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9월 6일(금)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지난 강좌 보기

회고록과 사상사업

통일여명 편집위원 강인규

 

먼저, 사상사업의 정의이다. 사상사업은 사상개조사업과 정치사업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은 사상의식을 가진 사회적 존재이다. 사상의식은 사람의 가치와 품격을 결정하며 사람의 모든 활동을 조절한다. 인간개조는 본질에 있어서 사상개조이며 공산주의적 인간을 키우는데서 기본은 공산주의사상으로 무장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이 공산주의사상으로 무장하여야 공산주의적 인간의 풍모를 갖출 수 있으며 자주성과 창조성을 높이 발양할 수 있다. . . .

그러므로 사회주의교육은 마땅히 사람들을 혁명화, 노동계급화하는 사상혁명과정으로 되어야 한다. 사회주의교육에서는 사상교양에 기본을 두어야 하며 사람들을 공산주의사상으로 무장시키는데 주되는 힘을 넣어야 한다. 사회주의교육의 내용과 방법은 사람들을 혁명화, 노동계급화하기 위한 것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모든 교육조건과 수단은 사람들의 사상을 개조하는데 복종되어야 한다.≫(김일성주석, 사회주의교육에 관한 테제, 1977 9 5)

혁명운동에서 인민대중의 자주적인 사상의식이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만큼 혁명과 건설에서는 반드시 사상을 기본으로 틀어쥐고 나가며 인민대중의 자각성과 적극성을 높이기 위한 사상개조사업, 정치사업을 모든 사업에 앞세워야 합니다.≫(김정일장군, 주체사상에 대하여, 1982 3 31)

사상개조는 사람들을 참다운 공산주의적 인간으로 개조하는 중요한 사업입니다. . . .

사람들을 전면적으로 발전된 공산주의적 인간,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인간으로 만들자면 그들을 공산주의사상과 선진과학기술지식으로 무장시켜야 하며 높은 문화수준을 가지도록 하여야 합니다...

인간개조는 본질에 있어서 사상개조입니다. 사람들의 가치와 품격을 결정하는 것은 사상이며 따라서 사람을 개조하는 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상을 개조하는 것입니다. . . .

사상개조에서 기본은 혁명적 세계관, 혁명관을 세우는 것입니다. . . .

우리 당원들과 근로자들이 지녀야 할 혁명관은 주체의 혁명관입니다. . . .

주체의 혁명관에서 핵을 이루는 것은 당과 수령에 대한 충실성입니다. . . .

혁명관이 바로 선 공산주의혁명가가 되자면 혁명적 학습을 강화하여야 합니다. . . .

혁명관이 바로 선 공산주의혁명가가 되자면 혁명적 조직생활을 잘 하여야 합니다. . . .

혁명관이 바로 선 공산주의혁명가가 되자면 혁명적 실천속에서 단련하여야 합니다.≫(김정일장군, 주체사상에 대하여, 1982 3 31)

≪혁명과업을 성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서는 사람들을 교양하고 발동시키기 위한 정치사업을 모든 사업에 앞세워야 합니다. . . .

결국 사람과의 사업은 본질에 있어서 정치사업이며 사람들의 사상과의 사업입니다. 사람과의 사업, 정치사업을 앞세운다는 것은 다른 모든 사업에 앞서 인민대중을 당의 노선과 정책으로 무장시키고 그들의 혁명적 열의를 불러일으킴으로써 대중자신이 높은 자각성과 적극성을 가지고 혁명투쟁과 건설사업을 성과적으로 수행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 . .

정치사업은 설복과 교양의 방법으로 하여야 합니다. . . .

정치사업은 다양한 방법으로 참신하게 하여야 합니다. . . .

정치사업은 대중자신의 사업으로 벌여나가야 합니다. . . .

정치사업은 혁명실천과 밀접히 결부되어야 합니다.≫(김정일장군, 주체사상에 대하여, 1982 3 31)

다음, 사상개조사업과 관련한 회상교시이다.

포평예배당에서 청년들을 선진사상으로 교양하시는 김형직선생님

학교나 야학을 통하여 군중을 계몽시키고 쓸모있는 인재들을 많이 키워내야 나라도 찾을 수 있고 부강한 독립국가도 세울 수 있다는 것이 아버지의 신념이었다. 1924년 여름에 삼원포에서는 조선소학교 교원들을 위한 여름강습이 진행되었는데 아버지는 그때 학생들에게 배워줄 교육내용과 노래곡목까지 구체적으로 짜주었다. . . .

아버님으로부터 애국주의교양을 받으시는 김일성동지

그래서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 아버지로부터 개별교육을 받았다. 아버지는 나에게 우리 글과 지리, 조선역사를 배워주고 레닌, 손문, 워싱톤을 비롯하여 세계적으로 이름난 명인들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해주었으며 진보적인 소설이나 서적들 가운데서 몇 권을 지정해주고는 어김없이 읽고 감상을 발표하도록 체계적인 독서지도도 하였다. 그 덕으로 나는 그때 ≪조선지위인≫, ≪조선영웅전≫, ≪러국혁명사와 레닌≫과 같은 좋은 책들과 신문, 잡지들을 많이 읽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공부에 대한 통제를 엄하게 하였다. 공부를 잘 안하면 나나 철주동생은 물론, 형권삼촌까지 붙들어세워놓고 종아리를 칠 때도 있었다.≫(타향에서 타향으로, 세기와 더불어 1권)

≪혁명적 세계관은 사람들이 자기의 계급적 처지와 이해관계를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착취계급을 증오하고 자기 계급의 이해관계를 옹호하는 사상을 가지며 나아가서는 새 사회를 건설하려는 각오를 가지고 혁명의 길에 나서게 되었을 때 형성된다고 볼 수 있다.

자본론나도 맑스-레닌주의고전을 비롯한 혁명적인 책들을 보고 계급적 처지를 인식하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사회현상을 보고 불평등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착취계급과 착취사회를 증오하는 사상이 자라서 결국 세계를 개조하고 변혁해야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투쟁의 길에 나서게 되었다.≫(선진사상의 탐구, 세기와 더불어 1권)

≪청년들은 연애소설들을 읽는 멋에 도서실출입을 많이 하였다. 그런 식으로 책에 맛을 붙이게 해놓고는 사회과학책을 조금씩 주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사회과학책들을 보면서 점차 각성되면 그때에는 비밀서고에서 맑스-레닌주의고전들과 혁명적인 소설책들을 꺼내주군 하였다. . . .

토요일과 일요일이면 우리는 길림예배당이나 북산공원 같은데 모여 독서발표모임을 자주 하였다. 처음에는 더러 연애소설내용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러나 듣는 학생들이 그따위 시시껄렁한 이야기는 집어치우라고 들이대군 하였다. 이렇게 한번 망신을 당하면 연애소설에 빠졌던 학생들도 스스로 혁명적인 소설책들을 보게 되었다. . . .

그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마실방이나 공원 같은데 가서 내용이 좋은 소설들을 뜬금으로 구수하게 엮어서 매번 호평을 받았다. 소경은 ≪당수≫를 하고 돈을 받았지만 그는 돈을 받지 않았다. 그대신 재미나는 대목에 가서 끊고는 한바탕 선동연설을 한 다음 내일 어느 시간에 다음대목을 또 들어보라고 하였다. 그러면 다음날 사람들이 소설을 마저 들으려고 약속된 장소에 모이군 하였다.≫(선진사상의 탐구, 세기와 더불어 1권)

≪ㅌ·ㄷ≫성원들과 비밀독서조성원들의 활동에 의하여 맑스-레닌주의사상이 빠른 속도로 전파되어가자 청년학생들의 사상의식에는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선진사상은 그들로 하여금 점차 역사와 민족앞에 지닌 자기들의 임무를 깊이 자각하게 하였다.

우리는 청년학생들의 의식화를 위한 사업을 계속하면서 그들을 여러 가지 조직에 묶어세워나갔다. 조직을 통해서만 맑스-레닌주의사상을 더 널리 보급할 수 있었고 핵심역량도 더 빨리 키워낼 수 있었다.≫(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세기와 더불어 1권)

≪학생들은 그 빵을 먹으면서 ≪하느님≫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보다는 실지 노동을 통해서 먹을 것을 얻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단순한 사실 같지만 청소년들의 사상의식을 개조하고 낡은 인습을 청산하는데서는 이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 . .

그래서 우리는 청소년들에게 혁명적인 노래들을 대대적으로 보급하였다. 찬송가를 부르면서 거리를 오가던 소년회원들이 얼마 후부터는 ≪소년애국가≫와 ≪조선인길림소년회가≫를 부르며 버젓이 시가행진을 하였다.

조선인길림소년회와 조선인유길학우회가 나온 다음 우리가 한 활동가운데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 해 여름방학에 조직한 국어강습이다. . . .

우리는 그때부터 ≪조선사람은 조선을 알아야 한다.≫는 구호를 내들었다.

계영춘, 김원우, 박소심이 엇바꾸어가며 강의에 출연하였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우리에게는 교원이 따로 없었다. 조직의 모든 핵심들이 다 교원이었고 강사였다.

20일 동안 강습을 하고나니 여기에 참가했던 소년들이 누구나 다 어린이잡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소년회와 학우회는 청소년들의 취미와 기호에 맞게 용담산원족과 강남공원야유회도 조직하고 문화유적들에 대한 참관과 답사도 조직하였으며 강연회, 토론회, 학습회, 웅변대회, 독서발표회, 노래보급, 연예공연과 같은 과외활동도 많이 조직하였다. . . .

나는 길림에서 학교를 다닐 때 강연도 많이 하였다. 어떤 때에는 민족주의자들이 조직한 토론회에 가서도 연설을 하였다. 오동진, 이탁을 비롯한 정의부의 지도자들은 국치일(8월29일), 3월 1일, 단군탄생일(10월 3일)등 주요기념일이 있을 때마다 시내 교포들과 청소년학생들을 모여놓고 강연회와 토론회를 자주 조직하였다.

유길학우회의 성원들속에서는 이준의 방법이 옳은가, 안중근의 방법이 옳은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많이 하였다. 아무리 논쟁을 해도 결판이 나지 않으므로 우리는 여길학우회가 유길학우회로 개편된 그 해 여름에 손정도네 예배당에 시내에 있는 조선인학생들을 다 모아놓고 그 문제를 토론에 붙이기까지 하였다. 그 토론회를 계기로 길림의 청소년들이 크게 각성되었다.≫(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세기와 더불어 1권)

≪우리는 조직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의 정치실무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각 조직의 책임자들과 핵심성원들을 망라하는 강습을 조직하였다.

나는 차광수, 계영춘 동무들과 함께 매일밤 두세 시간씩 엇바꾸어가며 카륜회의에서 제시된 주체적인 혁명노선과 전략전술적 방침, 군중속에서의 정치사업방법, 조직을 확대하고 질적으로 강화하는 방법, 조직성원들에 대한 교양사업방법과 그들의 조직생활을 지도하는 방법 등에 대하여 강의하였다.

우리는 강습이 끝난후에도 조직책임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그들에게 조직을 내오는 방법, 핵심을 육성하는 방법, 분공을 주고 총화하는 방법, 회의를 진행하는 방법, 담화를 하는 방법 등 여러 가지 사업방법을 배워주었다. . . .

우리는 조선혁명군 대원들과 지하조직성원들 가운데서 유능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삼성학교에 교원으로 배치하고 그들이 주동이 되어 학교의 교육내용을 혁명적으로 개편하게 하였다. . . .

우리는 학교교육을 받지못하는 청장년들과 부녀자들을 위해서 야학에도 힘을 넣었다.

나는 중심부락 뿐만 아니라 주변부락들에도 야학을 내오고 거기에 모든 청년들을 다 망라시키었다.

볼세위크우리는 카륜에서 ≪볼쉐위크≫를 발간하던 경험을 살려 오가자에서도 ≪농우≫라는 잡지를 만들어냈다. ≪농우≫는 농민동맹기관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볼쉐위크≫가 좀 이해하기 어렵게 씌여졌다면 ≪농우≫에 실린 글들은 농민들이 보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문체도 간결하고 평이하였다. ≪농우≫도 ≪볼쉐위크≫와 마찬가지로 간도에까지 배포되었다.

우리는 그때 학생들을 통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혁명적인 노래를 많이 보급하였다. ≪적기가≫나 ≪혁명가≫와 같은 노래도 학교에 가서 한번만 배워주면 그날로 온 마을에 퍼지곤 하였다. . . .

나도 길림시절부터 쓰기 시작하여 시험적으로 몇 차례 연습까지 해본 ≪꽃파는 처녀≫의 대본완성작업에 달라붙었다. 대본이 완성되자 계영춘이 삼성학교에 조직되어있는 연극조 성원들을 데리고 형상작업을 시작하였다.

우리는 10월혁명 13돐기념일에 삼성학교 강당에서 이 가극을 공연하였다.≫(≪이상촌≫을 혁명촌으로, 세기와 더불어 2권)

≪수리한 격침을 들고 훈련장으로 뛰어올 때 이영배와 방인현의 얼굴에 활짝 피어났던 그 보름달 같은 미소를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미소는 분명 자기 자신의 힘에 대한 다함없는 긍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자기에게 없다고 생각했던 힘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냈을 때에 맛보게되는 쾌감과 희열보다 더 격렬한 환희가 이 세상 또 어디에 있겠는가.

격침 한 개란 사실 보잘 것 없는 것이다. 그것을 수리하는 시간이면 새 보총 10자루도 능히 노획해올 수 있다. 하지만 그 격침 한 개를 수리했을 때에 얻게 되는 교훈은 수소폭탄 한 개의 힘보다 더 큰 힘을 산생시키고 확산시킨다.≫(밀림속의 병기창, 세기와 더불어 3권)

도문 뒷산에 있다가 유격구로 돌아간 다음 우리는 군대들을 모여놓고 그 마을에서 당한 일을 그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이걸 보라. 계급적 본성이다. 어려운 사람은 죽이라도 같이 먹자고 하는데 잘 사는 지주는 죽은 고사하고 문전에서 쫓아버린다. 나쁜 놈이 아닌가. 이런 놈들의 꼴을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착취사회를 청산해야 한다.

그 이야기가 훌륭한 계급교양자료로 되었다.

그 다음부터 잘 사는 지주와 가난한 농사꾼에 대한 이야기는 두만강연안 농촌부락들에서 하나의 화젯거리가 되어 돌아갔다.≫(부자와 가난뱅이, 세기와 더불어 3권)

≪나는 이날 회의에서 공청대오의 조직사상적 기초를 강화하고 선전선동 교양사업을 개선하는 문제, 상호비판, 자기비판을 성실히 하는 문제, 아동단을 공청후비로 육성하는 문제 그리고 과거 애국청년들의 투쟁에서 그 우수한 점들을 받아들이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공청사업의 전반 분야를 포괄하여 연설도 하고 담화도 하였다.

그 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청지도일군들이 항상 군중속에서 살며 사업에서는 대중의 선두에 서는 기수가 되고 사람과의 사업에서는 참된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공청일군회의가 있은 후 공청지도일군들의 일본새에서는 혁신이 일어났다. 관료주의와 관문주의, 형식주의의 낡은 틀에 얽매여 있던 공청조직들은 생기발랄한 산 조직으로 되어 청년대중속에 깊이 침투했다.≫(공청의 산아들, 세기와 더불어 4권)

≪그러기에 나는 지금도 조직은 영웅을 낳는 집이며 대학이라고 말한다. 조직생활을 통해 단련된 1명의 공청원이나 사로청원은 100명, 1,000명의 적도 타승할 수 있는 큰 힘을 가진다. 우리 인민이 일당백의 인민으로 되는 것은 그들이 모두 조직생활을 통해 단련된 인민이기 때문이며 우리 인민군대가 일당백, 일당천의 군대로 되는 것은 그들이 다같이 조직이라고 불리우는 용광로에서 자신들을 정치사상적으로, 군사기술적으로 철저히 연마해가는 군대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청년들은 사로청이라는 조직을 통하여 투사로, 영웅으로, 혁명가로 자라나고 있다. 항일전쟁 당시의 공청조직이 직업적인 혁명가들을 키워내는 학교였다면 지금의 사로청조직은 사회주의건설의 전위부대를 육성해내는 기지라고 말할 수 있다.≫(공청의 산아들, 세기와 더불어 4권)

≪나는 그에게 눈덩어리 두 개를 주면서 그걸 합쳐보라고 이르고 나 자신은 작은 눈덩이를 눈위에 굴려 그 두 개의 눈덩이를 합친 것만한 눈덩이를 만들었다. . . .

나는 길림시절부터 우리가 시종일관하게 고수해 온 통일전선정책과 각계각층의 반일애국역량을 결속시키는데서 새 세대의 청년공산주의자들이 축적해 놓은 경험을 구체적으로 말해 주었다.≫(조국광복회, 세기와 더불어 4권)

만강에서의 연극공연은 두메산골 가막눈이던 젊은이들, 늙은이들을 계몽하고 교양하여 항일혁명투쟁의 적극적인 참가자로, 후원투사로 개변시켰다. 그때 수많은 마을청년들이 무대에 뛰어올라와 참군을 열렬히 청원하였다. 만강은 수많은 참군자를 배출한 고장의 하나로 되었으며 우리의 믿음직한 후방보급기지의 하나로 되었다. . . .

한마디로 말하여 항일혁명시기의 예술은 암흑을 불사르는 등불이라고도 할 수 있었으며 사람들을 투쟁의 길로 부르는 북소리라고도 할 수 있었다. 우리가 예술활동을 가리켜 ≪북대포≫라는 말로 표현한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정당한 것이었다. . . .

혁명가극 피바다연극 ≪피바다≫공연은 유격대원들을 사상문화적으로, 정서적으로 더 잘 준비시키는데도 큰 기여를 하였다. . . .

실로 한 편의 훌륭한 시나 연극이나 소설이 천만 사람의 가슴을 격동시키며 혁명적인 노래는 총칼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도 적의 심장을 꿰뚫을 수 있다는 것은 항일혁명시기의 문학예술활동을 통하여 우리가 도달한 진리이다.

사람들을 혁명적으로 각성시키는 과정이란 혁명사상에 공명하게 하고 감동시키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을 감동시키는데서 가장 힘있는 수단의 하나로 되는 것은 문학과 예술이다.≫(≪피바다≫ 초연무대, 세기와 더불어 5권)

≪우리는 이제순을 위한 단독강습을 진행하였다.

강습의 주제는 조선혁명의 노선과 성격, 전략전술에 대한 것이었다. 이 강의는 가 담당하였다. 조국광복회10대강령과 창립선언, 규약에 대한 해설강의, 국제당사강의이동백이 해주었다. 단 한 명의 수강생을 위하여 여러 명의 유능한 강사들이 번갈아 출연해가며 그처럼 알심있게 강습을 진행한 실례는 항일혁명투쟁의 전기간 그때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이제순, 세기와 더불어 5권)

≪≪혜산사건≫ 때 박달의 집을 수색한 경찰들은 깜짝 놀랐다. ≪조국광복회10대강령≫, ≪조국광복회창립선언≫을 비롯하여 ≪사회주의대의≫, ≪사회진화론≫, ≪식민지 문제의 기본지식≫, ≪무산계급의 부인운동≫, ≪실업반대투쟁선언≫, ≪사회주의사전≫, ≪제7차 국제당대회에서의 왕명의 연설≫, ≪중국공산당 창건 15주년 기념≫, ≪조선문제에 관한 테제≫, ≪당원기본상식≫과 같은 사회주의서적들이 무데기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서발막대로 휘둘러도 걸칠 것이 하나도 없는 집이었는데 책만은 부자였다.≫(불굴의 투사 박달, 세기와 더불어 5권)

≪박달은 확실히 교조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혁명이란 워낙 자기가 하고싶어서 하는 일이지 그 누구의 지령이나 승인을 받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어디 좀 물어봅시다. 박달동무는 그 누가 시켜서 혁명을 시작했습니까? 또 그 누구의 승인을 받아가지고 갑산공작위원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냈습니까?≫ . . .

≪ . . .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자주권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우리 집안일을 우리 집안사람들끼리 처리하면 되는 것인데 괜히 바깥사람들에게 우리 집일을 어떻게 하라느냐고 물을 필요야 있습니까? 조선혁명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아닙니까.≫

박달은 그제야 자기 생각이 너무나 짧았다고 하면서 우리의 입장과 제안을 적극 찬성해 나섰다.≫(국내당공작위원회, 세기와 더불어 5권)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선전하시는 김정숙동지

≪그가 도천리를 혁명화하는데서 중심고리로 잡은 것은 군중을 의식화하여 혁명조직에 묶어세우는 사업이었다. 김정숙≪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내걸고 우리의 혁명사상을 정력적으로 선전하였다. 이런 과정에 지도핵심들을 소문없이 키워냈다. 그리고 그 핵심들로 반일청년동맹도 조직하고 부녀회도 조직하였다. 조용하던 산골마을은 드디어 우리의 위력한 활동지반으로 되었다. 김정숙은 가는 곳마다에서 인민들은 옹군애병사상으로 교양하였으며 부녀회원들, 청소년들과 함께 원호물자들을 준비하여 부대에 보내주고는 하였다.≫(양민보증서, 세기와 더불어 5권)

≪혁명적 낙관주의는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부단한 교양, 부단한 사상단련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혁명적 낙관주의입니다. 적이 아직은 강하고 혁명이 언제 승리한다고 기약하기 어려운 때에 미래를 낙관한다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사상교양, 사상단련을 부단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그 어떤 폭풍 속에서도 휘여들지 않는 강한 군대로 될 수 있은 것은 우리가 초기부터 사상교양에 큰 힘을 넣어온데 있습니다.

우리는 시종일관 유격대원들을 혁명에 대한 무한한 충실성으로, 불요불굴의 투쟁정신과 혁명적 낙관주의로, 우리위업의 정당성과 승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교양하였습니다.

나는 짬만 있으면 대원들을 낙천적으로 교양하였습니다. 대원들에게 ≪독립이 되면 평양에 가서 숭어국도 먹고 냉면도 한 그릇씩 먹고 모란봉에 올라가 대동강 구경을 하자!≫고 하면 그들이 다 ≪야, 빨리 그 날을 앞당겨와야지!≫하면서 주먹을 부르쥐었습니다. 그리고는 용기백배해서 싸움판에 뛰어들었습니다.≫(미래에 대한 낙관, 세기와 더불어 8권)

≪대원들에 대한 신념교양, 낙관주의교양에서 중요한 수단으로 된 것은 문예활동이었습니다. 혁명적인 문화오락을 떠나서는 항일유격대의 생활을 논할 수가 없고 혁명적인 노래와 춤을 떠나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이 걸어온 승리의 노정에 대해 말할 수가 없습니다.

김정일동무가 조선혁명은 노래로부터 시작되었고 노래 속에서 전진하여 왔으며 노래와 함께 승리한 혁명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옳은 말입니다. 조선혁명처럼 노래와 밀착된 혁명, 노래로 엮어진 혁명은 아마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혁명 그 자체가 하나의 장중한 교향곡이고 노래를 낳는 터전입니다. 노래를 떠난 혁명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인터내셔날≫의 노래를 떠나서 국제노동운동의 발전역사를 생각할 수 있겠는가.≫(미래에 대한 낙관, 세기와 더불어 8권)

≪우리는 지갑룡의 도주와 같은 사건이 두 번 다시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의 힘으로 조선혁명을 완수하자!≫는 구호를 내걸고 사대주의를 청산하기 위한 투쟁을 진공적으로 벌였습니다.≫(신념과 배신, 세기와 더불어 8권)

≪국제연합군이 편성된 후 우리는 소부대작전과 정찰활동을 맹렬하게 벌이는 한편 군정 학습과 훈련을 대대적으로 진행하였습니다. . . .

국제연합군시절의 교육은 군사일면의 교육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정치와 군사를 겸한 종합적인 교육과 훈련이었고 조국해방작전을 위한 준비인 동시에 해방된 조국에서의 당, 국가, 무력 건설을 위한 준비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교육과 군사교육을 똑같이 중시하였습니다. 정치경제학, 철학 같은 것도 학습하였고 당건설이론도 연구하였으며 경제운영과 관련된 교재도 공부하였습니다.≫(해방의 날을 그리며, 세기와 더불어 8권)

≪1937년 겨울에는 몽강현 마당거우밀영에서 부대안의 전체 장병들이 군정학습에 주력하였습니다. 아마 한 너덧 달쯤 품을 들여 학습한 것 같습니다. . . .

조선인민혁명군은 단순한 군사집단이 아니라 정치와 군사를 다같이 중시하는 혁명군대입니다. 문과 무를 겸비해야 무장투쟁도 잘할 수 있고 인민들과의 사업이라든가, 통일전선사업이라든가 적군와해사업도 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군인들의 교육과 교양에 많은 힘을 넣은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군인들을 육성하는데서도 힘있는 수단은 학습입니다.

동무들도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오래 전부터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혁명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사상의식에 있다고 보아왔습니다.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은 결국 사람의 사상의식과 지적 능력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사상의식과 지적능력은 학습을 통해서 부단히 높여야 합니다. . .

우리 혁명군대오안에서도 부분적인 현상이긴 하지만 동요분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 . .

국제당의 간판을 달고 나도는 이러저러한 노선이 일으키고 있는 혼란도 큰 문제거리였습니다.

그 당시 국제당에 앉아 있던 좌경모험주의자들은 실정에 맞지도 않는 열하원정노선을 내리먹이어 조중 두 나라 혁명에 막대한 피해를 끼치었습니다. . . .

이로부터 우리는 우선 인민혁명군 지휘관들과 대원들에게 조선혁명의 자주노선에 관한 지식부터 똑바로 심어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 친필원고내가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라는 논문을 쓰고 그것을 교재로 하여 집중적인 정치학습을 조직했던 이유의 하나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나는 그 논문에서 조선혁명의 성격과 당면임무를 또다시 서술하고 조선혁명을 자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과업을 제시하였습니다.≫(마당거우밀영, 세기와 더불어 7권)

≪우리는 출판물을 가리켜 대중의 교양자, 선전자, 조직자라고도 표현한다.

혁명적 출판물은 또한 수령과 당, 대중을 하나의 유대로 이어주는 훌륭한 수단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 . .

출판물은 혁명투쟁의 위력한 무기의 하나이다. 이 무기의 사정거리는 무한하다.

우리가 백두산에 앉아서 ≪3·1월간≫이나 ≪서광≫같은 출판물들을 통하여 조국을 잊지 말고 조국동포들을 잊지 말자고 호소하면 그 목소리를 남북만의 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이 다 듣게 된다. 수백만 대중을 향해 동일한 사상과 투쟁구호를 일시에 신속히 선전하여 대중을 결속시키고 그들을 조직사상적으로 단련시키는데서 출판물만큼 큰 위력을 발휘하는 선전선동수단은 아마 세상에 없을 것이다.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우리 사람들은 흔히 구두선전은 ≪입대포≫, 연예활동을 통한 선전은 ≪북대포≫, 출판물을 통한 선전은 ≪붓대포≫ 또는 ≪글대포≫라는 통속적인 말로 표현하고는 하였다.

3.1월간구두선전이나 연예활동에 의한 선전은 출판물선전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효과가 빠르고 선동성이 강하지만 그대신 출판물을 통한 선전은 지속성이 있고 지역적인 제한성을 받지 않는 것이 장점이다. . . .

그 당시 내가 제일 그리웠던 것은 김혁과 최일천이었다. 카륜과 오가자 시절의 막역지우들이었던 ≪볼쉐위크≫의 주필 김혁과 ≪농우≫의 주필 최일천은 쌍벽을 이루는 재능있는 문장가들이었다. ...

주간정치신문인 ≪서광≫에는 유격대원들을 위한 정치군사학습자료들도 많이 실리었다. 내가 집필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도 ≪서광≫에 발표되었다. . . .

≪종소리≫는 마당거우밀영에서 군정학습을 시작하면서 발간한 대내주간신문이었는데 군정학습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정치군사학습자료들과 교양자료들을 주로 싣곤 하였다. . . .

대내의 반일청년동맹기관지였던 ≪철혈≫은 1939년 말의 대부대선회작전을 앞두고 발간된 속보형식의 주간신문이었다.≫(≪3.1월간≫, 세기와 더불어 5권)

 

다음, 정치사업과 관련한 회상교시이다.

길회선철도 부설 반대 투쟁≪1928년 10월 26일 새벽 선전대는 날이 새기 전에 길림의 거리들에 삐라를 뿌리고 격문을 붙이었다. 2-3명으로 무어진 소년회의 감시조들도 날이 밝자 지정된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날 아침 각 학교의 학생들은 약속된 시간에 일제히 교정에서 모임을 가지고 길회선철도부설을 반대하는 성토문을 발표한 다음 가두시위에 들어갔다. 거리는 삽시간에 수천 명의 학생들로 차고넘치였다. 그들은 ≪일제침략자들을 타도하자!≫, ≪일제의 길회선철도부설공사를 반대하여 투쟁하자!≫는 조선글로된 플랭카드와 ≪타도 일제≫, ≪타도 매국노≫, ≪회수길회선≫이라고 중국글로 쓴 플랭카드들을 들고 거리를 누비면서 신개문밖에 있는 성의회마당으로 모여들었다.≫(단결의 시위, 세기와 더불어 1권)

≪그런데 단식이 시작되자 매 감방에서 음식이 그대로 되돌아나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그릇의 음식을 놓고 싸우던 잡범들까지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학생사건≫으로 들어온 우리 동무들이 소리없이 교양사업을 해온 보람이 컸다.≫(철창속에서, 세기와 더불어 1권)

≪그때 노동자들이 우리에게 한 말을 듣고 나는 세 가지 측면에서 큰 충격을 받았는바 하나는 혁명가가 민심을 잘 알려면 항상 대중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장투쟁을 시작하려면 무엇보다도 대중을 정치적으로 각성시키고 조직화하는 사업을 더 다그쳐야 하겠다는 것이었으며 또 다른 하나의 충격은 그 어떤 형태의 투쟁도 대중이 그 의의를 충분히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동원되기 전에는 성과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이었다.≫(무장에는 무장으로, 세기와 더불어 2권)

≪≪사령님, 아까운 청년들을 자꾸 죽여선 뭘 하겠습니까. 저 사람들에게 총은 당장 줄 수 없겠지만 창이나 하나씩 주어서 한번 돌격대로 써볼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왜놈들하구 잘 싸우는가 어쩌는가를 시험해보잔 말입니다. 잘 싸우면 그 이상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저 죽여버릴거야 없지 않습니까≫

우사령은 내 말을 한참동안 듣고 있더니 ≪음, 그건 그래. 그럼 선전대장이 나가서 그 문제를 해결해보게.≫하고 말하였다.≫(새 무장력의 탄생, 세기와 더불어 2권)

≪≪참모장동무는 상층의 표정만 보았지 하층의 얼굴은 보지 못했구만. 독립군대원들이 우리 유격대를 보고 얼마나 감탄하고 부러워하였소. 나는 무장해제설보다 그걸 더 중시하고싶단 말이요. 중요한 것은 상층의 표정이 아니라 하층의 태도요. 나는 거기서 합작의 장래를 보고 있소.≫ . . .

여러 해가 지난 후 부대를 이끌고 조선인민혁명군에 병변하여온 독립군의 사령 최윤구는 나와 함께 1932년의 여름을 감회깊이 회고하였다.≫(합작은 불가능한가?, 세기와 더불어 2권)

≪5구소비에트정부 회장인 조창덕은 소비에트정부 사무실로 우리를 안내하였다. 나는 그 집에서 20명가량되는 가야허지방 농민들과 담화를 하였다. . . .

나는 소비에트정부를 대신하게 될 정부로 인민혁명정부를 세우려고 한다는 것과 이 정부는 세계정권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진정한 인민의 정부로 될 것이라는데 대하여 격정에 넘쳐 선언하였다.

≪이 정부는 조국을 사랑하고 겨레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옹호하며 그들의 숙망을 풀어줄 것입니다. 여러 분들의 숙망이 무엇입니까? 땅을 가지는 것, 노동의 권리를 가지는 것,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것, 만민이 평등하게 사는 것, 인민혁명정부는 이 모든 소원을 죄다 풀어줄 것입니다.≫

가야허의 인민들은 인민혁명정부노선에 대한 우리의 설명을 듣고 그것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였다.≫(쏘비에트냐 인민혁명정부냐?, 세기와 더불어 3권)

≪≪공산주의자들도 사람들인데 어찌 실수가 없겠습니까. 나도 이따금 실수를 합니다. 그건 내가 기계가 아니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일을 많이 하느라면 잘못을 범할 때도 종종 있게 되지요. 그래서 우리는 공부를 많이 하고 정신수양을 많이 합니다. 그래야 실책도 적을 게 아닙니까.≫

≪그건 그렇소. 일을 안하는 건달뱅이들한테야 실수라는 것두 있을 수 없지. 공산당이 일을 많이 해. 그건 우리두 인정하는 거구. 어쨌든 사령하구는 말할 재미가 나거든. 솔직해서 의사소통이 잘된단 말이오.≫

오사령은 이런 말로써 담판을 일단락 지은 다음 내 손을 다정스럽게 잡았다 놓았다. 담판의 성공은 확정적인 것이었다.≫(오의성과의 담판, 세기와 더불어 3권)

동녕현성전투의 목적을 알기 쉽게 시화한 강동무의 ≪십진가≫는 왕청중대에서 훈춘중대에로, 훈춘중대에서 사충항여단에로, 사충항여단에서 채세영부대에로 순식간에 전파되었다. 몇몇 구국군대원들은 행군을 하면서도 ≪십진가≫를 흥얼거렸다.≫(동녕현성전투, 세기와 더불어 3권)

≪우리는 적의 역량이 분산되어 있을 때에는 힘을 합쳐 습격소멸하고 역량이 집결되어 쳐들어올 때에는 분산하여 도처에서 적의 후방을 교란한다는 종래의 전술적 원칙을 다시금 확정하고 소왕청 관내 전체주민들에게 전민항전을 호소하였다.

유격구인민들은 그 호소를 받들고 조직별, 계층별로 격전준비에 한 사람같이 떨쳐나섰다.≫(마촌작전, 세기와 더불어 3권)

≪≪13연발≫은 탄우속에서 공청소조회의를 열고 이렇게 호소하였다.

≪동무들, 우리의 뒤에는 유격근거지가 있고 사랑하는 형제들이 있다. 만일 여기서 한치라도 뒤로 물러선다면 우리는 조선청년으로서 이 세상에 살아 있을 자격이 없다. 몸이 열백 번 쪼개지는 한이 있더라도 결사적으로 초소를 지키자!≫

적개심에 불타는 방차대원들을 총칼을 꼬나들고 적들의 무리속에 뛰어들어 백병전을 벌이려고 하였다.≫(마촌작전, 세기와 더불어 3권)

≪노상에서 보천보전투소식을 들은 그는 연길의 거리거리와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목메인 목소리로 외쳤다.

≪조선동포 여러분, 6월 4일 김일성장군이 부대를 거느리고 보천보를 습격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이 압록강을 건너 오매에도 그리던 조국으로 진출하였다. 혁명군의 위력앞에 혼비백산한 적들은 지금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일제의 멸망은 확정적이다.≫

그의 불같은 연설에 연길시는 죽가마처럼 끓어번졌다.≫(밀림속의 병기창, 세기와 더불어 3권)

≪하루 전에 정치공작조가 들어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온 다음에 가서 하모니카중주단이 이처럼 놀라운 실적을 올릴 수 있은 것은 전적으로 그들이 진행한 선전공작의 통속성과 진실성에 있었다.

우리는 이런 경험에 토대하여 군중들속에 더 깊이 들어가 다양한 형식과 방법으로 영안현의 수십 개 마을을 점차적으로 혁명화하였다.≫(영안땅에 울린 하모니카소리, 세기와 더불어 3권)

≪우리는 요영구에서 군민연합대회를 열고 유격구해산의 절박성과 정당성을 인내성 있게 해설해 주었다. 동만의 각 현과 혁명조직구들에 내려간 특파원들도 같은 성격의 대회를 열고 군대와 인민을 교양하였다. 해산을 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이치를 민중은 어렵지 않게 이해했으며 그것을 정당한 전략적 조치로 받아들였다. . . .

우리는 ≪설복하고 설복하고 또 설복하자!≫는 구호를 내들고 매일같이 주민들의 집을 찾아다녔다. 구별로도 모임을 열고 조직별로도 회의를 열어 해설에 해설을 거듭했지만 적지 않는 주민들은 적구로 내려가지 않겠다고 그냥 검질기게 고집하였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의 선전과 선동이 얼마나 위대한 힘을 낳는가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어떤 동무들은 그 힘을 무한대한 것이라고도 한다.≫(혁명의 씨앗을 넓은 대지에, 세기와 더불어 4권)

≪≪ . . . 일본의 군부파쑈집단은 ≪2.26사건≫을 도발한 후 북방침략을 더욱 본격화하고 있다. 일제가 치치할과 북부중국을 장악하고 쏘련침공의 구실을 찾기 위해 쏘만국경에서 끊임없는 도발을 하고 있다는 것은 동무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북만의 유격부대들은 이에 대처하여 항일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핵심의 부족으로 큰 곤란을 겪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지원을 요구하였다.

동무들, 이런 형편에서 우리가 모두 백두산쪽으로만 나가게 되면 어떤 후과가 빚어지겠는가.≫(전우들은 북으로, 나는 남으로, 세기와 더불어 4권)

≪나는 왕가대장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써보냈다. . . .

우리의 주적은 일본군대이다. 우리는 우리를 해치지 않는 한 위만군경들을 상대로 싸움을 벌일 의사가 없다. 그러므로 당신이 우리의 요구에 동의한다면 당신이 통솔하는 경찰대와 그 관하의 각 경찰분서들을 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화평을 제기하는 바이다. . . .

이런 식으로 편지의 서두를 뗀 다음 산림부대들에 대한 ≪토벌≫을 중지하라는 것, 인민혁명군이 파견한 공작원들이 성시나 부락들에 마음대로 드나들거나 머무를 수 있게 하라는 것, 인민혁명군을 적극 지지성원하고 있는 애국자들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며 수감중인 애국자들을 당장 석방하라는 것 등의 내용으로 된 요구조건들을 제기하고 왕가대장이 이 요구조건들을 수락하는 조건에서 무송현 경내에서의 ≪치안유지≫에 되도록 혼란을 조성하지 않을 데 대하여 담보하였다.

며칠 후 왕가대장으로부터 우리의 제의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것과 우리가 내놓은 세 가지 요구조건을 전부 수락한다는 내용의 회답이 왔다.≫(왕가대장을 치고 만순을 끌다, 세기와 더불어 5권)

우리는 그때 그들 중 누가 소작인들을 어떻게 착취하였고 일제의 식민지정책을 어느 정도로 협조하였으며 조국과 겨레앞에 떳떳치 못한 일을 얼마만큼 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캐여묻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지주들이 친일분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기정사실로 하고 그들에 대한 신임까지 서슴없이 드러내놓았다. 그 신임 때문에 지주들은 그날 밤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게 되었다.≫(애국지주 김정부, 세기와 더불어 5권)

≪결국 박도정은 청수를 모시고 앉아 21자의 주문을 외웠다. 거듭 세 번을 외운 다음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나서 그는 숙연한 기색으로 말하였다.

≪백두산곡의 청수가 참 별맛입니다. 우리 나라 조종이 마시던 물로 청수봉전을 하였으니 오늘저녁 일은 평생 두고 잊지 못하겠습니다. 장군과 같은 무인이 우리교의 법도를 이처럼 존중해주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정말 감개무량합니다.≫ . . .

그 날 내가 김성락목사에게 식전기도를 드리도록 권고한 것은 그 무슨 생색을 내자는 것도 아니었고 우리가 종교와 종교신자들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선전하자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다만 손님을 손님답게 대하고 싶은 주인으로서의 예절과 일생을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살아온 그가 조국에 와서도 구속을 받지 않고 교도를 지킬 수 있게 하자는 순수한 인도주의적 감정을 가지고 그런 권고를 했을 뿐이었다.≫(박인진도정, 세기와 더불어 5권)

우리가 소를 왜 임자에게 돌려주자고 하는가, 그것은 이 소가 농민의 귀중한 재산이기 때문이다, 소임자가 자기 소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가를 보라! . . .우리가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고 인민들의 지성이라고 하여 소를 잡아먹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 . .동무들도 거의 모두 가난한 농민들의 자식이니 땀흘리며 고생하시는 부모님들을 생각해보라고 하였다.

내 말에 가책을 받았는지 소를 끌고온 대원들은 눈물이 글썽해서 자기들이 잘못하였다고 하면서 처벌해 달라고 제기하였다.≫(인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세기와 더불어 5권)

유화 : 보천보의 횃불

≪운집한 사람들을 둘러보니 별빛같은 시선들이 일제히 나한테로 쏠리었다.

나는 모자를 벗어쥔 다음 팔을 높이 들어 흔들면서 만장을 향해 필승의 사상으로 일관된 반일연설을 하였다.

≪여러 분, 나라가 해방되는 날 다시 만납시다!≫≫(보천보의 횃불, 세기와 더불어 6권)

지양개군민연환대회는 군민의 위대한 정치적 단결력을 만천하에 보여준 회합이었다.

이 연환대회에 참가했던 인민들은 1940년대 전반기 일본제국주의자들이 혁명군이 다 소멸되었다고 선전할 때 그것을 누구도 믿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지양개군민연환대회가 인민들의 마음속에 얼마나 깊은 인상을 남겼는가를 증명해준다. 항일유격대원들 역시 인민이 자기들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그 후 곤경에 부닥칠 때마다 인민들을 찾아가군 하였다.≫(지양개군민연환대회, 세기와 더불어 6권)

혁명군이 녹아났다고 적들이 선전할 때 그것을 허위라고 까밝히며 혁명군이 살아있다고 선전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국내에 들어가서 총소리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총소리만 내면 지하조직도 많이 내올 수 있었습니다.≫(고난의 행군, 세기와 더불어 7권)

≪… 수풀속에 들어있는 바늘은 만쌍의 눈이 밝혀도 쉽게 찾아내지 못한다. 우리가 잘만 꾀를 쓰면 대밀림과 대적의 무리속에서 능히 바늘처럼 자신을 숨길 수 있다. 이순신장군은 명량해전때 적은 배를 가지고 수많은 왜군의 함대와 싸워 이겼다. . . .이순신이 무슨 수로 적을 이겼겠는가. 물론 지혜와 책략, 용기로 이겼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요인은 애국심이었다. . . .

애국심만 버리지 않으면 우리도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다. 물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정세는 험악하다. 그러나 혁명승리에 대한 신심을 확고히 가지고 난관앞에 주저앉지 않으면 우리도 능히 대세를 뒤집어놓을 수 있다. 그러니 신심을 가지고 행군을 계속하자…

이런 연설을 하자 대원들은 장군님, 명령만 내리십시오, 우리는 장군님을 끝까지 따라가겠습니다 하면서 밝은 얼굴로 행군길에 나섰습니다.≫(고난의 행군, 세기와 더불어 7권)

적기가≪고난의 행군 때 경위대원들이 눈 속에 파묻혀 일어나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 . .나는 눈 속에 미이라처럼 누워있는 대원들에게 다가가 조용히 ≪적기가≫를 불렀습니다. 대원들은 그 노래를 듣고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고는 쓰러졌던 자리에서 일어나 행군을 계속하였습니다.

적들이 한때 수천 명의 병력으로 처창즈유격구를 봉쇄한 일이 있는데 그때 그 고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기아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혹심한 식량난과 적의 거듭되는 ≪토벌≫로 사경에 이른 처창즈인민들을 결사전에로 불러일으킨 것이 아동단원들이 부른 혁명가요였습니다.≫(미래에 대한 낙관, 세기와 더불어 8권)

≪나는 조선, 중국, 쏘련 세 나라 무장력의 이상적인 연합형태를 국제연합군으로 보았습니다. 국제연합군편성과 관련된 나의 구상에 대해서는 김책, 최용건, 안길, 강건을 비롯한 우리 동무들도 지지하였습니다. 그들은 일치하게 그 구상을 빨리 실현하면 할수록 좋다고 하면서 쏘련, 중국 동지들과의 협의를 나에게 위임하였습니다.

한때 적지 않은 중국동지들은 만주의 항일무장부대들과 쏘련원동군의 일부역량으로 하나의 새로운 군체계를 창설하고 공동활동을 할 데 대한 국제당과 쏘련군사당국의 발기를 시기상조라고 하면서 부정적으로 대한 적이 있었습니다. . . .

그러나 그 후 우리가 국제연합군편성과 관련된 구상을 무르익히고 그것을 토론에 붙이었을 때 그들은 종래의 입장에서 탈피하여 세 나라 무장력의 연합은 성숙된 문제로 된다고 한결같이 인정하였습니다.

쏘련군사당국도 그 구상을 지지하였습니다.≫(국제연합군을 편성하여, 세기와 더불어 8권)

나는 원산시당일군들에게 ≪공산주의기치아래 프롤레타리아트는 단결하라!≫고 한 시당청사의 구호는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을 당면과제로 안고 있는 우리 나라 실정에 맞지 않는 것만큼 민주주의기발아래 단결하라로 바꾸어야 한다, 해방된 조국땅에 인민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는 민주주의적인 사회를 건설하려면 노동계급 뿐 아니라 그 동맹자인 농민은 물론, 새 사회건설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각계각층의 애국적인 군중을 통일전선에 묶어세워 거족적인 힘으로 우리 나라를 부강한 자주독립국가로 건설해야 한다고 말했었습니다.≫(개선, 세기와 더불어 8권)

인민들을 만나시는 김일성주석님

개선 후의 사업에서도 기본은 사람과의 사업, 인민대중과의 사업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공장과 농촌, 가두에 내려가 인민들을 만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무실과 숙소에서 백두산시절처럼 전우들과 침식을 같이해가며 국내외에서 나를 찾아오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만나 국사를 의논하였습니다.≫(개선, 세기와 더불어 8권)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폭발한 민중의 환호성은 조국과 겨레를 위해 우리가 겪어온 반생의 간난신고에 대한 표창이고 답례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 .

조국개선을 환영하는 평양시군중대회에서 연설하시는 김일성동지그날 내가 한 연설의 골자는 민족대단결이었습니다. 나는 힘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있는 사람은 돈으로 애국성업에 이바지하자고, 온 민족이 하나로 굳게 단결하여 이 땅우에 부강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해 나가자고 호소하였습니다.

군중은 하늘땅을 진감하는 박수와 환호로써 지지를 표시하였습니다.≫(개선, 세기와 더불어 8권)

혁명가가 사상개조사업과 정치사업을 잘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자주적인 사상의식을 무장하여여야 하며 식견이 풍부하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 혁명가의 첫째가는 임무는 바로 학습이라는 강령적 교시는 참으로 심오한 가르침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길림에서 나는 과학적 학설로서의 맑스-레닌주의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그 학설의 도움으로 조선의 독립과 인민의 행복을 위한 실천적 진리를 더 깊이 깨닫게 되었다. . . .

길림시절에 나의 세계관이 확립되고 드팀없는 것으로 굳어졌으며 그것이 내 한 생의 사상정신적 양식으로 되었다.

길림에서의 축적과 체험은 그 후 나로 하여금 자주적인 혁명사상의 골격을 세울 수 있게 하였다.

학습은 혁명가가 자신을 수양하기 위해 반드시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기초적 공정이며 사회의 진보와 변혁에 이바지할 밑천을 마련하는데서 단 하루도 중단해서는 안되는 필수적 정신노동이다. 선진사상의 탐구과정을 통하여 길림시절에 터득한 교훈으로부터 나는 오늘도 혁명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학습은 첫째가는 임무라고 강조하고 있다.≫(선진사상의 탐구, 세기와 더불어 1권)

This counter provided for free from HTMLcounter.com! copyleft © 백두산편집부
이 문서는 Internet Explorer v5.0을 기준으로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