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회고록으로 보는 세상이야기』 중에서


 
1. 《세기와 더불어》 주체사상 둘러보기    

 체 게바라, 혁명의 진정성은? 

 

감자꽃

 

체 게바라의 《달빛》은 그가 적에게 포위당해 최후의 순간을 기다리며 쓴 시같다.

달빛비친 나무사이로 보이는 감자밭은 김일성주석의 회고록에도 비슷한 장면으로 나온다. 《피바다》 초연을 하고 백두산아래 첫동네 무송현 남단 만강을 김일성항일유격대원들이 지나갈 때 달빛아래 때늦은 자주빛감자꽃이 들을 가득 메워 피여있었다. 때는 19368. 체 게바라가 생의 마지막순간 바라보던 1967 10월의 감자밭. 이 두 영상이 하나로 포개여지면서 나는 이 지구의 량극단에 있는 두 감자밭을 《민중》이란 이름으로 아로새기고싶어 이 글을 쓴다.

 

《달빛》

 

이른 저녁

희미한 달빛아래

숲속 은신처에 포위된

우리는

이제 37명뿐이다

 

나무사이로

감자밭이 보인다

더이상,

탈출구가 없다

 

만강은 만주 어느 지역보다도 감자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다.

김일성주석은 피바다공연을 끝내고 만강을 지나가던 추억을 이렇게 회고하고있다.

《동강에서 무송현성전투승리를 총화하는 반일부대지휘관들과의 련합회의를 끝낸 다음 나는 주력부대를 데리고 백두산의 서쪽 위성구역인 만강으로 향하였다.

만강은 드넓은 고원우에 올라앉아있는 백두산아래의 첫동네이며 무송현 남단의 마을이다. 여기서 남쪽으로 되골령을 넘으면 장백땅이고 서남쪽으로 로령을 넘으면 림강땅이다.(5 4849페지)

감자밭사이로 구름에 달가듯 유격대원들이 일렬종대로 행군하는 모습은 한폭의 그림같다.

 

《마찌니의 님은 이딸리아》

 

아래 시는 한룡운 《님의 침묵》 서시 《군말》이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긔룬것은 다 님이다/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철학은 칸트의 님이다/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마찌니의 님은 이딸리아이다/님은 내가 사랑할뿐만아니라 나를 사랑한다

 

여기서 말하는 《님》은 하나로 고정된 의미가 아닌 다양한 뜻으로 해석된다. 《긔룬것》은 다 님이라는것이다. 《긔룬》은 《그리움》과 《길음》의 두 말의 의미를 합성한것으로 풀이된다. 그렇다면 만해의 시는 군말의 군말을 이어갈 여지를 우리에게 남겨놓고있다고 볼수 있다. 긔림은 봄비와 장미같은 자연속에도 있고, 중생과 석가같은 종교속에도 있고, 칸트의 철학같은 사상속에도 있고, 이딸리아와 마찌니와 같은 력사와 혁명속에도 있다. 더우기 인간은 그 어느 존재보다 누구에게나 나름대로 《긔루는것》이 있기때문이다. 님을 《긔린다》는것은 랑만을 넘어 자기의 목숨까지 바칠수 있는것이다.

19201930년대 조선의 문인들은 한결같이 님을 절규하였다. 소월은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하면서 님을 향해 절규하다 요절하였다. 육사는 흰말 타고 광야를 달려오는 님을 긔리였다. 님이 되는데는 조건이 있다. 《내가 님을 긔룰뿐만아니라 님도 나를 긔리면》 모두 님으로서 성립되기에 필요충분한 조건이다. 그런데 소월의 시는 님을 절규하다 부정이 부정으로 끝나고마는데 만해의 시는 부정을 통해 긍정에 이르고 그것을 다시 부정함으로써 보다 큰 긍정으로 나아가게 하는 《존재》로서 《부재(不在)》한 상태로만 존재한다.

식민지지배하에서 존재하지 않는 《님》은 조국이 존재함으로써만 드러난다. 일제식민지현실속에 시인자신이 추구하고 민족이 갈망하는 진정한 조국(《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부정) 그러나 현실의 관점에서는 식민지조국을 어쩔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인다. 일본제국주의와 싸워 조국의 해방으로 《님》을 만났다 하더라도(긍정) 그안에 품고있는 모순(례를 들면 분단과 같은)과 싸우기 위하여 《님》과 다시 리별하지 않으면 안된다(부정)는 론리가 이뤄진다. 이처럼 만해에게 있어서 《님》이란 끊임없는 부정을 통하여 더 큰 긍정으로 나아가는 살아움직이는 개념으로 식민지시대에만 국한된 고정불변한 개념은 아니다.

민족과 혁명이란 두 개념은 어떤 점에서 불가상용적개념이다. 그런 두 대립되는 님을 한꺼번에 같이 가슴에 안고산 혁명가가 있는가 하면, 억눌린 민중의 해방만을 님으로 사랑한 혁명가들이 있는가 하면, 민족의 해방만을 님으로 사랑한 혁명가도 있다.

마찌니는 1831년 이딸리아가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고있을 때에 청년당을 만들어 외세로부터의 독립과 국가통일을 위한 운동을 전개한 이딸리아민족주의의 화신이다. 그의 님은 민족과 그 민족의 해방이였다. 그러나 남아메리카의 체 게바라의 님은 민족이 아니고 민중과 계급만의 혁명이였다. 그래서 그는 아르헨띠나에서 태여나 꾸바에 가 혁명을 성공시켰으나 볼리비아혁명을 위하여 투쟁하다 죽었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마찌니같은 민족이란 님은 없었다. 그의 님은 민중이요, 혁명이였다.

 

체 게바라가 사랑한 꾸바

 

체 게바라(Che Guevara, 1928. 6. 141967. 10. 9)는 아르헨띠나에서 태여났다. 원래 이름은 에르네스또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 문화어: 에르네스또 체 게바라)이다. 그가 남긴 주옥같은 시어들은 그가 긔린 님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님을 그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림같이 전한다.

 

《꾸바》

 

나는/ 꾸바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모든것을/ 만져보고싶었고/ 모든것을/ 느끼고싶었고/ 그리고/ 모든것을 알고싶었다

 

《사랑》

 

민중에 대한 사랑

인류에 대한 사랑

정의감

그리고 인간에 대한

관대함없이는

진정한 혁명가가 될수 없다

 

《참된 삶》

 

북아메리카의 백만장자가/ 되는것보다는/ 차라리/ 문맹의 인디안이/ 되는것이 낫다

 

《유언》

 

/지금/ 혁명의 불멸성을/ 생각하고있다

 

혁명은 결코 혁명으로부터 시작하는것이 아니다. 사랑할줄 알고 춤출줄 알고 자연속에서 자기를 잃을줄도 아는 인간만이 진정한 혁명가가 될수 있다. 세상을 싫어하고 인간을 기피하는 염세주의자가 혁명가가 되였다는 얘기는 없다. 젊은 남아메리카의 혁명가 체 게바라는 의학도로서 원래 새로운것을 찾아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랑만적인 려행가였다고 그의 자서전에서 말하고있다. 모터찌클을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놀기 좋아하던, 바람기마저 있던 풍류객같은 인물이 체 게바라였다고 그의 친구들은 그를 회고하고있다. 그의 바람기, 그것이 바로 혁명의 불씨일것이다.

자서전 첫 장에 있는 첫 려행을 하던 때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애초에는 코르도바지방의 두세곳만 돌아보려 했다. 그런데 어쩌다가 싼띠아고와 투쿠마, 카타마르카, 라 리오자, 싼 후안, 멘도자, 싼 루시스, 부에노스아이레스, 미라마르까지 가보자는 충동적인 시도로 발전하게 되였다(자서전 28)고 쓰고있다. 그가 첫 려행을 떠날 시기의 나이는 23살이였다. 이 려행은 그가 누구를 만나기 위해 어느곳을 특별히 가고싶어서 떠난 려행은 아니였다. 그의 표현대로 하면 자서전 첫 장의 제목그대로 《충동적인 시도》에 불과했다. 이 첫 려행은 체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떠나 넓은 세계를 향해 떠나가는 첫 충동적려행이였다.

오토바이를 타는 재미 그리고 처음 보는 남아메리카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처음에는 황홀했을것이다. 그의 친구 까를로스 페레르 소리쟈(73)에게 인디안처녀들의 아름다움으로 그가 동행하기를 유혹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려행은 계속될수록 단순한 려행이 아니고 《목격자》가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소리쟈의 기차려행회고에 의하면 《당시 호주머니에는 7 000페소정도가 전재산(당시 환률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지만 현재시세로 1 000US$가 채 안된 금액정도)이였고 가방에는 옷가지보다는 책이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레띠로역을 떠난 우리는 볼리비아의 라빠스에 머물다 뻬루와 에꽈도르로 들어갔다. 에꽈도르에 도착한 후 나는 베네수엘라의 까라까스에 머물게 되였고 그는 과떼말라를 거쳐 메히꼬로 건너가 라울 까스뜨로를 만나게 된다.》 이것이 그의 인생을 바꾼 려정이 된것이다.

 

 

려행자에서 목격자로, 《배움의 천리길》

 

김일성주석이 1923 3월에 걸은 《배움의 천리길》은 어떤 의미에서 성년식과 같았다.

김주석의 아버지 김형직선생은 조국의 현실을 알아야 한다고 12살 어린 자제를 천리길을 걷게 한다. 이것을 두고 《배움의 천리길》이라 하여 금년에는 이에 대한 기념우표까지 발행되였다.

중국 팔도구를 떠나 압록강을 건너 조선의 포평에서부터 고향 만경대까지의 천리길을 걸으면서 일제식민지통치하에서 조선인민들이 겪고있는 비참한 처지에 대한 생활체험을 한다. 북의 청소년학생들은 해마다 3월이면 수천명규모의 《배움의 천리길》답사행군대를 조직하여 천리길로정을 밟고있다.

어린 김주석의 진정한 배움은 목적지 고향에서 있었던것이 아니고 천리길을 걷는 이 과정속에 있었다. 혁명도 결국 끝없이 진행되는 과정이 아닐가? 그러나 우리는 혁명의 결과를 늘 기대하고 실망하기도 기뻐하기도 하지 않는가?

체 게바라가 집을 떠난 모터찌클려행은 이에 비하면 훨씬 랑만적이였다. 그러나 랑만으로 시작한 려행이 점점 현실로 변한다. 같이 려행한 그의 친구의 말에 의하면 《그라나도와 함께 한 모터찌클려행이 젊음을 발산하는 랑만적인 려행길이였다면 우리의 기차려행은 중남아메리카빈민들, 특히 토착원주민들과 호흡을 함께 하며 고단한 그들의 삶을 직접 체험하는 경험이였다. 랑만적인 청년 체를 혁명가로 변신하게 만든 려행이였다는 말이다.

체의 일생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할수 있다. 그의 유년기는 랑만적인 젊은이들의 삶의 표상이라고 한다면 그의 꾸바투쟁은 혁명가로서 승리자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볼리비아투쟁은 비록 실패했지만 20세기 저항의 상징으로 우리곁에 살아숨쉬고있다는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주석의 경우는 10 초반의 나이부터 혁명의 길에 나섰으며 이와 같은 랑만은 없었다. 그 나이부터 《고난의 행군》은 시작되였다.

체가 처음 목격한 대상은 작은 다리밑에서 지내는 떠돌이남자였다. 이 남자는 차코지방에서 면화따는 일을 하다가 싼 후안으로 가서 포도수확일을 할것이라는 남자였다. 체 게바라는 려행을 계속할수록 이런 인간군상들을 수도 없이 만나게 되였으며 그래서 그의 려행은 그의 인생교육장이 되였다. 수렁속에 빠져사는 민중들의 바다를 지나면서 그는 드디여 26살때에는 제국주의자와 싸우기 위해 과떼말라에서 총을 들고말았다. 28살때에는 꾸바로 떠나는 혁명가들의 배를 타게 하였다. 드디여 31살때에는 꾸바혁명을 성공시킨다. 마침내 39살때에 볼리비아밀림에서 미제와 싸우다 전사한다. 이러한 체를 싸르트르는 《20세기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 부른다. 싸르트르의 이 말도 전세계혁명사를 다 읽지 못한 단견의 결과가 아닐가?

 

김일성주석과 호지명주석

 

마찌니와 체 게바라와는 달리 민족주의와 국제주의라는 두개의 님을 가지고 평생을 산 인물이 김성주소년, 김일성주석이다.

김일성주석은 《진정한 공산주의자도 참다운 애국자이며 또 진정한 민족주의자도 참다운 애국자라고 보는것은 나의 변함없는 신조이다.(4 462페지)라고 주장하고있다.

당시에나 지금이나 서로 불가상용적인 이 두개의 님을 하나의 님으로 묶어낸것이라 할수 있다. 이밖에도 국제주의와 지역주의를 하나로 엮어내여 주체를 세워나갔다. 김일성주석의 독특한 종합주의때문이라고 믿는다.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전편에 흐르고있는 기본틀은 이런 종합주의에 있다고 보는데서 크게 벗어나있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마오이즘》(Maoism)에 대하여 이를 《키미즘》〔Kimism(KIm Il Sung initial)〕이라고 국제화해야 한다고 본다. 키미즘이 마오이즘보다 우월함은 1970년대 일부 학자들에 의하여 연구발표된바도 있다. 이에 대하여서는 다음기회에 차례로 소개하려 한다.

이러한 두개의 님을 동시에 긔룬 혁명가 김일성주석을 가장 닮은 혁명가는 윁남의 호지명주석이였다. 분명 호지명의 님은 윁남이였다. 서양제국주의로부터 민족의 해방과 계급의 해방이란 두 님을 동시에 긔루었다는 점에서 조선의 김일성주석과 닮은 점이 있다.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반제, 반식민지투쟁에 생애를 바친 아시아의 대표적인 혁명가이다.(, 1997, 149)

호지명의 본명은 《구엔 신 군》이다. 김일성》이라는 명함처럼 혁명이 붙여준 이름이다. 김일성주석과 호지명주석은 일제와 미제뿐만아니라 같은 공산국가들로부터도 자기 민족과 국가의 존엄성과 자주를 지키려 했었다. 외국군대의 남부윁남침입을 반대하고 윁남문제는 윁남인스스로 결정, 해결해야 한다는 호지명의 투쟁은 《조선사람은 조선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김일성주석의 신념, 투쟁을 닮았다고 볼수 있다.

이들의 님은 조국과 혁명이였다.

 

《만고의 애국자는 누구인가를》

 

꾸바의 까스뜨로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에 서로 고생한 후일담을 나눈적이 있다. 이자리에서 까스뜨로가 김일성주석에게 유격활동기간중 식량문제와 피복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느냐고 묻는다.

김주석의 고생담을 다 들은 까스뜨로는 탄복을 하면서 우리는 그렇게 고생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꾸바는 중국 동북지방이나 조선과는 달리 기후가 매우 더운 나라입니다. 그리고 먹을것도 많습니다.

김일성사령관부대가 항일유격활동을 한 북위 43도 훨씬 상위지역인 동만과 북만일대는 한해의 반이 동토로 변해버리는 곳이다.

김일성주석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술회하고있다.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하여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친 사람들만이 조국이 얼마나 귀중하고 조국에로 다시 가는 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시련에 찬 길인가를 진정 뼈에 사무치게 느낀다고 말할수 있다.(3권의 머리글)

《나는 한평생 민족의 존엄을 위하여 싸워왔다. 나의 일생은 민족의 존엄과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력사였다고 말할수 있다. 우리 민족을 해치거나 우리 나라의 자주권을 건드리는 놈들을 나는 한번도 용서하지 않았다.(4 115페지)

남아메리카는, 그리고 호지명이 싸운 윁남의 경우는 자연환경자체가 혁명가들로 하여금 추위와 배고픔으로 시달리게 하지는 않았기때문에 까스뜨로가 그렇게 말한것이다. 체는 미국이라는 제국주의와의 싸움 그리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세인의 이목이 집중되는 가운데 투쟁을 했기때문에 상대적으로 그의 이름도 쉽게, 빠르게 국제적이 될수 있었을것이다. 체를 두고 《20세기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 한것도 그의 투쟁 전과정이 투명하게 드러나있었기때문이다.

력사가들은 꾸바혁명의 성공은 쟝글과 도시의 결합이라고 했다. 체 게바라가 《뉴욕 타임스》 기자를 유격구아지트로 불러 기자회견을 두번이나 한것은 꾸바국내와 전세계에 혁명을 확산시키는데 기여하였다.

1950년말 세계의 이목은 꾸바에 집중돼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꾸바국내여론을 사로잡는데 언론이 큰 역할을 했었다. 그리고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어내는데 34년이면 족했다.

그러나 김일성사령관이 이끄는 항일유격대는 외로운 투쟁을 하였다. 추위와 배고픔은 말할것도 없고 심지어는 같은 공산권들로부터도 아무런 지원이 없는, 그리고 세계의 주목도 받지 못하는 동북아 밀림과 황야에서 15년이란 그렇게 긴 세월을 싸워 살아남은것이다.

《홀로코스트》만 하더라도 유태인의 그것은 잘 포장되여 세상에 널리 알려져 동정도 받고있지만 우리는 고난의 력사마저 차별을 받고있다. 《위안부》문제만 하더라도 이제야 겨우 국제적으로 알려지고 인정을 받아가고있는 실정이 아닌가?

이에 세계사의 한장에 진실을 남겨놓기 위해서라도 김일성주석의 한생이 장백산 줄기줄기마다, 압록강 굽이굽이마다에 그와 그의 유격대가 흘린 피가 묻어있는 곳을 찾아 확인하고 세계혁명사를 다시 써야 할것이다. 과연 《만고의 애국자》가 누구인지를 알려야 할것이다.

지금 체 게바라는 완전히 세계혁명사의 하나의 브랜드가 되였다. 상품화가 되여 그의 얼굴이 있는 티샤쯔판매수입만 하여도 엄청날것이다.

우리도 리념을 진정으로 초월한다면 우리의 혁명예술의 결정판 《아리랑》공연을 국제적으로 브랜드화시켜야 할것이다. 체 게바라 서거 40주기행사는 국제적이 되였다.

나는 회고록을 읽으면서 《공비》란 말이 일제가 만들어붙인 이름이란 사실을 알고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아무리 김일성항일유격대가 눈에 가시같더라도 일본놈들이 붙인 이름만은 사용하지 말았어야 하지 않았을가? 이는 량식있는 사람들의 공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혁명은 영원히 긔리는것으로 남을지도?

 

글을 맺으며 달빛속 볼리비아의 산골짝 어느 감자밭과 함께 왜 이렇게 만강이 영화의 한 장면같이 가슴을 처연하게 하는것일가?

지금도 철이 되면 감자꽃은 피고지건만 이 두 혁명가들이 그리던 세상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청춘도 삶도 다 버리고 사랑했던것은 무엇이였는지? 그들은 과연 누구를 위하여 무엇때문에 혁명을 했는지? 혁명이란 영원히 긔리는것이 아닐지? 혁명의 진정성은 혁명가가 인민을 사랑하고 인민이 혁명가를 사랑하는, 그래서 서로 긔리는 정념이 남아있는 한 성공한 혁명이라고 정의할수 있지 않을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