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8월 25일(일)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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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과 모순

통일여명 편집위원 강인규

 

먼저, 모순 및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에 대한 개념 정의이다.

대립물들 사이의 상호제약하고 의존하는 동시에 상호부정하고 배척하는 관계.

모순은 대립되는 두 측면의 동시적인 투쟁에 의해서만 발전하고 폭발한다.≫(≪영화예술론≫, 99쪽)

모순을 이루는 대립물들은 상호 구별되며 따라서 모순은 차이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 차이 때문에 모든 대상들 사이의 관계가 모순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구별되는 대상들이 직접 연관되어 있으면서 서로 상반되는 측면, 경향을 가지고 상호배척하고 투쟁할 때의 관계만이 모순으로 된다. 모순에 관한 사상은 일찌기 고대의 변증법사상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음양오행설≫에 의하면 우주만물의 물질적 시원인 ≪기≫는 자체 내에 음과 양의 대립물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우주만물이 부단히 운동 변화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영원한 생성≫한 대립물로부터 다른 대립물의 끊임없는 이행으로 보았으며 대립물의 투쟁을 온갖 존재의 일반적 법칙으로 이해하였다. 독일의 관념론철학자 헤겔은 모순을 ≪온갖 운동과 생명성의 근본≫으로, 통일체가 두 대립물로 갈라지는 과정을 발전의 본질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객관현실의 실제적인 모순을 부인하고 사유과정, 개념의 논리적 전개에서 작용하는 모순만을 인정하였으며 사유과정의 모순의 논리적 내용을 자의적으로 고안해 내고 모순의 해결을 대립물의 투쟁, 한 대립물에 의한 다른 대립물의 극복으로서가 아니라 대립물의 중화, 융화로 그릇되게 해석하였다.

모순에 관한 과학적 해명은 유물변증법이 창시됨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유물변증법은 모순이 사물현상들의 자기운동, 자기발전의 원천을 이룬다고 인정한다. 사물현상들의 변화발전은 모순의 해결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대립물들 사이에는 끊임없는 투쟁이 있는 것만큼 대립물들의 관계에서는 필연적으로 변화가 일어나게 되며 현존 질적 상태를 새로운 질적 상태로 변화시키려는 경향이 우세하게 될 때에는 사물현상이 한 질적 상태로부터 다른 질적 상태로 넘어가게 된다. 모순은 사람들의 주관적 의사와 관계없이 존재하며 객관적이다. 객관세계의 사물현상들이 다양한 만큼 사물현상들에 존재하는 모순도 또한 다양하다. 모순에는 내적 모순과 외적 모순, 기본모순과 비기본모순, 주요모순과 비주요모순, 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이 있다. 내적 모순은 해당 사물현상 자체에 있는 대립물들 사이의 모순이며 외적 모순은 서로 다른 대립되는 사물현상들 사이의 모순이다. 기본모순사물현상이 존재하는 전 기간에 걸쳐 존재하면서 사물현상의 운동과 변화발전에서 규정적 역할을 수행하는 모순이며 비기본모순은 기본모순이 아닌 다른 모든 모순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내적 모순 가운데서 어느 하나가 기본모순으로 된다. 주요모순기본모순에 의하여 발전하는 사물현상 발전의 일정한 단계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면서 선차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모순이다. 주요모순이 아닌 다른 모순들은 비주요모순이라고 한다. 적대적 모순은 이해관계와 목적이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계급들 사이의 모순이며 비적대적 모순은 목적과 근본적인 이해관계에서 공통적인 계급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모순이다. . . . 그러나 사회생활에서는 모순이 사람들의 목적의식적이며 주동적인 활동 없이는 스스로 해결되지 않는다.≫(모순, 주체철학사전)

모든 사물현상의 운동, 변화, 발전의 원천을 밝혀주는 유물변증법의 법칙. 사물현상들에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과 같은 서로 상반되고 배척하는 측면들과 경향들이 있다. 서로 상반되고 배척하는 측면, 경향대립물이라고 한다. 자연과 사회의 사물현상들에는 그에 고유한 대립물이 있다. 대립물들은 한 사물안에서 서로 다른 것의 존재를 제한하면서 연관되어 있다. 대립물들 가운데서 하나가 없으면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만약 대립물 가운데서 어느 하나가 없어지면 그 사물은 본래의 사물이기를 그만두고 다른 사물로 전환된다. 일정한 사물현상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대립물들 간의 이러한 관계를 대립물의 통일이라고 한다. 대립물의 통일은 사물현상의 상대적 정지, 균형을 조건짓는다. 자연과 사회의 사물현상들은 대립물의 통일로 되어 있다. 이 통일은 절대적 통일이 아니라 차이성과 대립을 포괄하는 통일이다. 대립물들은 서로 다른 것의 존재를 제약할 뿐 아니라 부정하고 배척한다. 대립물들사이에 있는 이러한 상호작용을 대립물의 투쟁이라고 한다. 대립물의 투쟁은 사물현상의 운동과 발전을 조건지으며 그 사물의 운동, 변화, 발전의 원천으로 된다. 따라서 대립물은 새것과 낡은 것으로 표현된다. . . .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새것의 담당자인 노동계급과 낡은 것의 담당자인 반동적 자본가계급이 서로 투쟁하게 되며 이 투쟁에서 노동계급은 처음에는 비록 미약하나 점차 성장강화되어 마침내는 자본가계급을 때려엎고 새로운 사회주의사회를 건설한다. . . . 기회주의자들도 대립물의 투쟁을 부인하고 대립물들의 ≪조화≫에 대하여 떠들어댄다.≫(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 주체철학사전)

다음, 대립물의 투쟁을 부정하는 우경기회주의이다. 이는 대립물의 통일성과 투쟁성에서 통일성을 규정적으로 보는 반변증법적 오류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발언에서 민중의 투쟁의욕을 거세할 수 있는 위험한 요소들을 발견하고 실망하였다. 총체적으로 볼 때 그의 주장에는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점들이 있었다.

각자가 자기를 수양하고 인격을 높이며 그에 토대하여 민족의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안창호의 주장에는 나도 동감이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을 세계적으로 정신적 자질이 가장 낮은 민족이라고 한 그의 견해와 실력양성을 위한 개량주의적 방법론에는 도저히 찬성할 수 없었다. 실력양성은 어디까지나 독립투쟁을 추진시키는 하나의 과정으로 되어야지 그 자체가 혁명전체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안창호는 독립투쟁을 실력양성으로 대신하려고 하였다. 실력이 양성된다고 하여 독립투쟁이 저절로 진척되는 것은 아닌데 그는 민족의 역량을 어떻게 조직하고 그것을 종국적인 승리의 길로 어떻게 동원시켜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특히 민족해방투쟁의 기본형태로 되어야 할 폭력투쟁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입에 담지 않았다. . . .

나는 강연을 듣다못해 더 참지 못하고 안창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종이에 써서 들이대었다.

- 산업과 교육을 진흥시켜 조선민족의 실력을 배양해야 한다고 했는데 나라를 일제놈들에게 통채로 빼앗긴 조건에서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 . .

그처럼 도도한 기상을 가지고 장내를 쥐락펴락하던 안창호의 연설이 그만 김이 빠져버리었다. 안창호는 조금전까지 일사천리로 펼쳐나가던 강연을 성급하게 마무리짓고 연탁앞에서 황황히 물러섰다.≫(안창호의 시국대강연, 세기와 더불어 1권)

신채호   ≪노선상으로 보면 신채호는 무력항쟁의 제창자였다. 그는 이승만의 외교론과 안창호의 준비론을 다같이 현실성없는 위험한 노선이라고 보았으며 조선민중이 한 편이 되고 일본 강도가 한 편이 되어 네가 망하지 않으면 내가 망하게 된 정황에서 우리 2천만 민중은 하나가 되어 폭력파괴의 길로 나가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일부 인사들이 이승만을 상해임시정부 수반으로 내세웠을 때 신채호가 분격을 참지 못하고 그것을 정면으로 반대해 나선 것도 평소부터 이승만의 위임통치론과 자치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왔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다.≫

이것은 그가 임시정부를 조각하는 자리에서 폭탄같이 내던진 유명한 말이다. 그는 임시정부를 탈퇴한 후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에서도 이승만을 호되게 비판하였다.≫(손정도목사, 세기와 더불어 2권)

9.18사변 후 만주지방에서의 혁명정세의 급격한 발전에 커다란 우려를 느낀 사이또총독은 간도시찰반성원으로 동만지방에 파견된 박석윤과 연변자치촉진회의 거두 전성호, 연길주재 만주국군군사고문 박두영, 수급반공특무 김동한을 비롯한 친일적인 민족주의세력을 내세워 1932년 2월에 연길에서 ≪민생단≫을 조작하게 하였다.

≪민생단≫은 외형적으로는 ≪민족으로서의 생존권확보≫라든가, ≪자유낙토건설≫이라든가, ≪조선인에 의한 간도자치≫의 허울좋은 구호를 들고 마치 조선사람의 민생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최고의 경륜인 것처럼 떠들었다. 하지만 이 조직은 실제상에서는 조선민족의 반일의식을 마비시키고 조선공산주의자들을 모해하여 인민들로부터 고립시키며 조중인민 사이에 쐐기를 박아 혁명대오를 내부로부터 와해시킬 것을 목적으로 일제가 만들어낸 간첩모략단체였다.≫(사나운 회오리, 세기와 더불어 4권)

길림의 교포청년들속에서는 간디의 사상을 자기의 신앙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다. 비폭력불복종운동 같은 것으로 포악하고 탐욕스러운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서 독립을 선사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환상가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간디의 사고방식은 무력항쟁을 포기하였거나 독립운동의 길에서 탈락한 일부 민족운동자들에게서 일정한 공명과 지지를 받았다. . . .

인민혁명군의 군사정치활동이 가장 맹렬하게 벌어지고 있던 나자구지구에 무혈독립군에 미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영감이 죽는 순간에야 무혈독립론이 허황하다는 걸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것마저 깨닫지 못하고 간다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왜놈들은 피맛을 보구 싶어 자꾸만 갈개는데 당치도 않게 무혈이라니...

이태경노인은 말을 잇지 못하고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노인님 말씀이 지당합니다. 강도들하고는 무혈이라는 게 있을 수 없습니다. 미친개는 몽둥이로 다스려야 합니다!≫≫(사도구참변에 대한 대답, 세기와 더불어 4권)

신간회 회의 모습   ≪신간회의 해산 원인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공산주의운동자들은 그 해산의 원인을 민족주의자들에게서 찾으려 하였고 민족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에게 그 책임을 지우려고 하였다. 한때 일부 역사가들은 신간회가 해산된 근본적인 원인을 상층의 분열과 개량주의적 경향에서 찾으려고 하면서 이 조직의 애국적 성격과 민족사적 의의 자체를 부정하려고 하였다.

나는 그런 허무주의적 견해에 동의할 수 없었다. 해산 원인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교훈을 찾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놀음을 하는 것은 아름답지 못한 일이다. 신간회 상층에 개량주의자들이 더러 있었다고 하여 이 조직 자체를 부정해서도 안되며 그 민족사적 의의를 영으로 만들어도 안된다.

신간회가 해산된 원인은 무엇보다도 조선민족의 반일항쟁역량이 하나로 단합되는 것을 두려워한 일제가 그 내부에 쐐기를 박아 분열을 꾀하고 개량주의적 상층을 매수한 데 있었다. 적들의 암해책동과 파괴공작을 물리치고 신간회를 능숙하게 운영하고 이끌어 나갈 만한 중심적인 지도역량이 없는 것도 하나의 주요한 해산 원인이었다.≫(조국광복회, 세기와 더불어 4권)

≪박인진은 서울에 올라가자마자 최린이 그 사이 명륜정에 있는 양옥자택을 더 호화롭게 꾸려놓았다는 것과 그가 ≪독립을 위한 자치≫를 실현하자면 일본과 화해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많은 천도교 자금을 총독부에 ≪국방헌금≫으로 갖다 바쳤다는 것 등 기막힌 소식을 들었으나 의분을 가까스로 누르며 그를 인내성있게 설복해보았다.

그러나 최린은 안하무인이었다.

박인진도정   박인진은 격분을 금할 수 없어 지금 당신이 하고 있은 헌금놀음은 독립성업에 역행하는 매국배족적인 배신행위로서 오히려 일본의 국력이나 더 한층 증가시키고 조선의 예속을 더욱더 지속시키는 결과밖에 가져올 것이 없다고 규탄하였다. 그는 최린의 면전에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내흔들며 조선의 독립을 이룩할 수 있는 참다운 길은 헌금이 아니라 바로 이 강령에 있다, 우리가 가야 할 유일무이한 길은 이 길 뿐이다, 우리 교도들은 김일성장군이 조직한 조국광복회에 들어가서 조선인민혁명군과 합세하여 항일대전을 벌려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최린은 10대 강령을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나서 덤비지 말라, 김일성이 가자는 목표도 대해이고 내가 가자는 목표도 대해이다, 대해로 가는 노정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 큰길도 있고 오솔길도 있다, 지금은 소란을 피우며 큰길로 나갈 때가 아니다, 만사는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지금은 그릇만 닦아놓으면 된다, 물은 언제든지 담을 수 있다고 박인진을 설유하였다. 격노한 박인진은 최린과 한바탕 싸우고 그의 집에서 나와버렸다.≫(박인진도정, 세기와 더불어 5권)

≪식민주의자들의 첫째가는 특성이 야만성과 탐욕성, 철면피성에 있다는 것은 하나의 상식이다. 국적과 피부색에 관계없이 남의 나라를 강탈한 자들은 모두가 포악하고 교활하고 후안무치한 놈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다른 나라의 말과 글을 빼앗는 자들, 다른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저들의 신사앞에 절을 하게 하는 그토록 야비하고 뻔뻔스러운 식민주의자들은 아직 한번도 보지 못하였다.

조선민족의 운명이 과연 어느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무장소조원이 안고온 소식은 나의 피를 끊게 하였다. (조국으로 하루빨리 진군해서 그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 조선민족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 조선민족은 자기의 말과 글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조선민족은 ≪내선일체≫와 ≪동조동근≫을 인정하지 않으며 ≪황민화≫를 거부한다는 것, 조선민족은 일본이 망할 때까지 손에서 무장을 놓지 않고 항쟁을 계속한다는 것을 보여주자, 그렇게 하는 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이다)≫(보천보의 불길(2), 세기와 더불어 6권)

≪조선의 지성인들앞에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민족말살정책에 저항하는가 아니면 복종하는가 하는 두 갈래의 길밖에 없었습니다. . . .

그 글을 읽어보면 조선사람의 체면이나 자존심 같은 것은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 이광수란 사람이 변해도 아주 너절하게 변했습니다. ≪민족개조론≫이라는데서는 두루마기와 저고리만 벗었다면 이 글에서는 아예 바지와 속옷까지도 다 벗어내치고 공공연히 친일을 선언했습니다.

그는 잡지에 지원병제를 찬양한 글까지 발표하였습니다.

해방 후 이광수는 자신의 친일을 ≪민족보존≫을 위한 애국적인 소행으로 묘사하였습니다. 민족을 보존하자니 부득불 친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소리인데 그가 진실로 민족보존을 염원하고 있었다면 지원병제는 왜 찬양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원병으로 전쟁터에 나갔다가 살아돌아온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됩니까.

한용운불교인들가운데 한용운이라는 시인이 있었습니다. 3.1인민봉기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나섰던 사람입니다. 그는 불교승이었는데 조선독립은 청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민족 스스로의 결사적인 행동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행동파였습니다. 적들에게 체포되었을 때에는 변호사도, 사식도, 보석도 다 거절했습니다. 대부분의 민족대표들이 겁에 질려 동요하는 기미를 보이자 감방의 변기통을 들어 내동댕이치면서 이 더러운 것들아, 너희들이 민족과 나라를 위한다는 놈들이냐하고 고함을 쳤다고 합니다. . . .

그런데 그날은 한용운이 이광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가려고 했습니다. 어안이 벙벙해진 이광수는 한용운을 붙잡고 내가 춘원이다, 나를 모르겠는가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한용운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자기가 알고 있은 춘원 이광수는 이미 죽고 이 세상에 없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불교승이 민족혼을 저버린 이광수한테 내린 사형선고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 . .

하지만 그는 애국적 지성인으로서의 대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밤이면 삼에서 피신생활을 하는 징병, 징용 기피자들이 그의 조언을 들으려고 마을로 내려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그들에게 소나 말처럼 풀을 뜯어먹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산에서 내려오지 말고 왜놈들에게 저항하라고 선동했습니다. 그때 이기영한테서 영향을 받은 청년들이 해방이 되자 그가 살던 고장의 간부들로 되었다고 합니다.

이광수는 창씨를 했지만 이기영은 왜놈들이 망할 때까지 창씨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창씨개명을 하면 개아들이 된다고 하면서 자기자신은 물론 친척들까지도 성과 이름을 갈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기영   해방 후 평양에서 이기영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 나는 그에게 선생은 몸도 약한 분인데 어떻게 그처럼 견결하게 옥중고초도 견디어내고 창씨선풍도 이겨냈는지 참으로 놀랍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말이 유관순과 같은 17살내기 처녀도 꽃다운 목숨을 바쳐 지조를 지키는데 나같은 문인이 절개를 굽히면 어떻게 합니까, 나는 간또대진재가 일어났을 때 도꾜바닥에서 왜놈들이 죽창과 일본도와 쇠갈구리로 조선사람들을 마구 학살하는 것을 보고 죽어서 귀신이 되더라도 그놈들과는 꼭 결판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민족의 얼, 세기와 더불어 8권)

다음, 내적 모순과 외적 모순이다.

첫째, 내적 모순이다. 아래의 네번째 노작발췌문은 내적 모순이 외적 모순보다 규정적이라는 측면과관련있다.

≪국민부가 만들어낸 조선혁명군이라는 것은 국민부 자체의 내적 모순이 그대로 반영되어 실제활동과정에 대립과 분쟁이 반복되면서 그 명칭과 간부진영도 사흘이 멀다하게 뒤바뀌군 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실체를 가려보기 힘든 형편이었다.≫(조선혁명군, 세기와 더불어 2권)

≪일제가 초기에도 비록 중국의 항전역량에 생긴 공백을 이용하여 일시적인 우세를 차지할 수 있지만 종국적으로는 멸망하게 되리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부정의의 전쟁은 항상 내부모순을 동반하는 법이다. 자국내에서의 전쟁세력과 반전세력간의 모순과 동반하는 법이다. 자국내에서의 전쟁세력과 반전세력간의 모순과 이권쟁탈을 위한 제국주의열강들간의 모순은 일본의 전쟁수행에 제동을 거는 무시할 수 없는 요인들이었다.≫(새로운 정세를 맞받아, 세기와 더불어 6권)

≪일본의 정계도 대단히 복잡했습니다. 사흘이 멀다하게 내각이 교체되고 입씨름질이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군부도 모순투성이었습니다. 군장성들과 장교들이 여러 파로 가라져 옥신각신하게 되니 작전에서 통일성과 협동도 보장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노자간의 모순, 군민간의 모순, 종주국과 식민지간의 모순이 폭발직전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본토의 주민부락들에도 정보원들을 박아넣어 국민의 입에 자갈을 물리는 판이었습니다.≫(소할바령에서, 세기와 더불어 8권)

≪이렇게 우리 나라의 해방은 15성상이나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강력한 군사적 타격을 안겨 그것을 밑뿌리채 뒤흔들어놓은 조선인민혁명군과 각계각층을 망라한 전민항쟁역량의 총동원으로 이룩되었습니다. 우리 군대와 인민의 장기간에 걸치는 항전이 선행되었기에 쏘련의 대일작전은 그처럼 짧은 기간에 결속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의 해방은 쏘련군이 일본관동군을 격멸하는 유리한 환경에서 우리 인민과 인민혁명군 자체의 역량에 의해 마련된 위대한 결실입니다. 1930년대와 1940년대 전반기에 우리가 조직한 국내의 항쟁조직들과 무장대들이 조선인민혁명군의 최후공격작전계획에 따라 국내도처에 웅거하고 있는 일제의 침략무력과 식민지통치기구들을 제압소탕하고 나라를 해방하였습니다.≫(최후결전의 날, 세기와 더불어 8권)

둘째, 외적 모순이다.

1931년 9월 18일밤 심양 북대영 서쪽 유조구에서 일본만철회사 소유의 철도가 폭파되었다. 일제는 장학량군이 철도를 폭파하고 일본수비대를 공격했다는 터무니없는 구실을 내걸고 불의의 침공을 개시하여 일거에 북대영을 점령하였으며 19일 아침에는 봉천비행장까지 차지하였다.

심양에 뒤이어 안동, 영구, 장춘, 봉성, 길림, 돈화와 같은 동북지방의 대도시들이 관동군과 압록강을 넘어온 조선주둔군에 의하여 연달아 점령되었다. 닷새도 못되는 사이에 일본침략군은 요녕, 길림 두 성의 광대한 지역을 거의 다 강점하였으며 전역을 계속 넓혀가면서 금주방향으로 육박하였다.≫(9.18사변, 세기와 더불어 2권)

918사변 피바다에 잠긴 동북   ≪우리가 노구교사건에 대한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것은 간삼봉전투가 있은 후인 1937년인 7월 중순경이었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9.18사변이 새로운 ≪9.18≫을 낳게 되고 일제의 만주강점이 수백만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중국의 전 영토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에로 이어지게 되리라는 것을 예견해왔었다. 그러나 막상 노구교사건을 도화선으로 하여 중일간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으니 흥분을 금할 수 없었다.≫(새로운 정세를 맞받아, 세기와 더불어 6권)

≪쏘만국경일대에서 붉은 군대와 직접 대치하고 있던 관동군의 움직임만 놓고보더라도 제국주의자들이 그 당시 쏘련을 압살하기 위해 얼마나 발광적으로 준동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일제는 1932년부터 1939년사이에만도 널리 알려진 하싼호나 할힌골 사건을 비롯하여 근 1,000번의 크고작은 국경분쟁을 일으켰는데 그것은 며칠에 한 번씩 무장도발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쏘만국경지대에서는 초연이 가실 날이 없었습니다. . . .

쏘련과 일본의 대립은 중일전쟁발발을 계기로 더욱 표면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본이 7 7사변을 일으키자 쏘련은 중국을 지원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쏘일관계는 더 악화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37년 8월에 중국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쏘련은 일본관할지역에 있는 자기 나라 영사관의 일부를 스스로 폐쇄한 다음 자기 나라에 있는 일본영사관의 일부도 폐쇄할 것을 상대측에 요구하였습니다. 해가 갈수록 쏘일사이의 모순은 더 심화되었습니다.

그런데다가 1938년 1월에는 일본당국이 만주땅에 불시착륙한 쏘련비행기를 억류한 사건이 발생하여 또다시 쏘일관계를 팽팽하게 만들었습니다. 쏘일사이의 대립과 모순이 국지전쟁이나 전면전쟁으로 번져가게 되리라는 것은 누구나 어렵지 않게 내다보았습니다.≫(쏘련을 무장으로 옹호하자!, 세기와 더불어 7권)

다음, 기본모순과 주요모순이다.

첫째, 기본모순이다. 기본모순은 사물현상이 존재하는 전 기간에 걸쳐 존재하면서 사물현상의 운동과 변화발전에서 규정적 역할을 수행하는 모순이다.

≪우선 조선혁명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겠는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논쟁이 생기었다. 보고에서 밝힌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라는 규정을 두고 논의가 분분했다. 논쟁의 초점은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라는 새로운 성격규정이 혁명의 보편적 원리나 합법칙성에 모순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때 당시의 청년들은 근대역사를 변혁시킨 혁명가운데는 부르조아혁명이나 사회주의혁명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사회주의혁명도 아니고 부르조아혁명도 아닌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라고 규정한 것은 우리 나라에 조성된 계급관계와 우리 혁명앞에 제기된 과업으로부터 얻어낸 결론이었다. 조선민족이 수행해야 할 가장 절박한 혁명임무는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우리 인민을 얽매어놓고 있는 봉건적 관계를 청산하며 우리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이런 데로부터 우리는 조선혁명의 성격을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으로 규정하였다.≫(카륜회의, 세기와 더불어 2권)

≪최후결전의 시기를 회상할 때마다 아쉽게 생각되는 것은 쏘련의 훈련기지에서 여러 해 동안이나 조국해방작전준비를 해온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역량이 본래의 계획대로 전투작전을 전개하지 못한 것입니다. . . .

일본의 패망은 우리의 선대들이 눈을 감으면서도 바라던 염원이었고 우리 인민이 수십 년 동안 무서운 고통과 희생을 당하면서도 피를 물고 줄기차게 톺아온 항쟁의 종착점이었습니다. 일본의 패망으로 하여 우리 조국과 민족앞에는 휘황찬란한 재생의 길, 부흥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때이른 항복을 일미간의 음모의 산물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막은 어떻든지간에 일본이 몇 달만 더 저항해도 우리는 자체의 힘으로 얼마든지 나라의 전 영토를 다 해방하였을 것입니다.≫(최후결전의 날, 세기와 더불어 8권)

둘째, 주요모순이다. 주요모순은 기본모순에 의하여 발전하는 사물현상 발전의 일정한 단계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면서 선차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모순이다. 중심고리라는 개념은 주요모순에서 비롯되었다. 마지막 노작발췌문은 주요모순이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과 관련있다.

≪오의성과의 담판과 동녕현성전투의 성공으로 하여 동만의 유격부대들과 구국군부대들, 반만항일세력들속에서 우리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오의성과의 합작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통일전선을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전반적 항일혁명을 추진시키는데서 계속 틀어쥐고 나가야 할 생명선이며 중심고리라는 것을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오의성과의 담판, 세기와 더불어 3권)

≪그래서 나는 적구교란론을 재차 상정시키고 ≪군대는 내가 책임졌으니 내 결심대로 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런 다음 유격대원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우리가 방어에만 매달리지 말고 적의 뒤통수도 쳐야 한다. 누가 적구로 가겠는가? 갈 사람은 나를 따라 서라. 많이 요구하지 않는다. 절반만 적구로 나가고 절반은 유격구에 남아 인민들을 보호해야 한다. 적구로 나갈 사람들은 나와 같이 오늘 밤중으로 포위망을 뚫자. 포위망만 뚫으면 살 길이 열린다. 적의 거점들과 지탱점들을 연이어 들부수면 소문이 난다. 소문을 내면서 여기에서도 치고 저기에서도 치면 후방이 녹아날까봐 산골 안에 들어왔던 ≪토벌대≫들이 다 달아난다.≫≫(마촌작전, 세기와 더불어 3권)

새 사단의 탄생으로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가 더욱 강화발전된 것으로 하여 우리의 앞길에는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과 당창건을 위한 조직사상적 준비를 보다 폭넓고 깊이 있게 전개할 수 있는 돌파구가 열렸다. 새 사단의 출현은 무장투쟁을 국내 깊이에로 확대하며 각계각층의 애국역량을 하나로 결속시키기 위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군사정치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강력한 추진력으로 되었으며 카륜회의 이후부터 우리가 줄기차게 전개해 온 통일전선운동에서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올 수 있는 광활한 전망을 열어놓았다.≫(조국광복회, 세기와 더불어 4권)

≪국제당은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재빨리 포착하고 각국 노동계급과 근로인민들을 반전, 반파쑈 투쟁에로 묶어 세워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수호하며 파쑈를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고수하는 것을 당면한 전략적 과업으로 제시함으로써 세계혁명의 영도기관으로서의 명분에 맞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여기에 반파쑈인민전선운동과 관련한 국제당과 역사적 공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조국광복회, 세기와 더불어 4권)

국내에 강력한 정치적 역량을 꾸리는 사업은 조국광복회망을 확대하여 각계각층의 광범한 애국역량을 반일민족통일전선의 기치밑에 굳게 묶어세우는 것과 함께 국내에 강력한 당조직망을 꾸림으로써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전반적 항일혁명을 일대 앙양에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핵심역량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실에 있어서 우리가 백두산을 타고앉아 벌이려고 하는 모든 정치적, 군사적 활동의 승패를 좌우하는 관건적인 중심고리라고 말할 수 있었다. . . .

우리앞에는 이러한 요구에 민감하게 호응할 수 있는 실천대책이 필요하였다. 그 대책 중에서도 선차적인 것이 바로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운동의 일원화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운동의 일원화를 실현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여 국내혁명운동에 대한 우리의 지도를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런 과제를 실행하자면 무엇보다도 국내에서 이제순과 같은 형의 견실한 혁명가들을 찾아내고 그들과의 공동노력을 통하여 조국광복회망을 빨리 늘이고 온 민족을 반일성전에로 불러일으키기 위한 대책을 세워야만 하였다.

그런 적임자로 물색된 것이 박달이었다.≫(불굴의 투사 박달, 세기와 더불어 5권)

≪보천보전투는 일본제국주의식민지통치를 끝장내고 민족적 독립과 자주권을 부활시키려는 우리 인민의 혁명적 의지와 불굴의 투쟁정신을 내외에 널리 보여주었다. 이 전투를 통하여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자기 활동의 전 노정에서 시종일관하게 견지해온 투철한 반제적 입장과 자주적 입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으며 철저한 실행력과 유력한 전투력을 시위하였다.

우리는 또한 이 전투를 통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하고 있은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조국과 민족을 가장 열렬히 사랑하는 진실하고 참된 애국자들이며 민족해방위업을 승리적으로 완수해나갈 수 있는 가장 헌신적이고 책임적인 투사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조국인민들로 하여금 무장투쟁을 주축으로 하는 항일혁명의 마당에 거족적으로 달려나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으며 국내에서의 당조직건설과 조국광복회조직건설을 일사천리로 내밀 수 있는 분위기를 지어주었다.

보천보전투가 가지는 가장 주요한 의의는 조선이 다 죽었다고 생각하던 우리 인민들에게 조선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싸우면 반드시 민족적 독립과 해방을 이룩할 수 있다는 신심을 안겨준 데 있다.≫(보천보의 불길(2), 세기와 더불어 6권)

≪얼마후에는 우리의 앞에 적들이 나타났다는 전방척후들의 보고가 또 날아들어왔습니다. 적이 뒤에도 있고 앞에도 있다면 그것은 야단이었습니다. 오백룡은 또다시 내 얼굴을 보면서 ≪장군님, 이제는 우리가 사령부라는 것도 다 들장난 것 같은데 어떻게 하랍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사생결단을 하는 것밖에야 다른 길이 있는가, 앞에서 오는 놈들은 우리를 생판 모르는 놈들이고 우리와 조우하는 것도 모르고 마음놓고 오는 놈들이다, 뒤에서 따라오는 놈들은 우리 역량이 얼마나 되고 우리가 얼마만큼 피곤한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까지 다 알고 있다, 때문에 그놈들과 본격적인 대항전을 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니까 다른 도리가 없다, 한 개 분대쯤 되는 인원을 떼서 뒤에 있는 놈들을 견제하게 하고 기본역량은 우리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마주 오는 앞에 놈들을 제껴버려야 한다, 그래야 포위를 돌파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뒤에서 우리를 추격하는 것은 일본군 ≪토벌대≫였지만 앞에서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만주국군대였습니다. 만주국군대는 우리 부대와 맞서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즉 약한 고리는 앞에 있었습니다.≫(고난의 행군, 세기와 더불어 7권)

≪돌이켜보면 일제를 반대하는 무장투쟁 뿐 아니라 전반적 조선혁명수행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이 차지하고 있는 확고한 영도적 지위와 증대되는 핵심적 역할은 우리가 혁명무력건설을 튼튼히 틀어쥐고 그것을 모든 사업에 선행시키는 원칙을 견지한 것이 천백번 옳았다는 것을 뚜렷이 실증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주권 전취를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에서 정치적 영도기관으로서의 당을 먼저 꾸리고 그 다음에 무력건설에 착수하는 것이 하나의 원리로 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혁명투쟁, 특히 식민지민족해방투쟁에서 혁명무력, 폭력적 진출이 가지는 결정적 역할과 당시 우리 나라의 현실로부터 출발하여 먼저 무력을 건설하고 다음에 당을 건설하는 방식을 택하였습니다.

우리는 1932년 4월에 첫 혁명적 무장력으로서의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고 그것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확대발전시켰으며 바로 이 조선인민혁명군에 의거하여 일제를 반대하는 무장투쟁의 불길을 높여나가면서 전반적 반일민족해방투쟁을 새로운 앙양에로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조선인민혁명군의 영도와 무력적 담보 밑에 당창건의 조직사상적 준비도, 조국광복회조직과 통일전선운동의 확대발전도, 전민항쟁 준비도 성과적으로 이끌어나갔습니다.

사실에 있어서 일제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항일혁명시기 우리 혁명의 중추적 핵심역량이며 정치적 향도자이며 민족적 이익의 무력적 담보자였던 조선인민혁명군은 그대로 우리의 군대이자 당이고 정권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소할바령에서, 세기와 더불어 8권)

일제는 패망하였지만 반혁명혁명에 대한 공세를 단념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일본천황이 무조건항복을 선언한 후에도 일본군패잔병들은 저항을 계속하였습니다.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착취계급의 대표자들은 지하에서 새 조국 건설을 방해하기 위한 음모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혁명의 배신자들과 불순이색분자들, 정치적 야심가들이 정체를 숨기고 당단체들과 인민정권기관들에 기어들었습니다.≫(개선, 세기와 더불어 8권)

다음, 민족적 모순과 계급적 모순이다.

첫째, 민족적 모순이다.

≪6월 10일 순종의 상여가 종로를 지나갈 때 수만 명의 서울 시민들이 ≪조선독립 만세!≫, ≪일본군대 물러가라!≫, ≪조선독립 운동자들은 단결하라!≫는 구호를 웨치면서 대중적인 시위를 벌이었다. ≪문화통치≫ 7년간 쌓이고쌓인 원한과 울분이 마침내 ≪독립만세!≫의 함성으로 폭발한 것이다.≫(화성의숙, 세기와 더불어 1권)

≪우리가 항일전쟁의 초기부터 자력갱생의 구호를 내걸고 그 관철을 위해 분발한 것은 당시 혁명앞에 조성된 정세의 요구에도 부합되는 것이었다. 일제의 만주침공은 조일, 중일간의 모순을 격화시켰고 이 모순은 불피코 조선공산주의자들앞에 무장투쟁이라는 높은 형태의 투쟁과제를 제기하였다.≫(밀림속의 병기창, 세기와 더불어 3권)

일본의 파쑈화는 식민지조선의 질식도 가속화시켰다. 조선반도에서는 모든 조선적인 것을 말살하고 모든 형태의 반일운동과 반일적인 요소들까지 전멸시키기 위한 광란적인 대섬멸전이 벌어졌다.

일본어를 쓰지 않고 조선말을 하는 것, 색옷을 입지 않고 흰옷을 입는 것, ≪히노마루≫를 게양하지 않는 것,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것,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우지 않는 것, 심지어는 게다를 신지 않는 현상까지도 반일, 반역, 반국가 행위로 범죄시하면서 벌을 주고 벌금을 물리고 붙잡아 가고 가두어 넣었다.≫(경박호 기슭에서, 세기와 더불어 4권)

식민주의자들의 첫째가는 특성이 야만성과 탐욕성, 철면피성에 있다는 것은 하나의 상식이다. 국적과 피부색에 관계없이 남의 나라를 강탈한 자들은 모두가 포악하고 교활하고 후안무치한 놈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다른 나라의 말과 글을 빼앗는 자들, 다른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저들의 신사앞에 절을 하게 하는 그토록 야비하고 뻔뻔스러운 식민주의자들은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하였다. . . .

일본제국주의자들은 한 쪽으로는 총을 내대고 ≪복종하겠느냐, 아니면 죽겠느냐?≫하고 을러메는가 하면 다른 쪽으로는 ≪자, ≪동조동근≫에 ≪내선일체≫이니 신사참배도 같이하자≫, ≪만주에서는 ≪왕도낙토≫에 ≪오족협화≫와 꽃이 피여있고 일본에는 사꾸라꽃속에 복지가 기다리니 만주나 일본에 가서 부자가 되라≫, ≪남쪽에서는 목화를 심고 북쪽에서는 양을 치며 대일본의 신민이 되어 온 아세아를 주물러보라.≫하고 입에 침발린 소리로 구슬리기도 하였다.

조선민족이 당하고 있은 가장 무서운 비극적 사태는 정신이 무너진다는 바로 그 점에 있었다. 일제의 독재기관으로부터 유행가를 불어넣은 축음기판대기에 이르는 모든 것들이 조선을 없애고 조선민족의 넋을 뿌리채 뽑아버리는데 집중되고 있었다.≫(보천보의 불길(1), 세기와 더불어 6권)

우리 인민은 수백 년 동안의 반일투쟁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16세기말에 벌써 우리 나라는 수십만의 일본침략군과 맞서 7년 동안이나 임진조국전쟁을 하였습니다.

근대로부터 계산해도 조선민족의 반일투쟁역사는 70년이 훨씬 넘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875년 운양호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도 우리 인민은 무력으로 일본침략군에 대항해나섰습니다. 통치배들은 일본군의 위세에 눌리워 벌벌 떨었지만 군대와 인민은 단호하게 맞서 싸웠습니다.

그 후에는 위정척사운동과 의병운동, 계몽운동, 독립군 운동을 비롯하여 폭력, 비폭력, 합법, 비합법을 비롯한 각이한 방법으로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수십 년 동안이나 꾸준하게 투쟁해왔습니다.≫(최후결전의 날, 세기와 더불어 8권)

둘째, 계급적 모순이다.

≪뙤약볕이 내려쬐는 어느 여름날 동무들과 함께 북산에 갔다오던 나는 길가에서 인력거군이 부자와 다투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인력거를 타고 온 부자가 인력거군한테 돈을 적게 준 모양이었다. 인력거군이 부자에게 지금은 ≪삼민주의≫시대인데 ≪민생≫문제를 좀 돌봐주어야 하지 않겠는가고 하면서 몇 푼만 더 달라고 빌었다. 부자는 돈을 더 줄 대신에 도리어 ≪삼민주의≫만 알고 ≪오권헌법≫은 모르는가고 하며 단장을 들어 인력거군을 때리었다.

분격한 우리 학생들은 부자놈에게 달려들어 돈을 더 주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임금을 올리고 대우를 개선하라   이런 체험을 통하여 우리는 세상에 왜 인력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고 인력거를 끌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왜 어떤 사람들은 열두대문이 달린 으리으리한 집에서 호강을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거지가 되어 거리를 헤매야 하는가 하는 의문과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혁명적 세계관은 사람들이 자기의 계급적 처지와 이해관계를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착취계급을 증오하고 자기 계급의 이해관계를 옹호하는 사상을 가지며 나아가서는 새 사회를 건설하려는 각오를 가지고 혁명의 길에 나서게 되었을 때 형성된다고 볼 수 있다.

나도 맑스-레닌주의고전을 비롯한 혁명적인 책들을 보고 계급적 처지를 인식하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사회현상을 보고 불평등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착취계급과 착취사회를 증오하는 사상이 자라서 결국 세계를 개조하고 변혁해야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투쟁의 길에 나서게 되었다.≫(선진사상의 탐구, 세기와 더불어 1권)

≪반일항쟁의 첫 봉화를 들고 8도강산을 주름잡던 의병의 대오는 상하일치를 이룩하지 못하고 분열되어 있었다. 왕조정치의 회복을 바라는 유생출신의 의병장들과 기성질서의 개혁을 부르짖는 평민출신의병들사이에는 심각한 이념상의 대립과 모순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의병의 전투력을 높일 수 없게 하였다.≫(철창속에서, 세기와 더불어 1권)

≪도문 뒷산에 있다가 유격구로 돌아간 다음 우리는 군대들을 모여놓고 그 마을에서 당한 일을 그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이걸 보라. 계급적 본성이다. 어려운 사람은 죽이라도 같이 먹자고 하는데 잘 사는 지주는 죽은 고사하고 문전에서 쫓아버린다. 나쁜 놈이 아닌가. 이런 놈들의 꼴을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착취사회를 청산해야 한다. . . .

나는 그 사건까지 겪고나서 장차 나라가 독립되면 지주, 자본가들이 거들먹거리는 패륜패덕의 낡은 사회를 청산해버리고 만 사람이 빈부의 차이가 없이 한 가정처럼 화목하게 살아가는 아름답고 건전한 사회를 세우려고 더 굳게 결심하였다.

우리는 지금 모든 근로자들을 부자로 만들기 위해 힘쓰고 있다. 남의 피땀으로 호의호식하는 그런 부자가 아니라 자기의 노동으로 사회의 부를 끊임없이 창조해나가는 성실하고 근면하고 물질적으로 풍족하면서도 인덕이 후한 도덕적인 부자들을 만들자는 것이다. 금전이 만능의 수단으로 되어 있는 자본사회를 우리는 용납할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이 꼭같은 물질과 도덕의 부를 향유하는 시대가 도래할 때 인류를 더럽히는 사회악은 깨끗이 근절될 것이다.≫(부자와 가난뱅이, 세기와 더불어 3권)

≪최제우가 활동하던 시기는 세도정치와 당쟁으로 그 피해가 말세에 이르고 국력이 극도로 쇠잔해지던 때였다. 봉건적 학정을 반대하는 농민폭동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는데다가 기근과 홍수까지 겹쳐 사회정치적 혼란은 문자그대로 절정에 이르렀다. 양반과 상민 사이의 신분적, 계급적 대립도 극한점에 도달하였다. 수백 년을 내려오면서 이왕조의 존립을 제도적으로 받들어온 봉건적인 신분관계는 나라의 중흥과 사회발전을 억제하는 저주로운 질곡으로 되었다. 탐관오리들의 학정과 핍박으로 하여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허울조차 없는 민권은 통곡하였다.≫(민족종교 천도교를 두고, 세기와 더불어 5권)

세째, 민족적 및 계급적 모순이다. 우리 나라에서 기본모순은 민족 및 계급 모순이고 주요모순은 민족모순이다. 이는 일제치하 식민지반봉건사회에서나 미제치하 식민지반봉건 또는 식민지반자본주의 사회에서나 차이가 없다. 일부운동대오는 기본모순은 계급모순이고 주요모순은 민족모순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견해이다. 한편 민족 및 계급 모순을 이해하는데서도 조선혁명의 전국적 관점을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와 관련된 부분은 아래 인용문에서 붉은 글씨로 강조하였다.

≪1928년 10월 26일 새벽 선전대는 날이 새기 전에 길림의 거리들에 삐라를 뿌리고 격문을 붙이었다. 2-3명으로 무어진 소년회의 감시조들도 날이 밝자 지정된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날 아침 각 학교의 학생들은 약속된 시간에 일제히 교정에서 모임을 가지고 길회선철도부설을 반대하는 성토문을 발표한 다음 가두시위에 들어갔다. 거리는 삽시간에 수천 명의 학생들로 차고넘치였다. 그들은 ≪일제침략자들을 타도하자!≫, ≪일제의 길회선철도부설공사를 반대하여 투쟁하자!≫는 조선글로된 플랭카드와 ≪타도 일제≫, ≪타도 매국노≫, ≪회수길회선≫이라고 중국글로 쓴 플랭카드들을 들고 거리를 누비면서 신개문밖에 있는 성의회마당으로 모여들었다. . . .

길회선철도부설을 반대하는 투쟁이 일본상품배척투쟁과 결합되어 전면적인 반일투쟁에로 점점 더 크게 번져가는데 당황한 일제는 반동군벌을 사촉하여 시위군중에게 총을 마구 쏘아대는 야수적 만행을 감행하게 하였다.

그때까지 우리는 반동군벌들을 견제하는 입장에 서있었다. 그러나 군벌당국이 일제의 편을 들어 우리를 탄압해나서는 만큼 우리도 그들을 견제하는 입장에만 서있을 수 없었다. 우리는 ≪일제와 결탁한 반동군벌타도≫의 구호를 듣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장례식과 결합된 보다 대규모적인 시위로 넘어갔다. 이 날의 시위는 많은 시민들까지 합세하여 최대의 규모를 이루었다.≫(단결의 시위, 세기와 더불어 1권)

≪일제는 전쟁승리를 위하여 우리 나라에서 식민지통치를 강화하고 전쟁물자보급을 위한 경제적 수탈에 미쳐날뛸 것이다. 민족적 모순과 계급적 모순은 극한점에 달할 것이며 조선민족의 반일기운은 고조될 것이다. 우리가 무장대오를 조직하고 항일전쟁을 시작하면 인민대중이 물심양면으로 우리를 적극 지지성원해줄 것이다.

중국의 수억만 인민대중도 거족적인 반일항전에 떨쳐나설 것이다.≫(9.18사변, 세기와 더불어 2권)

≪일제가 감행한 반동적인 농업정책은 조선농촌에서 계급분화를 촉진시키었다. 농촌에서 이농현상이 격증되고 화전민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계층이 형성된 것은 계급분화의 결과로 이루어진 식민지특유의 서글픈 풍경이었다. . . .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사람들을 해외에로 몰아내는 대신 과잉인구의 격증과 식량부족으로 곤란을 겪고 있은 본토에서 이주민들을 대대적으로 끌어들이었다. 그들은 ≪산미증식계획≫제1기로 규정한 15년간에만도 400만 명의 일본농민들을 조선에 끌어들이려고 꾀하였다. . . .

일제의 반동적인 농업정책은 우리 나라 농촌에서 농민들의 생활을 영락시키고 민족적, 사회적, 계급적 모순을 격화시키었다.

농민대중은 생존권을 위해 궐기하였다. . . .

농민조합은 해방 전 우리 나라 농민운동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주도적인 조직형태였다. 이 조직은 객관적 정세발전의 요구에 따라 농민운동앞에 생존을 위한 경제적 구호와 함께 정치적 요구를 반영한 구호도 동시에 제기하였다.≫(농민을 준비시키던 나날에, 세기와 더불어 6권)

≪백두산이 조종의 산으로서 조선의 만산을 거느리고 있는 것처럼 백두밀림에서 개척되고 발전해온 우리의 항일무장투쟁은 민족적 해방과 사회적 진보를 위한 우리 인민의 투쟁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최후결전의 날, 세기와 더불어 8권)

≪현단계의 혁명에는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지식인, 소자산계급과 양심적인 민족자본가와 종교인들까지 포함한 광범한 반제역량이 참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반일애국역량을 총동원하여 일제와 그와 결탁한 지주, 자본가,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타도하고 민족적 해방과 독립을 이룩하여야 합니다.≫(김일성주석, 조선혁명의 진로, 1930 6 30)

≪오늘 일제와 조선인민 간의 민족적 및 계급적 모순은 극도로 첨예화되고 있다.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지식인, 민족자본가, 상인, 종교인 등 모든 조선사람들은 일제를 불공대천의 원쑤로 저주하면서 놈들의 멸망을 일일천추로 고대하고 있으며 도처에서 반일투쟁을 벌이고 있다. . . .

조선혁명의 주되는 대상은 일본제국주의침략세력이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통치는 조선인민이 겪고 있는 모든 불행의 화근이며 우리 나라에서의 온갖 사회적 질곡의 근원이다. . . .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통치를 뒤집어엎고 조국을 광복하지 않고는 우리 인민의 민족적 및 계급적 해방을 이룩할 수 없으며 우리 나라에서 사회적 진보를 실현할 수 없다. . . .

조선혁명의 대상은 다음으로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아부굴종하면서 그의 충실한 앞잡이로 복무하고 있는 친일지주, 예속자본가, 민족반역자, 친일관료배들이다.≫(김일성주석,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 1937 11 10)

≪그리하여 현계단에 있어서 우리 혁명의 기본임무미제국주의침략세력과 그 세력을 부식하며 그 동맹자로 되고 있는 남반부의 지주, 예속자본가, 친일친미파, 민족반역자들을 타도하고 남반부인민들을 제국주의적 및 봉건적 압박과 착취에서 해방함으로써 조국의 민주주의적 통일과 완전한 민족적 독립을 달성하는데 있다.

남반부에 있어서 혁명의 동력노동계급을 비롯하여 그의 가장 믿음직한 동맹자인 농민과 미제국주의 및 봉건세력을 반대하는 광범한 소자산계급이며 적지 않는 민족자본가들까지도 반제반봉건적 투쟁을 같이 진행할 수 있다

혁명의 적미제국주의침략세력과 그 세력을 부식하며 그 동맹자로 되고 있는 남반부의 지주, 예속자본가, 친일친미파, 민족반역자들이다.

만일 세계반동세력의 괴수인 미국의 간섭이 없었더라면 조선인민은 이미 오래전에 국내반동세력을 타도하고 전조선적 범위에서 반제반봉건적 민주혁명의 과업을 승리적으로 완수하였을 것이다.≫(김일성주석, 모든 힘을 조국의 통일독립과 공화국북반부에서의 사회주의건설을 위하여, 1955 4)

≪오늘 남조선에서 모든 애적 역량을 망라하는 반미구통일전선을 형성하는 것은 혁명발전의 가장 중요한 요구입니다. 남조선의 노동자, 농민, 도시소부르조아지, 청년학생, 지식인 그리고 민족부르조아지까지도 조국의 분렬과 미제국주의식민지통치에 의하여 다 같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다 공통한 민족적 이해관계에 의하여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계급들과 계층들의 역량을 튼튼히 집결하여 조선인민의 주되는 원쑤미제국주의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에 집중하여야 합니다. 오직 이렇게 함으로써만 남조선인민들은 공동의 원쑤를 물리치고 해방투쟁에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으며 조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김일성주석, 조선노동당 4차 대회 보고, 1961 9)

남조선혁명의 기본임무미제의 식민지통치를 청산하고 남조선사회의 민주주의적 발전을 보장하며 북반부의 사회주의역량과 단합하여 나라의 통일을 달성하는 데 있습니다.

남조선혁명의 주되는 대상은 미제국주의침략세력입니다. 미제국주의자들은 남조선을 무력으로 강점하고 남조선을 자기들의 완전한 식민지로, 군사기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남조선을 ≪독립국≫으로 선전하며 자신을 ≪원조자≫로 묘사하고 있으나 남조선에서 모든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실제적 통치자는 바로 미국 침략자들입니다. 남조선의 소위 ≪대한민국 정부는 미제국주의자들이 만들어낸 괴뢰 정권으로서 그들의 식민지통치를 가리는 위장물이며 미국의 침략정책을 충실히 집행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미제의 남조선 강점과 그의 식민지통치남조선인민들이 겪고 있는 모든 불행과 고통의 근원이며 우리 조국의 통일을 가로막고 있는 기본장애입니다.≫(김일성주석, 조선노동당 대표자회 보고, 1966 10)

다음, 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이다.

첫째, 적대적 모순이다.

≪그때 감옥에 가서 아버지를 만나고 온 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큰 사변이었다. 나를 감옥에 데리고 간 어머니의 깊은 뜻도 이해되었다. 아버지의 몸에 생긴 상처는 나로 하여금 악마와도 같은 일본제국주의의 존재를 온몸으로 느끼게 하였다. 나는 그때 아버지의 상처에서 세계의 수많은 정치인들과 역사가들이 일본제국주의에 대하여 분석하고 평가한 것보다 훨씬 더 실제적이고 직관적인 표상을 얻었다. . . .

집에 돌아온 후 아버지는 삼촌들을 앉혀놓고 이런 말씀을 하였다.

≪나는 감옥에서 물이라도 더 먹고 어떻게 하든지 살아나가서 끝까지 싸우겠다는 결심을 했다. 세상에 제일 못된 놈들이 일본놈들인데 그놈들을 그냥 놔둘 수가 있느냐. 형록이나 형권이도 왜놈들과 싸워야 한다. 죽어도 피값은 해야 한다.

나는 그때 아버지의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나도 장차 아버지의 뒤를 따라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사생결단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게 하였다.≫(아버지와 조선국민회, 세기와 더불어 1권)

≪적들은 공산당원 한 명만 있어도 그 부락주민들을 전멸시켰다. 공산당원 1명을 없애기 위해서는 100명의 군중을 죽여도 좋다는 것이 일본군경들이 제창한 구호였다. 중일전쟁 때 화북주둔 일본군 사령관인 오까무라 야스지가 화북지방의 해방구들을 공격할 때 적용했다는 3광정책(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불사르고, 모조리 약탈하는 정책)은 사실상 1920년대의 간도 ≪토벌≫에서 벌써 감행되었고 1930년대 초에 이르러서는 동만의 방방곡곡에서 유격구역들을 초토화하는 본격적인 실천행동으로 그 진면모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놓았다.

조선과 만주대륙에서 일제가 제창한 3광정책과 이른바 ≪비민분리≫를 목적했던 집단부락정책은 알제리의 항쟁세력을 탄압하는 군사작전에서 프랑스식민주의자들에 의하여 적용되었고 월남땅에서 미군에 의해 더욱 완성되었다.

삼도만, 해란구, 용정, 봉림동을 비롯한 연길현의 이름있는 혁명촌들도 모두 주검으로 덮였다. 훈춘현의 삼한리 일대에서는 1,600여 호의 집들이 불에 타버렸다. 연길 한 개 현에서 학살된 사람들의 수만 해도 무려 1만여 명에 달하였으니 간도임시파견대의 죄행을 무슨 말로 다 고발할 수 있겠는가.≫(보금자리, 세기와 더불어 2권)

적들은 조선혁명의 참모부가 자리잡고 있는 소왕청유격구에 공격의 예봉을 돌리고 이 일대에 관동군, 위만군, 경찰, 자위단으로 구성된 5,000여 명의 무력을 들이밀었다. 방진대열을 짓고 적과 승부를 겨루던 매뉴팩츄어 시기의 전쟁을 제외한다면 산병선이 출현한 이후부터의 전쟁에서 병력을 이런 정도로 조밀하게 배치한 실례는 러일전쟁 당시의 여순공방전밖에 없을 것이다. . . .

그리하여 동만의 모든 지역은 우리와 일본제국주의와의 가장 격렬한 혈전장으로 되었다.≫(마촌작전, 세기와 더불어 4권)

≪어떤 대원들은 영안이라는 지방이 원래 공산주의운동을 할 만한 고장이 못된다는 한심한 주장까지 하였다. 그들이 내놓은 첫 번째 논거는 영안사람들이 의식수준이 낮아 공산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둘째로는 영안현에 토지가 많은 대신 그것을 경작해야 할 농민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사회계급적 관계에서 적대적 모순이 생기지 않으며 따라서 계급투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 . .

주민이 적고 땅이 넓어서 적대적 모순이 조성되지 않는다는 것도 현실을 잘 모르고 내리는 피상적인 판단이다. 그런 이론대로 한다면 인구밀도가 높은 독일이 인구밀도가 희박한 러시아보다 계급적 모순도 더 첨예하고 혁명승리도 먼저 달성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는가. 이것은 궤변이다 하고 그 논거를 일축해버렸다.≫(영안땅에 울려퍼진 하모니카 소리, 세기와 더불어 3권)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우리 주력부대에 ≪토벌≫역량을 총집중하였습니다. 1군은 다 녹고 얼마 없다, 남은 것은 김일성부대뿐이다, 전역량을 다 동원하여 김일성부대 토벌에 집중하라고 떠들어대면서 야단법석을 하였습니다. 적들은 통신수단으로 비둘기까지 날리면서 싸움에 열을 올리었습니다.

적들의 전술이 어떤 전술이었는가. 혁명군을 쉬지도 못하게 하고 먹지도 못하게 하고 자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전술을 가지고 수백 명씩 막 들이밀었는데 하루 20번이상 전투를 한 날도 있었습니다.≫(고난의 행군, 세기와 더불어 7권)

≪소부대를 발견한 적들은 유격대원들을 사로잡으려고 기를 쓰고 따라왔습니다. 최희숙은 포위속에서 그만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적들에게 붙잡히었습니다.

적들은 비밀을 뽑아내려고 그에게 말이나 글로써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고문을 들이댔습니다. 나중에는 그의 두 눈까지 뽑아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고문과 위협도 최희숙의 송죽같은 절개를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최희숙   나에게는 지금 눈이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혁명의 승리가 보인다!

여투사의 이 외침앞에서 혼비백산한 적들은 최희숙의 심장까지 도려냈습니다.≫(여투사들의 절개, 세기와 더불어 7권)

≪나는 그런 통보까지 받고나서 일본사람들의 심부름을 마지못해 하는 박차석과 달리 이종락은 조국과 민족도 안중에 두지 않고 의식적으로 적들에게 복무하는 일제의 충견이며 심복이라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우리 대원들의 한결같은 요구에 따라 사령부는 이종락을 민족반역자로 규정하고 그를 처형하는데 동의하였습니다. 이종락의 시체위에 동창생이건 누구건 배신자는 이렇게 처단한다는 내용의 경고장을 덮어두었습니다.≫(남패자의 수림속에서, 세기와 더불어 7권)

남패자에서는 이종락이 일본군속의 옷을 입고 나타나 귀순을 권고했지, 고난의 행군 때에는 이호림이 달아나버렸지, 임수산도 변절했지, 오늘은 또 최용빈이라는게 찾아와서 어쩌고저쩌고 하니 내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 . .

혁명이 다 망했기 때문에 옛 사령관한테 찾아와 ≪귀순≫을 설교해도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정세에 암둔했고 인간자체가 극도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최용빈은 이종락과 같은 운명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1940년 겨울, 세기와 더불어 8권)

≪1941년 4월에 쏘련과 일본사이에는 중립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쏘련과 일본 사이에는 러일전쟁 당시부터 역사적으로 형성된 뿌리깊은 모순관계가 있습니다. 그 모순관계가 쏘일간의 새로운 전쟁으로 번져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나라는 즉시적인 충돌을 피하는 방향에서 정치군사외교를 추진시키고 있었습니다.

독일과 일본은 쏘련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경계한 세계최악의 호전국가들이었습니다. 쏘련은 반공의 돌격대로 등장한 히틀러독일의 침공을 미연에 방지해보려고 여러 모로 애를 쓰면서 독일과의 있을 수 있는 전쟁을 피하든가 최소한 지연이라도 시킬 목적으로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일본사람들과의 화평을 추구하면서 그들의 침공을 예방하려고 하였습니다. 쏘일중립조약의 체결은 이런 맥락속에 이루어진 일시적인 결과물이었습니다.≫(국제연합군을 편성하여, 세기와 더불어 8권)

≪이렇게 우리 나라의 해방은 15성상이나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강력한 군사적 타격을 안겨 그것을 밑뿌리채 뒤흔들어놓은 조선인민혁명군과 각계각층을 망라한 전민항쟁역량의 총동원으로 이룩되었습니다. 우리 군대와 인민의 장기간에 걸치는 항전이 선행되었기에 쏘련의 대일작전은 그처럼 짧은 기간에 결속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의 해방은 쏘련군이 일본관동군을 격멸하는 유리한 환경에서 우리 인민과 인민혁명군 자체의 역량에 의해 마련된 위대한 결실입니다. 1930년대와 1940년대 전반기에 우리가 조직한 국내의 항쟁조직들과 무장대들이 조선인민혁명군의 최후공격작전계획에 따라 국내도처에 웅거하고 있는 일제의 침략무력과 식민지통치기구들을 제압소탕하고 나라를 해방하였습니다.≫(최후결전의 날, 세기와 더불어 8권)

둘째, 비적대적 모순이다.

≪나는 그런 토론을 들으면서 화성의숙에서 실시하는 민족주의교육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는 것을 더욱 통절하게 느끼었다. 봉건왕조를 되살리겠다는 것도 그렇고 자본주의길로 나가야 한다는 것도 그렇고 다 시대착오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답답해졌다.

나는 참다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나라는 구라파나라들처럼 부르조아혁명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낡은 봉건통치기구를 그대로 되살려도 안된다고 말하였다. . . .

우리는 조선을 독립시킨 후 조국땅에 착취와 압박이 없는 사회,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근로대중이 잘 사는 그런 사회를 세워야 한다. ...

많은 학생들이 나의 주장에 공감을 표시하였다. 착취와 압박이 없는 만민평등의 부강한 사회를 세우자고 하는데 누가 반대하겠는가.≫(환멸, 세기와 더불어 1권)

유격대원들속에서 국민부테러분자들을 타도하고 최창걸의 복수를 하자는 목소리가 폭발적으로 터져나온 것이 바로 그때였다. 유하의 청년들이 국민부의 테러분자들을 요정내고 남만청총대회때 괴모산골짜기에서 학살된 6열사의 원쑤, 최창걸의 원쑤를 갚아야 한다고 부르짖을 때만 하여도 나와 목소리를 합쳐 그들을 달래던 동무들까지 지휘부로 찾아와 우리의 자제력에도 한도가 있지 않느냐고 하면서 한번 싸움을 본때있게 하여 버릇을 떼주자고 하였다. 그런데 버릇을 떼준다는 것도 말은 쉽지만 그렇게 간단히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우선 역량상으로 볼 때에도 상대는 우리보다 더 우세하였다.

그러나 이런 대비는 큰 문제로 되지 않았다. 제일 난처한 것은 상대가 적 아닌 적이라는 것이었다. 항일구국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싸우는 무장부대들끼리 서로 맞총질을 한다는 것은 사실상 1930년대 초기의 혼란된 시국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일종의 만화라고밖에는 달리 말할 수가 없었다. 반일인민유격대와 독립군이 동족상잔을 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중국인반일부대와 독립군이 합작하여 반일인민유격대를 공격한다는 것도 괴이한 일이었다.

싸움을 하면 물론 승패는 갈라질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유의 싸움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다 도덕적인 규탄을 면치 못하는 법이었다.≫(단합의 이념아래, 세기와 더불어 2권)

≪동장영은 자기의 주장의 고집하면서 소비에트를 절대화하였다. 그는 성미가 온화하고 인정도 있는 사람이었으나 벽창호였다. 지식이 풍부한 반면에 사고와 실천에서는 교조를 많이 범하였다.

그 후 나는 다시 동장영과 함께 정권문제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 그날의 논쟁에서 중점적으로 토의된 것은 소비에트를 유지하는가 포기하는가, 포기한다면 새로운 정권형태로 어떤 것을 선택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과업을 수행해야 할 동만지방의 유격구들에서 소비에트가 실정에 맞지 않는 정권형태라는 것이 생활적으로 증시된 조건에서 조중 두 나라 공산주의자들은 결단을 내려 정권형태를 바꾸고 인민이 구미에 맞는 정책을 실시하여 혼란상태에 빠진 시국을 수습해야 한다고 동장영을 설복하였다.≫(소비에트냐 인민혁명정부냐, 세기와 더불어 3권)

≪동장영의 죽음도 나에게 있어서는 가슴아픈 손실이었다. 그는 나를 사랑해주고 나의 사상을 존중해주던 중국 동지들 가운데서도 가장 잊지 못할 전우의 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와 함께 중요한 노선문제를 두고 논쟁도 많이 하였다. 고집이 좀 세 견해의 일치를 보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나 그러한 견해상의 차이가 우리의 우정에까지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는 늘 조선사람들 가운데서는 내가 제일 믿음이 간다고 하면서 무척 나를 위해 주었다.≫(마촌작전, 세기와 더불어 3권)

≪그런데 간도의 유격근거지들에서는 혁명이 혁명을 타도하는 비극적인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타도하는 사람들과 타도당하는 사람들 사이에 모순이나 대립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도하는 사람들은 타도당하는 사람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혁명대오에서 무자비하게 제거하였다. ≪숙반≫의 심판대에 오른 사람들의 절대 다수는 지난날 혁명을 위해 일신을 초개와 같이 바쳐온 검열된 투사들이었다.≫(사나운 회오리, 세기와 더불어 4권)

≪어떤 사람들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내세우고 있는 민족해방의 구호가 ≪민생단≫에서 만들어낸 ≪조선인에 의한 간도자치≫의 구호와 같으며 국제당의 1국1당제원칙에도 모순된다고 하였다.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는 간부가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이것은 우리의 견해와 완전히 상반되는 위험한 견해였다. 만일 이 견해대로 한다면 우리는 조선혁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나라의 혁명을 위해서 그들의 시중꾼이나 국제군의 한 구분대의 사명만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조선혁명을 한갓 다른 큰 나라 혁명의 부속물로밖에 보지 않는 이런 견해를 용인할 수 없었다.≫(다홍왜에서의 논쟁, 세기와 더불어 4권)

≪맑스주의고전들을 한 배낭씩 지고 다니는 축들은 적군속에 혁명조직을 꾸린다는 것은 일종의 계급협조와 비슷한 우경적인 탈선이라고 비평하였다. 그것은 불상용적 모순관계에 있는 계급적 원쑤들과의 제휴를 꾀한다는 것이겠는데 고전에는 적군와해에 대한 명제가 없다고 우겼다. 지금 청년들이 들으면 코막고 답답한 사람들이라고 비난하겠지만 고전의 명제가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던 당시로서는 이런 일면적인 입장이 상당한 정도로 득세하였다. . . .

문제는 선행고전에 적군와해에 대한 명제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혁명의 근본이익으로부터 출발하여 노선과 방침을 세우려고 하지 않은데 있었다.≫(기이한 인연, 세기와 더불어 4권)

≪요영구회의 결정에 따라 위증민이 국제당에 제소하기로 되어있는 기본문제는 현상적으로는 동만에서 수천 명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였던 ≪민생단≫문제였으나 내용적으로는 조선혁명의 주체성에 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조선혁명의 구호를 들고 싸우는 것이 정당한가 정당하지 않은가, 합법적인가 비합법적인가, 국제당의 1국1당제원칙에 모순되는가 모순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지금의 사고방식으로 놓고 보면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명약관화한 것이지만 국제공산당이 존재하였고 1국1당제원칙이 불가역적인 것으로 되어 있던 당시로서는 어느 견해가 옳고 어느 견해가 그르다고 가볍게 판정할 수 없는 복잡하고 심각한 난문제였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생사를 판가름하는 중대한 운명문제이기도 하였다.≫(경박호기슭에서, 세기와 더불어 4권)

≪최현은 두 산림부대사이에 화해를 시킨다고 하면서 연회를 차렸다. 투항을 시도하던 100명짜리 산림부대의 지휘관들도 연회에 초대되었다. 그 지휘관들이 연회장에 나타나자 최현중대는 그들을 순식간에 무장해제시켰다. 그러면서도 80명짜리 산림부대는 건드리지 않았다. 그 부대와 우호관계에 놓여 있던 자위단에 대해서도 물론 실력행사는 하지 않았다.

최현이 그 자위단을 치지 않은 것은 통일전선노선의 요구에 부합되는 공명정대한 처사였다. 그러나 군부 정치주임을 비롯한 상급의 좌경분자들은 ≪적을 치지 않았으니 적에게 투항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식으로 최현의 정당한 처사를 범죄시하면서 그를 정치지도원자리에서 철직시키고 그가 애용하던 모젤권총까지 회수하였다.≫(백전노장 최현, 세기와 더불어 4권)

≪우리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조국해방을 위하여 싸우는 것은 민족적 권리라는 것을 인식시키고 그것이 결코 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와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납득시키는데 상당한 시간과 정력을 바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 . .

나의 이야기를 주의 깊이 듣고 난 이동백은 무릎을 치며 환성을 올렸다.

≪이제는 됐습니다! 눈뜬 소경이 됐던 나는 장군과 논쟁을 한 덕에 불구를 면케 됐습니다. 대찬성입니다.≫≫(조국광복회, 세기와 더불어 4권)

통일전선탑

박달은 아마도 우리가 운동의 최고목적을 포기하고 모종의 기회주의적 입장에로, 적극적인 투쟁형식보다도 타협적인 개량주의 운동에로 돌아섰다는 비난이라도 받을까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도 역시 ≪대통영감≫이 초기에 가지고 있던 교조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불굴의 투사 박달, 세기와 더불어 5권)

열하원정계획이 매우 무모하고 비현실적인 군사작전이었다는 것은 중일전쟁발발 후 더욱 명백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종전에도 그랬지만 국제당은 이 시기에 와서도 ≪반달형포위≫라는 꿈을 버리지 않고 항일연군부대들에 승산없는 서정을 계속 요구하였습니다.≫(열하원정, 세기와 더불어 5권)

≪위증민이 조선혁명가들은 조선혁명의 기치를 들고 싸워야 한다는 나의 주장이 국제주의와 모순되지 않으며 반민생단투쟁이 극좌적으로 진행되었다고 한 나의 발언도 정당하다는 국제당의 견해와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조선의 민족군대를 가지고 국내와 압록강연안에서 싸워야 한다는 국제당의 결론을 전달하면서 내 어깨를 부둥켜안았을 때 나는 조선혁명을 위해 바친 그의 노고를 잊지 말자고 생각하였습니다.≫(위증민에 대한 회상, 세기와 더불어 8권)

≪그러나 왕청문에서의 희생이 아무리 참혹하고 가슴아픈 것이라 하더라도 국민부의 반동적인 상층이 범한 죄행을 민족주의진영전체의 잘못으로 증폭시켜 전가할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대의를 위해서 동지들의 희생으로부터 오는 슬픔과 분노를 묵새겨가며 통일전선의 기발을 시종일관하게 추켜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과거를 백지화하고 국민부의 잔존세력으로 남만에서 활동하던 양세봉이네 부대에도 찾아갔고 반공의 대명사와 같은 존재로 되어있던 김구와의 합작도 모색하였습니다. . . .

역사적 사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우리가 일찍부터 점을 찍어두었던 대상들은 해방 후 모두 통일전선의 기발아래 모여들었습니다. 1948년 4월의 남북연석회의에 어떤 정객들이 참가했는가를 보시오. 김구, 김규식, 조소앙, 최동오, 엄항섭, 조완구, 김월송… 이름있는 민족주의자들은 다 참가하지 않았습니까. 따지고 보면 김구네 임시정부인사들은 다 우리에게로 온 셈입니다.≫(반일애국역량과의 단합을 위하여, 세기와 더불어 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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