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9월 5일(목)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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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중흡과 유경수

서정욱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불후의 고전적 노작 ≪세기와 더불어≫에서 빛나는 수령님의 혁명동지에 대한 해설강좌 시간입니다.

오늘은 그 다섯 번째 시간으로 위대한 수령님의 충실한 전사였던 오중흡과 유경수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두 동지의 공통점, 차이점과 함께 특히 그 누구보다도 위대한 수령님의 지시명령을 관철하는데서 무조건적이었던 충신으로서의 면모에 대하여 깊이 사색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중흡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1930년 9월 오중화의 집에서 그 사촌동생인 오중흡을 처음으로 만나시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36년 10월 오중흡을 백두산밀영에서 다시 만나시었으며 그때 오중흡은 주력부대의 7연대의 2중대 정치지도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너무나 때늦은 도착이었지만 오중흡, 권영벽, 김평을 비롯하여 오래전부터 정이 든 전우들과 다시금 한 가마밥을 먹으며 같이 지내게 된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새 사단의 탄생, 4권)

≪우리 일행이 곰의골에 도착한 후 어느 날 교하지방에서 활동하던 2연대 성원들이 곰의골로 찾아왔다. 권영벽, 오중흡, 강위룡 등이 바로 그때 교하에서 돌아온 사람들속에 끼어 나와 함께 쌓였던 회포를 나누었다.≫(백두산밀영, 5권)

오중흡의 일가는 모두 쟁쟁한 혁명가였습니다.

≪우리는 오중흡동무를 놓고 가정혁명화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태희그전에 왕청을 포함한 간도전역에서 첫손가락으로 꼽은 애국혁명일가가 바로 오태희일가였습니다. 이 가문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항일혁명에 참가하였습니다. 지하공작원이나 인민혁명군대원으로 활동하다가 희생된 사람들만 하여도 20명 가까이 되니 나라를 위해 바친 이 가문의 애국충정이 어느 정도인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오중흡과 7연대, 7권)

오중흡은 한마디로 소리는 작게 내면서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으며 낙천적이었습니다.

≪오중홉은 군사지휘관으로서는 드물다고 할 만치 조용하고 얌전한 사람이었으며 소리는 작게 내면서도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겸손하고 소박한 일군이었습니다.≫(오중흡과 7연대, 7권)

≪오중흡은 일상생활에서는 조용하고 얌전한 것 같지만 혁명실천에 들어가서는 매우 과단성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단 결심만 서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돌진하는 호랑이같은 사나이였습니다. 어지간한 난관 같은 것은 탁탁 퉁겨버리면서 무슨 일이든지 끝장을 보고야 말았으며 맡은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는 잠도 휴식도 몰랐습니다.≫(오중흡과 7연대, 7권)

≪얌전한 사람이지만 일상생활에서 쾌활하고 낙천적이었으며 붙임성이 좋고 향학열도 높았습니다. 그는 허튼소리를 잘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품행이 단정하였고 동지들이 어떤 비판을 주든지 그것을 다 접수하고 성실하게 고쳐나갔습니다. 또한 부대의 살림살이를 알뜰하고 깐지게 하였으며 자력갱생, 간고분투하는 정신도 남보다 높았습니다.≫(오중흡과 7연대, 7권)

오중흡은 계급의식이 강하고 불의와는 비타협적이었습니다.

≪오중흡은 정의를 옹호하는 정신이 강한 반면에 부정의와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남보다 일찍 계급의식에 눈을 뜨게 된 것은 정의에 대한 강한 옹호의 정신과 부정의에 대한 비타협성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오중흡과 7연대, 7권)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대원 몇 명을 데리고 전방초소에 나가 경계근무를 서던 오중흡이 농민옷차림을 한 수상한 사람들을 잡아가지고 밀영으로 돌아왔다. 조사하여보니 적들의 밀정들이었다.≫(백두산 기슭에서의 싸움, 5권)

≪이종락은 처음부터 처신을 희떱게 하여 우리 동무들의 눈총을 받았습니다. 혁명군의 군영에 들어왔다는 공포감이나 위축감 같은 것은 전혀 없이 뻔뻔스럽게 웃고 망탕 말하고 주저없이 행동하였습니다. 그는 보초대를 책임지고 밀영어귀에 나가있던 오중홉을 보고 추운 산중에서 고생이 많겠다고 하면서 그에게 시계를 선사하려고 했습니다. 오중흡은 자기의 회중시계를 꺼내보이면서 필요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종락은 사양말고 받으라, 시계가 둘 있으면 더 좋지 않겠는가고 했습니다. 오중흡은 시계는 하나를 기준해야지 오늘은 혁명시계를 차고 내일은 반동시계를 차는 식으로 해서야 되겠는가고 오금을 박아놓았습니다. 그것은 혁명의 편에서부터 반동의 편으로 넘어간 이종락의 반역행위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습니다.≫(남패자의 수림속에서, 7권)

오중흡은 담력있고 용력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동무들이 오중흡더러 당신은 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이다, 하느님 덕을 단단히 보았다고 말해주자 그는 일본놈들의 눈먼 총알이 겁쟁이의 이마는 뚫을 수 있을는지 모르나 공산주의자의 이마는 뚫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오중흡과 7연대, 7권)

≪수류탄이란 투척시간부터 폭발시간까지 불과 2-3초의 여유밖에 없는 근거리살방무기입니다. 폭발직전의 수류탄을 손에 집어든다는 것 자체가 벌써 하나의 모험입니다. 오중홉은 바로 그런 위태위태한 모험을 눈섭 한 오리 까딱하지 않고 해낸 사람입니다.≫(오중흡과 7연대, 7권)

오중흡은 결단성이 있고 재치있는 군사지휘관이었습니다.

≪오중흡은 싸움을 아주 재치있게 하는 군사지휘관이었습니다. 군사지휘관으로서의 그의 장점은 우선 정황판단과 결심이 빠르고 전투조직이 치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일단 결심이 선 다음에는 망설이지 않고 결단성있게 밀고 나가는 특기를 가지고 마치 씨름을 잘하는 사람이 묘한 수를 써서 힘을 센 적수를 넘어뜨리듯이 아무리 우세한 적과 맞다들어도 그에 알맞은 전술을 적용하여 실수없이 소탕해버리군 하였습니다.≫(오중흡과 7연대, 7권)

≪오중흡은 무엇보다도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 충실했던 충신 중의 충신이었습니다. 오중흡은 위대한 수령님의 사상과 노선에 충실하였으며 수령님의 명령, 지시를 무조건적으로 집행하였습니다. 18살에 벌써 공산당에 입당하여 추수투쟁, 춘황투쟁의 적극 참가하였던 오중흡은 조직성과 규율성, 전투성이 높았습니다.≫(오중흡과 7연대, 7권)

≪오중흡의 장점을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 장점들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혁명에 대한 무한한 충실성이라고 봅니다.

혁명에 대한 오중흡의 충실성이 어떻게 표현되었는가. 그것은 자기 사령관에 대한 충실성으로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되었습니다.≫(오중흡과 7연대, 7권)

≪오중흡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사상과 노선에 충실하였습니다. 그는 조선공산주의운동과 조선민족해방운동과 관련된 우리의 사상과 노선을 언제나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심오히 연구하였습니다.≫(오중흡과 7연대, 7권)

≪혁명에 대한 오중흡의 충실성은 또한 자기 사령관의 명령, 지시에 대한 무조건적인 집행정신과 그 명령, 지시 관철에서의 높은 책임감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오중흡은 사령관이 주는 명령, 지시라면 한치도 드티지 않고 최상의 수준에서 무조건 집행하였습니다. 그 명령, 지시가 아무리 과한 것이라 하더라도 절대로 타발하거나 불평을 부리지 않았습니다.≫(오중흡과 7연대, 7권)

≪사령관이 준 명령, 지시에 대한 오중흡의 태도에서 우리 일군들이 본받아야 할 다른 하나의 우점은 한 가지 일을 해낸 다음에는 연이어 다른 일거리를 맡겨달라고 간청해나서는 점이었습니다. 오중흡은 한자리에서 맴도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한 가지 일을 수행하고는 꼭꼭 다른 일거리를 붙잡군 하였습니다. 지금식으로 표현하면 계속혁신, 계속전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7연대가 다른 연대들보다 고생을 특별히 많이 한 것은 오중흡이 일욕심이 많은 연대장이었다는 사정과도 관련됩니다.≫(오중흡과 7연대, 7권)

≪나는 지금까지 수십 년동안 혁명을 해오면서 오중흡만큼 조직성이 강하고 규율성이 강한 사람을 많이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조직성이 강하고 규율성이 강한 투사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상급의 명령, 지시에 대한 절대성, 무조건성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임무를 받을 때에는 예! 하고 무조건 접수하였으며 무슨 일이든지 변명할 줄을 몰랐습니다.≫(오중흡과 7연대, 7권)

≪오중흡은 우리가 주는 명령과 지시를 1분1초도 어기지 않고 무조건 철저히 수행하군 하였습니다. 어디가서 어떤 임무를 수행하고 언제까지 어느 연락장소에 도착하라고 하면 꼭꼭 어김없이 임무를 수행하고 제시간에 도착하였으며 간혹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 예상치 않았던 일이 생기게 되면 소부대를 남겨두어 그 임무를 수행하게 하고 자기자신은 기본부대를 데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약속한 날자에 돌아오군 하였습니다.≫(오중흡과 7연대, 7권)

≪오중흡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슴에 큼직한 불덩어리를 안고 싸워온 사람이었습니다. 무슨 불덩어리였는가 하면 혁명에 대한 열정이었습니다. 그 열정의 핵이 다름아닌 자기 사령관에 대한 충실성이었습니다.≫(오중흡과 7연대, 7권)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오중흡의 충실성은 수령님의 안전을 목숨으로 결사옹위하는데서도 표현되었습니다.

≪혁명에 대한 오중흡의 충실성, 자기 사령관에 대한 오중흡의 충실성은 사령관을 정치사상적으로 뿐 아니라 목숨으로 옹호보위하려는 결사옹위정신에서도 표현되었습니다. 오중흡은 사령관의 신변안전을 위해서라면 연대와 함께 육탄이 되어 뛰어들었고 어떤 간고한 싸움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오중흡과 7연대, 7권)

홍두산전투장≪내가 홍두산에서 이두수중대를 데리고 수백 명의 적과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을 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투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오중흡은 사령관동지의 신변이 걱정된다고 하면서 적의 숙영지를 불이 번쩍나게 기습하였습니다. 후방이 기습당하게 되자 살아남은 적들은 하는 수 없이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때 내가 오중흡의 덕을 단단히 보았습니다.≫(오중흡과 7연대, 7권)

≪만강부근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부대의 철수를 지휘하는 나를 육탄으로 막아나선 것도 오중흡이었고 7연대 성원들이었습니다. 단두산전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백 명의 적을 꼬리에 달고 사령부가 철수하였는데 그 후위에서 7연대가 우리를 엄호하였습니다.≫(오중흡과 7연대, 7권)

위대한 수령님을 결사옹위하는 오중흡의 충실성은 고난의 행군 시절 집중으로 드러났습니다.

고난의 행군 약도≪자기 사령관에 대한 오중흡의 남다른 충실성은 고난의 행군시기에 집중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오중흡은 행군의 첫 시기 갈지자전술을 쓰면서 근 보름동안이나 결사적인 후위전을 벌려 사령부를 보위하였습니다.

내가 다른 기회에도 말했지만 고난의 행군을 하는 과정에 우리는 7도구치기에서 대부대집단행동이 불리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집단행동으로부터 분산행동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때 우리와 헤어진 오중흡은 자진해서 사령부로 가장하고 두 달 남짓이 험준한 용강산줄기와 장백산줄기를 누비면서 적들을 유인하였습니다. 그러느라고 7연대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 덕으로 사령부는 얼마동안 적들의 성화를 덜 받았습니다.≫(오중흡과 7연대, 7권)

≪고난의 행군 때에 사령부의 안전을 위해서 바친 오중흡의 희생성과 충실성에 대하여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사령부에 위험이 미치지 않게 하려고 7도구치기를 떠나는 첫 순간부터 달려드는 적들을 자기들 쪽으로 유인하면서 어려운 싸움을 벌였습니다. 자기네를 사령부로 가장하다나니 모든 중하를 도맡아 걸머지게 되었습니다. 적들이 나를 잡자고 혈안이 돼있는데 그 사람네가 김일성을 옹위하고 있는 사령부집단인체 하였으니 적들이 더 기를 쓰고 덤벼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중흡이네 연대는 그때 한 주일나마 낟알구경도 못하고 적을 끌고다니며 쉴새없이 싸움을 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홍두산전투 때에도 멀리서부터 총소리를 듣고 달려와 사령부를 잘 보위하였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적들의 성화를 덜 받았습니다. 사령부에 집중되었던 적의 역량이 분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식량난만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고난의 행군, 7권)

≪오중흡은 내가 내는 총소리까지도 귀신처럼 알아맞추는 충신이었습니다. 고난의 행군도중에 우리는 집단행군을 하다가 얼마동안 분산행동에로 넘어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나는 오중흡이와 헤어지면서 봄에 삼수골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조선사람들은 13도구골짜기를 삼수골이라고 불렀습니다. 1939년 3월 초순에 나는 삼수골의 어느 한 부락을 습격하는 전투를 조직하였습니다. 오중흡은 그때 우리가 내는 총소리를 듣고 이것은 사령관동지께서 울린 총소리요. 불과 1개 중대의 역량밖에 안되는 사령부가 노출되어 적들의 포위에 들 수 있소. 동무들, 사령부를 목숨으로 보위해야 하오! 라고 하면서 앞장에서 우리가 있는 곳을 향해 달리었다고 합니다.≫(오중흡과 7연대, 7권)

≪우리가 고난의 행군을 승리적으로 마감지을 수 있은 요인으로는 혁명적 동지애도 들 수 있습니다. 행군을 끝내갈 무렵 오중흡이네와 만나던 일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는 나를 붙잡고 막 울었습니다. 나도 그를 보자 눈물이 났습니다. 육친을 만난 것보다 더 반가왔습니다. 너무 반가와서 가슴이 뻐근했습니다. 나는 그때 온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그 귀중한 전우들과 다시는 절대로 헤어지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고난의 행군, 7권)

오중흡은 위대한 수령님의 지도아래 혁명군지휘관으로 성장한 표본이었습니다.

≪그 후 오중흡은 분대장, 소대장, 중대장 등의 군직을 차례차례 밟아가며 연대장으로 승진하였습니다. 그는 혁명군대지휘관의 표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오중흡과 7연대, 7권)

오중흡와 7연대는 모범적인 지휘관, 강철같은 연대의 전형이었습니다.

≪그처럼 간고한 환경속에서도 그는 정규군에서처럼 부대관리를 알뜰하고 깐지게 하였습니다. 그가 지휘하는 7연대에는 꿰진 신을 신거나 찢어진 바지를 입고 다니는 대원들이 없었습니다. 오중흡은 행군하다가도 옷이 꿰진 것을 보면 도중휴식시간에 옷을 다 기워 입게 하였습니다. 그가 부대관리를 잘하였기 때문에 그의 수하에서는 한 건의 사건사고도 나지 않았습니다.≫(오중흡과 7연대, 7권)

≪지휘관이 쇠소리가 나는 사람이면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다 쇠소리가 나는 사람들로 되는 것 같습니다. 중대장은 연대장을 닮고 소대장은 중대장을 닮으며 대원들은 소대장이나 분대장을 닮는 법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지휘간부들의 인품과 성미를 닮게 됩니다. 7연대는 통털어 오중흡을 닮아서 강철같은 연대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오중흡과 7연대, 7권)

≪7연대는 조선인민혁명군 관하부대들 중에서 전투력이 제일 강한 부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령부에서는 가장 긴급하고 책임적인 과업은 항상 7연대에 주었습니다. 7연대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주타격수였습니다.

나는 행군 때나 숙영할 때에도 전투력이 강하고 책임성이 높은 7연대를 늘 후위에 배치하군 했습니다. 적들의 추격과 불의습격이 노상 뒤따르는 유격대의 생활에서는 후위가 대단히 중요했습니다.≫(오중흡과 7연대, 7권)

≪추적하는 적은 오중흡이 책임진 방차대가 막았다. 오중흡은 각 소대에서 결사대원들을 선방하여 무려 10여 차례에 접전을 하면서 적들을 완강하게 견제하였다. 날이 밝은 다음에 보니 적들은 50미터 밖에까지 와있더라고 하였다.

방차대원들이 적을 막아내는 동안 주력은 동쪽에 있는 두 개의 봉우리를 차지하고 전령병을 보내여 그 두 봉우리 사이의 새초밭으로 오중흡이네 방차대가 적을 유인하며 빠지도록 하였다. 방차대의 유인전술에 걸려 무여한 새초밭에 들어선 적≪토벌대≫는 수많은 시체를 남기고 도주하였다.≫(무송원정, 6권)

≪김주현의 말에 의하면 오중흡이네 후방공작조가 소덕수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의 모습은 너무도 참혹하고 끔직해서 눈물이 없이는 볼 수 없더라는 것이었다. 겨우 숨이 붙어있는 그들을 소덕수인민들이 맞아들여다가 형체만 남아있는 누데기같은 옷을 가위로 째내고 새 옷을 갈아입혔는데 온몸에 피얼음들이 엉켜 붙어있어 상처자리부터 소금물로 소독하고 언독을 빼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이다. 오중흡 이하 전원이 동상을 입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후방공작조성원들이 의식을 차리기가 바쁘게 일어나 재봉기앞에 마주앉더라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소덕수의 조국광복회원들과 인민들은 일심일체가 되어 600벌의 군복을 짓는데 필요한 천도 해결하고 제작도 끝내었다.≫(보천보의 불길(2), 6권)

≪나는 밀영생활에서 온 부대가 다 따라배울 수 있는 모범을 하나 만들기로 결심하고 오중흡을 불렀습니다. 그가 맡고 있은 7연대 4중대는 전투력이 제일 강한 핵심중대였습니다. 오중흡에게 밀영생활에서 나타나고 있은 이러저러한 부족점을 말해주었더니 그는 그것을 자기 중대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오중흡은 중대에 돌아가자 생활문화바람을 되게 일으켜 중대의 면모를 일신시켰습니다.≫(마당거우밀영, 7권)

≪육과송전투에서는 역시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의 기둥부대인 7연대가 제일 잘 싸웠습니다. 7연대는 강철부대라고도 할 수 있는 무적의 부대였습니다. 그 부대가 일당백의 부대로 될 수 있은 것은 연대의 지휘를 담당한 오중흡의 공로에 속한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가 충신이고 명장이기 때문에 7연대가 강한 부대로 될 수 있었습니다.≫(오중흡과 7연대, 7권)

이권행오일남손태춘김혁철

≪나에게로 날아드는 적탄을 몸으로 막고 전사한 이권행도 7연대출신이었고 사령부의 명령, 지시를 관철하는 길에서 귀중한 생명을 바친 오일남, 손태춘, 김혁철도 7연대출신이었습니다.≫(오중흡과 7연대, 7권)

오중흡은 육과송전투에서 애석하게 전사하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중흡의 전사를 두고두고 마음아파하시었습니다.

≪오중흡이 연대장의 중책을 지니고 싸우다가 전사한 것도 29살의 꽃나이였다.≫(공청의 산아들, 4권)

오중흡이 최후를 마친 육과송전투장≪그런데 아군의 승리가 확실해진 때에 뜻하지 않은 일격을 당했습니다. 지하도에 숨어있던 적들이 수색작전을 지휘하던 오중흡연대장에게 치명상을 입힌 것입니다. 전령병 김철만이도 부상을 당했습니다. 패잔병들이 발악적으로 저항하는 바람에 7연대의 유능한 지휘관들인 최일현과 강흥석이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치명상을 입은 오중흡이 역시 원통하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한생 험한 길을 헤쳐오면서 혁명을 위해 그처럼 몸을 아끼지 않고 싸우던 그 불덩어리같은 사람이 그렇게 갔습니다.≫(오중흡과 7연대, 7권)

≪만약 지갑룡이 되돌아서지 않고 제때에 병실에 달려가 정황을 알아왔더라면 우리의 명령이 지체없이 오중흡에게 전달되었을 것이고 그러면 이런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전투에서의 정황처리는 분초를 다툽니다. 지갑룡이 수행하지 못한 임무를 김학송과 지봉손이 대신 수행하느라고 늦어진 사이에 오중흡은 지하도에 깊이 숨어있던 패잔병들이 난사하는 총탄에 맞았던 것입니다.≫(신념과 배신, 8권)

≪부상당한 김철만이 내앞에 나타나 왕왕 소리쳐 울면서 오중흡이 희생되었다는 비보를 전할 때 처음 나는 자기 귀를 의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엄연한 사실임을 확인하게 되자 나는 거의 이성을 잃어버리고 오중흡을 죽인놈이 어디에 있는가? 오중흡을 죽인 놈들은 용서할 수가 없다고 소리를 치며 적병실쪽으로 달려갔습니다.≫(오중흡과 7연대, 7권)

≪우리는 어떤 고통을 당해도 대원들앞에서는 마음을 억제하는데 습관되어 있었지만 그 날은 정말 참을 수 없었습니다. 하기는 우리가 얼마나 사랑하던 오중흡입니까.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떨립니다. 그 날 우리는 숱한 적을 소멸하고 많은 전리품을 얻었지만 그게 다 귀찮았습니다. 우리 대원들의 가슴이 그때처럼 아팠던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오중흡과 7연대, 7권)

≪그러나 그날밤만은 어떤 손님이든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모든 게 귀찮았습니다. 육과송전투에서 오중흡을 잃은 것이 너무나도 분하고 애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다가 최일현과 강흥석이까지 잃고 나니 밥을 먹고 싶은 생각도 없고 말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오중흡이 전사한 것은 나에게서 오른팔이 떨어져나간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정말 그때 나는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평안도사람, 7권)

≪우리는 오중흡과 강흥석이 희생된 다음에도 연거퍼 두 번이나 큰 규모의 연예공연을 조직하였습니다. 우리 부대의 병사, 지휘관들이 그들이 전사한 때만큼 그렇게 슬퍼하고 분해한 적은 없었습니다. 오중흡의 장례를 한 그날밤 숙영지에서는 흰밥에 절인 고등어를 구워 저녁식사를 마련했으나 누구도 숟가락을 들지 않았습니다. 해방 후 김정숙은 고등어만 보면 오중흡의 생각이 나서 눈물을 짓군 했는데 그를 잃고난 다음 우리 대원들의 기분상태가 얼마나 침통했겠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미래에 대한 낙관, 8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중흡을 한마디로 혁명전우이고 동지이며 생명의 은인이라고 높이 평가하시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75년 10월 당창건 30돌을 맞으며 대성산의 혁명열사능에 오중흡의 반신상을 세우시었습니다.

≪나는 김혁이나 차광수를 잊을 수 없듯이 오중흡을 잊을 수 없습니다. 오중흡은 나에게 있어서 혁명전우이고 동지인 동시에 생명의 은인이기도 합니다.≫(오중흡과 7연대, 7권)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일찍이 오중흡과 7연대를 전형으로 내세우시며 따라배우는 운동을 전개하시었습니다.

≪나는 일찍부터 인민군대에서 오중흡과 같은 사람들을 전형으로 내세우라고 하였습니다. 오중흡을 전형으로 내세우라는 것은 오중흡을 따라 배우라는 뜻입니다.

김정일동무는 벌써 1960년대초에 인민군대안에서 7연대를 따라 배울 데 대하여 강조하였습니다.≫(오중흡과 7연대, 7권)

≪지금 김정일동무가 인민군대안에서 오중흡을 따라배우는 운동을 지도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오중흡과 7연대, 7권)

유경수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유경수를 처음 만나신 때는 1933년 동녕현성전투 직후였습니다. 그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유경수에서 ≪어린 혁명가≫라는 높은 치하와 격려의 말씀을 주시었습니다.

≪나와 유경수와의 첫 상봉은 1933년 동녕현성전투 직후에 이루어졌다. 싸움을 끝내고 소왕청으로 돌아와 대원들을 휴식시키고 있을 때 최현이 인솔한 연길유격대의 대원들이 나를 찾아왔다. 그 대원들 중에 최현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어린 대원이 한 명 있었는데 그가 바로 유경수였다.

유경수는 통신원의 불찰로 연길유격대가 동녕현성전투에 참가하지 못한데 대하여 몹시 원통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고 ≪지각생≫의 신세가 된 분풀이를 최현에게 막 해댔다.

≪중대장동지, 소왕청까지 와서 밥만 얻어먹다가 어떻게 거저 돌아가겠습니까. 아무데라도 좋으니 대장을 모시고 한번 답새기고 갑시다.≫

그 한마디의 말만으로도 나는 유경수가 보통배짱군이 아니라는 것을 인차 간파할 수 있었다. 그 당시 그의 나이는 18살이었다. 그가 혁명대오에 들어선 것은 16살 때였다.

최현대장, 저 삼손이가 나이는 어려도 싸움군입니다. 애가 녹록치 않수다≫

삼손이란 유경수의 본명이었다.

이것이 유경수에 대한 최현의 총적 평가였다. 나는 그 한 마디의 평가를 듣고 최현이 유경수를 몹시 애지중지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혜산사건≫을 겪으면서, 6권)

≪유경수가 우리의 가까이에 와서 중대장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소할바령회의 이후부터였다. 소왕청에서의 첫 상봉이 있은 때로부터 근 10년 세월을 그는 최현부대에서 기관총수로 복무하였다. 그러다나니 그를 자주 만나보지도 못하였고 살뜰히 돌보아주지도 못하였다. 내가 유경수를 위해 해준 것이 있다면 ≪어린 혁명가≫라는 칭호를 준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경수는 그 칭호를 자기자신에 대한 표창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우리를 마음의 기둥으로 삼고 혁명을 위해 한 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였다.≫(≪혜산사건≫을 겪으면서, 6권)

유경수는 머슴을 살았던 경력과 10대에 춘황투쟁에 참가하여 구속된 경력이 있었습니다.

≪유경수의 경력가운데서 특기할만한 점은 어릴 때부터 머슴살이를 한 사실과 10대에 춘황폭동에 참가하였다가 군벌당국에 체포되어 용정감옥에서 곤장맛을 본 사실이었다. 간도지방에 혁명가들이 많았지만 어린 나이에 감옥에서 물고문이나 고춧가루고문을 받은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장중열이나 이종락과 같은 인간들과는 달리 유경수의 손을 잡아보았는데 손바닥에 썩살이 어찌나 험하게 배겼던지 쇠판대기 같았다.≫(≪혜산사건≫을 겪으면서, 6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유경수의 학구열을 평가하시는 한편 어려웠던 가정환경을 동정하시었습니다.

그림 : 학교가 그립건만≪나는 유경수가 어렸을 때 이삭공부를 했다는 말을 듣고 동정심을 금할 수 없었다. 이삭공부란 남들이 공부할 때 그 곁에서 눈과 귀로 글자를 익히고 이치를 새기면서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학문을 섭취하는 학습방법을 말한다. 그는 나무짐을 지고 장에 갔다올 때마다 사립학교 창문밑에 쭈그리고 앉아 나무가지를 들고 교원이 칠판에 쓰는 글을 열심히 따라썼다. 그 과정에 조선말 자모와 구구표를 완전히 익히었다.

유경수의 이삭공부를 미구에 온 학교가 다 알고 동정하게 되었다. 유경수의 향학열에 감동된 곽찬영(곽지산)교원은 그를 학교에 입학시키었다. 그리고 학비는 자기가 부담하였다. 이삭글을 배우는 나무군총각에도 쉽지 않은 소년이었지만 낯도 모르는 생명부지의 아이에게 입학을 허락하고 그에게 학비까지 대준 훈장 역시 쉽지 않은 교육자였다.

하지만 유경수는 가정사정으로 인해서 학교를 졸업할 수 없었다. 그는 학교를 중퇴하고 지주집에 머슴군으로 끌려갔다. 그가 학교를 그만두게 되자 곽찬영도 큰 충격을 받고 교사직에서 물러나 노동자, 농민들속에서 혁명적인 계몽사업을 시작하였다. 후에는 항일유격대에 입대하여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혜산사건≫을 겪으면서, 6권)

유경수는 위험하고 중요한 싸움을 도맡아해온 유능하고 전투적인 투사였습니다.

≪그는 더 많은 ≪토벌≫역량을 소멸하기 위해 유인전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50명 남짓한 부대의 일부 성원들로 전투조를 조직한 다음 천보산시가에서 20리쯤 떨어진 수림속에 매복전을 퍼놓았다. 바로 그 전투조에 유경수가 망라되어 있었다. 유경수소조는 적을 유인하기 위해 ≪토벌대≫의 숙영지들을 연속적으로 기습하였다. 어떤 날 밤에는 같은 숙영지를 두 번씩이나 습격하였고 또 어떤 날 밤에는 ≪토벌대≫의 작전지도까지 탈취해옴으로써 적들로 하여금 악에 받쳐 인민혁명군을 추격해 오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유경수는 그때 옹근 사흘동안 물도 변변히 마시지 못하고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 싸움을 도맡아하였다. 이 작전에서 유경수가 세운 공로를 두고 최현은 해방 후에도 이따금씩 생동한 회상을 하였다.≫(≪혜산사건≫을 겪으면서, 6권)

유경수는 정치공작활동도 잘 하였습니다.

≪조국광복회가 창립된 후 우리는 조정철, 유경수, 최경화, 조명식 등 파악있는 정치공작원들을 이 지구에 파견하였다. 이런 사람들이 국내에 들어가 농조핵심들을 장악한 다음 그들 중에서 똑똑한 사람들을 선출하여 우리에게도 보내고 각 지방의 농조조직들에도 파견하였다.≫(농민을 준비시키던 나날에, 6권)

유경수는 반≪민생단≫투쟁이 극좌적으로 벌어지는 살벌한 상황속에서도 스승에 대한 의리를 다한 사람이었습니다.

≪곽찬영이 군중심판장에 끌려나온 날 유경수는 목숨을 걸고 그를 보증해나섰다. 그가 심판장에서 자기의 은사를 보증해나선 것은 사실 만인의 찬양을 받을 만한 큰 용단이었다. 그 당시는 유경수자신도 ≪민생단≫혐의자의 명부에 등록되어있었다. ≪민생단≫혐의자가 ≪민생단≫의 딱지가 붙은 ≪피고≫를 두둔하거나 동정한다는 것은 총구앞에 달려가 자기를 죽여달라고 청원하는 것과 같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유경수는 가슴을 내대고 스승의 무죄를 증명하였다. 그 ≪죄≫로 하여 그는 ≪민생단≫감옥으로 끌려갔다.

유경수의 용감한 행위는 제자가 스승을 위해 지킬 수 있는 최고의 의리였다. 그는 한평생 스승의 은정을 잊지 않고 제자로서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가 그처럼 의리에 충실할 수 있었던 것은 신념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신념이 강한 사람은 도덕과 의리도 잘 지키는 법이다. 혁명가는 정의를 옹호하고 불의를 증오하며 진리만을 말해야 한다는 것, 혁명하는 사람들이 동지들과 인민들에 대한 의리를 잘 지키자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가 지니고 있던 생활의 신조였다.

그는 좌경배타주의자들과 종파사대주의자들이 ≪민생단≫이라고 규정한 사람들 중 절대다수는 아무 죄도 없는 무고한 사람들이며 혁명에 충실한 사람들을 ≪민생단≫으로 몰아 아무렇게나 처형하는 것은 범죄이라고 단호히 까밝히였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은 비록 반≪민생단≫투쟁이 극좌적으로 벌어져 혁명대오내에서 혼란이 빚어지고 있지만 언제인가는 꼭 수습될 날이 견실한 혁명가들과 애국적 인민들을 견결히 옹호하였다.

생사결단의 각오를 가지고 심판장에서 자기의 은사를 구원해낼 유경수의 용감한 소행에 대한 풍문은 동만의 혁명가들과 인민들을 격동시키었다. 나도 다홍왜에서 그 소식을 듣고 소왕청에서 있었던 그와의 상봉을 감개무량한 심정으로 돌이켜보았다.≫(≪혜산사건≫을 겪으면서, 6권)

유경수는 무엇보다도 위대한 수령님께 무한히 충직했던 충신이었으며 신념과 의리가 강한 혁명가였습니다.

≪우리에 대한 유경수의 의리는 참으로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의리가 얼마나 고결하고 진실한 것인가를 나는 소부대활동시기에 더욱 절절하게 체험하였다.≫(≪혜산사건≫을 겪으면서, 6권)

≪혁명가로서의 유경수의 인간미는 자기 사령관의 명령, 지시에 대한 무조건적인 집행정신에서 집중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는 사령관의 명령을 집행하는데서 맹세나 약속을 번지르르하게 하지 않았지만 일단 한 맹세나 약속은 어김없이 이행하는 좋은 품성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믿을 만한 사령관동지의 품밖에 없다. 사령과 동지를 잘 모시고 받들어야 우리는 조국의 해방도 이룩할 수 있고 자기자신의 운명도 개척할 수 있다. 사령관동지의 의도대로 하기만 하면 우리는 이긴다. 이것이 바로 유경수가 일상적으로 간직하고 있던 신념이었다. 이런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어떤 악조건에서도 나의 명령이나 지시를 훌륭하게 집행할 수 있었다.≫(≪혜산사건≫을 겪으면서, 6권)

≪우리는 한총구에 사령부자리를 정한 다음 각지에 소조들을 파견하였다. 유경수도 나의 명령을 따라 여러 차례에 걸쳐 연락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사령부를 떠날 때마다 자기네 소조에 차례진 식량을 경위대원들에게 맡기며 장군님께 밥을 지어드리라고 당부하군 하였다. 그리고 우리한테 화가 미치지 않게 하려고 유인전을 자주 조직해서 적들의 주의를 딴데로 돌리군하였다.≫(≪혜산사건≫을 겪으면서, 6권)

≪유경수도 후방부에서 쌀을 조금씩 공급해주면 김정숙이한테 맡기고 가면서 소문을 내지 말고 나한테 밥을 지어주라고 했습니다.≫(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8권)

≪유경수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한총구는 온통 ≪토벌대≫의 불무지로 가득차 있었다. 사령부가 천막을 치고 있던 자리에서도 여러 개의 불무지가 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돌아오라고 명령한 마지막시간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나어린 두 대원은 나의 생사를 걱정하면서 눈물을 흘리었다. 사실 그날밤 한총구에 펼쳐진 불바다를 보고서는 사령부가 살아서 건재해있다고 생각할 사람이 없었다.

그렇지만 유경수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이제 남은 시간은 30분밖에 없다. 이 30분 동안에 우리가 저 불무지가 있는 사령부자리까지 가지 않으면 사령관동지의 명령을 어기게 된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이 위험속에서도 우리 세 사람을 끝까지 기다리실 것이다라고 하면서 우는 대원들을 달래였다. 그리고는 그들을 산봉우리에 남겨두고 사령부의 천막자리를 향해 주저없이 기여 내려갔다. 그러다가 그 근처에서 우리가 떨궈두고온 대원을 만났다. 유경수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사령부자리부터 어김없이 찾을 것이라는 나의 확신과 정황이 어떻게 변하든지 간에 자기 사령관이 소조를 기다릴 것이라는 유경수의 판단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하였다.

내가 정해준 날자와 시간과 장소를 털끝만큼한 편차도 없이 엄수하려는 유경수의 드팀없는 자세와 철저한 집행정신은 자기 사령관은 어떤 정황에서나 대원들을 버리지 않는다는 확고부동한 신념과 사령관의 신임과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이나 고통도 각오해야 한다는 진정한 의리심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혜산사건≫을 겪으면서, 6권)

≪그때 유경수가 활동을 잘했습니다. 그가 고생도 많이 하였습니다. 화전현 쟈피거우로 가자면 푸르허강을 건너가야 하였는데 물이 불어난 때여서 건너갈 재간이 없었습니다. 강줄기를 올리훑고 내리훑다나니 식량도 다 떨어지고 돌아와야 할 날자가 되었습니다. 유경수는 며칠간 굶은데다가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여 너무 속을 태우다나니 병이 나서 몹시 앓았습니다.

쟈피거우에는 누구든 꼭 갔다와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경수를 보내려던 곳에 내가 직접 소부대를 데리고 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천막 한쪽에서 정신없이 앓고 있던 유경수가 이 사실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나 비척거리며 내앞에 나서더니 장군님, 장군님은 가시면 안됩니다, 제가 다시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못간다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떼를 쓸 때에는 설복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고통스러운대로 그의 제의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의 생활에는 그가 어떤 인간인가를 검열하게 되는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다. 생사를 판가리하는 우리의 유격투쟁은 매 분초가 그런 검증의 순간이었습니다. 자기를 바치는가 마는가 하는 순간이 하루에도 수십 번 있었습니다.≫(소부대활동의 나날, 8권)

유경수는 조국에 개선한 후에도 위대한 수령님의 지시를 관철하기 전에는 고향에 갈 권리도 없다는 혁명가였습니다.

≪나는 떠나가는 김책에게 짬이 생기거들랑 고향에 꼭 찾아가보라고 신신당부하였습니다. 최춘국과 유경수, 조정철, 이을설에게도 같은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고향은 모두 함경남북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 파견지에 갔다가 평양으로 소환되어올 때까지 그들은 모두 고향에 한번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고향에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이 높은 사명감과 책임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무들은 내가 강선제강소로 갈 때 고향집에도 들리지 않았다고 하면서 만경대갈림길에 대한 노래를 지어부르고 있지만 사실 항일혁명투사들은 개선후 누구도 고향에 가보지 않고 건당, 건국, 건군을 위한 기초작업을 하였습니다.

사령관의 명령지시를 관철하기 전에는 고향에 갈 권리도 없다는 것이 바로 우리 투사들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개선, 8권)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서울에 입성하는 조선인민군 탱크유경수는 항일혁명투쟁기간만이 아니라 조국해방전쟁기간에도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의 명령을 관철하는데서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유경수는 우리 나라의 첫 탱크부대를 건설하였으며 서울해방작전과 대전해방작전에서 커다란 위훈을 세웠습니다.

≪이런 신념과 의리심을 가지고 유경수는 해방 후 철도경비대를 조직하고 탱크부대를 건설하였으며 전쟁의 매 단계에서 최고사령부의 작전적 방침을 실현하는데서도 큰 공헌을 하였다.≫(≪혜산사건≫을 겪으면서, 6권)

유경수는 어려운 일에 앞장서고 공은 동지들에게, 잘못은 자신에게 돌리는 혁명가였습니다.

≪유경수는 어려운 고비에 부닥칠 때마다 언제나 자기를 육탄처럼 내던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제일 어려운 모퉁이에 늘 그를 보내군 했습니다.

헐한 일은 전우들에게 맡기고 힘든 일은 자기가 맡아하며 영광의 자리에는 동무들을 내세우고 책임추궁이 가해지면 모든 잘못을 자기한테서 찾고 어떤 처벌이나 책망이든지 달게 받아들이는 여기에 바로 유경수의 인간적 매력이 있고 그가 만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소부대활동의 나날, 8권)

대전해방작전에서 승리한 조선인민군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인민군의 간부들을 만날 때마다 유경수의 예를 드시면서 군인들을 신념과 의지가 강한 투사, 충신들로 키우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지금도 인민무력부의 지도간부들을 만날 때마다 군인들을 그 어떤 정세변화나 역경속에서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신념과 의지를 굳건히 지키는 강의한 투사, 충신들로 키우라고 말하군 한다.≫(≪혜산사건≫을 겪으면서, 6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유경수야말로 신념과 의지가 강한 혁명가의 모범으로 높이 평가하시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배려에 의하여 1950년 8월 유경수에게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되었으며 1968년 9월에 함경남도 신흥군 신흥읍에 그의 동상이, 당창건 30돌이 되는 1975년 10월에는 대성산의 혁명열사능에 그의 반신상이 세워졌습니다.

≪혁명가의 신념과 의지를 두고 논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그 전열에 유경수와 같은 사람들을 세우곤 한다. 자기 수령이나 지도자의 사상을 신념으로 삼고 그 신념을 고수하기 위해 한생을 곧바르게 걸어가는데서 유경수는 만사람이 따라 배울만한 모범을 보여주었다.≫(≪혜산사건≫을 겪으면서, 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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