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8월 26일(월)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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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와 더불어≫ 강의 (4)
- 제8장 ≪제1차 북만원정≫부터 제11장 ≪광복의 새봄을 앞당겨≫까지

통일여명 편집위원 한철규

안녕하십니까. ≪세기와 더불어≫강의 네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주로 항일무장투쟁시기 첫째 단계의 후반부를 학습하도록 하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조선인민혁명군이 창건된 1934년 봄부터 조국광복회가 창건된 1936년 봄까지입니다. 물론 항일무장투쟁시기 첫째 단계는 남호두회의가 있었던 1936년 2월까지이므로, 엄밀히 말해 오늘 강의는 째 단계를 넘어 째 단계에 걸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회고록으로 보면 8장에서 11장, 그러니까 3권 마지막 장에서 4권 마지막 장까지입니다.

≪우리는 1932년 4월에 첫 혁명적 무장력으로서의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고 그것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확대발전시켰으며 바로 이 조선인민혁명군에 의거하여 일제를 반대하는 무장투쟁의 불길을 높여나가면서 전반적 반일민족해방투쟁을 새로운 앙양에로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조선인민혁명군의 영도와 무력적 담보 밑에 당창건의 조직사상적 준비도, 조국광복회조직과 통일전선운동의 확대발전도, 전민항쟁 준비도 성과적으로 이끌어나갔습니다.≫

이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회상교시는 오늘 우리가 학습할 부분에 나오지는 않지만(그럼 어디에 나오나요?) 워낙 중요한 내용일 뿐 아니라 이번 강의내용을 관통하기에 먼저 인용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학습내용은 한마디로 ≪조선인민혁명군창건으로부터 조국광복회창건까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이에 제1, 2차 북만원정이 있으며 그 북만원정 사이에 다홍왜회의와 유격구해산조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2차 북만원정에서 돌아오는 중에 남호두회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국광복회 창건은 남호두회의의 결정이고 항일무장투쟁 둘째 단계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앞에서 인용된 회상교시의 핵심이 무엇인가요? 이 회상교시가 몇권 어디에 나오는지는 몰라도 그 내용의 핵심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회상교시를 6글자로 요약하면, 바로 선군혁명노선입니다. 지난 시간에 함께 학습했지요.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 우리 시대의 최강의 혁명전략으로 심화발전시키시고 계시는 선군혁명사상은 그 뿌리가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항일무장투쟁에 있습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항일혁명 전기간 무력건설을 당건설, 통일전선체건설보다 확고히 앞세우셨습니다. 그 이유는 식민지민족해방투쟁에서 혁명무력, 폭력적 진출이 결정적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조선인민혁명군은 항일혁명기간 우리 혁명의 중추적 핵심역량이며 정치적 향도자이며 민족적 이익의 무력적 담보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인민혁명군을 한마디로 군대이자 당이며 정권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조선인민혁명군이 곧 당인 이유는 조선인민혁명군내의 당위원회사실상 조선혁명의 당중앙 역할을 수행하였기 때문입니다. 동지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우리 당은 1926년 ≪ㅌ.ㄷ≫에 그 뿌리를 두고 1930년 ≪건설동지사≫를 그 모체로 합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국제당의 1국1당제원칙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조선혁명을 책임적으로 수행할 참모부를 자주적으로 건설하기 위하여 만주와 북부조선에 수많은 기층당조직부터 건설하시었습니다. 특히 동만유격구에서의 항일혁명투쟁은 공산주의지도핵심을 발굴육성하는데서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군대내의 당조직만이 아니라 바로 이 만주와 북부조선에 퍼져있는 수많은 기층당조직의 영도중심이었던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학습할 국내당공작위원회도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의 지도를 받는 당조직이었습니다. 해방직후인 1945년 10월 10일 북조선공산당중앙조직위원회(이런 명칭은 외워두어야 합니다)를 창건하면서 명실상부한 당중앙이 건설되었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와 국내당공작위원회가 없었다면 이처럼 빠르게 당중앙을 건설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조선인민혁명군사령관이시며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위원장이신 김일성주석님   그러므로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사령관이시면서 동시에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위원장이신 것입니다.(그럼 국내당공작위원회위원장은 누구인가요?) 그러고보면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당위원장보다 먼저 혁명군사령관이라는 지위에 오르신 셈입니다. 역시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도 조선노동당총비서보다 먼저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국방위원장의 지위에 오르시었습니다. 어찌 보면 사소한 듯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선군혁명노선은 이처럼 모든 측면에서 일관되게 관철되고 있는 것입니다. 해방직후에도 조선인민군(1948년 2월)이 조선노동당(남북조선노동당의 합당-1949년 6월)보다 먼저 창건되었다는 점도 참고로 밝혀둡니다.

조선인민혁명군과 관련하여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그 명칭입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경우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이라는 명칭도 사용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바로 대답할 수 있다면 회고록 학습에 충실하였다는 증거로 됩니다. 뒤에 나오겠지만 다홍왜회의에서의 논쟁의 초점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자주성문제였습니다. 당시는 국제당의 1국1당제원칙과 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에 대한 교조적 견해가 압도적이었으며, 조선혁명을 독자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조선연장주의≫로 매도되었던 시절입니다. 그래서 조선인민혁명군을 독자적으로 구성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사리정연한 주장과 현명한 대처에 의하여 결국 조선인민혁명군이 건설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홍왜회의의 쟁점을 국제당에 보고한 위증민이 위대한 주석님의 견해가 옳았음을 확인하며 조선인민혁명군을 동북항일연군에서 분리시킬 데 대한 구체적 대책까지 마련하여 주었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니 동지 여러분께서는 깊이 새겨두기 바랍니다.

그런데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이 동북항일연군에서 분리되면 동북항일연군자체에 커다란 타격으로 될 뿐만 아니라 조중통일전선에서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헤아리시었습니다. 더불어 중국동북지역에서 조선혁명을 수행하여야 하는 조건에서 중국민중으로부터 지지와 협력을 받는 데에도 불리한 측면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시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인민혁명군을 동북항일연군으로부터 분리하시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우리가 요구한 것은 자주권이었지 분권은 아니었다. 우리는 조선사람들이 제한과 구속과 방해를 받지 않고 조선혁명을 해나갈 수 있는 자주적 권리를 인정하고 존중할 것을 요구한 것이지 세력분배를 요구하지 않았다.≫고 명쾌히 밝히시었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조선인마을에서는 그대로, 중국인마을에서는 동북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이라는 명칭을 융통성있게 사용하였습니다. 결과 어디서나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활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 조선인민혁명군의 명칭과 관련하여서는 더욱 중요한 내용이 숨겨져 있습니다. 본질은 조선인민혁명군인데 어느 마을인가에 따라, 경우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점에 대하여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우리가 운동의 그 어떤 형식적인 측면보다는 본질적인 내용을 더욱 중시한 것은 지금의 시점으로 평가해보아도 참으로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것이었다.≫라고 긍지높이 회상하시었습니다. 그러시면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인민혁명군으로 통합개편하는 과정에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취한 원칙적인 입장과 용의주도한 정치적 아량은 그 후 일제를 반대하는 조중인민의 공동투쟁, 특히 중국 동북지방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라고 하시었습니다. 이 현상보다 본질을 중시하고, 원칙적이고 용의주도한 조치오늘 우리 시대에도 분명히 응용되고 구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숙제로 남겨두겠습니다. 힌트를 하나 주면, 조선인민혁명군이든 동북인민혁명군이든 명칭이 어떻든 민중과 적들은 모두 ≪김일성군≫으로 호칭하였다는 점입니다.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동지는 주체의 통일혁명전략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고 크게 칭찬을 받을만한 동지입니다.

조선인민군편제도   조선인민혁명군은 마촌작전(소왕청방어전투)을 총화하며 이루어낸 결실입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5000명의 적군을 2개 중대로 맞선 마촌작전을 총화하시면서 반일인민유격대의 통일적인 지휘체계의 필요성을 절감하시었습니다. 이를테면 동녕현성전투와 같은 공격은 유격대들이 연합하여 전개하였는데, 마촌작전과 같은 방어는 따로따로 전개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입니다. 이전에 유격대역량이 미약했을 때, 일본군이 전면적인 포위압살책동을 벌이지 않았을 때와는 상황이 달라진 것입니다. 한마디로 정세발전이 반일혁명역량의 핵심대오인 반일인민유격대의 통일적 지휘체계를 확립하는 것이 초미의 과제로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릇 고정불변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정세가 변화면 응당 전략전술도 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당시 항일혁명의 정세발전이 조선인민혁명군을 통한 통일적인 지휘체계를 요구하였다면, 오늘 통일혁명의 정세발전은 어떤 통일적 지휘체계를 요구하고 있습니까? 조미공동코뮈니케와 6.15공동선언이 발표된 조건에 맞게 전국적인 범위에서 통일혁명운동을 통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요? 이 역시 좋은 토론주제라고 할 수 있으므로 숙제로 내주겠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창건되었으니 이제 대부대전술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래서 기획된 것이 북만원정입니다. 항일시기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 친솔하신 원정은 남만원정과 북만원정이 있는데, 그중 남만원정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학습했습니다. 복습하는 의미에서 하나 물어보지요. 왜 위대한 주석님께서 남만원정을 계획하시었나요? 이 정도는 바로 답이 나와야 합니다. 정답은 양세봉민족주의군대와의 합작을 실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직하였으면 당연히 전투를 하여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군대는 싸움을 하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니까요. 그럼 조선인민혁명군을 조직하였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역시 전투를 하여야지요. 그래서 계획된 것이 북만원정입니다. 그런데 남만원정이 양세봉민족주의군대와의 합작, 이홍광, 이동광부대와의 상봉을 위해서였다면 북만원정은 1차가 주보중을 비롯한 중국인민혁명군을 지원하기 위해서였으며 2차가 북만의 김책, 최용건부대와의 상봉을 실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남만원정에서든 북만원정에서도 이홍광, 이동광부대와 김책, 최용건부대와의 상봉과 결합은 실현되지 못하였습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이 점을 두고두고 아쉬워하시었습니다.

주보중   북만원정에서 가장 덕을 본 부대는 바로 주보중부대였습니다. 예술영화 ≪조선의 별≫을 본 동지라면 부상당한 몸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주석님을 향해 눈속을 쓰러질 듯 달려오는 주보중의 모습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마 위대한 주석님의 지도와 방조가 없었다면 주보중은 중국혁명에 오늘의 이름을 남기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보중은 참으로 행운의 혁명가, 사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유격전의 묘술과 방법을 전수해 주시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피붙이와 같은 전사들까지 떼어주시었습니다. 위대한 주석님의 지도, 방조는 이에 그치지 않고 중국의 동북지역이 장개석치하로 넘어가 힘든 국내전쟁을 치르던 시기, 강건, 박락권, 임춘추와 같은 혁명가들을 보내주시고 군사적,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으시었습니다. 이제 막 건국한 청소한 공화국이 미제국주의와 맞서 힘겨운 싸움을 하는 중에 이처럼 막대한 지원을 하였다는 것은 세계 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역사에 보기드문 모범으로 됩니다. 중국인민해방군이 조선의 조국해방전쟁에 참전한 것은 기실 조선인민혁명군, 조선인민군이 중국해방전쟁, 동북해방전쟁에 참전한 데 대한 보답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여튼 자기 나라 수령을 잘 만나는 것도 큰 행운이지만 이웃 나라 수령도 잘 만나는 것도 큰 행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주보중은 자기의 글에서 ≪항일연군 제2군은 동시에 ≪조선인민혁명군≫이었다. … 항일유격전쟁 중 중조인민은 공동사업을 위하여 선혈로 얽혀져 있었다≫라고 함으로써 조선인민혁명군의 실체를 인정하고 공동투쟁노정에서 역사적으로 존재하였던 조중항일무력의 연합을 격찬하였다.≫고 회상하시면서 간접적으로 주보중의 심정을 대변하시었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제1차북만원정도

1차 북만원정에서 돌아오니 유격구가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고 민족배타주의자들과 좌경종파주의자들이 극좌적인 반≪민생단≫망동을 일으켜 동만의 수많은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을 ≪민생단≫을 몰아 처형한 것입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무려 2000여명이 ≪민생단≫으로 몰려 학살당했다고 회고록에 서술하시었습니다. 이 숫자는 위대한 주석님의 말씀처럼 항일무장투쟁시기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동지들의 숫자보다 많은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여 적들손에 죽은 숫자보다 동지들손에 죽은 숫자가 더 많았던 것입니다. 그 속에는 ≪여투사들의 절개≫편에서 달비일화로 유명한 이계순의 남편이자 동만지역에서 신망높고 유능한 김일환도 있었습니다. 최현도 오백룡도 유경수도 김주현도 오빈도 양성룡도 모두 민생단감투를 썼었으니 반≪민생단≫투쟁이 얼마나 극좌적으로 진행되었겠습니까. 동지 여러분도 마찬가지겠지만, 회고록의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참으로 분통터지는 심정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좌경이 혁명운동에 얼마나 치명적인 후과를 끼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례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우경이 공개적인 반혁명이라면 좌경은 은폐된 반혁명이고 우경이 암이라면 좌경도 그에 못지 않은 독버섯이다. 우경과 좌경은 혁명이라는 하나의 거목 위에 기생하면서도 서로 등을 돌려대고 동상이몽하는 듯하지만 실은 하나의 맥락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 개인이 좌경을 하면 집단을 해칠 수 있고 집권당이 좌경을 하면 인민을 잃어 혁명을 망칠 수 있다는 진리를 명심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도 고수할 수 없다. 이것은 반≪민생단≫투쟁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교훈이며 좌경의 침해로 하여 막대한 출혈을 당한 일련의 나라들에서의 뼈아픈 체험이 전세계 공산주의자들에게 보내는 호소이다.≫고 절절하게 말씀하시었던 것입니다. 해방직후 남측에서 남로당에 의해 진행된 좌경모험주의적인 투쟁들이 어떠한 후과를 끼쳤는지, 6-70년대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의 악폐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운동대오에 존재하는 즉각적인 사회주의혁명이나 좌경적 폭력투쟁을 선동하는 세력에 대하여 경각성을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다홍왜 및 요영구회의를 지도하신데 대하여 쓴 출판물그럼 반≪민생단≫투쟁과 관련하여 다홍왜에서 전개된 논쟁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제1차 북만원정으로 지칠대로 지치시고 뼈만 앙상하게 남으신 체력으로 1대 백의 간고한 사상투쟁을 전개하시었던 것입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 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이처럼 생사를 건 혈전처럼 치열한 사상전을 전개하시었던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조선혁명의 주체성을 고수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조선혁명을 지향하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을 두고 ≪조선연장주의≫니 뭐니 하며 매도하고 나아가 ≪민생단≫감투를 씌우는 중국인민족배타주의자들과 이를 추종하는 좌경종파주의자들과의 일대 사상전이 바로 다홍왜회의였던 것입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무리죽음을 당하고 있는 조선공산주의자들, 조선인들을 구원하고 조선혁명의 자주성을 수호하기 위하여 말그대로 헌신분투, 고군독전하시었던 것입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이를 두고 ≪우리는 좌절에서 돌격에로 이전하기 위하여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조선민족과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자주적 권리를 침해하는 사람들과 맹호가 되어 싸웠다. 다홍왜회의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자주의 깃발을 들고 조선혁명의 주체노선을 견지하고 그 권리를 옹호고수하기 위하여 벌인 대사상전이었다. 만일 우리가 인정사정없는 좌경의 철권앞에서 질겁하였거나 희생을 조금이라도 두려워했더라면 우리는 미친 듯이 질주하는 그 좌경의 무한궤도밑에서 혁명을 구원하지 못하였을 것이다.≫라고 회상하시며 강조하시었습니다.

김일성주석님께서는 과장을 모르십니다. 그런 위대한 주석님께서 ≪맹호≫, ≪대사상전≫, ≪무한궤도≫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는 점에 우리는 특히 주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조선혁명에서 주체를 확립하는 과정이 이처럼 간고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해방이후에 조선노동당내에서, 6-70년대 쏘련의 우경수정주의와 중국의 좌경교조주의의 환경속에서, 90년대 고난의 행군과정에서 여전히 사활적인 과제로 제기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혁명과 건설에서 자주성을 견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처럼 절절하게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 90년대 그 어려웠던 시절인 1997년 6월 ≪혁명과 건설에서 주체성과 민족성을 고수할 데 대하여≫라는 불후의 노작을 발표하신 점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동지들은 이 점을 심장깊이 새기어 앞으로 모든 혁명투쟁, 나아가 건설사업에서 주체성과 민족성을 생명처럼 간직하고 이를 고수하기 위하여 우리 시대의 맹호가 되고 사상전의 전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홍왜회의의 연속이었던 요영구회의는 한 가지 안건을 더 토의함으로써 유격구의 정황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격구해산안입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 주동적으로 발기하신 이 제안은 당시 유격구를 사면팔방으로 포위해 들어오는 일본관동군, 위만군의 위공작전을 근본적으로 무력화시키는 전략적 묘안이었습니다. 국가적인 후방이 없이 활동하는 유격대에게 유격근거지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해방지구형태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해방지구형태의 유격구가 필요한 시기는 지나간 것입니다. 해방지구형태의 유격구에 부여된 역사적 임무가 성과적으로 달성되고 일본군의 고립압살책동이 극심한 조건에서 이런 형태의 유격구를 더이상 고집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유격구를 주동적으로 해산하고 대부대로 유동하며 넓은 대지에 혁명의 씨앗을 뿌리자! 바로 이것이 새로운 정세에 맞는 새로운 전략전술인 것입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유격구해산과 관련하여 혁명이란 대하나 장강과 같은 것이기에 쉼없이 전진하여야 한다고 비유하시면서 ≪혁명은 자기가 세운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새로운 환경과 조건에 맞게 전술을 부단히 갱신해야 한다. 이런 갱신이 없다면 혁명은 침체와 답보를 면치 못하게 된다.≫고 가르치시었습니다. 그러시면서 ≪하나의 전략을 성공에로 이끄는 과정에는 열 가지 전술이 있고 백 가지 전술이 있을 수 있다. 하나의 전략을 위해 한 가지 처방만을 내세우는 것은 혁명에 대한 창조적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교조이다. 교조는 자기의 손발을 자기 스스로 얽어매는 미욱한 자살행위이다. 교조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생동하고 박력 있는 정치를 볼 수 없으며 도도하고 활력에 넘친 혁명의 장강을 만날 수가 없다.≫고 힘주어 강조하시었습니다. 회고록에는 누구나 쉽게 혁명을 이해하게 하기 위하여 수많은 비유가 등장하지만 이처럼 힘있고 생동감있는 비유는 또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사고와 행동에서 교조주의를 강력하게 반대하신 것입니다. 사실 교조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사대주의를 반대하는 것과 함께 주체사상의 두 가지 출발점 중의 하나입니다. 주체사상의 창조성이란 개념도 기실은 교조주의에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는 위대한 주석님의 ≪혁명은 장강≫이라는 비유를 늘 명심하면서 조성된 정세에 맞는 신축성있는 전략전술, 놓여진 상황에 맞는 탄력적인 임기응변에 능란해야 할 것입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유격구해산제안은 대부분의 중국공산주의자들에게서도 지지를 받았습니다. 덕분에 반≪민생단≫투쟁에 대한 사상전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격구민중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유격구를 생명처럼 여겨왔던 유격구민중들이니 당연한 반응이라고 할 것입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이 난제를 어떻게 해결하시었나요? 그것은 바로 정치사업입니다. ≪설복하고 설복하고 또 설복하자!≫는 구호가 말해 주는 것처럼 유격구해산과정은 일방적인 결정이나 완력이 아니라 순전히 정치사업의 방법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힘이나 명령으로 밀어부치는 것이 관료주의방식, 반동들의 방법이라면 사상과 교양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공산주의방식, 혁명가들의 방법입니다. 우리 동지들은 위대한 주석님의 정치사업을 선행하는 사업방법, 정치사업으로 풀어나가는 사업방법을 깊이 체득하여 이를 모든 대중사업에 철저히 구현하여야 할 것입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유격구민중들의 생계를 위한 물자를 해결하기 위하여 대왕청집단부락습격과 같은 전투도 여러 번 조직하시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해방지구형태의 유격구는 해산되었지만 왕청, 연길, 안도, 화룡일대를 반유격구로 유지하시었으며, 이를 위하여 최현부대와 같은 독립여단이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하도록 조치하시었습니다. 결국 보이는 유격구는 해산되었지만 보이지 않는 유격구가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유격구의 혁명가들과 민중들이 드넓은 만주지역에 퍼지면서 더욱 많은 민중들이 혁명화되고 보다 많은 지역이 혁명화된 것입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유격구해산에 대하여 ≪요영구회의는 인민혁명군이 유격구역을 사수하기 위한 전략적 방어로부터 전략적 공격의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는 전환적 계기로 되었다. 이 회의의 결정으로 하여 우리는 유격구역의 협소한 범위를 벗어나 동북과 조선의 광활한 판도에서 적극적인 대부대유격전을 영활하게 벌일 수 있는 창창한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간도 5개 현에 국한되었던 인민혁명군의 활동무대는 수십 배로 확대되었다.≫고 회상하시었습니다.

유격구를 해산한 후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 친솔하시는 조선인민혁명군은 제2차 북만원정을 전개하였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북만원정을 전개한데에는 북만의 전우들과 상봉하고 결합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북만혁명을 지원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습니다. 당시 동만은 조선혁명의 책원지, 중심지로서 전 만주지역과 북부조선의 끌끌한 혁명가들이 모두 모여든 곳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동만유격구라는 용광로를 통해 단련된 혁명가들이 북만을 지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됩니다. 이는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지역본위주의, 지역이기주의를 반대한다는 것으로도 됩니다. 오늘 우리 운동대오에게 지역본위주의, 지역이기주의는 없는지 한번 돌아보았습니다. 항일혁명시기 지역혁명이 조선혁명 위에 놓일 수 없듯이 오늘 통일혁명시기 지역혁명이 전국적인 조선혁명위에, 일부 지역운동이 남측 전체의 운동 위에 놓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는 지역운동만이 아니라 부분운동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것입니다. 한편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제1차 북만원정에서도 그러셨지만 제2차 북만원정에서도 직접 손때 묻혀 키워온 살붙이같은 혁명전우들을 북만의 혁명대오에 뚝 떼어주시었습니다. 이런 결심도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과연 우리 주석님이 아니시라면 그 누가 이처럼 하실 수 있겠습니까. 결국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항일무장투쟁의 두번째 단계, 항일무장투쟁의 전성기를 사실상 혼자서 개척하신 것입니다. 밑천이 되는 부대가 하나 있기는 했지만 초기에는 만나시지 못하셨으니 정말 빈손으로 시작하신 셈입니다.

조선인민혁명군 제2차 북만원정도

제2차 북만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경박호의 남쪽인 남호두에서 중요한 회의가 있었습니다. 항일무장투쟁 둘째 단계가 시작되는 전략적인 회의입니다. 남호두회의에서도 항일무장투쟁노선, 민족통일전선노선, 자주적 당창건노선이라는 3대 노선이 논의되고 그 집행대책이 논의되었습니다. 남후두회의는 다홍왜, 요영구회의에서 쟁점이 되었던 조선혁명의 자주성에 대한 문제에 대한 국제당의 결론을 전달받은 조건에서 열리었습니다. 누가 전달해주었지요? 예, 바로 위증민입니다. 위증민은 다홍왜에서의 논쟁과 조선공산주의자들의 고충에 대하여 애석해 한 중국공산주의자입니다. 그 위증민은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 제출하신 견해와 입장이 옳다는 국제당의 결론을 받아왔던 것입니다. 극좌적인 반≪민생단≫투쟁으로 모함을 받았던 수많은 조선혁명가들이 누명을 벗고 조선혁명을 독자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당당한 명분을 받아온 것입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그 위증민을 포옹하시면서 조선혁명을 위해 헌신한 위증민을 결코 잊지않겠다고 다짐하시었다고 하십니남호두회의가 열렸던 장소다. 실제로 회고록 8권에서 위증민의 죽음을 두고 총괄적으로 회상하십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국제당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조선혁명의 구호를 드는 것은 죄로 되지 않겠다는 것과 그것은 국제당이 조선공산주의자들에게 응당히 분공주었어야 할 신성한 의무이며 1국1당제 원칙으로도 빼앗아낼 수 없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의 당당한 권리라는데 대해서도 명백하게 결론하였다.≫고 회상하시었습니다. 이로써 조선혁명은 급속히 상승비행할 수 있는 날개를 단 셈입니다.

국제당은 당시 제7차대회를 열고 반파쇼인민전선을 기본노선을 제출하였습니다. 쏘련출신이 아니지미트로프불가리아출신 지미트로프가 국제당의 수위에서 파시즘을 반대하여 국제적 범위에서 투쟁할 데 대하여 호소한 것은 두가지 점에서 중요한 사실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국제당의 활동이 독자적인 매개 공산당들의 활동에 입각하여 진행되게 되는 새로운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반파쇼인민전선이 국제당의 조직노선으로 되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는 조선혁명의 주체성과 민족성을 고수하여 오신 위대한 주석님께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조선혁명의 주체를 튼튼히 세우고 민족통일전선노선을 확고히 견지할 데 대한 신심을 더욱 굳건히 해주는 의의가 있었다고 할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열리는 남호두회의는 한 마디로 웃으면서 시작하여 웃으면서 끝난 회의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남호두회의는 한마디로 말하여 조선공산주의운동과 반일민족해방투쟁 역사에서 처음으로 주체를 완전히 확립한 회의라고 할 수 있다. 이 회의에서 채택된 일련의 결정들은 그 이후 여러 단계의 혁명에서 조선의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주체적 입장을 튼튼히 견지하고 어떤 역경속에서나 그것을 민족을 첫째가는 생명으로 변함없이 틀어쥐고 나갈 수 있게 하였다.≫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자주독립을 이룩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 민족대단결을 바탕으로 하는 전민항쟁에 있고 민족대단결이 자력독립의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적 문제라는 것은 우리가 일찍부터 주장해 온 사상이었다. 통일전선은 주체확립과 더불어 항일혁명투쟁의 초시기부터 견지해 온 가장 중요한 이념의 하나였다.≫

조국광복회 창립을 선포하시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남호두회의와 조국광복회를 회상하시면서 이와 같은 중요한 회상교시를 주시었습니다. 우리는 이 교시말씀을 통하여 주체확립과 통일전선이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항일혁명투쟁의 양대이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주체확립이 무엇입니까.조선혁명이고 사대주의와 교조주의를 반대하고 민중을 믿고 민중에 의거하여 혁명을 전개하는 주체사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그런 주체확립이념과 비견되는 통일전선이념이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통일전선은 곧 민족대단결이고 민족대단결은 곧 전민항쟁인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전 민족이 자주의 기치아래 굳게 단결할 때 통일혁명의 결정적 조건이 무르익는 것입니다. 전 민족을 하나로 묶어세우기 위해서는 통일단결의 기치가 필요합니다. 항일혁명시기는 그 기치가 바로 조국광복회10대강령이었습니다. 조국광복회10대강령이야말로 조국광복의 이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통일혁명시기의 기치는 무엇인가요?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그것은 6.15공동선언입니다. 6.15공동선언이야말로 조국통일의 이정표인 것입니다.

조국광복회10대강령 친필원고전 민족을 하나로 묶어세우기 위해서는 강령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전 민족을 하나로 묶어세우기 위한 통일단결의 구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무릇 단결은 그 중심이 있어야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항일혁명시기 통일단결의 구심은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이시었습니다. 그럼 오늘 통일혁명시기 통일단결의 구심은 누구인가요? 바로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이십니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이시야말로 지난 기간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통일혁명의 위대한 업적을 쌓아올리신 분이시며 오늘도 통일혁명을 통일적으로 현명하게 영도하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90년대 조미대결전을 승리로 영도하시며 조미공동코뮈니케라는 항복선언을 받아내신 분도 위대한 장군님이시며 조러모스크바선언으로 국제적인 반지배주의전선을 형성하시며 통일혁명의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신 분도 위대한 장군님이십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평양상봉을 결심하신 분도 위대한 장군님이시며 6.15공동선언이라는 조국통일의 이정표를 세우신 분도 위대한 장군님이십니다. 한마디로 항일혁명시기 김일성장군님과 사상, 영도, 풍모에서 똑같으신 분이 바로 통일혁명시기 김정일장군님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회고록을 학습하는 이유는 우리 혁명에서 승리하기 위한 비결을 얻기 위함입니다. 우리 혁명이 승리하기 위한 비결은 항일혁명이 승리한 비결과 똑같습니다. 바로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이 계시어 항일혁명이 승리하였듯이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이 계시어 통일혁명의 승리는 확정적인 것입니다.

다음 강의부터는 항일무장투쟁 둘째단계로서 본격적인 항일혁명투쟁이 전개되던 시기를 학습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하여 조선혁명의 전략을 더욱 구체적으로 파악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 오늘의 통일혁명전략을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간 통일여명보도를 통해 발표된 통일혁명전략을 예습한다면 강의내용을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이 강의를 결속하면서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이 제1차 북만원정을 마치고 돌아오시는 길에 겪으셨던 절대절명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시었는지에 대한 위대한 주석님의 회상교시를 인용하고자 합니다. 다시금 민중을 믿고 민중에 의거하면 그 어떤 시련과 난관도 극복하고 백전백승할 수 있다는 진리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김노인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사경에서 구원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원정대는 나와 함께 천교령 오지에서 괴멸되었을 것이다. 그 노인이 사실 큰 은인이었다. 빨치산대장의 아버지답게 우리를 희생적으로 도와준 훌륭한 분이었다.

생사를 가르는 아슬아슬한 곤경에 처할 때마다 내앞에는 이상하게도 매번 김노인과 같은 귀인이 나타나 나를 사지에서 구출해주곤 하였다. 교하에서 이름모를 아주머니가 나를 체포의 위기로부터 보호해주고 마노인이 나자구등판에서 기한에 떨던 나와 나의 동무들에게 안식의 선물을 마련해준 것처럼 천교령에서는 생면부지의 김노인이 절명 직전의 원정대와 그 지휘관인 나를 천길 나락에서 건져주지 않았던가.

내가 이 이야기를 하면 어떤 사람들은 우연이 나를 도와주었다고 말한다. 개중에는 그것을 필연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분골쇄신하는 애국자들을 귀인이 나타나 도와주는 것은 우연의 힘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구태여 어느 것이 옳다거나 어느 것이 그르다고 시비를 가를 생각은 없다. 내 일생에서 은인들의 도움을 받는 일이 여러 번 되풀이되었다면 그 우연은 분명 내 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인민을 위해 한 생을 바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우연조차도 선심을 베푸는 법이다.≫(천교령의 눈보라)

조택주로인의 며느리 최일화    ≪나는 입맛이 없을 때에도 어머니의 정성을 생각하여 개다리소반의 밥과 찬을 억지로 다 들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최일화어머니의 입가에는 느슨한 웃음기가 내비치곤 하였다.

인민이 우리에게 바치는 정이란 참말로 깨끗하고 구김살이 없었다. 만일 그 정을 강물이나 시냇물에 비길 수 있다면 나는 거기에 ≪청류≫나 ≪옥류≫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다. 그 정은 길이로써도 잴 수 없고 무게로써도 가늠할 수 없는 무한대한 것이다.

인민의 사랑속에 사는 사람은 행복하고 인민의 사랑을 받지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이것이 나의 일생을 관통하고 있는 행복에 대한 가치관이다. 지난날에도 그러하였지만 지금도 나는 인민의 사랑을 받는데서 최대의 보람과 행복을 느끼고 있다. 인생의 첫째가는 진미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이 진미를 아는 사람만이 인민의 참된 아들이 되고 충복이 될 수 있다.≫(인민의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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