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김일성주석 통일일화』 중에서

 

6. 민족의 위대한 어버이

 

김일성동지께서는 조국애와 민족자주정신을 민족적단결의 기초로 삼으시고 사상과 리념, 정견과 신앙의 차이를 초월하여 모든것을 조국통일위업에 복종시키는것을 민족대단결의 원칙으로 내세우시였으며 넓은 도량과 아량있는 포옹력으로 통일을 지향하는 모든 사람들을 과거를 불문하고 통일애국의 길에 나서도록 이끌어주시였다.》

김 정 일

5분 늦어진 신년사

 

주체68(1979)년 1월 1일이였다.

뜻깊은 새해의 양력설날 아침 금수산의사당(당시)의 어느 한 방에는 려운형선생의 네 자녀가 숭엄한 마음을 안고 조용히 앉아있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의 부르심을 받고 신년축하연회에 참가하러 왔던것이다.

수십여년전 려운형선생은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는 자리에서 자기에게 리화녀자대학에 다니는 두 딸이 있는데 그들을 장군님께서 키워주셨으면 하는 의향을 표시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제의를 쾌히 받아들이시고 그후 려운형선생이 보낸 두 딸을 직접 댁에 두고 키우시였으며 류학도 보내주시고 중요한 단위들에 세워주시였다.

그러시고도 이날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바로 려운형선생의 자식들이 못내 그리워 그들을 몸가까이 불러주신것이다.

만면에 환한 미소를 담으시고 그들을 반갑게 만나주신 그이께서는 너희들의 아버지는 3번이나 38°선을 넘어와서 나를 만났다, 그후 남조선에 나가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희생되였다, 내가 너희들을 더 잘 돌봐주어야 하겠는데…라고 감회깊이 말씀하시였다.

마디마디 사랑과 믿음이 흘러넘치는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을 받아안으며 려운형선생의 네 자녀는 솟구치는 눈물을 금치 못했다.

돌이켜보면 주체36(1947)년 몽양이 희생되였다는 비보를 받으시고 그 누구보다 가슴아파하시며 려운형선생이 죽다니, 죽어도 조국통일을 보고 죽겠다던 선생이 벌써 가다니라고 하시면서 못내 절통해하신 위대한 수령님이시였다.

그이께서는 그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해방직후 려운형선생을 만나셨던 일을 추억하시며 그의 자녀들에게 주실수 있는 온갖 배려를 다 돌려주시였었다.

정녕 조국통일을 위한 성스러운 투쟁의 길에 한몸바친 애국지사들을 두고두고 잊지 못하시며 그들이 남긴 혈육들까지도 친어버이심정으로 보살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자애로운 사랑과 크나큰 믿음을 무슨 말로 다 전할수 있으랴.

감격과 흥분속에 어느덧 시간은 흘러 위대한 수령님께서 신년사를 하실 시간이 되였다.

하건만 그이께서는 선뜻 자리를 뜨지 못하시였다.

한 통일애국인사의 자녀들에게 무엇인가 더 큰 행복을 마련해주고싶으신듯 잠시 생각에 잠겨계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인자하신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내가 설날에 너희들을 만났는데 기념사진이나 찍자.》

그러시고는 려운형선생의 네 자녀들을 따뜻이 이끌어 자신의 량옆에 나란히 세워주기까지 하시였다.

하여 이해의 신년사는 5분 늦게 시작되였다.

길지 않은 그 5분이 기록한 뜻깊은 사랑의 사연을 사람들은 후날에야 알수 있었다.

 

생전의 특전과 사후의 특대조치

 

남조선에서 대부호였던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통협) 회원 백상규선생으로 말하면 남조선《대한적십자사》 부총재로 있었으며 해방후 《민주의원》 의원, 2대《국회의원》이였다.

그는 련공애국대오의 지도급인사들과 함께 평양까지 후퇴하여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 안기게 되였다. 그후 백상규선생은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원이 되여 상무위원들과 꼭같은 공화국정부 부상급대우를 받으며 부럼없이 생활하고있었다.

주체46(1957)년 6월 2일 통협의 최고위원 안재홍선생을 부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원들가운데서 우리의 조국통일방안을 가지고 남조선에 가서 전달하고 올만 한 사람이 누구이겠는가고 물으시였다.

그가 신중히 생각을 굴리는데 그이께서는 안재홍선생이 갔다오면 좋겠지만 놈들이 눈독을 들이기에 신변이 위험해서 보낼수 없다고 하시면서 이 사람의 말이면 안재홍의 말이나 마찬가지다 하고 인정할만 한 사람을 선발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백상규선생이 어떻겠는가고 물으시였다.

순간 안재홍선생은 저으기 놀라운 기색으로 그 사람은 이름난 대부호이고 또 다년간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이니 믿을수 있겠는지 하는 솔직한 심정을 말씀드렸다.

그러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너그럽게 웃으시며 내 생각에는 그가 결코 변절할 사람 같지는 않다, 사람은 우선 믿어야 한다, 사람을 믿지 않고서는 통일을 못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날 안재홍선생은 백상규선생을 비롯한 통협회원들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 수령님은 바로 이런분이시오. 나도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을 이렇게 굳게 믿으시니 나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소.》

백상규선생은 무릎을 꺾고 주저앉으며 목메인 소리로 격정을 터뜨렸다.

《수령님, 저같은게 뭐라고 … 정말 고맙습니다!》

그후 미제와 남조선당국자들의 반대로 백상규선생이 남조선으로 갔다오는 일은 성사되지 못했지만 그는 생전에 받아안은 절대믿음이라는 최상의 특전을 잊지 않고 련공통일애국사업에 헌신하였다.

그러던 그가 불치의 병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병원원장을 전화로 찾으시여 백상규선생의 병치료에 최선을 다할데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그 선생이 고령에 침상에 누워있으니 얼마나 가족이 그립겠는가, 남조선적십자사에 통지하여 선생의 가족들이 와서 간호하게 하는것이 좋겠다고 은정어린 조치까지 취해주시였다.

그 고마운 조치를 전해들은 백상규선생은 남조선에서 가족들을 보내주는 인도주의적조치를 취해주기를 고대하였다.

그러나 남조선당국의 거부로 백상규선생은 끝내 가족과의 상봉을 이루어보지 못한채 주체46(1957)년 12월 26일 78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애석한 심정을 금치 못하신채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백상규는 남조선에서 이름난 갑부의 한사람으로서 …적십자사 부총재를 하였기때문에 남조선사회계에 일정하게 알려져있습니다.

그는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공화국북반부에 들어온 이후 비교적 량심적으로 살았습니다.…

백상규의 사망에 대한 부고를 평양방송으로 내보내야 하겠습니다. …

고인의 유해를 장례식전후를 막론하고 가족들이 운장하는것을 쾌히 승낙하였으니 어느때라도 가능한 시기에 판문점을 통하여 운구하여가기를 바란다는것을 알려야 하겠습니다.》

부고를 받은 선생의 처와 아들딸들로부터 고인의 시신을 운장하겠다는 답전이 왔으나 남조선당국자들은 국제적십자사를 통해서만 운장할수 있다는 식으로 까박을 붙이며 그것을 이렇게저렇게 방해해나섰다.

하여 공화국정부에서는 제 나라, 제땅에서 죽은 사람을 고향에 가져다묻겠다는데 국제적십자사가 무슨 상관인가고 남조선당국자들을 엄하게 추궁하는 성명을 내고 백상규선생의 장례를 크게 치르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백상규선생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하며 시신을 평양시교외의 풍치좋은 곳에 안장할데 대하여 가르쳐주시고 자신의 명의로 된 화환까지 보내주시는 특대조치를 취해주시였다.

 

《누구도 선생님을 다치지 못합니다》

 

전후시기 조국과 혁명의 운명은 안중에 없고 정치적야심에만 혈안이 되였던 일부 사람들은 위대한 수령님께 충직한 간부들을 하나하나 떼여낼 흉악한 음모를 꾸미고있었다.

당시 공화국의 내각부수상으로 사업하고있던 홍명희선생도 그들의 공격대상자중의 한사람이였다.

그들은 《우리 정권은 로농정권인데 량반출신의 인테리이며 당적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사회주의를 위해서 함께 일할수 있는가.》고 시비해나섰다.

홍명희선생의 마음은 참으로 괴로왔다. 그의 이러한 괴로움은 나이도 70이 다 되여오고 부수상의 중책에 있으면서 위대한 수령님의 사업을 마음처럼 받들어드리지 못하는 자책감으로 해서 더하였다.

그에 대한 일부 사람들의 시비도 시비지만 내각 부수상직은 나이가 지난 자신이 아니라 젊고 능력있는 일군이 맡아야 할 자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을 찾아뵈온 그는 이제는 나이도 많고 한데 그만 부수상자리를 내놓았으면 한다고 말씀드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근엄한 안색으로 그를 바라보시였다.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그러시면 안됩니다. 통일된 다음에 서울에 나가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이께서는 잠시 말씀을 끊으시였다가 다시 이으시였다.

《선생님, 요즘 나쁜놈들이 잡소리를 돌리고있다는것을 나도 알고있습니다. 그자들은 지어 내앞에서까지 선생님에 대해 시비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했습니다. 홍명희선생이 성분이 어떻단 말인가, 과거 <림꺽정>을 썼으면 또 어떻단 말인가, 오랜 인테리인것은 사실이나 왜정세월에 일본놈들과 타협하지 않았으니 애국자가 아닌가, 그리고 홍선생은 해방후 제국주의편으로 따라간것이 아니라 우리를 찾아와 조국과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길에 들어섰다. 당과 국가를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재능과 정력을 바쳐 일하고있는데 국가의 중요간부로 되지 못할 리유가 무엇인가, 인테리에 대한 편협한 태도는 종파주의사상이다, 혁명의 편으로 따라오는 사람들을 왜 성분이 나쁘오, 무엇이 어떻소 하면서 감투를 씌워 배척하겠는가, 그래 따라오려는 사람들을 다 떼여버리고 혼자서 무엇을 할수 있단 말인가! … 내가 이렇게 면박을 주었더니 그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사라졌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천천히 방안을 거니시며 말씀을 이으시였다.

《선생님, 당은 선생님을 믿으니 마음놓고 일하십시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마음을 놓으십시오.

당이 있는 한 누구도 선생님을 다치지 못합니다!》

순간 홍명희선생은 옷깃을 여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일 70돐을 눈앞에 둔 그였지만 그 위대한 품, 한없이 자애로운 품에 와락 안기고싶은 심정이였다. 옷섶을 눈물로 적시며 서있던 홍명희선생은 이윽하여 위대한 수령님을 우러르며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올리였다.

《수상님, 이토록 믿어주시니 저는 마음이 든든합니다. 수상님만 믿고 일하겠습니다. 내 숨이 진할 때까지 충직하게 일하겠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수령님의 이처럼 크나큰 믿음과 대해같은 사랑의 품에 안기였기에 홍명희선생은 고목에도 꽃을 피우는 활력을 안고 자기 한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추호의 드팀도 없이 통일의 길, 애국의 길을 꿋꿋이 걸어갈수 있었다.

 

16일만에 찾은 시신

 

미제에 의하여 강요된 조선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주체40(1951)년 8월 16일이였다.

그때 공화국북반부전역은 30년래의 큰물로 강들이 넘어 전시수송에 일정한 지장을 받고있었다.

적들은 릿치웨이의 이른바 《하기공세》를 앞두고 인민군대의 수송을 완전히 마비시켜보려고 후방에 대한 야만적인 무차별폭격을 어느때보다도 강화하고있었다. 특히 물이 넘어나는 큰 강들의 나루터에 대한 악랄한 폭격이 밤낮 쉬임없이 감행되고있었다.

그간 평양에 나와있던 허헌선생은 이날 김일성종합대학의 새 학년도 개학식에 참가하기 위하여 앞길에 놓인 홍수를 무릅쓰고 정주를 향해 떠났다.

그날 저녁 청천강을 무사히 넘은 허헌선생이 대령강나루터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밤이였다. 군용차도 실어 건네는 큰 배가 소용돌이치며 바다로 내닫는 홍수에 떠밀리면서도 믿음직하게 강한복판으로 나가고있을 때 갑자기 미제의 야간폭격기편대가 머리우에 나타났다. 적들이 강안과 강물에 수많은 폭탄을 쏟아붓는 바람에 강한복판에 떨어진 폭탄들이 터지며 숲처럼 일으키는 물기둥과 곤두서서 밀려와 덮씌우는 집채같은 물결에 의하여 불행하게도 허헌선생이 탔던 배는 뒤집히고말았다. 어두운 밤인데다가 30년래의 큰물속에서 생긴 불상사이니 어떻게 손쓸바가 없었다.

그날 밤부터 강물에 빠진 사람들의 행처를 찾는 작업이 벌어졌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있었다.

조난자들은 홍수와 함께 바다로 나갔을것인데 말그대로 넓은 바다 어느 밑에 가서 그들을 찾을수 있겠는가.

이 사실을 보고받으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허헌선생의 불상사를 통분해하시면서 바다가 아무리 넓다한들 우리 당이 아끼고 사랑하던 허헌동지를 못 찾는다는거야 말이 되는가, 어떻게 해서든지 찾아야 한다, 바다밑을 다 뒤져서라도 꼭 찾아야 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3 000여명의 군인들을 이 작업에 붙이는 조치를 즉석에서 취하시였다.

그때로 말하면 적들이 《하기공세》를 시작한 직후여서 참으로 전투원 한명이 새로왔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허헌선생을 위하여 서슴없이 그처럼 많은 군인들을 동원해주시였던것이다.

그리하여 16일만에 정주앞바다에서 끝내 허헌선생의 시신을 찾아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허헌선생의 희생을 두고 못내 가슴아파하시며 그의 딸 허정숙을 부르시여 그를 위로해주시고 허헌선생의 장례를 국장으로 거행하도록 하시였다.

국장으로 엄숙히 거행되여온 허헌선생의 장례는 9월 6일 령구를 떠나보내는것으로 마감단계에 들어서게 되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령구가 있는 모란봉지하극장으로 친히 나오시였다.

전선형편이 더없이 긴장한 이때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최고사령부를 뜨시면 어떻게 하는가고 하며 어서 돌아가시라고 애원하는 허정숙의 손을 잡아주시며 그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아니오. 아무리 어떻다한들 허헌선생이 마지막 가는 길에 내가 나오지 않을수 없지요. … 나오지 않고서는 견딜수 없어서 왔습니다.…》

그러시고는 장의위원회에서 일보는 한 일군에게 검은 완장을 가져오라고 이르시고는 팔에 검은 완장을 끼시였다.

장중한 추도곡과 함께 령구를 떠나보낼 시각이 다가왔을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선참으로 령구의 앞머리를 향해나가시였고 당과 정부의 책임일군들을 이끄시면서 맨앞에서 몸소 령구를 메시고 모란봉지하극장의 높은 계단을 오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령구가 산으로 떠나는것을 배웅하시고나서야 최고사령부로 향하시였다.

그날 오후 6시경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몇몇 수원들과 함께 허헌선생의 분묘를 찾으시여서는 분묘를 잘 관리할데 대하여 일군들에게 이르시였다.

참으로 위대한 수령님은 조국과 민족을 위한 애국적량심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품에 안으시여 믿고 아끼시며 행복과 광명의 한길로 이끌어주시였으며 죽어서도 영생하는 삶을 안겨주시는 민족의 은혜로운 어버이, 영원한 사랑의 태양이시다.

 

분계선너머로 보내신 화환

 

주체80(1991)년 11월 25일 오전 9시 30분, 《아시아의 평화와 녀성의 역할》에 관한 제2차 토론회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로 향한 북측대표단이 판문점을 넘어섰다.

대표단단장은 통일애국지사 려운형선생의 맏딸 려연구였다.

이날 오후 려연구단장은 서울 도봉구 우이동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를 찾았다.

묘소에는 이미 고인의 친척들과 려운형선생추모회 회장, 고문들을 비롯한 이 단체의 성원들 그리고 북과 남의 수많은 기자들과 안내원들이 와있었다.

고인의 친척들, 친지들 그리고 수많은 신문기자들이 줄지어선 가운데 차에서 내린 려연구는 두개의 커다란 지함을 가지고 나왔다.

류달리 눈길을 끄는 2개의 지함, 과연 그속에 무엇이 들어있을가…

주위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이윽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한데 모으며 지함의 뚜껑이 열렸다.

《아!》

여기저기서 탄성이 울려나왔다.

뜻밖에도 지함에서 나온것은 김일성화, 김정일화가 소담하게 담긴 화환이였다.

이때 려연구단장은 품속에서 붉은 댕기를 꺼내여 화환에 정중히 드리워놓았다.

그 댕기에는 《고 몽양 려운형선생을 추모하여 김일성이란 글자가 빛을 뿌리고있었다.

고인의 친척들은 물론 주위사람들이 받아안은 놀라움과 감격은 이루 헤아릴수 없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 근 반세기전에 세상을 떠난 한 통일애국지사를 잊지 않으시고 평양에서 그곳 서울까지 추모의 화환을 보내주실줄 과연 그 누가 상상이나 할수 있었겠는가.

려연구는 목놓아울면서 추모사를 읽기 시작하였다.

《…아버지가 생전에 그토록 경모해마지 않던 위대한 수령님께서 몸소 은정어린 화환을 보내주시였습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그 마음 소중히 여기시며 우리 아버지를 통일의 선각자로 애국지사로 불러주시고 오래 잊지 못해하고계시는 우리 수령님이십니다.…》

려연구의 오열은 그대로 그 자리에 참가한 모든 사람의 오열로 파급되였다.

믿음이면 이런 믿음이 어디에 있고 은정이면 이런 은정이 어디에 있겠는가. 사람의 기억이란 야속한것이여서 아무리 가까왔던 사람이라도 그와 리별하고 세월이 지나면 그 감정이 사라지는것인데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수십년전에 만나셨던 민주인사를 잊지 못하시여 그 험한 분계선을 넘어 애도의 화환을 보내주신것이다. 진정 고매한 인덕과 믿음이 그려낸 더없이 아름다운 화폭이였다.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주석의 숭고한 의리와 고매한 덕성에 대한 이야기는 남녘땅 구석구석에까지 오늘도 전설처럼 전해지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