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8월 11일(일)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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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과 유물론(1)

통일여명 편집위원 강인규

 

맑스무엇보다도, 회고록에는 유물론이 바탕에 놓여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 유물론자이시라는 점은 물론이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10대의 어리신 나이에 벌써 맑스레닌주의에 정통하시었으며 그 철학인 변증법적 유물론도 완전히 터득하시었다. 이는 다음의 두 발췌인용문에서 단적으로 확인된다.

≪≪다 알다시피 어떤 물질이든지 본래의 구성요소와 다른 요소가 80-90% 이상을 차지하게 되면 그 물질은 다른 물질로 변하게 된다. 이것은 과학이다.

동만에 사는 조선사람의 70%가 ≪민생단≫이라는 것은 노인들과 아녀자들을 제외한 조선족 청장년들 전부가 ≪민생단≫이라는 말과 같은데 그렇다면 동만에서는 ≪민생단≫이 혁명을 하고 있으며 ≪민생단≫이 자기 상전을 반대하는 혈전을 벌이고 있단 말인가?≫(다홍왜에서의 논쟁, 세기와 더불어 4권)

≪천도교에서는 ≪한울≫ 즉 우주전체가 ≪지기≫라고 하는 그 어떤 특수한 기운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니지만 물질적인 것인 동시에 정신적인 것으로서 자연도 사람도 신도 모두 ≪지기≫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지기≫를 세계의 시원이며 만물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동학의 ≪지기설≫은 모든 물체에 영혼이 있다고 보는 영혼설의 일종으로서 범심론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 .

한마디로 말하여 ≪인내천≫의 사상은 유물론에 기초하지 못하고 유신론에 기초한 사상이었다.≫(민족종교 천도교를 두고, 세기와 더불어 5권)

다음으로, 회고록에는 종교에 대한 과학적이고 주체적인 견해와 관점, 입장이 밝혀져 있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회고록에서 종교의 본질과 함께 식민지민족해방투쟁에서 종교인과의 사업을 어떻게 전개하여야 하는가를 명확히 밝혀주시었다. 다음은 회고록에 나오는 종교와 관련한 대목이다.

첫째, 종교에 대한 유물론적 견해이다. 참고로 동양에서는 중세까지 물질은 ≪기≫라는 개념으로 불리워졌다.

사상으로 보면 아버지 무신론자였다.≫(나의 어머니, 세기와 더불어 1권)

≪≪어머니, 어머니는 ≪하느님≫이 정말 있어서 예배당에 다니시나요?≫

어머님으로부터애국주의교양을받으시는김일성주석님

어머니는 웃으면서 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무엇이 있어서 다니는 것 아니다. 죽은 후에 ≪천당≫가서는 뭘하겠니. 사실은 너무 피곤해서 좀 쉬자고 간다.≫≫(나의 어머니, 세기와 더불어 1권)

≪소년회에 망라된 학생들가운데는 기독교신자들의 자녀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부모들의 종교적 영향을 어떻게나 많이 받았는지 세상에 정말 ≪하느님≫이 있다고까지 생각하였다. 이런 학생들에게는 아무리 ≪하느님≫이 없고 종교를 믿는 것이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해주어도 소용이 없었다.

어느 날 나는 우리의 영향을 받고 있던 조선인소학교의 한 여선생에게 부탁하여 종교를 믿는 학생들을 데리고 예배를 보러 가게 하였다.

그 여선생은 나의 말대로 학생들을 데리고 예배당에 가서 온종일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아버지이시여, 배가 고픈데 우리에게 떡을 주시고 빵을 주십시오.≫하고 기도를 드리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떡이나 빵이 차례질 리는 만무하고 배만 여전히 쪼록쪼록 고팠다. 이번에는 여선생이 학생들을 데리고 가을을 하고난 밀밭에 가서 이삭을 줏도록 하였다. 선생은 밭에 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굉장히 많은 이삭을 주어왔다. 그 이삭을 털어서 빵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학생들은 그 빵을 먹으면서 ≪하느님≫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보다는 실지 노동을 통해서 먹을 것을 얻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단순한 사실 같지만 청소년들의 사상의식을 개조하고 낡은 인습을 청산하는데서는 이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세기와 더불어 1권)

≪≪종교를 아편이라고 한 맑스의 명제를 나는 물론 부정하지 않소.. . . . ≫≫(조직을 확대하기 위하여, 세기와 더불어 1권)

≪동학도들이 주장한 ≪인내천≫의 사상은 사람을 하늘에 비기며 존중했다는 측면에서는 비교적 진보적이었다고 볼 수 있으나 그것은 종교적인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사람 자체를 신적 존재로 보는 것으로 하여 이론적 불합리를 면치 못하고 있다. . . .

천도교에서는 ≪한울≫ 즉 우주전체가 ≪지기≫라고 하는 그 어떤 특수한 기운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니지만 물질적인 것인 동시에 정신적인 것으로서 자연도 사람도 신도 모두 ≪지기≫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지기≫를 세계의 시원이며 만물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동학의 ≪지기설≫은 모든 물체에 영혼이 있다고 보는 영혼설의 일종으로서 범심론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바로 그 ≪지기설≫에 기초하여 천도교에서는 인간도 살았거나 죽었거나 ≪한울≫처럼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즉 사람은 세상만물 중 가장 으뜸가는 영혼을 지닌 특수체라는 것이다. . . .

한마디로 말하여 ≪인내천≫의 사상은 유물론에 기초하지 못하고 유신론에 기초한 사상이었다.≫(민족종교 천도교를 두고, 세기와 더불어 5권)

둘째, 종교에 대한 주체적인 견해와 관점, 입장이다.

≪≪글을 배워도 조선을 위하여 배우고 기술을 배워도 조선을 위하여 배우며 하늘을 믿어도 조선의 하늘을 믿어야 한다.

아버지는 이런 사상으로 학우들을 깨우쳐주면서 애국적인 청년학생들을 묶어세웠다.≫(아버지와 조선국민회, 세기와 더불어 1권)

아버님으로부터애국주의교양을받으시는김일성동지

≪≪아버지, 오늘은 예배당에 안갈래요. 예배를 구경하는게 재미없어요.≫

아버지는 아직 철부지라고 할 수밖에 없는 나어린 나를 앉혀놓고 이런 말씀을 하였다.

≪가고 안가는거야 네 마음대로지. 사실상 예배당이라는데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니 안가도 좋다. 너는 예수보다도 자기나라를 더 믿고 자기 나라 사람들을 더 믿어야 한다. 그리구 나라를 위해서 큰일을 할 생각을 해야 한다.≫ 이런 말씀을 들은 다음부터 나는 예배당에 잘 다니지 않았다. 칠골에서 학교를 다닐 때에도 예배당에 다니지 않는 학생들을 통제하였지만 한번도 가지 않았다. 나는 예수의 복음이 우리 인민이 겪고 있는 비극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였다. 예수의 교리가운데 인도주의적인 것도 많았으나 민족의 운명을 두고 깊은 고뇌에 빠져있던 나에게는 구국에로 부르는 역사의 웨침소리가 그보다 더 절박하게 들리었다.≫(나의 어머니, 세기와 더불어 1권)

≪우리가 청소년들이 예배보러 다니는 것을 경계하고 그들이 미신의 포로가 되지 않도록 부단히 교양한 것은 결코 종교 그 자체를 타도하자는데 있지 않았다. 청소년들이 미신에 빠지고 예수의 교리를 절대화하게 되면 혁명에 아무 쓸모도 없는 나약하고 무기력한 존재로 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자는데 목적이 있었다. 신자라고 하여 혁명을 못한다는 법은 없지만 세계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가 부족한 청소년들의 경우에는 종교가 내포하고 있은 무저항주의적인 요소들로부터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

길림에 가보니 어떤 소년회원들은 거리를 걸어다니면서도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그만큼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종교적 영향력이 강하였다. 그런데 찬송가나 불러가지고서는 적의 화구앞으로 돌진할 수 없었다. 우리에게는 찬송가를 부르는 신도들보다도 결사전가를 부르는 투사들이 더 필요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청소년들에게 혁명적인 노래들을 대대적으로 보급하였다. 찬송가를 부르면서 거리를 오가던 소년회원들이 얼마 후부터는 ≪소년애국가≫와 ≪조선인길림소년회가≫를 부르며 버젓이 시가행진을 하였다.≫(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세기와 더불어 1권)

≪바로 그 ≪지기설≫에 기초하여 천도교에서는 인간도 살았거나 죽었거나 ≪한울≫처럼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즉 사람은 세상만물 중 가장 으뜸가는 영혼을 지닌 특수체라는 것이다.

영혼설을 인정하게 되면 인간은 자기의 의식과 의사에 따라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지배밑에 그 어떤 숙명적인 삶의 궤도를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영혼설은 불가불 숙명론에 떨어진다. 숙명론으로부터는 인간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지론이 나올 수 없으며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자신이며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힘도 자기자신에게 있다는 진리도 도출할 수가 없는 것이다. . . .

한마디로 말하여 ≪인내천≫의 사상은 유물론에 기초하지 못하고 유신론에 기초한 사상이었다.

천도교는 그 계급적 제한성과 이론적, 실천적 미숙성으로 하여 반일민족해방투쟁에서 주도적 역할을 감당하지는 못하였다. 바로 이것이 동학만능을 우리가 지지하지 않는 주되는 논거였다.

우리는 천도교를 이러한 관점으로 대하면서도 좋은 측면을 보다 중시하였으며 천도교가 이념상에서나 실천상에서나 통일전선의 대로에서 우리와 손을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 . .

우리는 교리에서 하늘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것을 반대하고 사람자체를 믿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점다른 종교들에서처럼 하늘이나 신의 초자연성과 초인간성을 운운하면서 봉건사회제도나 봉건적 신분제도를 하늘이 정한 질서라고 설교하지 않고 있는 사실을 놓고 천도교가 인간의 존중과 평등을 주장하는 진보적인 종교로 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보았다.

물론 나는 우리 혁명의 주체적인 노선을 세워나가면서 기성의 이러저러한 이론과 운동에 관심을 가지는 가운데 민족종교로서의 천도교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서도 일정하게 긍정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철저히 우리 나라 역사발전의 특수성과 우리 혁명이 처하고 있는 환경, 선행운동에 대한 역사적 분석으로부터 출발하여 그리고 우리의 민족적인 전통과 계급역량관계를 충분히 타산한 과학적 기초 위에서 주체학설을 세우고 우리 혁명의 진로를 탐색하였으며 그에 부합되는 전략전술을 작성하였다.

새 세대 공산주의자들은 결코 어떤 하늘의 도움이나 천명에 따라 혁명한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우리 인민자신의 힘을 믿고 그에 의거하여 싸워야 한다는 이론적 대의와 신념을 가지고 투쟁의 길에 나섰다.≫(민족종교 천도교를 두고, 세기와 더불어 5권)

세째, 종교에 대한 편견을 시정해주시는 대목이다.

≪≪그 망할놈의 천불교 때문에 내도산사람들이 그만 다 환장하였소. 종교를 아편이라고 한 맑스의 말은 정말 명언중의 명언인 것 같소. 이런 종교쟁이들을 새 사상으로 개조하는 것이 과연 필요하며 가능하겠는가 하는 거요.

이제우는 이렇게 푸념하면서 내도산사람들의 얼을 다 뽑아서는 ≪덩덕궁≫에 불을 지르고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치밀 때도 있다고 고백하였다.

나는 이제우의 관점이 협애하다고 비판하였다.

≪종교를 아편이라고 한 맑스의 명제를 나는 물론 부정하지 않소. 그러나 이 명제를 어떤 경우에나 다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요. 일본에 천벌을 내리고 조선민족에 행복을 내려달라고 비는 천불교에다 그래 아편이라는 감투를 함부로 씌울 수 있겠소? 나는 천불교를 애국적인 종교라고 생각하며 이 교의 신자들을 다 애국자라고 생각하오. 우리가 할 일이 있다면 이 애국자들을 하나의 역량으로 묶어세우는 것뿐이요.≫

나는 이제우와 앉아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었다. 그 과정에서 천불교를 타도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반일감정을 적극 지지해주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래서 그곳에 한 열흘가량 물러있으면서 마을사람들과의 사업을 하였다. 종교를 믿는 것으로는 조국을 광복하지 못한다는 나의 말을 천불교신자들은 쉽게 긍정하였다.≫(조직을 확대하기 위하여, 세기와 더불어 1권)

이동학이창선   ≪내가 그래서 이창선의 입대를 거침없이 승인하자 이동학은 불공정한 판결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볼이 부어 말하였다.

사령관동지, 종교쟁이가 빨치산을 하면 얼마나 잘하겠습니까. 근로청년들도 디글디글한데 하필이면 저런 천도쟁이를 받아들여가지고 우리 대오의 구성성분을 어지럽힐 필요가 있습니까?

나는 농담절반, 진담절반의 말로 이동학을 나무랐다.

≪동무의 눈은 알다가도 모르겠소. 이제순이가 인재라는 것은 제꺽 알아보았는데 저 사람이 보배라는건 알아보지 못하니 말이요. 사팔뜨기가 아닌데 어떤 때는 왕청같이 비뚤어지게 보거든.≫

맑스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종교는 아편이라구요. 저따위 천도쟁이가 보배는 무슨 보배란 말입니까? 우환단지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겠습니다.

종교인에 대한 그의 편견은 확실히 지나쳤다.

 나는 진지하게 그를 설복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종교를 아편이라고 한 맑스의 명제를 극단적으로, 일면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그 명제는 종교적 환상에 유혹당하는 것을 경계하라는 의미에서 한 말이지 종교인 일반을 배척하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애국적 종교인이라면 그가 어떤 사람이건 다 포섭하고 손을 잡아야 한다, 우리 유격대는 항일구국을 자기의 첫째가는 사명으로 삼고 있은 애국적 무장력이며 노동자, 농민만이 아니라 전체 조선민족을 위하여 싸우는 인민의 군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유격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우리 공산주의자들이다, 그렇지만 공산주의자들이 핵심적 역할을 하는 무장력이라고 하여 다른 계층이나 세력을 배제하자는 것은 아니다, 설사 종교인이라 하더라도 그가 원한다면 주저없이 우리의 무장대오에 받아들여야 한다, 동무는 지금 우리가 어떤 호박을 잡았는지 아직 모르고 있다, 저 청년의 줄을 타면 갑산, 풍산, 삼수 지방의 천도교도들속에 조국광복회의 씨앗을 뿌릴 수 있고 나아가서는 영북의 광활한 대지를 우리 세상으로 만들 수 있다, 이제 두고보면 저 청년의 가치를 알게 될 테니 그를 잘 대해주고 귀중히 보호해주라고 말해주었다.≫(박인진도정, 세기와 더불어 5권)

네째, 종교인들의 방조와 관련한 대목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성장과정에 기독교적인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는가고 묻는데 나는 종교적 영향은 받지 않았지만 기독교신자들에게서 인간적으로 도움은 많이 받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상적 영향도 주었다.≫(나의 어머니, 세기와 더불어 1권)

손정도목사   ≪손정도목사는 자기 자식이 감옥에 있다가 나온 것처럼 기뻐하면서 나를 맞아주었다.

≪군벌이 자네를 일본놈들에게 넘겨줄가봐 우리는 은근히 마음을 조이었네. 형을 지지 않고 무사히 풀려나왔으니 천만다행일세.≫

목사님께서 후원을 잘 해주신 덕에 저는 감옥생활을 한결 헐하게 했습니다. 저 때문에 옥리들에게 돈도 많이 찔러주셨다는데 그 신세를 무엇으로 갚을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은혜를 일평생 잊지 않겠습니다.≫(손정도목사, 세기와 더불어 2권)

다섯째, 천도교와의 통일전선에 대한 대목이다.

박인진은 우리가 백두산 청림속에서 조국해방을 위한 도를 닦으며 ≪화엄경≫이나 ≪동경대전≫보다 더 사활적인 민족재생의 대경륜인 ≪조국광복회10대강령≫까지 마련해놓고 수많은 젊은이들을 군사로 키우는 모습만 보아도 기운이 부쩍부쩍 난다고 하였다. . . .

≪나는 50년 세월을 살아오면서 알지 못했고 보지 못했던 것을 여기 와서 처음 알고 처음 봤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밀영에 완전히 매혹됐습니다. 이제는 내가 해야 할 바도 똑바로 알았고 결심도 섰습니다. 내 이제 최린을 찾아가서 모든 천도교도들을 조국광복회에 끌어들이는 거사를 치르겠습니다. 그 거사를 성사시키지 못하면 내 산하에 있는 영북의 8개 종리원에 속한 천도교인들만이라도 전부 끌어들이겠습니다. 그리고 전국의 피끓는 천도교 청년당원 100만 명도 모두 총을 메고 장군의 수하병정이 되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내 말을 믿어주십시오.≫

이것은 밀영을 떠날 때의 박인진의 말이었다.조국광복회10대강령

밀영을 방문하고 돌아간 박인진은 천도교인들을 조국광복회조직에 인입하기 위한 사업을 정력적으로 밀고 나갔다. 나는 장백의 천도교도들을 조국광복전선에 묶어세우는 한편 1937년 8월에는 직접 삼수종리원에 가서 그곳 종리원장 조완협, 장백종리원장 이전화 등과 협의하여 우리와의 통일전선문제를 적극적으로 추진시켰다. . . .

장군이 건재하고 혁명군이 백두산에 건재하는 한 우리 백의동포들은 반드시 동틀 날을 맞이하게 될거네. 자네들은 이제 백화가 만발하는 ≪한울님≫의 나라에서 살게 될 걸세. 내 눈에는 그 날이 환히 보이네. 암 보이구말구.

연공구국의 길에서 거대한 공적을 세운 박인진도정은 항일혁명이 낳은 애국지사의 한 사람이다. ...

박인진을 각방으로 적극 도와주던 천도교 청년당원이었으며 조선인민혁명군 정치공작원이었던 이창선은 엄혹한 백두산 추위가 가져다준 동상 때문에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그가 동사한 것이 아마 1938년 겨울이었던 것 같다. 최근에 관계부문 일군들은 ≪김빠이≫의 4촌처남의 사진첩에서 자못 놀라운 사진 한 장을 찾아내었다.

이창선이 천도교 청년당원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결의형제들과 함께 찍은 사진인데 그 중의 한 사람이 신념과 의지의 화신인 이인모라는 것이다. 그는 박도정의 많은 제자들 중 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러고보면 박인진은 희세의 애국자들을 키운 은사이기도 하다.≫(박인진도정, 세기와 더불어 5)

≪3.1 운동 때에도 천도교 세력은 큰 역할을 하였다. 3.1 인민봉기의 주력군은 물론 광범한 노농대중과 청년학생, 지식인 계층이었다. 하지만 그 봉기를 발단시켰던 민족대표들 가운데 기독교도, 불교도들과 함께 천도교인이 들어가 있었으며 당초의 발기를 천도교 측에서 하였다는 사실과 300만이나 되는 전국 천도교도들의 과반수가 시위투쟁에 떨쳐나섰던 사실들은 그 반일투쟁에서 천도교측의 역할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천도교의 투철한 저항정신은 우리가 그와의 통일전선을 중시하게 한 주되는 요인의 하나였다.≫(민족종교 천도교를 두고, 세기와 더불어 5권)

여섯째, 종교인과의 사업에서 주의할 점과 관련하여 말씀하신 일화이다.

≪그가 우리 밀영에 들어와서 가장 큰 자극을 받은 것은 내가 그에게 청수봉전의 기회를 마련해준 순간이었다. . . .

박인진은 손님으로서의 예절을 지켜 굳이 사양했지만 나는 ≪조국광복회10대강령≫에도 인륜적 평등과 신앙의 자유 보장을 밝히고 있는데 무신자의 앞이라 하여 신앙심이 남달리 강한 도정님이 평시의 법도를 단 한 번만이라도 소홀히 하게 되면 우리가 오히려 미안하지 않느냐고 하면서 그에게 청수봉전을 거듭 권하였다.

천도교 도정 박인진  결국 박도정은 청수를 모시고 앉아 21자의 주문을 외웠다. 거듭 세 번을 외운 다음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나서 그는 숙연한 기색으로 말하였다.

≪백두산곡의 청수가 참 별맛입니다. 우리 나라 조종이 마시던 물로 청수봉전을 하였으니 오늘저녁 일은 평생 두고 잊지 못하겠습니다. 장군과 같은 무인이 우리교의 법도를 이처럼 존중해주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정말 감개무량합니다.

그러고보면 박인진은 반공에 오염된 교인들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자들이 종교와 종교상의 모든 법도들을 무시하거나 배척하거나 증오한다고 생각해온 것이 분명하였다.≫(박인진도정, 세기와 더불어 5)

어느 해인가 미국에 사는 교포 김성락목사가 조국을 방문하였을 때 나는 그와의 오찬석상에서 식전기도를 드리도록 권고한 적이 있다. 그때 김성락목사는 우리가 그런 권고를 하는데 대하여 몹시 놀랍게 생각하였다. 공산국가의 주석이 어쩌면 종교인의 식전기도에까지 관심을 돌리는가, 이것이야말로 수수께끼 같은 일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날 내가 김성락목사에게 식전기도를 드리도록 권고한 것은 그 무슨 생색을 내자는 것도 아니었고 우리가 종교와 종교신자들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선전하자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다만 손님을 손님답게 대하고 싶은 주인으로서의 예절과 일생을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살아온 그가 조국에 와서도 구속을 받지 않고 교도를 지킬 수 있게 하자는 순수한 인도주의적 감정을 가지고 그런 권고를 했을 뿐이었다.≫(박인진도정, 세기와 더불어 5)

일곱째, 종교에 대하여 총괄하시며 하시는 말씀이다.

우리 나라 헌법에 명기되어 있는 신앙의 자유에 대한 조항은 빈말공부나 비누거품 같은 약속이 아니다.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신앙의 자유를 유린해본 적도 없고 종교신자들을 탄압해본 적도 없다. 만일 공화국정권하에서 제재를 받았거나 정치적 시련을 겪은 종교인이 있다면 그것은 조국과 인민의 이익을 팔아먹은 범죄자들과 민족반역자들뿐일 것이다.

해방 후 일부 지방에서 종파분자들이 종교인들을 차별하고 종교자체를 적대적으로 대하는 편향이 발로되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실례들도 없지 않지만 그것은 어디에나 다 있었던 보편적인 현상도 아니었고 더욱이는 중앙의 조직적인 의사나 지령에 의해 발생되었던 폐단도 아니었다.

미제를 반대하는 조국해방 전쟁 직전까지만 하여도 우리 나라에는 수많은 예배당과 절간이 있었다. 나라가 해방된 다음 칠골에 가보니 거기에도 창덕학교시절에 보던 예배당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지금 인민대학습당이 자리잡고 있는 평양의 남산재에는 큰 예배당이 두 개나 있었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도들이라고 자처하는 미국사람들이 비행기를 타고 와서 그 건물들을 다 파괴해버리었다. 부처를 모신 큰 절간과 임자들도 폭탄세례를 받았다. 십자가와 성상, 성경책들은 불타서 재가 되거나 폐허속에 파묻히었다. 교인자신들도 시체가 되어 저승으로 떠나갔다.

보는바와 같이 미국사람들이 예배당도 파괴하고 교인들도 죽이었다. ≪하느님≫은 그러한 만행을 제어하지 못하였다. 이런 이유로 해서 전쟁기간 우리 인민들속에서는 예배당에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적어지게 되었다. 우리의 종교신자들은 ≪하느님≫앞에서 천당에 가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릴 필요를 더는 느끼지 않았다. 종교가 인간의 운명 개척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신자들은 스스로 신앙을 버리고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원리, 사람이 이 세계의 창조자이며 지배자라는 원리에 기초한 주체사상의 신봉자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다음 그들은 성금을 모아 두 번 다시 예배당을 지으려고 서두르지 않았다. 그 대신 살림집과 공장, 학교들을 먼저 건설하였다.

우리의 후대들속에는 ≪하느님≫이나 ≪한울님≫이나 부처님을 믿어야 복도 받고 천당에도 간다고 생각하는 청소년들이 없다. 그들이 신자가 되거나 종교단체에 가입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종교를 나쁘게 보거나 종교인들을 학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국가가 그들에게 무상으로 교회당도 지어주고 생활조건도 보장해주고 있다. 몇 해 전에는 종합대학 역사학부에 종교과도 새로 내왔다. 그 과에서는 종교전문가들을 키워내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 나라에서도 모든 종교단체들과 교인들의 활동은 법적으로 철저히 보호되고 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며 남조선에는 상당히 많은 신자들이 있다고 한다. 그 신자들 중에는 민주, 통일, 평화를 위한 3대 전선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은 애국자들과 투사들이 적지 않다.

지금 남조선과 해외의 종교인들속에서 연공애국인사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그들이 ≪공산당 선언≫을 신봉하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우리와 그들을 결합시켜주고 있는 유대는 애국애족의 사상감정이다.

이러한 유대는 1930년대에도 존재하였다. 애국애족만 있으면 그 어떤 계층과도 손을 잡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조국광복회10대강령≫에 천명된 통일전선의 원칙이었다. 우리는 이 원칙에 따라 박인진도정과도 손을 잡게 되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의 자유에 관한 우리의 사상을 통일전선의 그물속에 종교인들을 끌어넣기 위한 하나의 일시적인 회유책이라고 왜곡선전하고 있다. 이러한 날조는 그 목소리가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통할 수가 없다. 오동진, 손정도, 최동오, 강제하 등의 신자들과 나를 이어주고 있던 친교는 순결한 애국애족의 감정에 기초한 것이었지 그 어떤 책략으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들을 맑스의 신봉자로 만들려고 시도해본 적도 없으며 공산당의 들러리로 내세우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다만 진정으로 그들의 신앙심을 존중했고 그들의 인격과 인권을 존중하여 주었을 뿐이다.≫(박인진도정, 세기와 더불어 5권)  

다음으로, 위대한 주석님의 주체적인 ≪신앙관≫이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민중을 하늘처럼, 신처럼 숭상하신다. 그런 위대한 주석님을 민중이 역시 하늘처럼, 신처럼 존경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위대한 주석님의 혁명적 대중관은 민중의 혁명적 수령관과 본질적으로, 하나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이민위≫, 인민을 하늘같이 여긴다는 이것이 나의 지론이고 좌우명이었다. 인민대중을 혁명과 건설의 주인으로 믿고 그 힘에 의거할 데 대한 주체의 원리야말로 내가 가장 숭상하는 정치적 신앙이며 바로 이것이 나로 하여금 한 생을 인민을 위하여 바치게 한 생활의 본령이었다.≫(머리말, 세기와 더불어 1권)

≪박인진도정이 청수를 모신 뒤 우리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게 된다고 솔직하게 고백한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그 날 박도정은 청수봉전을 치르고 나서 나에게 불쑥 물었다.

≪제가 꼭 여쭈어 알고싶은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가 ≪한울님≫을 숭상하듯이 장군도 숭상하는 대상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도정의 그 질문을 우리에 대한 믿음의 표시로 받아들이고 진지하게 대답하였다.

... 물론 나에게도 신처럼 숭상하는 대상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민이다. 나는 인민을 하늘처럼 여겨왔고 인민을 하느님처럼 섬겨오고 있다. 나의 하느님은 다름아닌 인민이다. 세상에 인민대중처럼 전지전능하고 위력한 힘을 가진 존재는 없다. 그래서 나는 ≪이민위천≫ 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

박인진은 그 대답을 듣고 내가 백두산에 온 보람이 있다, 좀 때늦긴 하지만 진짜 ≪한울님≫이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고 의미심장하게 말하였다. 그리고 천도교 시조 최제우의 ≪인내천≫ 사상이 우리의 생각과 상통한 데가 있다면서 대단히 흡족해하였다.≫(박인진도정, 세기와 더불어 5)

다음으로, 죽은 사람에 대한 산 사람의 도리에 대해 하신 말씀이다. 이 대목에는 위대한 주석님의 영생관이 비껴있다.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자기앞에 부과된 혁명임무에 충실하는 것으로 희생된 전우들에 대한 의리를 다하려고 노력하였다. 나도 역시 혁명임무에 충실하는 것으로 우리의 곁을 떠나간 혁명동지들의 유지를 지키고 그들이 생전에 우리에게 표시하여 준 높은 신임과 기대에 보답하려고 혈전분투하였다. 지금도 나는 이런 입장과 관점을 가지고 당과 인민이 우리에게 맡겨 준 혁명임무 수행에 투신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이것을 죽은 사람들에 대한 산 사람들의 도리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조국해방이라는 대사변을 분기점으로 하여 이 의리의 내용은 새로운 시대적 요구와 조건에 맞게 바할 바 없이 풍부해졌다. 고인들의 유지를 잘 지키면 희생된 전우들앞에서 산 사람으로서의 우애를 다하는 것으로 된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이국산천에 널려 있는 전우들의 유해도 조국으로 옮겨오고 싶어했고 역사의 수풀속에 파묻혀 있는 전우들의 업적도 후대들에게 알려 주고 싶어했다. 나라가 부강해지게 되니 전우들의 동상도 세워 주고 싶어했다. 새로운 도시와 거리들이 생기던 거기에 전우들의 이름을 붙이고 싶어했다.

희생된 전우들에 대한 동지적 의리는 그들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에서도 집중적으로 발양되었다. 우리는 조국에 개선하기 바쁘게 일군들을 파견하여 해외에 널려 있는 혁명가 유자녀들을 조국으로 데려왔다. 모래밭에서 금싸래기들을 주워모으듯이 한 아이, 한 아이 찾아내서는 만경대 혁명자유가족학원에서 공부시켰다. 국내에서 싸운 투사들의 자녀들도 그 학원에 데려다가 새 조선 건설의 역군으로 육성해 냈다.

1970년대에는 우리와 함께 싸우던 전우들의 모습을 후손만대에 길이 전해 주기 위하여 대성산 주작봉에 혁명열사릉을 건설하였다. 형제산 구역의 산머리 산등성이에는 제2의 혁명열사릉이라고 부를 수 있는 애국열사릉이 건립되었다.≫(혁명전우 장울화 2, 세기와 더불어 4권)

혁명열사릉애국열사릉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서거하시었지만 우리 겨레와 진보적 인류의 마음속에 살아계신다. 그런 의미에서 영생하시는 것이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우리 겨레와 진보적 인류를 대표하여 그 어려웠던 시절, 위대한 주석님께서 집무하시었던 금수산의사당을 주체의 성지, 금수산기념궁전으로 개조완성하시었다. 그 금수산기념궁전의 대성산 주작봉에는 백두여장군 김정숙동지와 김혁, 김책과 같은 주체의 충신들이 생전의 모습 그대로, 호위전사처럼 서있는 혁명열사릉이 있다.

지금까지 인류는 예수의 탄생년을 기준으로 하는 서기와 예수의 탄생일을 크리스마스라 하여 최대의 경축일로 삼아왔다. 인류의 자주위업과 더불어 영원불멸할 향도이념 주체사상을 창시하시고 우리 민족과 진보적 인류를 위하여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룩하시며 가장 숭고한 공산주의적 덕성을 지니신 위대한 주석님께서 서거하신 이후, 그 탄생년을 기준으로 주체연호를 제정하고 그 탄생일을 태양절로 경축하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아무나 이러한 수령영생위업을 이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위대한 김정일장군님만이 이 역사적인 위업을 완전무결하게, 그것도 가장 어려웠던 고난의 행군 시절에 이룩하시었던 것이다. 온 세계의 자주화, 온 세계의 주체사상화가 이룩되어갈수록 인류는 서기 대신 주체연호를 사용하고 크리스마스 대신 태양절을 경축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무한히 이어질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영원히 살아계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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