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8월 30일(금)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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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과 전국적 관점

통일여명 편집위원 강인규

 

두루봉에서 있은 국내 첫 당조직 건설모임 때 정면에 내걸었던 깃발물론 항일혁명은 오늘처럼 북과 남으로 갈라져있는 조건에서의 혁명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에게 실천적으로 중요한 사상관점인 전국적 관점의 내용이 그대로 회고록에 담겨있을 리 없다. 그러나 ≪조선은 하나≫라는 전국적 관점이야말로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혁명사상의 핵심이고, 우리 혁명의 뿌리가 ≪한국혁명≫이 아니라 ≪조선혁명≫이라는 점, 당시와 오늘의 혁명역량이 각각 압록강과 38선으로 갈라져있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점 등을 주목한다면, 회고록이야말로 주체의 전국적 관점을 터득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교재라 할 수 있다.

먼저, 조선혁명의 관점이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좌절을 당했다고 모두가 가슴치며 통탄하고 있을 때 우리는 여기 카륜에서 조선혁명의 새 출발을 알리는 역사적인 고고지성을 울리었다. 이 여명이 종소리와 함께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새로운 궤도를 따라 매진할 것이다.

동무들, 즉각 무장을 잡고 일제와의 판갈이싸움에 떨쳐나서자!≫

우리는 그 연설을 듣고 모두 환성을 울리면서 ≪혁명가≫를 불렀다. 우리가 카륜에서 이처럼 조선혁명의 진로를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길림시절에 이미 청년학생운동을 하는 과정을 통하여 조선혁명에 대한 주체적 입장과 태도를 확립하고 공산주의운동의 새 길을 개척해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투쟁의 나날에 심어지고 옥중에서 무르익힌 그 사상과 입장을 ≪조선혁명의 진로≫라는 이름으로 발표하였을 뿐이다.

그것이 곧 우리 혁명의 노선으로 되고 지도사상으로 되었다. 우리가 그 논문에서 전개한 내용을 보면 모두가 주체사상을 핵으로 하였다고 할 수 있다.≫(카륜회의, 세기와 더불어 2권)

김책≪하지만 김책은 쏘련사람들앞에서나 중국사람들앞에서나 나를 조선혁명의 대표자로, 지도자로 내세웠습니다.

어떻게 되어 그가 자기보다 9살이나 아래인 나를 그처럼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내세웠겠습니까.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책이한테는 혁명을 하자면 영도중심이 있어야 하고 그 영도중심의 두리에 모두가 하나로 튼튼히 뭉쳐야 한다는 사상이 온몸에 꽉 차있었습니다. 영도중심에 대한 갈망과 그리움이 결국은 나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혁명가 김책, 세기와 더불어 8권)

≪우리 당사상사업에서 주체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다른 나라의 혁명도 아닌 바로 조선혁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조선혁명이야말로 우리 당사상사업의 주체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상사업을 반드시 조선혁명의 이익에 복종시켜야 합니다.≫(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 1955 12 28)

다음, 일국일당제원칙이다.

제3국제당 1차대회 상임위원회≪우리는 1국1당제원칙의 요구를 한 나라에서 둘 또는 그 이상의 공산당이 국제당에 가입할 수 없고 오직 하나의 공산당만이 가입할 수 있다는 것, 한 나라에는 한 개 이상의 공산당 중앙이 존재할 수 없고 하나의 공산당중앙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 원칙의 본질은 한 나라에 같은 이해관계와 목적을 가진 당중앙이 하나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첫당조직 - 건설동지사, 세기와 더불어 2권)

≪국제당의 지시에도 부합되고 조선혁명도 강력히 추진시킬 수 있는 그런 길이 과연 없단 말인가.

이런 모색 끝에 내가 찾아낸 출로가 바로 선행공산주의운동의 교훈으로부터 출발하여 조급하게 당중앙을 선포하는 방법으로가 아니라 당창건의 조직사상적 기초를 착실하게 다지고 그 토대 우에서 명실공히 우리 혁명의 참모부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당을 창건하자는 것이었다. 계급적으로 각성되고 준비된 조직적 골간의 육성과 대열의 사상의지적 통일, 당이 의거할 수 있는 군중적 지반의 구축이 없이 주관적 욕망만으로는 당을 창건할 수 없었다. . . .

우리는 이러한 사상을 정립하여 카륜회의에서 당창건방침을 제시하고 첫 당조직을 내오게 되었다.≫(첫당조직 - 건설동지사, 세기와 더불어 2권)

≪한때 어떤 사람들은 1국1당제원칙을 코에 걸고 조선사람이 조선혁명을 하는데 대해 시비하면서 우리 민족군의 독자성과 자주적 권리를 침해하고 유린하려고까지 하였다. 그 후 국제당은 조선사람이 조선혁명을 하는 것이 1국1당제원칙에 모순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항일연군에서 갈라져나와 독자적으로 활동하라는 조언을 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대로 남아있기로 하였다. 따로 세간을 내면 우리에 대한 중국인민의 지지가 약화될 수 있었고 우리의 활동도 불편해질 수 있었다. 연군을 민족별로 가르는데 대해서는 중국사람들도 바라지 않았다. 우리가 지금 유지하고 있는 연군체계는 공동의 적을 반대하여 싸우는 조중 두 나라 전우들간의 혈연적 유대의 산물로서 국제적인 반제공동행동의 모범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자주적 권리가 침해당하지 않고 또 중국사람들이 싫다고 하지 않는 한 우리는 앞으로도 이 체계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한다. 가능하다면 몽골민족군대나 쏘련군대와도 항일연군을 형성해가지고 싸우고 싶다.≫(불굴의 투사 박달, 세기와 더불어 5권)

조선노동당의 기본사명은 주체위업의 승리를 위하여 투쟁하는 것입니다. 주체위업은 주체사상의 기치밑에 개척되고 발전하는 인민대중의 위업이며 주체사상을 구현하여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성스러운 위업입니다. 우리는 당의 창건을 선포할 때 주체사상을 구현하여 사회의 민주주의적 개혁을 실시하고 우리 나라에 부강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당의 강령으로 내세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항일혁명투쟁 시기부터 목표로 내세웠던 투쟁강령이었습니다. 우리 당은 당의 강령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로 전당과 인민대중을 힘있게 조직동원하였으며 그 결과 공화국북반부에서 이미 우리 당의 첫 강령이 빛나게 실현되었습니다.

아직도 전국적 범위에서는 이 강령이 실현되지 못하였습니다. 주체위업을 실현하는데서 우리 당 앞에 나선 당면한 혁명임무는 공화국북반부에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이룩하고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것입니다.≫(김일성주석님, 조선노동당 건설의 역사적 경험)

김일성동지가 내놓은 통일적 중앙정부수립에 관한 방침은 모든 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들과 전체 인민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들의 지도자협의회는 남조선에서 강압적으로 실시된 단독선거의 무효를 선언한 다음 전조선적인 선거를 실시하며 이에 기초하여 최고인민회의를 창설하고 중앙정부를 세울 것을 결정하였다.

남북조선 전지역에서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는 1948년 8월 25일 온 민족의 비등한 열의와 감격 속에서 진행되었다.

북반부지역에서는 일반적, 평등적, 직접적 비밀투표에 의하여 선거가 진행되었는데 유권자의 99.97%가 참가하여 98.49%의 찬성투표로서 212명의 대의원을 선출하였다. . . .

미제와 국내반동들의 폭압에도 불구하고 남조선인민들은 높은 애국적 열의와 구국항쟁의 투지를 가지고 선거에 참가하였다. 그리하여 전체 유권자의 77.52%에 해당하는 673만 2,407명이 선거에 참가하여 1,080명의 대표를 선출하였다.

피선된 대표자들은 북반부지역인 해주에 들어와서 8월 21-26일 사이에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위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여기서 비밀투표에 의하여 남조선인구 5만명에 1명 비례로 360명의 최고인민회의대의원을 선거하였다. . . .

역사적인 남북총선거에 기초하여 1948년 9월 2일 평양에서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에는 남북조선에서 선거된 572명의 대의원들이 참가하였다.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하였다.

김일성동지는 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수상으로, 국가수반으로 추대되었으며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을 온 세상에 선포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정강≫을 발표하였다. .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북조선 전체 인민의 한결같은 지지를 받는 우리 나라의 유일한 합법적 국가주권으로서 항일혁명 투쟁의 영광스러운 전통을 이어받은 정권이며, 가장 민주주의적이고 애국적이며 자주적인 정권이며,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인민대중의 이익을 철저히 옹호하는 참다운 인민의 정권이다.≫(현대조선역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김일성동지는 이 엄중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남조선노동당을 북조선노동당에 합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김일성동지의 지도밑에 1949년 6월 30일 평양에서는 남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연합전원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서는 남북조선노동당을 통일된 하나의 당으로 합당하는 데 대한 중요한 문제가 토의되었다.

회의에서는 남북조선 노동당을 합당하고 조선노동당의 창건자이며 영도자인 김일성동지를 당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높이 추대하였으며 김일성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유일적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를 구성하였다.≫(현대조선역사)

≪대한민국≫이란 가증스런 식민지지배를 분장하기 위한 간판이고 그 정권은 미제침략군과 원조달러에 의해 부지·조종되는 신식민주의의 도구이며 매국배족의 괴뢰정권이다.≫(통일혁명당 강령)

≪참으로 ≪한국≫의 지나온 40년 역사는 민족 자활이 아니라 망국의 가속화과정이었고 독립이 아니라 예속의 확대재생산과정이었으며 국민복지가 아니라 사회적 재앙의 확산과정이었다. . . .

한국민중의 권익의 옹위자인 우리 ≪한국민족민주전선≫은 저주로운 망국노와 처지와 결별하고 민족 웅비와 새 기원을 마중하려는 겨레의 의지를 한 데 모아 하루빨리 참된 해방을 성취하기 위한 사명감으로부터 광복 40주년을 맞으며 이 선언을 발표한다.≫(한국민족자주선언)

다음, 첫 당조직과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 국내당공작위원회이다.

≪ㅌ·ㄷ≫의 결성은 조선공산주의운동에서 종전의 당과 구별되는 새 형의 혁명적 당창건을 위한 출발점으로 되었다. 모든 것이 ≪ㅌ·ㄷ≫로부터 시작되었다. ≪ㅌ·ㄷ≫가 발전하여 반제청년동맹으로 되고 공청으로 되었다.

공청이 키워낸 우리 혁명의 핵심부대, 반제청년동맹이 이루어놓은 우리 혁명의 대중적 지반이 곧 당창건의 기초로 되었다. . . .

카륜회의 결정에는 ≪ㅌ·ㄷ≫와 공청의 강령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의 길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원칙으로 삼아야 할 전략들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것은 새 형의 당을 창건하기 위한 사상적 기초로 되었으며 실패와 좌절의 진통속에서 오랫동안 갈 길을 찾아 암중모색하던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상 지침으로 되었다.

지도사상, 영도핵심, 군중지반, 이것은 당조직을 내오는데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요소들을 다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1930년 7월 3일 카륜의 진명학교교실에서 차광수, 김혁, 최창걸, 계영춘, 김원우, 최효일 동무들로 첫 당조직을 무었다. . . .

그 후 우리는 첫 당조직건설동지사라는 소박한 명칭을 붙이었다. . . .

15년 후 해방된 조국에서 을 창건하고 어린 시절의 체취가 그대로 스며있는 고향집 온돌방에 멍석을 깔고 누웠을 때 나는 만가지 시름을 다 털어버리고 카륜에서 첫 당조직을 내오던 때의 일을 감회깊이 추억하였다.

첫 당조직 건설동지사는 우리 당의 태아였고 씨앗이었으며 당의 기층조직들을 내오고 확대하는데서 모체적 의의를 가지는 조직이었다. 첫 당조직을 가지게 된 때로부터 우리 혁명은 종파의 물을 먹지 않은 백지장 같이 깨끗하고 참신한 새세대 공산주의자들의 영도를 받으며 승승장구해왔다. 자주적인 당 건설을 위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은 이때로부터 항일대전의 도도한 흐름을 타고 줄기차게 진척되어왔다. . . .

국내에 당조직을 내오는 일은 내가 맡아하였다. 나는 1930년 가을에 우리의 영향이 비교적 강하게 미치고 있던 함경북도 온성군에 나가 국내 당조직을 무었다. . . .

반일인민유격대가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된 후 우리는 유격대 안에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를 내왔다. 그것은 카륜에서 조직된 첫 당조직의 확대발전으로 이루어진 결실이었다. 우리의 자주적인 당조직은 그 후 조국광복회 국내조직인 조선민족해방동맹과 농조, 노조들에도 뿌리를 뻗치었다.

우리가 조국에 개선한 후 한 달도 못되는 사이에 당창건의 위업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항일혁명의 장구한 나날 당건설위업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과정에서 이룩한 성과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첫 당조직 - 건설동지사, 세기와 더불어 2권)

첫 국내당 결성장소 기념비≪내가 온성지구에 나오게 된 것은 국내에 당조직도 내오고 카륜회의 방침도 실현하기 위한 대책도 세워 전반적 조선혁명을 확대발전시키자는 것이었다. . . .

무장투쟁문제, 당창건문제, 반일민족통일전선문제도 내놓고 이야기해주었다. . . .

우리는 월파천을 옆에 끼고 있는 두루봉산상의 아늑한 공지에서 국내당조직을 결성하기 위한 모임을 가지었다. . . .

나의 제의에 의하여 오중성, 전장원, 전창룡, 최춘국, 최봉송, 최근주 동무들이 온성지구 당조직에 가입하였다. 당조직책임자로는 오중성동무가 선거되었다.≫(두만강을 건너, 세기와 더불어 2권)

≪한때 어떤 사람들은 1국1당제원칙을 코에 걸고 조선사람이 조선혁명을 하는데 대해 시비하면서 우리 민족군의 독자성과 자주적 권리를 침해하고 유린하려고까지 하였다. 그 후 국제당은 조선사람이 조선혁명을 하는 것이 1국1당제원칙에 모순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항일연군에서 갈라져나와 독자적으로 활동하라는 조언을 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대로 남아있기로 하였다. . . .

참으로 박달은 조선인민혁명군이 백두산으로 나온 이후시기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의 일원화를 맨처음으로 실현한 국내혁명가의 당당한 대표자였으며 우리를 위하여 일도 제일 많이 하고 고생도 많이 겪은 우리의 국내전권대표였다. 박달과 같은 이런 투사들의 덕으로 우리는 해방 직후 그처럼 복잡한 정세속에서도 단시일안에 당을 창건하고 부강한 자주독립국가를 일떠세울 수 있었다.≫(불굴의 투사 박달, 세기와 더불어 5권)

다음, 항일무장투쟁노선과 조선인민혁명군이다.

≪≪우리가 믿을 것은 인민대중의 힘밖에 없다. 2천만의 힘을 믿고 그 힘을 하나로 묶어세워 일본제국주의자들과의 혈전을 벌이자.≫ . . .

나는 그때 특히 무장투쟁문제를 놓고 많은 생각을 하였다.

우리는 보고에서 무장으로 전면적인 항일전쟁을 벌일 데 대한 문제를 반일민족해방투쟁의 기본노선으로,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첫째가는 과업으로 제기하였다. . . .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지도하는 무장투쟁만이 가장 철저하고 혁명적인 반일항전으로 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왜냐하면 공산주의자들만이 자기의 무장대오에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광범한 반일애국역량을 폭넓게 집결시킬 수 있으며 대중의 이익을 정확히 반영한 과학적인 전략전술로 무장성전을 끝까지 책임적으로 전개하면서 전반적 조선혁명을 승리에로 영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 .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애국심이었고 젊은 혈기뿐이었다. 우리가 3-4년안팎이라고 한 것은 일본의 힘을 경시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애국심이 그보다 더 강하고 정의롭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담보가 있었다면 그것은 2천만 민중의 힘이었다. 2천만을 잘 훈련시켜 도처에서 들고일어나 일본군경들을 족치면 나라를 독립시킬 수 있으리라는 배심이 우리에게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장투쟁을 본때있게 해나가자면 대중적 지반을 잘 닦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여기로부터 반일민족통일전선에 대한 구상이 나왔다고 할 수 있다.≫(카륜회의, 세기와 더불어 2권)

첫 유격대오가 들었던 깃발1932년 4월 25일 아침 우리는 토기점골 등판에서 반일인민유격대의 창건식을 가지었다.≫≫(새 무장력의 탄생, 세기와 더불어 2권)

동장영과 같은 사람도 우리의 구상을 지지하였다. 그는 동만에 조직되어 있는 반일인민유격대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주동이 되어 조직한 무장력이며 그 구성에서도 조선사람들이 압도적 다수를 이루고 있으며 중국땅에서 조직된 것이기는 하지만 종국적으로는 조선혁명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의 혁명적 무장력으로 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 . .

우리가 반일인민유격대를 대부대혁명군으로 통합개편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국제당파견원 반성위도 국제당노선에 부합되는 정당한 방침이라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었다. . . .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함으로써 우리는 무력항쟁으로 기어이 조국의 광복을 이룩하려는 조선민족의 의지를 내외에 힘있게 과시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은 경우에 따라서 동북인민혁명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도 활동하였다.

우리의 견해에 의하면 동북이라는 명칭은 어느 한 나라를 의미하는 국호로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지역적 개념으로 통용되는 것이었다. . . .

반일인민유격대를 인민혁명군으로 통합개편하는 과정에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취한 원칙적인 입장과 용의주도한 정치적 아량은 그 후 일제를 반대하는 조중인민의 공동투쟁, 특히 중국 동북지방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만일 우리가 당시의 주객관적 정세를 고려함이 없이 우리 혁명의 주체노선에 명실상부한 형식이나 명칭만을 고집하였더라면 조선공산주의자들은 항일무장투쟁을 중국인민의 광범한 지지성원속에서 효과적으로 전개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훗날 동북항일연군을 조직한 다음에도 조중항일연합군의 성격에 맞게 중국 동북지방에서 활동할 때에는 동북항일연군이라고 하였고 조선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거나 조선에 나와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정황에 맞게 이름을 바꾸어가며 활동함으로써 이르는 곳마다에서 조중 양국 인민의 사랑과 보호속에 살며 싸울 수 있었다. . . .

그들은 동만과 남만에서 활동하는 우리의 항일무장력을 그 명칭은 어떻든 김일성군≫으로 통칭하여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 . .

주보중은 자기의 글에서 ≪항일연군 제2군은 동시에 ≪조선인민혁명군≫이었다. … 항일유격전쟁 중 중조인민은 공동사업을 위하여 선혈로 얽혀져 있었다≫라고 함으로써 조선인민혁명군의 실체를 인정하고 공동투쟁노정에서 역사적으로 존재하였던 조중항일무력의 연합을 격찬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사람들도 만주, 특히 간도에 조직된 빨치산을 ≪조선인 순혈빨치산≫이라고 하였을 것이다.≫(조선인민혁명군, 세기와 더불어 3권)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우리 조선인민혁명군은 연군의 간판을 띠고 중국혁명을 도와주면서도 조국해방을 근본사명으로 하는 민족군대로서의 면모를 완전히 갖추고 조선혁명에 주력하면서 독자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 군대가 창건초기부터 자기 조국의 해방과 자기 민족의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는 조선의 민족군대라는 것은 만주에 살고 있는 모든 동포들이 다 알고 있다. 우리는 중국사람들이 많이 사는 고장에 가서는 항일연군이라고 부르고 조선사람들이 많이 사는 고장에 가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말한다.≫(불굴의 투사 박달, 세기와 더불어 5권)

≪어떻게 하면 하루라도 더 빨리 일제를 타도하고 조국해방을 앞당길 수 있겠는가. 우리의 관심은 이 하나의 문제에로 집중되었습니다. . . .

나는 조선, 중국, 쏘련 세 나라 무장력의 이상적인 연합형태를 국제연합군으로 보았습니다. 국제연합군편성과 관련된 나의 구상에 대해서는 김책, 최용건, 안길, 강건을 비롯한 우리 동무들도 지지하였습니다. 그들은 일치하게 그 구상을 빨리 실현하면 할수록 좋다고 하면서 쏘련, 중국 동지들과의 협의를 나에게 위임하였습니다. . . .

조선인민혁명군대원들은 백두광야에서 연마해온 유격전법들을 더욱 완성하는 한편 정규군의 요구에 맞는 현대전법들을 익혀나감으로써 조선혁명을 담당한 주력군으로서의 정치군사적 면모를 훌륭히 갖추어나갔습니다. . . .

쏘련의 군사일군들은 스탈린이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의 장병들을 얼마나 아끼는가에 대하여 자주 말해주었습니다. 스탈린은 조선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에서 싸운 매개전사들은 다 장차 자기조국을 해방하고 새 조국 건설을 해나가는데서 한몫 단단히 할 귀중한 사람들이므로 한 명의 손실도 없도록 아껴야 한다고 말했다고 했습니다.≫(국제연합군을 편성하여, 세기와 더불어 8권)

혁명은 총대를 가지고 해야 하며 민족적 독립이나 사회적 해방을 위한 모든 투쟁의 결말은 대체로 무장투쟁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우리가 항일혁명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기본요인도 자체의 독자적인 혁명무력을 가지고 있은 데 있습니다.

우리 나라 민족해방투쟁무대에 김구네 세력, 이승만이네 세력, 여운형이네 세력을 비롯하여 각이한 세력들이 있었지만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제일 무서운 적수로 본 것은 우리의 조선인민혁명군이었습니다. 왜 우리를 제일 무서운 적수로 보았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청원이나 파업이나 붓이나 말로써가 아니라 민족해방운동의 최고형태인 무장투쟁의 방법으로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완강하게 싸웠기 때문입니다.

항일혁명의 승리는 혁명은 총대를 가지고 해야 한다는 진리의 정당성을 확증해주었으며 해방 후 우리로 하여금 새 조국건설과 사회주의위업을 수행하기 위한 투쟁의 전행정에서 혁명적 건설노선을 확고히 틀어쥐고 강유력한 혁명무력을 건설하는데 모든 힘을 다 바치게 하였습니다. . . .

오늘 김정일동무가 혁명무력의 수위에 서서 인민군대를 무적필승의 강군으로 키우고 군건설에서 경이적인 성과를 이룩하고 있는 것은 백두산에서 개척된 주체의 혁명위업을 계승완성해 나가는데서 이룩한 가장 빛나는 역사적 업적으로 됩니다.≫(혁명가 김책, 세기와 더불어 8권)

최용건, 김책, 강건 동지와 함께 계시는 김일성장군님≪김책은 내가 없으면 자기도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제일 준엄했던 때가 후퇴 때였습니다. 일시적 후퇴다, 전략적 후퇴다 하고 선포했지만 신념이 약한 사람들은 공화국의 운명이 끝장나는가보다 하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적들이 사리원을 돌파하자 전선사령관인 김책은 중화, 상원, 강동 일대에 평양방위선을 구축해놓고 나에게 전선정황을 보고하면서 자기는 후퇴해 들어오는 부대들로 방위역량을 보강하고 끝까지 견지하겠으니 장군님만은 최고사령부성원들을 데리고 평양을 떠나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혁명가 김책, 세기와 더불어 8권)

서울해방전투대전해방전투의 승리를 비롯하여 전쟁1계단 때 우리 인민부대가 거둔 전과속에는 강건의 공로도 크게 깃들어 있습니다.

인민군대가 낙동강계선에 진출한 후 강건은 나에게 전선형편을 보고하다가 며칠 후에는 고향 상주에 가서 누이와도 상봉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북만에서 온 투사들, 세기와 더불어 8권)

다음, 민족통일전선노선과 조국광복회이다.

조국광복회 창립대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장투쟁을 본때있게 해나가자면 대중적 지반을 잘 닦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여기로부터 반일민족통일전선에 대한 구상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조직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깨달은 것이 화성의숙시절이라면 민족의 힘을 처음으로 느끼고 뇌리에 새겨둔 것은 3.1인민봉기 때였다. 내가 인민들속에 깊이 들어가 그들을 묶어세우고 그들의 힘에 의거하여 혁명을 하겠다는 결심을 품은 것은 길림시절이었다.

2천만의 총동원으로 이루어지는 거족적인 항전이 없이는 식민지노예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순수한 계급혁명이라면 노동자, 농민 대중이 혁명의 동력으로 되겠지만 우리 혁명의 성격자체가 봉건을 반대하고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혁명인 것만큼 노동자, 농민은 말할 것도 없고 청년학생, 지식인, 애국적인 종교인, 민족자본가들도 다 혁명의 동력이 될 수 있다고 우리는 주장하였다. 우리의 원칙은 민족해방에 이해관계를 가지는 반일애국역량은 다 집결하고 다 동원시키자는 것이었다. . . .

우리는 이런 입장을 가지고 해방 후 일생을 반공으로 살아온 김구선생과도 합작하였고 지금도 모든 겨레의 이성을 향해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자고 호소하고 있다.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면 남는 것은 외세와 매국노들뿐이다.

민족의 대단결이 그처럼 귀중한 지상의 과제이고 경륜이기에 우리는 반공일선에서 우리에게 총부리를 맞대고 평생을 살아온 최홍희, 최덕신 선생이 평양으로 찾아왔을 때에도 그들에게 과거를 묻지 않고 혈육의 정으로 반갑게 맞아주었다.≫(카륜회의, 세기와 더불어 2권)

새 사단의 탄생으로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가 더욱 강화발전된 것으로 하여 우리의 앞길에는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과 당창건을 위한 조직사상적 준비를 보다 폭넓고 깊이 있게 전개할 수 있는 돌파구가 열렸다. 새 사단의 출현은 무장투쟁을 국내 깊이에로 확대하며 각계각층의 애국역량을 하나로 결속시키기 위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군사정치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강력한 추진력으로 되었으며 카륜회의 이후부터 우리가 줄기차게 전개해 온 통일전선운동에서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올 수 있는 광활한 전망을 열어놓았다.

남호두회의 이후 시기부터 우리의 통일전선운동은 범민족적인 통일전선체의 조직을 위한 활동에로 집중되었다. 하나의 상설적인 통일전선조직을 내오고 그 산하에 광범한 반일애국역량을 튼튼히 묶어 세우는 것은 우리 혁명발전의 견지에서 보나 내외 정세의 요구로 보나 더는 미룰 수 없는 절박한 과제로 나섰다. . . .

조선의 근대역사에서 주의와 주장을 초월하는 민족의 대동단결문제가 처음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중기 이후부터였다. 그 당시 우리 나라 민족해방투쟁 무대에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로 대표되는 두 개의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일제의 폭정과 수탈이 강화될 수록 민족해방운동을 지도하던 선각자들은 애국역량의 단합과 민족대단결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런 필요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초기공산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들과의 연합을 모색하였고 민족주의자들은 공산주의진영과의 제휴를 시도하였다. . . .

신간회 창립우리 나라 민족협동전선의 첫 산아라고 할 수 있는 신간회는 그 취지와 목적이 애국적이고 반일적이었다. . . .

신간회의 와해에서 뼈저린 교훈을 찾은 우리는 애국적 민족역량의 통일을 우리가 주도해야겠다는 비상한 각오와 결의밑에 반일민족통일전선문제를 중요한 방침으로 제기하고 민족의 총력을 항일구국위업의 깃발 아래 결집시키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해왔다. 그 과정에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갈 만한 핵심도 키워내고 유익한 경험도 축적하였다.

남호두회의는 범민족적인 통일전선체의 창립에 대한 결정을 채택함으로써 우리 나라 통일전선운동에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역사적인 분수령으로 되었다. . . .

우리에게 있어서 파시즘은 새로운 적이 아니었다. 국제파시즘이 대두함으로써 우리 나라 혁명의 대상이 달라진 것도 없었고 성격이 변화된 것도 없었다. 우리는 국제당이 반파쑈인민전선운동 노선을 제기하기 전부터 우리 식의 반일민족통일전선노선을 제기해왔고 그 궤도를 따라 우리 혁명을 줄기차게 전진시켜왔다.≫(조국광복회, 세기와 더불어 4권)

≪그래서 나는 혁명이란 공산주의자들 몇 사람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 각계각층의 광범한 군중이 총동원되어야 우리 혁명은 승산있는 혁명으로 될 수 있다, 동무도 다 아는 바이지만 일제식민지통치하에서는 노동자, 농민이나 공산주의자들만이 아니라 온 민족이 압제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는 조선독립에 이해관계를 가지는 모든 역량을 다 반일민족통일전선에 묶어세워야 한다, 동무는 조국광복회 명칭문제에 의견을 가지지만 사실상 그것은 어떤 계층이나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적합한 명칭이다, 지금 어떤 사람들은 단체명을 하나 지어도 혁명이라는 말이나 적색이라는 말이 꼭 들어가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은 좌경의 한 개 표현이다, 우리는 범민족적인 통일전선조직체의 명칭에 조국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그 단체가 어떤 한정된 계급이나 계층을 위한 조직인 것이 아니라 온 민족을 위한 조직으로 된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려 하였다고 말해주었다. . . .

1937년 1월 갑산공작위원회의 지도핵심들은 박달의 사회하에 갑산공작위원회를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하기 위한 모임을 열고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그들은 이 회의에서 반일민족통일전선노선을 관철하기 위한 집행대책도 겸하여 토의하였다.

조직대열을 갑산지방범위로부터 도범위, 전국적인 범위에로 확대해나갈 데 대한 문제, 동맹조직내의 일체 종파주의적 요소가 침습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경계할 데 대한 문제, 비밀을 엄수할 데 대한 문제, 동맹원교양문제, 기관지발행문제 등 당면한 여러 가지 실천적 문제들이 진지하게 토의되었다.

갑산공작위원회를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한 것은 조국광복회운동사에서 특별한 의의를 가지는 또 하나의 역사적 사변이었다. 조선민족해방동맹은 조국광복회조직을 국내깊이에로 확대시키는 하나의 발진기지로 되었다.≫(불굴의 투사 박달, 세기와 더불어 5권)

다음으로,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운동의 일원화이다.

≪그는 국내에 있을 때 동지들에게 늘 농조조직이 투쟁에서 성과를 거두려면 반드시 조선인민혁명군의 지도를 받을 수 있는 통로를 개척해야 한다는 것과 혁명군의 지도가 없이는 국내투쟁이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완강하게 주장하였다. 물론 그 주장은 많은 동지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혁명군의 줄을 어떻게 찾겠는가고 하면서 그 주장을 시답지 않게 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혼자서라도 유격대를 찾아가기로 결심하고 자기의 친지들이 활동하고 있는 장백현 신흥촌으로 단호히 이주하였다.

그는 국내인사들 가운데서 해외의 무장투쟁과 국내정치투쟁의 불가분리성과 일원화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인식하고 공리공담의 울타리를 벗어나 적극적인 자세로 그것을 실현하였을 뿐 아니라 혁명군과의 연계를 성사시킨 다음에는 우리의 노선을 관철해 나가는 길에서 생명까지 바친 선각자, 투사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이제순, 세기와 더불어 5권)

≪조선혁명의 주체노선을 관철하는데서 우리가 중요하게 내세운 전략적 과업은 한편으로는 국내에 무장투쟁과 정치투쟁을 총괄적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믿음직한 책원지, 비밀거점을 꾸리는 것이었으며 다른 편으로는 강력한 정치적 역량과 군사적 역량을 마련함으로써 자력광복을 위한 전민항쟁준비를 다그치는 것이었다.

국내에 강력한 정치적 역량을 꾸리는 사업은 조국광복회망을 확대하여 각계각층의 광범한 애국역량을 반일민족통일전선의 기치밑에 굳게 묶어세우는 것과 함께 국내에 강력한 당조직망을 꾸림으로써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전반적 항일혁명을 일대 앙양에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핵심역량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실에 있어서 우리가 백두산을 타고앉아 벌이려고 하는 모든 정치적, 군사적 활동의 승패를 좌우하는 관건적인 중심고리라고 말할 수 있었다. . . .

국내혁명운동이 거둔 업적과 경험을 존중시하고 그 성과를 토대로 하여 기성운동을 수습하고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맞게 발전시키는 것, 이것이 국내혁명운동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선택한 자세였고 방침이었다.

우리는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부터 ≪ㅌ·ㄷ≫와 조선혁명군에서 육성된 우수한 공작원들을 북부국경지대와 국내깊이에까지 파견하여 정치군사적 기반을 닦기 위한 일정한 준비사업을 선행시키었다.

국내혁명운동을 더 높은 단계에로 추켜올리자면 조선민족해방투쟁과 공산주의운동의 중심적인 지도세력으로 등장한 인민혁명군의 조선경내에로의 본격적인 정치군사적 진출과 국내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방조가 필요하였다.

사실상 실패와 좌절만을 거듭해온 국내혁명운동은 새로운 지도와 노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운동의 상층부는 파쟁으로 혼란되어 있었으나 하층의 선각자들과 인민들은 혁신적인 노선과 지도를 받아들여 결사전에 나설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당재건에 열을 올리던 투사들도 지하와 감방에서 자신들이 엮어온 실패작들을 돌이켜보며 출로를 찾으려고 암중모색하였다.

우리앞에는 이러한 요구에 민감하게 호응할 수 있는 실천대책이 필요하였다. 그 대책 중에서도 선차적인 것이 바로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운동의 일원화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운동의 일원화를 실현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여 국내혁명운동에 대한 우리의 지도를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런 과제를 실행하자면 무엇보다도 국내에서 이제순과 같은 형의 견실한 혁명가들을 찾아내고 그들과의 공동노력을 통하여 조국광복회망을 빨리 늘이고 온 민족을 반일성전에로 불러일으키기 위한 대책을 세워야만 하였다.

그런 적임자로 물색된 것이 박달이었다. . . .

참으로 박달은 조선인민혁명군이 백두산으로 나온 이후시기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의 일원화를 맨처음으로 실현한 국내혁명가의 당당한 대표자였으며 우리를 위하여 일도 제일 많이 하고 고생도 많이 겪은 우리의 국내전권대표였다. 박달과 같은 이런 투사들의 덕으로 우리는 해방 직후 그처럼 복잡한 정세속에서도 단시일안에 당을 창건하고 부강한 자주독립국가를 일떠세울 수 있었다.≫(불굴의 투사 박달, 세기와 더불어 5권)

다음, 전민항쟁노선이다.

≪≪우리가 믿을 것은 인민대중의 힘밖에 없다. 2천만의 힘을 믿고 그 힘을 하나로 묶어세워 일본제국주의자들과의 혈전을 벌이자.≫ . . .

우리는 보고에서 무장으로 전면적인 항일전쟁을 벌일 데 대한 문제를 반일민족해방투쟁의 기본노선으로,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첫째가는 과업으로 제기하였다. . . .

2천만의 총동원으로 이루어지는 거족적인 항전이 없이는 식민지노예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순수한 계급혁명이라면 노동자, 농민 대중이 혁명의 동력으로 되겠지만 우리 혁명의 성격자체가 봉건을 반대하고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혁명인 것만큼 노동자, 농민은 말할 것도 없고 청년학생, 지식인, 애국적인 종교인, 민족자본가들도 다 혁명의 동력이 될 수 있다고 우리는 주장하였다. 우리의 원칙은 민족해방에 이해관계를 가지는 반일애국역량은 다 집결하고 다 동원시키자는 것이었다.≫(카륜회의, 세기와 더불어 2권)

≪보천보전투는 일본제국주의식민지통치를 끝장내고 민족적 독립과 자주권을 부활시키려는 우리 인민의 혁명적 의지와 불굴의 투쟁정신을 내외에 널리 보여주었다. 이 전투를 통하여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자기 활동의 전 노정에서 시종일관하게 견지해온 투철한 반제적 입장과 자주적 입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으며 철저한 실행력과 유력한 전투력을 시위하였다.

우리는 또한 이 전투를 통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하고 있은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조국과 민족을 가장 열렬히 사랑하는 진실하고 참된 애국자들이며 민족해방위업을 승리적으로 완수해나갈 수 있는 가장 헌신적이고 책임적인 투사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조국인민들로 하여금 무장투쟁을 주축으로 하는 항일혁명의 마당에 거족적으로 달려나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으며 국내에서의 당조직건설과 조국광복회조직건설을 일사천리로 내밀 수 있는 분위기를 지어주었다.

보천보전투가 가지는 가장 주요한 의의는 조선이 다 죽었다고 생각하던 우리 인민들에게 조선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싸우면 반드시 민족적 독립과 해방을 이룩할 수 있다는 신심을 안겨준 데 있다.≫(보천보의 횃불(2), 세기와 더불어 7권)

≪우리는 항일혁명을 시작한 첫날부터 시종일관 전민항쟁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때 우리가 말한 전민항쟁이란 전민을 혁명화하여 항일혁명에 총동원시킨다는 뜻이었습니다. 다시말하여 온 나라, 온 민족을 망라하는 거족적이고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반일항전으로 나라의 해방을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 . .

전민항쟁 준비가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것은 우리가 백두산에 틀고앉아 무장투쟁을 압록강연안과 국내에로 확대하면서 조국광복회의 기치밑에 당건설과 통일전선운동, 대중조직건설을 활발히 벌이던 때부터였습니다. 온 민족의 총동원으로 나라의 해방을 이룩할 것을 호소한 조국광복회10대강령은 사실상 전민항쟁선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전체 조선동포들에게 보내는 호소문(1937년 9월)우리가 전민항쟁방침을 독자적인 노선으로 제시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실무적 조치들을 취하기 시작한 것은 중일전쟁이 일어난 다음부터였다고 봅니다. 전인민적 반일항전문제를 가지고 백두산밀영에서도 회의를 했고 초수탄과 신흥에서도 회의를 하였습니다. 9월 호소문은 전민항쟁호소문이라고 이해해도 됩니다.

우리는 백두산에 나와 있을 때 북선반일인민유격대를 조직할 데 대한 구상도 내놓았습니다.

우리는 간백산에 꾸려진 강습소를 통하여 지방조직들에서 단련된 사람들을 뽑아다가 전민항쟁에 필요한 지도핵심들을 많이 길러내는 한편 북부지대를 비롯한 국내의 여러 곳에 반군사조직들을 더 많이 내오고 그것을 확대강화하는데 큰 힘을 넣었습니다.

국내에 파견된 우리의 정치공작원들은 도처에서 노동자돌격대와 생산유격대를 조직하였습니다.

최후결전의 날이 다가옴에 따라 우리는 전민항쟁을 위한 작전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 . .

그 후 우리는 국내에서의 당조직건설과 대중단체건설 정형 그리고 비밀무장조직들의 활동정형을 요해한데 기초하여 조국해방의 3대노선을 내놓았습니다. 조국해방의 3대노선이라는 것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총공격과 그에 배합한 전인민적 봉기, 배후연합작전으로 조국광복의 역사적 위업을 이룩할 데 대한 노선입니다. . . .

일본놈치하에서는 지긋지긋해서 더는 못살겠다, 김일성빨치산부대가 조선으로 쳐들어올 때에는 우리도 들고일어나서 왜놈들에게 철추를 내리자, 죽든지 살든지 결판을 내자는 것이 그때의 민심이었습니다. . . .

우리는 전민항쟁준비를 다그치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제에 특별한 주목을 돌리었습니다. 하나는 국내에 있는 비밀근거지들을 전민항쟁의 군사정치적 거점으로 더욱 튼튼히 다지면서 새로운 임시 비밀근거지들을 꾸리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국내에 더 많은 소부대들과 소조들, 정치공작원들을 파견하여 새로운 정세의 요구에 맞게 전민항쟁역량을 조국해방작전에 철저히 준비시키는 것이었으며 또 다른 하나의 문제는 국내의 전민항쟁역량에 대한 통일적 영도를 실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 . .

1940년대에 와서는 새로운 정세의 요구에 맞게 이러한 비밀근거지외에 조국해방작전수행에서 전략전술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전국의 주요요충지들에 여러 가지 형태와 규모로 임시 비밀근거지들을 건설하였습니다.

우리는 근거지건설을 선행시키면서 국내에 수많은 소부대와 소조들, 정치공작원들을 파견하였습니다. 나도 소부대를 데리고 여러 번 국내 깊이에 진출하였습니다.

우리가 파견한 소부대들과 소조들, 정치공작원들은 두만강, 압록강 연안의 국경지대 뿐 아니라 서울을 포함한 중부조선일대와 부산, 진해를 비롯한 남부조선일대 그리고 멀리로는 일본에까지 침투하여 정치, 군사 활동을 활발히 벌였으며 광범한 반일군중을 전인민적 항전에로 준비시키었습니다. . . .

전민항쟁준비를 다그치는데서 또한 중요한 것은 국내항쟁운동에 대한 통일적 지도를 실현할 수 있는 영도기관을 꾸리는 것이었습니다.

국내당공작위원회가 결성된 후 우리 나라에서는 각지에 당소조들이 조직되어 대중단체들에 대한 지도를 보장하였습니다. 1930년대 말부터 여러 지역에 산발적으로 꾸려진 당소조들과 반일대중조직들에 대한 통일적인 지도를 실현할 사명을 지닌 지구당위원회들이 태어나 지역적 영도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실례로 김정숙이 조직한 연사지구당위원회를 들 수 있습니다.≫(전민항쟁의 불길은 온 강토에, 세기와 더불어 8권)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회고록의 머리말에서 조선은 하나이고 조선혁명도 하나라는 사상에 바탕하여 한 생을 회고하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시었다.

≪하나의 평범한 인간으로서, 근대 이후 세계정치에서 언제나 두드러졌던 한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복무한 정치가로서 나는 깊은 추억과 잊을 수 없는 회포속에 자신의 한 생을 돌이켜보게 된다.

민족수난의 비운이 칠칠히 드리웠던 망국초엽에 태어났고 격변하는 내외정세의 소용돌이속에서 생의 첫 걸음을 떼어야 했던 나는 어린 시절부터 조국과 운명을 같이하고 겨레와 더불어 희로애락을 나누는 길을 걷게 되었으며 바로 그 길에서 어언 팔순에 이르렀다.

인류의 생활에 미증유의 대 흔적을 남기고 세계의 정치지도에 괄목할 변화를 일으켰던 20세기와 더불어 흘러온 나의 한 생은 그대로 우리 조국과 민족이 걸어온 역사의 축도이다. . . .

우리 혁명이 승리적으로 전진하고 우리 조국이 융성번영하며 만민이 그 최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바로 이 날을 위해 자기 일신을 초개와 같이 바쳤던 동지들의 생각이 더더욱 간절하고 잊을 수 없는 그 모습들이 삼삼히 갈마들어 잠 못 이루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머리말, 세기와 더불어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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