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9월 8일(일)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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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과 부정

통일여명 편집위원 강인규

 

먼저, 부정의 부정의 법칙의 정의이다.

발전의 일반적 경향성, 방향을 밝혀주는 유물변증법의 기본법. 부정의 부정의 법칙은 발전과정에서 앞선 단계와 다음 단계, 사멸하는 것과 발생하는 것, 낡은 것과 새것 사이에 합법칙적 연관을 반영하면서 사물현상들의 발전이 어떤 방향으로 어떤 경향성을 가지고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준다. 부정의 부정이라는 말은 독일의 관념론 철학자 헤겔의 ≪삼단법≫으로부터 유래되었으며 그가 처음으로 정식화하였다. 헤겔 이전 시기에도 이 법칙의 개별적 특성들 예컨대 부정의 변증법적 성격, 발전에서 계승성의 역할, 발전방향의 비직선성 등이 어느 정도 해명되었으나 그것들이 전일적으로 체계화되지는 못하였다. 발전의 출발 단계인 ≪정립≫은 ≪반정립≫에 의하여 부정되며, 둘째 단계인 ≪반정립≫은 발전의 세째 단계인 ≪종합≫에 의하여 부정된다. 따라서 ≪종합≫은 2차의 부정, 부정의 부정이다. 헤겔의 관념론적 철학에서 극히 신비적이며 형식적인 성격을 띠고 있던 이 법칙은 유물변증법이 창시됨으로써 비로서 현실세계 발전에서 작용하는 보편적 법칙으로 새롭게 정식화되고 그 내용이 과학적으로 밝혀졌다.

부정의 부정의 법칙은 사물현상들의 발전이 반드시 변증법적 부정을 통하여 낮은 단계부터 높은 단계로 그리고 보다 높은 단계로 끊임없이 상승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밝혀준다. 부정의 부정의 법칙의 내용을 해명하는 데에서 본질적인 의의를 가지는 것은 변증법적 부정이다. 변증법적 부정은 발전의 선행한 단계, 즉 사물현상의 낡은 질적 상태를 극복 청산하는 동시에 낡은 질적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 가운데서 새로운 질의 형성과 발전에 긍정적인 것을 보존하고 계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변증법적 부정은 발전의 선행 단계와 다음 단계 사이의 필연적 연관을 반영하고 있다. 변증법적 부정은 형이상학적으로 이해된 부정과 같이 대상을 임의의 방법으로 없애거나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단계로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게끔 진행되는 긍정적인 부정이며 외부적인 작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물현상 자체의 발전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자체부정이다. 그것은 발전의 상승적 성격을 규정하는 발전의 필수적이며 합법칙적 계기이다. 변증법적 부정이 없이는 상승적인 운동으로서의 발전이란 불가능하다. 변증법적 부정이 끊임없이 거듭되는 과정을 걸쳐 낡은 것은 새것으로, 새것은 보다 더 새로운 것으로 이행하면서 상승적 과정, 발전과정이 이루어지게 된다.

부정의 부정의 법칙은 발전과정이 또한 형식적 측면에서 일정한 주기성을 나타낸다는 것을 보여준다. 발전의 주기성은 발전과정이 상승적으로 이루어지면서도 마치 선행한 출발단계로 되돌아가는 듯한 형식을 취하는 데에서 나타난다. 발전의 상승성과 주기성을 동시에 고려할 때, 발전과정은 순차적으로 연속되는 나선의 형태를 가지게 된다. 나선의 매 고리는 발전의 매 주기에 해당한다. 발전의 한 주기는 크게 세 단계 또는 그 이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세 단계로 이루어지는 경우 발전의 첫 단계는 대상의 출발 상태이며 둘째 단계는 그것이 부정되고 그 대립물로 전환된 상태이다. 세째 단계는 둘째 상태가 다시 부정되어 그 대립물로 전환된 상태이다. 2차의 부정을 통하여 이루어진 세째 단계에서는 출발 단계에서의 대상의 일부 특징, 측면들이 새로운 기초 위에서 다시 나타난다. 이것은 발전과정이 처음 상태로 되돌아간 듯한 인상을 준다. 주기성을 고려할 때 부정의 부정의 법칙의 중요한 특성은 유물변증법의 다른 기본법칙들과 달리 그것이 적어도 셋 또는 그 이상의 개별적 단계들로 이루어지는 상대적으로 완결된 발전과정 전체를 통하여서만 완전하게 발현되는 데 있다. 온갖 발전이 반드시 처음 상태로 되돌아가는 듯한 형식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발전의 지나온 단계의 어떠한 특징도 되풀이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특징들을 나타내면서 상승적으로 이루어지는 발전과정도 또한 존재한다. 때문에 발전과정의 주기성을 발전의 보편적인 합법칙성으로 보거나 어떠한 과정이든지 그것이 반복, 복귀의 형식만 취한다면 덮어놓고 부정의 부정이라고 하여서는 안된다.

부정의 부정의 법칙의 진정한 내용은 그것이 발전과정의 내적 필연성, 무엇보다도 새것과 낡은 것과의 투쟁의 합법칙성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새것의 전진과 성장과정의 모순성, 새것의 필연적 승리, 새 질에 의한 낡은 질의 근본적 교체, 발전의 앞선 단계와 다음 단계 사이의 계승성 등에서 표현되는 발전과정의 상승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데 있다.≫(주체철학사전)

다음, 변증법적 부정과 관련한 회고록의 부분이다.

3.1인민봉기는 부르조아민족주의자들이 더는 반일민족해방운동의 지도세력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3.1인민봉기를 주도한 지도자들의 계급적 제한성은 그들이 일본의 식민지지배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데까지 도달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 . .

3.1인민봉기를 통하여 우리 인민은 강력한 지도역량이 없이는 어떤 운동이든지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독립만세의 메아리, 세기와 더불어 1권)

관전회의를 지도하시는 김형직선생님

러시아에서 사회주의10월혁명이 승리한 다음부터 아버지는 공산주의사상에 공감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후 3.1운동을 계기로 하여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고 우리 나라 민족해방운동을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운동에로 방향전환시켜야 하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가지게 되었다.

아버지는 1919년 7월 청수동회의에서 무산혁명의 역사적 필연성을 논증한 데 기초하여 8월 중국 관전현 홍통구에서 조선국민회 각 구역장들과 연락원들, 독립운동단체책임자들의 회의를 소집하고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을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운동에로 방향전환할 데 대한 방침을 정식으로 선포하였으며 시대의 변화에 보조를 맞추어 민족자력으로 일본제국주의를 타승하고 무산민중의 권익을 보장하는 새 사회를 건설할 데 대한 과업을 제기하였다.≫(독립만세의 메아리, 세기와 더불어 1권)

항일혁명투쟁탑의 일부분≪그날은 동무들도 흥분하고 나도 흥분하였다. 조직을 뭇는 마당에 정작 나서고보니 왜 그런지 돌아가신 아버지생각이 떠오르고 조선국민회생각이 떠올랐다. . . .

뼈가 부서지고 몸이 찢기는 한이 있더라도 나라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고 한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는 길에서 드디어 첫 열매를 맺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가슴도 울렁이고 눈물도 났다.

우리가 내오게 된 조직의 강령에는 아버지의 이념도 포함되어 있었다. . . .

그 모임에서 나는 우리가 뭇는 조직을 타도제국주의동맹으로, 약칭으로는 ≪ㅌ·ㄷ≫라고 할 것을 제의하였다.

타도제국주의동맹은 반제, 독립, 자주의 이념밑에 민족해방, 계급해방을 실현하기 위해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새 세대의 청년들이 역사의 진통속에서 창조한 순결하고 참신한 새 형의 정치적 생명체였다. . . .

우리 당 역사에서는 ≪ㅌ·ㄷ≫를 당의 뿌리로 보고 있으며 ≪ㅌ·ㄷ≫의 결성을 조선공산주의운동과 조선혁명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시원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 뿌리에서 우리 당의 강령이 태어나고 우리 당 건설과 활동의 원칙에 마련되고 우리 당창건의 골간이 육성되었다. ≪ㅌ·ㄷ≫가 조직된 때로부터 우리 혁명은 자주성의 원칙에 기초하여 새로운 걸음을 떼였다.≫(타도제국주의동맹, 세기와 더불어 1권)

민족주의계열의 학교를 부정하고 사상적으로 결별해버린 나의 행동이 그에게 충격을 준 모양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이관린은 분명 그때 내 생활에서 일어난 변화를 목격하면서 독립군의 말로, 민족주의말로를 더 심각하게 느낀 것 같았다.≫(독립군의 여걸 이관린, 세기와 더불어 1권)

≪성주, 우리 서로 믿음과 사랑속에 공산주의운동을 할 수 없을가? 분파와 헤게모니싸움이 없이 말이요!≫

차광수의 그 부르짖음은 혁명의 길을 찾아 만리타향을 헤매던 끝에 그가 찾은 인생총화이며 교훈이기도 하였다.

나도 그의 손을 잡고 우리 새 세대들은 종파분자들처럼 분열의 길을 갈 것이 아니라 한마음한뜻으로 굳게 뭉쳐 혁명의 곧바른 길을 가자고 격해서 말하였다.≫(차광수가 찾은 길, 세기와 더불어 1권)

≪나는 이제우와 앉아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었다. 그 과정에서 천불교를 타도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반일감정을 적극 지지해주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래서 그곳에 한 열흘가량 물러있으면서 마을사람들과의 사업을 하였다. 종교를 믿는 것으로는 조국을 광복하지 못한다는 나의 말을 천불교신자들은 쉽게 긍정하였다.≫(조직을 확대하기 위하여, 세기와 더불어 1권)

길림감옥≪나는 감방에서 우리 나라의 민족해방투쟁과 공산주의운동이 남긴 경험과 교훈도 분석해보고 다른 나라의 혁명운동경험도 더듬어보았다.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반대하여 시위투쟁도 해보고 파업투쟁도 해보고 의병투쟁도 해보았으며 독립군운동도 해보았다.

그러나 그 모든 투쟁은 실패의 운명을 면치 못하였다.

운동도 많이 하고 피도 많이 흘렸는데 왜 투쟁은 승리하지 못하고 매번 주저앉기만 하였는가?

우리 나라 반일투쟁대열안에는 파벌이 형성되어 민족해방투쟁에 커다란 해독을 끼쳤다. . . .

독립운동의 지도적 위치에 있던 인물들 가운데는 중국을 등에 업고 조선의 독립을 이룩해 보려는 사람들도 있었고 쏘련의 힘을 빌어 일본을 타승해 보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미국이 조선독립을 ≪선사≫해줄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 . .

초기공산주의자들은 인민대중속에 들어가 그들을 교양하고 결속하며 투쟁에 동원할 대신 인민들과 동떨어져 말공부나 하고 ≪영도권≫쟁탈을 위한 권력싸움만 하였다.

초기공산주의운동은 운동내에 발생한 종파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 . .

초기공산주의자들은 사대주의에 사로잡혀 자체로 당을 꾸리고 혁명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저마다 자기 파가 ≪정통파≫라고 하면서 감자도장까지 만들어가지고 국제당의 승인을 받으러 돌아다니었다.

나는 우리 나라 민족주의운동과 초기공산주의운동의 이러한 실태를 분석하여 보고 혁명을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되겠다는 것을 심각히 느끼게 되었다.

이로부터 나는 자기 나라 혁명은 자신이 책임지고 자기 인민의 힘에 의거하여 수행하여야 승리할 수 있으며 혁명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지금 말하는 주체사상의 출발점으로 되었다. . . .

그때 나는 우리 나라의 구체적 현실과 사회계급적 제관계로부터 출발하여 조선혁명의 성격을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으로 규정하고 무장한 일제를 때려부시고 조국을 광복하자면 무장을 들고 싸워야 하며 노동자, 농민, 민족자본가, 종교인을 비롯한 모든 반일애국역량을 반일의 기치하에 묶어세워 투쟁에 불러일으키고 파쟁이 없는 새로운 혁명적 당을 창건하여야 한다는 투쟁방침을 확정하였다.≫(철창속에서, 세기와 더불어 1권)

총괄적으로 말하여 선행세대의 전략이나 노선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약점은 인민대중의 힘을 믿지 않고 외면한데 있었다. . . .

≪우리가 믿을 것은 인민대중의 힘밖에 없다. 2천만의 힘을 믿고 그 힘을 하나로 묶어세워 일본제국주의자들과의 혈전을 벌이자.≫ . . .

나는 이런 충동을 안고 오늘 우리가 주체라는 이름을 달아서 부르고 있는 사상을 보고의 구절구절에 담으려고 노력하였다.≫(카륜회의, 세기와 더불어 2권)

≪국제당의 지시에도 부합되고 조선혁명도 강력히 추진시킬 수 있는 그런 길이 과연 없단 말인가.

이런 모색 끝에 내가 찾아낸 출로가 바로 선행공산주의운동의 교훈으로부터 출발하여 조급하게 당중앙을 선포하는 방법으로가 아니라 당창건의 조직사상적 기초를 착실하게 다지고 그 토대 우에서 명실공히 우리 혁명의 참모부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당을 창건하자는 것이었다.≫(첫 당조직 - 건설동지사, 세기와 더불어 2권)

≪어떤 역사가들 가운데는 국민부가 만들어낸 조선혁명군과 우리가 고유수에서 조직한 동명의 조선혁명군을 같은 군사조직이 아닌가 하고 혼돈하는 사람들도 있다. 국민부가 만들어낸 조선혁명군 성원들 중에서 적지않은 사람들이 우리 혁명군에도 망라된 것만큼 그렇게 추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두 군사조직은 명칭이 같으면서도 서로 지도이념이 다르고 사명도 달랐다. . . .

우리가 만들어낸 조선혁명군은 공산주의이념에 의해서 지도되며 군중정치사업도 하고 군사활동도 하는 정치 및 반군사 조직이었다. . . .

나는 그때 국민부가 내온 조선혁명군의 명칭을 그대로 이용하여 우리 군의 이름을 조선혁명군으로 해야 한다고 그들을 설복하였다. . . .

조선혁명군이라는 외피를 썼기 때문에 그 후 우리 군은 실지로 활동에서 많은 덕을 보았다.≫(조선혁명군, 세기와 더불어 2권)

≪≪그러니 ≪이상촌≫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라는건가?≫

변노인은 초조하게 나의 대답을 기다리었다.

우리는 이 마을을 현상유지나 하면서 조용히 살아가는 마을이 아니라 조국광복을 위해서 싸우는 마을로, 혁명하는 마을로 개조하자는 것입니다.≫≫(≪이상촌≫을 혁명촌으로, 세기와 더불어 2권)

≪그러나 우리는 9.18사변을 두고 불리한 것만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 . .

일제는 전쟁승리를 위하여 우리 나라에서 식민지통치를 강화하고 전쟁물자보급을 위한 경제적 수탈에 미쳐날뛸 것이다. 민족적 모순과 계급적 모순은 극한점에 달할 것이며 조선민족의 반일기운은 고조될 것이다. 우리가 무장대오를 조직하고 항일전쟁을 시작하면 인민대중이 물심양면으로 우리를 적극 지지성원해줄 것이다. . . .

어제날 조선사람들을 망국민이라고 불쌍하게 여기던 그들이 내일은 단순한 동정자로부터 믿음직한 동맹자가 되어 한 전호에서 같은 과녁을 향해 총을 겨누게 될 것이다. . . .

일본이 중국관내에로 전쟁을 확대하게 되면 구미열강들의 이해관계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될 것이며 그것은 새로운 세계대전에로 가는 도화선으로 될 것이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되고 일본이 세계대전에 말려들게 되면 인적, 물적 자원의 결핍과 고갈로 곤란을 겪게 될 것이다.

일본이 만주를 먹는다는 것은 그들이 통치구역을 더 넓힌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치구역의 확대는 불피코 통치력의 약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일본은 식민지를 통치하는데서 종전의 밀도를 보장하지 못할 것이다.

온 세계가 일본제국주의를 침략자로 규탄하게 될 것이며 일본은 국제적으로 고립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우리 혁명에 전략적으로 유리한 국면을 열어놓게 될 것이라고 타산 . . .

일제침략군은 전과를 확대하기에 급급하여 치안유지에 힘을 기울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만주지방에서는 한동안 무정부상태가 지속되었다. 우리는 일제가 대륙에 자기들의 통치체계를 새로 세울 때까지 얼마간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리라고 타산하였다. 이 공백상태야말로 우리들이 마음놓고 무장대오를 꾸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 호기를 놓쳐서는 안되었다.≫(9.18사변, 세기와 더불어 2권)

≪≪역설이라고 판단하실 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인민대중이 일제의 침략에 굴복하지 않고 폭력적으로 진출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혁명의 고조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고조기를 놓치지 않고 추수투쟁을 끝낸 다음에는 대중을 더욱 각성시키고 조직화해서 항일투쟁을 더욱 높은 단계에로 발전시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대세가 어떻게 되어가든 이 결심은 변하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을 것입니다.≫≫(무장에는 무장으로, 세기와 더불어 2권)

≪이 무장대오의 결성을 위하여 우리의 동지들이 길은 얼마나 걸었고 모임은 얼마나 가졌고 연설은 얼마나 하였고 준령은 얼마나 넘었으며 그 과정에 가슴아픈 희생은 얼마나 당하였던가. 반일인민유격대는 수많은 동지들의 눈물겨운 노고와 피어린 투쟁과 희생의 대가로 이루어진 우리 혁명의 고귀한 산아였다.≫(새 무장력의 탄생, 세기와 더불어 2권)

국제당의 의사와 맞지 않는 인민혁명정부노선을 소비에트노선에 대치시키고 소비에트의 시책을 좌경망동이라고 한 우리의 행동에 대하여 반성위가 어떤 입장을 취하겠는가 하는 것은 자못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였다.

나는 좌경의 전횡밑에서 인민이 울고 있는 동만 땅에 국제당이 파견원을 보내준 것은 혁명을 위해서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소비에트노선과 인민혁명정부노선이 서로 대치되어 제가끔 자기의 정당성을 논증하는 시점에서 반성위의 출현은 그 중 어느 하나를 지지하고 다른 하나를 부정하게 될 결정적인 국면을 열어놓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국제당 파견원, 세기와 더불어 3권)

≪그런데 쏘련측에서는 그 청원에 아무런 회답도 보내주지 않았다. 청원을 해결해주겠다는 약속도 없었고 해결해주지 못하겠다거나 해결할 수 없다는 통지도 없었다. 우리가 자력갱생을 해야겠다고 강하게 결심한 것이 그때였다. 쏘련사람들의 침묵은 우리고 하여금 자력갱생만이 살길이라는 것, 혁명을 추동하는데서 결정적인 것은 자기 힘을 최대한으로 발동하는 것이며 남들의 원조는 부차적인 것이라는 입장을 확고히 가지게 했다.≫(밀림속의 병기창, 세기와 더불어 3권)

≪그가 총화모임에서 강조하려고 한 것은 요컨대 무엇이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한흥권이 자기를 근시안이라고 자탄할 때 나는 나대로 그를 지도하는 상급의 자각을 가지고 마촌작전이 남긴 심각한 교훈을 도출해냈다. 그것이 바로 수시로 변화되는 전투상황에 맞게 중대 상호간의 협동을 원만히 조직하자면 그를 총괄할 만한 지휘, 참모기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 그렇게 하자면 지휘체계를 단일화해야 한다는 교훈이었다. 지휘체계를 단일화해야겠다는 그들의 요구는 결국 반일인민유격대를 통합하여 정연한 군체계를 갖춰야 하겠다는 것이었다.≫(조선인민혁명군, 세기와 더불어 3권)

나는 반≪민생단≫투쟁과 그 총화로서의 다홍왜회의 과정을 통하여 자주성은 민족의 첫째가는 생명이라는 것과 이 자주성을 고수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민족을 이루는 모든 구성원들, 특히는 그 선각자들의 희생적인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심장 깊이 절감하였다.≫(다홍왜에서의 논쟁, 세기와 더불어 4권)

신간회 회의 모습≪나는 그런 허무주의적 견해에 동의할 수 없었다. 해산 원인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교훈을 찾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놀음을 하는 것은 아름답지 못한 일이다. 신간회 상층에 개량주의자들이 더러 있었다고 하여 이 조직 자체를 부정해서도 안되며 그 민족사적 의의를 영으로 만들어도 안된다.

신간회가 해산된 원인은 무엇보다도 조선민족의 반일항쟁역량이 하나로 단합되는 것을 두려워한 일제가 그 내부에 쐐기를 박아 분열을 꾀하고 개량주의적 상층을 매수한 데 있었다. 적들의 암해책동과 파괴공작을 물리치고 신간회를 능숙하게 운영하고 이끌어 나갈 만한 중심적인 지도역량이 없는 것도 하나의 주요한 해산 원인이었다.

신간회의 와해에서 뼈저린 교훈을 찾은 우리는 애국적 민족역량의 통일을 우리가 주도해야겠다는 비상한 각오와 결의밑에 반일민족통일전선문제를 중요한 방침으로 제기하고 민족의 총력을 항일구국위업의 깃발 아래 결집시키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해왔다. 그 과정에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갈 만한 핵심도 키워내고 유익한 경험도 축적하였다.≫(조국광복회, 세기와 더불어 4권)

≪내가 자산가들속에도 양심적인 자산가가 없지 않으며 따라서 그들을 애국적인 자산가와 반동적인 자산가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창덕학교시절에 백선행이 학교에 많은 땅을 기부하였다는 말을 들은 다음부터였다. . . .

만일 우리가 이런 애국적인 사람들을 자산가라고 하여 타도하거나 따돌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혁명의 지지자들을 배척하는 것으로 되며 애국적인 자산가는 물론, 수많은 군중을 잃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군중은 그런 인정사정없는 혁명을 외면할 것이다. 기뻐할 것은 오직 적들뿐이다. 계급투쟁에서의 사소한 오류나 탈선은 결국 원쑤들의 전략에 발을 맞추는 최대의 이적행위로 된다.≫(애국지주 김정부, 세기와 더불어 5권)

≪1937년 1월 갑산공작위원회의 지도핵심들은 박달의 사회하에 갑산공작위원회를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하기 위한 모임을 열고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그들은 이 회의에서 반일민족통일전선노선을 관철하기 위한 집행대책도 겸하여 토의 . . .

갑산공작위원회를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한 것은 조국광복회운동사에서 특별한 의의를 가지는 또 하나의 역사적 사변이었다. 조선민족해방동맹은 조국광복회조직을 국내깊이에로 확대시키는 하나의 발진기지로 되었다.

갑산공작위원회가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된 그때로부터 갑산지방공산주의자들의 사고방식과 일본새에서는 전환이 일어났다.≫(불굴의 투사 박달, 세기와 더불어 5권)

동학 농민군 지도자 전봉준≪내가 동학을 실천과 결부시키면서 주의깊이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길림시절부터였다. 조선혁명의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는 과정이미 역사에 의해 부정된 주의주장이나 해석을 대체로 멀리하는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우리는 과거의 이념이나 운동 그 자체를 허무주의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우리는 기성이론이나 남의 경험을 맹목적으로 이식하는 것은 반대하면서도 거기에서 좋은 것은 허심하게 섭취하였다.≫(민족종교 천도교를 두고, 세기와 더불어 5권)

≪≪사령관동지, 솔직히 말씀드려서 나는 부대를 떠날 때까지만 해도 마음을 진정하지 못했습니다. 1선에서 2선으로 밀려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 . .지금은 지하전선을 2선이라고 보던 관점에서 멀리 벗어났습니다. 이 전선은 분명 2선이 아니라 1선입니다. 조직들이 날마다 늘어나고 사람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사는 보람을 느낍니다. 이 비옥한 토양의 주인으로 나를 세워준 사령관동지에게 감사를 보내는 바입니다.

인민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는데서 사는 보람을 느낀다고 한 권영벽의 말에는 심오한 진리가 깃들어 있었다.≫(권영벽, 세기와 더불어 6권)

≪일제가 초기에도 비록 중국의 항전역량에 생긴 공백을 이용하여 일시적인 우세를 차지할 수 있지만 종국적으로는 멸망하게 되리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부정의의 전쟁은 항상 내부모순을 동반하는 법이다. 자국내에서의 전쟁세력과 반전세력간의 모순과 이권쟁탈을 위한 제국주의열강들간의 모순은 일본의 전쟁수행에 제동을 거는 무시할 수 없는 요인들이었다. . . .

중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비할 바 없이 강해지고 악랄해진 일제의 파쑈적 폭압과 경제적 약탈은 우리 민족의 처지를 참을 수 없는 막바지에 밀어 넣었다.

그러나 우리는 비록 이런 불리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중일전쟁으로 하여 조성된 복잡한 정세를 영활하게 이용하면 화를 복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새로운 정세를 맞받아 나가며, 세기와 더불어 6권)

초기농민운동이 우여곡절을 겪게 된 것은 민족개량주의자들과 초기 공산주의운동자들이 끼친 부정적인 후과와도 많이 관련된다.≫(농민을 준비시키던 나날에, 세기와 더불어 6권)

≪나는 농민을 전민항쟁역량으로 준비시키는데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가 국내에 있는 기성농민조직들을 조국광복회하부조직으로 개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 . .

과거의 농민단체나 농민운동은 다 보잘 것 없는 것이고 재생시키거나 재편성할 가치가 없다고 보는 것은 허무주의였다. 그런 허무주의적 견해는 공산주의운동자체의 요구와 조국광복회창립선언의 취지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기성의 농민운동이 쌓아올린 토대와 성과를 스스로 줴버리는 것으로서 농민들을 묶어세우는데 있어서도 백해무익한 것이었다.

우리의 구상은 그것이 반일을 지향하고 반제반봉건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명칭이라든가 공로의 대소를 불문하고 모든 기성조직들을 반일민족통일전선의 기치아래 묶어세우자는 것이었다. 문제는 조국광복회 10대강령과 창립선언의 취지에 맞게 해체직전에 이른 지난날의 농조직들을 어떻게 재조직하고 재편성하는가 하는데 있었다.≫(농민을 준비시키던 나날에, 세기와 더불어 6권)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간판이나 복장을 보고 사람의 사상을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여 사람의 신분이나 직급을 보고 사상이 좋다거나 나쁘다고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왕촌장과 왕서장, 세기와 더불어 7권)

≪… 수풀속에 들어있는 바늘은 만쌍의 눈이 밝혀도 쉽게 찾아내지 못한다. 우리가 잘만 꾀를 쓰면 대밀림과 대적의 무리속에서 능히 바늘처럼 자신을 숨길 수 있다. 이순신장군은 명량해전때 적은 배를 가지고 수많은 왜군의 함대와 싸워 이겼다. 그래서 임진왜란의 대세를 역전시키었다. 이것은 세계해전사에 대서특필할 기적이다. 이순신이 무슨 수로 적을 이겼겠는가. 물론 지혜와 책략, 용기로 이겼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요인은 애국심이었다. 왜적을 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고 나라가 망하면 그놈들의 노예가 된다는 분발심으로 적을 이긴 것이다. 애국심이 강했기에 지혜와 용기도 최대한으로 발동된 것이다.

애국심만 버리지 않으면 우리도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다. 물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정세는 험악하다. 그러나 혁명승리에 대한 신심을 확고히 가지고 난관앞에 주저앉지 않으면 우리도 능히 대세를 뒤집어놓을 수 있다. 그러니 신심을 가지고 행군을 계속하자…≫(고난의 행군, 세기와 더불어 7권)

과오는 엄중했지만 이동걸은 용서할만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과오를 범한 것은 정치책임자라는 자각을 버리고 엄광호한테 기만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주동이 아니라 피동에서 엄광호에게 동조하고 그의 모략을 묵인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점을 참작하여 이동걸을 강직시키는 것으로 그쳤습니다.≫(청봉의 교훈, 세기와 더불어 7권)

≪적들은 국경연선에까지 통행금지 구역이라는 것을 만들어놓고 조선사람들이 다니지 못하게 하였지만 우리는 그것을 용인할 수 없었습니다. 조선사람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통치를 부정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도 나는 어떻게 하나 조선인민혁명군의 위세를 시위하여 갑무경비도로를 건설한 적들에게 타격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대홍단전투, 세기와 더불어 7권)

유통사는 눈을 감는 마지막순간까지 우리가 올기강밀영에서 써준 증서를 가보로 간수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 . . 결국 우리는 서로 멀리 떨어져있으면서도 늘 가깝게 지낸 셈입니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나라도 민족도 혈육도 안중에 없이 오로지 개인의 이익과 향락만을 추구하는 자산가들과는 뜻을 같이할 수 없지만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양심적인 자산가들은 국적과 당파, 정견에 관계없이 우리의 동행자로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념의 차이나 재산의 유무는 인간을 평가하는데서 절대적 기준으로 될 수 없습니다. 가장 보편적인 사람평가의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조국애와 민족애, 인민애, 인간애일 것입니다. 인간을 귀중히 여기는 사람이 민족을 사랑하며 민족애가 강한 사람이 조국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의 법칙이며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중국인지주 유통사, 세기와 더불어 7권)

김책≪그렇다면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이제부터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 그리고 나는 무슨일을 해야 하는가. 김책은 감옥안에서도 감옥밖에 나아서도 이 한 가지 생각만 했다고 합니다. 기성세대에 의거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겠고 그렇다고 기성세대를 부정하자니 그것을 대신할만한 세력이 없는 것 같고 아무리 궁리를 해보아야 홀로는 막연한데 감옥문을 나섰다고는 하나 수중에 돈 한푼 없으니 이 몸을 어디다 어떻게 건사하겠는가.≫(혁명가 김책, 세기와 더불어 8권)

≪김책은 그때 사형장을 떠나면서 세상이 영 무심하지는 않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이런 곡절을 겪는 과정에 그가 어떤 교훈을 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가 젊어서부터 혁명을 하느라고 했지만 태반은 감옥이나 노상에서 보내면서 큰일은 치지 못하고 쫓겨다니기만 하다가 무장을 잡은 다음부터야 비로소 주동에 서서 적들을 쳤다고 하였습니다.

≪적들은 맨주먹으로 싸우는 혁명가들을 허재비로 압니다.≫ . . .

나는 김책의 그 말을 듣고 그가 옳은 교훈을 찾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김책의 반생이 도달한 교훈이기도 했지만 혁명투쟁의 일반적 합법칙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혁명가 김책, 세기와 더불어 8권)

임춘추≪어떻게 되어 임춘추가 그처럼 자기 수령과 영도자를 열렬히 경모하고 그 영도에 충실한 혁명가로 되었겠습니까. 그것은 그가 김혁, 차광수나 김책과 마찬가지로 종파의 해독성을 잘 알고 실지체험을 통하여 수령이 귀중함을 그 누구보다도 뼈에 사무치게 통감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 . .

후계자를 올바로 선정하는 것은 혁명과 건설, 나라와 인민의 장래운명을 결정하는 근본문제입니다. 후계자를 잘못 내세운 탓으로 혁명도 망치고 나라도 망치는 실례가 얼마나 많습니까.

10월 혁명 후 쏘련인민이 짧은 기간에 자기 나라를 세계적인 강국으로 만들 수 있었던 기본요인은 레닌이 후계자를 잘 골랐기 때문입니다. 레닌의 충실한 전우이며 제자인 스탈린은 한 평생 자기 수령의 위업에 충실하였습니다. . . .

스탈린이 살아있을 때는 쏘련에서 만사가 다 잘돼 나갔습니다. 그런데 흐루시쵸프가 집권한 다음부터 일이 비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쏘련당안에서 현대수정주의가 대두하고 쏘련사람들이 사상적으로 병들기 시작하였습니다.

흐루시쵸프는 자기를 길러준 수령의 은덕도 다 잊어버리고 개인미신에다 걸면서 스탈린을 헐뜯었으며 스탈린에게 충실한 노혁명가들도 모조리 정치국에서 쫓아내고 당대열에서까지 추방해 버리었습니다.

그 후 언제인가 임춘추는 모스크바붉은광장에서 레닌묘를 참관하다가 우연히 심각한 몰로토프를 만난 일이 있습니다.

몰로토프는 그때 임춘추에게 당신들은 쏘련당의 전례를 생각해서라도 절대로 수정주의를 하지 말고 자기 수령의 사상과 업적을 충실하게 계승해 나가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임춘추는 그때 후계자 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하면 당도 망치고 혁명도 망친다는 것을 똑똑히 깨달았다고 합니다.

역사의 쓰라린 교훈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후계자의 표정에서 기본을 이루는 것은 수령과 수령의 위업에 대한 충실성이며 도덕의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령에 대한 충실성은 도덕의리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수령에 대한 충실성과 도덕의리, 이것은 후계자가 갖추고 있어야 할 첫째가는 표징입니다.

그리고 높은 자질과 영도풍모를 지닌 실력가만이 수령이 개척한 혁명위업을 수령의 사상과 의도대로 빛내어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 인민은 수령의 사상체계와 영도체계를 확립하는데서 김정일동무가 발휘한 비범한 수완과 혁명적 원칙성, 수령의 노선과 구상을 옹호하고 실현하는데서 그가 보여준 불굴의 의지와 정력, 고결한 충성심과 효성에 경탄하였으며 김정일동무야말로 수령의 사상과 의도대로 주체의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향도하고 완성해나갈 수 있는 영도자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세기와 더불어 8권)

다음, 발전의 주기성과 관련된 회고록의 부분이다.

첫째, 차광수의 인식전환과 관련된 부분이다. 차광수가 시골에서 도시로, 다시 시골로 가게 된 것은 외형상 낡은 것으로 복귀한 듯 하지만 인식의 질적 전환을 의미한다.

차광수내가 신안툰마을에 내려가 사업하라고 하자 차광수는 의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시골에 있다가 운동선을 찾아 모처럼 올라온 사람을 왜 도로 시골로 보내는가고 농담절반, 진담절반으로 물었다. . . .

나는 차광수한테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큰 도시 같은데 틀고앉아 혁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도시건 시골이건 인민이 있는 곳이면 가리지 말고 가야 한다, . . .농민들속에 깊이 들어가지 않고서는 조국광복위업에 인민을 동원시킬 수 없으며 우리 나라에서 공산주의운동의 승리에 대하여서도 생각할 수 없다, . . .오직 자기앞에 부과된 민족적 의무와 국제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성실히 투쟁한다면 국제당의 승인도 받을 수 있고 우리가 목마르게 바라는 조국광복의 날도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

. . .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자, 아래에 내려가 노동자, 농민들속으로 들어가자.

≪우로 올라갈 것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자.≫

차광수는 이 말을 혼자소리로 심각하게 되뇌이고나서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있더니 책상을 주먹으로 쾅 하고 내리치면서 ≪그것 참 신통한 발견이요!≫하고 부르짖었다.≫(차광수가 찾은 길, 세기와 더불어 1권)

둘째, 유격구해산과 관련된 부분이다. 유격구해산은 마치 유격구가 없던 시절로 되돌아간듯한 인상을 주지만 해방지구형태의 유격구를 건설하는 기간 조선혁명의 주체역량은 비약적으로 강화발전되었던 것이며 유격구해산으로 새로운 전환적 국면이 창출되었던 것이다.

요영구회의 장소≪요영구회의는 인민혁명군이 유격구역을 사수하기 위한 전략적 방어로부터 전략적 공격의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는 전환적 계기로 되었다. 이 회의의 결정으로 하여 우리는 유격구역의 협소한 범위를 벗어나 동북과 조선의 광활한 판도에서 적극적인 대부대유격전을 영활하게 벌일 수 있는 창창한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간도 5개 현에 국한되었던 인민혁명군의 활동무대는 수십 배로 확대되었다.≫(혁명의 씨앗을 넓은 대지에, 세기와 더불어 4권)

세째, 이제순의 질적 변화이다. 이제순은 신흥촌에서 백두산으로, 다시 신흥촌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신흥촌장에서 조국광복회장백현책임자로 질적 전환하였다. 이는 백두산을 찾았다가 갑산으로 다시 돌아간 박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제순≪강습을 마치고 밀영을 떠나게 되었을 때 이제순은 진정에 넘쳐 말하였다.

저는 쌀 한 말을 지고 왔다가 몇 섬이나 되는 혁명적 양식을 지고 갑니다. 이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이제는 저에게 사업분공을 주십시오. 지역을 하나 떼서 맡겨주면 그 지역안에 있는 조선사람들이 사는 모든 마을마다에 조국광복회조직을 내오겠습니다.≫

우리는 장백현 상강구지역을 그에게 맡기기로 하였다.≫(이제순, 세기와 더불어 5권)

네째, 고난의 행군과정과 관련한 부분이다. 집중, 분산, 다시 집중되는 과정이 발전의 주기성과 관련 있다. 그리고 정상적 국면에서 위기의 국면으로, 다시 정상적 국면으로 돌아오는 과정도 발전의 주기성과 관련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부정의 부정의 법칙은 혁명적 낙관주의를 심화시키는데 실천적인 의의가 있다.

≪7연대가 사령부를 찾아온 다음에는 무송쪽에서 활동하던 8연대와 독립대대도 우리를 찾아왔고 청봉밀영에 있던 후방성원들까지 다 북대정자에 모이었습니다. 대열을 점검해보니 전해에 몽강현 남패자를 떠날 때의 인원수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습니다. 남패자를 떠났던 대원들의 거의 전부가 그대로 살아있었습니다.

그때의 그 감격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항일전쟁기간에 이별도 많이 해보고 상봉도 많이 해보았지만 아마 그때의 그 상봉만큼 격동적인 상봉은 없었을 것입니다. 북대정자는 온통 축전마당처럼 흥성거렸습니다. 100여일 동안이나 사지에서 고생하다가 만난 대원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웃기도 하고 딩굴기도 하면서 회포를 나누었습니다.

고생끝에 이루어진 상봉일수록 그 열도는 더 큰 것 같습니다. 동지가 얼마나 귀중한가를 알려면 서로 헤어져 있어도 보아야 합니다. 피를 나눈 동지들이 서로 이별도 하고 상봉도 하는 과정에 동지애는 더 공고해지고 열렬해지는 법입니다. 이런 동지애는 어떤 풍파가 닥쳐와도 쉽사리 깨지지 않습니다.

유화 : 고난의 행군

고난의 행군은 부대의 이동을 위한 단순한 행군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옹근 하나의 전역과 맞먹는 규모가 큰 군사작전이었습니다. 항일무장투쟁의 축도였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행군과정에 우리는 군인으로서 겪을 수 있는 고통도 다 겪었고 인간으로서 체험하게 되는 온갖 시련도 다 맛보았습니다.

우리는 고난의 행군을 통하여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한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조국의 아들, 인민의 아들들이며 자기 민족과 민족해방위업에 가장 충실한 혁명투사들임을 다시 한번 온 세상에 보여주었습니다. 항일유격대원들은 고난의 행군을 하면서 자신들의 인격을 높은 경지에서 연마하였습니다. 이 행군과정에 형성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아름다운 영상은 우리 인민이 후손만대를 두고 따라배워야 할 공산주의적 인간의 훌륭한 전형으로 되었습니다. 그 어떤 역경속에서도 신념을 버리지 않고 자기 지도자의 두리에 튼튼히 뭉쳐 적들을 타승한 공산주의자의 전형을 창조한 것, 이것이 바로 고난의 행군이 거둔 중요한 성과이며 항일혁명이 이룩한 가장 큰 업적중의 하나입니다.≫(고난의 행군, 세기와 더불어 7권)

다섯째,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배움의 천리길과 관련한 부분이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팔도구에서 만경대로, 다시 팔도구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조국에 대한 인식이 더욱 깊어지시었다.

내가 팔도구를 떠나던 날은 음력 정월 그믐날(양력 3월 16일)이었다. 아침부터 눈보라가 일고 바람이 사납게 불었다. 그날 팔도구에서 사는 동무들이 나를 바래주느라고 압록강을 건너 후창남쪽까지 30리를 따라왔다. 길동무를 해준다고 하면서 한정없이 그냥 따라오기에 겨우 설복해서 . . .

팔도구에 떠난 지 열나흘만인 1923년 3월 29일 해질 무렵에 나는 마침내 고향집뜨락에 들어섰다. . . .

나는 만경대에 며칠간 머물러있다가 외할아버지가 교감으로 계시는 창덕학교 5학년에 편입되어 조국에서의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때부터는 칠골외가에 가있으면서 학교를 다니었다. . . .

김일성동지

나는 경찰들의 눈을 피하여 포평나루터 아래쪽으로 좀더 내려가 여울목에서 압록강얼음판에 발걸음을 무겁게 내디디었다. 폭이 백자도 되나마나한 그 강만 건느면 팔도구시가이고 그 강안거리에 우리 집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강건너쪽으로 발을 옮겨놓을 수가 없었다. 조국을 하직하면 언제 다시 이 강을 건너보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 .

그날 압록강가에서 나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심리적 체험을 하였다. 그날의 그 체험이 가슴속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였기 때문에 나는 조국에 개선한 후 국내애국자들이 나를 환영하여 차린 연회석상에서도 압록강을 건늘 때의 이야기를 먼저 하였다.≫(타향에서 타향으로, 세기와 더불어 1권)

여섯째, 압록강도하와 관련한 부분이다. 조선인민혁명군이 압록강이북에서 압록강이남으로, 다시 압록강이북으로 돌아가는 과정에 항일무장투쟁은 또 하나의 질적 변화를 일으켰다.

우리는 6월 3일 밤 압록강을 건넜다.

전원이 강을 도하할 때까지 자신도 모를 긴장감이 온몸을 엄습하였다. 적들이 1선, 2선, 3선도 모자라 4선으로 경계진을 치고 있다는 삼엄하고 조밀한 국경경비였다. . . .

우리는 지체없이 곤장덕에 올랐다. 곤장덕은 울창한 수림으로 덮혀있는 평평한 야산이었다. 여기서 부대는 보초를 세우고 하루밤을 숙영하였다. . . .

≪여러 분, 나라가 해방되는 날 다시 만납시다!≫

연설을 다친 다음 이런 말을 남기고 화랑이 충천하는 면사무소앞을 떠났으나 가슴이 그냥 저려들었다. 칼로 살을 도려낸 것처럼 몹시도 아파났다. . . .

부대가 곤장덕에 올랐을 때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구령도 없이 갑자기 대열이 흩어지는 것이었다. 대원들이 저마끔 흙을 움켜져 배낭속에 넣고 있었다. . . .

오늘은 우리 비록 한 거리를 치고 가지만 내일은 100개의 거리, 1000개의 거리를 치리라. 지금은 우리 비록 한 줌의 흙을 안고 가지만 내일은 온 나라를 다 해방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리라!

우리는 이런 맹세를 다지면서 압록강을 다시 건넜다.≫(보천보의 불길 2, 세기와 더불어 6권)

≪세기와 더불어≫ 항일혁명편의 기본체계 자체가 부정의 부정의 법칙과 관련 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 평양, 조국을 떠나신 1925년에서 평양, 조국으로 개선하신 1945년은 정확히 발전의 주기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한편 자주조국이 식민조국으로, 다시 자주조국으로 돌아오는 과정도 발전의 주기성을 띤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단일조국이 분단조국으로, 다시 통일조국으로 돌아가는 과정도 발전의 주기성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망국은 순간이요, 복국은 천년이라는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가르침을 깊이 새기는 한편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반드시 자주독립한다, 조국통일한다는 혁명적 신념, 혁명적 낙관주의를 가져야 할 것이다.

개선문≪우리가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날은 파도가 심했습니다. . . .

배전너머로 아득하게 펼쳐진 망망대해를 바라볼 때 이상스럽게 가슴이 뛰던 일을 좀처럼 잊을 수 없습니다. 내 눈앞에는 어째서인지 열네 살 때 건느던 압록강과 조국의 일만강들이 해방열에 모조리 녹아 이 바다를 펼쳐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혈육들과 친지들, 동지들을 이국의 고혼으로 남겨두고 스무 해 만에 조국으로 돌아가는 내 마음은 참으로 말이나 글로써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일희일비의 심정이었습니다. . . .

우리 일행은 9월 22일 오전에야 평양에 도착하였습니다. . . .

나는 10월 9일 강선제강소를 돌아보고 그 후 당을 창건한 다음 10월 14일에야 평양시환영군중대회에서 조국인민들에게 처음으로 인사를 하였습니다. . . .

그날 오후에야 나는 삼촌내외와 함께 만경대로 나갔습니다. . . .

감옥에 계시는 아버지 생각에 쪽잠마저 어설프던 유년시절이 어제같은 데 내 나이 어느덧 서른세 살이 되었으니 옛 사람들이 어찌 세월의 무정한 흐름을 일촌광음에 비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망국 40년만에 조국을 찾고 이향 20년만에 고향을 찾았다면 우리는 그 조국과 고향을 위해 너무도 많은 세월을 바치지 않았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망국은 순간이요 복국은 천년이라는 것이 항일혁명 20년의 노정을 걸으면서 내가 얻은 하나의 중요한 교훈이었습니다. 잃기는 헐해도 찾기는 힘든 것이 바로 조국이라는 뜻입니다. 순간에 잃은 조국을 찾느라고 수십 년, 지어는 수백 년의 고생을 해야 하는 것이 이 세상의 준엄한 이치입니다. ...

삼촌어머니를 앞세우고 고향집 뜨락에 들어설 때는 가슴이 막 설레이었습니다. 20년 전만 해도 큰 광장처럼 넓어보이던 뜨락이 그때는 손바닥만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스무 해를 걸치는 간고무쌍한 행군의 종착점이라고 생각하니 일만장강을 건느다가 뭍에 오른 심정이었습니다. . . .

해방된 조국땅에서 스무 해만에 맛보게 되는 만경대의 밤, 그 밤은 참으로 평화로운 밤이었습니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조국이 광복된지도 만 두 달, 그러나 3천만 조선민족은 그때까지도 해방의 열광속에 그냥 깊이 잠겨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3천만 가운데 조국해방이 곧 국토분단과 민족분열을 낳고 그 분단과 분열이 근 반세기의 대국난으로 이어지게 되리라는 것을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개선, 세기와 더불어 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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