당 파견원(순시원) 반성위였다. 반이란 성이고 성위는 이름이 아니라 만주성 당위원이란 직책을 이르는 약어였다.≫(국제당 파견원, 3권)

≪반성위를 본명대로 이기동이라고 부르거나 반경유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국제당 파견원, 3권)

당시 반성위는 만주지방의 공산주의자들속에 널리 알려진 혁명가였으며 많은 동지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공산주의자였습니다.

≪반성위는 만주지방의 공산주의자들속에 널리 알려진 이름난 혁명가였고 당활동가였다.≫(국제당 파견원, 3권)

≪그의 말에 의하면 반성위는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으로서 중국의 무창폭동과 북벌전쟁에도 참가하였고 쏘련에 가서 공부도 한 바 있는 능력있는 노간부라는 것이었다. 한때는 수녕중심현위 서기로도 활약하였는데 자기 자신은 반성위의 인간미와 예리한 통찰력에 매혹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하였다.

반성위에 대한 왕윤성의 존경심은 보통 정도가 아니었다.≫(국제당 파견원, 3권)

최성숙   ≪≪영안에서 온 최성숙동무가 잘 있습니까?≫

우리의 대화는 반성위의 이런 물음으로 시작되었다.

아랫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반성위의 특출한 장점이라고 하던 최성숙의 말이 되살아 오르며 새삼스럽게 가슴이 뭉클해졌다.≫(국제당 파견원, 3권)

≪그러나 나는 반성위에 대한 왕윤성과 최성숙의 평가를 매우 중시하였다. 그들은 반성위가 아랫사람들을 대하는데서 절대로 편견을 앞세우지 않는다는 것과 주견을 가지고 매사를 공정하고 신중하게 처리하는 노숙한 일군이라는데 대하여 여러 번 강조하였다. 반성위에 대한 나의 첫 인상도 무척 좋았다.≫(국제당 파견원, 3권)

반성위는 소박하고 겸손한 품성의 소유자였습니다.

≪반성위는 나보다 나이가 20여 살이나 더 든 투쟁경험이 풍부하고 노숙한 혁명가였지만 틀을 차리거나 연령의 격차로부터 오는 거리감을 조금도 두지 않고 나와 동지 대 동지로서 허심탄회하게 열정적으로 담화를 하였다.≫(국제당 파견원, 3권)

위대한 수령님께서 동만유격구에서 소비에트좌경노선의 문제를 해결하는데서 반성위의 출현을 주목하시었습니다.

≪나는 좌경의 전횡밑에서 인민이 울고 있는 동만 땅에 국제당이 파견원을 보내준 것은 혁명을 위해서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소비에트노선과 인민혁명정부노선이 서로 대치되어 제가끔 자기의 정당성을 논증하는 시점에서 반성위의 출현은 그 중 어느 하나를 지지하고 다른 하나를 부정하게 될 결정적인 국면을 열어놓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국제당 파견원, 3권)

반성위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지도하시었던 길회선철도부설반대투쟁을 격찬하였습니다.

≪반성위는 그 시위에 대한 말을 꺼낼 때마다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곤 하였다. 그리고 나서는 우리가 길회선철도부설공사를 반대하여 조직했던 시위투쟁을 연방 격찬하였다.≫(국제당 파견원, 3권)

반성위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제출하시었던 인민혁명정부노선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내가 불행 중 다행이라고 본 것은 그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이 좌경의 쑥대밭에서 혁명을 위기에서 건져줄 수 있는 인민혁명정부노선이 탄생하여 유격구인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었소. 김동무가 아주 신통한 정식화를 했다고 나도 방금 전에 동장영동무에게 실토했더랬소.≫

≪그러면 반동지도 인민혁명정부노선을 지지한단 말입니까?≫

≪지지하지 않는다면 내가 동장영동무에게 왜 그런 말을 했겠소. 인민혁명정부노선에 대해서는 동장영동무도 지지하였소, 그 동무는 인민이 좋다면 좋을 것이라고 한 김동무의 말에서 큰 감명을 받은 것 같더구만. 우리 마음을 푹 놓고 일을 더 잘해봅시다.≫

반성위는 느닷없이 내 손을 의미있게 꽉 잡았다가 놓았다.

이렇게 되어 우리는 인민혁명정부노선에 대한 국제당의 지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국제당 파견원, 3권)

반성위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별동대를 조직하시며 구국군과의 관계를 개척하신 업적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반성위는 계속하여 우리가 별동대를 조직하는 방법으로 유격대를 합법화하고 구국군과의 관계를 개척한 것은 특기해야 할 업적이라고 하면서 동만혁명가들은 앞으로 이 업적을 계속 고수하고 발전시켜나가야 한다고 언명하였다.≫(국제당 파견원, 3권)

반성위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제출하신 반일인민유격대를 대부대혁명군으로 통합개편안을 적극 지지하였습니다.

≪우리가 반일인민유격대를 대부대혁명군으로 통합개편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국제당파견원 반성위도 국제당노선에 부합되는 정당한 방침이라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었다.≫(조선인민혁명군, 3권)

특히 반성위는 위대한 수령님의 자주적인 당창건방침을 전적으로 지지하며 크게 고무하였습니다.

≪≪나는 국제당 파견원으로서가 아니라 김동무와 다름없는 조선공산주의자의 한 사람으로서 조선공산당 해산을 수치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선포한 국제당의 처사를 섭섭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대하여 동감을 표시하는 바이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소. 조선공산당은 해산됐는데 인도지나공산당이 해산되지 않고 건재하는 건 무슨 이유 때문인가 하는 것이오. 그건 호지명과 같은 뛰어난 인물이 국제당에 인도지나대표로 틀고앉아 있었기 때문이었소. 그런데 그 당시 조선공산주의운동 대열에는 국제당의 인정을 받을 만한 출중한 인물이 없었고 영도핵심이 없었던 것이오.≫

당이 해산되게 된 기본적인 이유의 하나를 지도자와 영도핵심이 없는데서 찾는 반성위의 말은 당 해산의 1차적 원인을 파쟁에서만 찾아보는데 습관된 나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국제당의 인정을 받을 만한 세계적인 지도자의 결핍, 그것으로 하여 조선공산당의 해산을 저지시킬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은 사리에 맞는 반성위식의 분석이고 발견이었다.≫(국제당 파견원, 3권)

카륜회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자기 당을 재건해야 한다는 반성위의 주장은 카륜에서 채택되었던 우리의 당창건 방침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옳습니다. 조선사람이 자기 당을 재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은 조선혁명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남의 집 곁방에서 눈치놀음이나 하며 껄렁껄렁한 세월을 보내는 그런 인간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입장을 가지고 우리는 세 해 전에 이미 기층당조직을 먼저 내오고 그것을 확대강화하는 상향식 방법으로 당을 창건할 데 대한 새로운 방침을 내놓고 건설동지사란 명칭을 가진 당조직을 내왔습니다.≫

나는 첫 당조직을 내오게 된 역사적 경위와 그것을 결성하고 확대하는 도상에서 직접 체험했던 가지가지 일에 대하여 상세하게 소개하였다.

반성위는 나의 말을 주의깊이 들어주었다.

≪내가 공상가라면 김동무는 철저한 실천가라고 할 수 있겠구만. 어쨌든 대단합니다. 그런데 이것 보시오. 조선공산주의운동 선상에는 파벌이 너무 많아서 야단이오. 그러니 파벌을 하는 놈팽이들은 인정하지 말고 반드시 젊은 사람들끼리 새 출발을 해야 하오. 종파를 그냥 두어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소. 적잖은 종파꾼들이 왜놈의 개가 되었소. 개가 안 된 놈팽이들 가운데도 종파습성이 골수에 사무쳐서 혁명을 하려고는 생각지 않고 헤게모니 쟁탈에만 열중하고 있는 자들이 적지 않소. 파벌과 싸우려면 우리가 반일투쟁을 잘해야 합니다. 투쟁과정에 대열이 강화되고 핵심이 묶어지면 그것이 곧 당을 창건하는 밑천으로 되는 것이오.≫

반성위의 이 말은 나를 몹시 흥분시켰다. 물론 그것은 우리가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소리는 아니었다. 종파에 오염되지 않은 새 세대 청년들로 당을 창건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이미부터 주장해온 기본방침이었다.

나는 어떻게 하든지 조선사람들로 핵심을 꾸리고 그들을 묶어세워 당도 창건하고 조국해방의 대사도 이루고야 말리라는 결심을 더욱 굳게 다졌다.

반성위와 함께 국제공산주의운동 문제와 국제당문제, 조선에서의 당건설문제를 논의하고 완전한 견해의 일치를 본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국제당 파견원, 3권)

위대한 수령님과 반성위는 한두 번의 만남의 둘도 없는 동지로 되었습니다.

≪소왕청에서의 잊지 못할 담화를 계기로 반성위는 나의 둘도 없는 벗이 되었고 동지가 되었다.≫(국제당 파견원, 3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반성위의 주체적인 관점을 높이 평가하시면서 그로부터 동지적 고무를 받았다고 회상하시었습니다.

≪어쨌든 반성위를 만난 것은 분명 내 생애에서 의미 있는 사변이었다. 국제당에 우리를 이해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종파에 물들지 않은 사람들로 핵심을 양성하여 조선공산주의운동 대열을 다시 꾸리고 조선사람의 당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그의 말에서 나는 특히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받았다. 그때 그가 우리에게 준 조언들은 나로 하여금 사고와 실천에서 주체적인 대를 더욱 튼튼히 견지하게 하였다. 그때 반성위가 준 영향과 동지적 고무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반≪민생단≫투쟁이 스산하게 벌어지던 시기에 조선민족과 우리 혁명의 주체를 옹호고수하여 그처럼 결사적인 투쟁을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국제당 파견원, 3권)

≪나에게 ≪자본론≫을 안내해준 선생이 박소심이고 ≪홍루몽≫을 배워준 스승이 상월선생이라면 반성위는 조선사람은 조선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우리의 신념을 더욱 굳게 해준 진실한 지지자, 고무자, 동정자였다.≫(국제당 파견원, 3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반성위를 통해 혁명투쟁에서 이론가의 중요성을 절감하시었습니다.

≪나의 항일혁명사에 반성위를 만났을 때처럼 조선혁명의 운명과 노선문제를 두고 그렇듯 진지하고 열렬하고 심각한 논의를 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반성위는 혁명에 대한 자기 식의 일가견을 가진 흔치 않은 이론가였다. 1930년대의 후반기 우리가 대부대를 인솔하고 백두산 일대에 진출했을 때 반성위가 살아서 우리와 함께 활동했더라면 그는 조선혁명이 직면하고 있는 난문제들을 해결하는데서 이론실천적으로 많은 공헌을 하였을 것이다.

나는 반성위를 만난 다음부터 혁명투쟁을 하는데서는 실천가도 중요하지만 그 실천을 선도하고 조종해줄 수 있는 이론가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국제당 파견원, 3권)

반성위는 특히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수령으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발견하고 당시 청년장군이시었던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선의 ≪호지명≫≫, 곧 조선의 수령으로 성장하기를 당부하였습니다.

≪≪나도 역시 같은 심정입니다. 이번 행각이나 끝나면 나도 처를 데리고 동만 땅에 와서 김 동무와 같이 손을 맞잡고 일하고 싶소. 우린 어딘가 낡았소. 때묻었거든…. 조선의 ≪호지명≫이 되시오.≫

반성위는 이런 말을 남기고 왕청땅을 떠났다.≫(국제당 파견원, 3권)

더불어 반성위는 위대한 수령님의 안전에 대하여 각별히 주의하며 강조하였습니다.

≪≪혁명의 전도가 아직 요원한데 그렇게 모험을 해서야 되겠소? 제발 심사숙고해 주시오.≫

반성위는 끈덕지게 나를 설복하였다.

≪자기의 몸을 개인의 몸으로 생각해서는 안되겠소. 자칫하면 제2의 이광이 될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하오. 우리가 다 죽어서 백골이 되더라도 동무들만은 살아서 끝까지 조선을 위해 싸워줘야 할 게 아니오!≫

반성위의 그 말은 나를 적이 감동시켰다. 그러나 나는 공동전선의 대망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았다.≫(오의성과의 담판, 3권)

혁명적이고 원칙적인 반성위는 안타깝게도 종파분자에 의해 암살당하였습니다.

≪그를 살해한 것은 훈춘유격대의 대대정치위원이었던 박두남이었다. 노선전환을 토의하는 훈춘현당 확대회의에서 반성위로부터 가장 엄중한 비판을 받은 것이 다름아닌 그 박가였다. 박가는 파벌투쟁의 우두머리라는 낙인을 받고 정치위원직에서 해임되었다. 호위임무를 지닌 병사들이 반성위가 글을 쓰고 있는 숙소마당에서 전리품으로 들어온 38식보총을 구경하고 있을 때 박두남이 그 총으로 국제당 파견원을 쏘았다는 소문이 왕청에까지 날아와 사람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국제당 파견원, 3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반성위의 부고를 들으시고 참으로 애통해 하시었으며 두고두고 반성위를 회상하시었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나는 반성위와 함께 혁명을 논하고 인생을 논하던 이치백노인네 윗방에서 하루종일 문을 닫아걸고 눈물을 흘리며 고인을 추모하였다.≫(국제당 파견원, 3권)

≪나는 사양하지 않고 노인을 따라나섰다. 밤참도 밤참이려거니와 나와 반성위의 체취가 그대로 남아있는 그 집에 가서 하룻밤 자고 싶은 생각도 간절하였다.≫(마촌작전, 3권)

위증민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홍왜회의에서 처음으로 위증민을 만나시었습니다.

≪내가 위증민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그가 만주성당 파견원의 자격으로 간도에 와서 다홍왜회의에 참가했을 때입니다. 그때부터 나와 위증민은 줄창 항일의 길에서 뜨거운 우정을 나누었습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8권)

≪나와 중국공산당과의 관계는 이렇게 맺어졌으며 이 과정에 나는 중국공산당조직의 간부로도 활동하게 되었다. 동장영이 희생된 다음에는 위증민과 연계를 가지었다.≫(첫 당조직 - 건설동지사, 2권)

위증민은 어릴 때부터 혁명투쟁에 뛰어든 직업적인 혁명가였습니다.

다홍왜회의 장소≪위증민은 어릴 때부터 줄곧 항일애국의 길을 걸어온 직업적인 혁명가였습니다. 그는 안양에서 군사학교에도 다녔고 베이징에서 공부할 때에는 항일시위에도 참가하였습니다.

혁명가로서의 위증민의 활동은 9.18사변 후 만주로 투쟁무대를 옮기면서부터 새로운 시기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만주에 와서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곳이 하얼빈도시입니다. 위증민은 거기서 당서기로 활동하였습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8권)

위증민은 소박하고 겸손하며 허심한 품성이었습니다.

≪용모로 보면 위증민은 대학교수를 방불케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무관형이 아니라 문관형이었습니다. 혁명만 아니면 과학탐구나 저술활동에 한 생을 바칠 수도 있는 사색형의 인간이었습니다. 위증민은 인간으로서는 소박하면서도 붙임성이 좋았고 진지하고 원만하고 겸손하고 허심한 것이 특징이었습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8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위증민에 대하여 한마디로 조선혁명을 위해 왼심을 많이 쓴 중국혁명가라고 회상하시었습니다.

≪위증민은 중국의 혁명가였지만 조선혁명가들을 지지해주고 조선혁명을 위해 왼심을 많이 쓴 사람입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8권)

위증민은 다홍왜회의에서 국제당파견원의 자격으로 참가하여 비교적 공정하게 처신하였습니다.

≪성당 파견원으로서 이 투쟁을 객관적으로 정확히 종합분석하고 평가할 사명을 걸머진 위증민 한 사람만이 당, 단 조직 자체를 ≪민생단≫조직으로 보는 것은 착오이며 부분과 전체는 반드시 구별해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발표하여 장내에 조성된 긴장도를 약간 늦추어놓았다. . . .

위증민과 왕윤성도 공식적으로는 자기들의 의사를 표명하지 않았지만 내적으로는 나의 주장에 이해를 표시하였다. 특히 위증민의 이성적 판단과 공정한 태도는 나에게 적지 않은 도움으로 되었다.≫(다홍왜에서의 논쟁, 4권)

≪다홍왜회의가 얼마나 심각한 회의였습니까. 그때 당파견원의 자격으로 회의에 참가한 위증민이 처신을 공정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참으로 불리한 처지에 떨어졌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래도 내 주장을 귀담아듣고 긍정할 것은 긍정하고 참작할 것은 참작하였습니다. 요영구회의가 끝난 다음에는 우리가 제소한 문제들에 대한 결론을 받기 위해 모스크바에 있는 국제당본부에까지 갔다왔습니다.

그가 국제당에 갔다온 것이 조선혁명을 위해서는 좋은 방조로 되었습니다. 사선을 헤치고 남호두에 찾아온 위증민을 얼싸안고 서로 볼을 비비던 그날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8권)

위증민은 다홍왜회의와 요영구회의의 주요쟁점을 국제당에 제소하여 공정한 결론을 받아왔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당시 위증민의 노고를 높이 평가하시었습니다.

동북의 신비경 경박호   ≪위증민이 조선혁명가들은 조선혁명의 기치를 들고 싸워야 한다는 나의 주장이 국제주의와 모순되지 않으며 반민생단투쟁이 극좌적으로 진행되었다고 한 나의 발언도 정당하다는 국제당의 견해와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조선의 민족군대를 가지고 국내와 압록강연안에서 싸워야 한다는 국제당의 결론을 전달하면서 내 어깨를 부둥켜안았을 때 나는 조선혁명을 위해 바친 그의 노고를 잊지 말자고 생각하였습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8권)

≪≪동만특위와 그 산하의 우리 중국인 공산주의자들이 ≪민생단≫을 반대하는 투쟁을 하면서 문제를 편협하게 보고 사람들의 운명을 극단적으로 처리한 엄중한 과오를 범하였습니다. 사실 많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과 혁명가들이 애매하게 피해를 보았습니다.

반≪민생단≫투쟁을 공명정대하게 진행하지 못한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나도 큰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나는 위증민의 말을 진실한 자기반성으로 받아들였다.≫(경박호기슭에서, 4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위증민을 통해 국제당 제 7차대회의 과정에 대하여 전달받으셨습니다.

≪위증민은 국제당 제7차대회의 전과정에 대해서도 상세히 전달해 주었다.≫(경박호기슭에서, 4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중통일전선을 중시하시어 위증민이 전달해준 국제당의 분권대책을 수용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동북항일연군의 형식으로 투쟁하실 것을 결심하시었습니다.

≪우리가 요구한 것은 자주권이었지 분권은 아니었다. 우리는 조선사람들이 제한과 구속과 방해를 받지 않고 조선혁명을 해나갈 수 있는 자주적 권리를 인정하고 존중할 것을 요구한 것이지 세력분배를 요구하지 않았다.

물론 위증민을 비롯한 중국동지들도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위증민은 자기가 모스크바에 다녀와서 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바로 이 분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국제당의 의사대로 부대를 민족별로 가르기 위한 대안을 세워보는 것이 어떻겠는가고 거듭 말하였다.≫(경박호기슭에서, 4권)

위증민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주재하신 남호두회의에 참여하였습니다.

≪우리는 1936년 2월 하순부터 근 한 일주일 동안 소자지하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를 일명 남호두회의라고도 부른다. 회의에는 위증민을 비롯한 중국동지들과 함께 김산호, 한흥권, 최춘국, 전만송, 최인준, 박태화, 김려중, 임춘추, 전창철 등 군정간부 30, 40명이 참가하였다.≫(경박호기슭에서, 4권)

≪남호두회의를 계기로 나와 위증민의 우정은 몇 곱절 더 깊어졌습니다. 거기서 한 보름쯤 그와 함께 지냈는데 뜻이 잘 통했습니다. 그때 그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8권)

위증민은 위대한 수령님의 주도하신 조국광복회 창립을 열렬히 환영하였습니다.

≪위증민은 미혼진회의에서 부대개편과 관련된 우리의 의사를 지지해주었고 그 후 조국광복회의 창립도 열렬히 환영해주었습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8권)

서강회의 장소(무송현 양목정자)위증민은 위대한 수령님이 주재하시고 국내진공작전방침이 확정된 서강회의에도 참가하였습니다.

≪이 모임에 이어 소집한 회의가 바로 항일혁명투쟁사에서 하나의 역사적 분기점으로 되는 서강회의이다. 회의는 서양목정자밀영에서 사흘동안 진행되었는데 2사와 4사의 간부들과 위증민, 전광을 비롯한 군부간부들도 참가하였다. 회의에서는 국내진공작전방침이 토의되었다. 이 방침과 관련하여 내가 연설을 하였다. 회의참가자들은 모두 내가 내놓은 국내진공작전방안을 찬동하였다.≫(소탕하에서의 일행천리전술, 6권)

위증민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주재하신 소할바령회의에서 채택한 소부대전술도 지지하였습니다.

≪그래도 위증민은 화제를 유격운동의 당면과제와 전략전술과 관련한 문제에로 자꾸만 끌어갔습니다. 우리가 조성된 정세의 요구에 맞게 혁명역량을 보존축적하며 대부대활동으로부터 소부대활동에로 넘어갈데 대한 방침을 채택하고 그에 따르는 실천적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통보하자 위증민은 조선동지들이 정세도 옳게 판단하고 전략도 옳게 세웠다고 하면서 우리의 방침을 지지해 주었습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8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위증민에게 당건설과 대중단체건설의 경험을 많이 가르쳐주시었습니다.

≪위증민은 자기자신에 대한 요구성이 높고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장점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줄도 아는 군사정치일군이었습니다. 그는 나에게 조선동지들이 유격구가 해산된 다음에도 동만과 국내, 서간도의 광활한 지역에서 당조직건설과 대중단체건설에 많은 품을 들었는데 그 경험을 듣고 싶다고 하였습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8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위증민에게 군사제일주의원칙의 문제점을 일깨워주시었습니다.

≪군과 민은 서로가 바늘과 실처럼 따라 다니는 존재로서 어떤 환경에서나 일심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위증민은 남만성위가 소집한 회의에서 준비된 유격대간부들을 만주각지에 파견하기로 한 것은 종래의 결함을 고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때늦게나마 실책을 깨닫고 군사일변도경향을 퇴치하려고 결심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8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위증민에게 열화원정의 모험주의적 측면을 일깨워주시었습니다. 그러나 위증민은 긍정하면서도 그 원정을 지지하는 한계를 보였습니다.

≪위증민은 열하원정계획에 모험주의적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원정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중국혁명에 대한 위증민식의 충실성이라고 보았습니다.≫(열하원정, 7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로군과 남만성위의 사업에 대하여 위증민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시었습니다.

≪위증민은 실천상에서 결심을 내리기 어려운 문제에 부닥칠 때마다 꼭꼭 우리의 견해를 들어보군 했습니다. 그가 어느 정도로 우리를 신뢰했는가 하는 것은 양정우가 전사한 후 1로군과 남만성위의 사업과 관련된 문제를 전적으로 우리와 협의한데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8권)

양정우   양정우가 희생된 이후 위증민은 1로군을 맡아 지휘를 잘 하였습니다.

≪양정우가 희생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일 슬퍼한 사람이 위증민이었습니다. 얼마나 슬퍼했던지 식사도 전폐했다고 합니다. 양정우가 희생된 후 1로군의 지휘를 맡은 위증민은 싸움도 잘하였습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8권)

위증민은 동북혁명에서 조선공산주의자들과 조선인민혁명군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위증민은 동북지방의 항일무장투쟁에서 조선공산주의자들과 조선인민혁명군이 수행하고 있는 역할을 항상 높이 평가하군 하였다.≫(새로운 정세를 맞받아 나가며, 6권)

위증민은 허약한 체질에 부상까지 당하여 건강이 매우 나빴습니다.

≪남만에 다녀온 위증민을 보니 건강상태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무슨 고질병이 있었는가 하면 심장병과 위병이었습니다. 원래 체질이 허약한 사람인데다가 무슨 일에서나 몸을 아끼지 않는 성미이다 보니 건강이 나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8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위증민의 건강을 위하여 심려하시면서 많은 도움을 주시었습니다.

≪위증민은 미혼진회의 직후 우리와 함께 백두산쪽으로 나오다가 푸르허근방에서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그때 우리 수중에는 적을 치고 노획해온 군마가 몇 필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군마들 중에서 제일 좋은 놈을 골라 위증민에게 주었습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8권)

≪나는 박영순을 시켜 대첨창에 병원을 꾸리게 하고 위증민이 거기서 치료를 받게 하였습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8권)

≪나는 강위룡과 김운신을 장백에 보내며 인조자라혈을 비롯하여 위증민의 몸보신에 필요한 약과 영양제를 구해오게 하였습니다. 우리 동무들은 그때 200여원의 모연금으로 인조자라혈은 물론, 흰쌀, 밀가루, 통졸임, 우유, 전병까지도 사 가지고 돌아와 위증민에게 보장해 주었습니다. 위증민은 가루음식을 특별히 좋아하였습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8권)

≪그 해 음력설을 나는 횡산밀영에 가서 위증민과 같이 쇠었습니다. 박영순이 통졸임통에 구멍을 내서 국수분통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 해 설에는 위증민과 함께 농마국수도 먹고 술도 몇 잔 나누었습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8권)

≪나는 연합동을 한동안 위증민의 곁에 가서 일하게 하였다. 위증민은 연합동이 일류급식당에 보내도 손색이 없을 재능있는 요리사라고 하면서 그를 몹시 사랑하였다.≫(유격대의 어머니, 6권)

≪우리 대원들이 그 마을에 가서 후방물자공작을 많이 하였다. 한번은 그곳에서 닭까지 구해가지고 왔다. 나는 그 닭으로 병약한 위증민에게 닭곰을 해주게 하였다.≫(인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5권)

≪나는 소할바령회의를 마친 다음 한총구밀영에서 병치료를 하고 있는 위증민을 찾아갔습니다. 병고로 얼굴이 창백해진 그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우리 동무들은 위증민의 총상자리는 그럭저럭 아물어가나 본래의 고질병이 도져서 건강이 호전되지 않는다고 걱정하였습니다. 밀영의 악조건에서는 현상유지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8권)

≪위증민은 나에게 가슴에서 돌덩이 같은 것이 자꾸 치민다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런 말을 듣고나니 가슴이 섬찍해졌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가슴앓이를 하면서 그런 하소연을 종종 하였기 때문입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8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위증민의 안전과 건강을 위하여 많은 훌륭한 유격대원들을 보내주시었습니다.

≪임춘추는 경위연대 당서기로 활동할 때 위증민의 곁에 오래동안 가있으면서 그의 사업도 도와주고 병치료도 해주었다. 그래서 위증민은 그와 같이 있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늘 곁에 있어줄 것을 요구하군 하였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백두산시절의 주석님의 전령병 백학림≪우리는 위증민이 사람을 달라면 사람도 주었습니다. 황정해와 백학림은 내가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들이었지만 그가 이름을 찍어서 달라고 하기에 보내주었습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8권)

≪백학림은 우리와 함께 고난의 행군에도 참가하였습니다. 그때 나와 함께 한 홉의 미시가루를 나누어먹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바로 백학림입니다.

상하간의 관계가 그런 정도로 밀접해지면 상하가 다 상대를 친혈육 이상으로 아끼고 사랑하게 되는 법입니다. 이런 사람을 남에게 주자니 나도 사실은 속이 좀 알찌근했습니다.

그러나 중병으로 시달리는 위증민이 욕심내기 때문에 미련을 버리고 보내주었습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8권)

황정해   ≪황정해는 오던 길로 되돌아가 비밀문건을 건사한 후 위증민을 들쳐업고 수림속으로 달렸습니다. 적탄이 인차 우박처럼 날아왔습니다. 그러자 그는 위증민을 안고 달리었습니다. 자기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위증민만은 살려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황정해는 어깨에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그런 상태로 더는 위증민을 안고 뛸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그는 위증민을 기관총수에게 넘기였습니다. 그리고는 기관총을 잡고 엄호사격을 하면서 적들을 견제하였습니다.

황정해란 사람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위증민이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위증민이 그에게 싸창을 넘겨 준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8권)

위증민을 보호하는 과정에서 적지않은 조선혁명가들이 희생당하였습니다.

≪적을 격퇴하고 전지를 수색하던 우리는 집천정에서 위증민을 찾아냈다. 총상을 입은 그의 허벅다리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날 따라 위증민은 병세가 악화되어 운신조차 못하였다고 한다. 임은하가 용케 그를 천장에 숨겨놓았다. 하지만 그 자신은 적의 화력을 피해 산으로 내달리다가 적탄에 다리를 맞고 체포되었다.

그날 조아범의 아내와 이주임은 희생되었다.≫(기이한 인연, 4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심지어 위증민을 위해 가장 우수한 유격대원들로 경위연대를 꾸려주시었습니다.

이동학최춘국임춘추

≪행군총화가 있은 뒤 우리는 경위연대를 하나 새로 편성하였다. 연대장으로 우리 부대의 경위중대장이던 이동학을 임명하고 정치위원으로는 최춘국을 임명하였다. 임춘추도 위증민의 곁에 가서 그의 병치료를 도와주게 하였다. 독립여단에 소속되어있던 다른 사람들도 다 보내주었다. 결국 위증민은 소원대로 가장 유능하고 우수한 조선인군정간부들과 끌끌한 전투원들로 무어진 경위연대를 가지게 되었다.

위증민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으나 경위연대에 넘어간 사람들 중에는 우리곁에 있으려던 소원을 성취하지 못해 섭섭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독립여단시절의 최춘국, 6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위증민에게 쏘련에 들어가서 병치료를 할 것을 권고하시었습니다.

≪그날 나는 위증민에게 쏘련에 들어가서 병치료를 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그러나 1로군의 실태를 두고 병상에서 몹시 고민하고 있던 위증민은 아직 바로 잡아야 할 일들도 많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오히려 나에게 쏘련으로 들어가게 되면 국제당에 1로군의 실태를 자세히 보고해주며 국제당에 보낸 자기의 편지가 정확히 가닿았는가를 알아봐달라고 하였습니다.

자기자신의 병보다 1로군의 운명을 두고 더 고민하는 위증민을 보니 나도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8권)

위증민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손에서 일을 떨구지 않았습니다.

≪위증민은 운명직전까지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붓을 들고 보고서도 집필하고 유격투쟁을 총화하는 글도 썼습니다. 어떤 날은 노군의 사업과 관련된 문건기안도 했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손에서 일을 떨구지 말자는 것이 혁명가로서 그가 품고 있던 지향이었던 것 같습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8권)

위증민은 임종시에 전우들에게 위대한 수령님을 찾아갈 것을 간곡히 당부하였습니다.

≪임종이 박두하자 위증민은 싸창과 문서보따리를 전우들에게 넘겨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동무들은 혈기왕성한 청년들이니 끝까지 싸워야 한다. 혁명은 동무들을 믿고 있다. 혁명이란 간고하고 피도 흘리고 희생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고생을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가 흘린 피는 헛되지 않을 것이다.

동무들은 꼭 김일성동지를 찾아가라.≫(위증민에 대한 회상, 8권)

≪한때 위증민 곁에 가서 오래 일한 바 있는 우리 동무들의 말에 의하면 위증민은 언제나 조선혁명의 운명을 우리와 연결시켰고 그래서 말끝마다 김일성동지를 잘 받들라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8권)

위증민은 1941년 사망하였습니다.

≪위증민이 사망한 때가 1941년 3월이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32살이었습니다. 아까운 나이었습니다. 조총도 쏘지 못하고 추도식도 없는 쓸쓸한 최후였습니다. 그러나 전우들은 있는 정성을 다해 그의 시신을 안장해 주었습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8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위증민의 마지막말을 잊지 않으시었습니다.

≪≪김사령, 부탁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밀영을 떠날 때 그가 나에게 한 마지막말이었습니다. 그 후 위증민을 다시 만나보지 못한 나한테는 유언이나 다름없는 말이었습니다.

사실이야 얼마나 단순하고 평범한 말입니까.

그러나 그날 위증민이 나를 전송하면서 한 ≪부탁합니다.≫라는 말을 나는 매우 무거운 마음으로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자기가 온 생애를 바쳐 가꾸고 사랑해온 혁명을 끝까지 성공시켜 달라는 뜻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로군사업을 부탁한다는 뜻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8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위증민을 조선혁명을 위해 헌신한 국제주의전사로 평가하시었습니다.

≪위증민은 그 무렵부터 조선동지들과의 공동투쟁을 위해서는 의사소통이 잘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조선말을 익히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조선인대원들을 몹시 사랑해주었습니다. 이것이 다 조선혁명에 대한 국제주의적인 지지와 성원의 표시였습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8권)

≪위증민은 조선혁명이 가장 어려운 시련을 겪고 있을 때 우리를 진심으로 지지해준 사람입니다. 내 지금도 그래서 그 사람 생각을 하군 합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8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위증민을 훌륭한 인간, 훌륭한 혁명가로 높이 평가하시었습니다.

≪위증민은 인간으로서도 훌륭한 사람이었고 혁명가로서도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훌륭한 인간이고 훌륭한 혁명가였기 때문에 우리도 있는 성의를 다하여 그를 도와주었습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8권)

≪위증민의 생애가 아름다운 일생으로 되는 것은 시작과 끝이 같은데 있습니다. 인생의 첫 자욱을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인류를 위해서 뗀 사람은 인생의 마감도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인류를 위해서 맺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일생의 사람들의 추억속에 영원히 남는 고결하고 아름다운 인생으로 될 수 있습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8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위증민을 회상하시면서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주의적 의무와 의리에 대하여 강조하시었습니다.

≪항일혁명시절에는 사람들의 정신세계가 참으로 깨끗하였습니다. 국제공산주의운동내부에 현대수정주의가 대두하면서부터는 국제주의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별반 없습니다. 입만 벌이면 국제주의를 부르짖던 사람들도 지금은 제 주머니를 채우느라고 바삐 돌아가고 있습니다.

못 먹고 못 입어도 혁명을 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국적을 따지지 않고 먹어라, 써라 하던 때가 좋았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언제 어떤 환경에서나 국제주의적 의무와 의리를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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