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8월 22일(목)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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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벽과 최희숙

서정욱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불후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나오는 수령님의 혁명동지에 대한 해설강좌 시간입니다.

오늘은 그 세 번째 시간으로 위대한 수령님의 충직한 전사이며 불요불굴의 공산주의투사인 권영벽과 최희숙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역시 두 동지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지, 특히 권영벽와 최희숙의 혁명적 신념과 절개에 대하여 깊이 사색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권영벽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권영벽을 처음 만나신 것은 1935년 요영구유격구에서였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1935년 봄에 나는 요영구에서 권영벽을 처음으로 만나보았다. 당시 거기서는 동만각지의 유격부대들과 혁명조직들에서 활동하는 일군들을 선발하여 군사정치간부를 양성하기 위한 단기군정강습을 주었는데 그 수강생들 가운데 권영벽도 끼여있었다.≫(권영벽, 6권)

경애하는 수령님은 권영벽이 비상한 자제력을 가진 청년투사라는 점을 익히 들어 알고 계시었습니다.

요영구유격구≪권영벽은 아버지의 시신이 처참하게 불타는 광경을 보면서도 입술을 앙다물고 비분을 참고 견디었다. 공작지로 돌아간 그는 동지들이 부어주는 술도 마시지 못하였다. 자기의 이발에 깨물리운 혀와 입술의 상처가 너무 심해서 며칠동안 죽도 먹지 못하였다.

권영벽은 동만의 공산주의자들속에서 비상한 자제력을 가진 청년투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혁명가가 원쑤들을 타승하고 대의를 성취하려거든 권영벽쯤은 되는 참을성을 가지고 일시적인 충동이나 고통을 참을 줄 알아야한다는 것이었다.≫(권영벽, 6권)

경애하는 수령님은 권영벽이 아내와 작별인사를 한 내용까지도 알고 계시었으며 첫 만남 때 이에 대하여 물어보시기까지 하시었습니다.

≪권영벽은 혁명의 길에 나설 때 집을 떠나면서 안해에게 이런 작별인사를 하였다고 한다.

≪나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사람이오. 설사 살아서 돌아온다 하더라도 혁명이 10년후에 성공하게 될지, 20년 후에 성공하게 될지 그것도 기약할 수가 없소. 그러니 당신은 나를 기다리느라 하지 말고 당신 나름대로 살길을 찾소. 당신이 나를 이 세상에 없는 사람으로 치고 재혼한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탓하지 않겠소. 다만 부탁할 것은 아이가 자라서 철이 들면 아버지의 뒤를 잇도록 키워달라는 것이요.≫≫(권영벽, 6권)

≪≪안해에게 좀더 살뜰한 말을 남기고 떠날걸 그랬습니다. 그러면 그의 가슴이 덜 아팠을 게 아닙니까.≫

내가 이런 말로 아쉬움을 표시하자 권영벽은 머리를 가로젖는 것이었다.

≪아무 때건 당할 아픔인데 뒤로 미룰 필요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동무는 지금도 살아서 안해의 곁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까?≫

권영벽은 그 물음에도 태연하게 대답하였다.

≪살아서 조국이 광복되는 것도 보고 고향에도 돌아가고 싶지만 그런 행운이 나한테는 차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나는 적들과의 결전에서 뒤자리에 설 생각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원한을 풀기 위해서라도 언제나 맨 앞자리를 차지할 작정입니다. 선두에서 결사전을 벌려야 할 이 몸이 어찌 살아날 생각부터 하겠습니까. 그런 우연은 바라지 않습니다.≫≫(권영벽, 6권)

≪권영벽의 그 후 행적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그는 실제로 혈전장에서나 지하전선에서나 가장 치열하고 위험한 앞자리에 서군 하였다. 2연대가 교하원정을 할 때 권영벽은 2중대 당지부서기로 있었다. 원정대가 적들의 포위속에 들어 괴멸당할 번한 위기를 여러 번 겪었으나 그때마다 그는 오중흡을 비롯한 전우들과 함께 연대를 구출해내군 하였다.

개미 한 마리도 얼씬하지 못한다는 국경경계마을을 뚫고 압록강을 건너가서 박달에게 나의 서신을 맨처음으로 전달한 사람도 권영벽이었다.≫(권영벽, 6권)

경애하는 수령님께서는 권영벽의 언행이 일치하고 결백하며 양심적인 성품을 높이 평가하시었습니다.

≪권영벽은 말수더구가 적은 사람이었다. 선전일군이라면 의례히 말을 잘하는 것으로 통하고 있지만 그는 사단선전과장으로 사업할 때에도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요긴한 말을 조리있게 몇 마디 할뿐 실속없는 빈말을 늘어놓거나 한번 한 말을 다시 곱씹는 법이라고는 없었다. 얼굴표정이나 외모를 보아서는 그의 생각과 감정상태를 좀처럼 가늠할 수 없었다.

권영벽은 거짓말을 하거나 허장성세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였다. 그는 자기가 한다고 말한 것은 몸이 열 쪼각 나도 기어이 해내는 사람이었다. 언행의 일치, 아마 그것이 권영벽의 사람됨을 단 마디로 규정지을 수 있는 특징이며 인간적 매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백두산과 서간도를 주되는 활동지대로 삼고 싸우던 당시 권영벽에게 장백현당위원회 책임자의 중책을 맡긴 것도 기실은 그 인간적 매력을 중시하였기 때문이었다.≫(권영벽, 6권)

≪사생활에서나 언제나 결백하고 양심적이고 고지식한 권영벽이었지만 지하전선의 중임을 맡은 다음부터는 순간순간마다 능란한 위장책을 써가면서 적들을 감쪽같이 속여넘기고 자기자신과 동지들과 조직들을 철저히 보호하였다.≫(권영벽, 6권)

강위룡   권영벽은 오중흡, 강위룡과 함께 만난을 극복하며 위대한 수령님께서 계시는 백두산으로 찾아와 주력부대에 합류하였습니다.

≪우리 일행이 곰의골에 도착한 후 어느 날 교하지방에서 활동하던 2연대 성원들이 곰의골로 찾아왔다. 권영벽, 오중흡, 강위룡 등이 바로 그때 교하에서 돌아온 사람들속에 끼어 나와 함께 쌓였던 회포를 나누었다.

그들은 우리를 찾아오느라고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고 하였다. 추운 날씨에 홑옷을 입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백두산으로 찾아오다가 어느 목재소를 치고 소를 얻었는데 우리를 위해 두 마리는 산채로 끌고왔다. 피골이 상접한 그들의 모습과 헐어빠진 여름군복을 보고 나는 마음이 아팠다. 그들도 나를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백두산밀영, 5권)

위대한 수령님께서 권영벽에게 장백현당 책임자의 중책을 맡기시었으며 이는 크게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하시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회의에서는 다음으로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 당조직체계를 세우는 문제를 토의하였고 권영벽을 위원장으로 하고 이제순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장백현당위원회와 이제순을 책임자로 하는 조국광복회 장백현위원회를 조직하였다.≫(백두산기슭에서의 싸움, 5권)

≪장백현당 책임자라는 중책을 감당하자면 큰 담력과 선도력, 포옹력, 조직력, 활동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였다. 지하전선을 움직이는 것만큼 정확한 판단력과 치밀성, 임기응변의 지략도 지니고 있어야 하였다. 특히나 시야가 넓어야 하였다.

이런 표징을 갖춘 인물을 고를 때 내 머리에 선참으로 떠오른 사람이 다름아닌 권영벽이었다. 김평도 그를 추천하였다.≫(권영벽, 6권)

≪우리가 권영벽을 장백현당 책임자 후보로 내정하게 된 다른 하나의 이유는 그가 1930년대 전반기 간도에서 사업할 때 일정한 지하공작경험을 쌓은 사람이라는데 있었다.

권영벽의 가장 큰 우점은 사람과의 사업을 아주 능숙하게 할 줄 안다는데 있었다. 그는 사람들을 잘 끌어당기었을 뿐 아니라 끌어당긴 사람들을 원만하게 통솔할 줄 아는 일군이었다.≫(권영벽, 6권)

실제로 권영벽은 장백지구 조직사업을 노숙하게, 정력적으로 잘 하였습니다.

≪권영벽의 남다른 예절과 인품에 기분이 흐뭇해진 좌상노인은 ≪그 젊은이 과연 인사범절이 밝다. 뉘집 후손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절지키는걸 보니 속이 익었거든. 우리 마을 인심이 무던한데 여기서 마음을 맞추며 살아가세나.≫라고 하면서 점심까지 대접하였다. 옹성라자에서는 이 노인을 쟁취하는 것이 전투장에서 하나의 고지를 점령하는 것만치나 힘든 일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권영벽은 조선절 한 번으로 그 고지를 어렵지 않게 점령하였다. 이렇게 되어 마을혁명화도 쉽게 할 수 있었다고 한다.≫(권영벽, 6권)

≪권영벽은 공작상 필요로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다가도 남자의 손이 닿아야 할 일거리가 눈에 띄우면 나무도 패주고 작두질도 해주고 마당도 쓸어주었다. 관혼상제를 하는 집에 가서는 떡도 쳐주고 돼지도 잡아주었다. 그가 돼지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고 내장을 꺼내는 솜씨를 본 사람들은 권영벽을 가리켜 한결같이 백정 찜쪄먹을 사람이라고 하였다. 왕가동사람들은 소나 돼지를 잡을 일이 생기면 권영벽부터 찾군 하였다고 한다.

권영벽의 공작아지트두 공작원은 일솜씨와 일본새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놓았다. 그들은 남들이 자기네를 도와주는 것을 한사코 사양하면서도 자기네가 남들을 돕는 것은 응당한 일로 여기였다. 권영벽은 지하공작원이 남들에게 부담을 끼치는 존재로 된다면 그 공작은 벌써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제나름의 견해를 가지고 실농군처럼 자기 집일도 직심스럽게 하였다.≫(권영벽, 6권)

≪권영벽은 왕가동에서 사업하는 동안 일찍이 잠자리에 들어본적이 없었고 늦게까지 누워있어 본적이 없었다. 그는 다른 공작지에 가서도 하루 3-4시간이상 자지 않았다고 한다.

권영벽은 허술한 봇짐을 메고 줄곧 어디론가 나돌아다니었는데 내용을 알지 못하는 일부 사라들은 부부사이에 금슬이 좋지 못해서 아마 자주 외박을 하는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였다고 한다. 하강구의 7도구로부터 상강구의 25도구에 이르는 수백 리의 노정을 권영벽은 한 달에도 몇 차례씩 발이 닳게 돌아다니였다. 장백현에 부락들이 많았지만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부락이란 거의 없었다. 그러니 나들처럼 잠인들 제대로 잘 수 있었겠는가.

언제인가 밀영에 사업보고를 하려고 들어온 권영벽을 보니 두 눈이 뻘겋게 충혈되어있었다. 몸을 돌보면서 일을 해야지 한두 해만 혁명을 하다말겠는가고 나무라는 말을 했더니 그는 조직을 내오는 재미가 어찌나 아기자기한 지 모르겠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권영벽, 6권)

권영벽과 그 동지들의 정력적인 활동으로 장백현은 완전히 혁명화되었습니다.

≪권영벽과 그 전우들의 정력적인 활동에 의하여 1937년 초봄까지는 장백현의 거의 모든 중심부락들에 지하당조직들이 나왔다. 권영벽의 산하에는 수많은 당소조들과 조국광복회 지회, 분회 조직들이 태어나 역량이 급속히 확대되어가고 있었다. 생산유격대들도 당조직들의 보호와 지도밑에 맹렬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밤에 장백땅을 활보하며 민심을 쥐락펴락하는 것은 만주국의 관리가 아니라 권영벽의 손탁안에 들어있는 우리 사람들이었다.≫(권영벽, 6권)

권영벽은 수많은 지하공작의 핵심을 발굴 육성하여 다른 공작지로 파견하거나 유격대로 보냈으며 생산유격대를 조직하여 전민항쟁에 대비하였습니다. 최경화는 조선인민혁명군의 대내주간신문이었던 ≪종소리≫의 주필로서 큰 역할을 한 동지입니다.

≪권영벽은 이전보다 더 분망한 나날을 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가 직접 교양하고 육성한 믿음직한 공작원들이 여러 명 국내에로 들어갔다. 17도구의 지하혁명조직들은 지하공작의 담당자들을 양성해내는 원종장이나 다름없었다.≫(권영벽, 6권)

최경화   ≪최경화는 고향에 있을 때 청년학생운동에 깊이 관여하였다가 적들의 추적을 피하여 장백으로 망명해온 사람이었다. 장백에 와서는 서당훈장의 간판을 가지고 군중계몽에 몰두하였다. 물론 조국광복회조직에도 인차 가입하였다. 그는 권영벽의 공작선과 연계를 가지면서부터 17도구 당지부 조직부책임자로, 성진(김책시) 방면 정치공작원으로 되었는데 순간적인 실수로 지하사업을 더 계속할 수 없게 되자 유격대에 입대하였다.≫(≪3.1월간≫, 5권)

≪권영벽은 반군사조직인 생산유격대를 통해서도 청년들을 교양하고 단련시키었다. 생산유격대에 망라된 청장년들은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지하혁명조직을 보위하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유사시에 무장투쟁에 나설 수 있는 준비를 갖추었다.

권영벽은 조직원들인 촌장들과 상론하여 자위단의 야간순찰대를 생산유격대원들로 꾸리게 하였다. 생산유격대원들은 야간순찰대를 생산유격대원들로 꾸리게 하였다. 생산유격대원들은 야간순찰대라는 합법적인 명목으로 적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하조직을 보호하기 위해서 순찰을 하였다.≫(권영벽, 6권)

권영벽은 국내당공작위원회를 건설하고 방조하는데서, 국내에 조국광복회조직을 건설하는데서 적지않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우리는 박달이 요구한대로 당사업경험이 풍부한 권영벽을 갑산지방에 파견하였다. 그때 내가 권영벽을 통하여 박달에게 보낸 편지는 아래와 같다. . . .

권영벽이 갑산으로 나갈 때 이제순도 동행하였다. 그들이 박달을 만난 것은 1936년 12월이라고 기억된다. 박달은 그때 처음으로 권영벽을 통하여 조국광복회가 창립되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권영벽을 그에게 조선인민혁명군이 전개해온 주요활동내용에 대해서도 소개해주었다.≫(불굴의 투사, 5권)

≪그 후 우리는 국내당공작사업을 방조할 사명을 지닌 정치공작대를 파견하였다. 1937년 여름과 가을에 국내당공작위원회 위원 김평과 권영벽, 정일권, 김주현, 마동희, 김정숙, 백영철, 이동학, 최경화, 김운신, 이창선, 이경운, 이병선 등을 성원으로 하는 정치공작대가 북부조선의 여러 지역들에 파견되어 당조직건설사업과 군중과의 사업을 진행하였다. 이 공작대를 북선정치공작대라고 불렀다. 북선정치공작대는 북부조선일대를 혁명화하는 방법으로써 국내당조직건설사업을 직접적으로 도와주었다. . . .

국내에서의 당조직건설사업을 추진시켜 나가는데서 김평, 권영벽, 김정숙을 비롯한 정치공작원들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신파, 풍산, 낭림, 부전, 흥남, 신흥, 이원, 단천, 허천을 비롯한 북부조선 일대와 장백일대에서 겹쌓인 난관과 시련을 이겨내면서 여러 지역에 당조직들을 내오고 공산주의자들을 튼튼히 묶어세웠다.≫(국내당공작위원회, 5권)

≪주동환은 우리와의 연계를 맺어보려고 서간도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러다가 그는 서간도에서 왕가등촌장의 소개로 권영벽의 공작선에 흡수되었다. 권영벽과 주동환은 용정대성중학교시절의 동창생이었다. 주동환이 장백과 연길 지방에서 반일계몽사업을 많이 해왔고, 또 국내에 나가서도 혁명운동에 관계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이상이나 감옥살이까지 했다는 것을 알게 된 권영벽은 그에게 북청, 단천 지방에서의 조국광복회조직건설을 맡기였다.≫(삼천리 방방곡곡에, 6권)

권영벽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직접 지휘하신 보천보전투의 정찰임무를 직접 수행하였습니다.

≪우리는 1937년 봄에 국내 진공작전을 앞두고 국민의 협동으로 보천보시가지에 대한 여러 갈래의 정찰을 조직하였다. 보천보를 정찰할 데 대한 과업은 장백현당조직에도 떨어졌다.

국내진공작전의 중대성을 누구보다 깊이 알고 있던 권영벽은 그 정찰임무를 자기가 직접 수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출발준비를 서둘렀다.≫(권영벽, 6권)

≪≪보천보를 치자면 여러 가지로 타산을 해보아야 한다. 첫째로, 수백 명에 달하는 부대가 적의 조밀한 국경감시망을 번개처럼 뚫고 들어가 적을 치고 번개처럼 빠져나오는 전격전을 할 수 있는가? 둘째로, 이 전투는 단순한 화력전이 아니라 국내인민들에게 승리의 신심을 주는 것을 주요한 과제로 삼고 있는 것만큼 화력전을 하면서 강력하고 신속한 정치선동을 동시에 해야 하는데 이런 신속한 선전선동이 가능한가? 셋째로, 우리는 이번 기회에 혁명군무력과 지하조직이 하나의 목표를 놓고 연합작전을 하는 모범을 창조하려고 하는데 그것을 실행할 수 있겠는가?≫

그 세 가지가 다 헐치않은 전제들이어서인지 지휘관들은 또다시 팽팽한 분위기에 휩싸이었다.

그러나 그 때 권영벽이 무게있는 목소리로 정적을 깨뜨리었다.

≪사령관동지, 해낼 수 있습니다. 명령만 내리십시오!≫

≪해낼만한 담보가 있소?≫

나는 권영벽의 대답이 달리는 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우쳐 물었다.

≪있습니다. 보천보야 조국이 아닙니까!≫

나는 그 대답을 귀로 들었다기보다는 자신이 웨친 것만 같았다. 어쩌면 권영벽의 심정이 내 심정과 그렇게도 같은가. 아니 다른 사람들도 마음속으로는 그런 대답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보천보의 불길(1), 6권)

≪우리는 이미 여러 갈래의 선을 통하여 보천보에 대한 정찰을 충분히 해두었었다. 권영벽이나 이제순의 선도 동원하고 박달의 선을 통해서도 적정을 입체적으로 파악하였다. . . .

군중이 우리를 둘러싸고 끓어대자 권영벽이 내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아무래도 조국동포들에게 인사 겸 연설을 한마디해야겠다는 것이었다.≫(보천보의 불길(2), 6권)

유화 <보천보의 횟불>

권영벽의 지하사업에서 특징은 위장이 능란하고 사업에서 용의주도하다는 점입니다.

≪사생활에서나 언제나 결백하고 양심적이고 고지식한 권영벽이었지만 지하전선의 중임을 맡은 다음부터는 순간순간마다 능란한 위장책을 써가면서 적들을 감쪽같이 속여넘기고 자기자신과 동지들과 조직들을 철저히 보호하였다. 조직의 핵심성원들을 적기관의 요직에 박아넣은 것도 일종의 위장책이었다.≫(권영벽, 6권)

≪권영벽은 사령부가 작성한 기본노선에 근거하여 상급에 보고할 것은 보고하여 처리하고 자체로 결심할 수 있는 것은 제때에 결심을 채택하여 처리하면서 용의주도하고 능숙하게 지하공작을 해나갔다. 전화기나 무전기와 같은 현대적인 통신수단도 없이 쪽지편지와 같은 불편한 수단을 이용하면서 사령부와의 연계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실정에서 공작원들은 상급에 보고하여 처리하는 것보다 현지에서 자체의 판단과 결시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권영벽은 우리의 결론이 필요한 중요한 노선상 문제만 사령부에 보고하였지 대부분의 문제는 현장에서 조직성원들과의 합의를 거쳐 즉결처리한 다음 경위와 결과만 우리에게 보고하였다.≫(권영벽, 6권)

≪나는 권영벽에게 집단부락건설을 반대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니 화를 복으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모두 거기에 들어가라고 권고하였다. 집단부락에 들어가면 우리의 활동이 상당한 제약을 받을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철조망으로 강물을 막을 수 없고 성벽으로 바람을 다 막을 수 없듯이 우리 유격대와 인민들 사이에 강물처럼 흐르고 바람처럼 통하는 군민의 정과 원군의 대하는 절대로 막아내지 못한다. 걱정말고 집단부락에 들어가라고 하였다.

권영벽은 공작지에 돌아가자 관도거리 집단 부락건설장에 앞장서 나갔다. 그가 나서는 것을 보고 완고파들도 따라나서서 열성스럽게 집을 짓고 토성을 쌓았다. 권영벽의 지령에 따라 지하조직성원들은 적들의 시책을 고분고분 받아서 충실하게 집행하는 척하였다. 관도거리 집단부락은 현경찰당국으로부터 첫 번째로 ≪안민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7도구의 지하조직성원들은 관도거리 집단부락의 요직들을 다 차지하였다. 서응진은 자위단단장, 송태순은 자위단부단장, 전남순은 촌장, 권영벽은 학교교장의 자리를 각각 차지하였다. 다른 집단부락들에서도 사태는 마찬가지였다.≫(권영벽, 6권)

권영벽은 민중을 의식화, 조직화하는 지하공작의 중요성을 실천을 통하여 절감하였으며 이 사업에 온갖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1937년 여름 그가 통신원을 통해 나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들이 적혀있었다.

≪사령관동지, 솔직히 말씀드려서 나는 부대를 떠날 때까지만 해도 마음을 진정하지 못했습니다. 1선에서 2선으로 밀려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때의 그 섭섭하던 심정을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인민을 조국광복회조직에 묶어세우는 것이 항일혁명의 승리를 앞당기는 지름길로 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건만 나는 작별의 악수를 청하는 사령관동지의 곁에서 발을 가볍게 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고장에 와서 사업을 전개하는 과정에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지하전선을 2선이라고 보던 관점에서 멀리 벗어났습니다. 이 전선은 분명 2선이 아니라 1선입니다. 조직들이 날마다 늘어나고 사람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사는 보람을 느낍니다. 이 비옥한 토양의 주인으로 나를 세워준 사령관동지에게 감사를 보내는 바입니다.≫

인민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는데서 사는 보람을 느낀다고 한 권영벽의 말에는 심오한 진리가 깃들어 있었다. 인민을 조직동원하는 것은 혁명가들이 한 시도 놓쳐서는 안되는 항구적인 사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민을 부단히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는 여기에 바로 우리 혁명의 생명이 있고 승리가 있고 영구불멸성이 있다.≫(권영벽, 6권)

≪권영벽은 이런 원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인민을 조직동원하는 사업에 온갖 심혈을 다 기울이었다.≫(권영벽, 6권)

권영벽은 적들에게 체포된 이후에도 동지들과 조직을 구원하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였으며 옥중투쟁, 재판투쟁을 견결하게 전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길에서 영용하게 싸우다가 적들에게 체포되었다. 감옥에서 그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한 것은 자기자신과 동지들이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며 자래운 조직들이 무더기로 파괴되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다문 한 사람이라도 더많이 살려내여 조직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권영벽은 일신이 그대로 방패가 되어 혁명조직들이 당하고 있는 출혈을 최대한으로 막아보려고 애썼다. 그는 우선 이제순에게 이런 백글쪽지를 보냈다. 백글이란 펜이나 연필이 아니라 손톱으로 쓴 글을 말한다.

≪모든 것을 나에게 밀 것!≫≫(권영벽, 6권)

≪권영벽과 이제순의 희생적인 구출작전의 덕으로 박인진, 이주익을 비롯한 수많은 피검자들이 재판정으로 끌려가기 전에 유치장에서 풀려났거나 예상보다 퍼그나 가벼운 형을 마치고 살아서 조국광복의 날을 맞이할 수 있었다.≫(권영벽, 6권)

≪권영벽은 그때의 이 주장을 공판정에서 다시 한번 강조하였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 우리는 조국강토에서 일제를 내쫓고 우리 민족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도록 하기 위하여 항일대전에 나선 조선의 애국투사들이며 이 나라의 당당한 주인들이다. 누가 누구를 감히 재판하는가. 재판을 받아야할 진짜 범인은 바로 너희들이 아닌가. 남의 나라를 강점하고 남의 나라 사람들을 마음대로 학살하고 남의 나라의 재물을 제멋대로 도적질해가는 너희들이야말로 희세의 강도범들이고 살인범들이다. 역사가 공정한 심판을 내려 우리를 민족의 수호자로 받들고 네놈들을 매장해버릴 날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권영벽, 6권) 이현상

≪이현상도 콩그룹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할 때 우리가 내놓은 전민항쟁방침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형무소에 박달도 있었고 권영벽이랑 이제순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현상이한테 조국해방작전과 관련한 우리의 구상을 전해주었다고 합니다.

그 구상을 알게 된 때로부터 그는 단식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살아나가서 항쟁대오를 뭇고 왜놈들과 결판을 내자는 것이었습니다.≫(전민항쟁의 불길은 온 강토에, 8권)

위대한 수령님의 충실한 전사이며 불굴의 혁명가였던 권영벽은 1945년 3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최후를 마치었습니다. 권영벽은 그 때 혁명가는 한 생을 마치기 전에 수령님께 얼마나 충실했는가를 총화하여야 한다고 말하면서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오늘도 계속 사업하고 내일도 계속 싸울 혁명동지들이 있다는 것과 멀지않은 앞날에 반드시 우리의 혁명이 승리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떳떳하게 사형장으로 나가려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습니다.

≪쏘련군이 동구라파의 약소국들을 해방하면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진격하고 있을 때, 미군의 폭격으로 도꾜의 거리를 이 불바다로 되고 있을 때, 조선인민혁명군이 백두산지구와 원동의 훈련기지에서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위한 대일작전준비를 다그치고 있을 때 권영벽은 서울서대문형무소 교수대에서 혁명만세를 부르며 최후를 마치였다. 그가 이 세상에 남기고간 일점 혈육은 어언 열대여섯 살의 사내애가 되어 청진거리에서 거름달구지를 끌고다니고 있었다.≫(권영벽, 6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권영벽의 체포와 최후를 얼마나 애통해 하시었는지, 서울을 해방한 후 처음으로 가보신 곳이 서대문형무소였으며 그 곳에서 눈물을 참지 못하시었습니다.

서대문형무소≪위대한 조국해방 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여름 나는 서울에 얼마동안 머무르며 남반부의 해방구사업을 지도한 적이 있었다. 서울에 처음으로 가보는 나로서는 다녀보고 싶은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다른 곳은 다 제쳐놓고 서대문형무소부터 찾아갔다. 나의 친지들과 전우들 중에는 그 형무소와 피맺힌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인민군용사들은 이 도시에 입성하자마자 탱크로 형무소의 대문을 짓부시고 수인들을 해방시키였다. . . .

패말도 없는 무덤들은 찾을 길이 없었지만 그들의 피와 숨결의 어려있는 형무소의 지붕과 담벽만이라도 보니 한결 마음이 가라앉았다. 해방이 되어 5년 세월이 흘렀지만, 옛 전우들의 조의방문조차 받아볼 수 없었던 동지들의 영령앞에서 나는 오래 참아왔던 눈물을 걷잡지 못하였다.≫(권영벽, 6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권영벽의 유언을 잊지 않으셨으며 대성산혁명열사릉에 그 반신상을 세워주시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아들 하나를 남기고 간다. 나한테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아들이 자라서 아버지가 하던 일을 계속해달라는 것이다.≫

이제순동지의 반신상   권영벽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전우들에게 이런 부탁을 남기였다.

형무소를 돌아보고 거리에 나서니 그 말이 새삼스럽게 종소리처럼 머리를 울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권영벽과 같이 한 생을 값있게 산 혁명가들만이 남길 수 있는 고귀한 말이었다. 나는 지금도 이따금씩 그 말을 상기하군 한다.≫(권영벽, 6권)

≪이제순은 그처럼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는 오늘도 대성산 혁명열사능에서 자그마한 반신상의 겸허한 모습으로 후대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곁에는 그와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권영벽, 이동걸, 지태환도 나란히 서있다.≫(이제순, 5권)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최희숙을 처음 만나신 것은 최희숙동지가 주력부대에 편입된 1936년 봄이었습니다.

≪내가 그를 처음으로 만난 것이 1936년 봄일 것입니다. 그 해 봄에 연길, 화룡 지방의 부대들에서 활동하던 여성들이 우리 주력부대에 많이 편입되었습니다. 김정숙과 최희숙도 그때 주력부대로 넘어왔습니다.≫(여투사들의 혁명절개, 6권)

최희숙   최희숙은 1909년생으로서 여대원들 중의 연장자였습니다.

≪여대원들은 다들 최희숙을 언니라고 불렀습니다. 남대원들 중에는 그를 누나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최희숙은 나이로 보아도 우리의 누이벌이 되었습니다. 그는 나보다 여러 살이나 나이가 더 든 여자였습니다. 여대원들 중에서는 김명화나 장철구 다음가는 연장자였던 것 같습니다.≫(여투사들의 혁명절개, 6권)

≪최희숙은 나이만이 아니라 1930년 초 연길현 용암동 반일부녀회 회장이었고 1932년에 반일인민유격대에 입대한 오래된 혁명가였습니다.

≪최희숙은 조선인민혁명군 여대원들 중에서 노병급에 속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입대연도가 아마 1932년일 것입니다. 1932년이면 동만 각현에서 반일무장대오들이 앞을 다투어 태어나던 해가 아닙니까.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에 여대원들이 적지 않았지만 1932년에 입대한 여성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1932년에 총을 멘 대원이면 응당 노병대접을 받아야 합니다.≫(여투사들의 혁명절개, 6권)

최희숙의 남편도 혁명가였습니다.

≪최희숙의 남편 박원춘은 서대문형무소에 끌려가서 옥중생활을 했습니다.≫(여투사들의 혁명절개, 6권)

최희숙은 전투장에 나서면 백발백중의 사격술을 소유한 용감한 전투원이었고 밀영지에 가면 작식대, 재봉대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온갖 일을 스스로 찾아하는 알뜰한 주부였으며 간고한 행군이 계속될 때면 어린 대원들과 힘들어하는 동지들의 짐까지 다 져주는 혁명적 동지애가 깊은 혁명투사였습니다.

≪최희숙이 전우들속에서 언니나 누이로 불리운 것은 비단 나이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상생활과 임무수행에서 항상 남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우들을 잘 보살펴주었습니다. 지방조직들에서 몇 해 동안 공청활동과 부녀회활동, 반일부대공작을 해온 그는 정치적 자질도 높고 통솔력도 강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힘든 일거리를 많이 맡기었습니다. 최희숙이 소할바령회의 이후시기에도 조선인민혁명군 재봉대책임자로 계속 활약한 것은 그에 대한 우리의 신임의 표시었습니다.≫(여투사들의 혁명절개, 6권)

≪주력부대의 모든 지휘관들과 병사들은 최희숙의 남다른 충실성과 혁명성을 언제나 경이의 눈길로 바라보았습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은 늘 전우들을 감동시켰습니다. 나도 그의 숭고한 의리와 인격에 탄복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고난의 행군 때 목격한 일인데 최희숙은 남들이 다 자는 한밤중에도 우등불가에서 언 손을 녹여가며 전우들의 꿰진 옷들을 기워주었습니다. 그는 맹물로 끼니를 에워가면서 이틀이건 사흘이건 맡은 일을 끝내기 전에는 절대로 쉬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사업의 성과를 논할 때면 매번 전우들을 내세워주었습니다. 군복제작이 끝난 다음 공로자들을 표창할 때 금반지와 시계를 받고 군복을 만드느라고 고생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데 나만 이런 특대를 받으면... 하고 송구해하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여투사들의 혁명절개, 6권)

≪그래서 최희숙을 비롯한 여당원들에게 지순옥을 따뜻이 대해주고 잘 교양할 데 대한 과업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지순옥을 진심으로 돌보면서 교양하였습니다.≫(밀영에 찾아온 여인, ≪세기와 더불어≫ 7권)

충실하고 성실한 최희숙은 재봉대 책임자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하였습니다.

≪최희숙이 소할바령회의 이후시기에도 조선인민혁명군 재봉대책임자로 계속 활약한 것은 그에 대한 우리의 신임의 표시었습니다.≫(여투사들의 혁명절개, 6권)

≪최희숙은 1939년 가을에 올기강일대에서 수많은 군복을 제작할 때에도 김정숙과 함께 손발을 맞추어가며 일을 본때있게 하였습니다. 그 군복을 제작하는데서 발휘한 최희숙의 높은 책임성과 노력적 성과를 평가하여 우리는 그에게 금반지와 시계를 선물하였습니다.≫(여투사들의 혁명절개, 6권)

최희숙은 특히 백두여장군이시며 불요불굴의 공산주의여성투이신 김정숙동지를 도와 적후지하공작의 역할도 잘 수행하였습니다.

≪김정숙이도 도천리일대에서 어려운 적후공작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때 최희숙은 요방지라는 마을에 침투하여 그의 활동을 은밀히 도와주었습니다. 김정숙이 신파에 건너가서 조직건설활동에 마음껏 투신할 수 있은 것은 최희숙이 요방지에 틀고앉아 그의 사업을 잘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여투사들의 혁명절개, 6권)

서순옥   ≪김재수의 ≪3·1월간≫ 배포탄로사건이 있은 후 얼마 안되어 우리는 김정숙의 신파공작을 뒷받침해줄 목적으로 최희숙을 요방자에 파견하였다. 최희숙이 오자 김정숙은 도천리를 비롯한 하강구 지구의 부녀회, 청년회, 소년회 조직들에 대한 지도를 그에게 맡기고 신파공작에 주력하였다.≫(양민보증서, 5권)

≪서순옥은 최희숙이 요방자라는 고장에 지하공작을 나갔다가 데리고와서 입대시킨 여대원이었습니다. 입대당시의 그의 나이는 열대여섯살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최희숙은 서순옥을 부대로 데리고 올 때 그의 조카까지도 데려왔습니다. 엄광호가 청봉밀영에서 적의 밀정으로 몰아붙인 애숭이대원이 바로 서순옥의 조카였습니다.≫(타향에서 봄을 맞으면서, 8권)

최희숙은 소부대공작에 참가하여 정보수집사업도 잘 하였습니다.

≪소할바령회의 후 소부대공작에 참가하였던 최희숙은 중요한 정보자료를 가지고 사령부로 찾아오다가 적들의 만산토벌을 당하였습니다. 만산토벌이란 빗으로 훝듯이 온 산판을 샅샅이 뒤진다는 뜻입니다.≫(여투사들의 혁명절개, 6권)

최희숙은 일제에 붙잡혀 두 눈을 뽑히우는 무지막지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소부대를 발견한 적들은 유격대원들을 사로잡으려고 기를 쓰고 따라왔습니다. 최희숙은 포위속에서 그만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적들에게 붙잡히었습니다.

적들은 비밀을 뽑아내려고 그에게 말이나 글로써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고문을 들이댔습니다. 나중에는 그의 두 눈까지 뽑아냈습니다.≫(여투사들의 혁명절개, 6권)

그러나 최희숙은 결코 혁명적 절개를 꺾지 않았으며 최후를 앞두고 혁명의 승리가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고문과 위협도 최희숙의 송죽같은 절개를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나에게는 지금 눈이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혁명의 승리가 보인다!

여투사의 이 외침앞에서 혼비백산한 적들은 최희숙의 심장까지 도려냈습니다. 공산주의자의 심장이 어떤 것인가를 보려는 것이었습니다. 혁명가의 심장이라고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심장에는 혁명가의 표식도 없고 반역자의 표식도 없습니다. 혁명가의 심장이 조국과 민족, 혁명동지들을 위해 고동친다면 반역자의 심장은 언제나 자기자신만을 위해 고동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적들은 최희숙을 체포하자마자 우리가 그에게 표창으로 준 금반지를 빼앗아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놈들은 그의 심장속에 간직된 우리에 대한 믿음과 의리는 결코 빼앗아낼 수 없었습니다.

적들은 최희숙의 심장을 도려냈지만 이런 이치를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여투사들의 혁명절개, 6권)

≪원쑤의 고문에 두 눈을 잃은 최희숙이 최후를 앞두고 무엇이라고 절규했는가. 혁명의 승리가 보인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민이 만세를 부르며 해방을 알리는 그날이 보인다고 했습니다.≫(미래에 대한 낙관, 8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최희숙의 회생을 참으로 애석하게 생각하시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최희숙이 희생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그렇게도 그리던 조국해방의 날을 보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나간데 대하여 애석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여대원들은 목이 메여 밥을 먹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오래동안 슬픔에서 헤어날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남긴 말에서 우리는 큰 힘을 얻었습니다.≫(여투사들의 혁명절개, 6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최희숙의 마지막 외침을 두고두고 회상하시며 혁명적 낙관주의 상징으로 높이 평가하시었습니다.

≪원쑤들에게 두 손을 묶이우고 두 눈을 빼앗긴 최악의 상태에서도 혁명의 승리가 보인다고 한 최희숙의 말속에는 얼마나 견결하고 자랑스러운 혁명적 기개가 높뛰고 있습니까. 혁명의 승리가 보인다! 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위업의 정당성과 진리성을 확신하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말이며 혁명절개가 강한 투사들만이 할 수 있는 명언입니다. 그 말은 여투사 최희숙의 한 생의 총화이기도 하였습니다.

혁명의 승리가 보인다! 는 말은 오늘날 우리 인민들과 청소년들에게 있어서 혁명적 낙관주의를 상징하는 금언으로 되었습니다. 여투사의 그 외침소리는 오늘도 우리 인민의 귀에 쟁쟁히 울리고 있습니다.

나는 낙관주의를 주장하며 낙천적인 인간들을 사랑합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것이 내가 중시하고 있은 좌우명의 하나입니다. 내가 산전수전을 다 겪으면서도 어떤 동요나 편향이 없이 건강한 몸으로 혁명과 건설을 영도해올 수 있은 것은 이 낙관주의의 덕입니다.

나는 한줄기의 빛조차 볼 수 없는 실명상태에서 남긴 최희숙의 마지막 말을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말이 조선공산주의자들의 강의한 의지와 불변의 신념을 담고 있은 말이기 때문입니다.≫(여투사들의 혁명절개, 6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최희숙을 높이 평가하시었습니다.

≪다시한번 강조하는 바이지만 최희숙은 간고한 시련을 헤쳐온 우리 혁명대오의 대열에 당당히 세울 수 있는 여성혁명가입니다.≫(여투사들의 혁명절개, 6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최희숙을 높이 평가하시면서 대성산혁명열사릉의 백두여장군 김정숙동지와 같은 열에 그 반신상을 세워주시었습니다.

≪김책, 강건 동무들이 있는 열에 여투사를 2명 배치하였는데 그것은 항일혁명투쟁에서 우리 여성들이 차지하고 있던 지위와 역할을 말해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일, 임춘추, 최현을 비롯한 노투사들은 나에게 인민의 일치한 염원이고 전우들의 한결같은 소망이라고 하면서 김정숙을 거기에 세워줄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최희숙을 그 열에 추천한 것은 나입니다.≫(여투사들의 혁명절개, 6권)

장백진출의 길에서 마을 인민들에게 <조국광복회 10대강령>을 선전하시는 위대한 공산주의혁명투사 김정숙동지

≪그는 웃열에 세워줄만한 당당한 투사입니다. 김정숙과 최희숙을 동열에 놓은 것은 항일혁명의 나날 그들 사이에 맺어진 우정을 보더라도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김정숙이도 도천리일대에서 어려운 적후공작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때 최희숙은 요방지라는 마을에 침투하여 그의 활동을 은밀히 도와주었습니다. 김정숙이 신파에 건너가서 조직건설활동에 마음껏 투신할 수 있은 것은 최희숙이 요방지에 틀고앉아 그의 사업을 잘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최희숙은 1939년 가을에 올기강일대에서 수많은 군복을 제작할 때에도 김정숙과 함께 손발을 맞추어가며 일을 본때있게 하였습니다.≫(여투사들의 혁명절개, 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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