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9월 2일(월)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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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와 더불어≫ 강의 (5)
제12장 ≪백두산으로≫에서 제14장 ≪지하전선의 확대≫까지

통일여명 편집위원 한철규

안녕하십니까. ≪세기와 더불어≫강의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부터 4회에 걸쳐서 항일무장투쟁의 전성기, 곧 둘째 단계를 학습하도록 하겠습니다. 둘째 단계는 남호두회의(4권 제10장 ≪경박호의 기슭에서≫)부터 시작하지만 본격적으로는 5권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강의의 핵심, 곧 5권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운동의 일원화입니다. 이것이 오늘 강의의 핵심일 뿐만 아니라 항일무장투쟁 둘째 단계, 나아가 세째 단계를 관통하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운동의 일원화란 조선인민혁명군과 국내지하조직의 결합을 말하며, 본질상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영도를 실현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오늘 어떻게 남측혁명역량에 대한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영도를 실현하는가에 대한 역사적 경험과 시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강의내용에는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통일혁명전략의 핵심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운동의 일원화를 실현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여 국내혁명운동에 대한 우리의 지도를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런 과제를 실행하자면 무엇보다도 국내에서 이제순과 같은 형의 견실한 혁명가들을 찾아내고 그들과의 공동노력을 통하여 조국광복회망을 빨리 늘이고 온 민족을 반일성전에로 불러일으키기 위한 대책을 세워야만 하였다. 그런 적임자로 물색된 것이 박달이었다.≫(불굴의 투사 박달)

바로 이 세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회상교시가 오늘 강의의 핵심이며 항일무장투쟁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조국광복의 대사변을 이룩하기 위한 김일성장군님의 핵심전략인 것입니다. 이 속에 모든 것이 다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동지들은 이제순과 박달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가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지들에게 진심으로 권고하는데,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운동의 일원화≫라는 명제이제순, 박달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깊이 깊이 연구하기 바랍니다. 그 속에 통일혁명의 핵심적인 진리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을 통해 우리는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 선군혁명노선에 의거하여 조선인민혁명군을 창건하시고 그 이후 남호두회의를 거쳐서 조국광복회라는 반일민족통일전선을 건설하시었다는 내용을 학습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민혁명군내의 당위원회가 모든 군대의 당조직만이 아니라 모든 지역의 당조직까지 통일적으로 지휘하는 사실상의 당중앙이라는 사실도 확인하였습니다. 자, 그럼 군대와 통일전선, 당이라는 혁명의 3대 기둥이 모두 선 것이 아니겠습니까. 역사적인 카륜회의에서 발표된 조선혁명의 기본노선인 ≪조선혁명의 진로≫에서 밝힌 항일무장투쟁, 민족통일전선, 자주적 당창건의 3대 위업의 기본이 해결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조선혁명가들은 무엇을 하는 사람들입니까.

01-01-411925년 1월 동생들을 데리고 림강으로 발구를 타고가다 하루밤 쉬고간 압록강기슭의 오구비   무장투쟁, 통일전선, 당창건도 모두 조선혁명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조선인민혁명군과 조국광복회,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는 모두 조선혁명을 위한 무기이고 수단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무기와 수단은 주로 동만을 비롯한 만주지역에 한정된 것입니다. 조선혁명을 힘있게 추동할 무기와 수단만 만들어졌으되 실제로 조선혁명 자체, 곧 국내혁명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만주지역이라는 압록강이북의 해외무장투쟁과 국내지역이라는 압록강이남의 국내혁명운동이 분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국내혁명운동이 조선혁명의 올바른 노선과 정책을 알지 못하고 세련된 영도를 받지 못하여 심각한 우여곡절을 겪고 있는 것이며 이런 식으로 혁명역량이 분리되어 있어서는 반일전민항쟁을 전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 이제 오늘 강의의 핵심적인 개념이 다 나왔습니다.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운동의 일원화는 무엇을 위해 필요한 것인가요? 바로 조선혁명을 위해 필요한 것이고 전민항쟁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조선혁명은 전민항쟁을 통해 이루어지고 전민항쟁은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운동의 일원화를 전제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 찾으시고 개척하신 조선혁명의 열쇠, 비결, 방략인 것입니다. 그럼 항일의 조선혁명을 반미의 통일혁명으로 바꾸어 대입한다면 어떤 명제가 성립하나요?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강의가 추구하는 핵심목표이며 우리 시대 혁명가들이 찾아야 하는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통일혁명전략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 답은 동지들이 스스로 찾기 바랍니다. 오늘 강의는 그 답을 찾는데 길잡이의 역할을 할 것입니다.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운동의 일원화에 대한 역사적 경험을 학습하는데서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백두산입니다. 그럼 왜 백두산이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운동의 일원화를 이룩하는데서 중요한가요? 바로 거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무장투쟁의 해외와 혁명운동의 국내를 연결시키는 천혜의 거점이기 때문입니다. 잘 알다시피 백두산은 압록강과 두만강의 경계지점일 뿐 아니라 만주와 국내의 경계지점이기도 합니다. 당시 일제는 만주와 국내의 경계선을 압록강, 두만강으로 하였는데, 백두산은 그 경계선을 하나로 잇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백두산은 조선혁명의 성산이 될 수밖에 없는 자연지리적 조건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조선혁명이 만주지역과 국내지역으로 분리되어 있다가 하나로 통일되면서 혁명운동의 일대 앙양이 일어났고 결국 전민항쟁의 힘으로 조국광복을 이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유격구를 해산과 함께 잠시 제2차 북만원정을 다녀오신 후에는 곧바로 백두산에 나오셨던 것입니다.

백두산도 유격구입니다. 유격대는 국가적 후방이 없이 활동하므로 반드시 근거의 지탱점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회의와 휴식도 하고 재충전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격구는 완전유격구와 반유격구로 나누기도 하지만 해방지구형태와 밀영형태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동만지역의 왕청, 연길, 화령, 안도 등지의 유격구가 해방지구형태의 유격구였다면 백두산을 거점으로 거대하게 형성된 유격구는 밀영형태의 유격구입니다. 밀영형태의 유격구란 해방지구형태의 유격구와 달리 보이지않는 유격구를 말합니다. 유격대의 근거지이되 보이지않는 근거지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백두산유격구는 곧 백두산밀영인 것입니다. 백두산밀영을 설명하면서 반드시 언급하여야 할 밀영 중의 밀영은 소백수밀영입니다. 그럼 소백수밀영이 어떤 역사적 의의를 가지는 밀영인가요? 예, 바로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 지내셨던 사령부의 밀영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안전하게 지어졌고 또 철저히 비밀이 유지되었던 밀영이 바로 소백수밀영입니다. 그런데 소백수밀영은 이 못지않게 중요한 역사적 의의가 더 있는 곳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요? 예, 바로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 태어나신 곳입니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1942년 2월 16일 바로 이 천고밀림의 수림속에서 영하 40도의 강추위속에서 백두광명성으로 탄생하시었습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고향은 백두산인 것입니다. 소백수밀영은 겹겹이 엄폐되어 있는 천혜의 근거지로서 해방까지 전혀 노출되지 않았습니다.

백두산근거지 - 정일봉

백두산에 밀영을 꾸리는데서 김주현이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백두산으로 근거지를 옮기시면서 선견대로 김주현부대를 파견하여 이곳에 밀영망을 건설하도록 사전에 조치하시었습니다. 그리고 이동학을 파견하여 백두산주변을 돌아보며 좋은 인물을 발굴하도록 지시하시었김주현습니다. 어떤 인물인가요? 당연히 항일무장투쟁과 국내지하혁명의 일원화라는 전략을 추진하는데 적합한 인물이지요. 이동학은 지시대로 백두산주변부를 돌아보다가 당시 신흥촌촌장을 하고 있던 이제순을 찾아내었습니다. 그리고 몇가지 과업을 주며 검열한 후, 믿을 수 있겠다고 판단이 되자 백두산밀영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이제순이 이동학의 눈에 들 수 있었던 이유는 이동학이 주는 과업들을 헌신적으로, 백프로 달성했기 때문입니다. 버선과 행전을 만들어오라고 했더니 한 채밖에 없던 이불을 뜯어 만들어올 정도였던 것입니다. 그럼 이제순은 도대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었기에 생전 처음 보는 이동학을 비롯한 유격대를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게 되었나요?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쳐주시었습니다.

≪그는 국내인사들 가운데서 해외의 무장투쟁과 국내정치투쟁의 불가분리성과 일원화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인식하고 공리공담의 울타리를 벗어나 적극적인 자세로 그것을 실현하였을 뿐 아니라 혁명군과의 연계를 성사시킨 다음에는 우리의 노선을 관철해 나가는 길에서 생명까지 바친 선각자, 투사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이제순)

이제순   이제순은 국내에 있을 때 동지들에게 늘 농조조직이 투쟁에서 성과를 거두려면 반드시 조선인민혁명군의 지도를 받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 통로를 개척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혁명군의 지도가 없이는 국내투쟁이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물론 그 주장은 많은 동지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혁명군의 줄을 어떻게 찾겠는가고 하면서 그 주장을 시답지 않게 대하였습니다. 바로 여기서 이제순과 일부 사람들의 차이가 나타나는데, 이제순은 혼자서라도 유격대를 찾아가겠다며 자기의 친지들이 있는 장백현 신흥촌으로 단호히 이주하였던 것입니다. 이제순이 이동학의 눈에 들고 백두산밀영을 찾아온 첫 손님이자 혁명가가 된 이유는, 바로 ≪해외무장투쟁과 국내정치투쟁의 일원화≫를 인식하고 또 이를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이제순이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을 만나게 된 이유이며 오늘도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품에서, 조국과 당의 품에서 영생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어찌 보면 종이 한 장의 차이인 것 같지만, 그 차이는 결국 이처럼 하늘과 땅 같은 차이로 이어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제순의 경험에서 혁명의 가장 중요한 철리를 터득하여야 합니다. 그럼 혁명의 가장 중요한 철리란 무엇인가요? 이것도 참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 인터넷회고록강좌 중 ≪회고록과 주체확립≫(지난주 금요일)은 ≪주체확립≫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회고록의 원문을 인용하며 해설하였습니다. 그 강좌를 수강한 동지들은 잘 알겠지만 혁명의 가장 중요한 철리란 바로 주체확립입니다. 이는 항일혁명시기나 오늘 통일혁명시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주체확립이란 무엇인가요? 여기서 주체란 곧 조선혁명을 뜻하며 주체확립이란 사대주의, 교조주의를 배격하고 자주성과 창조성을 견지하는 것, 민중을 믿고 민중에 의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는 곧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영도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강사가 마지막에 최용건의 고백을 인용하며 강조하였듯이 백두산에 가서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의 부하로 싸우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을 찾아 백두산으로 가는 것이 주체확립이고 조선혁명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진리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이제순이 일찌감치 터득했던 것이고 공리공담을 떠나 과감히 실행했던 것입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이제순을 만나시고는 이내 흡족해 하시었습니다. 사람이 종파의 때가 묻지 않아 깨끗하고 특히 군중관점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천지주의 양아들의 처리문제에 대한 위대한 주석님의 질문에 거침없이 사실상 머슴과 같은 불쌍한 청년이며 별로 지은 죄도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당시를 회상하시면서 ≪통일전선의 각도에서 문제를 너그럽게 고찰하는 그의 관용과 독특한 사고방식앞에서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고 말씀하시었습니다. 통일전선의 각도, 이런 관점은 특히 어떤 역할을 수행하여야 할 혁명가에게 필요할까요? 바로 조국광복회 사업입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이제순의 군중관점이 좋고 매사를 통일전선적 각도에서 판단하는 측면을 주목하시어, 이제순이 있는 장백현의 조국광복회 조직을 건설할 책임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제순의 이런 면모를 높이 평가하시는 위대한 주석님의 회상교시를 명심하면서 오늘 우리 시대의 최대의 과제인 민족통일전선사업을 강화하기 위하여 어떤 대중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크게 깨우쳐야 하겠습니다.

이제순의 바탕이 괜찮다고 판단하신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최고의 강사진을 무어 이제순을 집중 교양하시었습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당시의 강습을 ≪강습의 주제는 조선혁명의 노선과 성격, 전략전술에 대한 것이었다. 이 강의는 내가 담당하였다. 조국광복회10대강령과 창립선언, 규약에 대한 해설강의, 국제당사강의는 이동백이 해주었다. 단 한 명의 수강생을 위하여 여러 명의 유능한 강사들이 번갈아 출연해가며 그처럼 알심있게 강습을 진행한 실례는 항일혁명투쟁의 전기간 그때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라고 회상하시었습니다. 이제순도 ≪저는 쌀 한 말을 지고 왔다가 몇 섬이나 되는 혁명적 양식을 지고 갑니다. 이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이제는 저에게 사업분공을 주십시오. 지역을 하나 떼서 맡겨주면 그 지역안에 있는 조선사람들이 사는 모든 마을마다에 조국광복회조직을 내오겠습니다.≫고 진정에 넘쳐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교양사업의 의의에 대하여 새삼 확인하는 한편 피교양자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도 깨닫게 됩니다. 한편 위대한 주석님께서 직접 해주신 강습의 주제가 조선혁명의 노선과 성격, 전략전술이라는 점에 주의하면서, 오늘 우리 혁명가들이 최우선적으로 학습하여야 할 주제가 무엇인가를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권영벽   실제로 이제순은 장백지구 조국광복회 사업을 잘 하였습니다. 이 사업을 전개하는데서는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신임장이 큰 은을 발휘하는 한편 주석님께서 파견하신 권영벽의 역할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순 자신이 견결하고 헌신적이면서도 창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순이 혁명대중과 함께 붉은기를 들며 5.1절시위를 전개한 것은 그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이를 ≪일제의 폭압이 절정에 치달아오르던 1937년 당시 수백 명의 집단이 백주에 붉은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부른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것이 반일반만시위라는 것을 일만군경들이 다같이 감촉하지 못했다는 것도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이것은 뛰어난 지략과 대담성을 가진 인물들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고안해낼 수 없는 큰 모험이었다.≫고 높이 평가하시었습니다. 이제순이 보천보전투 후 전투결과와 민중들의 여론을 수집, 보고한 것도 창발성 있는 사업이라고 평가하시었습니다. 담력과 사색, 이 두 가지 요소가 결합하여 이제순은 위대한 주석님께서 두고두고 평가하신 창발적인 사업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따라배워야 할 중요한 사업경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순은 이처럼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순이 한 가장 큰 일 중의 하나는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 바로 박달을 소개한 것입니다. 예로부터 인재는 천거한 공을 더 알아준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유유상종이라고 그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이제순을 좋게 보시었기에 이제순이 책임있게 천거한 박달도 좋게 보시었습니다. 특히 박달은 이제순이 있는 압록강이북의 장백현이 아니라 압록강이남의 갑산땅에서 살고 있다는 점과 갑산공작위원회라는 자생적이지만 견실한 혁명대오를 자체적으로 조직해두고 있다는 점을 참고하시었습니다. 그럼 이 점이 왜 중요하나요? 역시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운동의 일원화를 이루어내기 위해서입니다. 그 일원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내에서 이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지도핵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물론 이 사업이 중요하고 절박하다고 해도 조건만 보고 아무나 덥석 선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박달을 직접 만나보시려고 결심하시었습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친서를 품고 박달에게 주석님의 뜻을 전달한 인물이 바로 권영벽입니다. 권영벽은 이제순, 박달과 뗄래야 뗄 수 없이 연관된 인물입니다. 권영벽에 대하여는 다음 시간에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박달은 권영벽을 통해 위대한 주석님의 친서를 받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 안그렇겠습니까. 당시 박달은 눈시울을 붉히며 즉시 장군님을 만나뵙게 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과거 유치장에 있을 때 구한 유격대기사쪼박이를 정성스럽게 내보이면서... 위대한 주석님의 친서도 그냥 넘어갈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는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무장을 들고 만주광야에서 일만군경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동무들과 손을 굳게 잡고 모든 힘을 합쳐서 일제를 반대하며 조국을 광복시키는 투쟁을 진행할 것을 충심으로부터 권합니다.≫는 문장의 내용은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운동의 일원화에 대한 사상과 전략이 그대로 담고있는 것입니다.

박달이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을 만나뵙기 위해서는 압록강을 넘어야 합니다. 당시의 살벌한 정세로 인하여 비합법적인 도강은 거의나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도강을 하기 위해서는 합법적인 도강증이 필요하였습니다. 박달은 궁리끝에 알고지내던 주재소 김순사를 찾아가서 장백땅에 ≪비적≫(유격대)들이 출몰하는 바람에 백성들이 이사하느라고 곡식을 마구 처분하는 통에 그 값이 매우 싸다고 값싼 콩을 사줄 테니 도강증을 떼 달라고 한 것입니다. 값싼 콩을 사준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진 순사들이 도강증을 떼 주며 자기네들의 메주콩도 실어다달라고 한 것은 물론입니다. 이렇게 기지를 발휘하며 박달은 합법적으로 무사히 압록강을 건널 수 있었으며 이제순을 통해 백두산밀영으로도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혁명운동, 지하투쟁은 고도의 창발성을 요구하는 사업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박달의 지혜는 오늘 우리에게도 많은 점을 시사해준다고 할 것입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박달을 만나보시고 이내 만족하시었습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박달의 솔직성과 소탈한 품성, 혁명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인상적으로 회고하시었습니다. 그러시면서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박달에 대하여 ≪외형상으로 수더분하게 보이는 이 박달이야말로 속대가 바로선 사람이었고 허식이나 겉치레를 모르는 솔직하고 소탈하고 성실한 인간이었다. 요새 사람들의 표현대로 한다면 그는 정녕 심장에 남는 사람이었다.≫고 높이 평가하시었습니다. 그리고 박달이 합법적 가능성을 최대한의 이용하면서 갑산공작위원회를 조직하고 운영한데 대하여 주목하시며 평가하시었습니다. 박달의 합법적인 방법과 비합법적인 방법을 배합할 줄 아는 면모야말로 위대한 주석님의 뜻을 받들어 국내지하투쟁을 전개하는데서 꼭 필요한 자질이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뒤에 박달에게 망명객식 사업방법을 청산하여야 한다며 합법적 가능성을 더욱 적극적으로 이용할 데 대하여 가르치시었습니다. 그럼 망명객식 사업방법이 무엇인가요? 그리고 이를 오늘에 적용하면 무엇인가요? 이는 숙제로 남겨두겠습니다. 또 하나, 위대한 주석님의 지도를 받은 박달이 갑산공작위원회의 경험을 살려 독특하게 구현한 당조직건설방법이 무엇인가요? 그리고 이를 오늘에 적용하면 무엇인가요? 역시 이도 숙제로 남겨두겠습니다.

한편 박달에게는 심중한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일반적인 특징인데, 바로 교조주의입니다. 이 교조주의는 특히 당건설과 통일전선사업에서 심각하게 나타났습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박달이 가지고 있는 교조주의적 한계를 차근차근 깨우쳐주시었습니다. 박달이 당건설과 통일전선사업에서 교조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은 곧 조선혁명의 노선을 터득하는 과정이고 주체를 확립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달은 위대한 주석님께서 밝혀주신 자주적인 당창건방침과 민족통일전선전략에 대하여 크게 깨우치고 감격해 하였습니다. 왜 안그렇겠습니까. 위대한 주석님의 자주적인 당창건방침과 민족통일전선전략이야말로 항일무장투쟁과 함께 조선혁명의 3대 노선으로서 항일혁명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비결이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친히 ≪국내에 당조직을 확대할 데 대한 문제를 비롯하여 조선인민혁명군원호문제, 적통치기관침투문제, 국내혁명가들의 신변보호문제, 앞으로의 연락방법과 연락장소, 암호, 연락원 문제 등 많은 문제들≫에 대하여 논의해 주시고 그 방도에 대하여 가르쳐주시었습니다. 박달도 이제순처럼 백두산밀영을 찾아 대단한 교양을 받은 셈입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박달이 조선혁명의 노선에 대하여 깊이 이해하게 되자 준비가 되었다고 보시고 국내당공작위원회를 조직하시었습니다. 국내당공작위원회는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을 위원장으로 하고 당시 참모장이었던 김평과 국내전권대표인 박달을 위원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강조하건대, 국내당공작위원회의 위원장은 박달이 아니라 바로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이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매우 중시하여야 합니다. 국내당공작위원회의 위원장이 바로 김일성주석님이시라는 점은 오늘 많은 점을 시사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럼 국내당공작위원회는 어디에 소속되어 어디의 지도를 받게 되나요? 바로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입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국내당공작위원회 위원장이시면서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 위원장이신 것입니다. 역시 이 점도 오늘 커다란 진리를 깨우쳐주는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결국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와 국내당공작위원회는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을 정점으로 완전히 통일되어 있는 것입니다.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운동의 일원화는 바로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와 국내당공작위원회의 일원화, 곧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을 통일적인 구심으로 하며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학습하고 크게 터득하여야 할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감히 강조하건대, 이 점을 진실로 깊이 터득한다면 회고록학습의 절반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항일혁명전략의 진수가 담겨있으며 오늘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통일혁명전략의 핵심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박달은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제안을 따라 갑산공작위원회를 조국광복회의 산하로 두고 그 명칭을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전환하였으며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그 강령으로 채택하였습니다. 갑산공작위원회를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한 것은 조국광복회운동사에서 특별한 의의를 가집니다. 조선민족해방동맹은 조국광복회조직을 국내깊이에로 확대시키는 하나의 발진기지로 되었습니다. 조선민족해방동맹은 갑산지방을 비롯한 현재의 양강도일대는 말할 것도 없고 멀리 성진, 길주, 단천, 흥원을 비롯한 동해안 일대의 주요지역들에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이제순이 그 커다란 장백현을 맡아 혁명화하는데서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면 박달은 함경남북도를 혁명화하는데서 결정적 역할을 한 것입니다. 최근 미군정이 보관하던 일제의 요시찰자료가 공개되어 텔레비젼뉴스에까지 방영되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함경도의 요시찰대상수가 웬만한 도의 3-4배가 넘는 것입니다. 이는 함경도의 인구수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을 감안해볼 때 대단한 수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로 ≪갑산, 혜산사건≫이 일제시대 가장 큰 지하조직사건이었습니다. 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직접 영도를 받는 국내혁명조직의 역량과 성과를 반영하는 한 징표라고 할 것입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박달의 공로를 다음과 같이 단적으로 말씀하시며 높이 평가하시었습니다.

몸은 포승에 묶였어도 태연자약한 박달   ≪참으로 박달은 조선인민혁명군이 백두산으로 나온 이후시기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의 일원화를 맨 처음으로 실현한 국내혁명가의 당당한 대표자였으며 우리를 위하여 일도 제일 많이 하고 고생도 많이 겪은 우리의 국내전권대표였다. 박달과 같은 이런 투사들의 덕으로 우리는 해방 직후 그처럼 복잡한 정세속에서도 단시일안에 당을 창건하고 부강한 자주독립국가를 일떠세울 수 있었다.≫(불굴의 투사 박달)

아마 공산주의자, 혁명가에게 이 이상의 평가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갑산의 한 평범하고 촌부나 다름없던 투사 박달이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높은 신임과 배려속에서 이처럼 커다란 업적을 남긴 것은 정말로 커다란 행운, 커다란 영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동지들도 자신을 공산주의자, 주체주의자로 여긴다면, 오늘의 박달, 오늘의 이제순이 되기 위하여 부단히 사상을 단련하고 조직사업과 대중투쟁에 전심전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박달과 이제순, 이제순과 박달은 권영벽과 함께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 친솔하시었으며 항일무장투쟁의 최고봉이자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보천보전투를 성과적으로 전개하는데서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보천보전투는 물론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주체혁명무력이 주도역량이었지만 국내와 장백지구의 혁명역량이라는 방조역량이 없었다면 결코 쉽지않았을 것입니다. 항일혁명투쟁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보천보전투와 뗄 수 없는 연관을 가지며 영생하는 권영벽, 이제순, 박달은,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행복하고 영광넘치는 항일투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오늘의 보천보전투는 무엇이고, 그 투쟁의 주도역량과 방조역량은 무엇인가요? 역시 숙제로 하겠습니다.

보천보전투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일제침략자들은 피눈이 되어 백두산주변의 혁명조직들을 찾았으며 그 과정에서 일부 변절자들의 밀고에 의하여 조국광복회장백지구조직과 조선민족해방동맹의 지도핵심들이 대거 구속되는 ≪혜산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권영벽, 이제순과 같은 주체형의 충신이자 견결한 공산주의혁명가들이 신념과 의지를 지키는 한편 조직과 동지를 구원하기 위하여 불굴의 투쟁을 전개하였음은 물론입니다. 다행히도 박달은 이 위기를 피할 수 있었는데, 그 때 박달에게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지시와 대책을 전달해준 분이 바로 백두여장군 김정숙동지입니다. 김정숙동지를 통해 위대한 주석님의 변함없는 신임과 현명한 방책을 전달받은 박달은 조직을 살리기 위한 투쟁을 잘 했으며, 안타깝게 구속된 이후에는 옥중투쟁도 역시 잘했습니다. 박달은 허리가 부러지는 고문에도 결코 굴하지않는 완강한 투쟁으로 많은 동지와 조직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박달을 회고하시면서 ≪불굴의 투사≫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박달을 두고 ≪박달은 원쑤와의 싸움에서 날개를 잃었지만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혁명을 위해 굴함없이 싸운 투사이다.≫라고 높이 평가하시었습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1960년 4월 박달이 세상을 떠나자 그 집에서 조선노동당중앙위 정치국회의를 여시며 그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할 데 대하여 결정하시었습니다. 사택에서 국장을 결정하는 당중앙위 정치국회가 열린 일은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항일의 여성영웅 김정숙동지 동상   ≪혜산사건≫의 후과를 극복하기 위하여 가장 고생한 분이 바로 김정숙동지입니다. 김정숙동지는 압록강연안의 신파, 도천리에 정치공작원으로 파견되어 조선민족해방동맹과 같은 새로운 국내혁명조직을 건설하고 조선혁명의 최후승리를 위한 국내혁명거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용감하고 영활한 지하공작을 전개하였습니다. 당시 신파와 도천리는 함남도 서부 및 남부 지역과 국내의 내륙지대로 조선인민혁명군의 조직망을 펼치기 위한 통로였습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김정숙동지의 혁명적이고 민중적인 사업방법에 대하여 ≪김정숙은 지나가는 길에 잠깐 들렀던 집에서도 그냥 앉았다가 일어서는 법이 없이 나무도 패주고 물도 길어주고 방아도 찧어주었다. 마을사람들을 위해 바치는 김정숙의 정성은 참으로 돌위에 꽃이라도 피울 수 있으리만큼 지극하였다. 이 과정에 노인들이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도천리 혁명화의 돌파구는 이렇게 열리었다.≫고 회상하시었습니다. 김정숙동지는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내걸고 위대한 주석님의 혁명사상을 정력적으로 선전하면서 소리소문없이 수많은 지도핵심들을 육성하였으며 신파와 도천리를 혁명화하였습니다. 나아가 부전, 장진, 신흥, 흥남 일대와 갑산, 북청, 덕성, 단천 일대의 혁명화사업에서도 커다란 역할을 하였습니다.

김정숙동지는 적구의 혁명화사업만이 아니라 지도핵심들을 유격대에 참군시키는 사업이나 유격대를 원호하는 사업, 유격대활동에 필요한 군사정보수집 사업 등도 적극 전개하였습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김정숙동지의 놀라운 사업수완과 뛰어난 보위능력의 비결은 ≪그로 하여금 어려운 적구공작임무를 성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한 중요한 비결은 바로 책임성이었으며 군중속에 깊이 뿌리를 박은 것이었다. 그가 적구지하공작에서 발휘한 놀라운 창발성도 결국 이런 책임감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고 회상하시었습니다. 혁명에 대한 책임감과 군중속에 깊이 뿌리를 박는 것, 오늘 우리 청년주체주의자들이 꼭 명심하여야 할 귀중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장백진출의 길에서 조국광복회 선전사업을 하시는 김정숙동지

백두여장군이며 불요불굴의 여성투사인 김정숙동지가 구속되자 일제군경은 500명의 양민보증서를 석방조건으로 내걸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당시의 엄혹한 조건에서 불가능한 요구사항이었습니다. 그러나 절대불가능하다고 여긴 그 요구사항이 실현된 것입니다. 김정숙동지를 석방하라는 500명의 양민보증서, 이것이 뜻하는 바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민중속에 깊이 뿌리를 박은 김정숙동지의 혁명성과 민중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이에 대하여 ≪그 뭇사람들로 하여금 양민보증서에 서슴없이 도장을 누르게 할 수 있은 것은 김정숙에 대한 인민들의 다함없는 사랑이었고 지지였다. 달리 말하여 강권이나 금권보다도 더 위력한 인민의 절대적 신뢰와 지지가 그런 기적을 낳게 한 것이다.라고 뜻깊게 회상하시었습니다. 신파를 혁명화하는데서 김정숙동지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신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훗날 ≪신파≫의 지명을 ≪김정숙≫으로 새롭게 명명해 주시었습니다.

김정부박인진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 백두산에서 조국광복회사업을 지도하시는데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두 인물이 있는데, 바로 김정부와 박인진입니다. 김정부는 애국지주의 대표적인 인물이고 박인진은 민족종교천도교의 한 핵심인물입니다. 김정부와 박인진은 모두 위대한 주석님을 만나뵙고 그 민족단결의 경륜과 숭고한 풍모에 감복하여 조국광복회사업에 적극 떨쳐나선 애국자들입니다. 조국광복회는 이제순, 박달과 같은 공산주의자만의 조직이 아니라 이런 민족적이고 애국적인 인사들을 포괄하였던 통일전선조직인 것입니다. 혁명군대와 노동자, 농민속에 뿌리박은 공산주의자들 외에도 이처럼 애국적인 지주와 종교인들까지도 포섭한 여기에, 위대한 주석님의 넓으신 도량이 있는 것이고 민족통일전선의 경륜이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김정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조선인민혁명군을 원호하는 사업에 다 투여하였으며, 박인진도 자기 휘하의 천도교인들을 조선광복회에 망라시키며 혁명군을 원호하고 나아가 혁명군에 참군하는 운동을 적극 벌이었습니다. 그럼 오늘 김정부와 박인진과 같은 애국적인 자본가(지주)와 종교인은 누가 있을까요? 역시 숙제인데, 다른 숙제보다는 좀 쉬울 것입니다.

조국광복회는 ≪3.1월간≫이라는 기관지를 발간하였는데, 이 기관지가 조국광복회사업을 전개하는데서나 인민혁명군대열을 강화하는데서 커다란 은을 발휘하였습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3·1월간≫은 ≪2천만의 총동원으로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려는 조국광복회의 이념달성에 이바지하는 것을 기본사명으로 담은 대중정치이론잡지≫였다고 규정하시면서, ≪붓대포≫라는 비유를 드시며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하시었습니다. ≪3.1월간≫의 주필은 잘 알다시피 ≪대통영감≫ 이동백이었습니다. ≪3.1월간≫을 대대적으로 찍어이동백내는 고급 등사기는 박달이 조직선을 통해 일본에서 구해온 것이었습니다. 그럼 이 기회에 항일혁명시기에 발간된 주체형의 출판물들의 제목과 주필들을 한번 확인해보도록 하지요. 항일혁명초기 청년공산주의자들의 기관지와 그 주필은? 오가자에서 창간된 농민동맹의 기관지와 그 주필은? 위대한 주석님의 노작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를 게재한 조선인민혁명군의 대내주간정치신문과 그 주필은? 군정학습에 역할이 컸던 조선인민혁명군의 대내주간신문과 그 주필은? 대내의 반일청년동맹기관지와 그 주필은? 이 정도는 입에서 줄줄 나와야 합니다. 각각 ≪볼세위크≫와 김혁, ≪농우≫와 최일천, ≪서광≫과 김영국, ≪종소리≫와 최경화, ≪철혈≫과 강위룡입니다. 이 중에서도 특히 ≪3.1월간≫과 ≪서광≫은 중요하니 꼭 기억해두기 바랍니다.

한편 5권을 학습하면서 눈에 띄는 제목이 하나 있는데, 바로 맨처음에 나오는 ≪왕가대장을 치고 만순을 끌다≫입니다. 왕가대장과 만순은 각각 무송지방을 군림하고 있는 두 군사세력의 대표들로서, 왕가부대는 위만경찰 ≪토벌대≫(적)였고 만순부대는 반일산림부대(동맹자)였습니다. 두 부대의 성격을 고려한 끝에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왕가대장과는 서로 상대방을 치지 않고 적당히 지내며 만순대장과는 공동전선을 형성하기로 작정≫하시었습니다. 왕가대장과는 불가침협약을 맺고 만순대장과는 공동전선을 편 것입니다. 불가침협약과 공동전선, 이 위대한 주석님의 가르침을 깊이 깨우치면 오늘의 정세를 꿰뚫을 수 있는 주요개념을 터득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와 관련한 개념은 무엇이고 이를 통해 파악하는 정세의 핵심은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숙제로 남겨주겠습니다. 한편 왕가대장은 위대한 주석님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차던지었기에 결국 유격대의 공격을 받아 절명하고 말았으며, 반면 만순은 우사령이나 오의성처럼 위대한 주석님과의 공동전선을 끝까지 지키었습니다.

자, 그럼 오늘 강의를 결속하면서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 조선인민혁명군의 잠행조례를 발표하시면서 하신 말씀과 백두여장군 김정숙동지와 관련한 가르침을 인용하겠습니다. 민중을 믿고 민중에 의거하면 백전백승한다는 이민위천의 사상이야말로 주체사상의 진리이고 오늘 우리 주체주의자들이 명심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음시간에 뵙겠습니다.

≪인민의 지지를 떠난 군대가 결코 강군으로 될 수 없으며 싸움에서 승자로 될 수 없다는 것은 항일혁명의 전 기간 우리가 뼈에 사무치게 체험한 진리이다. 우리는 항일무장투쟁의 나날에 ≪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는 것처럼 유격대가 인민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시종일관하게 주장해왔다. 그것을 한마디로 압축한 구호가 바로 ≪옹군애민≫이었다. ≪옹군애민≫이란 인민은 군대를 옹호하고 군대는 인민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 . .

나의 체험에 의하면 군민일치나 관병일치는 규정과 원칙만 가지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상감정의 일치성이다. 그것이 이루어지자면 군대와 인민, 지휘관과 병사, 상급과 하급 사이에 서로 아끼고 위해주는 인간적인 정이 동시에 통해야 한다. 마음속으로 서로 사랑하고 친근하고 귀중하게 여기는 인간적인 정이야말로 사상을 공고하게 결합시켜주는 강력한 접착제로 된다.≫

≪나는 이따금 이런 질문을 던져보곤 한다. 어떻게 되어 김정숙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후원속에서 어려운 지하공작을 해낼 수 있었을까?

만일 김정숙이 인민에게 참다운 사랑을 바치지 않았더라면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인민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민을 위해 자기를 깡그리 바치지 않는 사람은 위기일발의 순간에 인민의 진정한 도움을 받을 수가 없다. 김정숙은 인민에게 사랑을 바친 것만큼 자기가 그처럼 아끼고 품어준 인민들로부터 응당한 보답을 받은 것이다. 그러고 보면 500명의 인장이 찍힌 양민보증서는 그가 인민의 참된 충복임을 증명하는 영원한 증서라고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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