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8월 29일(목)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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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순과 박달

서정욱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불후의 고전적 노작 ≪세기와 더불어≫에서 빛나는 수령님의 혁명동지에 대한 해설강좌 시간입니다.

오늘은 그 네 번째 시간으로 위대한 수령님의 충실한 전사였던 이제순과 박달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두 동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짚어보면서 오늘 우리가 두 동지의 혁명생애를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사색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이제순을 처음 만나신 것은 1936년 10월 상순 백두산밀영에서였습니다.

이제순≪내가 백두산지구를 한바퀴 선회하고 돌아오자 이동학은 신흥촌이라는 동네에서 좋은 청년 한 명을 물색하였는데 사령관동지께 소개해드리고 싶어 밀영까지 데려왔다고 하면서 이제순에 대한 자랑을 한바탕 늘어놓았다.≫(이제순, 5권)

당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운동의 일원화를 실현하기 위한 첫 사업으로서 서간도지역을 혁명화하기 위한 적임자를 찾고 계시었습니다. 이제순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국내에 있을 때 동지들에게 늘 농조조직이 투쟁에서 성과를 거두려면 반드시 조선인민혁명군의 지도를 받을 수 있는 통로를 개척해야 한다는 것과 혁명군의 지도가 없이는 국내투쟁이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완강하게 주장하였다. 물론 그 주장은 많은 동지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혁명군의 줄을 어떻게 찾겠는가고 하면서 그 주장을 시답지 않게 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혼자서라도 유격대를 찾아가기로 결심하고 자기의 친지들이 활동하고 있는 장백현 신흥촌으로 단호히 이주하였다.

그는 국내인사들 가운데서 해외의 무장투쟁과 국내정치투쟁의 불가분리성과 일원화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인식하고 공리공담의 울타리를 벗어나 적극적인 자세로 그것을 실현하였을 뿐 아니라 혁명군과의 연계를 성사시킨 다음에는 우리의 노선을 관철해 나가는 길에서 생명까지 바친 선각자, 투사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이제순, 5권)

이제순은 순결하고 신념있는 혁명가였으며 학습열이 높았습니다.

≪한마디로 이제순은 백지장처럼 깨끗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생활경력도 비교적 단순하였다. 그것은 그가 행세식 운동자들과 파쟁분자들의 그릇된 사고와 투쟁방법에 오염당하지 않았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우리는 오히려 그 단순성을 값있게 여기었다. 다른 때가 끼지 않는 순결한 머리에 이식되는 사상이나 주의주장은 흐리터분해지지 않는 법이다.≫(이제순, 5권)

≪이제순은 여자처럼 곱살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인상적인 것은 언제나 새물새물 웃는 것 같은 눈이었다. 겉보기에는 상당히 부드럽고 유약한 사람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강쇠처럼 굳건한 속대와 바위와 같이 드놀지 않는 신념과 냉철한 사고력을 가진 강의하고 이성적인 인간이었다.≫(이제순, 5권)

그림 : 학교가 그립건만≪이제순은 정규교육을 받아보지 못하였으나 독학으로 중등 정도의 지식까지 소유한 성실한 노력가였다. 14살까지 머슴을 산뒤에 몇 해 동안 야학방에 다니었고 형한테서 국문을 배우고 장가를 간 다음에는 옥편을 끼고 다니면서 자습하였다.≫(이제순, 5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특히 이제순의 군중관과 통일전선적 관점을 높이 평가하시었습니다.

≪반일애국운동을 하는 과정에 이제순이 터득했다고 하는 인생철학 가운데는 흥미있는 것들이 적지 않았다. 그는 사람이 하는 일 가운데서 제일 힘든 것은 선구자, 지도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시말하여 남이 한 가지를 할 때 두 가지, 세 가지를 하거나 남이 한 걸음을 걸을 때 두 걸음, 세 걸음을 걷는 것이 제일 뻐근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 말에는 사실 심오한 진리가 있었다. 그것은 남들의 앞장에서 사회개조의 어려운 길을 개척해가는 혁명가의 고충을 반영하고 있는 진리였다.

그는 군중공작을 제일 큰 재미라고 하였으며 동지를 얻을 때의 기쁨을 제일 큰 기쁨이라고 하였다. 군중을 쟁취하는데서 제일 어려운 대상이 무엇인가고 하였더니 노인들이라고 대답하였다. 이제순은 큼직한 운동장과 공회당(회관)만 있으면 한 동네를 계몽시키는 것쯤은 문제없고 옹근 한 개 면이라도 다 혁명화할 수 있다고 하였다.≫(이제순, 5권)

≪나는 이제순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동학중대장은 경제모연을 하려고 데려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순동무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천지주의 양아들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합니까?≫

이제순은 마치 그런 질문이 나오리라는 것을 미리 예견하고 있었던 사람처럼 자기의 속생각을 거침없이 털어놓았다.

≪나는 유격대가 그를 해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명색은 지주의 양아들이지만 실상은 머슴이나 다름없는 불쌍한 청년인데 별로 죄를 지은 것도 없습니다.≫

통일전선의 각도에서 문제를 너그럽게 고찰하는 그의 관용과 독특한 사고방식앞에서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천지주의 양아들에 대한 이제순의 관점은 사실 우리의 관점과 일치하였다.≫(이제순, 5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제순에게 장백지구의 조국광복회 책임자로 임명하시었으며 확고한 신임을 안겨주시었습니다.

≪어쨌든 이제순은 만사람이 반할만한 특색있는 성격의 사나이었다. 그는 장백을 혁명화할 수 있는 둘도 없는 적임자였다. 필요한 지식과 방법만 배워주면 이제순은 장차 훌륭한 지하조직활동가로 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장백지구에 조국광복회조직을 꾸리는 사업을 그에게 맡기기로 결심하였다.≫(이제순, 5권)

≪우리는 이제순을 위한 단독강습을 진행하였다.

강습의 주제는 조선혁명의 노선과 성격, 전략전술에 대한 것이었다. 이 강의는 내가 담당하였다. 조국광복회10대강령과 창립선언, 규약에 대한 해설강의, 국제당사 강의는 이동백이 해주었다. 단 한 명의 수강생을 위하여 여러 명의 유능한 강사들이 번갈아 출연해가며 그처럼 알심있게 강습을 진행한 실례는 항일혁명투쟁의 전기간 그때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강습을 마치고 밀영을 떠나게 되었을 때 이제순은 진정에 넘쳐 말하였다.

≪저는 쌀 한 말을 지고 왔다가 몇 섬이나 되는 혁명적 양식을 지고 갑니다. 이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이제는 저에게 사업분공을 주십시오. 지역을 하나 떼서 맡겨주면 그 지역안에 있는 조선사람들이 사는 모든 마을마다에 조국광복회조직을 내오겠습니다.≫

우리는 장백현 상강구지역을 그에게 맡기기로 하였다.≫(이제순, 5권)

≪출발에 앞서 이제순은 자기에게 신임장을 한 장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나의 도장이 찍힌 신임장만 내대면 군중들을 조국광복회조직에 많이 묶어 세울 수 있고 또 일도 상당히 쉽게 해나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였다.

나는 그의 요구대로 신임장을 써주고 나의 이름밑에 도장까지 찍어주었다.

이제순은 그 자그마한 증명서를 받아들자 반년안으로 상강구 지역을 우리 세상으로 만들겠다고 장담하였다. 그 장담이 허풍이 아니었다는 것은 그 후의 그의 투쟁실적이 증명해주었다.≫(이제순, 5권)

이제순은 위대한 수령님의 지도와 신임속에 장백지구 조국광복회 사업을 성과적으로 수행하였습니다.

≪이제순은 적들의 신임을 능숙하게 이용해가며 그 해 가을 김병철, 이주관, 이삼덕과 함께 조국광복회 신흥촌지회를 조직하였다. 이 지회는 백두산 서남쪽 턱밑에서 생겨난 최초의 조국광복회조직이었다.

이때부터 이제순은 촌장의 자리를 이삼덕에게 넘겨주고 권영벽과 함께 장백현 상강구 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망을 확대하기 위한 사업에 착수하였다. 우리는 장백현을 편의상 세 개의 지구 즉 상강구, 중강구, 하강구로 구분하고 활동하였으며 상강구는 다시 상방면, 중방면, 하방면으로 나누고 활동하였다. 이제순은 신흥촌에서 지회를 내온데 뒤이어 주경동, 약수동, 대사동, 평강덕에도 조국광복회 지회들을 조직하였다.

지회산하에는 또한 많은 분회들을 두었으며 반일청년동맹과 부녀회, 아동단과 같은 외곽단체들을 꾸려 각계각층을 폭넓게 결속시키었다.

불과 반년도 못되는 사이에 이제순은 상강구 전지역을 조밀한 지하조직망으로 뒤덮어놓았다. . . .

장백지구에서의 조국광복회조직들의 확산이 어찌나 빠르게 진척되었던지 우리가 조국광복회 장백현위원회를 내오고 이제순에게 총책임을 지우던 1937년초에 이르러서는 장백현의 전지역이 완전한 우리 세상으로 되었다.≫(이제순, 5권)

이제순은 가정혁명화, 마을혁명화 사업을 잘 하였습니다.

≪오중화와 마찬가지로 이제순도 가정혁명화를 잘 하였다. 우선 자기와 혈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부터 반일애국사상으로 무장시켜야 온 동네를 혁명화하고 나아가서는 온 나라, 온 민족을 혁명화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고 혁명활동방식이었다. 그래서 그는 고향에 있을 때부터 동생들을 혁명사업에 끌어들이었다. 그의 여동생은 오빠의 혁명사업을 잘 도와주었다.

이제순은 신흥촌에 온 다음 아내와 장모도 혁명사업에 인입하였다.

남편의 세밀한 방조와 사랑속에서 아내 최채련은 조국광복회 산하 신흥촌 부녀회회장으로 성장하였다.≫(이제순, 5권)

≪이제순은 가정을 혁명화한 다음 마을도 혁명화하였다. 그는 권영벽과 함께 신흥촌에 당특별지부도 조직하였다. 그 지부가 조직된 후 장백지방에서는 수많은 조국광복회원들이 당대열에 들어섰다. 사람들을 조직에 결속시키고 유격대를 원호하는데서 신흥촌은 단연 첫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부락이었다.

신흥촌사람들은 유격대가 마을에 온다는 말만 들으면 기름을 짤 들깨부터 닦았다. 그들은 유격대에 보낼 원호미를 마련하기 위하여 식량절약을 이악하게 하였다.≫(이제순, 5권)

이제순의 신흥촌은 백두산과 함경도를 연결하는 지하조직망의 통로였습니다.

≪이제순의 신흥촌과 박달의 큰웅뎅이 마을을 연결하는 지하선이 함북도 전지역과 함남도의 동부지구에 우리의 지하조직망을 펼치기 위한 통로였다면 도천리와 신파를 연결하는 지하선은 함남도 서부 및 남부 지역과 국내의 내륙지대로 우리의 조직망을 펼치기 위한 통로였다고 말할 수 있다.≫(양민보증서, 5권)

위대한 수령님께 박달을 소개한 사람이 바로 이제순입니다.

≪우리에게 박달을 소개한 사람은 이제순이었다.

≪박달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서는 칼날 위에라도 올라서는 사내대장부입니다. 이론도 굉장합니다. 한번은 사상가랍시고 으시대는 단천내기 사자머리 하고 무슨 논쟁이 붙었는데 그 사람의 코를 아예 납작하게 만들어놓았습니다. 함남북을 개척하자면 박달을 만나야 합니다!≫

나는 이제순이 한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러나 만나보지 않고서는 그 말을 다 믿기가 어려웠다. 사실 요란한 소문을 듣고 만나본 명사들에게서 우리는 기대와 달리 얼마나 큰 실망만을 받아안았던가.≫(불굴의 투사 박달, 5권)

김영국≪서광≫의 주필이었던 김영국을 유격대로 보낸 사람도 이제순입니다.

≪백두산 시절의 대내출판일군들 중에서 이동백 다음으로 손꼽을 수 있는 문필가는 국내의 적색농조에서 활동하다가 박달과 이제순의 줄을 타고 우리 부대에 입대한 김영국이다.≫(≪3·1월간≫, 5권)

이제순은 보천보에 정찰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였으며 군민연환대회장소인 덕부골도 이제순이 개척한 곳입니다.

≪우리는 이미 여러 갈래의 선을 통하여 보천보에 대한 정찰을 충분히 해두었었다. 권영벽이나 이제순의 선도 동원하고 박달의 선을 통해서도 적정을 입체적으로 파악하였다.≫(보천보의 불길(2), 6권)

≪군민연환대회장소로 내정된 덕부골은 이제순, 김운신, 마동회, 김주현, 지태환, 김일 등이 개척한 혁명촌이었다.≫(지양개군민연환대회, 6권)

이제순은 정치공작원들의 안전하고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사업도 잘 하였습니다.

≪이제순과 이주익은 우리 정치공작원들의 안전하고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기 위하여 백두산 쪽으로 올라가는 마지막 산골인 24도구에 많은 ≪유령민적≫을 만들어낼 꾀를 생각해냈다. 그곳 막치기는 멀고 험악하여 경찰들도 가기를 저어하는 곳이었다.

이주익은 민적부에 장백일대와 국내에서 활동하는 우리 정치공작원들을 가명으로 등록한 다음 그 민적부를 들고 경찰서에 찾아가 수선을 떨었다.

≪산골 가난뱅이들이란 하나같이 무식하다보니 통 셈판을 모르거든. 일년 열두달 내내 산골에 들어박혀서 아무데도 나다니지 않으니 도무지 세상물계도 알지 못하고 거민증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한단 말이오. 그러니 어찌겠소. 그 곰같이 우둔한 것들한테 이쪽에서 갖다줘야지 별수가 있소. 다리가 늘어져도 할 수 없지. 정말 면장질 하기도 헐친 않구만.≫

경찰서에서도 백성들이 무식해서 야단났다는 식으로 맞장구를 치면서 면장, 촌장들에게 수다한 ≪유령민적≫에 따르는 거민증을 내주었다. 이제순에게는 이주익이 마련해다 준 예비거민증이 언제나 푼푼히 장만되어 있었다. 우리의 정치공작원들은 아무 때나 그것을 받아가지고 타고장에도 수월히 발을 붙일 수 있었고 국경도 쉽게 넘나들 수 있었다.≫(이제순, 5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제순을 장백현당의 부위원장으로, 조국광복회장백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하시었습니다.

≪회의에서는 다음으로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 당조직체계를 세우는 문제를 토의하였고 권영벽을 위원장으로 하고 이제순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장백현당위원회와 이제순을 책임자로 하는 조국광복회 장백현위원회를 조직하였다.≫(국내당공작위원회, 5권)

이제순은 조직적 수완이 높고 대담하며 지략이 뛰어난 혁명가였습니다.

≪이제순이 높은 조직적 수완과 임기응변의 묘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일화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1937년 봄에 조국광복회 장백현 위원회는 신흥촌에서 5.1절 시위를 조직하였다. 대낮에 그것도 만인의 주시속에서 합법적인 시위를 벌이자면 적들이 트집을 잡을 수 없는 그럴듯한 계책이 필요하였다. 이제순은 여우잡이를 구실로 각 촌에 있는 청소년들을 제정된 장소에 모이게 하였다. 시위대열은 붉은기를 들고 한 줄로 늘어서서 ≪조선독립 만세!≫를 부르며 압록강이 굽어보이는 산능선을 따라 20도구 남석부락까지 행진해갔다. 시위군중은 적들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하여 두간두간 다른 구호들도 불렀다. . . .

일제의 폭압이 절정에 치달아오르던 1937년 당시 수백 명의 집단이 백주에 붉은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부른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것이 반일반만시위라는 것을 일만군경들이 다같이 감촉하지 못했다는 것도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이것은 뛰어난 지략과 대담성을 가진 인물들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고안해낼 수 없는 큰 모험이었다. 우리가 보천보를 친 후 이제순은 신흥촌 부녀회성원들을 현지에 파견하여 전투결과를 알아내고 인민들의 여론을 수집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통보해주었다. 우리는 이제순에게 그런 부탁을 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가 창발성을 발휘하여 독자적으로 결심하고 포치한 사업이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놓고보더라도 우리는 이제순이 혁명에 대한 자기 식의 방법론을 가진 재능있는 일군이며 열정적인 사색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혁명과 자기의 어깨에 지워진 시대적 사명을 두고 그 누구보다도 머리를 많이 썩인 사람이었다. 그런 진통과정이 부단하게 되풀이되지 않았더라면 그가 짧은 기간에 그처럼 철저하게 장백땅을 우리의 세상으로 만드는 기적을 창조하지 못하였을 것이다.≫(이제순, 5권)

이제순은 낙관적인 혁명가였습니다.

≪최채련이 면회를 갔을 때 본 이제순의 얼굴은 이전날 조국광복회조직을 꾸리느라고 사방으로 뛰어다닐 때에 늘 보고는하던 그 곱살하고 탄력있던 얼굴이 아니었다. 옥중의 남편은 본래의 모습이라고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뼈만 앙상하게 남은 처참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으로 철창밖의 아내와 면회를 하면서도 이제순은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헤어질 때에는 셈평좋게도 사식이 아니라 세계지도를 구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이 유다른 주문앞에서 최채련은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랐다고 한다.

이제순이 옥중에서 세계지도를 요구한 것은 2차대전 후의 새로운 세계구조, 대전의 결과로 새롭게 태어나 세계만방에 빛을 뿌리게 될 해방조국의 모습을 지구상에서 자기나름대로 그려보고 싶었던 욕망의 표시가 아니었겠는가고 생각된다. 이것은 그가 사형판결을 받은 다음에도 절망이나 비관에 빠지지 않고 조국의 찬란한 미래, 세계의 광명한 미래를 끝없이 그려보고 있었다는 뚜렷한 증거이다. 그는 현실에 있으면서도 미래에 산 사람이었고 죽음앞에서도 해방된 조국땅에 백화로 만발할 행복한 새 삶을 그려본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전향을 권고하는 법관앞에서 ≪공산주의는 영원한 청춘≫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하였다.≫(이제순, 5권)

이제순은 옥중에서도 동지들을 구원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위대한 수령님의 전민항쟁노선을 전파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혜산사건을 취급한 당시 일제의 문헌≪이제순은 사색과 실천을 원만하게 결합한 창조적인 인간이었다. 그는 법정과 옥중에서도 사색을 중단하지 않았다. 법정에서의 그의 사색은 공산주의자로서 일생을 어떻게 마치겠는가 하는데 집중되었다.

≪법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나 자신이 더 많은 ≪죄≫를 뒤집어쓰면서라도 동지들을 구출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혜산경찰서 구류장에 있을 때 내린 결심이었다. 실지로 이제순은 자신을 희생시킴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데 성공하였다. 면장 이주익이 체포되었을 때도 그는 우리가 한 일에 대해서는 김장군과 나, 당신밖에 아는 사람이 없다, 장군은 산에 있고 나는 절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당신만 버티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주익은 실제로 그렇게 해서 며칠만 고생을 하고 풀려나왔다. 이제순이 모든 ≪죄상≫을 자기의 한 몸에 뒤집어쓰고 나선 덕으로 신흥촌당조직책임자였던 김병철과 이주관도 극형을 면할 수가 있었다.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시킨 거기에 공산주의자로서의 이제순의 숭고한 미덕이 있었다.≫(이제순, 5권)

≪이현상도 콩그룹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할 때 우리가 내놓은 전민항쟁방침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형무소에 박달도 있었고 권영벽이랑 이제순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현상이한테 조국해방작전과 관련한 우리의 구상을 전해주었다고 합니다.≫(전민항쟁의 불길은 온 강토에, 8권)

이제순은 1945년 사형당하는 순간까지 위대한 수령님의 전사로서 견결히 투쟁하였습니다.

≪1945년 3월 10일 적들은 심문장에 이제순을 불러내다가 설복하였다. 오늘은 우리 일본 황군의 육군절이다, 당신이 이제라도 전향을 하면 사형을 면제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제순은 그 어떤 회유와 악형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장백의 이름없는 산촌에서 야학선생과 촌장으로 있던 이제순은 항일혁명에 꽃다운 한생을 바친 열렬한 애국자, 견결한 혁명투사였다.≫(이제순, 5권)

이제순의 반신상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제순의 죽음을 참으로 애통해 하시었으며 훗날 그의 반신상을 혁명열사릉에 세워주시었습니다.

≪서대문형무소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이 땅에서 저지른 죄악과 범행의 수치스러운 대명사였다. 바로 악명높은 이 형무소에서 권영벽, 이제순, 이동걸, 지태환을 비롯하여 우수한 아들딸들이 귀중한 생명을 잃고 한줌의 흙으로 되었다. 형권삼촌 역시 마포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나는 산에서 싸울 때 나라가 해방되면 서울에 가서 그들의 묘지라도 찾아보리라고 생각하였다. 그 소망을 해방이 된지 5년만에야 성취하게 된 것은 조국을 두토막으로 갈라놓은 38선 때문이었다. 패말도 없는 무덤들은 찾을 길이 없었지만 그들의 피와 숨결의 어려있는 형무소의 지붕과 담벽만이라도 보니 한결 마음이 가라앉았다. 해방이 되어 5년 세월이 흘렀지만, 옛 전우들의 조의방문조차 받아볼 수 없었던 동지들의 영령앞에서 나는 오래 참아왔던 눈물을 걷잡지 못하였다.≫(권영벽, 5권)

≪그는 오늘도 대성산 혁명열사능에서 자그마한 반신상의 겸허한 모습으로 후대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곁에는 그와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권영벽, 이동걸, 지태환도 나란히 서있다.≫≫(이제순, 5권)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박달을 1936년 12월 백두산밀영에서 처음 만나시었으며 좋은 첫인상을 받으시었습니다.

박달≪그는 산골사람다운 농민적인 순박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말과 몸가짐이 세련되고 식자도 풍부하였다. 첫 상봉으로도 무게가 있는 사나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었다.≫(불굴의 투사 박달, 5권)

≪이제순의 말대로 박달은 정말 넓은 어깨에 비해 얼굴이 작아서 어딘가 생김새가 조화롭지 못한 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외모로 보아서는 풍운아다운데가 그닥 없고 촌나무꾼 같다고 한 이제순의 말이 옳은 것 같았다. 그러나 나를 지켜보는 예리한 눈빛만은 범상치 않게 느껴졌다.

≪퍽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박달의 첫 인사였다. 겉치레가 없는 간단한 인사였으나 진정이 느껴졌다.

그 두세 마디의 투박한 말에 나는 어째서인지 그만 가슴이 뭉클해졌다.≫(불굴의 투사 박달, 5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당시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운동의 일원화를 실현할 수 있는 견결하고 유능한 국내혁명가를 찾으시었습니다.

≪우리앞에는 이러한 요구에 민감하게 호응할 수 있는 실천대책이 필요하였다. 그 대책 중에서도 선차적인 것이 바로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운동의 일원화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운동의 일원화를 실현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여 국내혁명운동에 대한 우리의 지도를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런 과제를 실행하자면 무엇보다도 국내에서 이제순과 같은 형의 견실한 혁명가들을 찾아내고 그들과의 공동노력을 통하여 조국광복회망을 빨리 늘이고 온 민족을 반일성전에로 불러일으키기 위한 대책을 세워야만 하였다.

그런 적임자로 물색된 것이 박달이었다.≫(불굴의 투사 박달, 5권)

위대한 수령님은 이제순으로부터 박달을 소개받으시었습니다.

≪우리에게 박달을 소개한 사람은 이제순이었다.

≪박달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서는 칼날 위에라도 올라서는 사내대장부입니다. 이론도 굉장합니다. 한번은 사상가랍시고 으시대는 단천내기 사자머리 하고 무슨 논쟁이 붙었는데 그 사람의 코를 아예 납작하게 만들어놓았습니다. 함남북을 개척하자면 박달을 만나야 합니다!≫

나는 이제순이 한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러나 만나보지 않고서는 그 말을 다 믿기가 어려웠다. 사실 요란한 소문을 듣고 만나본 명사들에게서 우리는 기대와 달리 얼마나 큰 실망만을 받아안았던가.≫(불굴의 투사 박달, 5권)

박달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혐오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으며 열렬한 독학가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의 생활에서 가장 질색해 하는 것이 개인주의, 이기주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불굴의 투사 박달, 5권)

≪박달 자신은 인덕이 높은 사람이었다. 통속적인 표현을 빈다면 인정이 남아돌아가는 사람이었다. 감자를 수확하는 계절이 올 때마다 그는 자기집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끌어들이었다. 금년 감자맛이 꿀맛인데 한 번 먹어보고 갈 생각이 없소 하고 잔뜩 구미가 동하게 해놓고는 슬쩍 팔을 잡아당기고는 하였다. 감자를 심지 못한 집에는 감자떡을 쳐서 갖다주게 하였다.

박달과 같은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 만일 부자였다면 굉장한 자선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돈은 없지만 이웃을 돕는 일이라면 아무것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불굴의 투사 박달, 5권)

≪박달은 소학교를 마친 다음 독학으로 구학도 공부하고 중학강의록도 보았다. 박달이 얼마나 근면한 독학가였는가 하는 것은 그가 서대문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할 때 불구의 몸으로 ≪동의보감≫을 전부 독파했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능히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혜산사건≫ 때 박달의 집을 수색한 경찰들은 깜짝 놀랐다. ≪조국광복회10대강령≫, ≪조국광복회창립선언≫을 비롯하여 ≪사회주의대의≫, ≪사회진화론≫, ≪식민지 문제의 기본지식≫, ≪무산계급의 부인운동≫, ≪실업반대투쟁선언≫, ≪사회주의사전≫, ≪제7차 국제당대회에서의 왕명의 연설≫, ≪중국공산당 창건 15주년 기념≫, ≪조선문제에 관한 테제≫, ≪당원기본상식≫과 같은 사회주의서적들이 무데기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서발막대로 휘둘러도 걸칠 것이 하나도 없는 집이었는데 책만은 부자였다.≫(불굴의 투사 박달, 5권)

박달은 위대한 수령님의 편지를 받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 했습니다.

≪권영벽이 갑산으로 나갈 때 이제순도 동행하였다. 그들이 박달을 만난 것은 1936년 12월이라고 기억된다. 박달은 그때 처음으로 권영벽을 통하여 조국광복회가 창립되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권영벽을 그에게 조선인민혁명군이 전개해온 주요활동내용에 대해서도 소개해주었다.

권영벽의 출현은 우리와의 연계를 열렬히 희망하는 박달에게 있어서 충격적인 사변으로 되었던 것 같다. 권영벽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박달이 워낙 웬간해서는 자기 감정을 밖으로 내비치지 않아서 ≪무툴쇠≫라는 별명까지 받은 사람이라는데 나의 편지를 받고서는 너무 기뻐 눈굽에 이슬방울까지 맺히더라는 것이다.≫(불굴의 투사 박달, 5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박달을 일깨워주신 후 국내당공작위원회의 위원이며 조선민족해방동맹의 책임자라는 막중한 신임을 안겨주시었습니다.

≪우리는 그때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를 소집하고 나를 책임자로 하고 김평과 박달을 위원으로 하는 국내당공작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박달은 이 위원회의 현지집행인으로서 갑산지방을 비롯한 국내 여러 지역에서의 당조직건설사업을 주관할 임무를 지니었다.≫(국내당공작위원회, 5권)

≪박달은 사고와 실천에서 교조를 적지 않게 범한 사람이었지만 그것을 교조로 대담하게 인정하고 우리의 주장을 허심하게 받아들이었다.

나는 박달에게 갑산공작위원회를 조국광복회의 산하조직으로 하되 그 명칭은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바꿀 데 대하여 제의하였다. 박달은 그 제의에 흔연히 동의하였다.≫(불굴의 투사 박달, 5권)

≪1937년 1월 갑산공작위원회의 지도핵심들은 박달의 사회하에 갑산공작위원회를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하기 위한 모임을 열고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그들은 이 회의에서 반일민족통일전선노선을 관철하기 위한 집행대책도 겸하여 토의하였다.≫(불굴의 투사 박달, 5권)

≪갑산공작위원회를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한 것은 조국광복회운동사에서 특별한 의의를 가지는 또 하나의 역사적 사변이었다. 조선민족해방동맹은 조국광복회조직을 국내깊이에로 확대시키는 하나의 발진기지로 되었다.≫(불굴의 투사 박달, 5권)

박달은 위대한 수령님께 굳은 맹약을 다지었습니다.

≪≪내 몸이 열 조각, 백 조각이 되더라도 끝까지 장군님과 뜻을 같이하여 조국광복을 위해 싸우리라는 것을 믿어주십시오. 그리고 국내당공작위원회와 조선민족해방동맹은 염려말아 주십시오.≫≫(불굴의 투사 박달, 5권)

박달은 국내당공작위원회의 국내전권대표로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의 책임자로 충실히 사업하였습니다.

≪우리는 국내당조직건설을 위한 또 하나의 조치로 조선민족해방동맹조직에서 단련된 우수한 동맹원들을 망라하는 국내당소조를 무어주었다. 역사가들은 박달을 책임자로 하는 이 소조를 ≪3인조≫라고 부르고 있다. ≪3인조≫는 기층당조직으로서의 역할과 함께 국내당건설을 위한 모체조직으로서의 역할도 동시에 수행해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었다.≫(국내당공작위원회, 5권)

≪박달은 우리와 헤어진 다음 갑산에 돌아가 국내당조직건설을 위한 사업에 온 넋과 육신을 다 바치었다. 그는 우리가 세운 방침대로 갑산과 삼수 일대를 국내당조직건설을 위한 원종장으로 꾸리고 그것을 발판으로 하여 점차 타군, 타도로 활동선을 떨치었다.≫(국내당공작위원회, 5권)

≪국내운동정형에 대한 박달의 보고를 듣고 우리는 모두 만족해하였다. 조국광복회조직망을 확대하기 위한 사업은 조선민족해방동맹의 전위투사들의 줄기찬 노력에 의하여 빠른 속도로 진척되어가고 있었다. 조국광복회조직은 갑산지방을 비롯한 현재의 양강도일대는 말할 것도 없고 멀리 성진, 길주, 단천, 흥원을 비롯한 동해안 일대의 주요지역들에 널리 뻗어가고 있었다. 투쟁방법도 훨씬 세련되어갔다.≫(국내당공작위원회, 5권)

≪박달은 당조직건설과 조국광복회조직망을 확대하는 한편 우리 혁명의 군사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사업에도 큰 힘을 넣었다.≫(국내당공작위원회, 5권)

≪우리는 이병선이 밀영에 왔을 때 그를 통하여 박달에게 국내당조직성원들과 조국광복회 청년핵심성원들로 생산유격대를 조직할 데 대한 과업을 주었다.

박달은 생산유격대를 조직하기 위한 첫 준비작업으로 자위단을 이용하였다. 일제는 ≪향토보위≫의 미명아래 자위단을 대대적으로 확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장까지 공급해가면서 단원들을 훈련시키었다. 생산유격대원들을 이 조직에 모조리 밀어넣는다면 그들이 모두 무기에도 정통하고 적들의 신임도 많이 받을 것이 아닌가. 유사시에는 한꺼번에 왁 들고일어나 놈들에게 총부리를 돌려댈 수 있을 것이다. 박달은 이런 타산을 가지고 걸치기자위단 부단장이라는 직위를 이용하여 적들이 규정해놓은 입단연령에 해당되는 대부분의 생산유격대원들을 자위단에 빠짐없이 입단시키고 그들이 거기에서 지도적인 자리를 따내게 하였다.

그는 북선반일유격대조직과 관련된 우리의 방침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하였다.≫(국내당공작위원회, 5권)

≪나는 박달과 김정숙에게 우리의 공작원으로 활동할 수 있는 유망한 유학생들을 물색해보라는 임무를 주었습니다.≫(현해탄 너머에서도, 8권)

박달은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침대로 망명객식 사업방식을 지양하고 무명당조직과 같은 창조적인 방식으로 사업하였습니다.

≪나는 무엇보다 망명객식의 사업방법을 퇴치해야 할 것 같다는 의견을 주었다.

≪지금 국내동무들의 활동을 보면 망명객식방법으로 일하고 있는데 이것은 백해무익한 방법입니다. 낮에는 산에 숨어있다가 밤에 가만히 내려와서 사람들을 만나게 되니 조직원들은 놈들의 감시가 두려워 그들을 만나기 싫어합니다. 망명객식방법으로는 조직을 확대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적후지하활동을 하는 동무들이 생산에 참가하면서 합법적인 활동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얻어야 합니다. 망명객식사업방법을 즉시 버려야 합니다.≫

박달은 내 말을 듣고나서 얼굴을 붉히었다.

≪나도 사실은 망명객식방법으로 사업하였습니다. 우리는 정면충돌만 생각하였지 때에 따라서는 우회적인 방법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습니다.≫≫(국내당공작위원회, 5권)

≪당조직을 확대하고 당대열을 늘이기 위한 박달의 사업방법에서 특이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명당조직의 결성이다. 무명의 당조직이란 정식명칭은 없으나 실지로는 비밀리에 활동을 벌이고 있는 당원들의 당조직을 말한다. 이런 조직은 조국광복회의 내부에도 있었다.

무명의 지하혁명조직은 적들의 탄압이 극도에 달했을 때 조직을 건설하는 하나의 독특한 방법이다.≫(국내당공작위원회, 5권)

보천보전투 당시 보천보 시가박달은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을 적극 방조하였습니다.

≪나는 또한 박달에게 보천보시가의 약도를 그려오며 일제의 국경경비정형을 상세히 조사보고할 데 대한 특별과업을 주어 밀영을 떠나보냈다. 박달은 우리가 준 과업을 책임적으로 수행하였다. 그가 그린 약도와 조사보고자료는 보천보전투의 성과를 보장하는데서 큰 기여를 하였다.≫(불굴의 투사 박달, 5권)

3.1월간을 찍던 등사기≪우리가 ≪3·1월간≫ 발행에 필요한 출판기자재 명세를 작성해가지고 그 해결방도를 한창 모색하고 있을 때 박달이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성능좋은 새 등사기 2대를 해결하였다.≫(불굴의 투사 박달, 5권)

박달은 ≪혜산사건≫ 이후에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박달은 위대한 수령님이 파견하신 백두여장군 김정숙동지를 만나뵙고 수령님의 방침을 전달받았습니다.

≪박달은 일제교형리들이 국내당조직성원들과 조선민족해방동맹성원들을 마구 검거하고 있는 살벌한 환경속에서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미 꾸려놓은 기층당조직들과 조국광복회조직망을 지하에 은밀히 보존하기 위하여 각방으로 노력하였다.≫(불굴의 투사 박달, 5권)

≪장백현당과 장백현조국광복회조직의 지도부는 권영벽, 이제순, 서응진, 박인진 등의 체포로 해체상태에 이르렀지만 박달, 김철억, 이용술 등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민족해방동맹지도부는 그대로 살아움직이고 있었다.≫(≪혜산사건≫을 겪으면서, 6권)

≪그래서 이번에는 국내공작경험이 풍부한 김정숙을 대진평에 파견하였다. 그 동안 단천, 북청, 흥원, 신포를 비롯한 동해안 지구에서 조직을 확대해가던 박달은 대진평에 돌아와 곤경을 겪고 있는 조직을 수습하고 있었다. 김정숙은 천신만고 끝에 박달을 만나고 그와의 회견결과를 우리에게 보고하였다.≫(불굴의 투사 박달, 5권)

몸은 포승에 묶였어도 태연자약한 박달박달은 체포된 후, 고문으로 척추가 부러졌으나 투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박달과 김철억은 김철억의 4촌형인 김창영의 변절로 하여 1938년 9월과 10월에 적들에게 체포되었다. 그 후 이용술(이경봉)도 붙잡혔다.

교형리들은 박달에게 상상하기 어려운 고문을 들이대었다. 그들이 알고 싶어한 것은 우리의 위치와 조선민족해방동맹의 조직성원명단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모진 고문도 철석같은 의지를 지닌 박달을 굴복시킬 수 없었다. 적들은 처음에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다가 증거부족으로 무기징역형을 내렸다.

살인귀들의 고문장은 박달의 육체를 여지없이 파괴해버리었다. 척추가 부러지고 다리뼈가 부서졌다. 그렇지만 그의 넋은 변하지 않았고 동요하지도 않았다. 그는 불구의 몸으로 우리의 후대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옥고를 치르며 7-8년동안이나 기적적으로 역경을 이겨냈다.≫(불굴의 투사 박달, 5권)

≪이현상도 콩그룹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할 때 우리가 내놓은 전민항쟁방침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형무소에 박달도 있었고 권영벽이랑 이제순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현상이한테 조국해방작전과 관련한 우리의 구상을 전해주었다고 합니다. . . .

김삼룡이현상과 마찬가지로 김삼룡도 서대문형무소에서 박달이네를 만났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 두 사람의 친교가 깊어진 것 같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박달을 서울병원에 입원시키고 온갖 성의를 다해 보살펴준 사람이 김삼룡이었습니다. 박달이 우리의 부름을 받고 평양으로 들어올 때에도 그가 뒤에서 조직사업을 했습니다. 그는 박달을 통해 나에게 문안편지도 보내왔습니다.≫(전민항쟁의 불길은 온 강토에, 8권)

박달은 위대한 수령님의 배려로 조국과 수령님의 품에 안길 수 있었으며 위대한 수령님의 커다란 사랑과 은정속에 국가적인 치료를 받았습니다.

≪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사무국장을 서울로 보내어 박달을 평양으로 데려오게 하였다. 이전 날의 박달은 하루밤에도 수백 리 길을 날아다니던 박달나무처럼 단단하고 강기가 있는 혈기왕성한 사나이였다. 그러나 그 날 남의 등에 업혀 내앞에 나타난 박달은 고문으로 하반신이 마비되고 뼈만 앙상하게 남아 옛 모습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처참한 몰골의 불구였다. 피골이 상접한 그의 갑삭한 몸은 한 줌안에라도 들것처럼 작아 보이었다.

그래도 박달은 두 팔로 나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좔좔 흘리었다. 살아서 나를 다시 만났으니 죽어도 원이 없다고 하였다. 박달을 진찰한 의사들은 사형선고와도 같은 진단을 내리었다. 구원할 가망이 있다고 말하는 의사는 한 명도 없었다. 박달은 감옥문을 나설 때 이미 죽음의 그림자를 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우리 집 옆에 박달의 집을 잡아주고 그를 소생시키기 위한 면밀한 치료대책을 세웠다. 명약이란 명약은 다 구해다주고 명의란 명의는 다 데려다가 그의 치료를 전담하게 하였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집무실에 오갈 때면 문병을 하고는 하였다. 어느 해인가는 남포 우산장에 젖소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젖소를 가져다가 우유를 짜서 그에게 공급하도록 하였다. 3년간의 큰 전쟁이 있은 후에는 주을휴양소에 ≪박달각≫을 따로 내오고 그를 치료해주었다. 박달이 주을에서 요양생활을 할 때마다 우리는 비행기를 동원하여 그가 좋아하는 남새를 평양에서 실어다 공급해주었다.≫(불굴의 투사 박달, 5권)

박달의 수기박달은 최후의 순간까지 조국과 혁명에 충실하였습니다.

≪박달은 한평생 자기의 손발이 되어주고 간호사가 되어준 충실한 아내 현금선과 의료일군들의 방조를 받으며 수기 ≪조국은 생명보다 더 귀중하다≫와 항일혁명투쟁시기 갑산지방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을 반영한 자서전적 장편소설 ≪서광≫을 쓰기 시작하였다. 심장의 피를 찍어 한자한자 쪼아박듯이 쓴 그의 글줄들은 그속에 담긴 혁명에 대한 열화같은 충정으로 하여 사람들의 가슴을 흔들어주었다.

수많은 독자들이 그의 앞으로 독후감과 감사편지를 보내왔다. 박달은 자기의 글이 삶의 귀중한 길동무로 되고 있다는 독자들의 편지에서 고무를 받으며 여러 편의 글을 연방 써냈다.≫(불굴의 투사 박달, 5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박달의 죽음을 참으로 애통해 하시었으며 그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치루시었으며 그의 동상까지 세워주시었습니다.

≪우리는 박달의 집에서 역사상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당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를 열고 그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할 데 대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고인을 발인할 때 나는 영구와 함께 나갔다. 백두산에서 박달과 헤어질 때 멀리까지 바래주지 못했던 그 아쉬움이 항상 심중에 매달려 있었는데 영결하는 순간에나마 그를 바래주고 싶었다. 어떻게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지 손수건이 푹 젖어있었다. 나는 김책을 잃었을 때처럼 또 식사를 하지 못하였다.≫(불굴의 투사 박달, 5권)

≪우리는 그 후 박달이 해방 전에 쓰던 보천군 운흥리의 집을 원상대로 복구하고 집앞에 그의 동상을 세워주었다. 아마 이것이 우리 나라에서 혁명가들을 위해 건립한 최초의 동상일 것이다.≫(불굴의 투사 박달, 5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박달은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의 일원화를 실현하는데서 커다란 공헌을 국내혁명가로, 최후까지 혁명을 굴함없이 싸운 투사로 높이 평가하시었습니다.

≪참으로 박달은 조선인민혁명군이 백두산으로 나온 이후시기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의 일원화를 맨처음으로 실현한 국내혁명가의 당당한 대표자였으며 우리를 위하여 일도 제일 많이 하고 고생도 많이 겪은 우리의 국내전권대표였다. 박달과 같은 이런 투사들의 덕으로 우리는 해방 직후 그처럼 복잡한 정세속에서도 단시일안에 당을 창건하고 부강한 자주독립국가를 일떠세울 수 있었다.≫(불굴의 투사 박달, 5권)

≪박달은 원쑤와의 싸움에서 날개를 잃었지만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혁명을 위해 굴함없이 싸운 투사이다.≫(불굴의 투사 박달, 5권)

 조국광복회 주요 조직 분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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