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91(2002)년 8월 8일(목)                                                                                         통일여명 편집국 주관


     
 지난 강좌 보기

차광수와 김책

서정욱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불후의 고전적 노작 ≪세기와 더불어≫에서 빛나는 수령님의 혁명동지에 대한 해설강좌 시간입니다.

오늘은 그 첫시간으로 항일혁명초시기와 해방직후시기에 위대한 수령님을 최측근에서 보좌한 참모장인 차광수와 김책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왜 차광수와 김책이 위대한 수령님의 추억속에 영생하는지, 차광수와 김책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지, 오늘 우리가 두 동지로부터 따라배워야 할 점은 무엇인지를 사색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차광수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차광수를 처음 만나신 것은 1927년 봄이었고 그를 소개해 준 사람은 바로 최창걸이었습니다.

≪길림시절을 회상할 때면 잊을 수 없는 얼굴들이 수없이 떠오르군 한다. 그 얼굴들의 전렬에는 항상 차광수가 서있다.≫(차광수가 찾은 길, 1권)

차광수는 처음 경애하는 수령님의 사상이론적 깊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대뜸 꺼낸 질문이 바로 당시 격렬한 쟁점이었던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동맹문제였다. 물론 수령님께서는 명쾌한 답변으로 차광수를 탄복시키시었습니다.

≪최창걸이 돌아간 다음 한 주일쯤 있다가 불쑥 차광수가 다시 나타났다. 그는 한동안 길림바람을 좀 쐬였노라고 하면서 아닌밤중에 홍두깨라는 식으로 나에게 민족주의자들과의 동맹문제를 어떻게 하겠는가고 물었다. . . .

최창걸  그날 나는 차광수에게 조선의 일부 타락한 민족주의자들이 일제에게 굴복하여 ≪자치≫와 민족개량주의를 설교하고 있지만 양심적인 민족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은 국내와 해외에서 뜻을 굽히지 않고 조선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일제의 야만적 식민지통치를 체험하고 있은 조선의 민족주의자들은 반일정신이 강하다, 그러므로 그런 민족주의자, 민족자본가들과는 손을 잡아야 한다고 말하였다.≫(차광수가 찾은 길, 1권)  

차광수가 찾은 길, 그것은 바로 위대한 영도자를 중심으로 한 참다운 공산주의운동이었습니다.

≪이국땅에서 찬비를 맞으며 걸어갈 때 차광수는 자기에게 힘을 주고 희망을 줄 수 있는 올바른 투쟁노선과 지도자를 목마르게 기다렸노라고 고백하였다.

그는 자기의 경력을 다 소개하고나서 이렇게 부르짖었다.

≪성주, 우리 서로 믿음과 사랑속에 공산주의운동을 할 수 없을가? 분파와 헤게모니싸움이 없이 말이요!≫

차광수의 그 부르짖음은 혁명의 길을 찾아 만리타향을 헤매던 끝에 그가 찾은 인생총화이며 교훈이기도 하였다.≫(차광수가 찾은 길, 1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차광수 등과 함께 1927년 8월 28일에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을 결성하시었으며, 1930년 7월 3일에는 첫 당조직인 건설동지사를 건설하시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준비에 기초하여 1927년 8월 28일 북산공원의 약왕묘 지하실에서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을 결성하는 모임을 가지였다.

모임에는 최창걸, 김원우, 계영춘, 김혁, 차광수, 허률, 박소심, 박근원, 한영애를 비롯한 반제청년동맹 핵심들과 청년공산주의자들이 참가하였다.≫(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1권)

≪우리는 1930년 7월 3일 카륜의 진명학교교실에서 차광수, 김혁, 최창걸, 계영춘, 김원우, 최효일 동무들로 첫 당조직을 무었다.≫(첫 당조직 - 건설동지사, 2권)

차광수는 경애하는 수령님께서 조선혁명의 진로를 밝히시며 위대한 주체사상을 창시하신 역사적인 카륜회의에 참가하였으며 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격동적인 연설을 하였습니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좌절을 당했다고 모두가 가슴치며 통탄하고 있을 때 우리는 여기 카륜에서 조선혁명의 새 출발을 알리는 역사적인 고고지성을 울리었다. 이 여명의 종소리와 함께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새로운 궤도를 따라 매진할 것이다.

동무들, 즉각 무장을 잡고 일제와의 판갈이싸움에 떨쳐나서자!≫(카륜회의, 2권)

혁명영화 ≪조선의 별≫ 중에서 ... 차광수위대한 영도자와 참다운 공산주의운동을 찾은 차광수에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민중속으로 들어갈 것을 제시하시었으며 차광수는 그 위대한 가르침대로 민중속으로 들어가 만주지역의 여러 농촌을 혁명화하며 혁명의 대중적 지반을 축성하는 데서 커다란 공적을 쌓았습니다.

≪≪우로 올라갈 것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자.≫

차광수는 이 말을 혼자소리로 심각하게 되뇌이고나서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있더니 책상을 주먹으로 쾅 하고 내리치면서 ≪그것 참 신통한 발견이요!≫하고 부르짖었다.≫(차광수가 찾은 길, 1권)  

≪그때부터 차광수는 3년유여의 세월 우리와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하였다. 그는 청년학생운동을 개척하고 대중의 혁명화를 다그치며 항일무장투쟁의 기초를 축성하는데서 불멸의 공헌을 하였다. 신안툰, 강동, 교하, 고유수, 카륜, 오가자, 유하지방의 혁명화는 그의 이름과 떼여놓고 생각할 수 없다.≫(차광수가 찾은 길, 1권)  

≪그는 어느 고장에 가나 사람들과 쉽게 친숙해졌다. 군중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성미가 덜렁덜렁하고 지식이 해박하며 말주변이 좋은 그를 무척 따르고 존경하였다.≫(차광수가 찾은 길, 1권)  

≪남만청총대회가 소집되던 그 해 가을에 유하에서 사회과학연구회의 활동에 대한 차광수의 설명을 들은 나는 그 운영방법의 독창성과 참신성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으며 이 연구회를 이끌어나가는 세 전우(최창걸, 차광수, 김혁)를 통이 크고 창조성이 높은 사람들이라고 평가하였다.≫(단합의 이념아래, 2권)

혁명영화 ≪조선의 별≫ 중에서 ... 차광수  차광수는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영도아래 최초의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는데서 중요한 역할을 한 수령님의 참모장이었습니다. 차광수는 첫 전투에서 승리한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연설을 하였습니다.

≪동무들, 싸우니까 얼마나 좋은가. 총이 생기고 식량이 생기고 피복과 신발이 생기고 나는 오늘 저녁에 위대하고 심오한 변증법을 배웠소. 이제 우리는 노획한 총을 나누어 가집시다. 그래서 그 총으로 또 새 적을 쏴눕힙시다. 그러면 더 많은 총이 생길 것이고 식량이 생길 것이오. 기관총과 대포도 생길 것이오. 노획한 양식으로 미대를 채웁시다. 그것을 먹으면서 기운차게 행군해갑시다. 일제가 완전히 소멸되는 그날까지 우리는 오늘처럼 무기와 식량을 그들에게서 받아냅시다. 이것이 우리의 생존방식이고 투쟁방식이 아니겠소.≫(남만으로, 2권)

차광수는 그릇된 노선과 견해에 대하여는 추호의 타협이 없이 날카롭게 비판하였습니다.

≪차광수는 이 무장소조론에 대하여 현대판 프랑끼주의라고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차광수의 견해에 대해서는 나도 동감이었다.≫(남만으로, 2권)

≪그러나 차광수를 비롯한 다른 동무들은 그런 주장들을 즉석에서 일축해버리었다.    당신들은 인류역사에 모권제가 오래동안 존재해왔고 그 모권제의 그늘밑에서 남자들이 여자들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온 시대가 있었다는 걸 인정하는가?(여성중대, 5권)

차광수는 김혁, 최창걸과 함께 혁명적 수령관을 수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참다운 공산주의자입니다. 수령과 대중의 일심단결의 시원을 개척한 점이 차광수의 최대공적입니다.

김혁  ≪김혁은 우리 몰래 차광수, 최창걸 동무들과 의논해가지고 길림일대에 그 노래를 보급하였다. 그때 나는 우리를 별에 비기고 노래까지 지어부르는데 대해 아주 엄하게 꾸짖었다.

≪조선의 별≫이 보급되던 그 무렵부터 우리 동무들은 내 이름도 한별이라고 고쳐불렀다. 저희들끼리 이름을 지어가지고는 내 의향에는 관계없이 ≪한별이, 한별이≫하고 불렀다. 한문자로 표기하면 일성(一星), 즉 한별이라는 뜻이었다.≫(혁명시인 김혁, 2권)

≪내가 김혁, 차광수, 최창걸과 같은 사람들을 그토록 사랑하고 잊지 못해하는 것은 그들에 나에 대한 노래를 짓고 나를 지도자로 내세워서가 아니다. 바로 그들이 우리 민족이 그처럼 절절하게 바라면서도 실현할 수 없었던 통일단결, 우리 인민의 자랑이고 영광이며 무궁무진한 힘의 원천인 참다운 통일단결의 시원을 열어놓고 우리 나라 공산주의운동에서 영도자와 대중의 일심동체를 이룩한 통일단결의 새 역사를 피로써 개척한 선구자들이기 때문이다.≫(혁명시인 김혁, 2권)

차광수는 신념과 의리가 강한 혁명가였으며 혁명적 동지애가 뜨거웠습니다.

≪혁명가의 이상은 고사하고 일신의 목숨조차 보존하기 어려웠던 살벌한 시기에 적의 공세에 위축되거나 겁을 집어먹지 않고 오히려 변복을 해가면서 동지들을 찾아다니며 공산주의자로서의 모색을 계속하고 있는 그의 변함없는 모습에서 나는 커다란 감명을 받았다.≫(준엄한 봄, 2권)

≪김혁, 차광수 등 새 세대 청년공산주의자들을 비롯하여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간고한 항일혁명전쟁시기 우리와 함께 전장에서 싸운 수많은 항일유격대원들은 하나같이 순결한 의리의 소유자, 고상하고 아름다운 도덕의 창조자들이었다.≫(혁명적 의리에 대한 생각, 6권)

≪북만으로 출발할 날짜가 박두해오자 차광수는 나에게 어디서 구해들었는지 알 수 없는 첩약꾸레미를 가져다주면서 토기점골에 다녀오라고 권고하였다. 내가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는 김성주답지 않다고 비난하면서 우리 대장이 자기 어머니도 몰라보는 사람이라면 다시는 말도 걸지 않겠다고 하였다.≫(소사하의 가을, 2권)

차광수는 언제나 위대한 수령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사고하였으며 수령님을 보위하는 투쟁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치었습니다.

≪나는 국민부에서 청년사업을 책임진 고이허를 찾아가 담판을 하려고 마음먹었다. 차광수도 국민부의 비행에 대한 소식을 얻어듣고 몇 명의 반제청년동맹원들과 함께 강홍락의 집으로 달려왔다.

그들은 국민부의 습격대상인 대회준비위원회성원들이 우선 왕청문을 떠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왕청문의 교훈, 1권)

≪차광수는 돈화에 정찰을 나갔다가 전사하였다.≫(나자구의 등판에서, 2권)

수령님께서는 차광수의 전사소식을 전해듣고 누구보다도 애통해 하시었습니다. 차광수를 추억하시는 수령님의 마음이 얼마나 지극하시었던지 꿈까지 꾸시었습니다.

≪그 후 나는 이때의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였다. 안도-무송현경 전투를 치른 후 넉 달이 지나 차광수가 전사하였다는 비보를 받았을 때 맨 선참으로 내가 상기한 것이 바로 그때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왜 차광수에게 그렇게밖에 말하지 못했던가. 다르게 말해서 일어나게 할 수는 없었을까)

하기는 내 자신도 전우들을 잃은 다음 며칠동안 식사도 하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하였다.≫(남만으로)

≪왕대흥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은 후 얼마 안 되어 나는 또다시 실신상태에 빠졌다. 온몸을 통째로 불사르는 것 같은 고열이 오고 이어 환각인지 꿈인지 분간할 수 없는 몽롱한 세계가 펼쳐졌다. 나는 담가를 들고 왕대흥과 함께 오가산령을 넘고 있었다.

담가 위에는 차광수와 주보중이 팔베개를 하고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차광수나 왕대흥이 조금도 죽었다고 생각되지 않는 것이었다. 산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면서도 그것을 조금도 어색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었다.≫(천교령의 눈보라, 3권)

김책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김책을 처음으로 만나신 때는 1940년대 초반 하바로프스크 밀영에서 였습니다.

≪내가 김책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하바로프스크에서 국제당이 소집한 회의를 할 때입니다.≫(혁명가 김책, 8권)

김책은 그간 얼마나 경애하는 수령님을 만나뵙고 싶어하였는지 초면에 눈물까지 흘리었습니다.

≪김책은 통성이 끝난 다음에도 오래도록 내 손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얼굴을 쳐다보니 눈에 눈물이 글썽했습니다. 간도의 조선사람들이 얼마나 그립고 조선인부대들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그 과묵한 사람이 눈물까지 보였겠습니까.

그날은 나도 눈물을 흘리었습니다.≫(혁명가 김책, 8권)

김책은 공산주의운동 초기 종파분자들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김책은 영도권쟁탈로 일관된 파쟁의 내막을 알고는 권력다툼을 일삼는 공산당상층인물들에게 환멸을 느끼었습니다. 그 나날에 감옥에도 잡혀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파쟁속에서 조락해가는 공산주의운동실태를 두고 고민하고 있을 때 이번에는 국제당이 조선공산당을 해산시켰다는 놀라운 소식이 감방안에까지 날아왔습니다. 파쟁으로 피투성이가 된 당이었지만 그 당마저 해산되었다고 하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이제부터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 그리고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김책은 감옥안에서도 감옥밖에 나가서도 이 한 가지 생각만 했다고 합니다.≫(혁명가 김책, 8권)

젊은 시절의 김책김책은 석방된 후 혁명의 결의를 다지며 간도로 갔다. 그리고 ≪길림바람≫의 소문을 들고 수령님을 찾아 길림을 찾았으나 아쉽게도 수령님을 만나뵙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김책은 군벌경찰에 잡혀 죽을 고비를 넘기었습니다.

≪백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한이 있더라도 인민의 기대에 보답하자! 이것이 김책이 허헌선생네 집을 떠나 간도로 들어갈 때 다진 맹세였다고 합니다.≫(혁명가 김책, 8권)

≪김책은 동료들한테서 그런 말을 듣기 바쁘게 나를 찾아 떠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때는 내가 이미 길림을 떠난 뒤였습니다. 그 대신 여관에서 그는 우연히 우리 동무들을 만났습니다. 아마 그들이 김책을 미행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혁명가 김책, 8권)

≪김책은 사형장까지 끌려나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어떤 장교가 와서 쏘지 말라고 호통치더라는 것입니다. 반일사상이 강한 진보적인 장교였던 것 같았습니다.≫(혁명가 김책, 8권)

그 과정에서 김책은 혁명투쟁은 곧 무장투쟁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적들은 맨주먹으로 싸우는 혁명가들을 허재비로 압니다.≫

김책은 웃으면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그는 무장을 하지 못하면 무장한 강도들앞에서 허수아비처럼 무력한 존재가 되고 자기자신마저 지켜낼 수 없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생의 교훈이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김책의 그 말을 듣고 그가 옳은 교훈을 찾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김책의 반생이 도달한 교훈이기도 했지만 혁명투쟁의 일반적 합법칙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혁명가 김책, 8권)

김책은 북만에서 혁명군대를 조직하여 눈부신 활약을 하였습니다.

≪주하에서 유격대를 조직한 때로부터 그는 북만당과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의 주요직책에서 조선혁명과 중국혁명을 위해 눈부신 활약을 하였습니다. 북만의 조중혁명가들과 인민들은 한결같이 김책을 노숙하고 세련된 혁명가로 존경하고 사랑하였습니다.≫(혁명가 김책, 8권)

≪김해산과 이광림이 주보중과 함께 5군의 기초를 닦아놓은 사람들이면 김책, 허형식은 장수전, 조상지와 함께 3군을 건설한 노장들이며 최용건, 이학만, 이영호, 안영, 최일등은 이연록과 함께 4군과 7군을 조직하는데서 기수의 역할을 수행한 큰 공로자들이었다.≫(북만의 전우들을 찾아, 4권)

≪김책이 하얼빈동부와 동북부지방을 포괄하는 빈강일대를 중심무대로 하여 유격활동을 지도하고 있을 때 최용건과 이학만은 완달산줄기를 근거지로 삼고 적의 집단부락들과 후방기지들을 들이치는 끊임없는 습격전을 전개하고 있었다.≫(북만의 전우들을 찾아, 4권)

김책은 위대한 수령님의 조국광복회노선을 북만에서 관철하는 데에 적지않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조국광복회 10대강령  ≪북만의 조국광복회조직건설사업에 대하여 말할 때 김책의 노고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김책은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입수하자 그 강령을 한 자 한 자 목판에 새겨가지고 수백부나 찍어냈다. 그가 손수 찍어낸 ≪조국광복회10대강령≫은 북만의 항일연군부대들과 각현의 지방혁명조직들에 널리 배포되었다. 김책은 여러 차례의 회의들을 통하여 조국광복회조직망을 확대하고 그 조직들을 실천투쟁속에서 단련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세웠다.≫(삼천리 방방곡곡에, 6권)

김책이 유격활동에서 모범으로 삼은 것은 바로 위대한 수령님께서 직접 영솔하시는 동만유격대와 조선인민혁명군이었습니다.

≪그는 내가 북만에 파견한 사람들한테서 동만소식도 듣고 서간도소식도 많이 들었다고 하면서 자기가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의 활동에서 제일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본 것은 관병일치, 상하일치, 군민일치의 기풍이며 사상과 넋에서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남의 나라 땅에서 곁방살이를 하면서도 조국해방을 주되는 투쟁강령으로 내들고 조선사람은 조선의 해방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정정당당하게 주장해온 자주정신이라고 하였습니다.≫(혁명가 김책, 8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책의 자주적인 관점을 높이 평가하시었습니다.

≪혁명에 대한 견해, 인민에 대한 관점, 자주성에 대한 입장으로부터 시작하여 당건설과 국가건설, 군건설은 물론, 사업방법과 사업작풍에 관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많은 면에서 나와 김책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혁명가 김책, 8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책을 혁명적 동지애가 강하고 원칙적이면서도 가식을 모르는 혁명가였다고 평가하시었습니다.

≪김책은 우리를 거울로 삼았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가 혁명가의 표본이었습니다.

그는 범같은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고 있었으나 사실상 그 누구보다도 대원들을 사랑하는 정치일군이었습니다. 그가 총가목에 대한 일화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지만 그와 비슷한 상하관계상의 일화들은 그에게도 얼마든지 있었습니다.≫(혁명가 김책, 8권)

≪낮에 문건을 넘겨받을 때 김책은 벌써 그 통신원의 옷이 해진 것을 보고 기워줄 궁리를 했던 것입니다. 자기 부대의 대원도 아니고 딴 부대의 대원이었는데 친형이나 친아버지처럼 그 사람을 돌봐 주었던 말입니다.≫(혁명가 김책, 8권)

≪김책을 매우 엄하고 무서운 사람이라고 말하는 일군들도 있지만 사실 그가 무섭게 구는 것은 건달군들과 아첨쟁이들, 불평분자들, 이기주의자들, 탐위분자들과 종파쟁이들 앞에서였지 아래일군들과 인민들 앞에서는 무한히 인자하고 겸손하였습니다.≫(혁명가 김책, 8권)

≪16년 만에 짚신바람으로 찾아온 아들을 데리고 김책이 내 방에 나타났을 때 나는 눈물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날은 김책이보다 내가 더 울었습니다. 김책 자신도 속으로야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겠습니까.≫(혁명가 김책, 8권)

김책은 해방이후 위대한 수령님의 뜻을 받들어 모든 분야에서 헌신분투하였습니다.

≪해방 후 조국에 돌아와서도 김책은 사방으로 뛰어다니면서 당건설도 하고 군건설도 하고 국가건설도 하고 산업건설도 하느라 편히 지낸 날이 없었습니다.≫(혁명가 김책, 8권)

≪김책은 남의 뒤꽁무니에서 우물거리는 것을 제일 싫어하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선봉에서 달려나갔습니다. 우리 나라 산업건설에서 김책이 해놓은 일이 적지 않습니다. 나는 경제관리를 잘하지 못하는 공장, 기업소들을 볼 때면 속으로 김책이 만일 이걸 안다면, 김책이 만일 이걸 안다면 하는 생각을 하군 합니다. 그가 산업상으로 일할 때 우리 나라 경제는 치차처럼 잘 맞물려 돌아갔습니다.≫(혁명가 김책, 8권)

김책의 가장 큰 공헌은 위대한 수령님을 조선혁명의 구심으로 높이 모시는 데서 커다란 역할을 한 것입니다.

≪북만부대에서 높은 직급을 가지고 있던 김책은 나이로 보나 혁명투쟁경력으로 보나 만주빨치산의 조선인군정간부들 중에서 좌상대접을 받을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또 나로 말하면 그때에는 아직 국가수반도 아니고 당총비서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김책은 쏘련사람들앞에서나 중국사람들앞에서나 나를 조선혁명의 대표자로, 지도자로 내세웠습니다.≫(혁명가 김책, 8권)

≪길림시절에 새 세대의 청년공산주의자들이 나를 영도의 중심으로 내세웠다면 1930년대와 1940년대 전반기에는 김책을 비롯한 항일혁명투자들이 나를 통일단결의 중심으로 내세우고 조선혁명의 주체노선을 관철하기 위해 투쟁하였습니다.

나를 통일단결의 중심으로 내세우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 나라 혁명에서는 영도중심이 형성되었습니다. 이 영도중심을 꾸리는데서 김책은 특출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공산주의운동과 민족해방투쟁역사에서 김책이 차지하는 몫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혁명가 김책, 8권)

김책은 위대한 수령님께 충성을 다한 충신 중의 충신입니다.

≪김책이 나에게 얼마나 충실했는가 하는 이야기를 하자면 하루종일 해도 못다할 것입니다.≫(혁명가 김책, 8권)

≪김책이 수령의 권위를 어느 정도로 절대화했는가 하는 것은 그가 내 전화를 받을 때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단추를 채운 다음에야 통화를 시작하군 한 사실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병석에 있을 때에도 나한테서 오는 전화만은 자리에서 일어나 받군 했습니다. 옆에 사람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노상 그렇게 했습니다. 수령을 진심으로 존경하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하지 못합니다.≫(혁명가 김책, 8권)

≪김책은 내가 없으면 자기도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혁명가 김책, 8권)

≪며칠후 김책은 또다시 전화로 최고사령부의 위치를 옮겨달라는 건의를 하였습니다.

나는 동무들도 적들의 공격을 그만큼 지체시켰으면 되었으니 이제는 후퇴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책은 후퇴하지 않고 당원증만 보내왔습니다. 결사전을 하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나는 전화로 김책을 찾아 동무가 들어오지 않으면 나도 평양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때에야 김책은 방어부대들을 데리고 평양으로 들어왔습니다. 인민군대가 재진격을 시작했을 때에야 그는 당원증을 찾아갔습니다.≫(혁명가 김책, 8권)

≪우리가 일본군에 대한 최후공격작전준비를 하고 있을 때에는 김책이 나도 모르게 국제연합군의 조선지휘관들만 따로 모아놓고 회의를 하였습니다. 나의 신변호위와 관련된 회의였습니다. 각자가 경각성을 높여 김일성동지의 신변호위를 잘해야겠다, 김일성동지는 조선인민과 조선혁명가들을 대표하는 영도자이니 목숨으로 옹위해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혁명가 김책, 8권)

김책은 조국해방전쟁 시기 과로 때문에 순직하였습니다.

≪김책이 우리의 곁을 떠난 것은 과로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안고 있은 부담이 너무나 컸습니다.≫(혁명가 김책, 8권)

≪나는 전날밤 그를 내곁에서 재워보내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그가 내곁에서 자고 갔으면 밤을 새우지 않았을 것이고 심장마비에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후회한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김책이 나를 찾아온 날 밤 식사를 나누지 못하고 돌려보낸 것이었습니다. 밥 한 그릇을 먹여보냈다고 해서 내 슬픔이 덜어질 리는 없겠지만 어쩐지 그게 지금까지도 속에 얹혀서 내려가지 않습니다.≫(혁명가 김책, 8권)

김책은 세상을 떠났지만 김책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믿음과 사랑은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내가 그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김책의 묘앞까지 차를 타고 가지 못합니다. 그의 묘지를 찾을 때는 차를 타고가는 것이 죄스러워 대성산밑에서 내려 걸어서 올라가군 했습니다.

김책이 저 세상사람이라고 해서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내 마음이야 변할 수 없지 않습니까.≫(혁명가 김책, 8권)

≪김책이 서거한 다음 우리는 그를 영원히 추억하기 위하여 그의 고향 가까이에 있는 성진시와 그의 심혈이 깃든 청진제철소, 그리고 평양공업대학을 각각 김책시, 김책제철소, 김책공업대학으로 명명하고 인민군대의 한 군관학교도 그의 이름으로 부르기로 하였습니다. 김책시에는 그의 동상도 세웠습니다.≫(혁명가 김책, 8권)

김일성주석님을 보좌하는 김책동지김일성주석님을 보좌하는 김책동지 

 

 

 

 

 

김일성주석님을 보좌하는 김책동지김일성주석님을 보좌하는 김책동지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어버이수령님께서 서거하신 후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시었습니다.

≪금수산의사당에는 수령님께서 애용하시던 금고가 있었습니다. 수령님께서 그 금고안에 무엇을 보관하시었는가 하는 것은 부관들을 비롯하여 그 누구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수령님께서 서거하신 다음 그 금고를 열어보려고 하였으나 열쇠를 찾지 못하여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며칠 전에 그 열쇠를 찾아 금고를 열어보니 그 안에 수령님께서…김책동지와 함께 찍으신 사진이 있었습니다….

원래 수령님께서는 사진들을 다 당역사연구소에 보관하시었습니다. 이것은 수령님께서 전우인 김책동지를 얼마나 못잊어하시었는가 하는 것을 잘 말하여 줍니다….≫(혁명가 김책, 8권) 

 

This counter provided for free from HTMLcounter.com! copyleft © 백두산편집부
이 문서는 Internet Explorer v5.0을 기준으로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