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8월 18일(일)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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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과 유물론(2)

통일여명 편집위원 강인규

 

먼저, 회고록에서 ≪변증법≫이 직접적으로 표현된 부분이다.

차광수   ≪≪동무들, 싸우니까 얼마나 좋은가. 총이 생기고 식량이 생기고 피복과 신발이 생기고 나는 오늘 저녁에 위대하고 심오한 변증법을 배웠소. 이제 우리는 노획한 총을 나누어 가집시다. 그래서 그 총으로 또 새 적을 쏴눕힙시다. 그러면 더 많은 총이 생길 것이고 식량이 생길 것이오. 기관총과 대포도 생길 것이오. 노획한 양식으로 미대를 채웁시다. 그것을 먹으면서 기운차게 행군해갑시다. 일제가 완전히 소멸되는 그날까지 우리는 오늘처럼 무기와 식량을 그들에게서 받아냅시다. 이것이 우리의 생존방식이고 투쟁방식이 아니겠소.≫그가 연설을 끝내자 나는 맨 선참으로 박수를 쳐주었다.≫(남만으로, 세기와 더불어 2권)

≪≪동무들, 돌이켜보라!

무장투쟁의 변증법적 과정으로 새로운 정세가 조성될 때마다 우리에게는 어김없이 이별이 찾아왔다. 남호두회의를 계기로 조선혁명의 전환기가 마련된 오늘에 와서도 이것은 예외로 될 수 없으니 모두가 그러한 이별을 각오해야 한다. 일본의 군부파쑈집단은 ≪2.26사건≫을 도발한 후 북방침략을 더욱 본격화하고 있다. 일제가 치치할과 북부중국을 장악하고 쏘련침공의 구실을 찾기 위해 쏘만국경에서 끊임없는 도발을 하고 있다는 것은 동무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북만의 유격부대들은 이에 대처하여 항일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핵심의 부족으로 큰 곤란을 겪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지원을 요구하였다.

동무들, 이런 형편에서 우리가 모두 백두산쪽으로만 나가게 되면 어떤 후과가 빚어지겠는가.≫≫(전우들은 북으로, 나는 남으로, 세기와 더불어 4권)

≪그 말을 듣고 장금천과 장금록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자기 아버지의 공적보다 노비첸코의 공적이 몇 배나 더 큰 것이라고 하면서 그가 아니었더라면 어쩔 뻔했는가고 진심으로 말하였다.

≪나의 생애에는 나를 위해 준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다. 아슬아슬한 위기일발의 순간에 나를 도와 나선 잊을 수 없는 생명의 은인들이 많다. 지금 너희들과 함께 다니는 손원태선생의 아버지 손정도목사도 그렇고… 그래서 나는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하늘이 내려다보고 언제나 귀인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것은 관념론이 아니다. 인민을 위하여 한 생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은 그 어디서나 인민이 도와 나서게 되어 있다. 이것은 진리이고 변증법이다.≫≫(혁명전우 장울화 2, 세기와 더불어 4권)

≪그때 족제비사냥군영감이 사전에 자백을 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김일도 녹아나고 나도 녹아나고 다 녹아날 뻔했습니다.

사람에게 믿음을 준다는 것은 때때로 이런 아슬아슬한 위기도 동반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나는 화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된 것도 역시 믿음의 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고 밀영에도 들여놓고 부대생활의 이모저모를 통째로 개방해놓고 마음대로 구경도 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에 그 영감의 흑심이 인간본연의 양심으로 되돌아섰던 것입니다. 인간심리의 변증법이란 참으로 묘한 것입니다.≫(족제비 사냥군, 세기와 더불어 7권)

다음으로, ≪변증법≫이 내용적으로 구현된 부분이다.

첫째, 변화발전의 관점을 강조하신 부분이다.

≪혁명적 세계관은 사람들이 자기의 계급적 처지와 이해관계를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착취계급을 증오하고 자기 계급의 이해관계를 옹호하는 사상을 가지며 나아가서는 새 사회를 건설하려는 각오를 가지고 혁명의 길에 나서게 되었을 때 형성된다고 볼 수 있다.

나도 맑스-레닌주의고전을 비롯한 혁명적인 책들을 보고 계급적 처지를 인식하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사회현상을 보고 불평등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착취계급과 착취사회를 증오하는 사상이 자라서 결국 세계를 개조하고 변혁해야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투쟁의 길에 나서게 되었다.≫(선진사상의 탐구, 세기와 더불어 1권)

≪첫 당조직 건설동지사는 우리 당의 태아였고 씨앗이었으며 당의 기층조직들을 내오고 확대하는데서 모체적 의의를 가지는 조직이었다. 첫 당조직을 가지게 된 때로부터 우리 혁명은 종파의 물을 먹지 않은 백지장 같이 깨끗하고 참신한 새세대 공산주의자들의 영도를 받으며 승승장구해왔다. 자주적인 당 건설을 위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은 이때로부터 항일대전의 도도한 흐름을 타고 줄기차게 진척되어왔다.≫(첫 당조직 - 건설동지사, 세기와 더불어 2권)

첫 당조직 <건설동지사>를 무으시는 장면

1930년대 중엽의 간도지방 혁명정세는 조중공산주의자들에게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대답할 수 있는 노선상의 변화를 요구하였다.

유격구에 그대로 틀고 앉아 결사전가를 부르며 종전과 같은 방법으로 땅덩어리를 지키는 놀음을 하겠다는 것은 엄정하게 말해서 혁명을 더 심화시킬 의향은 없이 현상유지나 하자는 속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혁명을 흐르는 물에 비길 수 있다면 그들의 주장은 그 물이 바다로 흘러가지 않고 호수나 저수지 안에서만 맴돌기를 바라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혁명이란 대하나 장강과 같은 것이다. 절벽에 부딪쳐 아우성치고 계곡에 막혀 태질을 하면서도 허공에 부서져 나뒹구는 억만의 비말들을 고스란히 걷어 안고 바다를 향해 용용히 흘러가는 대하나 장강과도 같은 것이 바로 혁명이다. 대해를 등지고 산악을 향해 거꾸로 흐르는 장강을 본 적이 있는가? 역류와 정지는 장강의 본성이 아니다. 장강은 오직 앞으로만 달린다. 장애물이 있으면 격파하고 동료나 동행자가 있으면 포섭하면서 머나먼 종착점인 바다로 쉬임없이 달린다.

장강이 썩지 않는 것은 바로 정지나 휴식을 모르는 그 꾸준한 운동에 있다. 만약 장강이 한순간만이라도 흐름을 멈춘 강물과 같이 된다. 혁명은 자기가 세운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새로운 환경과 조건에 맞게 전술을 부단히 갱신해야 한다. 이런 갱신이 없다면 혁명은 침체와 답보를 면치 못하게 된다. 한 방법이 50년 후에도 유효하고 100년 후에도 절대적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한다면 그보다 더 어리석은 망상가가 어디 있겠는가. 이것은 인간의 자주성과 창조성과 의식성을 무시하는 입장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 없다.

전술은 어디까지나 상대적 의의를 가진다. 한순간을 대표할 수도 있고 하루를 대표할 수도 있고 한 달이나 한 분기, 한 시기를 대표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전술이다. 하나의 전략을 성공에로 이끄는 과정에는 열 가지 전술이 있고 백 가지 전술이 있을 수 있다. 하나의 전략을 위해 한 가지 처방만을 내세우는 것은 혁명에 대한 창조적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교조이다. 교조는 자기의 손발을 자기 스스로 얽어매는 미욱한 자살행위이다. 교조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생동하고 박력 있는 정치를 볼 수 없으며 도도하고 활력에 넘친 혁명의 장강을 만날 수가 없다.≫(혁명의 씨앗을 넓은 대지에, 세기와 더불어 4권)

≪나는 이 사건을 겪고나서 혁명가들에게 있어서 사람에 대한 환상은 금물이라는 심각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혁명이 어려운 고비를 겪을 때일수록 사람에 대한 환상은 철저히 배격해야 합니다. 사람을 믿어주고 사랑해주는 것은 좋지만 환상적으로 대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사상이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닙니다.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며 내일이 다를 수 있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심룡준의 실례가 이것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이해관계로부터 혁명을 추동할 수도 있고 훼방할 수도 있습니다. 인민의 이익을 첫자리에 놓고 투쟁하는 사람들의 사상은 금강석처럼 변하지 않지만 혁명의 이익과 인민의 이익은 안중에도 없이 개인의 안녕과 향락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사상은 인차 변질되고 맙니다. 어려운 때에 혁명을 제일 쉽게 배신하는 것이 바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에 중독된 인간들입니다.≫(족제비 사냥군, 세기와 더불어 7권)

둘째, 교조에 반대하신 부분이다.

≪나는 맑스-레닌주의고전들에서는 일반적으로 종주국에서의 혁명과 식민지나라들에서의 혁명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다고 하면서 종주국에서의 혁명승리가 가지는 의의만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 나라 경우에는 일본노동계급이 혁명에서 승리해야 나라가 독립될 수 있단 말이 아닌가, 우리는 그들이 승리할 때까지 가만히 앉아있어야 한단 말인가고 또 물었다.

박소심도 그 질문에는 대답이 막히었다. 그는 놀란 눈으로 한참 나를 바라보았다. 박소심은 고전에 씌여있는 것처럼 노동계급의 계급적 해방을 민족적 해방에 앞세우고 종주국노동계급의 투쟁을 식민지나라에서의 민족해방투쟁보다 중시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공인된 국제공산주의운동의 노선상의 문제라고 하였다.

내가 납득이 잘 안되어 머리를 기웃거리자 그는 그대로 안타까와서 자기는 맑스-레닌주의를 학술상으로만 연구해왔을 뿐이지 조선의 독립과 조선에서의 공산주의건설이라는 구체적인 혁명실천과 결부시켜서는 생각해보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였다.≫(선진사상의 탐구, 세기와 더불어 1권)

≪선행세대의 노선이나 전략들은 또한 조선의 산 현실에 발을 튼튼히 붙이지 못한 심중한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조선의 산 현실에 부합되는 옳은 지도이론을 내놓자면 고전이나 다른 나라의 경험을 절대시하지 말고 모든 문제를 자체의 실정에 맞게 독자적으로 사고하고 독창적인 방식을 풀어나가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였다. 지도이론을 마련한다고 하여 10월혁명의 경험 같은 것을 통채로 받아들여도 안되었고 국제당이 그 어떤 만병통치의 처방을 가져다줄 것 같이 기대하면서 팔짱을 끼고 앉아있어도 안되었다.≫(카륜회의, 세기와 더불어 2권)

≪≪종교를 아편이라고 한 맑스의 명제를 나는 물론 부정하지 않소. 그러나 이 명제를 어떤 경우에나 다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요. 일본에 천벌을 내리고 조선민족에 행복을 내려달라고 비는 천불교에다 그래 아편이라는 감투를 함부로 씌울 수 있겠소?≫≫(조직을 확대하기 위하여, 세기와 더불어 1권)

≪나는 그때 혁명의 퇴조기를 운운하는 최동화의 모습을 통하여 전 세대 공산주의자들과 우리와의 근본적 차이를 느끼었다. 그들과 우리와의 모든 차이는 결국 인민대중을 어떻게 보는가하는데서부터 산생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같은 이상과 목적을 추구하면서도 우리와 그들이 서로 힘을 합치지 못하고 남남처럼 지낸 것을 바로 그 차이 때문이었다. 나는 최동화에게 말하였다.

≪역설이라고 판단하실 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인민대중이 일제의 침략에 굴복하지 않고 폭력적으로 진출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혁명의 고조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고조기를 놓치지 않고 추수투쟁을 끝낸 다음에는 대중을 더욱 각성시키고 조직화해서 항일투쟁을 더욱 높은 단계에로 발전시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대세가 어떻게 되어가든 이 결심은 변하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을 것입니다.≫≫(무장에는 무장으로, 세기와 더불어 2권)

≪어느 해인가 라틴아메리카 항쟁운동자 한 사람이 나를 찾아와 유격전쟁의 경험을 들려달라고 요청하였다.

나는 항일전쟁시기의 경험을 몇 가지 들려주고 나서 유격전에는 만능의 공식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창조적인 지혜가 가장 높이 발휘되어야 하는 거창한 창조적 투쟁이다, 우리의 경험이 당신들에게 일정한 도움으로 될 수 있겠지만 그것을 절대화하고 기계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나라마다 실정이 다른 것만큼 당신들도 자기 나라의 실정에 맞는 투쟁방법과 형식을 창조하고 활용해보라. 거기에 바로 승리의 비결이 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그 항쟁운동지도자는 내 말을 듣고 한참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자기네 나라에는 산악지대가 많은데 지금까지 그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도시유격전에 치우쳐왔다. 그래서인지 성과는 적고 손실이 많았다. 앞으로는 실정에 맞게 산을 끼고 농촌유격전을 기본으로 항쟁운동을 해나가겠다고 하였다.≫(무장에는 무장으로, 세기와 더불어 2권)

이동백   ≪≪통일전선이란 반드시 정당단체들의 연합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정당단체설을 절대화하게 되면 그것은 곧 교조가 됩니다. 군중이 있고 영도핵심만 있으면 능히 통일전선체를 내올 수 있습니다. 목적과 지향의 동일성을 기준으로 하여 열 사람이건 백 사람이건 묶어 세워야 한다는 것이 통일전선에 대한 나의 견해입니다. 우리는 이런 입장을 가지고 오래 전부터 통일전선운동을 추진시켜 왔습니다.≫

이동백은 뒷더수기를 툭툭 치며 ≪역시 교조가 문제이군.≫하고는 껄껄 소리를 내어 웃었다.≫(조국광복회, 세기와 더불어 4권)

종교를 아편이라고 한 맑스의 명제를 극단적으로, 일면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그 명제는 종교적 환상에 유혹당하는 것을 경계하라는 의미에서 한 말이지 종교인 일반을 배척하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애국적 종교인이라면 그가 어떤 사람이건 다 포섭하고 손을 잡아야 한다. . . .≫(박인진도정, 세기와 더불어 5권)

≪이런 교훈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북대정자에서 고난의 행군을 총화할 때 전술문제를 가지고 많은 논의를 하였습니다. 나는 분산활동이 대부대공격에 대처하는 유격전의 한 개 전술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천편일률식으로 적용해서는 안된다는데 대하여 강조하였습니다. 다른 지휘관들도 사령부가 대부대의 후원이 없이 단독으로 분산활동을 하는 것과 같은 모험은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나는 고난의 행군을 총화하면서 아무리 원칙에 맞는 전술이라고 해도 그것을 적용하는데서는 교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진리를 뼈에 사무치게 느끼었습니다.≫(고난의 행군, 세기와 더불어 7권)

유화 <고난의 행군>

나는 원산시당일군들에게 ≪공산주의기치아래 프롤레타리아트는 단결하라!≫고 한 시당청사의 구호는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을 당면과제로 안고 있는 우리 나라 실정에 맞지 않는 것만큼 민주주의기발아래 단결하라로 바꾸어야 한다, 해방된 조국땅에 인민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는 민주주의적인 사회를 건설하려면 노동계급 뿐 아니라 그 동맹자인 농민은 물론, 새 사회건설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각계각층의 애국적인 군중을 통일전선에 묶어세워 거족적인 힘으로 우리 나라를 부강한 자주독립국가로 건설해야 한다고 말했었습니다.≫(개선, 세기와 더불어 8권)

세째, 정세변화에 맞는 새로운 전략에 대해 설명하신 부분이다.

≪≪변화무쌍한 유격전이야말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기본무장 투쟁형식이다. 국가가 없는 우리 나라의 실정에서 정규전으로 일제와 대항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군사기술적으로나 양적으로 열등한 무력으로 강대한 일제침략군과 맞서싸워야 하는 것만큼 변화무쌍한 유격전을 해야 한다. 이외에 다른 출로란 있을 수 없다.≫ . . .

나는 정규군과 유격대의 차이를 설명하여 주고 강대한 일본침략군과 싸워이기자면 소부대와 대부대의 영활한 배합작전, 기습전, 매복전, 정치활동, 정치공작, 생산활동 등 군사, 정치, 경제 활동을 다 벌려야 하며 그러자면 자유자재로 분산과 집중을 거듭하면서 전쟁을 할 수 있는 유격대를 조직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무장에는 무장으로, 세기와 더불어 2권)

≪반유격구문제는 근거지에 대한 단순한 형태상의 고찰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대주의, 교조주의를 극복하고 혁명에서 주체적 대를 세우는가 못 세우는가 하는 사상적 입장 문제였으며 좌경에서 벗어나 지난날 ≪양면파군중≫이라고 하면서 배척했던 광범위한 인민들을 혁명의 동력으로 보는가 보지 않는가 하는 군중관점 문제였고 그들을 반일민족통일전선에 결속시키는가 못 시키는가 하는 혁명역량편성과 직결되는 심각한 문제였다.≫(낮에는 적의 세상, 밤이면 우리 세상, 세기와 더불어 4권)

≪≪동장영동지, 프랑스노동계급이 코뮌을 내올 때 그 무슨 고전을 참고했던가요? 러시아의 소비에트가 맑스주의창시자들의 고전에서 명시된 정권형태였던가요? 소비에트를 어찌 한 천재의 두뇌가 낳은 산물이라고만 하겠습니까? 인민이 요구하지 않고 러시아의 현실이 요구하지 않았다면 소비에트는 역사무대에 등장하지도 못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합니다≫≫(소비에트냐, 인민혁명정부냐?, 세기와 더불어 3권)

≪중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비할 바 없이 강해지고 악랄해진 일제의 파쑈적 폭압과 경제적 약탈은 우리 민족의 처지를 참을 수 없는 막바지에 밀어 넣었다.

그러나 우리는 비록 이런 불리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중일전쟁으로 하여 조성된 복잡한 정세를 영활하게 이용하면 화를 복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나는 초수탄에서 열린 군정간부회의에서도 정세를 이런 각도에서 평가하고 그에 대응할 것을 강조하였다. 백두산회의에서 조선혁명의 주체를 강화하기 위한 과업을 조직건설의 측면에서 많이 논의하였지만 초수탄회의에서는 적배후교란작전방침을 관철하는데서 나서는 과업을 항일연군부대들과의 협동작전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군사적 측면에서 많이 협의하였다.≫(새로운 정세를 맞받아, 세기와 더불어 6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담하게 국내진출을 위해 압록강연안에로의 행군을 단행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는가? 우리 혁명앞에 닥쳐온 역경을 순경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앉아서 걱정만 해가지고서는 문제를 풀 수 없었습니다. 물론 밀영같은데 들어가서 배겨있으면 한 해 겨울을 무사히 보낼 수도 있고 역량은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 현상유지나 해가지고서야 어떻게 혁명앞에 조성된 난국을 타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힘이 들더라도 고난의 행군을 해서 조국에 나가기로 했습니다.≫(고난의 행군, 세기와 더불어 7권)

우리는 이상과 같은 전략적 과업을 성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대부대작전으로부터 소부대작전으로 이행할 데 대한 새로운 투쟁방침을 제시하였습니다. . . .

나는 그런 동무들에게 대부대전성기는 지나갔다, 대부대로 와와 밀려다닐 때가 아니다, 적들이 대병력을 동원하여 우리를 단꺼번에 그물에 잡아넣어 일망타진하려고 할 때 우리가 대부대작전을 계속한다면 것은 적들의 계책에 빠져 자멸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호박을 쓰고 돼지우리로 들어가는 격으로 된다, 소부대단위로 움직이면서 싸움도 하고 대중정치사업도 하면 식량도 쉽게 해결할 수 있고 기동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전우들이 식량을 해결하려다가 적들에게 희생되었는가, 그런데 그렇게 목숨과 바꾼 식량도 대부대가 나누어 먹다나니 얼마 못가고 인차 바닥이 나군하지 않았는가, 소부대로 활동하게 되면 적의 역량도 최대한으로 분산시킬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이번 봄과 여름에 진행한 소부대타격전의 전과정이 증명해준다, 과녁을 작게 하자는 것이 우리의 의도다라고 말했습니다. . . .

만일 그때 우리가 대세의 흐름을 제때에 보지 못하고 목전의 성과에만 급급하여 대부대활동을 계속했더라면 역량도 보존하지 못하고 자기존재를 끝마쳤을 것이며 역사에 순국한 열사들로만 남아있게 되었을 것입니다.≫(소할바령회의, 세기와 더불어 8권)

네째, 조건에 맞는 변화무쌍한 전술에 대해 설명하신 부분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직지도하신 길회선철도부설반대투쟁에 대한 신문보도≪길회선철도부설을 반대하는 투쟁이 일본상품배척투쟁과 결합되어 전면적인 반일투쟁에로 점점 더 크게 번져가는데 당황한 일제는 반동군벌을 사촉하여 시위군중에게 총을 마구 쏘아대는 야수적 만행을 감행하게 하였다.

그때까지 우리는 반동군벌들을 견제하는 입장에 서있었다. 그러나 군벌당국이 일제의 편을 들어 우리를 탄압해나서는 만큼 우리도 그들을 견제하는 입장에만 서있을 수 없었다. 우리는 ≪일제와 결탁한 반동군벌타도≫의 구호를 들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장례식과 결합된 보다 대규모적인 시위로 넘어갔다. 이 날의 시위는 많은 시민들까지 합세하여 최대의 규모를 이루었다.≫(단결의 시위, 세기와 더불어 1권)

≪마을여자들은 그날 손님들에게 떡을 나누어줄 때에도 머슴군 대접을 하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 그릇에 떡을 담아주면서도 나에게만은 그저 손에다 쥐어주었다. 나는 마을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수모하는데 대하여 나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푸르허를 혁명화하는 과정이 이처럼 간단치 않았다. 오가자를 혁명화하는 과정에 고초가 많았다고 하지만 이 고장의 혁명화과정에 비하면 식은 죽먹기였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마을에 달반가량 있으면서 조직을 꾸리고 핵심청년들을 발동시켜 밀정도 청산하였다.

소사하에 돌아온 다음 동무들 앞에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모두 배를 그러쥐고 웃었다. 나는 그때 동무들에게 ≪어데든지 혁명가들이 배기지 못할 곳은 없다. 지금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신사식으로 혁명을 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혈전의 준비, 세기와 더불어 2권)

≪우사령은 손을 내흔들며 오히려 제편에서 대장이 농담을 진담으로 들은게 아닌가고 하면서 너털웃음을 지었다. 나는 처음부터 구국군에서 떨어져나오겠다고 하면 우사령의 노여움을 살 것 같아서 그에게 사령의 명의로 부대의 이름을 하나 지어달라고 요구하였다.

옆에 있던 유본초선생이 ≪그럼 별동대라고 하지. 조선인별동대라고 하는 것이 좋겠소.≫하고 말하였다.

유본초선생의 제안에 우사령도 찬성하고 나도 찬성하였다.

비밀유격대를 합법화하기 위한 기초작업은 별동대의 탄생과 함께 성과적으로 종결되었다. 우리는 이 별동대 안에 안도에 있는 비밀유격대성원들과 우사령부대에 억류되었던 70-80명을 다 포함시켜 유격대를 합법화하였다.≫(새 무장력의 탄생, 세기와 더불어 2권)

≪호수에 돌을 던지듯이 갑작스레 의제를 설정해놓고 여럿이 모여앉아 필요한 결론을 도출해내는 과정에는 하자 하지 말자, 된다 안 된다, 이길 수 있다 없다는 식으로 끝없는 논쟁이 펼쳐지곤 하였다. 군사민주주의의 덕으로 모두가 평등한 발언권을 가지고 개개명창이 되어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는 논쟁은 무한정 시간을 끌었다.

그러는 사이에 적정에는 변화가 생기고 각급 회의들에서 모처럼 토의결정된 작전방안은 무용지물이 되곤 하였다. 설사 그 방안대로 싸움을 하는 경우에도 혁명군은 정황조건의 변화 때문에 막대한 희생을 당해야 했다.≫(극단적 군사민주주의를 논함, 세기와 더불어 3권)

≪조선인민혁명군은 경우에 따라서 동북인민혁명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도 활동하였다.

우리의 견해에 의하면 동북이라는 명칭은 어느 한 나라를 의미하는 국호로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지역적 개념으로 통용되는 것이었다. . . .

우리는 훗날 동북항일연군을 조직한 다음에도 조중항일연합군의 성격에 맞게 중국 동북지방에서 활동할 때에는 동북항일연군이라고 하였고 조선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거나 조선에 나와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정황에 맞게 이름을 바꾸어가며 활동함으로써 이르는 곳마다에서 조중 양국 인민의 사랑과 보호속에 살며 싸울 수 있었다.≫(조선인민혁명군, 세기와 더불어 3권)

≪≪지금 국내에서는 당을 먼저 건설하는가, 군중단체를 먼저 내오는가 하는 문제가 한창 논의되고 있습니다. 함흥패는 당건설을 앞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단천패나 흥원패는 군중단체를 먼저 내온 다음 실지투쟁을 통해서만 당을 내올 수 있다고 고집하고 있습니다.≫ . . .

≪내가 보건대 그것은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선후차를 결정하는 거야 구체적인 조건과 실정이지 여기에 12월 테제가 무슨 상관입니까. 조건에 따라 당조직을 먼저 내올만한 곳에서는 당조직을 먼저 내오고 군중단체를 먼저 내올만한 곳에서는 군중단체를 먼저 내오면 되지 않겠습니까. 당원자격을 갖춘 사람이 단 3명이라도 있다면 그 3명만으로도 당장 공산당 소조를 무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원자격을 갖춘 사람이 한 명도 없다면 군중단체를 먼저 내오고 거기서 공산주의자들을 키워낸 다음 당조직을 꾸릴 수 있습니다. 물론 당과 군중단체라는 이 양자는 서로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분리해서 고찰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선후차가 어떻게 되든지간에 공산주의자들은 군중속에서 당의 후비대를 육성하는데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당원자격을 갖춘 전위투사들만 있으면 당조직은 아무 때든지 내올 수 있습니다.≫≫(국내당공작위원회, 세기와 더불어 5권)

≪≪지금 국내동무들의 활동을 보면 망명객식방법으로 일하고 있는데 이것은 백해무익한 방법입니다. 낮에는 산에 숨어있다가 밤에 가만히 내려와서 사람들을 만나게 되니 조직원들은 놈들의 감시가 두려워 그들을 만나기 싫어합니다. 망명객식방법으로는 조직을 확대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적후지하활동을 하는 동무들이 생산에 참가하면서 합법적인 활동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얻어야 합니다. 망명객식사업방법을 즉시 버려야 합니다.≫

박달   박달은 내 말을 듣고나서 얼굴을 붉히었다.

≪나도 사실은 망명객식방법으로 사업하였습니다. 우리는 정면충돌만 생각하였지 때에 따라서는 우회적인 방법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습니다.≫≫(국내당공작위원회, 세기와 더불어 5권)

≪≪    적들은 지금 이곳에 수천 명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이것은 그들이 소탕하주변은 물론, 무송일대의 모든 주민 거주지들에 널려있던 군대와 경찰들만이 아니라 자위단 무력까지 깡그리 긁어모아가지고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즉 이 마을과 대로들은 텅 비여있을 것이다. 적들은 현재 밀림속에만 주의를 돌리고 있다. 우리가 설마 대도로로 빠지리라고는 상상도하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 바로 적들의 빈구석이 있다. 우리는 그 빈공간을 이용하여 동강밀영으로 신속히 이동해야 한다....≫ . . .

소탕하에서의 일행천리소탕하에서 실현한 대로행군전술을 우리는 훗날 조국에 나와서 베개봉을 떠나 무산지구로 진출할 때에도 적용하였다. 그 전술을 일행천리전술이라고 한다.≫(소탕하에서의 일행천리, 세기와 더불어 6권)

≪오백룡은 행군명령이 떨어지자 나보고 장군님, 우리가 행군을 시작하면 포대에서 철알이 우박같이 날아오겠는데 어떻게 저 벌판을 돌파하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하겠는가, 앞뒤에 기관총을 한 정씩 세우고 적이 앞으로 오면 앞에서 쏘고 뒤에서 오면 뒤로 쏘면서 강짜로 행군해야지 별 수가 있는가고 하였습니다.  . . .

얼마후에는 우리의 앞에 적들이 나타났다는 전방척후들의 보고가 또 날아들어왔습니다. 적이 뒤에도 있고 앞에도 있다면 그것은 야단이었습니다. 오백룡은 또다시 내 얼굴을 보면서 장군님, 이제는 우리가 사령부라는 것도 다 들장난 것 같은데 어떻게 하랍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오백룡   나는 그에게 사생결단을 하는 것밖에야 다른 길이 있는가, 앞에서 오는 놈들은 우리를 생판 모르는 놈들이고 우리와 조우하는 것도 모르고 마음놓고 오는 놈들이다, 뒤에서 따라오는 놈들은 우리 역량이 얼마나 되고 우리가 얼마만큼 피곤한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까지 다 알고 있다, 때문에 그놈들과 본격적인 대항전을 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니까 다른 도리가 없다, 한 개 분대쯤 되는 인원을 떼서 뒤에 있는 놈들을 견제하게 하고 기본역량은 우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마주 오는 앞에 놈들을 제껴버려야 한다, 그래야 포위를 돌파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뒤에서 우리를 추격하는 것은 일본군 토벌대였지만 앞에서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만주국군대였습니다. 만주국군대는 우리 부대와 맞서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즉 약한 고리는 앞에 있었습니다. 나는 오백룡에게 부대를 데리고 앞을 돌파하라, 약한 고리를 답새겨서 조금만 주춤거리면 숨돌릴 틈을 주지 말고 돌격해서 적들의 병영까지 따라가 혼쌀을 내주라고 하였습니다.≫(고난의 행군, 세기와 더불어 7권)

다섯째, 계승과 혁신의 변증법이다.

≪지원≫의 사상, 3대각오, 동지획득에 대한 사상, 두 자루의 권총, 이것이 내가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유산의 전부였다. 그것은 모진 고생과 희생을 전제로 하는 유산이었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그보다 더 훌륭한 유산이 없었다.≫(유산, 세기와 더불어 1권)

강반석여사께서 권총을 아드님께 드리는 모습

스탈린이 살아있을 때는 쏘련에서 만사가 다 잘돼나갔습니다. 그런데 흐루시쵸프가 집권한 다음부터 일이 비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쏘련당안에서 현대수정주의가 대두하고 쏘련사람들이 사상적으로 병들기 시작하였습니다. . . .

그 후 언제인가 임춘추는 모스크바붉은광장에서 레닌묘를 참관하다가 우연히 심각한 몰로토프를 만난 일이 있습니다.

임춘추   몰로토프는 그때 임춘추에게 당신들은 쏘련당의 전례를 생각해서라도 절대로 수정주의를 하지 말고 자기 수령의 사상과 업적을 충실하게 계승해 나가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임춘추는 그때 후계자 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하면 당도 망치고 혁명도 망친다는 것을 똑똑히 깨달았다고 합니다. . . .

항일혁명투사들이 김정일동무를 수령의 유일한 후계자로 내세운 것은 그가 당과 국가, 군대를 영도해야 민족의 장래가 담보되고 백두산에서 개척한 주체의 혁명위업이 한치의 편차도 없이 대를 이어 빛나게 계승발전 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항일혁명투사들이 그를 수령의 후계자로 추대했다는 것은 곧 군대가 그를 민족의 령수로 내세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세기와 더불어 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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