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회고록으로 보는 세상이야기』 중에서


 
1. 《세기와 더불어》 주체사상 둘러보기

 

《너 거기 있었는가 그때에》 《보도련맹》사건을 회억하며 

1932 7 14일 《민생단》은 해체되였지만 향후 3년간 반《민생단》투쟁은 계속되였다.

나는 회고록 4권에 실린 반《민생단》사건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생각한것이 이 땅에 살아온 녀성들의 운명이였다. 아마도 인류력사상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민생단》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운명이 녀성들의 그것과 어쩌면 같기때문이다.

우리 말 속담에 《녀자는 잘나도 욕먹고 못나도 욕먹는다.》가 있다. 이 속담은 남성가부장적사회에서 녀성들이 남성들한테 당하면서 살았던 구속적상황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있다. 같은 녀성끼리도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두고 《밥을 안 주면 굶겨죽이려 한다 하고 밥을 주면 독약을 넣었다.》고 하는것과 같은 경우, 녀성이 관능적이면 요괴라 하고 똑똑하면 여우라고 하는 경우, 이를 두고 《이중구속적》이라 한다. 일본어의 《이지메》같은것이 이에 해당할것이다.

쟝느 다르크는 나라를 구하고도 마녀로 몰려 죽게 되였다. 리유인즉 녀자같은 존재가 애국심이 있다는것은 마녀라는 증거가 된다는것이다. 중세기동안 똑똑한 녀성수학자들이 수없이 이렇게 수난을 당하였다. 《피타고라스의 바지》란 책이 이런 주제를 다루고있다. 녀성이 당했던 이런 상황도 《이중구속적》이다.

당시 《민생단》으로 몰린 사람들의 이중구속적상황을 김일성주석의 회고록을 통하여보면 유격대의 식사를 보장해주는 작식대원이 밥을 설군것도 《민생단》으로 몰릴수 있는 리유가 되였고 밥에 돌이 섞이거나 물에 밥을 말아먹여도 유격구의 인민들을 병들게 하려 한 증거로 되였으며 《민생단》의 작용이라는 어마어마한 감투를 쓰는 조건으로 되였다고 한다.

김일성주석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쓰고있다.

《설사를 하면 전투력을 약화시킨다고 <민생단>, 한숨을 쉬면 혁명의식을 마비시킨다고 <민생단>, 오발을 하면 적들에게 유격대의 위치를 알려주는 신호라고 <민생단>, 고향이 그립다는 말을 하면 민족주의를 고취한다고 <민생단>, 일을 잘하면 정체를 숨기려는 수작이라고 <민생단>… 그야말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이였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민생단>으로 걸려들지 않을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4 18페지)

《민생단》사건이 있은지 근 40년이 지난 1969년 미국의 그레고리 베이츤은 정신병리학과 의사소통리론에 이중구속론을 적용하여 노벨상을 받는다. 그리고 그는 촘스키와 함께 미국대학에서 가장 존경받는 학자가 되였다.

나는 김일성주석의 회고록을 읽으면서 많은 감사의 념을 갖게 되였다. 내가 지금까지 공부해온 리론들을 적용해볼수 있는 무궁무진한 소재들을 거기서 발견할수 있었기때문이다. 그동안 학자들, 예술인들에게 《보안법》이란 족쇄를 풀어 마음대로 회고록을 읽게 해주었더라면 수많은 문화콘텐츠를 거기서 발굴해 국익에 보탬을 주었을텐데.

베이츤은 《이중구속》이 성립하기 위한 요인들을 6가지로 손꼽고있다. 이중구속은 (1) 둘 혹은 그이상의 사람들이 상호 련관되여 만들어지며 그중에 《희생자》가 있어야 한다. (2) 반복적경험에 의하여 희생자는 그것이 정상적인 관습처럼 느껴지고만다. (3) 일차적부정형금지명령 《어떠어떠한것을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벌을 주겠다. (4) 이차적부정형금지명령 《내가 벌을 주더라도 그것을 벌로 생각하면 안돼.》가 따른다. (5) 희생자가 현장에서 도저히 피할수 없도록 삼차적부정형금지명령 《어떤 벌이라도 그것은 너를 위한것이니 감사해야 해. (6) 희생자가 드디여 자기가 구속을 받고있다는 사실도 모르게 됨. 반《민생단》사건으로 희생된 희생자들의 례를 들면서 이상 6가지 요소들이 어떻게 해당하는지를, 그리고 다음에는 김일성사령관이 이 구속적과제를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알아보기로 한다.

안도, 훈춘, 연길, 화룡 네곳가운데 반《민생단》처형이 가장 극심한 곳은 화룡이였다.

고도라는 별명을 가진 화룡현의 반제동맹위원회 책임자는 재인강에 나가서 정치공작을 하다가 자위단원들에게 체포되여 30여명의 애국자들과 함께 사형장으로 끌려나갔다. 자위단원들은 그들을 한줄로 세워놓고 한사람한사람씩 목을 쳐서 죽였다. 고도도 물론 그런 형벌을 면할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도의 목은 땅에 굴러떨어지지 않았다. 그대신 목의 살과 가죽이 훌렁 벗겨져서 등에 가붙고 온몸이 피범벅이 되였다. 이것은 죽음 그자체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치명상이였다. 고도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사이에 적들은 사형장을 떠나가버리였다.

밤중에 정신을 차리고 형장에서 가까스로 일어난 그는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으면서 등에 가붙은 살가죽을 목에 끌어다붙이고 옷을 찢어 동여맨 다음 60여리의 험산준령을 배밀이로 기고 굴러서 마침내 어랑촌유격구로 무사히 돌아왔다.

그러나 고도의 상처가 완치되기도 전에 좌경분자들은 그를 군중심판장으로 끌어내였다. 그가 적의 주구로서 혁명대렬내에 깊숙이 잠복하려고 일부러 목에 상처를 내가지고 유격구로 돌아왔다는것이다. 좌경분자들은 고도의 《죄행》을 장황하게 늘어놓았으나 심판장에 끌려나온 군중들은 그들의 판결을 한사람도 찬성하지 않았다. 결국 심판의 조직자들은 고도를 살려두고 일정한 기간 검열을 통해 그의 정체를 밝힌다는 판결을 내리였으나 뒤에 돌아가서 그를 암살해버렸다.

극좌좌경기회주의자들은 난다는 싸움군들만 골라서 처형해나간다. 《호미긁개》 별명을 가진 안태옥, 《새별눈》 박현숙 모두 《민생단》희생자들이다.

유격대원들에게 붙는 별명은 적들과 싸우다가 생긴 무용담에서 유래한다. 호미긁개란 총이 격발이 안되자 호미로 쳐서 격발시켰다고 붙여진 별명이다. 새별눈이란 춤과 노래를 잘 부르고 눈이 새별같이 빛나기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호미등으로 격발기를 쳤으니 격발기가 손상을 입을수밖에 없었고 결국 이것이 원인이 되여 《민생단》으로 몰렸다. 귀중한 무기를 손상시키려 들어온 일본의 밀정이라는것이다.

《무지한 살륙으로 하여 왕청의 강들과 고동하의 물이 선혈로 걸어지고 간도의 어느 골짜기에서나 통곡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다.

《무의식군중들은 자연히 혁명을 버리고 적구나 무인지경으로 도주하게 되였다. 혁명을 하려고 왔다가 혁명한테서 구박을 당하고 허공중에 뜬 신세가 되였으니 그들이 깃을 붙이고 살아갈 곳은 과연 어데란 말인가. 혁명이란 살기 위해서 하는것이지 죽기 위해서 하는것은 아니다. 살아도 사람답게 잘살기 위해서 하는것이 혁명이며 죽어도 정의를 위해 한몸을 아낌없이 바치다가 싸움터에서 값있게 죽어 영생을 얻는것이 혁명이다.(4 25페지)

독백같이 들리는 한 인간 혁명가의 자조어린 이 말은 그의 가슴에서 피고름이 터져나오는 울음이다. 이처럼 처절할수 있을가? 어느 혁명사에 이런 기록이 다 있단 말인가? 호지명의, 체 게바라의 평전 어디에서도 읽을수 없는 차라리 한갖 소설의 한구절이였으면…

좌경기회주의자들이 이렇게 무차별적으로 학살처형하던 처절한 현장들을 회고하면서 김일성주석은 이렇게 쓰고있다.

《만사를 <민생단>의 작간으로 보는 불신의 감시경밑에서 자기를 건져낼수 있는 최대의 보신책은 사실 아무 일에도 참견하지 않으며 보고서도 못본척 하는것이였다. 그러나 나는 그른것을 보고서도 그르다고 말할수 있는 용기가 없다면 그것은 살아도 죽은 목숨과 같고 구태여 살 필요조차 없는 생명없는 생명이라는 제나름의 배짱을 가지고 우리가 불의라고 보는 모든것을 향하여 반기를 들었다. 일신의 안위만을 걱정한다면 그것이 무슨 혁명가이겠는가. 나는 <숙반>의 회오리가 아무리 기승을 부린다 해도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이며 우리가 한몸을 내대고 투쟁한다면 반드시 그것을 밀어제낄수 있다고 확신하였다.(4 3940페지)

흑인 령가가운데 우리에게 깊은 령감을 주는 곡인 《너 거기 있었는가 그때에》가 있다. 예수의 수난절기간에 가장 많이 불리는 곡가운데 하나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힐 때에 너 거기 있었는가? 그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언덕을 올라갈 때에 너는 너 일신상의 안전때문에 외면하지 않았는가? 하고 량심의 고동을 치게 하는 곡이다.

김일성사령관이 만약에 그 현장을 외면하고 고개를 딴 방향으로 돌렸더라면 그는 결코 나라를 세울수도 없었고 세웠다 하더라도 50성상을 이끌어올수도 없었을것이다.

우리에게 새삼 알려진 《보도련맹》은 좌익인사 교화 및 전향을 목적으로 1949년에 조직된 단체이다. 1949년 좌익운동을 하다 전향한 사람들로 조직한 《반공》단체로 정식명칭은 《국민보도련맹》이다.

《대한민국정부》 절대지지, 북정권 절대반대, 공산주의사상 배격, 분쇄, , 북로당의 《파괴정책》 폭로, 분쇄 등의 내용을 주요 강령으로 삼았다. 1949년말에는 가입자수가 30만명에 달했고, 서울에만도 거의 2만명에 이르렀다.

주로 사상적락인이 찍힌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였고 거의 강제적이였으며 지역별할당제가 있어 사상범이 아닌 경우에도 등록되는 경우가 많았다. 6. 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와 경찰은 초기후퇴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무차별검속과 즉결처분을 단행함으로써 6. 25전쟁중 최초의 집단민간인학살을 일으켰다.

력사는 반복되고있다. 그런데 바로 《반공》우익단체인 《국민보도련맹》이 리승만의 우익에 의하여 약 30만명이 학살당했다. 6. 25발발 3일후부터 《보도련맹》가입자들을 모조리 잡아 학살을 하기 시작한다. 이는 최근 1950년 전쟁발발당시 헌병대 6사단 상사로 《보도련맹원》처형과정에 참여했던 김만식(84)씨의 증언으로 리승만의 직접명령에 의하여 자행되였다는것이 확인됐다. 당시 《보도련맹원》처형과정에 직접 참여한 헌병대초급간부의 첫 증언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보도련맹》사건은 반《민생단》사건과 일란성쌍둥이와 같다하나는 극좌좌경들이 좌익을 학살한 사건이라면 《보도련맹》사건은 그 반대로 우익이 우익을 죽인 사건이다. 그 혐의마저 비슷하다. 김씨의 증언에 의하면 《보도련맹원으로 끌려가 죽은 사람들중에는 아주 순박하고 어진 평범한 시민과 농민들이 많았다.》며 《하지만 국가명령에 따라 처형집행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리승만과 김창룡 등 수하들이 이 수법을 일제강점기 사상탄압에 앞장섰던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련맹》체제를 그대로 모방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반《민생단》사건과 한가지 다른 점도 있다. 한 사건은 지도자가 있어 억울하게 죽어가는 인민들을 가슴으로 끌어안아주었지만 다른 한 사건은 반세기가 지나가는 지금까지 그 누구도 앞장서 진실자체도 구명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글을 마감하는 날 아침 아버지가 《보도련맹》사건으로 죽었다고 간첩루명을 쓰고 5년간 옥살이를 한 그의 아들 김양기씨의 무죄가 군과거사우에서 밝혀졌다는 보도가 나왔다. 같은 날 1991년에 있었던 강기훈씨의 유서대필루명도 벗겨졌다.

금년 12 19일에도 이중구속의 올가미에서 우리를 풀어줄 지도자가 나타날 낌새는 보이지 않는다. 이런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는 한 《반공(反共)》은 한갖 공념불이 되고말것이다. 종교인사 강증산은 《모기 한마리라도 억울하게 죽으면 한이 맺힌다.》고 했다. 해방정국의 최대과제는 바로 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한을 푸는 과정이여야 했을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우리 력사는 한을 겹겹이 쌓이게 하는 력사였다. 맺힌 한은 고스란히 우리 후손들이 짊어져야 할 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