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회고록으로 보는 세상이야기』 중에서


 
1. 《세기와 더불어》 주체사상 둘러보기    

조국광복회10대강령과 《취임사》 

 

리명박《대통령》의 《취임사》는 그 진위문제로 하여 어느때보다도 세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대통령》자신의 《정치철학》인 동시에 국정의 근간이 되기때문이다.

조국광복회10대강령은 1936년 유격활동기간동안에 만들어진것으로 북의 정치철학인 동시에 그대로 국가의 리념이다. 그래서 여기서 량자를 비교해보는것은 지금 남북의 현주소를 그대로 한눈에 파악할수 있는 첩경이라 할수 있을것이다.

 

조국광복회10대강령의 력사적배경

 

회고록전반에 걸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말은 《민생단》과 《조국광복회10대강령》(혹은 《10대강령》)이 아닌가 한다. 북에서 조국광복회10대강령노래가 널리 불리우는것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중요시되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북의 정신적 그리고 건국의 정초가 되는것이 10대강령이다.

김일성주석은 일제타도와 조국광복을 위하여 1936 5월 길림성 무송현 동강에서 조국광복회를 창건하고 조국광복회 창립선언과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발표하였다. 이 사건이 중요한 리유는 조국광복회결성을 력사상 최초로 전민족적혁명조직이 만들어진것이며 10대강령은 그 당시 조선의 현실에 나머지수자 하나없이 맞아떨어질 정도로 정당성과 적합성을 지닌것이기때문이다.

다시말해 10대강령은 조국광복회의 활동방향을 제시했을뿐만아니라 당시 조선민족해방운동의 정치로선, 그 전모를 말해주고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평가받고있다.

나아가 10대강령이 발표된 이후 김일성사령관은 1936년말∼1937년초 최초로 백두산을 발판으로 주변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본토진출의 획기적인 전기를 만들었다. 드디여 1937년 6월 4김일성사령관이 이끄는 항일련군 제6사는 국내에 조직된 조국광복회와 련계하여 최초로 국내침투전투를 단행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보천보전투이고 같은 달 말(6 30)의 간삼봉전투였다

조국광복회는 조직의 발판을 확대하여 결국 김주석이 1945년 귀국했을 때에 새 조선건국의 발판이 되였던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10대강령의 중요성은 여기서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정도이다. 《취임사》이든 10대강령이든 그것이 시의적절한것이라면 구체적인 현실속에서 이렇게 파급효과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하나의 미사려구가 아닌 력사와 함께 살아남게 되는것이다. 아무튼 10대강령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유효하며 오늘의 북의 현실 그대로이다.

 

조국광복회폄훼에 대하여

 

남《한》의 학자들이 김일성주석과 그의 혁명활동을 폄훼함에 있어서 몇가지 씨나리오가 있다. 하나가 10대강령과 김일성주석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는것이다. 그들은 조국광복회 회장과 10대강령작성자가 김일성주석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김준엽, 김창순, 림은, 리정식, 서대숙, 와다하루끼 등의 국내외학자들의 연구에 의하여 불식된지 오래이기때문에 이젠 거론조차 되지 못하는 실정이다.

김일성주석이 이끈 항일혁명사외곡행위는 당시의 일본측 자료와 그 당시 국내신문들마저 대대적으로 보도한 자료가 있는 마당에서 설득력을 잃고만다. 최근에는 신진 젊은 학자들이 석사, 박사론문을 통해 항일혁명사외곡을 모두 부정하고있는 실정이다. 특히 연변대 조선족학자 김성호교수는 김일성주석 항일유적지를 몇차례 답사한 후 회고록의 기록이 사실 그대로라고 말해주었다.

김일성주석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가장 비중있게, 가장 많은 회수로 언급하고있는것이 조국광복회결성이다. 조국광복회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하기 시작한 곳은 회고록 제3권이다.

3권 제7 3《쏘베트냐, 인민혁명정부냐?에서 《이날의 모임에서는 인민혁명정부는 참다운 인민의 정권이라는 내용의 나의 연설이 있었고 10개 조항에 달하는 정부정강내용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그 정강내용은 후날 조국광복회10대강령에 거의 그대로 반영되였다.(3 76페지)고 쓰고있다.

 

쏘베트냐 인민혁명정부냐

 

그러면 우리의 관심의 요체는 여기서 말하는 《이날의 모임》(1933 3 18)이란 무슨 모임이였느냐이다. 《쏘베트》란 맑스주의리론을 원리원칙대로 적용하여 인위적으로 만든 공동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전 쏘련의 10월혁명이후 이를 리상화한 맑스주의교조주의자들은 가가호호 찾아다니며 개인재산을 몰수하고 심지어는 숟가락까지 몰수해가 공동분배한다는 쏘베트집단공동체를 만들려 했다.

동만유격구에도 쏘베트바람이 불어닥쳤다.

이들 좌경분자들을 두고 김일성사령관은 《좌경적편향은 교조주의, 사대주의, 모험주의에 중독된 사람들의 소부르죠아적조급성의 산물》(3 55페지)이라고 단정한다.

교조주의를 비판하는것은 맑스주의원리원칙이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것이다. 사대주의라 하는것은 쏘련에서 분 바람을 그대로 우리 현실에 적용하는것은 주체가 없는짓이란것이다. 결국 이런 실용성이 없는 교조주의는 인민으로부터 일탈을 가져왔으며 유격활동에 심대한 손실을 초래하였다. 유격구가 갑자기 쏘베트로 변하면서 사람들은 하나둘 일제통치구역으로 떠나는 현상마저 생겼다. 《여기서는 숨이 막혀 더 살수가 없어서…》가 주민들의 원성이였다. 그러나 극좌좌경분자들은 이런 원성에 아랑곳하지 않고 맑스주의원리원칙을 고수하고 적용하는것자체가 목적이였다.

김일성사령관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장영을 만났지만 그 역시 벽창호였다고 회고하고있다.

김일성사령관은 여기서 결단을 내린다. 왕청5구를 시범으로 쏘베트를 청산하고 《인민혁명정부》를 세우기로 결단을 한다. 이는 김일성사령관이 《민생단》사건때 내린 결단만큼이나, 아니 그이상으로 큰것이였다. 그 리유는 여기서 말하는 인민혁명정부란 다름아닌 조국광복회의 효시였으며 나아가 해방후 정권수립의 최초의 단서가 이에서 모두 비롯하기때문이다.

1933 3 18(이날은 모쁘르기념일이였다. 모쁘르란 국제혁명투사위원회 략칭이다. 1923년 코민테른집행위에서는 희생된 혁명투사유가족들의 후원을 목적으로 이 조직을 내오게 하였고 3 18일을 국제적인 모쁘르날로 정하였다.) 5구 조창덕의 집에서 20여명이 모여 《인민혁명정부》의 탄생을 선포한다. 그리고는 쏘베트가 몰수해간 개인의 재산을 모두 본인들에게 되돌려주었다. 심지어는 소비해버린것은 보상까지 해주었다.

인민혁명정부는 가야허마을에서 사수평마을로 급속히 확산되여 3년후 1936 5 5일 조국광복회탄생의 모체가 되였다.

그리고 조국광복회는 국내로까지 조직이 확대되여 혜산과 갑산 등지의 조직원들이 김일성항일유격대와 협조하여 보천보전투를 성공적으로 치르게 했던것이다. 그래서 오늘의 북의 정부탄생은 이 조국광복회와 그리고 그 정신없이는 리해할수 없다고 하는것이다.

10대강령이 지금도 유효한 리유가 여기에 있다.

 

조국광복회10대강령

 

1. 조선민족의 총동원으로 광범한 반일통일전선을 실현함으로써 강도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를 전복하고 진정한 조선인민정부를 수립할것.

 

2. 재만조선인들은 조중민족의 친밀한 련합으로써 일본 및 그 주구 《만주국》을 전복하고 중국령토내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진정한 민족자치를 실행할것.

 

3. 일본군대, 헌병, 경찰 및 그 주구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진정하게 싸울수 있는 혁명군대를 조직할것.

 

4. 일본국가 및 일본인소유의 모든 기업소, 철도, 은행, 선박, 농장, 수리기관 및 매국적친일분자의 전체 재산과 토지를 몰수하여 독립운동의 경비에 충당하며 일부분으로는 빈곤한 인민을 구제할것.

 

5. 일본 및 그 주구들의 인민에 대한 채권, 각종 세금, 전매제도를 취소하고 대중생활을 개선하며 민족적 공, , 상업을 장애없이 발전시킬것.

 

6.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전취하고 왜놈의 공포정책실현과 봉건사상장려를 반대하며 일체 정치범을 석방할것.

 

7. 량반, 상민 기타 불평등을 배제하고 남녀, 민족, 종교 등 차별없는 인륜적평등과 부녀의 사회상대우를 제고하고 녀자의 인격을 존중히 할것.

 

8. 노예로동과 노예교육의 철페, 강제적군사복무 및 청소년에 대한 군사교육을 반대하며 우리 말과 글로써 교육하며 의무적인 면비교육을 실시할것.

 

9. 8시간로동제 실시, 로동조건의 개선, 임금의 인상, 로동법안의 확정, 국가기관으로부터 각종 로동자의 보험법을 실시하며 실업하고있는 근로대중을 구제할것.

 

10. 조선민족에 대하여 평등적으로 대우하는 민족 및 국가와 친밀히 련합하며 우리 민족해방운동에 대하여 선의와 중립을 표시하는 나라 및 민족과 동지적친선을 유지할것.

 

 

《취임사》와 10대강령의 대차대조

 

강령의 대강의 15항은 반제(반일본), 69항은 반봉건(남녀평등, 계급평등), 10항은 국제친선에 관한것으로 크게 분류된다. 오늘날 평등파와 자주파가 반드시 읽어야 할 대목이다. 북에서는 왜 이런 때늦은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지도 리해하게 될것이다. 10개 조항들은 탁상공론으로 쓰인것이 아니다. 《민생단》과 《쏘베트사건》과 같은 력사의 현장에서, 생명을 내건 싸움에서 얻어진 산교훈에서 나온것이다. 극좌좌경과 민족주의와 일제라는 삼각파도를 헤치면서 풍파속에서 피를 먹물삼아 쓴것이 10대강령이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오늘 남《한》사회의 운동권에서 자주파와 평등파가 저렇게 피투성이가 되여 싸움을 하는것을 이미 북의 지도자들은 1930년대 만주에서 경험한것이다. 그리고 이를 10대강령속에 용해하여 1945 해방을 이룩하였다. 더 거슬러올라가 생각할 때에 동학혁명 역시 10대강령의 정신과 과히 멀지 않다. 반제반봉건이란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점이 없지 않은것이다.

나는 리명박《대통령》의 취임사가 이 시대와 사회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강력한 힘과 타당성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래야 우리모두가 다시는 불행해지지 않기때문이다. 이런 생각과 함께 남북은 지금 너무나 딴 길로 가고있다고 느끼게 되였다. 어느쪽이 바른 선택을 했는지는 력사가 판단할것이다. 여기서는 그 차이점만 말해놓자. 그리고 이 글을 읽는분들 선택의 자유에 맡겨놓자.

조국광복회10대강령의 8항은 《우리 말과 글로써 교육하며》라고 했다. 그런데 리《대통령》은 영어몰입교육을 강조했다. 우리 어린아이들의 혀를 더 자르라는 소리같이 들린다. 혀를 더 자르는 경우 인간의 언어기능자체가 말살되고만다는 사실을 알기 바란다. 모국어로 시를 쓰고 모국어로 수필을 쓰고 소설을 쓰는것은 수치스럽게 되여가고있지나 않나.

일본에 대해서 과거를 묻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일본에 대하여 물을것도 많고 요구할것도 많다. 《정신대》할머니들의 한은 깊어만 가고있다. 《대통령》의 말이 이들의 한에 덧상처를 주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 문화재도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있다. 무엇보다 분단의 궁극적인 원인은 일본때문인데 어째서 일본에게 물을것이 없다고 하는지 리해 못하겠다.

그리고 남북을 하나로 생각한다면 북은 아직 일본과 배상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있다. 그런가 하면 일본은 아직도 독도를 자기들 령토라 우기고있다. 이건 완전히 재침략의 야욕이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이런 일본에 과연 물을것이 없고 요구할것이 없다고 할수 있는가? 10대강령 15항은 아직도 우리에게 유효하다.

남쪽은 리념과 산업화를 넘어서 《선진조국》의 시대로 가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이 박정희의 《근대화》의 연장선상의 언어로만 들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말은 과거 산업화시대로 되돌아가자는 말로만 들린다. 선진국/후진국이란 이분법으로 지금 우리를 아직 후진에 있다고 보고 한 말이 아닌지. 《오래된 미래》란 말이 있다

에네르기절약을 최소화하고 초롱불 켜도 온 세상과 한몸같이 되는 작으나 아름다운 나라를 건설하는것이 선진사회로 가는 길이 아닐가. 그런 면에서 북은 남보다 훨씬 선진사회로 가로질러가기 쉽지 않을가. 그런데 리명박은 선진조국을 7. 4. 7에 련관시켰다. 경악을 금할수 없다. 아마 그 어느 지성도 선진을 그렇게 정의하지는 않을것인데 말이다. 최소한 바라건대 10대강령 69항에 위배되지 않은 선진화가 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