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회고록으로 보는 세상이야기』 중에서


 
1. 《세기와 더불어》 주체사상 둘러보기

《민생단》사건은 일제의 모략극 

 남쪽의 어느 대학교 교수는 《민생단》사건을 두고 《상처받은 민족주의(wounded nationalism)》라고 했다. 이는 그의 박사학위론문제목이기도 하다. 아마도 《민생단》을 주제로 영문으로 나온(1999년 미워싱톤대학) 최초의 론문인줄로 안다. 단행본으로는 연변대 김성호교수의 《1930년대 연변민생단사건 연구》외에 수권이 있다. 김교수는 1998년 남쪽에서 이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근 나는 김교수를 서울에서 만난적이 있다.

그는 지금 김일성주석의 항일유격활동에 관한 저술을 집필중이라고 한다. 그리고 작년에는 여러 학자들과 함께 김일성사령관 항일유격지 현지답사를 15일간 하였다고 한다. 내가 김교수를 만나 확인하고싶었던것은 회고록에 쓰인 김일성주석의 《민생단》기록내용이 얼마나 사실인지를 확인하고싶어서였다.

김교수의 대답은 대부분의 내용이 사실과 같다고 했다. 약간의 다른 점이 있다면 수치상의 차이일뿐 사건자체의 기록내용은 사실그대로 회고록이 담고있다는것이다. 그러면서 곁들여 유격대원들의 어려웠던 참상들을 증언해주기도 했다. 한 대원은 전투때에 총상에 창자가 흘러나오자 자기 손으로 움켜쥐면서 끝까지 총을 쏘았다고 한다. 최근 소말리아해적들을 물리친 북의 선원들의 용기가 과연 우연만은 아니구나 하고 생각해보았다.

김성호교수는 《9. 18사변은 조선민족성원들의 동향과 본심을 식별하는 시금석과도 같은 작용》(김성호 47페지)을 야기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작용을 프랑스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사건적(eventual)》이라고 했다. 주체가 객체의 한 부분이 되고 객체가 주체의 한 부분이 되는 역설적인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런 사건적상황을 두고 리강훈은 《나는 10년간 삭북의 황야에서 내나름대로 동분서주하다가 9. 18사변을 계기로 발붙일 곳조차 없게 되고 수많은 혁명동지들은 사면초가로 궁지에 몰리게 되였고…》라고 술회하고있다.

이런 상황을 견디여내지 못한 조선족은 9. 18이란 시금석으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기 시작한다.

김일성주석은 이에 대하여 회고록에서 《애국과 매국, 반일과 친일, 자기희생과 보신을 가르는 착잡한 분해과정이 9. 18의 포성과 함께 민족내부에서 빠른 속도로 진행되였다. 각자가 자기의 인생관에 따라 양극에도 가붙고 음극에도 가붙었다. 만주사변은 민족의 매 성원들의 동향과 본심을 식별하는 하나의 시금석과도 같은 작용을 하였다.(2 224페지)고 언급하였다.

일본의 영악한 위장기발은 그 효과를 백번 내기에 충분하였다.

9. 18이후 일본측의 자체평가에 의하면 《친중파는 공황에 빠져들었고 민족파는 유야무야 속수무책 랑패하였으며 친일파는 과연 일본은 위대하다 찬양했으며 그중 중공당계렬만이 무장대오를 창건하였다.》와 같다.

이미 일본의 이러한 영악스러움에 김일성사령관은 올것이 왔다고 생각했을뿐이다.

일본이 9. 18사변을 조작한 단 8일만인 9 26, 기다리기나 했다는듯이 조병상과 박석윤 이 두 인물이 《민생단》건설작업에 직접 나선다.

이들은 40만 조선족인구가 살고있는 간도땅에 《민족자유천지》나 《간도독립》이란 명칭을 사용한 단체를 하나 만들려고 일본총령사관에 신청을 했으나 총령사관은 전자는 일본정부로부터 《민족독립》이란 오해를, 후자는 중국당국으로부터 오해를 받을 리유가 있다고 하여 거부한다. 두 이름모두가 민족모순과 관련이 된것이기때문에 일본과 중국모두로부터 반대를 받을수 있다는것이 일본령사관의 판단이였다. 박이나 조는 일말의 민족정신은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들이 찾는 민족정신이 아무리 훌륭한 《민족주의》라 하더라도 일본의 재가를 받고서야 가능한것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다음차선으로 구상한것이 중국관헌의 조선인차별대우에  대항하는 《민중운동》으로 방향전환을 해보는것이였다. 그러나 민중운동 역시 중국당국이 민족문제로 볼것은 명약관화했다. 이를 잘 아는 사람들가운데 민중운동에 막상 나서려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형편이였다. 민족운동도 민중운동도 거부한 일제는 매의 발톱을 내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동만조선친일파들은 이를 눈치채지 못하였다. 아는것을 알지 못하고있는것이다.

이를 간취한 일제는 《간도에 있는 조선사람들의 자각을 촉진하고 자위상 서로 단결하며 산업인으로서의 생존권확보》 즉 요약하여 《민생단(民生團)》이란 단체조직에 박차를 가한다.

친일조직단체 《조선인민회》는 일제의 속셈을 빠르게 간파하고 이에 적극 부응하여 《민생단》건설에 일사천리. 당장 그해 920일 밤 10시 룡정 국자가에 있는 일본인보통학교와 민회에 방화(放火)를 한다. 다시한번 자기들이 피해자라는 위장기발을 흔들기 위해서이다. 이는 구국단 민회 회장 리강재와 구국단 단장 김택환이 공모해 일본군의 간도출병을 유도하기 위해 저지른 조작이다. 이렇게 조선족친일파들은 일본과 중국사이의 리간질에 앞장섰으며 일병의 간도진출이야말로 자기들이 학수고대하던바였다고 떠벌인다.

드디여 10 7일 조병상, 박석윤, 리강재 등 8인이 발기인대표로 재간도 일본제국총령사관에 《민생단》조직결성허가신청서를 낸다. 신청서의 내용은 재간도 40만 조선인들의 《활로는 오직 인류의 기본권인 자유, 자주, 자률만이 있을뿐. 여기에 자유락토를 건설하여야 한다. 오직 생활의 산업화만이 유일한 활로이다.》는것으로, 여기서 민족독립이나 간도독립 같은 말은 사라지고 《생활산업화》가 설립목적으로 부각되였다.

그리고 《총독부》는 《간도에 있는 조선사람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나날이 향상되게 한다.》라는 명분으로 《민생단》조직설립을 허가한다.

10 24일 다시 조와 박은 간도로 돌아와 제 단체들의 협조를 구한다. 4개 단체들(조선인민회, 중공당, 자진촉진회, 민족주의독립운동단체)이 이에 대하여 보이는 태도는 각각이다. 민족파는 합류하나 공산파는 탈퇴한다. 여기서부터 공산파에 대한 반《민생단》사건은 싹이 트기 시작한다. 자진촉진회는 친중, 반일, 《반공》에서 친일, 반중, 《반공》으로, 민족파는 자진흡수되여 소멸하는 등 실로 걷잡을수 없는 현상이 나타난다.

12 24일 일본령사관의 최종허가는 《조선인들의 생활안정과 산업진흥을 획책》한다는 명분으로 《민생단》건설의 최종인허가 내려진다.(김성호 55페지) 12 28일 발기준비위를 소집하여 참가자 64명중 11명을 대표로 선출한다. 놀라운것은 국내의 박영호, 최남선, 윤치호, 송지우 등 90여명이 이 《민생단》건설에 대찬성의 축하를 보냈다는 점이다. 이렇게도 자기가 하는 일을 자기가 알기란 어려운가?

이 《민생단》은 길림, 왕청, 화룡, 훈춘에 거주하는 20살이상 남자들만 참가가 허락되는 제한된 단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해를 넘겨 1932 1 7일 발기준비위 구성, 2 9일 오전 10시 룡정 공회당에서 발기인총회를 연다. 전성호의 사회, 리인구의 개회사 그리고 발기인명단이 발표되였다. 일사천리로 같은 날 3시 반 일본총령사관의 참석하에 창립대회가 열렸으며 박석윤은 《그동안 불법행위에 억눌려 눈물을 삼키며 살아왔는데 이제부터는 합법적으로 활동하게 되여 감개무량하다.》고 인사말을 한다. 《민생단》의 단장은 류보하고 부단장에 한상우를 선출한다. 당시 《간도신보》의 보도에 의하면 《40만 동포의 생활확보를 기하는 민생단》, 《산업의 자유자치의 대기를 추켜든 민생단》이라고 대서특필하고있다. 《매일신보》는 《각개 단체를 총 망라한》 조선사람의 자위자립단체라고 평하고있다.(김성호 62페지)

창립을 하고 같은 날 밤 812시사이에 제1차 《민생단》회의가 소집되였다. 이렇게 《민생단》이 생겨나게 되였다. 이 신생아 《민생단》은 불과 생겨난지 수개월만에 해체되였지만 우리 조선족공동체에 끼친 영향은 실로 심대하다고 할수 있다.

이때부터 조선족사회는 친일과 반일로 량분되였으며 《민생단》창단을 지켜보고있던 민족배타주의자들은 당장이라도 《민생단》을 단칼에 베여버릴 자세였다. 그래서 좌우가 하나가 되여 조선족을 적대시하게 만든 사건이 《민생단》사건이였으며 바로 이 점을 노리고 일제는 《민생단》건설을 서둘렀던것이다.

이런 《민생단》건설에 국내에서 이름난 인사들이 찬성을 하고 나왔다니 이렇게도 일본의 속셈을 간파하지 못할만큼 우리는 어리석었단 말인가?

역설적이게도 《민생단》설립이후 도리여 조선족의 자치와 자률 그리고 생활의 안전은 간 곳이 없이 사라지고 즉각 좌경분자들은 반()《민생단》활동을 전개하여 《민생단》에 관계되였다고 혐의가 조금만 있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잡아 학살하는 실로 《만주판 홀로코스트》가 자행되였다. 아마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 대학살극을 왕청산하만 알고있을것이다.

요약하면 《민생단》은 생겨나서 인차 사라지고말았지만 문제는 《민생단》이 해단된 다음 전개된 반《민생단》사건이 더 중요하다는것이다. 《민생단》이 친일우익들이 조직한것이라면 반《민생단》은 좌경분자들이 주도한 사건이다. 반《민생단》사건을 일명 《숙반운동》이라 하며 공산주의자의 탈을 쓴 김성도, 송일, 김권일 등이 앞장서 같은 조선혁명가들을 《민생단》으로 몰아 죽인다.

죽은 사람들은 모두 조선사람들뿐. 나중에는 김성도일행도 《민생단》으로 몰려 처형되였으며 이들에 대하여 《… 다 좋은 사람들이였으나 주체를 세우지 못하고 상급에 맹종맹동하다나니 본의아닌 과오를 범하였다.(4 22페지)김일성주석은 회고하고있다.

우스운것은 반《민생단》투쟁이 《민생단》해단이후 무려 3년간이나 계속되였다는 점이다.

이에 대하여 김일성주석은 <민생단>이 없는 반<민생단>투쟁》(4 15페지)이라고 했다. 《민생단》보다 반《민생단》이 6배나 긴 기간동안 지속된 그 근본적인 원인을 김일성주석은 《…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모략에 있었다.(4 15페지)라고 단정하고있다.

《민생단》은 사라져도 일제의 음모자체는 계속되였기때문이다.

《민생단》은 하나의 《상황(situation)》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반《민생단》은 상황이 아닌 《사건(event)》이다. 사건이 상황과 다른것은 후자는 주객의 구별이 분명한 경우이고 전자는 그것의 구별이 불분명한 경우이다. 다시말해서 반《민생단》은 적의 적도 적이 되는 경우이다. 보통 정상의 경우는 적의 적은 동지이다. 그러나 사건은 주객이 구분 안되고 적과 동지의 구별을 할수 없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는것은 상황이지만 반대로 개구리가 뱀을 잡아먹으면 사건이 된다. 이는 철학자 바디우의 정의이다. 일본제국주의는 《민생단》이란 상황을 교활하게 사건화시킨것이다. 혁명이 혁명을 타도하고 공산당이 공산당을 무리로 죽이도록 모략한것이다. 당나라 측천무후의 《이이제이》전술전략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좌경분자들은 이 모략에 그대로 휘말려든것이다.

일제는 1934 9월에는 투항자들을 일괄처리하기 위하여 귀순자의 배후관계, 위장귀순유무 확인, 세뇌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특수기관으로 《간도협조회》를 만들어내였으며 여기에 《민생단》을 통합한다. 일제의 모략가들은 중국인간부들이 조선인들을 신용하지 않고 부단히 감시하고있으니 조선인들은 들고일어나라고 조선민족주의를 선동하고 조장하였다. 그래서 조중 두 나라 공산주의자들사이에 쐐기를 박으려고 하였다.

누가 들어도 그럴사한 감언리설임에 분명하다.

회고록은 이렇게 쓰고있다.

《조선사람이 만주에서 피를 흘리는것은 조국의 독립과 민족해방과는 전혀 인연이 없다, 그런데 그대들은 무엇을 위해 기를 쓰고 싸우는가, 왜 력량상 우세한 조선사람들이 중국사람들에게 매워 무의미한 싸움에서 피를 흘리는가, 빨리 각성하라, 투항귀순의 길은 열려있다,… 이러한 사상을 열심히 주입시키는것을 <민생단> 사상모략공작의 주요한 선전요령으로 삼았다.(4 16페지)

일제는 《민생단》을 10명씩 조를 무어 유격대안에 들여보냈으나 다 붙잡혀 죽게 되니 더이상 침투시킬수 없게 되자 조선사람과 중국사람, 로동자와 농민, 상부와 하부간에 호상 믿지 못하게 하고 서로 리간시키는 전술을 써서 공산주의자들끼리 싸우게 하였던것이다.

회고록은 그 수법을 이렇게 밝히고있다.

《혁명대렬을 내부로부터 와해시키는 교란작전에서 일본의 모략가들이 발휘한 솜씨는 실로 놀랄만 한것이였다. 그 술책가운데는 이런 수법도 있었다. 가령 동만특위에서 어떤 간부가 지방에 순시를 나가게 된다면 그 사람이 오가는 길에다 이전에 지도사업차로 그 지방을 왕래하던 현급간부나 구급간부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떨어뜨리였다.

그러면 특위순시원이 그 편지의 수신인들을 어떤 인간들로 보겠는가.(4 17페지)

이런 비렬한짓까지 한 리유를 두고 형형색색의 일부 좌경기회주의자들과 종파사대주의자들의 불순한 정치적야망때문이라고 김일성주석은 평가하고있다. 좌경기회주의자들이 공산주의대렬안에서 지도적지위를 독차지하고 상승일로의 길로 전진하고있던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혁명투쟁을 자기들의 정치적야망을 실현하는데 종속시키려고 하였다면 파벌근성에서 해방되지 못한 사대주의자들은 그들의 지지와 묵인속에서 종파적목적달성에 장애가 되는 모든 사람들을 대오로부터 사정없이 제거하고 자파세력을 확대하는데 이 투쟁을 악용하려고 하였다.

남들이 차지하고있는 방석을 가로타고앉을 구실을 마련해준것이 바로 《민생단》이였다. 《너는 <민생단>이니 자리를 내놓거나 죽어야겠다고 선언하면 다였다.》 이런 판결에는 상소가 있을수 없었으며 또 상소를 해보았자 통하지 않았다.

일제가 류포시킨 《민생단》침투설은 당과 대중단체, 군대의 모든 책임있는 자리를 모두 자파일색으로 갈아치우고싶어하는 사람들의 패권주의적이며 출세주의적인 욕구에 불을 붙여주는 인화물질과 같은것이였다. 그들이 《민생단》의 이름을 걸고 올리는 천정부지의 《숙반》(숙청)실적은 유격구의 혁명력량을 모조리 교살해치우려는 모략가들에게 끝없는 리득을 가져다주고말았다.

결국은 적아가 합세하여 유격구를 마구 짓뭉개놓은셈이다. 이런 기괴한 결탁은 세계의 어느 혁명전쟁사에서도 찾아볼수 없을것이다.

앞으로 보겠지만 김일성주석은 엠엘파나 화요파 같은 공산주의자들을 혐오했으며 그들과 싸우는것이 항일유격활동보다 더 어려웠다고 술회하고있다.

이들 좌경기회주의자들은 만주일대에서 5. 30폭동을 통해 신망을 잃어가고있던 상태였다. 5. 30폭동이란 극단좌경분자들이 조그마한 땅과 재산을 가지고있던 사람들도 무턱대고 투쟁의 대상으로 삼은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김일성주석은 돈이 있고없고의 여부를 가지고 사람을 보아서는 안된다고 한다. 사람을 중심으로 보라는것이다. 애국, 애족, 애민이 있으면 지주라도 한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것이다. 그래서 김일성주석은 돈있는자는 돈으로, 지식있는자는 지식으로라는 구호를 제창한것이다.

그래서 김일성사령관의 주변에는 장울화, 김정부 같은 갑부들도 있었고 그들의 도움도 받았던것이다. 나는 주체사상의 《사람중심》사상이 여기서도 유래한다고 본다.

2004년 나는 만주 연길에서 문익환목사님 방북 15주년기념 학자들의 통일토론회를 북측대표들과 함께 치른적이 있다. 우리 일행은 룡정 일송정에 올랐다. 그런데 《선구자》비석의 비문은 모두 회로 덧칠되여있었으며 바위에 새겨진 《고향의 봄》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연을 물어보니 남쪽의 친일청산단체의 소행이라고 한다. 《선구자》 작사, 작곡가 윤해영과 조두남이 친일행위를 했기때문이라는것이다.

가장 궁금한것은 같이 간 북측인사들이 이런 행위에 어떻게 생각하느냐였다. 그분들의 의외의 대답은 북에서는 이미 인민대중에게 익숙해진 노래에 대해서는 리념과 사상의 여부를 떠나 그대로 부르게 한다는것이다.

나는 회고록을 읽으면서 이런 북의 태도가 김일성사령관이 《민생단》사건에서 보여준 태도와 먼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남쪽의 진보진영의 친일청산이 옳은것이지만 그것이 교조적이 될 때에는 반《민생단》사건과 같은 과오를 범할수 있다는것이다.

서로 남의 방석 빼앗아 차지하기에 급급한 인사들, 그래서 통일운동한다는 단체가 갈가리 갈라지는 이 반복되는 력사의 현실앞에서 우리는 착잡해지지 않을수 없다.

미일은 전보다 더 교활한 수법으로 우리 남북민족을 리간질하고 이에 자기 하나밖에 모르는 안일에 눈이 어두운 무리들이 놀아나고있다. 하나도 달라진것이 없다. 그래서 《민생단》사건은 《먼 후날의 어제된 일》이기도 하다.

 여기 적의 적마저 적이 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과감하게 자르고 자신마저 이 악순환의 고리속에 몸을 던지며 《민생단》이란 십자가를 지고 훈춘, 연길의 골고다길을 걸어 왕청법정에 우뚝 서 민족과 민생의 상처난 량날개를 감싼 한 거인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