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8월 15일(목)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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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과 최일천

서정욱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불후의 고전적 노작 ≪세기와 더불어≫에서 빛나는 수령님의 혁명동지에 대한 해설강좌 시간입니다.

오늘은 그 두번째 시간으로 위대한 수령님께서 충실하였으며 재능있는 혁명가였던 김혁과 최일천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두 동지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지, 특히 김혁이 위대한 수령님의 추억속에 영생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우리가 오늘 김혁에게서 따라배워야 할 점은 무엇인지를 사색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김혁을 처음 만나신 것은 1927년 여름이었으며 김혁을 소개해 준 사람은 바로 차광수였습니다.

김혁   ≪내가 김혁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1927년 여름이었다.

그날 한문시간이 끝나고 복도에서 상월선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권태석이 뛰어와서 손님이 찾아왔다고 알려주었다. 한번도 보지 않은 사람인데 차광수라는 안경쟁이와 함께 정문에 서 있었다고 하였다.≫(혁명시인 김혁, 2권)

김혁도 차광수처럼 참다운 영도자와 혁명조직을 갈망하였습니다.

≪나는 시위를 하면서도 내가 이렇게 시위를 하다가 맥을 놓을 때 앞으로 나가라고 소리쳐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위를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내일은 어떻게 하라고 일러주는 조직이 있고 지도자가 있다면 얼마나 힘이 날까, 내가 총탄에 맞아 쓰러질 때 나를 붙안고 ≪김혁아! 김혁아!≫하고 부르며 눈물을 뿌려줄 동지가 있다면 또 얼마나 행복할까, 그리고 그것이 조선사람들이고 조선의 조직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하는 생각을 하였다, 총구를 향해 달려가면서도 얼마나 좋겠는가하는 생각을 하였다. 총구를 향해 달려가면서도 이런 생각이 가슴에 맺혀 내려가지 않았는데 길림에 와서 좋은 동무들을 만나는 행운을 지닌데다가 오늘은 공청에까지 가맹하고 보니 얼마나 떳떳하고 자랑스러운지 모르겠다고 하였다.≫(혁명시인 김혁, 2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혁을 열정적이고 깨끗하며 식견이 풍부하며 문학예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으로 평가하시었습니다.

≪나는 첫 대면에 벌써 그가 불같은 열정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차광수는 덜렁덜렁한 사람이라면 김혁은 불같은 사람이었다. 평상시에는 여자처럼 조용하고 얌전하게 굴다가도 일단 충격만 가해지면 쇠가마처럼 끊으면서 단김을 뿜는 것이었다. 차광수처럼 동양 3국을 돌아다니면서 쓴맛단맛을 다 보았다면 풍운아였는데 그런 풍운아치고는 깨끗한 사람이었다.≫(혁명시인 김혁, 2권)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견문도 넓고 이론수준도 높았다. 특히 문학과 예술에 대해서는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다.≫(혁명시인 김혁, 2권)

특히 김혁은 시를 잘 지었으며 우리 나라에서 혁명시인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혁명영화 <조선의 별>중에서   ≪김혁이 시를 잘 지었기 때문에 우리 동무들은 그를 ≪에젠뽀찌에≫라고 불렀다.≫(혁명시인 김혁, 2권)

≪우리 후대들이 혁명시인이라고 부르는 김혁도 바로 그런 동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혁명시인 김혁, 2권)

김혁의 열정적 성격은 혁명과 과업에 대한 충실성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김혁의 불같은 성격은 혁명실천에서 충실성으로 표현되었다. 그는 높은 책임성과 충실성을 지닌 혁명가였다. 나보다는 나이가 다섯 살이나 위이고 일본에 가서 공부도 한 사람이었지만 그런 내색은 전혀 내지 않고 우리가 주는 과업을 언제나 성실하게 받아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김혁을 각별히 아끼고 사랑하였다.≫(혁명시인 김혁, 2권)

김혁은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과 건설동지사의 창립성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약왕묘 안에 있는 지하실   ≪우리는 이런 준비에 기초하여 1927년 8월 28일 북산공원의 약왕묘 지하실에서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을 결성하는 모임을 가지였다.

모임에는 최창걸, 김원우, 계영춘, 김혁, 차광수, 허률, 박소심, 박근원, 한영애를 비롯한 반제청년동맹 핵심들과 청년공산주의자들이 참가하였다.≫(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1권)

≪건설동지사에 가입한 동무들은 모두가 일어나서 격정에 넘치는 열변을 토하였다. 김혁은 그때 ≪출범이다. 우리의 배는 항구를 떠났다. 우리는 격랑을 헤치며 먼바다로 노를 저어간다.≫는 내용으로 즉흥시를 읊었다.≫(첫 당조직 - 건설동지사, 2권)

김혁은 ≪볼쉐위크≫의 주필로서 청년공산주의대오의 선전활동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김혁은 ≪볼쉐위크≫의 첫주필로서 카륜을 떠날 때까지 원고집필로 밤잠을 거의 자지 않았다. 불덩이같은 정열가여서 좀처럼 휴식이라는 것을 몰랐다.≫(혁명시인 김혁, 2권)

≪그 당시 내가 제일 그리웠던 것은 김혁과 최일천이었다. 카륜과 오가자 시절의 막역지우들이었던 ≪볼쉐위크≫의 주필 김혁과 ≪농우≫의 주필 최일천은 쌍벽을 이루는 재능있는 문장가들이었다.

시인인 김혁의 글이 범람하는 장강처럼 호방하고 격동적이었다면 최일천의 글은 민족적인 색채가 짙으면서도 지성도가 높고 분석이 예리하였다. 김혁은 ≪볼쉐위크≫에 자기가 순수 작사, 작곡한 혁명적인 노래들도 이따금 편집해넣곤 하였다. ≪볼쉐위크≫에 내보낸 그의 작품들 가운데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자본주의사회 저주가≫와 ≪반파벌가≫이다.

≪자본주의사회 저주가≫는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저주와 증오의 감정을 가지고 착취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한 노래였고 ≪반파벌가≫는 감자도장이나 새겨가지고 다니면서 남의 등에 업혀 당을 창건하려고 하는 종파사대주의자들의 정체를 예리하게 발가놓은 풍자가요였다.≫(≪3.1월간≫, 5권)

김혁은 사상교양사업에서도 적극성과 창의성을 발휘하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김혁은 1928년 여름부터 차광수와 함께 유하현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그들의 지도로 고산자동성학교에 사회과학연구회(특별반)가 나오고 반제청년동맹지부가 조직된 것도 이무렵이었다.

그때 김혁은 인류진화사와 세계정치지리, 문학, 음악 과목의 강의를 담당하였다. 고산자의 청년학생들속에서 인기가 대단하였다.

내가 감옥생활을 마치고 동만쪽으로 나갈 무렵에 김혁은 고유수와 길림으로 왔다갔다하면서 조직이 준 과업을 집행하고 있었다. 나는 돈화로 가면서 그에게 서면으로 강동, 길림, 신안툰의 혁명조직들을 지도하면서 새 출판물 발간을 준비하라는 일거리를 더 맡기였다.≫(혁명시인 김혁, 2권)

≪사회과학연구회는 맑스-레닌주의와 조선혁명의 지도이론을 연구보급하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삼고 있었다. 그 운영방법은 지금의 통신대학체계와 비슷하였다. 1년에 보름가량은 농한기를 택하여 청년들을 불러다가 강의를 해주었으며 나머지 시간에는 몇 달에 한번씩 이동강의도 해주고 필요한 학습교재들을 보내주는 방법으로 회원들을 계몽시키었다.

사회과학연구회 성원들은 참고서를 놓고 강의에서 받은 내용을 자체로 학습한 다음 한 주일에 한 번 정도 모여앉아 토론회를 가지였으며 이해하기 힘든 문제들이 있으면 서면질의응답의 방법으로 배운 지식을 완전히 소화하였다.

남만청총대회가 소집되던 그 해 가을에 유하에서 사회과학연구회의 활동에 대한 차광수의 설명을 들은 나는 그 운영방법의 독창성과 참신성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으며 이 연구회를 이끌어나가는 세 전우(최창걸, 차광수, 김혁)를 통이 크고 창조성이 높은 사람들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들이 실천속에서 창조해낸 운영방법은 어려운 지하투쟁의 조건에서도 머리를 잘 쓰면 청년들을 시대의 선각자, 역사의 개척자로 훌륭히 교양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단합의 이념아래, 2권)

김혁은 대중사업과 당사업, 무장투쟁준비사업에서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김혁은 무장소조원들과 함께 부두노동자들과 청년학생들을 비롯한 각계각층 군중속에 깊이 들어가 카륜회의 방침을 정력적으로 해설하였다. 그는 능숙한 조직적 수완과 담력을 가지고 청년들을 교양하고 조직을 확대하는 한편 기층당조직을 내오기 위한 준비사업과 무기를 확보하기 위한 사업도 힘있게 밀고 나갔다. 적들의 삼엄한 감시망을 피해가며 국제당연락소와의 연계도 지어놓았다.≫(혁명시인 김혁, 2권)

특히 하얼빈지역을 혁명화하는데서 김혁의 공로가 큽니다.

≪김혁을 하얼빈에 보낸 중요한 목적은 하얼빈일대에서 우리의 혁명조직을 늘이는 한편 국제당과의 연계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김혁이 그때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우리가 주는 임무를 흔쾌히 받아들이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혁명시인 김혁, 2권)

≪하얼빈의 일을 추켜세우는데서 김혁의 공로가 컸다.≫(혁명시인 김혁, 2권)

김혁은 사랑에서도 모범이었습니다.혁명영화 <조선의 별>중에서

≪생활을 언제나 열정적으로 감수하고 시화해온 김혁은 사랑도 역시 열렬히 하였다. 청년공산주의자들은 혁명을 하면서도 사랑을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인간성도 없고 인간다운 생활도 없으며 인간다운 사랑도 없는 것처럼 말하는데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혁명을 하면서 사랑을 하였고 탄우속에서도 가정도 이루었다.≫(혁명시인 김혁, 2권)

김혁의 혁명위훈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바로 혁명송가 ≪조선의 별≫를 창작하고 조선혁명에서의 통일단결의 구심을 확립하는 데 앞장섰다는 것입니다.

≪김혁은 우리 몰래 차광수, 최창걸 동무들과 의논해가지고 길림일대에 그 노래를 보급하였다. 그때 나는 우리를 별에 비기고 노래까지 지어부르는데 대해 아주 엄하게 꾸짖었다.

≪조선의 별≫이 보급되던 그 무렵부터 우리 동무들은 내 이름도 한별이라고 고쳐불렀다. 저희들끼리 이름을 지어가지고는 내 의향에는 관계없이 ≪한별이, 한별이≫하고 불렀다. 한문자로 표기하면 일성(一星), 즉 한별이라는 뜻이었다.≫(혁명시인 김혁, 2권)

 

≪내가 김혁, 차광수, 최창걸과 같은 사람들을 그토록 사랑하고 잊지 못해하는 것은 그들에 나에 대한 노래를 짓고 나를 지도자로 내세워서가 아니다. 바로 그들이 우리 민족이 그처럼 절절하게 바라면서도 실현할 수 없었던 통일단결, 우리 인민의 자랑이고 영광이며 무궁무진한 힘의 원천인 참다운 통일단결의 시원을 열어놓고 우리 나라 공산주의운동에서 영도자와 대중의 일심동체를 이룩한 통일단결의 새 역사를 피로써 개척한 선구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함께 혁명을 한 새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은 자리다툼 때문에 대오에 불화를 조성한 적도 없고 의견상이로 하여 우리가 생명으로 내세운 통일단결을 파괴해본 적도 없었다. 통일단결은 우리 대오에서 진짜 혁명가와 가짜 혁명가를 가르는 시금석으로 되어있었다. 그렇게 때문에 그들은 감옥과 교수대로 끌려가면서도 이 통일단결을 목숨으로 사수하였다. 그리고 다음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에게 그것을 재보로 넘겨주었다.

그들의 첫째가는 역사적 공적이 바로 거기에 있다. 지도자를 내세우고 그 지도자를 핵으로 통일단결한 새 세대 공산주의자들의 숭고하고 아름다운 넋은 오늘 우리 당이 일심단결이라고 부르는 통일단결을 낳은 위대한 전통으로 되었다.≫(혁명시인 김혁, 2권)

김혁은 혁명투쟁의 마지막 순간까지 한별의 전사로서, 혁명가로서 견결하였습니다.

≪그는 혁명의 한 개 지역을 담당한 책임자답게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다가 하얼빈도시의 비밀연락소에서 불의에 달려드는 적들과 총격전을 벌이던 끝에 최후를 결심하고 3층에서 뛰어내렸다. 그런데 강철같은 육체가 그의 뜻을 배신하였다. 김혁은 자결에 성공하지 못한 채 적들에게 붙잡혀 여순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 감옥에선 모진 고문과 박해에 시달리다가 옥사하였다고 한다.≫(혁명시인 김혁, 2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혁의 혁명가다운 신념과 의리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시었습니다.

≪김혁, 차광수 등 새 세대 청년공산주의자들을 비롯하여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간고한 항일혁명전쟁시기 우리와 함께 전장에서 싸운 수많은 항일유격대원들은 하나같이 순결한 의리의 소유자, 고상하고 아름다운 도덕의 창조자들이었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마동희와 장증열이 걸어온 서로 대조되는 두 인간의 행로를 돌이켜볼 때마다 나는 김혁과 장소봉을 의례히 회고해보곤 한다. 그들도 같은 시각에 같은 지점에서 같은 궤도를 타고 혁명을 시작하였지만 그 종착점은 서로 남극과 북극과 같은 차이를 자기고 있었다. 이 격차의 출발점 역시 두 인간이 지니고 있던 신념과 의지의 질적 차이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김혁이 조직생활과 혁명적 실천에 충실한 사람이라면 장소봉은 이론에 밝고 두뇌가 명석한 대신 실천이 굼뜨고 자만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김혁은 어떤 고생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소봉은 육체를 혹사하는 그런 성격의 일에 몸을 깊이 잠그지 않았다. 한 사람은 물불을 모르고 열정의 사나이였고 다른 한 사람은 소낙비라 쏟아지는 날에도 바지가랭이를 걷어올리고 진창속에서 돌을 골라 디디면서 신등에 흙을 묻히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런 냉철하고 타산이 밝은 사나이였다.

. . .

이처럼 육체적 생명 외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적 생명의 나이는 신념의 유무와 대소에 의해 결정된다. 신념이 강하고 의지가 강할수록 그 인간은 정치적 생명을 유지하는데서 장수자가 된다. 신념을 일찍이 줴버린 사람들의 정치적 생명은 비명에 요절하고 만다.≫(혜산사건을 겪으면서, 6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혁의 구속과 옥사 소식을 듣고 참으로 애통해 하시었으며 두고두고 그를 추억하시었습니다.

≪한 명의 혁명동지가 천금보다 더 귀중했던 그때 김혁과 같이 훌륭한 재사를 잃은 것은 우리 혁명에 있어서 참으로 가슴아픈 손실이었다.≫(혁명시인 김혁, 2권)

≪그가 붙잡혔다는 소리를 듣고 나는 며칠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나는 하얼빈에 갔을 때에 김혁의 발자취가 찍혀 있는 거리와 선창가를 하염없이 거닐며 그가 생전에 지은 노래를 입속으로 조용히 불러보았다.≫(혁명시인 김혁, 2권)

≪그가 지금 살아서 우리 곁에 있다면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혁명앞에 모진 시련의 고비가 닥쳐올 때마다 나는 지난날 온몸을 애국으로 불태우며 투쟁속에서 젊음을 빛내던 살틀한 동지 김혁을 생각하며 그가 너무도 일찍이 세상을 떠나간데 대하여 애석한 심경을 금치 못한다.≫(혁명시인 김혁, 2권)

≪김혁은 나의 청춘시절에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긴 사람이며 나는 그가 세상을 떠난 때로부터 반세기가 넘는 오늘까지도 그를 잊지 않고 있다.≫(혁명시인 김혁, 2권)

최일천   위대한 수령님께서 최일천을 처음 만나신 것은 길림에서이며 소개해 준 사람은 오동진이었습니다.

≪그날 오동진은 자기의 수하에서 서기로 일하는 최일천을 나에게 소개해주었다. 오동진이 서기자랑을 많이 하였기 때문에 최일천에 대해서는 나도 일정한 예비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정의부내에서 문장가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이날의 상봉을 계기로 하여 나와 최일천은 그 후 특별한 동지적 유대로 이어지게 되었다.≫(선진사상의 탐구, 1권)

최일천은 오가자의 동맹위원장을 맡으면서 이상촌을 혁명촌으로 바꾸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이런 준비단계를 거쳐 우리는 삼성학교 교실에서 오가자반제청년동맹을 결성하였다. 동맹은 각 부락들에 지부를 두었다. 동맹위원장으로는 최일천, 조직부장으로는 문조양이 선거되었다.≫(이상촌을 혁명촌으로, 2권)

최일천은 당시 일본경찰이 감시와 주목을 받으면서도 혁명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적들이 최일천을 주목하게 된 것은 그가 장춘에 나와서도 청년들과의 사업을 계속하였기 때문이며 국내애국인사들과의 밀접한 연계밑에 우리에 대한 선전을 많이 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동만에서 무장투쟁을 시작한 다음 그는 반제청년동맹조직을 통하여 직접 육성한 여러 명의 핵심청년들을 항일유격대에 보내주었다.≫(이상촌을 혁명촌으로, 2권)

최일천은 김혁과 쌍벽을 이루는 문필가로서 ≪농우≫의 주필로서 활동하였습니다.

≪오가자에서는 그가 제일 개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김혁처럼 시는 짓지 않았지만 뛰어난 산문가의 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권유로 여러 해 동안 장춘에 나가 비밀공작원활동을 하면서 ≪동아일보≫지국장의 일을 맡아보았다. 그 과정에 우리에 대한 자료도 많이 수집하고 좋은 글을 써서 투고도 자주 하였다.≫(이상촌을 혁명촌으로, 2권)

≪그 당시 내가 제일 그리웠던 것은 김혁과 최일천이었다. 카륜과 오가자 시절의 막역지우들이었던 ≪볼쉐위크≫의 주필 김혁과 ≪농우≫의 주필 최일천은 쌍벽을 이루는 재능있는 문장가들이었다.

시인인 김혁의 글이 범람하는 장강처럼 호방하고 격동적이었다면 최일천의 글은 민족적인 색채가 짙으면서도 지성도가 높고 분석이 예리하였다.≫(≪3·1월간≫, 5권)

최일천은 조국광복회의 강령을 선전하고 소개하는 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습니다.

≪최일천은 심양과 베이징에 있을 때 여러 차례에 걸쳐 서울에 나와 국내의 저명인사들과 각계각층 인민들에게 항일무장투쟁의 전과를 소개하였다.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전폭적으로 지지찬동하고 그 정신에 따라 민족문화와 민족의 얼을 고수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이상촌을 혁명촌으로, 2권)

최일천은 이극로선생을 비롯한 민족지식인에게 위대한 수령님과 항일유격대의 투쟁에 대하여 널리 소개하는 한편 그들속에서 조국광복회조직을 꾸리는 과업을 훌륭히 수행하였습니다.

이극로   ≪이극로선생에게 우리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사람은 황귀헌의 아버지 황백하였다. 그 당시 이극로선생은 신간회대표단 성원으로 만주지방에 들어가 있었다. 그 대표단의 사명은 5.30폭동과 8.1폭동에서 피해를 입은 조선동포들에 대한 구제사업을 하는 것이었다. 폭동피해자들이 속출하자 신간회지도부는 만주지방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그들에 대한 원호사업을 하려고 하였다.

그때 이극로선생은 심양에서 최일천을 만났다. 길림에 가면 황백하를 만나보라고 선생에게 권고한 사람이 바로 최일천이었다.≫(유산, 1권)

≪조선어학회 내부에는 우리의 조직선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이극로를 비롯한 선각자들을 망라한 비밀지하조직이 틀고앉아 있었습니다. 최일천이 서울에서 살고 있은 이극로를 찾아간 것이 1936년 가을과 1937년 여름이었다고 하는데 그때 우리 조직에서 그에게 국내지식인들속에 조국광복회조직을 꾸리는 과업을 주어 파견하였습니다.

최일천은 장춘에 있는 ≪동아일보≫지국장으로 서울에 들락날락하면서 우리의 과업을 훌륭히 수행하였습니다.≫(민족의 얼, 8권)

최일천은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역사를 소개한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를 서술하는 특기할 만한 업적을 남기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추켜들었던 타도제국주의동맹의 이념이나 기개에 대하여서는 해방 직후 최일천(최형우)이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에서 ≪≪ㅌ·ㄷ≫와 김일성≫이라는 제목으로 그 일단을 서술했다고 생각한다.≫(타도제국주의동맹, 1권)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에 반영된 재만조선인들의 민족해방투쟁 실상과 그것을 유감없이 구사한 활달하고도 격정적인 필자는 바로 이상과 같은 혁명실천과정에서 이루어지고 수련된 것이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이상촌을 혁명촌으로, 2권)

≪최일천은 일본관헌들의 박해와 감시가 심해지자 ≪동아일보지국의 일을 할 때 만주각지를 돌아다니며 손수 수집해놓았던 우리의 투쟁자료들과 독립운동자료들을 가지고 서울에까지 나와 당시 조선어학회를 책임지고 있던 이극로선생에게 그 자료들을 모조리 넘겨주었다. 그 자료들속에는 우리가 오가자에서 발간한 ≪농우≫잡지 묶음도 있었다.

≪이것은 국보적 가치를 가지는 자료입니다. 적의 감시와 추적속에서 사는 나에게는 이 자료들을 간수할 힘이 없습니다. 나라가 독립되면 이 자료들로 역사서술을 하려고 하는데 리선생이 어떻게 하나 그때까지 잘 보관해주기 바랍니다.≫

그때 최일천은 이런 부탁을 만기고 만주로 다시 들어갔다.

그는 해방 직후 이극로선생이 자기의 부탁을 받고 소중히 보관해온 자료들을 넘겨받아가지고 단숨에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를 써냈다. 그 책은 파지를 모아 제조한 모래알까지 섞인 재생지에 인쇄된 것이었으나 구독자들이 너무 많아 역사와 문학을 전공하는 젊은 지식인들이 백지에 전문을 베껴가지고 다니면서까지 탐독하는 인기도서로 되었다.

최일천은 해방 직후 미군정이 반공반북을 이남땅의 ≪국책≫으로 내세우고 그것을 총검으로 떠받들어주는 살벌한 환경속에서 반일투쟁만화도 찍어내며 청소년들에게 반제반일정신을 고취시켰다.

해방 후 정치적 혼잡과 무질서가 지배하던 서울장안에서 그가 온갖 정신력을 다 동원하여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와 같이 무게있는 글을 써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이상촌을 혁명촌으로, 2권)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는 최일천의 미완성작이다. 그는 원래 2집을 낸 다음 계속하여 다음 권을 쓰려고 하였으나 해방 후 복잡한 남조선정치무대에 발을 들이민 후 시간을 내지 못하여 그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 책은 다음권에서 필자는 우리의 혁명활동을 전면적으로 서술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최일천이 살아있었더라면 우리의 혁명역사와 관련된 흥미있는 사료들도 더 나왔을 것이다.≫(이상촌을 혁명촌으로, 2권)

최일천은 위대한 수령님을 진심으로 존경하였으며 수령님께서 오늘의 존함으로 불리우게 된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우리 동무들과 함께 내 이름을 김일성(金日成)으로 고치자고 발기한 것은 변태우를 비롯한 오가자의 유지들과 최일천과 같은 청년공산주의자들이었다.≫(혁명시인 김혁, 2권)  

최일천은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 사상과 전략에 충실하였습니다.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의 저자 최일천과 그의 안해 승소옥≪최일천은 해방 후 남조선정계에 진출하여 조선혁명당 정치부장, 신진당 중앙위원회부장, 김일성장군환영위원회 위원, 민족자주연맹 집행위원 등 주요직책을 역임하면서 여운형, 홍명희, 김규식 등의 인물들과 손을 잡고 민주역량의 집결과 남북통일을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하였는데 조국해방전쟁시기 서울에서 반동들에게 피살되었다.≫(이상촌을 혁명촌으로, 2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최일천을 김혁 못지않은 혁명가로 높이 평가하시었습니다.

≪승소옥은 그 후에도 혁명활동에 성실히 참가하다가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의 필자인 최일천의 안해가 되어 세상을 떠나자 그에게 시집을 갔다. 비록 계모가 되어 남의 아이들을 기르는 한이 있더라도 김혁과 같은 혁명가와 일생을 같이하겠다는 것이 여성으로서의 그의 이상이었다.≫(혁명시인 김혁, 2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서울지역으로 파견되어 가는 최일천과의 이별을 두고두고 추억하시었습니다.

≪최창걸, 김원우, 계영춘, 강병선, 박소심, 최일천, 고재봉, 박일파와의 이별과 마찬가지로 나의 길동무가 되어 하얼빈까지 동행했던 한영애와의 이별도 그런 것이었다.≫(전우들은 북으로, 나는 남으로, 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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