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회고록으로 보는 세상이야기』 중에서


 
1. 《세기와 더불어》 주체사상 둘러보기
 

유격구를 수라장으로 만들어놓은 좌경분자들 

김일성주석은 생전에 해외동포대표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일본은 경계해야 한다, 일본의 제국주의는 이 세상 제국주의가운데 가장 퇴매한 제국주의이다(홍동근, 1997, 153)고 하였다고 한다.

일본이 9. 18만주사변을 조작해낸것은 결코 그자체에 목적이 있었던것이 아니다. 사변직후 일본은 두가지 큰 사건을 만들어낸다. 그 하나가 1932년 《만주국》만들기이고 다른 하나는 같은 해 간도조선인들을 상대로 한 《민생단》꾸미기이다. 《만주국》과 《민생단》은 만주사변의 후사건과 같은것으로 일제가 만주사변을 조작한 진정한 동기가 드러나는 사건이라 할수 있다.

이 지구상에 력사가 시작된이래 이만큼 억울한 일도 있을가? 나는 미국에서 공부할 때에 매년 8월초가 되면 일본이 히로시마와 나가사끼 원폭피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는것을 보고 력사의 피해주장도 강자만이 할수 있구나 하고 생각한적이 있었다. 《홀로코스트》(2차대전시기 도이췰란드의 유태인대학살), 그것도 이젠 유태인들의 점유물이 되였다. 이 지구상에는 유태인보다 더한 학살을 당하고도 힘이 없고 돈이 없어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알릴수도 없는 경우가 많다. 일본인녀류작가가 쓴 《요꼬이야기》는 해방후 일본녀인이 조선사람들에 의해 《강간폭행》당했다는 이야기가 그 줄거리이다. 이 소설이 미국 중, 고등학생들의 교과서로 채택되였다. 우리 교민들이 이에 항의해보지만 력부족이였다.

일본의 원폭도 유태인들의 홀로코스트도 모두 그들의 적들로부터 당한것이다. 그런데 여기 1930년대초 동만(東滿)일대에서는 기이한 사건이 하나 벌어진다. 그것은 소위 반《민생단》사건이다. 회고록  4권전체에 검색어를 치면 아마도 가장 자주 나오는 말이 《민생단(民生團)》일것이다.

김일성주석은 항일유격대 전활동과정가운데 이만큼 괴롭힘을 당한적이 없었다고 회고한다.

오늘의 북조선의 인맥과 로선 그리고 주체사상의 기원을 파악하는데도 《민생단》이란 말을 떠나서 생각할수 없다. 그리고 내가 《김일성》 그 이름을 바로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같은것을 느낀것도 《민생단》사건때문임을 밝혀둔다. 1936년경 극단적인 좌경분자들은 마안산이란 산골짜기에 앞으로 《민생단》으로 몰아 처형할 사람들을 모아놓고있었다. 10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리고 거기에는  10살 전후의 어린이들도 있었다. 김일성사령관이 인솔하는 부대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그들은 사람에 대한 경계심과 공포에 가득차있고 며칠을 굶어 피골이 상접해있는 상태였다.

죽음을 앞둔 이 사람들은 무표정 그자체였으며 김일성사령관일행을 또 자기들을 해치러 온 부대로 볼 정도였다.

그런데 김일성사령관은 도착하는 즉시 《민생단》자료들을 모조리 모아 불태워버리고 이들을 모두 해방시켰다. 마치 노비문서를 불태워버린것과 같다. 그리고 고향을 떠날 때에 어머니 강반석녀사가 준 돈 20원으로 무명광목을 사다가 헐벗은 아동들에게 모두 새옷을 해입힌다.

장편소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장지락)마저 극좌좌익들에 의해 《민생단》으로 몰려 죽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민생단》으로 몰려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

해방후 마안산에서 김일성사령관에 의하여 구원된 사람들가운데 살아돌아온 사람들이 오늘 북조선을 움직이는 인맥이 되였다. 그때에 살아난 사람들이 죽을 목숨을 살려주고 먹을것과 입을것을 준 김일성사령관을 《어버이》라고 하는것이다. 《어버이수령》이란 말이 거기서 유래했다는것을 안다면 세뇌에 의해 억지로 붙여진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리해하게 될것이다.

회고록 4권은 반《민생단》사건회고라 할 정도로 그 내용으로 가득차있다. 그 첫절 제목이 《사나운 회오리》이다. 반《민생단》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1932년을 전후로 하여 김일성사령관은 신변주변에서 있었던 일들, 착잡했던 심경들 그리고 고달팠던 시절을 라자구등판에서 겪은 시련이 크다고 하지만 반《민생단》사건에 비하면 약과라고 할수 있다고 했다. 라자구등판의 시련은 1930년대말 고난의 행군에 버금가는 유격활동초기의 최대시련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 시련보다 《민생단》이 더 큰 괴로움을 주었다고 김일성주석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있다.

《시련의 나날들은 꿈결처럼 지나갔다. 우리의 앞길을 막아서던 중중첩첩한 설령들은 저 멀리로 사라지고 피와 고뇌로 얼룩진 원정은 승리적으로 종결되였다. 조선공산주의자들앞에는 그 승리에 기초하여 혁명을 심화시킬수 있는 새로운 전망이 열리였다. 병마에 지친 몸을 끌고 로야령산정에 오른 나는 대원들과 함께 왕청의 산발들을 굽어보며 환성을 올렸다. 수개월동안 초연과 혹한속에서 겹쌓인 피곤이 순간에 다 가셔지고 고향의 뒤동산에라도 와닿은것 같은 희열로 마음마저 구름처럼 부풀어올랐다. 하지만 나는 왕청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며칠동안 침상에서 고열과의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원정에서 얻은 촉한의 후유증이 또다시 나를 쓰러뜨리였던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숙반>바람에 유격구가 만신창이 되였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의 침상에까지 날아들어왔다. <간호병>들도 유격구를 수라장으로 만들어놓은 좌경분자들의 죄상을 분노에 차서 고발하는것이였다.

몇달전까지만 하여도 혁명을 하느라고 왕청골안이 좁다 하게 뛰여다니던 당원들과 공청원들, 부녀회원들이 광란적인 살인각본의 작성자들과 그 집행자들에게 저주를 보내며 자기자신들이 피로써 개척하고 사수해온 유격근거지를 버리고 동서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심장이 싸늘하게 식어가는것 같은 전률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우주의 모든 움직임이 한순간에 죄다 정지되고 세상만물이 빙하에 짓눌려 종말을 고하는것 같은 무서운 절망과 좌절감을 느끼였다.

16명밖에 안되는 대오를 이끌고 촉한에 걸린 몸으로 천교령을 넘을 때의 난관 역시 모진것이기는 하였으나 <민생단>문제때문에 당해야 했던 고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였다.(4 12페지) (《숙반》이란 지금의 숙청 그리고 《촉한》은 장티브스같은 열병을 두고 하는 말)

《나는 몸도 마음도 다 고통으로 시달리지 않으면 안되였다.(4 3페지)

김일성주석은 스스로 자신은 타고난 락천가라고 8권에서 말하고있다. 이러한 락천적성격때문에 그 시련의 시절을 견디여낼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민생단》문제에 있어서만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회고하고있다. 사실 인간이 견디기 어려운것은 외부의 적에서 오는것이 아니고 내부에서 생긴것이다. 적이 적이 아니고 동지가 적으로 변신할 때 인간은 참을수가 없는데 이를 두고 베이트슨은 《이중구속(double binding)》이라고 했다. 바로 이런 이중구속적상황으로 끌려들어가 결국 좌경분자들로부터 모해를 당했던것이다. 드디여 이 사건으로 다홍왜회의에서 결말을 짓기까지 그 전과정을 우리는 회고록 4권을 통해 읽을수 있다.

《민생단》사건의 분수령을 이룬것은 1931 9 18일에 있었던 9. 18만주사변이다. 이는 세계력사상 손꼽힐만 한 일본이 자행한 위장기발사건이다. 진주만, 바크보만 그리고 만주사변 이 3대사건은 미일이 흔든 3대위장기발이라고 그리핀교수는 이미 지적한바이다. 가해자를 피해자로 둔갑시키는 위장기발, 그러나 그 후과는 실로 엄청난것이였으며 동만에서 좌경분자들이 견실한 혁명가들과 무고한 군중을 죽이는, 이 피해를 고스란히 조선의 열혈혁명가들이 떠안았다.

김일성주석의 회고에 의하면 《민생단》혐의가 있는자들은 불과 몇명정도였다. 그 소수의 밀정들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였다. 그것도 김산 같은 인물들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이 력사를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한다. 《민생단》사건은 9. 18사변의 전후관계를 유기적으로 련관시켜야만 바로 리해할수 있음을 거듭 강조해둔다.

1932 2월 만주 간도에는 아직 봄이 올 소식은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훈춘과 연길, 오늘날 우리가 가장 자주 찾는 이 고장이 바로 《민생단》이라는 꿈에도 생각할수 없는 사건이 벌어진 곳이다.

동만안에 있던 조선동포들은 9. 18사변의 최대희생자가 될 운명이였다. 일본군대는 조선족 한교만 보면 자기들을 피해 도망온것이라 보고, 즉 《부정선인(不呈鮮人)》이라 하고 체포총살하였다. 일본측 적구로 오지 않는 부락은 방화략탈하였다. 반대로 극좌좌경분자들은  그들대로 조선족을 《소귀자(小鬼子)》라 하여 일본의 주구로 취급, 한교부락을 습격방화략탈 그리고 살상하였다. 일본에 대한 분풀이를 조선족에게 하였던것이다. 이것은 아리아인들이 유태인들에게 퍼부은 분풀이와 류사한것이다. 《부정선인》과 《소귀자》사이에 적의 적도 적인 이중구속적사건이 벌어진것이다.

《민생단》에 대하여 김일성주석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있다.

<민생단>의 조작은 조선에 대한 일제식민지통치의 지능화의 산물이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민생단>을 내온 속심은 모략과 권모술수의 방법으로 조선혁명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자는데 있었다. 총칼정치를 해도 안되고 <문화통치>의 비단보자기를 쓰고 <내선일체> <동조동근>을 부르짖어도 안되니 조선사람들끼리의 골육상쟁으로 혁명세력을 숙청소멸함으로써 치안유지에서 당하는 고충을 해결하려는것이였다.(4 10페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나타난 민생단 읽기 

(아래 글은 회고록 4권 10∼14페지 글을 그대로 옮겨놓은것임.)

 

9. 18사변후 만주지방에서의 혁명정세의 급격한 발전에 커다란 우려를 느낀 사이또총독은 간도시찰반 성원으로 동만지방에 파견된 박석윤과 연변자치촉진회의 거두 전성호, 연길주재 만주국군 군사고문 박두영, 수급반공특무 김동한을 비롯한 친일적인 민족주의세력을 내세워 1932 2월에 연길에서 <민생단>을 조작하게 하였다.

<민생단>은 외형적으로는 <민족으로서의 생존권확보>라든가, <자유락토건설>이라든가, <조선인에 의한 간도자치>의 허울좋은 구호를 들고 마치 조선사람의 민생문제를 해결하는것이 최고의 경륜인것처럼 떠들었다. 하지만 이 조직은 실제상에서는 조선민족의 반일의식을 마비시키고 조선공산주의자들을 모해하여 인민들로부터 고립시키며 조중인민사이에 쐐기를 박아 혁명대오를 내부로부터 와해시킬것을 목적으로 일제가 만들어낸 간첩모략단체였다.

<민생단>반동적본질은 일제식민지통치하에서의 <생활의 산업화> 조선민족이 나아갈 <유일한 활로>라고 설교한 이 단체의 <조직취지> <강령>과 같은 문건들을 보아도 잘 알수 있다. 적들은 조선과 만주에 대한 저들의 식민지통치기간을 <생존권의 확보와 확충>을 위한 가장 좋은 <절대적시기>, 식민지통치질서의 기반밑에서 암흑의 세계로 변한 조선과 만주를 <자유> <자률> <대지>로 묘사하는 한편 간도일대에 조선인에 의한 <자유의 락토를 건설해야 한다.>고 떠벌이면서 마치도 조선사람들이 일제의 만주강점과 식민지통치를 환영하며 간도일대에 대한 령토적야심이라도 가지고있는듯 한 인상을 조성함으로써 조중인민과 조중공산주의자들사이의 선린관계와 혁명적뉴대를 깨뜨려버리려고 획책하였다.

<민생단>이 철저한 반공주구단체라는것은 그 발기인이라는 사람들과 창립후 단장, 부단장, 리사의 자리를 차지한자들의 경력만 보아도 쉽사리 가늠할수 있다.

이 조직의 발기인들로서 그 성립을 위해 전력을 다해온 경성갑자구락부 리사 조병상이나 <매일신보> 부사장 박석윤, 연변자치촉진회의 전성호, 김동한 등은 다 애국애민을 부르짖는 민족주의자, 혁명가로 자처하였으나 례외없이 일제가 오래전부터 손때를 묻혀 길들여온 반역아들이였다.

16살에 일본류학을 가는것으로써 친일의 첫걸음을 뗀 박석윤은 도꾜제국대학 법과와 제국대학연구원,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등 일류급의 대학들에서 여유있는 수학생활을 하였다. 영국에서 류학을 할 때에는 매해 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3 000여원에 달하는 거액의 학비까지 받았다고 한다.

해외류학후의 그의 직함은 그보다 훨씬 더 화려하였다.

<동아일보> 기자, <매일신보> 부사장, 일본외무성촉탁 만주국 외교부 참사관, 뽈스까주재 만주국 총령사… 등 귀국후 그가 력임한 직무들과 후날 쏘일중립조약체결시 일본측 단장으로 그 조약문에 수표했던 외상 마쯔오까 요스께가 이끄는 일본대표단성원으로 1932년 제네바에서 열렸던 국제련맹총회에까지 참석한 현란한 경력은 그가 일본지배층으로부터 얼마나 두터운 신임을 받았는가 하는것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게 한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로서의 박석윤의 체면을 세울수 있게 그로 하여금 저들의 식민지통치를 비난하는 사설도 쓰게 하고 창씨개명을 반대하여 총독과의 정면대결도 하게 하고 태평양전쟁말기 려운형이 주관한 건국동맹에도 관여하게 하였지만 <민생단>과 관련된 원한도 있어 간도지방의 조선사람들은 누구나 다 그를 곱게 보지 않았다.

해방직후 박대우란 이름으로 변성명을 하고 양덕에 숨어살다가 적발되여 민족반역자로서 준엄한 심판을 받은 박석윤은 재판정에서 일제통치하 조선사람의 <민족자치>가 자기의 정치적리념이였다는것, 조선도 영국의 식민지들인 카나다나 남아련방과 같은 정치발전의 코스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는것, 바로 이런 정치리념으로부터 사이또총독과도 가깝게 지냈고 일본의 이름있는 세계제패론자이며 동아련맹의 정신적고취자의 한사람인 이시하라 간지도 숭배하였다고 실토하였다.

그는 또한 <민생단>의 창립취지가 공산당과 유격대의 괴멸에 있었다는것을 애써 부정하면서 <민생단>의 초기목적은 순수한 <생존권확보>에 있었다는것과 이 조직이 일제의 지령을 받는 간첩주구단체로 전락된것은 자기가 간도를 떠나간 후의 일이라는것, <민생단>투쟁과정의 혹심한 피해상황에 대한 소식을 듣고 놀랐다는것, 자기는 일본인들의 조종을 받는 하나의 인형에 불과하였다는것 등을 진술하였다.

박석윤의 고백에 어느 정도의 진실이 담겨있는가 하는것은 력사만이 판정할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사실여부는 어떠하든지간에 그가 일제의 충견이며 심복이였다는 사실은 그 어떤 론거로써도 부정하지 못할것이다.

<민생단>창출의 산파역을 논 박석윤이 일본물을 많이 먹은 사람이라면 <민생단>모략공작의 현지하수인이였던 김동한은 로씨야의 물을 많이 먹은 사람이였다. 김동한의 인생은 공산주의운동으로부터 시작되였다. 그는 10월혁명직후에 벌써 로씨야에서 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고려공산당 군사부 위원과 장교단장직을 력임하면서 사관학교졸업생으로서의 기질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초에 연해주에서 일제에게 체포되자 인차 급전향을 하여 반공일선에 선 친일특무가 되였다.

김동한은 <민생단>이 해체된 후 관동군의 승인을 얻어 그 후신인 <간도협조회>를 조작하였으며 100여명의 반동들로 의용자위대라는것까지 무어가지고 다니면서 혁명군<토벌>에 극성을 부리였다. 그는 자기를 조선에서 태여난 일본인이라고 착각할만큼 일본인으로 철저히 동화된자였으며 조선민족은 일본을 조국으로 하여 성심성의를 다하여야 한다고 고창할 정도로 매국배족근성이 골수에까지 사무친 수급역적이였다. <만선일보>가 전하는 자료에 의하더라도 그가 귀순시킨 공산주의자는 자그만치 3 800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김동한이 죽은 후 일제는 연길서공원에 그의 동상과 <간도협조회>의 현창기념비라는것까지 세워주었다.

일제의 <간도치안전략>에 따르는 사상모략시책으로 <간도성내의 조직의 전모를 밝히고 약 4 000명을 체포하고 그들을 지지하고있던 사회적기반을 붕괴하는데 성공>했다고 하는 이른바 <민생단전략>의 실상을 잠간 파헤쳐볼 필요가 있다.

<민생단>이 민족주의자들에 의한 간도민생해결을 목적으로 조직된것이 아니였다는것은 처음부터 명백한것이였지만 일제침략자들은 그 당시 그 단체에 민족주의적허울을 씌우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일본사람들은 <민생단>의 간판을 민생고의 해결이라는 구슬로 현란하게 장식하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나 동만의 혁명조직들은 그 단체의 우두머리들이 일본령사관의 뒤문으로 뻔질나게 드나드는것을 인차 간파하였다. 적들은 만인의 예리한 시선앞에서 <민생단>의 정체를 오래 숨겨둘수가 없었다. 우리는 혁명적출판물들과 구두강연을 통하여 그 정체를 제때에 발가놓는 한편 반<민생단>투쟁을 전군중적운동으로 벌리도록 하였다. 간판에 현혹되여 멋도 모르고 <민생단>에 들었던 사람들이 이 조직을 인차 탈퇴하였으며 주구로 전락되여 암해공작에 나섰던자들은 군중의 손에 의해 적발처단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