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9월 1일(일)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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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과 양과 질

통일여명 편집위원 강인규

 

먼저,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이행의 법칙이다.

객관세계의 사물현상들이 변화발전하는 형태를 밝혀주는 유물변증법의 기본법칙.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이행의 법칙은 사물현상의 양적 측면과 질적 측면의 상호연관, 양적 변화와 질적 변화 사이의 내적이며 필연적인 연관을 반영한다. 이 법칙은 사물현상들의 변화발전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어떻게 사물현상들이 한 질적 상태로부터 다른 질적 상태로 전환되는가를 보여준다. 이 법칙은 헤겔에 의하여 처음 관념론적 기초 위에서 밝혀졌다. 그후 유물변증법이 창시됨으로써 이 법칙은 사유의 법칙으로서 뿐 아니라 자연과 사회의 현실적 과정에 작용하는 보편적인 객관적 법칙으로 정식화되고 그 내용이 과학적으로 해명되었다.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이행의 법칙에 의하면 사물현상의 한 질적 상태로부터 다른 질적 상태로의 이행 즉 질적 변화는 서서한 양적 변화가 해당 사물현상에 고유한 일정한 크기 한정량에 이르게 될 때 비약적으로 이루어지며 이렇게 이루어진 새로운 질적 상태는 새로운 양적 변화를 거쳐 보다 높은 질적 상태로 이행한다는 것을 밝혀준다. 모든 사물현상들의 변화, 발전은 양적 변화로부터 질적 변화로 이행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양적 변화와 질적 변화는 사물현상들의 변화, 발전의 필수적인 두 단계로서 불가분리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양적 변화는 점차적이며 연속적인 특성을 띠며 질적 변화는 상대적으로 급격하고 불연속적인 특성을 띤다. 서서한 양적 변화의 점차적 축적에 토대하여서만 질적 변화가 가능하며 질적 변화는 새로운 양적 변화의 가능성을 조건짓는다. 사물현상들은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로, 질적 변화가 다시 양적 변화로 이행하면서 끊임없이 변화발전한다.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이행의 법칙을 이해하는 데에서 중요한 범주들은 질, 양, 한정량 등이다. 을 통하여 사물현상들의 상대적 공고성, 사물현상들 사이의 차이성과 동일성 등이 표현된다. 질은 속성들 특히는 본질적 속성들의 총체를 통하여 나타난다. 물질구조의 각이한 수준과 종류들(미시알갱이, 원자, 분자, 생물과 그것들의 각이한 종류들), 물질운동의 여러가지 형태들(역학적 운동, 물리적 운동, 화학적 운동, 생물학적 운동, 사회적 운동 형태들), 물질의 안정된 상태들(각이한 취합상태, 동소체적 상태 등), 같은 대상의 각이한 발전단계들(예컨대 사회발전의 각이한 단계들)은 다 질적 규정성이 서로 다른 대상들이다. 질적 변화는 대상의 내적 구조와 그에 상응하는 운동과 그 합법칙성들의 근본적인 변화로서 사물현상들의 변화발전에서 결정적인 형태이다.

사물현상들의 여러가지 속성들의 변화 정도를 반영하며 양적 변화는 대상의 구조와 운동, 상태 등을 특징짓는 다양한 속성, 특성, 징표들(예컨대 대상을 이루는 구성요소들의 수효, 그것들의 시공간적 배열, 상호결합의 크기, 질량, 부피, 압력, 온도, 색깔, 굳기, 농도, 속도, 빛 기타)의 변화이다. 한정량사물현상의 질적 측면과 양적 측면, 질적 변화와 양적 변화의 유기적인 연관을 반영한다. 한정량은 사물현상의 질이 보존되는 조건에서의 속성들의 양적 변화구간인 동시에 사물현상의 한 질적 상태와 다른 질적 상태를 갈라놓는 양적 변화의 크기이다. 매개 사물현상이 다른 것과 질적으로 구별되고 바로 그 사물현상으로 되는 것은 자기의 고유한 한정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리학에서 대다수의 상수들은 한정량을 나타내고 있다.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이행의 법칙은 자연과 사회의 모든 사물현상들의 변화발전에서 작용하는 보편적 법칙이지만 다른 보편적 법칙들과 마찬가지로 그 발현에서는 자연과 사회에서 일련의 차이를 가진다. 자연에서는 이 법칙이 무의식적으로, 자연발생적으로 작용하며 양적 변화나 질적 변화의 속도는 과정을 둘러싼 외적 조건에 크게 의존한다. 자연계 특히 무생물계에서는 한정량을 정확히 규정하거나 질과 양의 상호의존성을 수학적 관계로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

사회생활과 사람들의 인식과정에서는 자연에서와는 달리 이 법칙의 작용이 .사람들의 주동적인 활동을 전제로 하며 활동에서 능동성, 목적의식성이 증대될수록 양적 변화나 질적 변화가 촉진될 수 있다. 사회생활에서 질적 변화의 전형적인 실태의 하나는 진보적 사회제도에 의한 낡은 사회제도의 근본적 교체과정, 사회혁명을 들 수 있다. 사회혁명은 실행한 사회제도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적 발전의 전과정을 통하여 준비되며 특히는 혁명역량이 낡은 세력을 타도할 수 있을 만큼 그 힘이 성장할 때만 실현될 수 있다. 사회적 현상들의 경우에는 그 복잡성과 특수성으로 하여 양적 변화를 수학적 형식으로 나타내거나 한정량을 정확히 규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여기서도 발전은 양적 변화가 질적변화로, 질적 변화가 양적 변화로 이행함으로써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이행법칙은 인식과 실천활동에서 매우 중요한 방법론적 의의를 가진다.≫(주체철학사전)

다음, 양적 축적의 질적 변화로의 이행의 법칙에 대한 일화다. 회고록에는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 양적 축적의 질적 변화로의 이행의 법칙을 직접적으로 언명하신 유명한 일화가 나온다. 반≪민생단≫투쟁을 극좌적으로 전개한 민족배타주의자들, 종파사대주의자들과의 사상투쟁과정에서의 일화이다.

≪다 알다시피 어떤 물질이든지 본래의 구성요소와 다른 요소가 80-90% 이상을 차지하게 되면 그 물질은 다른 물질로 변하게 된다. 이것은 과학이다.

동만에 사는 조선사람의 70%가 ≪민생단≫이라는 것은 노인들과 아녀자들을 제외한 조선족 청장년들 전부가 ≪민생단≫이라는 말과 같은데 그렇다면 동만에서는 ≪민생단≫이 혁명을 하고 있으며 ≪민생단≫이 자기 상전을 반대하는 혈전을 벌이고 있단 말인가? . . .

조선혁명가들의 80-90%는 고사하고 그 십분의 일인 8-9%만 ≪민생단≫이라고 하여도 우리는 이 자리에서 마음놓고 회의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회의장 주변에서는 지금 조선사람들로 편성된 1중대가 완전무장을 하고 우리들에 대한 경위임무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는 몇 해째 적들이 소멸하지 못해 애를 쓰는 동만지방의 이름난 혁명가들과 지도핵심들이 다 모여 있다. 당신들의 주장이 옳다고 한다면 1중대 성원들도 거의나 ≪민생단≫이겠는데 그들이 좋은 총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를 습격하여 일망타진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않는가?≫(다홍왜에서의 논쟁, 세기와 더불어 4권)

다음, 양이다. 양의 개념을 풍부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대목을 몇개만 발췌한다.

≪나는 어머니의 뒤받침으로 공부를 해야 하였는데 우리 어머니는 병약한 몸이었다. 어머니는 겨울이나 여름이나 하루종일 쉬지 않고 삯빨래와 삯바느질로 품을 팔아서 한 달3원 정도씩 나에게 보내주었다. 그 돈으로 월사금과 공책, 교과서을 대고나면 신 한 켤레 사신기가 힘든 형편이었다.≫(선진사상의 탐구, 세기와 더불어 1권)

당조직을 내올 때의 인상 가운데서 잊혀지지 않는 것은 김원우가 회의장을 꾸리면서 연탁앞에 붉은를 세우느라고 애쓰던 일이다. 그 깃발의 붉은 색조는 혁명을 위해서 마지막 피 한 방울이 다할 때까지 싸우려는 우리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해주었다.≫(첫 당조직 - 건설동지사, 세기와 더불어 2권)

≪주변에서 반일부대병사들이 수천 수만 명 와글와글할 때에는 일본군과 싸움을 해도 당장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들이 다 달아나고 없는데다가 우리 대오마저 18명밖에 남지 않고 보니 그저 막연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왕청에 갔대야 총 여라문 자루밖에 없으니 그걸 가지고 무슨 일을 치르겠는가.≫(나자구등판에서, 세기와 더불어 2권)

≪그것이 바로 수시로 변화되는 전투상황에 맞게 중대 상호간의 협동을 원만히 조직하자면 그를 총괄할 만한 지휘, 참모기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 그렇게 하자면 지휘체계를 단일화해야 한다는 교훈이었다.≫(조선인민혁명군, 세기와 더불어 3권)

김금순   ≪김금순은 9살을 살고 영생을 얻은 소녀였다. 9살이며 꽁다리연필처럼 짤막한 생애이다. 그러나 번개와 섬광과도 같이 번뜩거리다가 사라진 이 어린 나이에 그는 인생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정신적 높이에 도달하였으며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산 모범으로 똑똑히 가르쳐주었다. 세상에는 100살을 살 때까지 민족앞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가버린 사람들이 수두룩하지만 그는 9살에 후대들의 추억속에 영생할 위훈의 창조자가 되었다.≫(영생의 꽃, 세기와 더불어 4권)

≪나는 어머니의 풍랑 세찬 일생이 몇 장의 지전으로 압축된 것 같은 감을 느끼며 그 돈을 소중히 받아 안았다. 20원,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호신부와 같은 것이었다. 그 돈을 품고 있으면 배고프지도 안하고 춥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가 항상 내곁에 계시면서 몸과 넋으로 나를 지켜주는 것 같았다.≫(20원, 세기와 더불어 4권)

≪보천보전투는 대포도 비행기도 탱크도 없이 진행한 자그마한 싸움이었다. 보총과 기관총에 선동연설이 배합된 평범한 습격전투였다. 사상자도 많지 않았다. 우리측으로 볼 때에도 전사자는 없었다.≫(보천보의 불길(2), 세기와 더불어 6권)

≪나는 후위에 있는 지휘관을 시켜 총을 한 방 쏘게 하였다. 그 총소리가 울린 다음부터 행군속도는 곱절 빨라졌다. 걸으면서 조는 사람도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소탕하에서 실현한 대로행군전술을 우리는 훗날 조국에 나와서 베개봉을 떠나 무산지구로 진출할 때에도 적용하였다. 그 전술을 리전술이라고 한다.≫(소탕하에서의 일행천리, 세기와 더불어 6권)

≪그런데 몽강현 남패자로부터 장백현 북대정자에 이르는 행군은 행군기간으로 보나 그 간고성으로 보나 종래의 행군들과는 대비도 할 수 없는 간고한 행군이었습니다. 행군기간이 100여 일이나 되기 때문에 이 행군은 ≪100일행군≫이라고도 불리우고 있습니다. 기간을 보면 사실 110여 일이나 되는 행군이었습니다.≫(고난의 행군, 세기와 더불어 7권)

≪1940년 상반년에 활발히 진행된 소부대분산활동의 시험적인 단계를 거쳐 소할바령회의 이후부터는 모든 빨치산부대들이 대부대활동으로부터 소부대활동으로 이행하였습니다.≫(소할바령에서, 세기와 더불어 8권)

≪1942년 7월에 우리는 쏘련, 중국의 동지들과 함께 국제연합군을 편성하고 조선혁명의 주체적 역량을 백방으로 강화해 나가면서 국제반제역량과의 공동투쟁을 통하여 일제의 격멸과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에 기여하였습니다.≫(국제연합군을 편성하여, 세기와 더불어 8권)

≪한때 민족주의운동은 공산주의운동과 함께 우리 나라 민족해방투쟁에서 2대 구성부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조선민족해방투쟁은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40년대 전반기에도 민족주의는 여전히 하나의 사조로 남아있었고 민족주의운동세력도 미약하나마 하나의 반일애국역량으로 존재하였습니다. 개량주의세력을 제외한 다수의 민족운동자들은 의연히 반일의 기치를 들고 국내와 해외에서 일본제국주의자들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민족운동세력은 국내인민들과 해외교포들속에서 일정한 영향력도 가지고 있었습니다.≫(반일애국역량과의 단합을 위하여, 세기와 더불어 8권)

다음, 질이다. 질의 개념을 풍부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대목을 몇개만 발췌한다.

≪아버지는 1919년 7월 청수동회의에서 무산혁명의 역사적 필연성을 논증한 데 기초하여 8월 중국 관전현 홍통구에서 조선국민회 각 구역장들과 연락원들, 독립운동단체책임자들의 회의를 소집하고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을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운동에로 방향전환할 데 대한 방침을 정식으로 선포하였으며 시대의 변화에 보조를 맞추어 민족자력으로 일본제국주의를 타승하고 무산민중의 권익을 보장하는 새 사회를 건설할 데 대한 과업을 제기하였다.≫(독립만세의 메아리, 세기와 더불어 1권)

김형직선생님께서 물려주신 권총≪그러나 나를 비탄의 눈물속에서 일으켜 세워준 것은 아버지의 남다른 그 유산이었다. ≪지원≫, 3대각오, 동지획득, 두 자루의 권총…≫(유산, 세기와 더불어 1권)

≪그러므로 민족의 이익을 진정으로 옹호하는 참다운 민족주의와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사상적 도구로서의 부르조아민족주의는 항상 구별해보아야 한다. 이것을 동일시하게되면 혁명실천상에서 엄중한 과오를 범하게 된다.≫(차광수가 찾은 길, 세기와 더불어 1권)

≪자주성을 요구하는 피압박인민들의 혁명적 진출은 1930년대에 들어와서도 세계적 규모에서 더욱더 확대되었다. 지구상에서 제국주의자들을 반대하는 피압박인민들의 해방투쟁이 가장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던 대륙이 아세아였다.≫(카륜회의, 세기와 더불어 2권)

≪나는 그때 국민부가 내온 조선혁명군의 명칭을 그대로 이용하여 우리 군의 이름을 조선혁명군으로 해야 한다고 그들을 설복하였다.≫(조선혁명군, 세기와 더불어 2권)

≪나는 그때 혁명의 퇴조기를 운운하는 최동화의 모습을 통하여 전 세대 공산주의자들우리와의 근본적 차이를 느끼었다. 그들과 우리와의 모든 차이는 결국 인민대중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데서부터 산생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같은 이상과 목적을 추구하면서도 우리와 그들이 서로 힘을 합치지 못하고 남남처럼 지낸 것을 바로 그 차이때문이었다.≫(무장에는 무장으로, 세기와 더불어 2권)

조선인민혁명군은 경우에 따라서 동북인민혁명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도 활동하였다. . . .

그들은 동만과 남만에서 활동하는 우리의 항일무장력을 그 명칭은 어떻든 ≪김일성군≫으로 통칭하여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조선인민혁명군, 세기와 더불어 3권)

≪그 다음부터 잘 사는 지주와 가난한 농사꾼에 대한 이야기는 두만강연안 농촌부락들에서 하나의 화젯거리가 되어 돌아갔다. 그 소문을 들은 인민들은 한결같이 지주를 몹쓸 놈이라고 욕하였고 농사꾼을 인정머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하였다.≫(부자와 가난뱅이, 세기와 더불어 3권)

≪그가 사랑한 사람들은 어떤 형의 인물들이었던가? 솔직한 사람, 단순한 사람, 근면한 사람, 대담한 사람, 성실한 사람, 통이 큰 사람, 뒤소리를 하지 않는 사람, 필요한 결심을 내릴 줄 아는 사람…그는 이런 사람들을 사랑하였다.

그가 제일 싫어한 것은 아첨쟁이, 비겁쟁이, 건달뱅이, 수다쟁이였다. 그는 주머니를 12개씩이나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꺼풀을 12개씩이나 쓰고 사는 사람들을 항상 경계하였다.≫(백전노장 최현, 세기와 더불어 4권)

마동희   ≪마동희와는 대조적으로 장증열은 곤장맛을 몇 대 보기 바쁘게 인차 자기가 아는 밀영들과 지하조직들을 다 불었다. 마동희는 혀를 끊으면서도 혁명가의 절개를 지켰는데 장증열은 어찌하여 혁명앞에 다진 맹세를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저주스러운 배신의 길을 택하였는가.≫(≪혜산사건≫을 겪으면서, 세기와 더불어 6권)

국제연합군의 편성으로 하여 우리의 무장투쟁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국제연합군편성을 분기점으로 하여 우리는 중국인민과의 공동투쟁단계로부터 조, 중, 쏘 세 나라 무장력의 연합을 내용으로 하는 폭넓은 공동투쟁단계에로, 세계 반제, 반파쑈 투쟁의 거창한 흐름에 합류하는 새로운 공동전선단계에로 넘어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국제연합군을 편성하여, 세기와 더불어 8권)

≪그 후 우리는 국내에서의 당조직건설과 대중단체건설 정형 그리고 비밀무장조직들의 활동정형을 요해한데 기초하여 조국해방의 3대노선을 내놓았습니다. 조국해방의 3대노선이라는 것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총공격과 그에 배합한 전인민적 봉기, 배후연합작전으로 조국광복의 역사적 위업을 이룩할 데 대한 노선입니다.≫(전민항쟁의 불길은 온 강토에, 세기와 더불어 8권)

다음, 양적 변화이다. 양적 변화와 질적 변화는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므로 양적 변화와 관련한 내용만 엄격히 분리시키기는 곤란하다. 더욱이 양적 변화와 질적 변화는 조건에 따라 상호전화하기도 한다. 아래 발체문들은 주로 양적 변화와 관련한 부분으로 보면 될 것이다.

≪특히 식민지에 대한 문제가 언급된 대목은 열번스무번 곱씹어읽었다. . . .

우리는 새 사조에 대한 이야기와 쏘련에 대한 이야기를 제일 많이 하였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 날에는 학생들이 저마다 착취와 압박이 없는 새 세계를 눈앞에 그리며 좀처럼 자리를 뜨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왕조복귀나 자본주의나 민족개조를 주장하는 이론보다 그런 이야기들이 훨씬 더 재미난다고 하였다. 그날 그날을 되는대로 보내던 학생들속에서는 점차 새것에 대한 동경심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학교에 나가서는 레닌에 대한 이야기나 10월혁명에 대한 이야기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학교당국이 그것을 금지시키고 있었다.

내 마음속에서는 점차 화성의숙에 대한 기대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환멸, 세기와 더불어 1권)

≪나는 길림에서 3년 남짓한 세월을 보냈다. 내 일생에서 길림은 참으로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긴 고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길림에서 나는 과학적 학설로서의 맑스-레닌주의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그 학설의 도움으로 조선의 독립과 인민의 행복을 위한 실천적 진리를 더 깊이 깨닫게 되었다. . . .

길림시절에 나의 세계관이 확립되고 드팀없는 것으로 굳어졌으며 그것이 내 한 생의 사상정신적 양식으로 되었다.

길림에서의 축적과 체험그 후 나로 하여금 자주적인 혁명사상의 골격을 세울 수 있게 하였다.

학습은 혁명가가 자신을 수양하기 위해 반드시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기초적 공정이며 사회의 진보와 변혁에 이바지할 밑천을 마련하는데서 단 하루도 중단해서는 안되는 필수적 정신노동이다. 선진사상의 탐구과정을 통하여 길림시절에 터득한 교훈으로부터 나는 오늘도 혁명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학습은 첫째가는 임무라고 강조하고 있다.≫(선진사상의 탐구, 세기와 더불어 1권)

≪1928년 10월 26일 새벽 선전대는 날이 새기 전에 길림의 거리들에 삐라를 뿌리고 격문을 붙이었다. 2-3명으로 무어진 소년회의 감시조들도 날이 밝자 지정된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날 아침 각 학교의 학생들은 약속된 시간에 일제히 교정에서 모임을 가지고 길회선철도부설을 반대하는 성토문을 발표한 다음 가두시위에 들어갔다. 거리는 삽시간에 수천 명의 학생들로 차고넘치었다. 그들은 ≪일제침략자들을 타도하자!≫, ≪일제의 길회선철도부설공사를 반대하여 투쟁하자!≫는 조선글로된 플랭카드와 ≪타도 일제≫, ≪타도 매국노≫, ≪회수길회선≫이라고 중국글로 쓴 플랭카드들을 들고 거리를 누비면서 신개문밖에 있는 성의회마당으로 모여들었다. . . .

모임을 끝낸 군중은 더욱 기세충천하여 일본영사관이 자리잡고 있은 신시가쪽으로 행진해갔다. 평시에는 영사관경찰의 행패가 심해서 좀처럼 발길을 돌리지 않던 곳이었다. 일본영사관앞에서 반일구호를 힘있게 부르며 기세를 올린 시위군중은 대마로, 북경로, 중경로, 상의가 등 길림의 여러 거리를 뒤덮으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 . .

길림에서 시작된 반일투쟁은 만주전지역에 번져갔다. . . .

시위가 점점 더 큰 규모로 확대되었을 때 우리는 일본상품배척투쟁을 힘있게 밀고나갔다. 군중은 일본인상점들에서 일본상표가 붙은 상품들을 거리에 끌어내다가 모조리 불태워버리었다. 어떤 상품들은 송화강에 무데기로 쓸어넣었다.

길회선철도부설을 반대하는 투쟁이 일본상품배척투쟁과 결합되어 전면적인 반일투쟁에로 점점 더 크게 번져가는데 당황한 일제는 반동군벌을 사촉하여 시위군중에게 총을 마구 쏘아대는 야수적 만행을 감행하게 하였다.

그때까지 우리는 반동군벌들을 견제하는 입장에 서있었다. 그러나 군벌당국이 일제의 편을 들어 우리를 탄압해나서는 만큼 우리도 그들을 견제하는 입장에만 서있을 수 없었다. 우리는 ≪일제와 결탁한 반동군벌타도≫의 구호를 듣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장례식과 결합된 보다 대규모적인 시위로 넘어갔다. 이 날의 시위는 많은 시민들까지 합세하여 최대의 규모를 이루었다.

투쟁은 무려 40여일동안이나 계속되었다.≫(단결의 시위, 세기와 더불어 1권)

≪우리가 카륜에서 이처럼 조선혁명의 진로를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길림시절에 이미 청년학생운동을 하는 과정을 통하여 조선혁명에 대한 주체적 입장과 태도를 확립하고 공산주의운동의 새 길을 개척해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투쟁의 나날에 심어지고 옥중에서 무르익힌 그 사상과 입장을 ≪조선혁명의 진로≫라는 이름으로 발표하였을 뿐이다. . . .

이 사상은 그 후 항일혁명투쟁을 비롯한 여러 단계의 혁명을 거쳐 어렵고 복잡한 실천투쟁속에서 부단히 발전풍부화되어 오늘과 같이 사상과 이론, 방법의 전일적인 체계를 갖춘 하나의 철학사상으로 되었다. 해방 후 우리가 주체를 세울 데 대하여 특별히 강조한 것은 전후시기 사회주의기초건설을 할 때였다. . . .

주체를 세울 데 대해서는 그 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하였다.≫(카륜회의, 세기와 더불어 2권)

≪나는 종파와 인연이 없는 새 세대 공산주의자들을 골간으로 기층당조직을 먼저 내오고 그것을 확대강화하는 방법으로 당을 창건하는 것이 우리앞에 주어진 가장 적합하고 현실적인 창당방법이라고 간주하였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당을 창건하면 국제당에서도 환영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나는 지금까지 우리가 키워온 새 세대 청년공산주의자들로 당조직을 먼저 내오고 그 역할을 부단히 높여나가면서 우리의 발길이 미치는 모든 곳에서 기층당조직을 확대강화해나간다면 공산주의운동과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지도도 능히 보장하고 우리에게 지워진 국제적 임무도 원만히 이행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 . .

우리의 투쟁도 초기보다도 비할 바 없이 전진하였다. 활동범위는 길림을 벗어나 멀리 동만과 북부조선 일대에까지 확대되었다. 청년학생운동에 머물러 있던 우리의 혁명투쟁은 지하활동의 양상을 띠고 광범한 노동자, 농민 대중속으로 줄을 뻗치었다. 경험이 축적되고 군사정치적 준비가 성숙되면 상비적인 혁명군대를 조직해가지고 대부대역량으로 본격적인 유격전쟁을 해야겠는데 공청이 그 영도를 다 감당할 수는 없었다. 지난날 공청이 여러 대중단체들을 지도한 것은 과도적인 현상이었지 영구적인 것은 아니었다. . . .

초기공산주의자들이 저마다 자기 파를 정통파로 자처하면서 승인을 받으러 다녔기 때문에 국제당에서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국제당은 조선에서 종파가 청산되기 전에는 진정한 노동계급의 전위대가 나올 수 없으며 종파를 근절하고 새로운 당을 창건하기 위해서는 파쟁도 모르고 집권욕도 없는 새 세대가 나서야 한다는 것을 점차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리의 투쟁에 주의를 돌리었으며 우리와 손잡아보려고 여러 방면으로 줄을 놓았다.

우리는 여러 해 동안의 혁명활동과정을 통하여 새 형의 혁명적 당조직을 내올 수 있는 초석도 쌓아놓았다. ≪ㅌ·ㄷ≫의 결성은 조선공산주의운동에서 종전의 당과 구별되는 새 형의 혁명적 당창건을 위한 출발점으로 되었다. 모든 것이 ≪ㅌ·ㄷ≫로부터 시작되었다. ≪ㅌ·ㄷ≫가 발전하여 반제청년동맹으로 되고 공청으로 되었다.

공청이 키워낸 우리 혁명의 핵심부대, 반제청년동맹이 이루어놓은 우리 혁명의 대중적 지반이 곧 당창건의 기초로 되었다. . . .

첫 당조직 건설동지사는 우리 당의 태아였고 씨앗이었으며 당의 기층조직들을 내오고 확대하는데서 모체적 의의를 가지는 조직이었다. 첫 당조직을 가지게 된 때로부터 우리 혁명은 종파의 물을 먹지 않은 백지장 같이 깨끗하고 참신한 새세대 공산주의자들의 영도를 받으며 승승장구해왔다. 자주적인 당 건설을 위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은 이때로부터 항일대전의 도도한 흐름을 타고 줄기차게 진척되어왔다.

그 후 우리는 건설동지사 성원들을 각지에 파견하여 두만강연안의 북부조선일대와 만주의 여러 지역에 당조직들을 내왔다.

국내에 당조직을 내오는 일은 내가 맡아하였다. 나는 1930년 가을에 우리의 영향이 비교적 강하게 미치고 있던 함경북도 온성군에 나가 국내 당조직을 무었다. 우리의 청소한 당조직들은 인민대중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면서 언제나 그들의 선두에서 항일전쟁의 진군로를 헤쳤으며 그 과정을 통하여 강철의 전위대오로 단련되고 군중의 절대적인 사랑과 신임을 받는 불패의 역량으로 자라났다. . . .

반일인민유격대가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된 후 우리는 유격대 안에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를 내왔다. 그것은 카륜에서 조직된 첫 당조직의 확대발전으로 이루어진 결실이었다. 우리의 자주적인 당조직은 그 후 조국광복회 국내조직인 조선민족해방동맹과 농조, 노조들에도 뿌리를 뻗치었다.

우리가 조국에 개선한 후 한 달도 못되는 사이에 당창건의 위업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항일혁명의 장구한 나날 당건설위업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과정에서 이룩한 성과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첫 당조직 - 건설동지사, 세기와 더불어 1권)

≪카륜회의에서 중요한 과업의 하나로 내세운 당조직건설사업은 첫 당조직, 건설동지사의 결성으로 제일보를 내디뎠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우리앞에는 무장투쟁준비를 다그쳐야할 어려운 과제가 남아있었다. 우리는 무장투쟁준비를 위한 첫 사업으로 고유수에서 조선혁명군을 결성하였다. 우리가 1년이나 2년이 지난 후에 상비적인 혁명무력을 창건할 것을 예견하면서도 조선혁명군과 같은 과도적인 정치 및 반군사조직을 내온 것은 그 군의 활동을 통하여 대규모의 유격부대를 꾸리기 위한 준비를 해두자는데 목적이 있었다.

우리는 조선혁명군의 정치군사활동을 통하여 무장투쟁의 대중적 지반을 축성하고 무장투쟁을 전개하는데 필요한 경험을 축적하려고 하였다.≫(조선혁명군, 세기와 더불어 2권)

≪강철도 산화되면 변하는 법이다. 인간은 강철도 아니거니와 그 강철보다 약하고 변이성이 많은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강철보다 훨씬 더 억세다고 말할 수 있다. 강철은 자기힘으로 산화과정을 막을 수 없지만 인간은 자기의 사상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스스로 통제하고 조정할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동요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동요를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데 있는 것이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조절할 줄 아는 고유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때문이며 혁명가를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역경을 순경으로 만들 줄 아는 강의하고 창조적이고 희생적인 인간들이기 때문이다.≫(나자구등판에서, 세기와 더불어 2권)

이순희   ≪이순희와 같은 열녀를 배출한 것은 의심할 바 없이 그의 정치적 생명에 빛을 주고 날개를 달아 준 공청조직의 공로라고 말할 수 있다. 조직이라는 존재가 없고 조직적 단련이라는 성장과정이 없었더라면 과연 이순희와 같이 앳된 처녀가 교형리들앞에서 그처럼 용감해질 수 있으며 그처럼 도도한 긍지와 자부를 안고 최후의 순간을 떳떳하게 장식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기에 나는 지금도 조직은 영웅을 낳는 집이며 대학이라고 말한다. 조직생활을 통해 단련된 1명의 공청원이나 사로청원은 100명, 1,000명의 적도 타승할 수 있는 큰 힘을 가진다. 우리 인민이 일당백의 인민으로 되는 것은 그들이 모두 조직생활을 통해 단련된 인민이기 때문이며 우리 인민군대가 일당백, 일당천의 군대로 되는 것은 그들이 다같이 조직이라고 불리우는 용광로에서 자신들을 정치사상적으로, 군사기술적으로 철저히 연마해가는 군대이기 때문이다.≫(공청의 산아들, 세기와 더불어 4권)

≪나는 그에게 눈덩어리 두 개를 주면서 그걸 합쳐보라고 이르고 나 자신은 작은 눈덩이를 눈위에 굴려 그 두 개의 눈덩이를 합친 것만한 눈덩이를 만들었다.

≪자 보십시오. 선생은 두 정당연합으로 한 덩이를 만들었고 나는 작은 구심력을 굴려 그보다 더 큰 덩이를 빚었습니다. 이래도 꼭 정당이 있어야만 통일전선체조직이 가능하다고 하겠습니까?≫ . . .

나는 길림시절부터 우리가 시종일관하게 고수해 온 통일전선정책과 각계각층의 반일애국역량을 결속시키는데서 새 세대의 청년공산주의자들이 축적해 놓은 경험을 구체적으로 말해 주었다.

≪통일전선이란 반드시 정당단체들의 연합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정당단체설을 절대화하게 되면 그것은 곧 교조가 됩니다. 군중이 있고 영도핵심만 있으면 능히 통일전선체를 내올 수 있습니다. 목적과 지향의 동일성을 기준으로 하여 열 사람이건 백 사람이건 묶어 세워야 한다는 것이 통일전선에 대한 나의 견해입니다. 우리는 이런 입장을 가지고 오래 전부터 통일전선운동을 추진시켜 왔습니다.≫≫(조국광복회, 세기와 더불어 4권)

≪레닌은 신문 ≪이스크라≫를 발간하면서 그 첫 호≪한 점의 불꽃에서 불길이 타오르라≫는 글발을 제사로 실었는데 이것은 전세계가 공명하는 금언으로 되었다. 이 제사속에 나오는 불꽃은 그 후 10월의 불길이 되어 러시아의 대지에 타번지었다.≫(≪3.1월간≫, 세기와 더불어 5권)

≪이 회의를 통해 표현된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지향은 조선에 나가서 총소리를 크게 내자는 것이었다. 바꾸어 말한다면 활동판도를 국내깊이에로 확대하여 조선혁명을 앙양시키자는 것이었다. 1930년대 전반기까지의 우리의 주되는 활동판도는 만주지방이었다. 항일유격대창건을 전후로 하여 국내에도 여러 번 드나들었지만 그것은 제한된 활동이었다. 1930년대 전반기의 우리의 활동은 주로 힘을 축적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었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의 무장대오는 여러 개의 사단을 이룰만치 장성하였다. 이 힘을 가지고 국내에 나가면 못해낼 일이 없었다. 백두산에 틀고앉아서 낭림산에도 1개사단, 관모봉에도 1개사단, 태백산에도 1개사단, 지리산에도 1개사단 하는 식으로 사방에다 무장부대들을 파견해서 근거지를 건설하고 적들을 연거퍼 답새기면 조선반도를 죽가마처럼 끓게 할 수 있었으며 2천 300만 조선민족을 전민항쟁의 마당으로 모조리 불러낼 수 있었다.≫(보천보의 불길(1), 세기와 더불어 6권)

≪초년고생은 금을 주고도 못산다는 속담도 있지만 태병열이 이처럼 온갖 풍상고초를 다 이겨낸 태병열혁명가로 성장할 수 있은 것은 어린시절에 잡은 총대의 덕분이었다. 사람이 어려서부터 무장투쟁을 하게 되면 쇠소리가 나는 혁명가가 된다. 그리고 물불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철같은 인간이 된다.

반년사이에 소년대원들은 구대원들 못지 않은 전투원들로 성장하였다. 그들의 발전은 실로 놀랄만한 것이었다. . . .

나는 소년중대를 조직한 후부터 사람의 생리적 연령과 정신적 연령을 완전히 갈라보기 시작했다. 그 두 연령가운데서 내가 기본으로 본 것은 정신적 연령이었다. 청소년기의 정신적 연령은 한 해에 두 살, 세 살, 지어는 다섯 살씩 늘어날 수도 있다.

총을 멘 소년중대원   청소년교양은 나라의 운명을 개척하는데서 또 하나의 천하지대본이다. 소년중대의 경험이 보여주고 있는바와 같이 혁명의 계승자, 후비군의 준비는 이를수록 좋고 잘할수록 좋다.≫(총을 쥔 소년들, 세기와 더불어 6권)

≪김주현이 남기고 간 빈 배낭을 부둥켜안으니 솟구치는 눈물을 걷잡을 수 없었다. 그가 후방부관을 하던 시절부터 우리 혁명군을 위해 공작해들인 쌀과 군복천, 신발을 전부 쌓으면 아마 산더미를 이룰 것이다. 그는 신발만 해도 수천 켤레나 구해 들었다. 그러나 김주현은 자기 배낭에 있던 예비신발 한 켤레마저 대원들에게 주었다.≫(김주현, 세기와 더불어 6권)

사람의 사상의식과 지적능력은 학습을 통해서 부단히 높여야 합니다. . . .

우리 혁명군대오안에서도 부분적인 현상이긴 하지만 동요분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형편에서 우리가 대원들에 대한 사상교양이나 군사교육에 힘을 넣지 않는다면 주체적 혁명역량을 강화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우리 혁명의 자주노선을 끝까지 배심있게 밀고나갈 수 없었습니다. 국제당의 간판을 달고 나도는 이러저러한 노선이 일으키고 있는 혼란도 큰 문제거리였습니다.

그 당시 국제당에 앉아 있던 좌경모험주의자들은 실정에 맞지도 않는 열하원정노선을 내리먹이어 조중 두 나라 혁명에 막대한 피해를 끼치었습니다. . . .

이로부터 우리는 우선 인민혁명군 지휘관들과 대원들에게 조선혁명의 자주노선에 관한 지식부터 똑바로 심어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라는 논문을 쓰고 그것을 교재로 하여 집중적인 정치학습을 조직했던 이유의 하나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마당거우밀영, 세기와 더불어 7권)

강돈≪강돈의 영웅적 생애는 학습을 성실하게 하는 사람이 혁명실천에서도 모범을 발휘하게 되고 조국과 인민의 기억속에 영생하는 위훈의 창조자가 된다는 진리를 말해줍니다. 내가 알고 있은 빨치산영웅들은 예외없이 일상생활에서 학습을 중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학습을 게을리한 사람들속에서는 후대들앞에 모범으로 내세울만한 영웅들이 배출되지 않았습니다. 정신적 양식을 풍족하게 마련하고 있은 사람들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간에 반드시 혁명을 위해 큰 위훈을 세우기 마련입니다. 인민무력부간부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수복영웅도 학창시절에 공부를 착실하게 했다고 합니다.

나는 학습을 잘하지 않는 사람들이 신념이 강한 것을 보지 못했고 신념이 강하지 못한 사람이 혁명적 의리에 충실한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사람은 학습을 많이 해야 신념도 강해지고 혁명을 하려는 열정도 높아집니다.

김정일동무가 사람은 아는 것만큼 보고 듣고 느끼고 받아들인다고 한 말은 아주 의미심장한 명언입니다.≫(마당거우밀영, 세기와 더불어 7권)

고생끝에 이루어진 상봉일수록 그 열도는 더 큰 것 같습니다. 동지가 얼마나 귀중한가를 알려면 서로 헤어져 있어도 보아야 합니다. 피를 나눈 동지들이 서로 이별도 하고 상봉도 하는 과정에 동지애는 더 공고해지고 열렬해지는 법입니다. 이런 동지애는 어떤 풍파가 닥쳐와도 쉽사리 깨지지 않습니다.

고난의 행군은 부대의 이동을 위한 단순한 행군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옹근 하나의 전역과 맞먹는 규모가 큰 군사작전이었습니다. 항일무장투쟁의 축도였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행군과정에 우리는 군인으로서 겪을 수 있는 고통도 다 겪었고 인간으로서 체험하게 되는 온갖 시련도 다 맛보았습니다.

우리는 고난의 행군을 통하여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한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조국의 아들, 인민의 아들들이며 자기 민족과 민족해방위업에 가장 충실한 혁명투사들임을 다시한번 온 세상에 보여주었습니다. 항일유격대원들은 고난의 행군을 하면서 자신들의 인격을 높은 경지에서 연마하였습니다.≫(고난의 행군, 세기와 더불어 7권)

≪전반적인 정세는 일제의 멸망이 확정적이고 시간문제이며 우리 인민이 조국광복의 역사적 위업을 성취할 날이 가까워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나는 지난 10년간의 항일무장투쟁행정에서 이룩한 성과와 경험들을 총화하고 급변하는 정세에 대처하여 조국광복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하여 역량보존축적을 잘할 데 대한 새로운 노선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소할바령에서, 세기와 더불어 8권)

≪유격전의 특성은 조성된 군사, 정치 정세와 환경에 따라 임기응변하는데 있습니다. 소부대활동은 대부대활동이 위주였던 1930년대 후반기에도 중시되어 왔으며 필요에 따라 적용하였습니다.

1940년 상반년에 활발히 진행된 소부대분산활동의 시험적인 단계를 거쳐 소할바령회의 이후부터는 모든 빨치산 부대들이 대부대활동으로부터 소부대활동으로 이행하였습니다.≫(소할바령에서, 세기와 더불어 8권)

≪내가 산에서 여러 해 동안 입고 다니던 솜외투도 실은 김정숙이 지어준 것이었습니다. 그가 어디서 총알이 명주솜을 뚫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습니다. 그런 말을 들은 다음부터 그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명주솜을 모아두었다가 나에게 솜외투를 해주었습니다. 여러 날을 두고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한뜸두뜸 정성스럽게 바느질을 해서 만들어낸 외투가 내몸에 꼭 맞는 것을 보자 그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하였습니다. . . .

나는 뜨개옷을 볼 때마다 김정숙을 생각하군 합니다. 그가 나를 위해 뜨개질을 많이 했습니다. 작식일을 하느라면 일손도 딸리고 시간도 바쁘겠는데 시간을 어떻게 짜내고 털실을 어데서 구해오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하여튼 짬만 생기면 책을 읽든가 뜨개질을 하였습니다.

산에서 털실을 구한다는게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때는 바늘 한 쌈을 얻자고 해도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김정숙은 적들과 싸우느라고 사철 밖에서 자고 먹고 행군하는 나를 걱정하여 솜외투도 지어주고 배띠개도 만들어주고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한 해도 빠짐없이 털양말을 떠주었습니다.≫(타향에서 봄을 맞으며, 세기와 더불어 8권)

먼저 낙하산을 접는 법부터 익히었습니다.

이 공정이 끝나면 50미터쯤 되는 낙하탑에 올라가 펼쳐진 낙하산을 타고 내리는 연습을 하였습니다. 50미터구간을 내리면서 바람방향에 따라 몸을 한번 돌리는 동작을 하는데 여기에 익숙되면 비행기를 타고 낙하할 자격을 얻게 됩니다. 10-20명 정도로 1개 승조를 무었습니다. 처음에는 1,000미터 높이에서 훈련하였고 나중에는 600미터 높이로 낮추었습니다. 보통 800미터 상공에서 낙하명령을 내리군 하였습니다. . . .

최용진   많이 뛰어내린 대원들에게는 새파란 기념마크를 주었는데 우리 지대에서는 최용진이 최고기록을 내어 기념마크를 받았습니다.

나도 여러 번 낙하산훈련에 참가하였습니다.≫(해방의 날을 그리며, 세기와 더불어 8권)

≪담화도중에 쥬다노브는 불쑥 나에게 조선사람들이 나라가 해방된 후 몇 해 동안이면 독립국가건설을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은가고 물었습니다.

나는 늦어도 2-3년간이면 해낼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쥬다노브는 그 대답을 듣자 두 손을 마주 비비면서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전혀 뜻밖이라는 듯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 . .

나는 우리 인민이 장기간의 항일무장투쟁과 민족해방투쟁을 전개하면서 정치적으로 크게 각성되고 단련되었다는 것과 그 과정에 자체의 힘으로 국가건설을 해나갈 수 있는 견실한 지도핵심과 광범한 애국역량이 준비되었고 풍부한 투쟁경험과 무궁무진한 창조력, 능숙한 조직력과 강력한 동원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역설하였습니다.≫(최후결전의 날에, 세기와 더불어 8권)

다음, 질적 변화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질적 변화는 조건에 따라 양적 변화로 전화한다는 점에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아래 발췌문들은 주로 질적 변화와 관련한 부분이다.

≪우리는 준비기간을 거친 다음 당시 중국의 국경절인 쌍십절(10월10일)에 조직을 내오기 위한 예비회의를 열고 조직의 명칭과 성격, 투쟁강령, 활동규범들에 대한 토의를 하였으며 한 주일 후인 1926년 10월 17일에는 김시우네 집에서 정식으로 조직을 무었다. . . .

그 모임에서 나는 우리가 뭇는 조직을 타도제국주의동맹으로, 약칭으로는 ≪ㅌ·ㄷ≫라고 할 것을 제의하였다. . . .

그 회의에서 최창걸이 나를 타도제국주의동맹 책임자로 추천하였다.≫(타도제국주의동맹, 세기와 더불어 1권)

≪혁명적 세계관은 사람들이 자기의 계급적 처지와 이해관계를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착취계급을 증오하고 자기 계급의 이해관계를 옹호하는 사상을 가지며 나아가서는 새 사회를 건설하려는 각오를 가지고 혁명의 길에 나서게 되었을 때 형성된다고 볼 수 있다.

나도 맑스-레닌주의고전을 비롯한 혁명적인 책들을 보고 계급적 처지를 인식하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사회현상을 보고 불평등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착취계급과 착취사회를 증오하는 사상이 자라서 결국 세계를 개조하고 변혁해야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투쟁의 길에 나서게 되었다.≫(선진사상의 탐구, 세기와 더불어 1권)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좌절을 당했다고 모두가 가슴치며 통탄하고 있을 때 우리는 여기 카륜에서 조선혁명의 새 출발을 알리는 역사적인 고고지성을 울리었다. 이 여명이 종소리와 함께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새로운 궤도를 따라 매진할 것이다.

동무들, 즉각 무장을 잡고 일제와의 판갈이싸움에 떨쳐나서자!≫

우리는 그 연설을 듣고 모두 환성을 울리면서 ≪혁명가≫를 불렀다. 우리가 카륜에서 이처럼 조선혁명의 진로를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길림시절에 이미 청년학생운동을 하는 과정을 통하여 조선혁명에 대한 주체적 입장과 태도를 확립하고 공산주의운동의 새 길을 개척해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투쟁의 나날에 심어지고 옥중에서 무르익힌 그 사상과 입장을 ≪조선혁명의 진로≫라는 이름으로 발표하였을 뿐이다. . . .

이 사상은 그 후 항일혁명투쟁을 비롯한 여러 단계의 혁명을 거쳐 어렵고 복잡한 실천투쟁속에서 부단히 발전풍부화되어 오늘과 같이 사상과 이론, 방법의 전일적인 체계를 갖춘 하나의 철학사상으로 되었다. 해방 후 우리가 주체를 세울 데 대하여 특별히 강조한 것은 전후시기 사회주의기초건설을 할 때였다. . . .

주체를 세울 데 대해서는 그 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하였다. . . .

그 후 김정일비서가 그 사상을 전면적으로 체계화하여 ≪주체사상에 대하여≫라는 논문으로 세상에 발표하였다.≫(카륜회의, 세기와 더불어 2권)

≪지도사상, 영도핵심, 군중지반, 이것은 당조직을 내오는데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요소들을 다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1930년 7월 3일 카륜의 진명학교교실에서 차광수, 김혁, 최창걸, 계영춘, 김원우, 최효일 동무들로 첫 당조직을 무었다.≫(첫 당조직 - 건설동지사, 세기와 더불어 1권)

15년후 해방된 조국에서 당을 창건하고 어린 시절의 체취가 그대로 스며있는 고향집 온돌방에 멍석을 깔고 누웠을 때 나는 만가지 시름을 다 털어버리고 카륜에서 첫 당조직을 내오던 때의 일을 감회깊이 추억하였다.

첫 당조직 건설동지사는 우리 당의 태아였고 씨앗이었으며 당의 기층조직들을 내오고 확대하는데서 모체적 의의를 가지는 조직이었다. . . .

국내에 당조직을 내오는 일은 내가 맡아하였다. 나는 1930년 가을에 우리의 영향이 비교적 강하게 미치고 있던 함경북도 온성군에 나가 국내 당조직을 무었다. 우리의 청소한 당조직들은 인민대중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면서 언제나 그들의 선두에서 항일전쟁의 진군로를 헤쳤으며 그 과정을 통하여 강철의 전위대오로 단련되고 군중의 절대적인 사랑과 신임을 받는 불패의 역량으로 자라났다. . . .

반일인민유격대가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된 후 우리는 유격대 안에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를 내왔다. 그것은 카륜에서 조직된 첫 당조직의 확대발전으로 이루어진 결실이었다. 우리의 자주적인 당조직은 그 후 조국광복회 국내조직인 조선민족해방동맹과 농조, 노조들에도 뿌리를 뻗치었다.

우리가 조국에 개선한 후 한 달도 못되는 사이에 당창건의 위업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항일혁명의 장구한 나날 당건설위업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과정에서 이룩한 성과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첫 당조직 - 건설동지사, 세기와 더불어 1권)

1931년 겨울명월구회의는 항일무장투쟁의 시초를 열어놓은 회의이며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과 공산주의운동에서 새로운 전환을 가져온 역사적인 회의였다.

카륜회의에서 제시되었던 무장투쟁노선은 이 회의를 통하여 심화발전되었다. 카륜에서 반일민족해방운동을 그 최고단계인 무장투쟁에로 이행시키려는 조선민족의 의지가 확인되었다면 명월구에서는 그 의지가 거듭 확인되고 ≪무장에는 무장에로, 반혁명적 폭력에는 혁명적 폭력으로!≫라는 구호밑에 일제를 격멸하기 위한 항일전쟁이 정식으로 선포되었다.≫(무장에는 무장으로, 세기와 더불어 2권)

≪1931년 9월 18일밤 심양 북대영 서쪽 유조구에서 일본만철회사 소유의 철도가 폭파되었다. 일제는 장학량군이 철도를 폭파하고 일본수비대를 공격했다는 터무니없는 구실을 내걸고 불의의 침공을 개시하여 일거에 북대영을 점령하였으며 19일 아침에는 봉천비행장까지 차지하였다.≫(9.18사변, 세기와 더불어 2권)

1932년 4월 25일 아침.

우리는 토기점골 등판에서 반일인민유격대의 창건식을 가지었다.≫(새 무장력의 탄생, 세기와 더불어 2권)

≪격침 한 개란 사실 보잘 것 없는 것이다. 그것을 수리하는 시간이면 새 보총 10자루도 능히 노획해올 수 있다. 하지만 그 격침 한 개를 수리했을 때에 얻게 되는 교훈은 수소폭탄 한 개의 힘보다 더 큰 힘을 산생시키고 확산시킨다.≫(밀림속의 병기창, 세기와 더불어 2권)

≪우리는 1936년 2월 하순부터 근 한 일주일 동안 소자지하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를 일명 남호두회의라고도 부른다. . . .

남호두회의를 분기점으로 하여 조선혁명은 새로운 앙양기를 맞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남호두회의는 1930년대 전반기와 1930년대 후반기를 구획짓는 조선혁명의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다. 남호두회의에서 채택된 결정으로 하여 조선공산주의자들은 항일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전반적 조선혁명을 더욱 높은 단계에로 발전시킬 수 있는 새로운 이정표를 가지게 되었다.

남호두회의는 한마디로 말하여 조선공산주의운동과 반일민족해방투쟁 역사에서 처음으로 주체를 완전히 확립한 회의라고 할 수 있다. 이 회의에서 채택된 일련의 결정들은 그 이후 여러 단계의 혁명에서 조선의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주체적 입장을 튼튼히 견지하고 어떤 역경속에서나 그것을 민족을 첫째가는 생명으로 변함없이 틀어쥐고 나갈 수 있게 하였다.≫(경박호기슭에서, 세기와 더불어 4권)

≪우리는 그때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를 소집하고 나를 책임자로 하고 김평과 박달을 위원으로 하는 국내당공작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박달은 이 위원회의 현지집행인으로서 갑산지방을 비롯한 국내 여러 지역에서의 당조직건설사업을 주관할 임무를 지니었다.≫(국내당공작위원회, 세기와 더불어 5권)

보천보전투때 거리에 내붙였던 포고문   ≪보천보전투는 조선과 만주대륙에서 아세아의 제왕처럼 행세하던 일본제국주의자들을 보기 좋게 후려친 통쾌한 전투였다. . . .

바로 이무렵 쏘련에서 발간되는 잡지 ≪태평양≫에 ≪북부조선지역에서의 빨치산투쟁≫이라는 제목으로 된 글이 실렸는데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우리의 투쟁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히 언급하였다. 쏘련출판물에 우리의 이름과 투쟁소식이 크게 소개된 것이 이때부터였던 생각이 든다.≫(보천보의 불길(2), 세기와 더불어 6권)

≪1940년 상반년에 활발히 진행된 소부대분산활동의 시험적인 단계를 거쳐 소할바령회의 이후부터는 모든 빨치산 부대들이 대부대활동으로부터 소부대활동으로 이행하였습니다.≫(소할바령에서, 세기와 더불어 8권)

새로운 전략적 단계에로 넘어가자면 객관적인 정세변화 일면만 보고 거기에 피동적으로 따라가는 식으로 되어서는 안되며 언제나 주동에 서서 투쟁을 끌고 나가며 최후승리를 앞당길 수 있는 주체적 역량에 대한 타산과 지난 시기의 투쟁에 대한 분석이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우선 선행단계에서 규정한 전략적 과제가 해결되었는가를 따져보았습니다. 남호두회의에서 제시된 전략적 임무를 꼼꼼히 따져보았지만 미해결문제는 없었습니다. 당창건을 위한 조직사상적 기초축성, 반일민족통일전선의 결성과 확대발전, 국경지대에로의 진출, 무장투쟁을 국내에로 확대하는 문제… 어느 것이나 해결되었다고 총화할 수 있었습니다. . . .

이 모든 것은 새로운 전략적 단계의 파업을 능히 맡아 수행할 수 있는 주체적 핵심역량이 믿음직하게 준비되어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인민대중의 의식화, 조직화를 다그쳐 그들을 정치사상적으로 준비시키는 사업에서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 때 조국광복회산하 회원이 20여 만이나 되었습니다. . . .

소할바령회의는 10일부터 11일까지 이틀동안 하였습니다. 회의과정에 크게 논의된 문제는 앞으로의 전략적 단계를 혁명적 대사변의 시기로 규정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달리 말하여 다음단계에 들어가서 조국해방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한마디로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소할바령에서, 세기와 더불어 8권)

≪쏘련군이 베를린해방작전을 시작한 대로부터 얼마쯤 지나서 원동전선군사령부는 우리에게 독일의 패망과 관련된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국제연합군에 망라되어있던 쏘련군장병들은 그날 온밤 자지 않고 축하연을 벌이었습니다.≫(최후결전의 날에, 세기와 더불어 8권)

≪간백산밀영을 최후공격작전의 출발진지로 차지하고 있던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대오를 늘이면서 작전계획에 예견된대로 진격하였으며 두만강연안에 집결한 부대들은 일시에 적의 국경요새들을 돌파하고 경원, 경흥 일대를 해방하였으며 웅기방향으로 계속 전과를 확대하면서 국내의 넓은 지역을 해방하였습니다. . . .

이미 국내에 파견되어 활동하던 조선인민혁명군 소부대들과 정치공작원들은 인민무장대들과 무장봉기조직들, 광범한 인민들을 무장폭동에로 힘있게 조직동원하였습니다.≫(최후결전의 날에, 세기와 더불어 8권)

≪이렇게 우리 나라의 해방15성상이나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강력한 군사적 타격을 안겨 그것을 밑뿌리채 뒤흔들어놓은 조선인민혁명군과 각계각층을 망라한 전민항쟁역량의 총동원으로 이룩되었습니다. 우리 군대와 인민의 장기간에 걸치는 항전이 선행되었기에 쏘련의 대일작전은 그처럼 짧은 기간에 결속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최후결전의 날에, 세기와 더불어 8권)

망국 40년만에 조국을 찾고 이향 20년만에 고향을 찾았다면 우리는 그 조국과 고향을 위해 너무도 많은 세월을 바치지 않았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 .

해방된 조국땅에서 스무 해만에 맛보게 되는 만경대의 밤, 그 밤은 참으로 평화로운 밤이었습니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조국이 광복된지도 만 두 달, 그러나 3천만 조선민족은 그때까지도 해방의 열광속에 그냥 깊이 잠겨있었습니다.≫(개선, 세기와 더불어 8권)

다음, 한정량이다.

≪우리는 준비기간을 거친 다음 당시 중국의 국경절인 쌍십절(10월10일)에 조직을 내오기 위한 예비회의를 열고 조직의 명칭과 성격, 투쟁강령, 활동규범들에 대한 토의를 하였으며 한 주일 후인 1926년 10월 17일에는 김시우네 집에서 정식으로 조직을 무었다. . . .

그 모임에서 나는 우리가 뭇는 조직을 타도제국주의동맹으로, 약칭으로는 ≪ㅌ·ㄷ≫라고 할 것을 제의하였다.≫(타도제국주의동맹, 세기와 더불어 1권)

≪카륜회의가 정식으로 열린 것은 1930년 6월 30일 밤이었다.≫(카륜회의, 세기와 더불어 2권)

≪우리는 1931년 12월 중순경에 명월구에서 당 및 공청간부회의를 소집하였다. 우리가 편의상 ≪겨울명월구회의≫라고 부르는 회의였다.≫(무장에는 무장으로, 세기와 더불어 2권)

≪조선혁명가들의 80-90%는 고사하고 그 십분의 일인 8-9%만 ≪민생단≫이라고 하여도 우리는 이 자리에서 마음놓고 회의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회의장 주변에서는 지금 조선사람들로 편성된 1중대가 완전무장을 하고 우리들에 대한 경위임무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다홍왜에서의 논쟁, 세기와 더불어 4권)

≪우리는 1936년 2월 하순부터 근 한 일주일 동안 소자지하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를 일명 남호두회의라고도 부른다. . . .

남호두회의를 분기점으로 하여 조선혁명은 새로운 앙양기를 맞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남호두회의는 1930년대 전반기와 1930년대 후반기를 구획짓는 조선혁명의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다. 남호두회의에서 채택된 결정으로 하여 조선공산주의자들은 항일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전반적 조선혁명을 더욱 높은 단계에로 발전시킬 수 있는 새로운 이정표를 가지게 되었다.≫(경박호기슭에서, 세기와 더불어 4권)

추수투쟁대열의 선두에 서시어 선동하시는 김정숙동지

≪정동철은 그 길로 김정숙을 뒤따라가서 13도구 경찰서장에게 석방교섭을 들이댔다. 경찰서장은 500명분의 양민보증서를 작성해오면 김정숙을 ≪양민≫으로 인정하고 석방시키겠다고 약속하였다. ...

그 뭇사람들로 하여금 양민보증서에 서슴없이 도장을 누르게 할 수 있은 것은 김정숙에 대한 인민들의 다함없는 사랑이었고 지지였다.≫(양민보증서, 세기와 더불어 5권)

정각 10시, 나는 권총을 높이 쳐들고 방아쇠를 당기였다. 10여년세월 조국의 동포들에게 말하고싶었던 모든 사연들이 그 한방의 총성에 담겨 밤거리에 울려퍼졌다.≫(보천보의 불길(2), 세기와 더불어 6권)

≪담화도중에 쥬다노브는 불쑥 나에게 조선사람들이 나라가 해방된 후 몇 해 동안이면 독립국가건설을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은가고 물었습니다.

나는 늦어도 2-3년간이면 해낼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최후결전의 날에, 세기와 더불어 8권)

≪그처럼 오만하고 포악하고 검질긴 일본이라는 강적이 개전 1주일만에 손을 든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 . .

일본천황이 항복선언을 한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도 일본군은 저항을 계속하였습니다. 그것은 전후 조선의 공산주의화를 막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방해하기 위해 미일 두 제국주의가 인위적으로 조성한 음모의 산물이었습니다.≫(최후결전의 날에, 세기와 더불어 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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