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8월 23일(금)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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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과 주체확립

통일여명 편집위원 강인규

 

먼저, 주체란 조선혁명이고 주체확립이란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다. 주체를 조선혁명이 아니라 ≪한국혁명≫으로 규정하는 것은 김일성혁명사상과 아무런 인연이 없는 반국적 관점이다.

≪우리 당사상사업에서 주체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다른 나라의 혁명도 아닌 바로 조선혁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조선혁명이야말로 우리 당사상사업의 주체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상사업을 반드시 조선혁명의 이익에 복종시켜야 합니다.≫(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 1955 12 28)

≪사상에서 주체를 세운다는 것은 혁명과 건설의 주인이라는 자각을 가지며 자기나라 혁명을 중심에 놓고 모든 것을 사고하고 실천하며 모든 문제를 자기의 지혜와 힘으로 풀어나가는 관점과 태도를 가지도록 하는 것입니다.≫(주체사상에 대하여, 1982 3 31)

다음으로, 주체확립의 과정에서 주체사상이 창시되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 민중을 믿고 민중에 의거하며 사대주의와 교조주의를 반대하는 과정, 주체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주체사상을 창시하시었다.

≪나는 감방에서 우리 나라의 민족해방투쟁과 공산주의운동이 남긴 경험과 교훈도 분석해보고 다른 나라의 혁명운동경험도 더듬어보았다. . . .

민족주의자들은 이렇게 여러 파로 갈라져 큰 나라들을 쳐다보면서 쓸데없는 말싸움만 하였다.

독립운동의 지도적 위치에 있던 인물들 가운데는 중국을 등에 업고 조선의 독립을 이룩해 보려는 사람들도 있었고 쏘련의 힘을 빌어 일본을 타승해 보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미국이 조선독립을 ≪선사≫해줄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민족주의자들이 사대주의를 하게 된 것은 인민대중의 힘을 믿지 않은데 있었다. 민족주의운동은 인민대중을 떠나 상층운동에 머물러있었기 때문에 튼튼한 지반을 가질 수 없었으며 인민들의 지지도 받을 수 없었다.

인민들과 이탈되어 상층의 몇몇 사람들끼리만 모여앉아 말공부와 권력다툼으로 세월을 보내면서 대중을 혁명투쟁에로 불러일으키지 않은 본질적 약점은 공산주의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속에서도 나타났다.

초기공산주의자들은 인민대중속에 들어가 그들을 교양하고 결속하며 투쟁에 동원할 대신 인민들과 동떨어져 말공부나 하고 ≪영도권≫쟁탈을 위한 권력싸움만 하였다. . . .

초기공산주의자들은 사대주의에 사로잡혀 자체로 당을 꾸리고 혁명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저마다 자기 파가 ≪정통파≫라고 하면서 감자도장까지 만들어가지고 국제당의 승인을 받으러 돌아다니었다.

나는 우리 나라 민족주의운동과 초기공산주의운동의 이러한 실태를 분석하여 보고 혁명을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되겠다는 것을 심각히 느끼게 되었다.

이로부터 나는 자기 나라 혁명은 자신이 책임지고 자기 인민의 힘에 의거하여 수행하여야 승리할 수 있으며 혁명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지금 말하는 주체사상의 출발점으로 되었다.≫(철창속에서, 세기와 더불어 1권)

≪총괄적으로 말하여 선행세대의 전략이나 노선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약점은 인민대중의 힘을 믿지 않고 외면한데 있었다.

선행세대의 운동자들은 한결같이 인민대중이 혁명의 주인이며 혁명을 추동하는 힘도 인민대중에게 있다는 진리를 무시하고 있었다. 수백만 대중의 조직된 힘에 의거해야 일제를 타도할 수 있겠는데 우리 나라의 반일운동자들은 혁명도 독립전쟁도 특수한 몇몇 사람들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공산주의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이런 입장에서 기초축성은 별로 하지 않고 몇몇 상층인물들로써 당중앙을 선포하는 방법으로 당을 만들었으며 대중속에 깊이 들어가지 않고 3인1당, 5인1파식으로 서로 분열되어 여러 해 동안 헤게모니싸움을 벌였다.

선행세대의 노선이나 전략들은 또한 조선의 산 현실에 발을 튼튼히 붙이지 못한 심중한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조선의 산 현실에 부합되는 옳은 지도이론을 내놓자면 고전이나 다른 나라의 경험을 절대시하지 말고 모든 문제를 자체의 실정에 맞게 독자적으로 사고하고 독창적인 방식을 풀어나가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였다. 지도이론을 마련한다고 하여 10월혁명의 경험 같은 것을 통채로 받아들여도 안되었고 국제당이 그 어떤 만병통치의 처방을 가져다줄 것 같이 기대하면서 팔짱을 끼고 앉아있어도 안되었다.

≪우리가 믿을 것은 인민대중의 힘밖에 없다. 2천만의 힘을 믿고 그 힘을 하나로 묶어세워 일본제국주의자들과의 혈전을 벌이자.≫

나의 마음속에서는 이런 외침이 자주 울리었다.

나는 이런 충동을 안고 오늘 우리가 주체라는 이름을 달아서 부르고 있는 사상을 보고의 구절구절에 담으려고 노력하였다. 보고에 담으려고 한 내용들은 모두 우리 혁명의 전도와 관련되는 심중한 문제들이었다.≫(카륜회의, 세기와 더불어 2권)

   ≪우리는 그 연설을 듣고 모두 환성을 울리면서 ≪혁명가≫를 불렀다. 우리가 카륜에서 이처럼 조선혁명의 진로를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길림시절에 이미 청년학생운동을 하는 과정을 통하여 조선혁명에 대한 주체적 입장과 태도를 확립하고 공산주의운동의 새 길을 개척해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투쟁의 나날에 심어지고 옥중에서 무르익힌 그 사상과 입장을 ≪조선혁명의 진로≫라는 이름으로 발표하였을 뿐이다.

그것이 곧 우리 혁명의 노선으로 되고 지도사상으로 되었다. 우리가 그 논문에서 전개한 내용을 보면 모두가 주체사상을 핵으로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사상은 그 후 항일혁명투쟁을 비롯한 여러 단계의 혁명을 거쳐 어렵고 복잡한 실천투쟁속에서 부단히 발전풍부화되어 오늘과 같이 사상과 이론, 방법의 전일적인 체계를 갖춘 하나의 철학사상으로 되었다.

해방 후 우리가 주체를 세울 데 대하여 특별히 강조한 것은 전후시기 사회주의기초건설을 할 때였다.

1955년에 나는 당선전선동부문 일군들앞에서 사대주의, 교조주의를 극복하고 주체를 세울 데 대한 연설을 하였는데 이것이 곧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라는 문헌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주체를 세울 데 대해서는 그 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하였다.

주체사상의 본질과 그것이 창시되게 된 경위, 그 사상을 어떻게 구현해왔는가 하는데 대해서는 외국인들과의 담화를 통하여 여러 차례 설명하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것을 체계화하여 하나의 책으로 묶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 인민이 그 사상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혁명실천에 구현하면 그것으로 만족하였다. 그 후 김정일비서가 그 사상을 전면적으로 체계화하여 ≪주체사상에 대하여≫라는 논문으로 세상에 발표하였다.≫(카륜회의, 세기와 더불어 1권)

≪수령님께서는 혁명투쟁에 나서신 첫시기부터 이들의 잘못을 꿰뚫어보시고 이들과는 다른 길, 인민대중 속에 들어가 대중에게 의거하며 투쟁하는 참다운 혁명의 길을 걸으시었으며 혁명의 주인은 인민대중이며 인민대중 속에 들어가 그들을 교양하고 조직동원하여야 혁명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진리를 밝히시었습니다. 이것이 주체사상의 출발점의 하나입니다. . . .

수령님께서는 이러한 사대주의, 교조주의의 후과로부터 심각한 교훈을 찾으시고 혁명은 그 누구의 승인이나 지시에 의하여서가 아니라 자기의 신념에 의하여 자기가 책임지고 하여야 하며 혁명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진리를 밝히시였습니다. 이것이 주체사상의 다른 하나의 출발점입니다.≫(주체사상에 대하여, 1982 3 31)

다음으로, 주체확립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회고록의 내용이다.

첫째, 주체확립은 회고록의 종자인 이민위천과 관련되어 있다.

≪≪이민위천≫, 인민을 하늘같이 여긴다는 이것이 나의 지론이고 좌우명이었다. 인민대중을 혁명과 건설의 주인으로 믿고 그 힘에 의거할 데 대한 주체의 원리야말로 내가 가장 숭상하는 정치적 신앙이며 바로 이것이 나로 하여금 한 생을 인민을 위하여 바치게 한 생활의 본령이었다.≫(머리말, 세기와 더불어 1권)

≪나는 나의 글이 인민을 믿고 인민에게 의거하면 천하를 얻고 백 번 승리하며 인민을 멀리하고 그의 버림을 받게 되면 백 번 패한다는 진리, 생과 투쟁의 교훈을 후세에 남기게 되기를 바란다.≫(머리말, 세기와 더불어 1권)

둘째, 주체확립은 혁명적 수령관과 관련되어 있다.

조선인민혁명군 사령관 김일성동지   ≪내가 김혁, 차광수, 최창걸과 같은 사람들을 그토록 사랑하고 잊지 못해하는 것은 그들에 나에 대한 노래를 짓고 나를 지도자로 내세워서가 아니다. 바로 그들이 우리 민족이 그처럼 절절하게 바라면서도 실현할 수 없었던 통일단결, 우리 인민의 자랑이고 영광이며 무궁무진한 힘의 원천인 참다운 통일단결의 시원을 열어놓고 우리 나라 공산주의운동에서 영도자와 대중의 일심동체를 이룩한 통일단결의 새 역사를 피로써 개척한 선구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함께 혁명을 한 새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은 자리다툼 때문에 대오에 불화를 조성한 적도 없고 의견상이로 하여 우리가 생명으로 내세운 통일단결을 파괴해본 적도 없었다. 통일단결은 우리 대오에서 진짜 혁명가와 가짜 혁명가를 가르는 시금석으로 되어있었다. 그렇게 때문에 그들은 감옥과 교수대로 끌려가면서도 이 통일단결을 목숨으로 사수하였다. 그리고 다음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에게 그것을 재보로 넘겨주었다.

그들의 첫째가는 역사적 공적이 바로 거기에 있다. 지도자를 내세우고 그 지도자를 핵으로 통일단결한 새 세대 공산주의자들의 숭고하고 아름다운 넋은 오늘 우리 당이 일심단결이라고 부르는 통일단결을 낳은 위대한 전통으로 되었다.

청년공산주의자들이 지도자를 내세우고 그 지도자의 두리에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 혁명투쟁을 전개한 바로 그때로부터 조선의 민족해방투쟁은 파쟁과 혼란으로 얼룩진 지난날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장을 개척하기 시작하였다.≫(혁명시인 김혁, ≪세기와 더불어≫ 2권)

≪길림시절에 새 세대의 청년공산주의자들이 나를 영도의 중심으로 내세웠다면 1930년대와 1940년대 전반기에는 김책을 비롯한 항일혁명투자들이 나를 통일단결의 중심으로 내세우고 조선혁명의 주체노선을 관철하기 위해 투쟁하였습니다.

나를 통일단결의 중심으로 내세우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 나라 혁명에서는 영도중심이 형성되었습니다. 이 영도중심을 꾸리는데서 김책은 특출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공산주의운동과 민족해방투쟁역사에서 김책이 차지하는 몫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혁명가 김책, 세기와 더불어 8권)

세째, 주체확립은 항일무장투쟁노선과 관련되어 있다.

≪20세기초엽에 벌써 ≪가쯔라-타프트협정≫으로 일본의 조선침략을 ≪승인≫한 미제가 조선의 독립을 지원할 리 만무하였다. 역사는 강대국들이 작은 나라를 동정하고 약한 나라 인민들에게 자유와 독립을 선사한 전례를 알지 못한다. 한 민족의 자주권은 오직 그 민족자체의 주체적인 노력과 불굴의 투쟁에 의해서만 보존하고 쟁취할 수 있다. 이것은 여러 세기와 세대를 거쳐 이미 역사에 의해 검증된 진리이다.≫(독립만세의 메아리, 세기와 더불어 1권)

≪나는 그때 특히 무장투쟁문제를 놓고 많은 생각을 하였다.

우리는 보고에서 무장으로 전면적인 항일전쟁을 벌일 데 대한 문제를 반일민족해방투쟁의 기본노선으로,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첫째가는 과업으로 제기하였다.

무장투쟁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내리고 그것을 방침으로 확정하기까지에는 오랜 시일이 필요하였다. 카륜에서 이 문제를 방침으로 채택할 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적수공권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조건에서도 나는 무장투쟁을 하자면 청년공산주의자들의 손으로 새 형의 군대를 창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카륜회의, 세기와 더불어 2권)

새 사단을 조직하는 문제는 우리 혁명의 주체노선을 관철해 나가는데서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관건적인 문제였다.

이제는 우리가 조선혁명에 주력하는 것을 어느 누구도 감히 시비하거나 훼방해 나설 수 없게 되었다, 우리가 오래 전부터 탐색해왔고 축성해왔던 조선혁명의 궤도우에는 그 어떠한 차단봉도 가로질러 있지 않았다.

그 궤도를 따라 곧바로 질주해 나가면 조국광복이라는 경축광장에도 가닿게 되고 인민의 나라라는 별천지에도 가닿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하자면 그 궤도우로 달리게 될 든든한 기관차와 차량들을 마련해야 했고 위력한 사령지휘처도 꾸려야 했다.

조선혁명의 선두기관차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새로 조직하자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주력사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창립하려는 조국광복회는 그 기관차 뒤를 따라가는 열차차량에 비길 수 있었다. 미구에 타고 않으려는 백두산은 조선혁명의 사령지휘처라고 할가. 우리는 이러한 과업수행에 지체없이 매진하여야 하였다.≫(새 사단의 탄생, 세기와 더불어 4권)

네째, 주체확립은 조선인민혁명군과 관련되어 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영도밑에 불패의 대오로 강화된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

조선인민혁명군은 경우에 따라서 동북인민혁명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도 활동하였다.

우리의 견해에 의하면 동북이라는 명칭은 어느 한 나라를 의미하는 국호로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지역적 개념으로 통용되는 것이었다.

우리가 조직한 인민혁명군이 ≪만주인민혁명군≫이나 ≪중국인민혁명군≫이 아니라 동북인민혁명군이라는 명칭으로도 활동한 것은 반만항일을 투쟁목적으로 내세우고 있던 중국 동지들에게 있어서도 적합한 것이었다. 결국 동북인민혁명군은 조선인민혁명군으로서의 사명과 함께 중국공산주의자들의 반만항일위업에 이바지하는 혁명무력으로서의 사명도 동시에 감당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은 간도와 동변도 일대,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조선반도 전역에서 가장 강대한 무장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반일인민유격대를 인민혁명군으로 통합개편하는 과정에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취한 원칙적인 입장과 용의주도한 정치적 아량은 그 후 일제를 반대하는 조중인민의 공동투쟁, 특히 중국 동북지방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만일 우리가 당시의 주객관적 정세를 고려함이 없이 우리 혁명의 주체노선에 명실상부한 형식이나 명칭만을 고집하였더라면 조선공산주의자들은 항일무장투쟁을 중국인민의 광범한 지지성원속에서 효과적으로 전개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훗날 동북항일연군을 조직한 다음에도 조중항일연합군의 성격에 맞게 중국 동북지방에서 활동할 때에는 동북항일연군이라고 하였고 조선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거나 조선에 나와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정황에 맞게 이름을 바꾸어가며 활동함으로써 이르는 곳마다에서 조중 양국 인민의 사랑과 보호속에 살며 싸울 수 있었다.

우리가 운동의 그 어떤 형식적인 측면보다는 본질적인 내용을 더욱 중시한 것은 지금의 시점으로 평가해보아도 참으로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원칙적인 견해와 폭넓은 태도로 하여 우리는 언제나 국제주의자로서의 자기 본분을 지키면서도 투쟁의 민족적 성격과 독자성을 원만히 고수할 수 있었으며 바로 이것으로 하여 중국동지들이나 국제당으로부터 높은 존경과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 . .≫(조선인민혁명군, 세기와 더불어 3권)

≪국제당에서는 우리들에게 단순한 정신적 지지, 노선 상의 지지만 보내지 않았다. 우리가 앞으로 조선혁명을 힘차게 떠밀고 나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몇 가지 대책적인 안까지 주어 행동상 지지도 표시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지금까지 연합하여 공동투쟁을 전개해 왔던 반일유격부대들을 조선인 부대와 중국인 부대로 갈라 재편성하도록 하라는 지시였다.

이 문제로 말하면 사실상 조선혁명에 대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책임과 권리에 대한 문제에서 중핵을 이루는 것으로서 조선혁명의 주체성, 독자성을 견지해나가는데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국제당의 지시대로 만주의 모든 유격부대들에서 조선사람들을 다 뽑아다가 순수한 조선인 부대를 따로 편성한다면 그 역량만으로도 능히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2개 사단 역량과 대적하여 혈투를 벌일 수 있었다. 우리가 일당십의 정신으로 일본군과 혈전을 벌이게 되면 조선청년들이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합세하면 전국은 달라지고 조국광복은 훨씬 앞당겨질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까지 여러해 동안 한 전호에서 공동의 적을 반대하여 연합항일을 해온 공산주의자들로서의 형제적 의리, 전우의 의리를 저버릴 수 없었다. 자기들쪽에 유리하다고 하여 조선사람들을 다 떼오게 된다면 조선족 군사인원이 90%나 되는 제2군같은 것은 허물어지고 말 수 있었다. . .. .

국제련합군의 소부대조선공산주의자들은 1930년대 중기부터 중국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항일연합군을 편성하고 반만항일의 기치밑에 공동투쟁을 조직전개함으로써 항일무장투쟁을 성과적으로 발전시키고 있었다. 새로운 정세하에서 조선인민혁명군 부대가 국경지대에 진출하여 조선혁명에 주력한다고 하여 중국인민의 항일무장부대들과의 공동투쟁을 약화시킬 수는 없었다.

파시스트의 연합된 역량에 맞서 에스파냐와 같은 나라들에서 인민전선을 지지하는 진보적 세력이 단결하여 싸우고 있는 때에 조중항일무장부대를 조선인부대와 중국인부대로 가른다는 것은 시대적 추세에도 부합하지 않고 도리에도 어그러지는 것이었다.

우리가 중국땅에서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는 형편에서 조선사람들이 따로 갈라져 나와 부대를 조직하게 되면 우리에 대한 중국인민들의 지지와 도움도 종전보다 약화될 수 있었다.

우리가 요구한 것은 자주권이었지 분권은 아니었다. 우리는 조선사람들이 제한과 구속과 방해를 받지 않고 조선혁명을 해나갈 수 있는 자주적 권리를 인정하고 존중할 것을 요구한 것이지 세력분배를 요구하지 않았다.≫(경박호 기슭에서, 세기와 더불어 4권)

다섯째, 주체확립은 반유격구노선과 관련되어 있다.

반유격구문제는 근거지에 대한 단순한 형태상의 고찰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대주의, 교조주의를 극복하고 혁명에서 주체적 대를 세우는가 못 세우는가 하는 사상적 입장 문제였으며 좌경에서 벗어나 지난날 ≪양면파군중≫이라고 하면서 배척했던 광범위한 인민들을 혁명의 동력으로 보는가 보지 않는가 하는 군중관점 문제였고 그들을 반일민족통일전선에 결속시키는가 못 시키는가 하는 혁명역량편성과 직결되는 심각한 문제였다.

반유격구란 우리도 통치하고 적들도 통치하는 지역, 형식상으로는 적의 통치지역이지만 내용상으로는 우리의 관할지역으로서 항일유격대에 대한 지원조건도 지어주고 그 후비원천을 비롯한 혁명역량도 키워내며 적구와 유격구 사이에서 중간 연락소의 역할도 담당하는 그런 곳을 말한다. 좀더 형상적으로 표현하면 낮에는 적들이 통치하지만 밤에는 우리가 관할하는 그런 지역을 말한다.

혁명근거지 건설에서 반유격구 형태는 우리의 투쟁실정에 맞는 것이었다. 이런 형태는 다른 나라들의 유격전쟁 경험에도 별반 없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 혁명의 발전노정은 반유격구 창설을 정상한 과제로 내세웠다. . . .

반유격구의 건설은 적백구역의 설정으로써 많은 군중을 적의 편으로 밀어던지던 좌경적 편향을 극복하고 반일민족통일전선의 기치밑에 광범한 인민대중을 하나의 정치적 역량으로 묶어세울 수 있게 하였으며 사대주의, 교조주의를 극복하고 조선혁명을 주체적으로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낮에는 적의 세상, 밤이면 우리 세상, 세기와 더불어 3권)

여섯째, 주체확립은 인민혁명정부노선과 관련되어 있다.

인민혁명정부를 세워주시고 인민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시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이러한 흐름속에서 동만의 모든 유격구들에서 소비에트는 인민혁명정부나 농민위원회로 교체되었고 공농유격대는 반일인민유격대로 개칭되었으며 적위대는 반일자위대로 개편되었다.

반성위의 출현은 유격구의 낡은 질서를 뒤흔들어놓은 회오리바람으로 되었다. 우리가 길림시절부터 일관하게 견지해온 혁명에 대한 주체적 입장은 국제적인 지지와 고무를 받을 수 있었으며 우리가 내놓은 모든 노선과 방침들을 그 정당성을 다시 한번 확고히 검증받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국제당이 하는 일을 하나에서 열까지 덮어놓고 다 좋다고 하거나 그 지령에 맹목적으로 추종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국제당의 처사에 대하여 존중시하면서도 조선혁명과 세계혁명의 이익의 견지에서 그것을 주체성있게 대하였다.≫(국제당 파견원, 세기와 더불어 3권)

일곱째, 주체확립은 민족통일전선노선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믿을 것은 인민대중의 힘밖에 없다. 2천만의 힘을 믿고 그 힘을 하나로 묶어세워 일본제국주의자들과의 혈전을 벌이자.≫(카륜회의, 세기와 더불어 2권)

≪남호두회의 이후 시기부터 우리의 통일전선운동은 범민족적인 통일전선체의 조직을 위한 활동에로 집중되었다. 하나의 상설적인 통일전선조직을 내오고 그 산하에 광범한 반일애국역량을 튼튼히 묶어 세우는 것은 우리 혁명발전의 견지에서 보나 내외 정세의 요구로 보나 더는 미룰 수 없는 절박한 과제로 나섰다.

자주독립을 이룩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 민족대단결을 바탕으로 하는 전민항쟁에 있고 민족대단결이 자력독립의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적 문제라는 것은 우리가 일찍부터 주장해 온 사상이었다. 통일전선은 주체확립과 더불어 항일혁명투쟁의 초시기부터 견지해 온 가장 중요한 이념의 하나였다.

민족대단결의 통일전선의 이념으로부터 출발하여 우리는 여러 갈래의 민족주의세력과 반일애국역량과의 연합을 실현하기 위하여 꾸준한 노력을 바쳐왔고 중국 땅에서 투쟁하는 조건에 맞게 중국의 광범한 반일역량, 공산주의들과의 공동투쟁도 적극적으로 발전시켜왔다. 이 과정에 우리가 쌓아올린 적지 않은 성과와 경험은 통일전선운동의 폭넓은 발전을 위하여 값있는 밑거름으로 되었다. 우리는 이런 성과와 경험에 토대하여 통일전선운동을 전민족적인 범위에서 벌여나갈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과 함께 그것을 맡아 수행할 수 있는 핵심과 주체적 역량을 빨리 키워내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였다.≫(조국광복회, 세기와 더불어 4권)

여덟째, 주체확립은 전민항쟁노선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믿을 것은 인민대중의 힘밖에 없다. 2천만의 힘을 믿고 그 힘을 하나로 묶어세워 일본제국주의자들과의 혈전을 벌이자.≫(카륜회의, 세기와 더불어 2권)

조선혁명의 주체노선을 관철하는데서 우리가 중요하게 내세운 전략적 과업은 한편으로는 국내에 무장투쟁과 정치투쟁을 총괄적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믿음직한 책원지, 비밀거점을 꾸리는 것이었으며 다른편으로는 강력한 정치적 역량과 군사적 역량을 마련함으로써 자력광복을 위한 전민항쟁준비를 다그치는 것이었다.

국내에 강력한 정치적 역량을 꾸리는 사업은 조국광복회망을 확대하여 각계각층의 광범한 애국역량을 반일민족통일전선의 기치밑에 굳게 묶어세우는 것과 함께 국내에 강력한 당조직망을 꾸림으로써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전반적 항일혁명을 일대 앙양에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핵심역량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실에 있어서 우리가 백두산을 타고앉아 벌이려고 하는 모든 정치적 , 군사적 활동의 승패를 좌우하는 관건적인 중심고리라고 말할 수 있었다.

우리가 국내혁명운동을 확대발전시키기 위한 투쟁을 처음부터 영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니었다. 국내에는 우리가 발을 붙이고 혁명을 심화시켜 나갈 수 있는 일정한 조직적 기초도 있었고 일제의 군도와 곤봉 맛을 본 준비된 정치적 역량도 있었다. 노조와 농조를 비롯하여 전국도처에서 우후죽순처럼 자라난 계층별 대중조직들, 그 조직들을 항일에로 인도해가는 검열된 투사들, 거듭되는 실패와 우여곡절속에서 단련되고 세련되고 강해진 인민, 좌절과 실패를 체험할 때마다 가슴을 치며 피눈물로 기록해놓은 투쟁의 교훈 ㅗㅗㅗ 그 모든 것은 국내혁명운동을 새로운 전략과 전술에 기초하여 가일층 심화발전시킬 수 있는 튼튼한 밑천이었다.

국내혁명운동이 거둔 업적과 경험을 존중시하고 그 성과를 토대로 하여 기성운동을 수습하고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맞게 발전시키는 것, 이것이 국내혁명운동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선택한 자세였고 방침이었다.≫(불굴의 투사 박달, 세기와 더불어 5권)

≪대독전승을 축하하는 모임이 있은 후 연합군에 망라된 조선인 지휘성원들은 한데 모여 조국해방과 관련된 작전문제를 가지고 장시간 토론하였습니다. 정식으로 소집한 회의는 아니었지만 분위기가 아주 진지하고 엄숙했습니다. 모두가 격정에 넘쳐 일제격멸과 조국광복을 부르짖었습니다. 당장이라도 두만강을 건너 국내에로 쳐들어갈 기세였습니다.

논의의 초점은 자력독립과 전민항쟁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체의 힘으로 조국을 해방한다는 확고한 주체적 입장을 튼튼히 견지해야 한다, 자체의 힘으로 조국을 해방하자면 조선인민혁명군의 정치군사적 위력을 백방으로 강화하고 국내의 항쟁조직들을 잘 준비시켜 인민혁명군이 조국해방작전을 벌일 때 그에 합세해서 전인민적 항전을 벌려야 한다, 쏘련, 중국의 무장력과의 군사적 연계를 강화하고 쏘련의 전반적 대일작전과의 깊은 연관속에서 협동작전준비를 잘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그날 우리가 논의한 요점이었습니다.≫(최후결전의 날, 세기와 더불어 8권)

아홉째, 주체확립은 자주적인 당건설노선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중국공산당과의 깊은 연계밑에 공동투쟁을 발전시켜나간 것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남의 나라 땅에서 혁명투쟁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당시의 복잡다단한 정세와 1국1당제에 관한 국제당 노선의 요구에 부합되는 주동적이면서도 신축성있는 조치였다. 우리는 중국공산당과의 이러한 공동투쟁을 적극 발전시키면서 시종일관 조국해방의 기치, 조선혁명의 주체노선을 견지하였으며 그것을 빛나게 관철하였다. 우리의 이러한 원칙적인 입장과 성실한 노력에 대하여 중국의 전우들은 혁명의 민족적 의무와 국제적 의무를 옳게 결합한 뚜렷한 모범으로 된다고 진심으로 찬양하였다. 수천 수만을 헤아리는 조선인민의 우수한 아들딸들이 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기치를 높이 추켜들고 중국의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간고하고 시련에 찬 항일의 대장정에 참가하였다.≫(첫 당조직 - 건설동지사, 세기와 더불어 2권)

≪내가 섭섭하게 생각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이 국제당이 작은 나라 인민들의 운명과 작은 나라 공산주의자들의 민족해방투쟁에 대하여 무심하게 대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이런 푸대접과 냉담성이 물론 우리로 하여금 혁명에서 주체의 대를 튼튼히 세우고 자력으로 민족해방을 이루고야 말리라는 결심을 불변의 것으로 만들어준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국제당의 처사와 입장을 시답지 않게 여기면서도 그것을 반대하거나 바로잡을 수 있는 힘이 아직은 없었던 것, 국제당의 사업조직과 고질로 된 사무실적인 사업작풍이 조선혁명을 희생시킬 수도 있고 조선혁명을 주체적으로 발전시켜나가는데서 하나의 걸림돌로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저지시킬 수 없었던 것, 이것이 내가 제일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던 문제였다.

우리들 새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이 간절하게 열망한 것은 국제당이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품고 있는 이런 고충을 이해하고 혁명을 주체적으로 해나가려는 우리의 지향과 확고부동한 결심에 보조를 맞춰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우리가 혁명실천상에서 시급히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복잡한 문제거리들을 안고 모대길 때 반성위가 동만에 나타난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어쨌든 반성위를 만난 것은 분명 내 생애에서 의미 있는 사변이었다. 국제당에 우리를 이해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종파에 물들지 않은 사람들로 핵심을 양성하여 조선공산주의운동 대열을 다시 꾸리고 조선사람의 당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그의 말에서 나는 특히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받았다. 그때 그가 우리에게 준 조언들은 나로 하여금 사고와 실천에서 주체적인 대를 더욱 튼튼히 견지하게 하였다. 그때 반성위가 준 영향과 동지적 고무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반≪민생단≫투쟁이 스산하게 벌어지던 시기에 조선민족과 우리 혁명의 주체를 옹호고수하여 그처럼 결사적인 투쟁을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나에게 ≪자본론≫을 안내해준 선생이 박소심이고 ≪홍루몽≫을 배워준 스승이 상월 선생이라면 반성위는 조선사람은 조선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우리의 신념을 더욱 굳게 해준 진실한 지지자, 고무자, 동정자였다. . . .

소왕청에서의 잊지 못할 담화를 계기로 반성위는 나의 둘도 없는 벗이 되었고 동지가 되었다. 20살 이상의 격차를 가진 우리가 열흘 남짓한 사이에 십년지기 못지 않은 벗으로 되고 동지로 된 것은 그 어떤 물질의 힘이나 이해타산의 마력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우리가 태양의 열광같이 열렬한 우정을 지닐 수 있은 것은 조선의 해방과 자유를 일일천추로 고대하는 염원이 같았고 세상만사를 주견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풀어나가려는 주체적인 사고방식과 지향이 같았기 때문이었다.≫(국제당 파견원, 세기와 더불어 3권)

위증민   ≪요영구회의 결정에 따라 위증민이 국제당에 제소하기로 되어있는 기본문제는 현상적으로는 동만에서 수천 명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였던 ≪민생단≫문제였으나 내용적으로는 조선혁명의 주체성에 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조선공사주의자들이 조선혁명의 구호를 들고 싸우는 것이 정당한가 정당하지 않은가, 합법적인가 비합법적인가, 국제당의 1국1당제원칙에 모순되는가 모순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지금의 사고방식으로 놓고 보면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명약관화한 것이지만 국제공산당이 존재하였고 1국1당제원칙이 불가역적인 것으로 되어 있던 당시로서는 어느 견해가 옳고 어느 견해가 그르다고 가볍게 판정할 수 없는 복잡하고 심각한 난문제였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생사를 판가름하는 중대한 운명문제이기도 하였다.

1국1당제원칙을 휘두르며 조선사람이 조선혁명의 구호를 드는데 대하여 공산주의자답지 않은 이단행위이며 비당적 분파행위라고 걸고드는 사람들의 지론은 아주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란 곧 국제주의자인데 어떻게 협애한 민족주의이념에 사로잡혀 자기가 당적을 붙이고 있는 나라의 혁명에 모든 것을 다 바칠 생각을 하지 않고 당조차 없는 고국생각에 골몰할 수 있는가, 그것은 제2국제당시기 조국방위의 간판을 들었던 수정주의자들과 같은 입장이다. 레닌은 일찍이 조국방위론자들을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배신자로, 원쑤로 낙인하고 규탄하였다, 당신들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조선혁명론을 계속 주장하게 되면 사회주의자의의 배신자로, 원쑤로 낙인될 수 있으니 경거망동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문제와 관련하여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위증민이 가지고 올 결과를 대체로 짐작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제기한 문제가 정당하였고 또 그 문제에 대하여 위증민도 충분한 인식과 이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국제당에 있는 일군들이 조선혁명의 근본문제와 관련한 우리의 제소에 응당 긍정적으로 대답해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국제당이 우리의 고충을 진리의 편에 서서 공명정대하게 해결해 줄 것이라는 나의 확신은 우리가 위증민을 통하여 모스크바에 제소한 문제점들이 어느 모로 보나 혁명적 원칙과 혁명의 이익에 부합된다고 변함없이 믿어온 데도 있었지만 국제당이 새로운 노선을 추구하고 있었던 당시의 사정과도 적지 않게 관련되어 있었다. . . .

이 요구를 교조적으로 받아들인 결과 일부 공산주의자들속에서 자기나라 혁명의 목적과 민족적 이익을 떠나 모스크바바람에 덮어놓고 추종하는 사대주의적인 경향이 발로되었던 바 이런 경향으로 하여 각국의 혁명운동은 적지 않은 손실을 당하였다.

그러나 국제당의 통일적인 지도밑에 각국의 혁명운동은 발전하였고 매개 나라들에서의 혁명역량도 장성하였다. 각국의 공산주의자들이 자기 나라 혁명을 독자적으로 맡아 수행할만한 역량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 초엽부터는 아세아의 식민지, 반식민지 나라들에서도 공산당들이 연이어 출연하였고 그 당들의 영도밑에 민족해방투쟁도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이 과정에 많은 나라 당들의 발언권이 서게 되고 자기당의 노선을 자주적으로 결정하려는 요구가 높아지게 되었다. 국제공산당이 모스크바에 앉아서 세계혁명의 운전대를 틀어잡고 여러 대륙에 널려 있는 나라들의 구체적 실정에 맞는 처방을 제때에 내리거나 천변만화하는 정황과 조건에 맞게 그 나라들의 혁명투쟁을 조종하고 지도한다는 것도 기실은 어려운 일이었다. 여러 나라 사람들의 연합으로 조직된 국제당은 노선과 정책을 작성하고 시달하는데서 일정한 제한성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국제공산주의운동은 세계적인 범위에서 혁명역량을 조직하고 투쟁을 발전시켜 나가는데서 그 조직형식과 지도방식을 서서히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도달되었다. 혁명은 수출입에 의하여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정과 매개 나라의 혁명역량을 하나로 굳게 묶어세워야 할 절박성은 각국의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노선 작성과 집행에서 주체를 세우고 자기 당의 독자성을 견지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였다. 이러한 변천된 정세는 국제당이 조선혁명의 주체성을 확인해 줄 수 있는 중요한 담보로 되고 있었다.≫(경박호 기슭에서, 세기와 더불어 4권)

열번째, 주체확립은 자력갱생의 혁명정신과 관련되어 있다.

자력갱생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투쟁에서 주체를 세우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도의 하나였으며 자력갱생을 떠나서는 주체에 대해서 생각할 수도 논할 수도 없었다. 도대체 조선혁명의 발전에 대해서 상상할 수도 없었다. 자력갱생만이 우리 인민의 근대 정신생활에서 큰 질곡으로 남아있던 사대주의를 종국적으로 추방하고 자주, 자강, 자립의 이념밑에 민족재생의 활로를 승리적으로 개척해나갈 수 있게 하기 때문이었다. 자력갱생은 주체가 선 인간과 주체가 서지 못한 인간을 가르는 시금석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일전쟁을 개시하는 첫날부터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으로 대중을 꾸준히 교양하였다. 남들이 도와주면 좋고 설사 도와주지 않아도 자기 힘으로 나라를 찾아야 하며 또 찾을 수 있다는 사상, 위에서 해결해주면 좋고 해결해주지 않으면 자신의 지혜와 힘으로 만사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사상은 대중을 쉽게 공감시켰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 힘을 믿지 않거나 과소평가하는 낡은 사상잔재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자기 인민의 힘을 믿고 그에 의거하여 혁명을 하자고 호소할 때 쌍수를 들어 환영하던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 크지 않은 무장문제가 제기되자 머리를 기웃거리며 난색을 짓는 경향이 나타났다. . . .

수리한 격침을 들고 훈련장으로 뛰어올 때 이영배와 방인현의 얼굴에 활짝 피어났던 그 보름달 같은 미소를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미소는 분명 자기 자신의 힘에 대한 다함없는 긍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자기에게 없다고 생각했던 힘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냈을 때에 맛보게되는 쾌감과 희열보다 더 격렬한 환희가 이 세상 또 어디에 있겠는가.

격침 한 개란 사실 보잘 것 없는 것이다. 그것을 수리하는 시간이면 새 보총 10자루도 능히 노획해올 수 있다. 하지만 그 격침 한 개를 수리했을 때에 얻게 되는 교훈은 수소폭탄 한 개의 힘보다 더 큰 힘을 산생시키고 확산시킨다.

맑스와 엥겔스는 인류발전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물론 정당한 규정이다. 인류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인 동시에 자기 발전의 역사, 자기 창조의 역사, 자기 완성의 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인류가 자기 자체에서 사람에게 고유한 힘과 재능을 끊임없이 찾아내고 연마해온 창조의 역사이며 동시에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의 역사이다.

인류역사는 또한 자기를 정치사상적으로, 문화도덕적으로, 과학기술적으로 부단히 세련시켜온 혁신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인류는 이런 창조와 혁신의 힘으로 오늘날의 로케트시대, 컴퓨터시대, 유전자공학의 시대, 녹색혁명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자력갱생은 역사발전을 촉진시켜온 강력한 추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만일 자기 힘을 계발시키지 않고 천지만물의 창조자라고 하는 그 어떤 신이나 하느님의 은총만을 믿고 살아왔다면 우리는 아직도 구석기 시대에서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밀림속의 병기창, 세기와 더불어 3권)

열한번째, 주체확립은 민족배타주의자들과의 사상투쟁과 관련되어 있다.

≪다홍왜회의를 분기점으로 하여 동만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사람들속에서 우리의 활동이 보다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내가 이 글에서 ≪민생단≫문제와 관련된 과거를 지루할 정도로 길게 추억하는 것은 그런 비화를 빚어낸 장본인들을 구태여 만천하에 고발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저지른 범죄를 계산하자는 것도 아니다. 이 추억은 혁명대오를 내부로부터 분열 와해시키려는 적들의 모략과 간계는 어제만이 아니라 오늘도 있고 내일도 있을 것이며 민족배타주의와 좌경분자들의 정치적 졸렬성은 지금도 우리 주변을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똑똑히 인식시킴으로써 후대들에게 조선혁명의 주체확립과 민족의 자주성과 관련된 교훈을 심어주자는데 있다.

나는 반≪민생단≫투쟁과 그 총화로서의 다홍왜회의 과정을 통하여 자주성은 민족의 첫째가는 생명이라는 것과 이 자주성을 고수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민족을 이루는 모든 구성원들, 특히는 그 선각자들의 희생적인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심장 깊이 절감하였다.

인간의 첫째가는 속성이 자주성인 것처럼 민족의 생존을 담보하는 첫째가는 원천도 자주성에 있다. 개별적인 인간들의 생활에 있어서나 민족을 이루는 대집단의 생활에 있어서나 그 운명을 좌우하는 기본적인 생존조건은 자주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항일혁명을 민족적 자주권을 되찾기 위한 성전으로 묘사하는 것은 자주권의 부활이야말로 조선인민이 수십 년동안 절절히 품어온 일차적 숙망이었고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자기의 강령으로 내세운 지상의 과제였다는 사정과 관련된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여 민족해방투쟁의 총적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모든 활동은 이 목표를 실현하는데 복종되어야 했다. 우리는 사고와 실천에서 자주성에 대한 옹호를 생명으로 내세우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어떤 환경에서나 맹호가 되고 우뢰가 되어야 했다.

자주성이란 그 누가 만들어서 선사하는 것도 아니며 시간의 누적과 더불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투쟁을 통해서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 자신을 돌보지 않는 백절불굴의 희생적인 투쟁정신을 발휘하는 사람들만이 자주성을 찾을 수 있으며 그것의 영원한 주인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지구상에는 다른 민족의 자주권을 짓밟는 강도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자기네가 자주성을 가지는 것은 응당하다고 여기면서도 남들이 자주적으로 살려는데 대해서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방해하는 인간들도 수두룩하다. 자주성을 저들만이 점유할 수 있는 독점물로 여기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제국주의, 지배주의의 오만성이다.

자주성을 유린하는 세력이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싸워온 투쟁대열 내부에 있은 것은 상식을 초월하는 역사의 변덕이었다. 이 변덕으로 하여 조선혁명은 심각한 고민과 좌절을 겪었다. 우리는 좌절에서 돌격에로 이전하기 위하여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조선민족과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자주적 권리를 침해하는 사람들과 맹호가 되어 싸웠다. 다홍왜회의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자주의 깃발을 들고 조선혁명의 주체노선을 견지하고 그 권리를 옹호고수하기 위하여 벌인 대사상전이었다.

만일 우리가 인정사정없는 좌경의 철권앞에서 질겁하였거나 희생을 조금이라도 두려워했더라면 우리는 미친 듯이 질주하는 그 좌경의 무한궤도밑에서 혁명을 구원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혁명을 위기에서 구원한 것은 정의를 옹호하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의 강의한 희생정신과 공산주의적 원칙성, 자기 위업의 정당성에 대한 불변의 신념이었다.

제국주의자들이 사회주의의 종말을 떠들며 우리 공화국을 주체의 궤도에서 밀어던지려고 정치적 심리전에 열을 올리고 있는 오늘 자주성을 계속 옹호고수해 나가는 것은 여전히 우리 민족과 우리 공화국의 생사존망과 관련된 사활적 요구로 나서고 있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인민대중중심의 우리 식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자주성을 옹호하기 위한 제국주의자들과 대결에서도 역시 승리자가 될 것이다.≫(다홍왜에서의 논쟁, 세기와 더불어 4권)

≪송일과 김권일은 다 좋은 사람들이었으나 주체를 세우지 못하고 상급에 맹종맹동하다나니 본의 아닌 과오를 범하였다. 나는 그들이 사형장에서 우리의 만세를 불렀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다. 그 두 사람은 나와 중요한 노선상 문제를 가지고 논쟁도 자주 하였다. 그들이 사형장에서나마 이성으로 돌아와 냉철하게 자기 자신들을 돌이켜 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사나운 회오리, 세기와 더불어 4권)

열두번째, 주체확립은 국제당의 열하원정방침에 반대하는 사상투쟁과 관련되어 있다.

국제공산당제7차대회회의장   ≪국제당에 앉아있던 좌경모험주의자들은 우리에게도 열하원정을 단행할 데 대한 지령을 여러 차례에 걸쳐 하달하였습니다.

1936년 봄에 처음으로 열하원정을 요구한데 이어 중일전쟁이 발발된 1937년 여름과 1938년 봄에 또다시 열하원정에 참가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국제당이 1, 2차 원정을 요구하던 1936년과 1937년은 조선인민혁명군이 백두산지구와 서간도일대에 진출하여 당창건준비와 통일전선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시기는 한편 무장투쟁을 국내깊이에로 확대하면서 기세를 올리던 때였으며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자기 나라 혁명은 자신이 책임지고 수행해야 한다는 자주적 입장을 그 어느 때보다도 확고히 견지하고 조선혁명의 주체를 강화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던 때였습니다. 혁명의 전도는 창창하였지만 우리앞에는 실로 할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있었습니다.

우리의 노력에 의해 압록강연안과 국내에서는 혁명조직들이 우후죽순처럼 태어나고 수천수만 명에 달하는 혁명가들이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앞에는 이 조직들과 혁명가들의 활동을 무장으로 보호해주고 백두산지구와 서간도를 발판으로 하여 국내혁명을 일대앙양에로 이끌어올려야 할 중대한 과제가 나서고 있었습니다.

이런 때에 승산이 없는 열하원정을 하라고 하였으니 우리의 심정이 어떠하였겠습니까. 국제당이 원정을 하라고 강요했지만 나는 처음부터 그것을 무모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 당시 우리가 내세운 조선혁명의 주체노선을 고수하면서 백두산근거지를 새롭게 꾸리고 조국안의 1군 2사와 협동하여 서간도일대에서 큰 전투도 여러 차례 벌였습니다. 또 대규모적인 국내진공작전도 적극적으로 진행하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1군이 차지하고 있던 남만의 일부 지역들의 군사적 공백도 메우면서 요서와 열하 방향으로 진출한 원정부대들의 활동을 성실하게 뒷받침해주었습니다. 말하자면 무장투쟁의 불길을 국내에로 확대할 데 대한 자주적인 노선을 확고히 틀어쥐고 나가면서도 국제당이 제시한 노선집행에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는 일석이조의 성과를 올리었습니다.≫(열하원정, 세기와 더불어 7권)

≪국제당이 내린 지령들 가운데는 현실에 부합되지 않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번 그 지령들을 심중하게 대했으며 그것을 우리 혁명의 구체적 실정과 결부시켜 이행하면서 국제적 이익과 민족적 이익이라는 양자를 옳게 결합시키기 위하여 용의주도하게 사색하고 영활하게 행동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혁명앞에 장벽이 가로놓이고 복잡한 정세가 조성될 때일수록 주체적 입장을 더 확고히 견지하고 자주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우리의 일관한 원칙입니다. 국제당과의 관계에서도 그랬지만 우리는 주변에 있는 큰 나라들과의 관계에서도 항상 자주성과 국제주의를 옳게 결합시켜나갔습니다.

우리가 오늘까지 갈지자로 걷지 않고 혁명을 곧바른 승리의 한길로 이끌어올 수 있은 것은 이런 요인 때문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오늘도 우리가 열하원정문제를 두고 취했던 입장과 행동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1970년 가을에 나는 중국을 비공식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중국측에서는 우리 당 창건기념일을 축하하여 베이징에서 연회를 차리었습니다.

주은래그 자리에는 왕명과 같이 국제당에 가있던 사람도 참가하였습니다. 나는 중국간부들에게 지난날 조선혁명이 주위의 압력으로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고 또 그 과정에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누구보다도 큰 고뇌를 체험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사실에 대하여 말해주었습니다. 반민생단투쟁과정에 수많은 조선혁명가들이 희생되었으며 특히 1930년대 후반기에는 일부사람들이 국제당에 들어앉아 실정에 맞지않는 노선을 강요하였기 때문에 조선인민혁명군을 강화하고 전반적인 항일혁명을 발전시키는데서 큰 손실을 당하였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그런 말을 하자 주은래가 그에 대한 책임은 왕명에게 있다고 하면서 그러고보면 왕명은 중국혁명에도 많은 손실을 주었지만 조선혁명발전에도 적지 않은 저해를 주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국제당이 주관주의적 오류를 많이 범하였다는데 대해서는 스탈린도 인정하였습니다.≫(열하원정, 세기와 더불어 7권)

열세번째, 주체확립은 국제연합군과 관련되어 있다.

≪국제당이 해산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봅니다. 하나의 이유는 국제당이 세계혁명을 영도해오는 동안 각국에서 공산주의적 정당들과 혁명역량이 충분히 자라나 국제당의 중앙집권적인 영도와 간참이 없이도 자기나라 혁명을 자신의 노선과 힘에 의거하여 독자적으로 추진시켜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국제당이 해산되게 된 다른 하나의 이유는 국제공산당의 존재가 세계적인 범위에서의 보다 폭넓은 반파쑈연합을 실현해 나가는데서 걸림돌과 같은 존재로 되고 있었던 사정과도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반파쑈연합은 이념과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는 새로운 양상의 연합이었습니다. 이 연합을 형성하고 있는 나라들이 파쑈와의 대결에서 보여준 초이념, 초제도적인 입장은 사회주의국가인 쏘련과 미국, 영국, 프랑스와 같은 자본주의나라들의 연합, 공산주의자와 부르조아우익정객들과의 합작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사정은 반제를 이념으로, 세계의 공산주의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던 국제당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국제공산당의 해산이 국제공산주의운동과 당시 정세발전의 요구에 전적으로 부합되는 시기적절한 조치로 된다고 인정하였습니다.

우리는 일찍부터 남의 힘이나 노선에 의거하지 않고 혁명의 매단계에서 전략과 전술도 자체로 채택하고 혁명역량도 자체로 꾸리면서 만사를 자주적으로 개척해온 우리자신의 투쟁노정을 두고 큰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국제당이 해산되었다고 해서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적인 단결과 협조가 무의미한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국제련합군의 전우들과 함께 계시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우리는 국제연합군의 테두리안에서 활동의 독자성을 계속 고수하면서도 의연히 국제적인 벗들과의 단결과 협조를 강화해 나갔습니다. . . .

국제연합군의 조직과 그 강화발전을 위해 기울인 조선공산주의자들의 고심어린 노력은 혁명투쟁에서 매개나라의 자주성, 독자성과 국제적인 단결과 협조의 두 개 원칙을 옳게 결합시킨 모범으로 됩니다.

국제연합군을 조직하고 그것을 강화발전시키는 나날에 얻은 성과와 경험은 일제를 격멸하는 최후격전의 나날에는 물론, 전후 복잡한 정치정세하에서 주체적 입장을 가지고 사회주의나라들을 비롯한 국제혁명역량과의 연합전선을 유지하고 확대해 나가는데서도 귀중한 밑천으로 되었습니다.≫(국제연합군을 편성하여, 세기와 더불어 8권)

다음으로, 주체확립교양과 관련한 내용이다.

정치상학과정안에서 기본을 이룬 것은 조선혁명의 노선과 전략전술문제, 국제국내정세에 대한 강의였다. ≪조국광복회10대강령≫에 대한 해설강의는 조선혁명에 관한 우리의 주체적 노선을 이해하는데서 큰 도움으로 되었다. 이 강의를 통하여 신입대원들은 백두산밀영에서 섭취한 지식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었다.≫(2. 소탕하에서의 일행천리, 세기와 더불어 6권)

≪내가 쏘련과 동구라파인민민주주의국가들에 대한 공식방문을 마치고 돌아오자 김정일동무는 혁명전적지답사단의 활동결과를 보고하면서 답사과정에 배우고 느낀 점에 대하여 격정에 넘쳐 말했습니다. 그때 그는 혁명선열들의 숨결이 그대로 어려있는 유서깊은 혁명전적지들이 응당한 수준에서 잘 건설되지 못하고 소흘히 꾸려졌거나 자연상태 그대로 있는 사실과 지어는 혁명전적지들에 답사자들에게 안내해설을 해주는 강사조차 없는 실태를 두고 가슴아파하였습니다.

1956년이면 사상사업에서 사대주의와 교조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세우기 위한 바람이 방금 불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우리 당 사상사업에서는 그때까지만 해도 주체가 확고히 서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나니 우리 당의 혁명역사와 관련된 자료들과 유물들도 많이 발굴되지 못했고 혁명전적지도 잘 꾸려지지 못했으며 혁명전통에 대한 연구도 본격적으로 추진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때에 김정일동무가 평양제1중학교 학생들로 혁명전적지답사단을 뭇고 백두산지구에 대한 답사를 떠날 용단을 내린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이었습니다.≫(대홍단전투, 세기와 더불어 7권)

≪나는 그때 간백산밀영에 가서 소부대와 정치공작소조, 혁명조직 책임자들을 불러 조성된 정세의 요구에 맞게 주체적 입장을 튼튼히 견지하며 우리의 힘으로 조선혁명을 완수하기 위한 사상교양사업을 진공적으로 벌일 데 대한 과업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국내와 서간도일대에서 우수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원동의 기지에 데려다가 훈련시키기 위한 준비와 그밖의 많은 역량을 백두산밀영과 간백산일대에서 튼튼히 키워 전민항쟁에 대처하기 위한 사업을 조직해나가도록 하였습니다.≫(소부대활동의 나날, 세기와 더불어 8권)

≪일본과 독일이 서산낙일의 길을 걷고 있을 때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눈앞에 두고 있던 우리는 조선혁명의 주체적 역량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조국에 대한 학습에 큰 힘을 넣었습니다. 조선혁명에 대한 올바른 이론과 전략전술, 조국의 역사와 지리, 경제와 문화, 도덕과 풍습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자력독립도, 새 조국 건설도 할 수 없고 혁명에 대한 자주적인 입장과 독자적인 주견도 세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동무들은 대체로 조국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많은 동무들이 만주태생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성철이 경상북도에서 출생하였다고 하지만 10살 때인가 고향을 떠난 후로는 줄곧 만주에서 살았고 이을설도 성진태생이기는 하나 어려서 두만강을 건넌 다음부터는 계속 장백에서 살다가 유격대에 입대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대원들에게 조선혁명의 주체노선과 자기 조국에 대한 학습을 단단히 시켜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해방의 날을 그리며, 세기와 더불어 8권)

다음으로, 주체확립과 관련된 기타 내용이다.

남호두회의는 한마디로 말하여 조선공산주의운동과 반일민족해방투쟁 역사에서 처음으로 주체를 완전히 확립한 회의라고 할 수 있다. 이 회의에서 채택된 일련의 결정들은 그 이후 여러 단계의 혁명에서 조선의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주체적 입장을 튼튼히 견지하고 어떤 역경속에서나 그것을 민족을 첫째가는 생명으로 변함없이 틀어쥐고 나갈 수 있게 하였다.≫(경박호 기슭에서, 세기와 더불어 4권)

≪그러므로 ≪3·1월간≫이라는 제호는 민족의 의지를 담은 것으로서 거기에는 우리가 조선혁명의 주체노선을 고수하고 백두산을 타고앉아 전조선적인 판도에로 무장투쟁을 확대발전시킨다는 전략적 의도와 함께 온 민족의 총동원으로 전민항쟁을 마련해간다는 의미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3.1월간≫, 세기와 더불어 5권)

≪물론 나는 우리 혁명의 주체적인 노선을 세워나가면서 기성의 이러저러한 이론과 운동에 관심을 가지는 가운데 민족종교로서의 천도교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서도 일정하게 긍정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철저히 우리 나라 역사발전의 특수성과 우리 혁명이 처하고 있는 환경, 선행운동에 대한 역사적 분석으로부터 출발하여 그리고 우리의 민족적인 전통과 계급역량관계를 충분히 타산한 과학적 기초 위에서 주체학설을 세우고 우리 혁명의 진로를 탐색하였으며 그에 부합되는 전략전술을 작성하였다.

새 세대 공산주의자들은 결코 어떤 하늘의 도움이나 천명에 따라 혁명한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우리 인민자신의 힘을 믿고 그에 의거하여 싸워야 한다는 이론적 대의와 신념을 가지고 투쟁의 길에 나섰다.≫(민족종교 천도교를 두고, 세기와 더불어 5권)

≪역사학자들이 남패자회의의 정치군사적 의의를 잘 서술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패자회의는 남호두회의와 함께 조선혁명과 동북혁명의 주체성을 강화하는데서 큰 몫을 담당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혁명의 주체성이란 무엇입니까. 독자적인 판단과 결심을 가지고 자기 나라의 특성과 실정에 맞게 혁명을 자주적으로 해나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양정우와 만나, 세기와 더불어 7권)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 백두산에서 개척하신 항일혁명투쟁의 기본노선이 바로 주체노선이었다. 1940년대초 하바로프스크밀영에서 위대한 주석님을 만나뵈온 최용건과 관련한 다음과 같은 회상교시는 주체확립이란 곧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향도따라 조선혁명을 전개하는 것임을 단적으로 확인시켜준다.

최용건   ≪최용건은 자기는 하바로프스크에 오면서도 쏘련과의 군사적 협조에 대해서만 관심했지 조선국내에서의 전민무장이나 조국해방작전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는 김사령을 만났으니 앞길이 환히 트인다고 말했습니다.

≪김사령, 솔직한 심정인데 나는 백두산에 가서 싸우고 싶었소, 백두산에 가야 나도 조선사람구실을 할 수 있을 것 같소. 평대원을 해도 좋고 아무 것을 해도 좋으니 백두산에 가서 김사령의 부하로 싸우다가 백두산에 묻히고 싶은 것이 내 소원입니다!

최용건은 눈물을 머금고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남만, 동만, 북만에 흩어져 싸우던 조선의 혁명가들이 한 자리에 다 모였으니 이제는 흩어지지 말고 손을 더 굳게 잡고 조선을 위해 싸웁시다.

이것은 최용건의 숙소를 떠날 때 내가 한 말이었습니다.

나는 최용건과의 상봉에서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한 말속에는 여러 해를 두고 품어온 숙원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남의 집 곁방살이를 하는 경우에도 제나라 혁명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려는 강렬한 염원이었으며 하나의 중심을 내세우고 그 두리에 집결하여 주체적으로 혁명을 해나가려는 확고한 지향이었습니다.

그것은 최용건 한 사람만의 염원이나 지향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남만에 있건 동만에 있건 북만에 있건 모두가 다 그런 염원과 지향을 품고 있었습니다.

최용건이 백두산에 가서 싸우겠다고 그처럼 절절하게 말한 것은 우리에 대한 신임과 기대의 표시였으며 혁명을 해도 조선혁명을 하고 죽어도 조선을 위해 죽겠다는 애국심의 표현이었습니다.

최용건이 품었던 소원가운데서 많은 몫은 그 후 국제연합군의 조직으로 하여 스스로 해결되었습니다. 하바로프스크에서 나와 첫 상봉을 한 때로부터 그는 우리와 함께 있었습니다. 결국 백두산에 가서 함께 싸우고 싶다던 그의 소원은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북만에서 온 투사들, 세기와 더불어 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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