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8월 19일(월)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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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와 더불어≫ 강의 (3)
- 제4장 ≪무장한 인민≫에서 제7장 ≪반일의 기치 높이≫까지

통일여명 편집위원 한철규

안녕하십니까. ≪세기와 더불어≫강의 세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항일무장투쟁의 첫째 단계의 전반부를 학습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기는 반일인민유격대가 창건되고 남만원정과 동녕현성전투, 소왕청방어전투가 진행되었던 무렵으로서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을 시작하신 때입니다.

김일성장군님 - 1932년 첫 무장대오를 조직하신던 때   왜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을 우리 민중들이 ≪김일성장군님≫이라고 호칭하나요? 그리고 왜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항일혁명투쟁을 항일무장투쟁이라고 규정하나요? 그것은 위대한 주석님께서 항일혁명을 무장투쟁을 기본으로 전개하시었기 때문입니다. 민족해방투쟁의 최고형태는 무장투쟁이며 항일민족해방투쟁도 항일무장투쟁을 주류로 하여 전개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항일혁명이야말로 무장투쟁을 우선으로, 기본으로 한 선군혁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 우리 시대의 최강의 혁명전략으로 규정하시고 심화발전시키시고 계시는 선군혁명사상의 뿌리도 바로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항일혁명투쟁에 있는 것입니다.

일제가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이를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절호의 계기로 삼으시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조선혁명의 실정에 맞게 무장투쟁의 형식을 유격전으로 설정하시고 동만지역에 해방지구형태의 유격근거지를 건설하며 조중통일전선과 광범한 혁명대중에 의거하는 항일무장투쟁노선을 제시하시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1931년 12월에 있었던 겨울 명월구회의입니다. 그러므로 이 겨울 명월구회의를 기점으로 항일무장투쟁의 첫째 단계가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회고록은 그 구성체계가 ≪현대조선역사≫나 ≪조선노동당약사≫와 전혀 다르므로 겨울 명월구회의가 제목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 겨울 명월구회의가 몇장 어디에 나오나요?)

당 및 공청 핵심들과 항일무장투쟁의 전략적 방침을 확정하고 그 구체적 집행대책까지 수립하였으니 이제 남은 것을 그 방침과 대책을 실행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혁명의 퇴조기라며 무장투쟁을 반대하는 교조주의자와의 논쟁은 그렇다 치더라도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기 위해 푸르허마을을 혁명화하는 문제나 반일인민유격대만 보면 잡아족치는 중국반일부대장 우사령, 오의성사령과의 담판, 남만원정과 조선반일부대 양세봉과의 합작, 나자구등판에서의 위기일발의 상황, 유격구내의 심각한 좌경바람, 그리고 유격구를 포위섬멸하려는 위공작전에 맞선 마촌작전 등 참으로 순간순간이 시련과 난관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강반석어머님과의 영별이라는 최대의 슬픔과 가장 충실하고 친근한 혁명동지인 차광수와 최창걸의 전사라는 아픔을 겪으셔야만 하시었습니다. 항일무장투쟁이 시작된 첫해 1932년은 이처럼 혈전의 연속이었습니다.

최동화와 같은 행세식 맑스주의자들은 5.30폭동을 좌경모험주의적으로 전개하며 혁명투쟁에 막대한 손실을 끼치더니, 막상 9.18사변이 발발하게 되자 겁을 집어먹고 퇴조기다 뭐다 하며 도망치기 급급해 했습니다. 그러므로 5.30폭동과 ≪퇴조기론≫은 당시 행세식 맑스주의자들이 범한 대표적인 좌우경적 오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왜 이들이 무모한 5.30폭동을 극좌적으로 벌였는지 동지들에게 질문을 하나 하지요. 이 질문에 바로 답할 수 있는 동지들은 회고록학습을 충실히 한 동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국제당이 조선공산당 해산과 중국공산당으로의 전당이라는 결정을 내리자, 조선의 행세식 공산주의자들, 종파사대주의자들이 중국공산당에 들어가기 이전에 자기들의 세력을 과시하고 더 높은 지위를 따내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종파적 야욕과 공명심을 채우기 위하여 적수공권의 조선민중을 일제의 총칼앞에 내몰았던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종파성과 출세욕에 피눈이 된 분파주의자, 운동권출세주의자가 존재한다는 점을 동지들은 항상 주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운동이 어려운 것은 운동대오내에 이런 기회주의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좌경과 우경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고 왼쪽과 오른쪽을 왔다갔다하는 괘종시계의 추와 같은 것입니다. 그럼 최동화와 같은 좌경모험주의자들이 막상 만주사변이 터지자 벌벌 떨며 스톨리핀반동기보다 심각한 퇴조기다 뭐다 떠들며 돌아친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민중의 힘을 믿고 그 힘에 의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나는 그때 혁명의 퇴조기를 운운하는 최동화의 모습을 통하여 전 세대 공산주의자들과 우리와의 근본적 차이를 느끼었다. 그들과 우리와의 모든 차이는 결국 인민대중을 어떻게 보는가하는데서부터 산생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같은 이상과 목적을 추구하면서도 우리와 그들이 서로 힘을 합치지 못하고 남남처럼 지낸 것을 바로 그 차이 때문이었다.≫라고 지적하시었습니다. 기회주의자의 본질이 민중의 힘을 믿지 않은데 있으며 그런 기회주의자와는 손을 잡지 말아야 한다는 이 가르침을 우리는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탄압이 있으면 저항이 있는 법이며 일제의 침략성이 노골화되면 될수록 혁명의 필요성은 더욱 높아지는 것입니다.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기 시작한 것은 고양이가 소대가리를 먹으려는 격입니다. 결과 조선혁명에는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유리한 조건이 형성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측면은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무장투쟁노선을 확정짓고 총을 들고 항일투쟁에 떨쳐나서게 된 것입니다. 일제의 반혁명적 폭력에 혁명적 폭력으로 맞서야 한다는 진리가 9.18사변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입증된 것입니다. 일제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공산주의자들만이 아니라 중국의 공산주의자들, 민족주의자들도 반일무장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점도 중요합니다. 조선과 중국의 공산주의자들, 민족주의자들간의 반일통일전선이 초미의 과제로 제기되게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일제는 적을 많이 만들게 된 것이고 그만큼 멸망이 멀지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혁명가와 기회주의자의 차이가 무엇인가요?. 그것은 혁명가는 정세가 유리하든 불리하든 한결같은데 반해 기회주의자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도 ≪기회주의자≫인 것입니다. 정세가 좋으면 더욱 좋게 만들고 정세가 나쁘면 좋도록 바꾸는 사람이 진짜 혁명가입니다.

조선의 청년공산주의자들이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기 위하여 안도땅에 훈련캠프를 두고 활동하던 무렵의 일입니다. 무장투쟁을 하겠다는 조선청년들이 각지에서 이 안도땅으로 모여드는데, 그 길목인 푸르허마을의 자위단에 잡혀 무리죽음을 당하곤 하는 것입니다. 그 배후에 일제놈들의 조종과 간계가 있었음은 물론입니다. 문제는 이 푸르허마을을 혁명화하는 이외의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이고 다른 동지들은 모두 실패만 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이 마을을 혁명화할만한 실력을 가진 지하조직가는 오직 김일성주석님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이 마을의 혁명화를 결심하시고 놀랍게도 한 집의 머슴으로 들어가시었습니다. 한 마을을 혁명화하기 위하여 혁명의 운명을 책임진 수령이 머슴으로 위장하여 지하사업을 전개한 사례는 인류혁명사에 전무후무한 일로 됩니다. 동지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하여 목숨도 걸고 머슴도 되시는 분, 우리의 주석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결국 위대한 주석님의 탁월한 수완과 민중적 풍모에 의해 짧은 시간안에 푸르허마을의 혁명화는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이 일화를 담은 혁명소설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요?)

반일인민유격대 대오를 돌아보시는 강반석여사

드디어 1932년 4월 25일 안도에서 반일인민유격대가 창건되었습니다. 강도일제를 격멸시킨 조선인민혁명군의 전신이며 훗날 최강미제를 타승한 조선인민군의 뿌리인 반일인민유격대는 이처럼 어렵게 건설되었습니다. 이전의 독립군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 형의 군대, 공산주의자들이 영도하고 광범한 민중에 뿌리 박으며 군사정치활동을 전개하는 혁명군대, 인민군대, 정치적 군대가 바로 반일인민유격대인 것입니다. 정치 및 반군사 조직이었던 조선혁명군(1930년 7월)의 경험과 성과를 계승하고 창건된 반일인민유격대는 훗날 조선인민혁명군(1934년 3월)으로 강화발전하고 해방이후에는 조선인민군(1948년 2월)으로 전화발전합니다. 주체조선이 반일인민유격대창건일을 건군절로 삼고 있다는 점, 꼭 기억해두어야 하겠습니다.(≪ㅌ.ㄷ≫,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건설동지사≫, ≪조국광복회≫는 각각 언제 결성되었나요?)

그런데 창건된 반일인민유격대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반일인민유격대 조직하신데대한자료그 이유는 일제의 반공선전과 이간계에 넘어간 중국인반일부대들이 반일인민유격대만 보면 쏴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같은 반일부대들끼지 맞불질을 할 수도 없으니 결국 반일인민유격대가 숨어다니는 신세, 곧 합법성을 갖지못한 처지가 된 것입니다. 합법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우리 한총련운동가들이 절감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감옥에 가는 것과 총살당하는 것은 질이 다릅니다. 그만큼 당시 조선혁명가들은 간고한 혁명투쟁을 전개하였던 것입니다. 이 문제를 풀지 않고서는 항일무장투쟁을 제대로 전개할 수 없다고 보신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또다시 생명을 걸고 중국인반일부대와의 담판, 곧 바로 우사령과의 담판을 시도하십니다.

이념이 다르고 성격이 판이한 두 세력이 합의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상대는 포악하고 고집스러우며 무식한 중국인반일부대장이 아닙니까. 그러나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이 난국을 타개하지 않으면 안되며 반드시 타개할 수 있는 신념으로 목숨을 건 담판을 하십니다. 결국 우사령과의 담판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이는 길림시절 인연이 있었던 유본초선생이나 진한장, 호진민과 같은 중국공산주의자의 방조 덕분이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것은 위대한 주석님의 탁월한 정치력, 감화력이었습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우사령과의 담판에서 고비를 아슬아슬 잘 피해가시며 결정적인 묘안으로 담판을 성사시키시었습니다. 그 묘안이 무엇인가요? 이 질문에도 바로 대답할 수 있어야 회고록을 옳게 학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답은 바로 별동대입니다. 반일인민유격대가 중국인반일군대속으로 들어가 하나의 별동대를 이루는 것입니다. 중국인반일군대의 한 별동대가 되었으니 이후 어떤 중국인반일부대와도 충돌할 리 없게 된 것입니다.(위대한 주석님 외에 유일하게 별동대를 구성한 조선혁명가는 누구인가요?) 청년공산주의자인 김일룡은 그 성공소식을 듣고 ≪아리랑≫을 불렀다고 합니다.(회고록에 나오는 다른 세 번의 ≪아리랑≫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오의성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 목숨을 걸고 중국반일부대와의 담판을 하신 일은 한 번 더 있습니다. 바로 오의성과의 담판입니다. 유격구의 좌경노선의 후과와 중국인반일부대와의 무장충돌사건 등으로 인해 조중반일부대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형성되고 우사령과의 담판이전의 상황으로 바뀌게 되자,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또다시 중국반일부대장과의 담판을 결심하시는데 그 대상이 바로 오의성입니다. 그런데 국제당파견원 반성위를 비롯한 많은 혁명동지들이 이 위험한 담판을 결사적으로 반대하였습니다. 영화 ≪마이클 콜린스≫을 본 동지는 잘 알겠지만, 도시게릴라의 귀재이며 아일랜드공화군의 영웅인 마이클 콜린스대장이 죽은 곳도 바로 담판현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이 어렵고 위험한 담판을 의연히 결심하시고 탁월한 정치력과 감화력으로 오만한 오의성을 탄복시키며 성공하십니다. 한편 주석님께서 영솔하시는 반일인민유격대가 싸움을 잘 한 것도 중요한 힘이 되었습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만일 우리가 1932년의 남북만원정과 왕청을 중심으로 하는 1933년의 대소 전투들에서 자체의 군사적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거나 유격대를 승승장구하는 무적의 철군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더라면 오의성은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문 밖으로 쫓아버렸을 것이다.≫라고 지적하시었습니다. 통일전선이란 결국 우리의 힘이 강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통일전선의 의의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진 오늘, 우리 운동가들은 이 가르침을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중국반일부대와의 통일전선만이 아니라 조선반일부대와의 통일전선에도 큰 힘을 넣으셨습니다. 우사령과의 합작이 성사된 이후 처음으로 계획하신 사업, 어머님과의 이별까지도 감수하시며 시도하신 사업, 결국 그 과정에서 차광수마저 잃으신 사업이 바로 남만원정, 곧 조선민족주의군대와의 통일전선사업이었습니다. 이처럼 통일전선사업은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인 사업이 아니라 혁명의 운명이 걸린 사업, 반드시 해내야 하는 사업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민족민주세력은 어떤 상대와 통일전선을 하고 있나요? 이 세력은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불리워지는데, 바로 화해협력세력, 평화공존세력, 시민운동세력입니다. 최근 8월 15일에 열린 8.15민족통일대축전도 바로 통일연대로 대표되는 민족민주세력과 민화협, 7개종단으로 대표되는 화해협력세력이 하나가 되어 치룬 행사입니다. 90년대 내내 얽힌 실타래처럼 꼬이고 꼬여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이 통일전선사업이 단 한순간에 이루어진 비결은 어디에 있나요? 바로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 6.15공동선언을 발표하시며 북측정부와 남측정부간의 상층통일전선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통일전선이 형성된 때에는 회고록의 수많은 일화와 조선혁명, 중국혁명의 역사적 경험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혁명은 승승장구하는 법입니다. 우리 민족민주운동가들은 통일전선사업의 중요성을 심장으로 각인하고 지역통일전선, 민족통일전선을 강화하기 위한 운동에 모든 힘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최윤구   비록 양세봉군대와의 합작은 실패했지만, 반일인민유격대가 그 하층군대에 끼친 영향은 적지않은 것이었습니다. 참모장 차광수는 헛고생만 하였다고 투덜댔지만, 남만원정과 양세봉군대와의 합작시도가 없었다면 훗날 양세봉휘하의 최윤구부대가 백두산으로 찾아오는 통일전선의 빛나는 성과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전선사업은 하다가 곤란하면 중단할 수도 있고 방향을 바꿀 수도 있는 전술적 사업이 아니라 혁명의 전기간 일관되게 추진하여야 하는 전략적인 사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해방후 양세봉의 아들을 만경대혁명자유자녀학원에 입학시키시어 혁명의 지휘성원으로 육성하시었습니다. 이 얼마나 큰 도량입니까. 그러니 48년 연석회의 때, 평양에 가서 양세봉의 아들이 씩씩하게 자라나고 있는 만경대혁명자유자녀학원을 돌아본 김구가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겠습니까. 하나 더, 그 때 김구의 안내자역할을 맡았던 사람이 젊은 시절 애인이었던 안신호였습니다. 안신호는 안창호의 누이였는데, 당시 여맹부위원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김구가 또 얼마나 감격하였겠습니까. 김구가 목숨과도 바꾸지 않겠다던 상해임시정부의 인장을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 바치려 했을 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지요. 아마 모른긴 해도, 오늘 남측의 유명한 민족주의인사, 자유주의인사중에는 이미 김구나 김규식처럼 위대한 장군님께 모든 것을 의탁한 인물이 한둘이 아닐 것입니다. 모든 것은 통일혁명의 결정적 시기에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1948년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석한 김구를 만나주신 김일성주석님   남만원정을 끝내고 돌아오시면서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이번엔 최창걸이 국민부우파의 손에 학살되었다는 기막힌 소식을 접하게 되시었습니다. 한동안 소식이 두절되어 찾아가시는 길이었는데,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으신 것입니다. 더욱이 그 독립군이 보복이 두려워 중국반일부대와 함께 적반하장격으로 길을 막고 나섰던 것입니다. 상황이 이쯤 되니, 반일인민유격대원들,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얼마나 격분했을 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저저마다 원쑤격멸을 소리높이 외칠 때,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박훈을 보내시어 화평으로 이 문제를 처리하시었습니다. 이 또한 말이 쉽지, 참으로 커다란 도량과 끝없는 인내심이 없었다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양세봉과의 결렬에다가 최창걸의 희생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이 덧붙여져 국민부에 대한 증오와 원한이 참을 수 없게 되살아오르던 그때 우리가 민족대단합의 경륜을 위해 20대의 젊은이들로서는 쉽지 않은 도량과 인내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만일 그때 우리가 이성을 잃고 복수감에 사로잡혀 국민부를 타도하였거나 독립군대원들과 무장대결을 하였더라면 지금처럼 이렇게 떳떳한 마음으로 후대들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할 것이다. 300여명에 달하는 양사령의 부하들이 엄동설한에 합작의 기발을 들고 조선인민혁명군을 찾아오는 역사적 화폭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회상하시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회상교시에 담겨있는 통일전선의 경륜을 깊이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남만원정이 아무리 이처럼 혈로를 헤쳐가는 간고한 노정이었지만, 단 18명만 남아 수천수만의 일본군에 포위된 나자구등판에서의 위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우선 왜 위대한 주석님께서 이런 상황에까지 가게 되었는지는 숙제로 넘기겠습니다. 한 번 잘 연구해보기 바랍니다. 하여튼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 때 얼마나 큰 한계를 느끼셨는지, 눈물까지 흘리셨다는 사실과 동요가 있었다는 사실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조절할 줄 하는 고유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때문이며 혁명가를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역경을 순경으로 만들 줄 아는 강의하고 창조적이고 희생적인 인간들이기 때문이다.≫라는 귀중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우리 동지들도 어렵고 힘든 상황에 부딪히면 바로 이 회상교시를 떠올리며 힘을 내기 바랍니다.

위대한 주석님을 비롯한 18명의 청년전사들이 나자구등판에서 얼어죽고 굶어죽고 총맞아죽지 않고 무사히 유격구로 들어갈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요? 바로 민중을 믿고 민중에 의거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절대절명의 위기상황을 돌파할 수 있었던 힘은 위대한 주석님께서 ≪신선≫이라고 비유하시는 나자구의 마노인, 곧 민중에 있었던 것입니다. ≪교하의 아주머니≫≪천교령의 김노인≫, ≪조택주노인과 최일화어머니≫처럼 생사의 갈림길에 어김없이 나타난 우리 민중은 ≪하느님≫의 손길로 민중의 위대한 지도자인 김일성주석님을 구해준 것입니다.(이 일화를 담은 혁명소설, 혁명영화가 무엇인가요?)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민중의 결정적인 힘에 대하여 인상깊이 회상하시는 한편 ≪그 겨울에 우리가 나자구오지에서 굶어죽지 않고 얼어죽지 않고 총탄에 맞아죽지 않은 것은 기적중의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지금도 그때 무슨 힘이 시련속에서 우리를 일어서게 하였는가, 무슨 힘이 우리를 패배자나 낙오분자로 만들지 않고 승리자로 만들어 항일의 기발을 그냥 추켜들게 하였는가고 자문하군 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것은 혁명에 대한 책임감이었다.≫라고 긍지에 넘쳐 자답하군 하다. 그 책임감만 없었더라면 우리는 눈구뎅이속에 그대로 주저앉아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혁명에 대한 책임감≫, 참으로 깊이 새겨야 할 귀중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33년 봄이 되자, 18명의 반일인민유격대는 마노인의 안내를 받으며 왕청유격구로 향했습니다. 그 경쾌하고 힘있는 발걸음처럼 인민의 세상인 유격구의 생활은 밝고 약동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생활이 얼마나 밝고 아름다우며 좋았기에 인질로 유격구에 잡혀왔던 한 중국인지주의 아들이 유격구에서 쫓아내버리지 말아달라고 애원까지 하였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자유로운 해방구에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으니 그 원인은 바로 유격구의 극좌노선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반민생단투쟁≫인데, 이에 대하여는 다음 시간에 살펴보기로 하고 오늘은 반유격구에 대한 문제, 혁명정부의 성격에 대한 문제, 극단적 군사민주주의의 문제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반유격구란 한마디로 낮에는 적의 세상이고 밤이면 우리 세상인 그런 지역으로서, 유격구와 적의 통치구역의 중간지대를 말합니다. 만일 유격구가 이런 반유격구를 외곽지역에 형성한다면, 적의 군사적 침략을 방어하는데서나 경제적 봉쇄를 극복하는데서나 유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유격구내 좌경배타주의자들은 반유격구를 적통치구역과 같은 ≪백색구역≫으로, 반유격구민중들을 ≪양면파군중≫으로 매도하며 배척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편협하고 배타적인 행동 때문에 초기 유격구는 적지않은 곤란을 겪었습니다. 다행히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현명한 영도와 사상투쟁을 통하여 이 문제가 바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반유격구는 혁명투쟁에서 큰 은을 발휘하였는데, 왕청유격구를 먹여살린 것이 바로 나자구반유격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유격구가 해산된 뒤에도 이 지역을 반유격구로 만드시었습니다. 그럼 오늘 우리 시대의 유격구는 무엇이고 반유격구, 적통치구역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역시 숙제입니다.

유격구가 민중의 세상이므로 마땅히 민중의 정권이 들어서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교조주의와 배타주의가 강했던 행세식 공산주의자들은 쏘련의 쏘비에트를 그대로 모방한 것입니다. 잘 알다시피, 쏘비에트는 발전된 자본주의국가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승리한 후 노동계급과 빈농, 병사를 주인으로 세운 혁명정권입니다. 그런데 동만은 그런 국가와는 전혀 다른 사회계급적 기초를 가지고 있었으며 혁명의 임무도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혁명의 성격에 맞게 노동자, 빈농, 병사만이 아니라 중농과 지식인, 애국적인 지주까지도 포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고 쏘비에트노선을 기계적으로 내려먹였으니 유격구에 어떠한 현상이 벌어졌겠습니까. 더욱이 쏘비에트노선이라고 해서 밥도 모두가 같이 먹고 가장물품까지 공유화하는 등 해괴하고 극좌적인 현상까지 벌어졌으니 유격구의 민심이 얼마나 흉흉해졌겠습니까. 유격구내 좌경바람은 이처럼 해괴하며 살벌했던 것입니다. 이 난해한 문제는 오직 민중의 자주적 요구와 창조직 능력을 한몸에 체현하신 위대한 김일성주석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었습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그때 동지들에게 ≪우리 모두가 인민을 위한 투사들이고 인민을 위해 한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충복들인 것만큼 우리가 수립하게 될 정권이 각계각층 인민의 이익을 옹호할 수 있으며 인민의 지지환영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데 기본을 두고 현 단계에서 우리 혁명의 성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라고 인민혁명정부의 정당성을 밝히시었습니다. 결국 정권형태도 원전이 아니라 민중의 자주적 요구와 창조적 지혜, 힘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입니다.

극단적 군사민주주의도 심각한 좌경바람이었습니다. 이는 군대내의 좌경노선으로서 지휘관의 권한을 무시하고 민주주의라는 이름아래 ≪평등주의≫를 적용한 것입니다. 모든 군인들은 분명 평등하지만 군대내에는 엄연히 지휘체계가 있는 것인데 이것이 완전히 무시된 것입니다.이 극단적 군사민주주의 때문에 오빈을 비롯한 수많은 끌끌한 혁명가들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작전과 전투에서 커다란 착오와 손실을 보았던 것입니다. 물론 군대에도 민주주의는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를 절대화한다면 조직성과 규율성이 생명인 혁명군대는 오합지졸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옹호하지만 극단적 민주주의는 반대하며 평등을 주장하면서도 지나친 평등주의는 금물로 여긴다. 극단적 민주주의나 극단적 평등주의가 다같이 수정주의를 끌어들이는 매개물로 되기 때문이다. ... 우리는 우리 당이 극단적 민주주의로 하여 구락부화되고 장마당화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극단적 군사민주주의로 하여 강요되었던 항일전쟁 당시의 진통과 동구라파의 교훈이 그렇게 하라고 부르짖고 있다.≫라는 위대한 주석님의 회상교시를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유격구에 좌경바람이 휘몰아칠 때,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상월과 박소심처럼 평생 잊지 못하시는 한 혁명가를 만나시게 되는데, 바로 국제당파견원 반성위입니다. 당시 국제당의 권위가 절대적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동만유격구에 파견된 반성위의 위치가 어떠한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반성위가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에 따라 반유격구문제나 혁명정부문제 등 수많은 문제들이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반성위가 위대한 주석님께서 제출하신 모든 노선에 대하여 전폭적인 지지를 표명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위대한 주석님께서 제출하신 자주적인 당건설방침에 대하여도 전적으로 지지하였던 것입니다. 매우 짧은 만남이었지만 반성위는 위대한 주석님께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기었습니다. 특히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 ≪조선의 호지명≫이 될 것을 당부 하였으니, 반성위가 얼마나 탁월한 안목과 통찰력을 가진 혁명가인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고 할 것입니다.

소왕청유격구의 사령부 귀틀집유격구의 일상이란 일제와의 전투의 연속이었지만, 5000명의 대적을 2개중대로 맞선 소왕청방어전투(일명, ≪마촌작전≫)는 참으로 간고한 전투였습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이 역사에 유례가 없는 전투를 어떤 묘술로 승리하시었나요? 이에 대하여도 바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묘술은 다름아닌 유격구의 민중이라는 힘, 전민항전이었던 것입니다. 마촌작전은 전민이 다 동원되고 매복전, 유인전, 기습전, 야간습격전, 불무지작탄전 등 온갖 방법이 활용된 총력전이었습니다. 여기에 물론 위대한 주석님의 공격정신과 적극적인 배후교란전이 승리에 결정적 작용을 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마촌작전의 승리는 군민일치의 열매이며 인민항쟁의 결실인 것이다. 어려운 때일수록 곤란을 맞받아나가는 우리의 공격정신과 그에 기초한 우리 식의 변화무쌍한 전법은 마촌작전의 승리를 가져온 결정적인 요인으로 되었다.≫라고 회상하시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유격구는 바로 주체조선이라고 할 때, 우리 시대의 소왕청방어전투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나요? 이 역시 숙제로 내주겠습니다. 유격구정신이 있는 한 우리 혁명은 아무리 강적과 맞부딪힌다 해도 승승장구할 것입니다.

이 강의를 결속하면서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회상교시를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자 합니다. 시련과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떠올리며 힘과 용기를 얻기 바랍니다. 그럼 다음시간에 뵙겠습니다.

사립문을 내다보시며 혁명사업을 돌보고 계시는 강반석어머니

≪내가 이런 생각에 잠겨 집둘레를 속절없이 돌고 있을 때 어머니가 문을 열어제끼며 준열하게 나를 꾸짖는 것이었다.≫

≪상기두 무엇이 걱정돼서 그렇게 떠나지 못하구 우물쭈물하느냐? 나라를 찾겠다구 결심품구 나선 사람이 그렇게도 마음이 여리고 집걱정이 많아서야 어떻게 대사를 치르겠니. 너는 집안일을 걱정하기전에 먼저 감옥에 계시는 삼촌을 생각하구 외삼촌을 생각해야 한다. 빼앗긴 나라를 생각하구 백성들을 생각해야 한다. 왜놈들이 나라를 강탈한지도 벌써 스무 해가 되어오는데 너두 조선의 사내라면 맘을 크게 먹구 걸음을 크게 떼야 할게 아니냐. 네가 장차로도 이 에미걱정때문에 집으로 찾아올 생각이라면 아예 이 문앞에 얼씬도 하지 말아라. 나는 그런 아들은 만나지 않겠다.≫

어머니의 말씀은 마치 천둥소리처럼 내 가슴을 세차게 울리었다. . . .

조국과 민족의 위해 그 준엄하고도 시련에 찬 길에서 혁명가의 신념을 검열하는 그런 곤경에 취할 때마다 나는 어떤 이념이나 철학적 명제를 생각하기에 앞서 나를 남만으로 떠밀어 보이면서 어머니가 하던 말씀과 흰옷을 입고 나를 바래주던 어머니의 모습을 회고하며 의지를 가다듬군 하였다.≫(마지막 모습)

≪노상에서 보천보전투소식을 들은 그는 연길의 거리거리와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목메인 목소리로 외쳤다.

≪조선동포 여러분, 6월 4일 김일성장군이 부대를 거느리고 보천보를 습격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이 압록강을 건너 오매에도 그리던 조국으로 진출하였다. 혁명군의 위력앞에 혼비백산한 적들은 지금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일제의 멸망은 확정적이다.≫

손원금   그의 불같은 연설에 연길시는 죽가마처럼 끓어번졌다. 그러나 그 대가로 손원금은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화형을 당하였다.

≪여러분, 나에게는 눈이 없습니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산천이 환히 보입니다. 승리의 날까지 굳세게 싸워주십시오! 조선혁명 만세!≫

이것은 그가 사형 직전에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당년 25살의 자력갱생의 선구자 손원금은 이렇게 한 생을 마쳤다.≫(밀림속의 병기창)

≪온몸이 피투성이김금순가 되어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유격구주민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다 이를 갈며 치를 떨었다. 백초구들판에는 눈물의 바다가 고였다. 그러나 금순이는 오히려 자기를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는 아버지, 어머니, 오빠, 언니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아버지, 어머니들. 왜 우십니까. 울지들 마세요. 혁명군 아저씨들이 꼭 원수를 쳐 없앱니다. 조국이 해방되는 날까지 굳세게 싸워주십시오!≫

불을 토하는 것 같은 이 최후의 절규에는 9살밖에 되지 않는 그의 생애가 짤막하게 함축되어 있었다. 사형장에서는 ≪일제놈들을 타도하자!≫, ≪조선혁명 만세!≫를 부르짖는 금순이의 앳된 목소리가 맵짜게 울렸다.≫(영생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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