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김일성주석 통일일화』 중에서

 

6. 민족의 위대한 어버이

 

김일성동지께서는 조국애와 민족자주정신을 민족적단결의 기초로 삼으시고 사상과 리념, 정견과 신앙의 차이를 초월하여 모든것을 조국통일위업에 복종시키는것을 민족대단결의 원칙으로 내세우시였으며 넓은 도량과 아량있는 포옹력으로 통일을 지향하는 모든 사람들을 과거를 불문하고 통일애국의 길에 나서도록 이끌어주시였다.》

김 정 일

《최덕신동무!》

 

미국에서 《배달민족회》를 뭇고 활동하다가 조국에 와서 생의 말년을 보람있게 장식한 최덕신선생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의 화성의숙시절의 스승인 애국지사 최동오선생의 아들이였다.

허나 그들부자간이 걸은 길은 너무도 판이하였다.

아버지가 화성의숙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활동할 때 아들은 멀리 베이징에 가있었고 아버지가 보천보의 홰불을 바라보며 애국의 마음을 다질 때 아들은 남의 나라 군복을 입고 이역땅을 헤매였다. 아버지가 4월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북행길을 떠날 때 아들은 아버지를 막아나섰고 아버지가 반미반외세를 주장할 때 아들은 미국으로 류학을 갔다. 아버지가 위대한 수령님의 품을 찾아 평양으로 왔을 때 아들은 남조선군 장성별을 달고 미국의 허수아비노릇을 하였다. 아버지가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통일에 마음쓰고있을 때 아들은 동남아《반공련맹》의 주창자로 나섰고 남조선《외무부 장관》이요, 《국토통일원》 고문이요 하면서 미국과 남조선당국의 영구분렬장단에 춤을 추었다.

그후 최덕신선생이 그들과 결별하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너무도 때늦은것이였다.

하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를 한없이 넓은 품에 안아주시고 불미스러운 과거가 많은 그의 한생을 용서해주시였다.

그가 죽기 전에 선친의 묘에 술이라도 한잔 붓겠다고 조국으로 힘든 걸음을 했던 때인 주체70(1981)년 7월 1일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그를 친히 만나주시였다.

뜻깊은 석상에서 최덕신선생은 머리를 들지 못하고 속죄의 말씀을 드리였다.

《주석님, 민족앞에 얼굴을 들수 없고 선친을 위해주신 주석님을 대할 면목이 없습니다.》

그가 떠듬거리며 하는 말을 듣고계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말을 제지하시며 말씀하시였다.

《과거는 어디까지나 과거이고 지금 나라가 분렬이냐, 통일이냐 하는 기로에 선 이때에 우리와 손을 잡고 통일을 위하여 한몫 하여야 하겠습니다.

나는 최선생이 지난날의 일들을 씻어버리고 조국통일을 위해 일해보겠다는 새로운 결심을 가진데 대하여 감사히 여기고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하해같은 도량에 감복한 선생은 그후부터 조국방문의 길에 자주 올랐다.

그 나날에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이끄시는 조국을 더 잘 알게 된 그는 동포들이 사는 이국땅에서 통일애국사업에 적극 떨쳐나섰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러한 그를 굳게 믿으시고 평양에 올 때마다 자주 만나주시고 뜨거운 사랑을 부어주시였다. 그리고 그가 조국에 영주하였을 때에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의 중임도 맡겨주시였다.

은혜로운 사랑과 믿음속에 인생말년을 보람있게 살게 된 그에게는 세상에 부러운것이 없었다.

단 하나 간절한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위대한 수령님의 전사로서 《동무》라는 호칭으로 불리웠으면 하는것이였다.

《주석님, 한가지 소청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주석님과 뜻을 같이하는 전사가 되고싶습니다.

이 사람을 선생이라 부르지 마시고 동무라고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소청을 기꺼이 받아주시였다.

그이께서는 환히 미소를 지으시며 아, 그렇습니까, 뜻을 같이하는 동무, 그렇게 부릅시다, 최덕신동무, 우리 함께 통일위업을 성취하는 길에서 생사를 같이합시다라고 말씀하시였다.

그이의 우렁우렁한 음성이 방안을 울렸다.

《최덕신동무!》

자기를 동무라고 불러주시는 자애로운 그 음성을 들으며 최덕신은 마음속으로 뜨겁게 생각하였다.

(아, 이런 품이여서 나의 선친도 사선을 헤치고 달려와 안기였구나!)

 

로목사가 올린 식전기도

 

주체70(1981)년 7월 3일,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해외에서 조국을 방문한 한 로목사를 접견하시였다.

그는 미국에 있는 《조국통일촉진회》 회장이며 《한국인교회련합회》 고문이며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해외한국인련합》의장단 성원인 전 남조선숭전대학교 총장 김성락이였다.

그로 말하면 평양태생으로서 평양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교회목사를 하다가 1936년 미국에 건너간 이후로 미국, 남조선에서 학계, 종교계에 있다가 1960년대초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안젤스련합 장로교회의 목사로 있으면서 미국종교계에 일정하게 영향력도 있고 미국정객들속에서도 친면이 넓은 사람이였다. 그는 또한 조선사람으로서는 미국당국으로부터 년봉금을 타는 유일한 사람이였다. 그는 오래동안 미국에서 종교활동을 하는 과정에 반공의식에 물젖을대로 물젖어있었다.

그는 1980년말에 평양에서 보낸 조국의 정당, 사회단체들의 명의로 된 고려민주련방공화국창립방안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방도를 담은 편지를 받고 그것을 상세히 알아보는 한편 인생말년에 고국산천을 찾아보려는 개인적소망도 있고 해서 평양으로 찾아왔었다.

하여 그는 조국땅에 첫발을 들여놓을 때 마중나온 일군들에게 고향인 평양을 조용히 방문하고 조용히 돌아가겠으니 자기와 관련하여 일체 보도를 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하였었다.

해방전에 평양에서 목사로 있다가 미국으로 건너간 그가 평양을 못 잊어 찾아왔다는것을 아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친히 그를 만나주시고 늦게나마 통일을 위한 길을 걸으려는 그의 민족적량심을 귀중히 여기시여 애국지사라고 불러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로목사와의 담화석상에서 우리 인민에게 있어서 절박한 문제는 조국을 통일하는것이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조국통일은 반드시 조선인민자체의 힘으로 실현하여야 합니다.》

계속하시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선인민이 자체의 힘으로 조국을 통일하고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자면 사대주의를 철저히 반대하고 민족적자주성을 확고히 견지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를 위하여 친히 오찬을 베풀어주시였다.

그를 식탁으로 초청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먼저 선생이 식전기도를 올려야 하지 않겠는가고 권고하시였다.

그이의 말씀에 로목사는 무척 당황해하며 어쩔바를 몰라하였다. 어찌나 충격이 컸던지 얼굴색이 붉어지고 숨소리가 높아지기까지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환한 미소를 지으시고 평생을 지켜온 신자의 도리를 어겨서야 되겠는가고, 어서 기도를 드리라고 재촉하시였다.

사실 그는 그 자리에서만은 신자의 도리를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하느님》께 기도드리는것을 그만두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의 넓으신 도량과 포옹력에 감복되여 절절한 어조로 우리 민족의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전설적영웅이시며 만민의 위대한 어버이이신 김일성주석님의 건강을 축원하며 조국의 자주적통일과 나라의 완전독립을 기원한다는 뜻깊은 기도를 드리였다.

이날 그는 이제야 비로소 자신은 인생의 새봄을 맞이하였다고 격동된 심정을 토로하였다.

그는 평양을 떠나기에 앞서 처음 도착하여 당부한것과는 달리 비행장에서 스스로 기자회견을 요청하고 기도를 올릴 때의 소감을 이렇게 피력하였다.

《저는 주석님의 말씀을 어길수 없어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는 충심으로 김일성주석님을 위하여 기도를 올렸습니다.》

 

건강해야 민족의 통일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수 있다시며

 

주체78(1989)년 여름,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평양에 온 아메리카주 교포인사들을 만나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몸소 승강기가까이에까지 나오시여 교포인사들을 친절히 맞아주시였다.

한 일군이 그들을 접견실로 안내하려고 하자 그이께서는 접견이라니? 한집안식구가 만났는데 접견은 무슨 접견이요라고 하시며 가볍게 나무라시였다.

그러시고는 손을 저으시며 몸소 식탁으로 일행을 이끄시였다. 그리고 일행 한사람한사람에게 친히 술을 권하시며 그들의 조국방문소행을 찬양하고 건강을 축원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너무나도 소박하시고 너무나도 평민적인 그 모습앞에서 교포인사들은 첫 순간에 그이께 모두 반해버렸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단란한 가정적분위기에서 해외인사들에게 여러가지 말씀을 하여주시였다.

그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문익환목사가 평양을 방문했던 이야기도 하시고 앞으로 이 땅에 서게 될 통일국가는 어느 나라에도 예속되지 않는 자주적이고 중립적이며 평화로운 민주주의나라라는데 대해서도 말씀하시였다. 그이의 말씀은 마치 할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이야기하듯 매우 인자하시고 지극히 소탈하셨지만 모든 내용은 그들이 관심하는 중요한 문제들이였고 모두를 기쁘게 하여주는것들이였다.

해외인사들이 너무나 기쁘고 감격스러워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감사의 인사를 올리려 하자 그이께서는 손을 저어 만류하시면서 나는 식탁에서 그런 말을 듣는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서 많이들 들라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그들에게 잔을 들자고, 모두 건강하라고, 건강해야 민족의 통일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수 있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이의 한없이 넓고 뜨거운 포옹력에 해외인사들은 모두가 통일을 위하여 더 많은 일을 하리라 굳게 마음다지며 잔을 내였다.

 

김규식선생의 날이라고 하시며

 

주체37(1948)년 4월 25일 남북련석회의를 지지하는 평양시민대회와 군중시위에 남북련석회의대표들을 초대하도록 해주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이날 오후 북조선인민위원회 회의실에서 련석회의참가자들을 위한 성대한 초대연을 베푸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초대연에서 김구, 김규식선생을 비롯한 남조선의 주요정당, 사회단체지도급인사들을 친히 몸가까이에 앉히시고 뜻깊은 말씀을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남북형제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한자리에 모여앉으려는것은 우리모두의 절절한 념원이였으며 이 념원은 남북련석회의를 진행함으로써 실현되였다고 하시면서 오늘 남조선에서 온 대표 여러분과 또다시 이렇게 자리를 같이하고보니 더없이 기쁘다고 말씀하시였다.

이윽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이가 많은 김규식선생에게 맨먼저 잔을 부어주시고 《김규식선생, 오늘은 선생의 날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새 몸이 불편해서 회의에도 참가하지 못하고 축사도 못하셨는데 오늘은 한마디 하셔야 할게 아닙니까.》라고 하시며 그가 연회의 첫 연설을 하도록 내세워주시였다.

그가 련석회의에 늦게 참가한데다가 몸이 불편하여 연단에 나설 기회를 얻지 못해 아쉬워하는 심정을 깊이 헤아려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뜨거운 사랑의 말씀이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대해같은 사랑에 그는 눈물을 머금으며 한동안 그이를 우러렀다.

사실 련석회의에 늦은것은 미제와 그 주구들의 방해책동에도 있었지만 오랜 반공의 타성으로부터 깨여나지 못한 자신의 과오이기도 하였던것이였다.

그는 일찌기 상해림정 외무총장, 중경림정 부주석을 하였으며 해방후에는 《민주의원》의 부의장, 미국이 주도하는 《좌우합작위원회》의 우익측 주석, 《과도립법의원》 의장 등을 력임하면서 반공으로 한생을 살아왔다. 그러했기에 그는 오랜 반공의 타성으로부터 남북련석회의참가와 관련한 이른바 《5개 항의 조건》이란것을 내놓고 련락원까지 파견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규식선생이 파견한 련락원들을 친히 만나주시고 즉석에서 민족자주련맹의 《5개항의 조건》을 수락하시면서 그의 북행을 바란다고 말씀하시였다. 하여 그는 회의가 진행중인 4월 21일에야 평양을 향해 떠나게 되였다.

어쩌면 그렇듯 숭고한 민족자주리념과 민족단합의 사상, 넓은 아량과 고결한 인품을 지닐수 있단 말인가!

연회장의 분위기마저도 민족단합을 위한데로 능숙하게 이끌어가시는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을 우러르는 70고령의 우익민족주의정객 김규식선생은 뜨거운것을 삼켰다.

그는 연회에서 연설하면서 련석회의연단에서 하고싶었던 자기의 심정을 죄다 쏟아놓았고 김일성장군님께서 하시는 일은 다 자기 인민의 힘을 믿으시고 나라의 통일독립과 민족의 번영을 위한 정치라고 력점을 박았다.

그리고는 남조선대표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우리도 우리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어야 하겠습니다. 어제 모란봉극장에서 본 우리 장단에 맞추어 추는 우리 춤이 제일 좋았습니다. <좌우합작>은 미국사람들의 장단에 추는 춤이였습니다.

이제는 남의 장단에 춤출것이 아니라 우리 장단에 춤을 춥시다.》

이것은 바로 지난날 미제의 조작품인 《좌우합작위원회》 주석이였으며 미군정청 남조선《과도립법의원》 의장이였던 김규식선생이 위대한 수령님의 민족자주정치에 대한 탄복인 동시에 그이께서 가리키시는 민족자주, 민족대단결의 한길로만 가겠다는 심장의 맹세였다.

 

사랑의 불사약

 

주체38(1949)년 7월 중순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력사적인 4월남북련석회의이후 북에 남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공화국 헌법위원회 위원으로 사업하던 장권선생이 본래 앓던 병이 재발하여 전염성질환으로 쓰러졌다는 보고를 받으시였다.

집무실에서 밤늦도록 일을 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병문안을 하기 위해 그가 입원한 병원으로 떠나려고 하시였다.

이때 장권선생의 병에 대하여 알고있던 한 일군이 위대한 수령님의 건강을 념려하여 자기가 대신 갔다오겠다고 말씀드리였다.

그러자 그이께서는 《아니요. 내가 가보겠소. 장권선생은 우리를 믿고 들어와서 일을 하다가 앓아누웠는데 내가 가보지 않으면 되겠소.》라고 하시며 병원으로 떠나시였다.

병원에 이르신 그이께서는 당직의사실에 들리시여 그의 병세에 대하여 알아보신 다음 그가 있는 병실로 가시였다.

환자를 위해 밝지 않은 희미한 전등불이 켜져있는 방안에는 장권선생이 침대에 누워있었고 맞은편에는 간호를 위해 와있던 안해가 앉아있었다.

조용히 병실에 들어서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시는 순간 가슴이 아프시여 잠시 걸음을 멈추시고 흐리신 시선으로 방안을 둘러보시였다.

그때에야 장권선생의 안해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 녀성은 《아니?! …장군님께서…》 이렇게 외우고는 어쩔바를 몰라하였다.

환자의 병이 몹쓸 병이다보니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옥체건강하셔야 할 위대한 수령님께서 이 깊은 밤중에 아무것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병실에 들어오시였으니 그는 참으로 무엇이라 말할수 없는 감동에 휩싸였다.

그는 위대한 수령님께서만은 이 방에 들어서시여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급히 그이앞으로 다가가 간절히 청하였다.

《장군님, 이 고마움을 어찌 다 말씀올릴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안됩니다. 어서 방에서 나가셔야 합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두손을 잡으시고 《아주머니, 왜 이러십니까? 장선생이 잠이 든것 같은데 조용하십시오.》라고 하시며 환자의 침대곁으로 걸음을 옮기려 하시였다.

그는 또다시 위대한 수령님앞을 가로막으며 환자곁으로 다가서지 말아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이께서는 웃음을 지으시며 《아주머니, 장선생이 저앞에 앓아누웠는데 그래 내가 병이 무섭다고 장선생을 이 방에 두고 그냥 돌아가겠습니까? 아주머니, 일없습니다. 어서 장선생을 만나봅시다.》라고 말씀하시고는 환자의 침상곁으로 가시였다.

그때에야 잠을 깬 장권선생은 이 놀라운 광경을 바라보며 침상에서 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러한 그를 만류하며 자리에 편안히 눕혀주시였다. 그러시고는 곁에 앉으시여 그의 손을 잡아주시고 맥박을 가늠해보기도 하시고 또 식사는 어떻게 하는가를 알아보시였다.

선생은 울컥 눈물이 솟구치는것을 애써 참으며 《장군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하고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수척한 두볼로는 그냥 뜨거운것이 흘러내렸다.

《장선생, 마음을 든든히 가지고 힘을 내야 합니다. 그래야 빨리 나아서 일할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음성도 저으기 갈리시였다.

깊은 밤중에 위대한 수령님을 침상에서 맞이하게 된 장권선생은 한량없는 기쁨과 고마움이 북받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이의 건강이 념려되여 그이께서 그만 돌아가주시기를 거듭 간청하였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때마다 웃으시며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는가고 하시며 그에게 은정넘치는 위로의 말씀을 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그 사랑, 그 은정이 그대로 불사약이 되여 그는 인차 병을 털고 일어설수 있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