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김일성주석 통일일화』 중에서

 

6. 민족의 위대한 어버이

 

김일성동지께서는 조국애와 민족자주정신을 민족적단결의 기초로 삼으시고 사상과 리념, 정견과 신앙의 차이를 초월하여 모든것을 조국통일위업에 복종시키는것을 민족대단결의 원칙으로 내세우시였으며 넓은 도량과 아량있는 포옹력으로 통일을 지향하는 모든 사람들을 과거를 불문하고 통일애국의 길에 나서도록 이끌어주시였다.》

김 정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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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적인 인생전환

 

주체37(1948)년 3월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미제와 그 주구들의 민족분렬책동을 짓부시기 위하여 남북련석회의를 친히 발기하시고 남조선의 각당, 각파, 각계층 인사들에게 초청장을 보내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보내주신 명단대로 초청장을 작성하던 일군들은 어느 한 이름에서 눈길을 딱 멈추고 굳어져버렸다.

김구,

그들은 놀라움과 우려를 표시했다. 한것은 그가 공산주의자와는 도저히 화합될수 없는 완고한 반공분자로 락인되고있었기때문이였다.

해방후 중국에서 돌아온 백범은 친일지주, 자본가세력의 집단인 《한민당》이 림시방편으로 내세웠던 《림정추대》에 편승하여 민주세력과 정면대립해나섰는가 하면 모스크바3상회의결정이 전해졌을 때는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하고 리승만과 쌍벽이 되여 《반탁》운동을 주도하면서 공산주의를 반대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서 그의 휘하에 집결되였던 우익반동들은 그의 이름을 빌어 횡포한 백색테로를 감행하였다. 그것은 당시 북조선인민위원회 서기장이였던 강량욱목사의 아들, 딸들이 그의 명함을 가진 테로단에 의하여 살해당한 사실에서도 나타났다.

이러한 사태로 하여 그는 이무렵 《테로의 두목》으로 불리울 정도로 민주세력, 특히 북반부인민들에게는 증오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해방전 《림정》에서 활동할 때에도 그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테로를 서슴지 않았다. 그의 영향하에 《림정》과 기맥이 통하고있던 동북의 민족주의자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을 찾아가는 청년들을 부당하게 살해까지 하였던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해방전부터 화해할수 없는 반공분자였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민족의 영구분렬이라는 정세하에서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그의 애국심을 귀중히 여기시고 그를 불러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대해같은 도량과 뜨거운 포옹력에 의해 초청장은 남조선의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선생에게 정확히 전달되였다.

그런데 초청장을 받은 그자신이 선뜻 발을 내짚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그에게 인식된 공산주의자들이란 민족은 안중에 없고 계급투쟁만 부르짖으며 덮어놓고 민족주의자들을 경멸배척하는 사람들이였다.

과연 그들이 공산주의자들을 질시하면서 테로까지 공공연히 감행해온 자기와 진심으로 손을 잡자고 한단 말인가.…

의심과 동요와 번민속에 모대기면서도 민족분렬의 현실을 외면할수 없었던 김구선생은 자기의 비서를 먼저 평양으로 떠나보냈다. 평양으로 가더라도 담보를 받고 가자는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런 그를 탓하지 않으시고 《특사》를 흔연히 만나주시였다.

접견석상에서 《특사》는 김구선생의 의사를 이렇게 말씀올리였다.

《장군님, 백범선생이 평양에 들어와서 장군님과 만나겠는데 과거를 백지로 해주실수 있겠습니까?》

간단치 않은 요구조건이였다.

하지만 민족대단결로 조국통일위업을 이룩해나가실 웅대한 뜻을 품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즉석에서 쾌히 답변을 주시였다.

좋다, 백지다!

이렇게 되여 백범이 평양으로 오게 되였다.

백범이 평양에 체류한 기간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어버이수령님의 위대한 사상과 걸출한 령도력, 숭고한 인덕에 완전히 매혹된 그는 그이를 절대적으로 숭배하면서 《반공》으로부터 련공합작에로 극적인 인생전환을 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했다가 서울로 떠나려는 백범을 만나주실 때였다.

《장군님, 마지막으로 한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백범 김구는 이렇게 정중히 말씀드리고나서 자리에서 일어나 묵직한 함을 그이앞에 내놓았다.

《지난날 저는 해외로 돌아다니면서 크게 하는 일없이 <상해림시정부>의 법통을 지켜왔습니다. 적으나마 민족사에 흔적을 남긴 <상해림시정부>의 인장을 받아주십시오.》

참으로 뜻밖의 일이였다.

《상해림시정부》의 인장이라면 그가 목숨보다 더 중하게 여겨오던것이였다.

그 인장으로 말하면 백범 김구와 그 동료들이 피어린 3. 1운동을 계승하는것으로 자부하는 《림시정부》의 법통을 상징하는것으로서 그것만 꺼내보이면 천하가 자기들을 《정부》로 인정해줄것만 같아 상해에서도, 머나먼 중경에로의 피난길에서도 그리고 귀국의 수천리길에서도 그가 애지중지 품고다닌 《옥새》맞잡이였다. 그것을 지금 제손으로 위대한 수령님께 올리겠다는것이였다.

김구선생으로서는 하나의 결단이였다.

그것은 파란곡절많은 70고령을 넘긴 백범이 이제 민족의 운명과 자신의 넋을 다 민족의 령수, 절세의 위인이신 위대한 수령님께 의탁하겠다는 뜻깊은 인생전환의 선언을 의미하는것이였다.

그가 올린 인장을 바라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것을 받는것을 사양하시면서 자신에게는 그저 인민대중의 두터운 신임만 있으면 그만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한없이 겸허한 풍모에 더욱 감동된 백범은 그이이시야말로 우리 민족이 받들어나갈 참된 령도자이시라는것을 다시한번 더욱 깊이 느끼였다.

그후 남조선에 돌아간 백범은 련공으로 돌아선 자기의 신념을 지켜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통일애국의 한길을 변함없이 걸어갔다.

 

《된장국이라도 같이 드십시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주체35(1946)년 2월 11일, 남조선에서 들어온 려운형선생을 만나주시였다.

그이께서는 만면에 환한 미소를 담으시고 문가에까지 마주나오시여 험한 길을 오시느라 수고하셨다고 하시면서 그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였다.

《장군님! 옥체무강하십니까? 시련에 찬 광복의 혈전으로 끝내 조국을 찾아주시고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을 환히 열어주신 장군님께 충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국사에 다망하시겠는데 하는 일도 없는 저희들까지 공연히 걱정을 끼쳐드려서 죄송스럽기 이를데 없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나는 선생이 보낸 편지들도 받아보았고 인편으로 보내준 소식도 여러번 들었습니다.

그래서 선생과 한번 만나려고 하였는데 선생이 이처럼 찾아와주니 정말 반갑습니다.》

그러시고는 과거 산에서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싸울 때 선생과 련계를 가지려고 공작원을 파견하였던 일이 있는데 뜻하지 않은 사고로 유감스럽게도 선생과 련계를 맺지 못했다고 하시면서 려선생이 일제의 박해속에서도 민족적지조를 굽히지 않고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싸웠다는것을 잘 알고있다고 말씀하시였다.

마음뿐이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한 일도 없는 자기에게 이처럼 과분한 치하의 말씀을 하시자 려운형선생은 송구스럽기 그지없어 몸둘바를 몰라하였다.

이날 그이께서는 려운형선생이 알고싶어 하는 정치적문제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시였다.

어느덧 시계는 오후 1시를 가리켰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서시며 말씀하시였다.

《려선생, 이젠 점심식사하러 갑시다.》

려운형선생은 따라일어서며 말씀드렸다.

《장군님, 어데로 가시렵니까?》

《가기는 어델 가겠습니까. 우리 집에 가지요.》

그이께서는 기별도 없이 왔으니 집에 가서 조밥이나 같이 들자고 웃으시며 말씀하시였다.

초면인 자기를 이토록 허물없이 따뜻하게 대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너그러우신 풍모에 가슴뜨거움을 금할수 없었던 려운형선생은 행복한 얼굴로 그이를 우러러보며 혹시 국수집에라도 보내면 어찌나 했노라고 하면서 역시 웃음으로 대답을 드렸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를 이끄시면서 친근하게 말씀하시였다.

《국수집에는 왜 가겠습니까. 국수집에 가면 더 맛있는것이 있겠지만 우리 집에 가서 된장국이라도 같이 드십시다.》

그이의 댁으로 간 그는 생각했던바와는 너무도 다른 방안과 가구들을 보며 자기 눈을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정갈하고 깨끗하기는 하였으나 너무나도 검소하였기때문이였다.

이윽고 식사가 들어왔다. 자개도 박지 않은 보통 밥상우에는 색다른 찬도 없었다. 려운형선생은 경건한 마음으로 그이와 마주앉아 한상에서 식사를 하였다.

화제는 다시 정치문제로 옮겨갔다.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받고나서 그는 감탄하여 말씀을 드렸다.

《장군님의 말씀을 들으니 답답하던 가슴이 후련해지고 조선이 나아갈 길이 환히 내다보입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 저는 남조선에서는 물론이고 외국의 이름있는 정치가들도 많이 만나보았습니다만 장군님 같으신분을 만나뵙기는 처음입니다! 겉치레가 아니라 진심으로 말씀을 드립니다만 장군님께서 계시여 우리 조선에 대통운이 텄습니다!…》

그는 계속하여 자기의 지나온 생애를 더듬으면서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헌신하려던 주관적욕망과는 달리 잘못된 일, 부끄러운 일도 많았다는것을 털어놓았고 앞으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힘자라는껏 일하겠다고 결의도 말씀드렸다.

그는 그날로부터 오래동안 위대한 수령님의 댁에 머물러있으면서 따뜻한 지도와 분에 넘친 배려를 받았다.

참으로 위대한 수령님은 탁월한 령도력을 지니신 희세의 정치가이실뿐만아니라 한없이 고매한 인민적풍모를 지니신 인민의 수령이시였다.

 

고목에 피운 꽃

 

주체37(1948)년 4월 22일 력사적인 남북련석회의 제3일 오전회의가 끝난 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점심식사도 뒤로 미루시고 김규식선생의 숙소를 찾으시였다.

이날 오전회의가 진행되는 도중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민족자주련맹 주석 김규식선생이 아침에 평양에 도착하였는데 신병으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숙소에 누워있다는 소식을 받으시였던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숙소에 이르시니 한발 먼저 가있던 김구선생이 문앞에서 그이를 마중해드리였다.

그이께서는 마중나온 김구선생에게 《김규식선생이 도착하였다고 하기에 왔습니다. 몸이 편치 않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라고 다정히 물으시였다.

백범은 너무도 황송하여 우사(김규식)가 몸이 편치않아 김일성장군님을 맞이하지 못하여 몹시 죄송해한다고 말씀드렸다.

이윽고 김규식선생을 만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두손을 뜨겁게 잡으시고 《김규식선생!》하고 다정히 불러주시면서 년로하고 병약하신 몸으로 먼길을 오느라 수고하셨다고,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데 좀 어떤가고 물으시였다.

자리에 앉으신 그이께서는 그를 정겹게 바라보시며 선생이 오신데 대하여 다들 기뻐하고있다고 하시면서 로환에 계시는 선생이 나라의 통일을 위하여 수고한다고 거듭 치하하시였다.

그이께서는 김규식선생을 다정히 바라보시며 서울에 있는 가족들의 안부도 물어주시고 놈들의 방해책동을 물리치고 평양에 찾아오신것은 애국적거사라고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응당 찾아야 할 길을 찾아왔습니다.》

김규식선생은 위대한 수령님의 한없이 너그럽고 고매한 풍모에 목이 메여 겨우 이렇게 말씀올렸다.

만면에 환한 미소를 담으신 그이께서는 남북련석회의에서 토의되고있는 문제들에 대하여 추려서 말씀하신 후 동행한 일군들을 둘러보시며 김규식선생의 병을 정부병원 의사들이 나와 치료하게 하시오, 의사들이 선생의 곁을 떠나지 말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간곡히 이르시였다.

그러시고는 몸둘바를 몰라하는 김규식선생을 바라보시며 《몸이 불편하여 련석회의에 참가 못하는데 대하여 다르게 생각하지 마시고 몸조리를 잘하여야 하겠습니다. 아직 남북 정당, 사회단체지도자회담도 있으니 몸이 쾌차한 후 일을 보도록 합시다.》라고 뜨겁게 고무격려해주시였다.

밝은 미소를 지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구선생과 김규식선생을 번갈아보시며 이렇게 두 선생께서 오셔서 남북련석회의가 더욱 빛을 내게 되니 얼마나 좋은가고 말씀하시였다.

김규식선생이 《감사합니다. 장군님께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라고 대답올리는데 김구선생은 절절한 목소리로 《조국통일의 려명이 비끼는데 우사도 고목이 재봉춘하듯 기사회생할것입니다.》라고 부채질하여 실내에 화기애애한 웃음꽃을 피웠다.

정말 김규식선생은 그날부터 병에 차도가 있어 자리를 털고일어나 여러 정치행사들과 회담들에도 참가하고 현실참관도 하였다.

그것은 그대로 위대한 수령님의 따뜻한 사랑과 크나큰 덕망, 믿음이 고목에 피운 꽃이였다.

 

중 대 조 치

 

조국해방전쟁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가 진행되고있던 주체39(1950)년 9월 17일이였다.

당시 당안에 기여든 한 불순분자는 남조선《정치인 및 국회의원협의회》 성원들에게 미군이 대병력을 인천에 상륙시켜 지금 서울을 향해 진격중에 있다고 하면서 각자가 피난하여 숨어서 살라고 지껄이였다.

이것은 남조선《정치인 및 국회의원협의회》 해산명령과 같은것이였다.

이에 격분한 《협의회》성원들속에서는 《<숨으라>는 소리는 곧 죽으라는 소리나 같다. 지금 이 판에 어디에 피난가서 숨으라는것인가. 우리는 입북만을 소망한다.》, 《조직적인 입북조치를 요망한다.》는 흥분된 목소리들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그자는 당신들 같은 우익반공정객들은 입북시켜줄수 없다고, 조직적인 입북조치란 있을수 없다고 뇌까린 다음 사라져버렸다.

그자의 책동으로 성남그릴에 모인 《협의회》성원들은 생사존망의 위기에 처했다.

이러한 엄중한 사태가 조성되였을 때 전쟁의 중하를 한몸에 안으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주체39(1950)년 9월 17일 오전 10시 관계부문 일군들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리시였다.

《현재 서울에 있는 남조선의 이름있는 여러 애국적정계인사들이 우리 공화국정부를 지지하여 평양에 들어올 의사를 표명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이 소망대로 평양에 무사히 들어오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미군병력이 인천에 상륙함으로써 서울일대에 위험한 정세가 조성되고 거기에 있는 남조선애국적정계인사들의 신변이 위태롭게 되였다, 만일 우리가 남조선정계인사들을 그대로 방임해둔다면 그들이 적들에게서 박해를 받고 참살당할수도 있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 그들을 구원하고 보호해주어야 합니다.》

그러시고는 그들이 리승만도당의 민족분렬책동을 반대하고 우리가 내놓은 남북협상방안을 지지하면서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한데 대하여, 그후 련석회의정신에 따라 미군철거와 평화적조국통일방안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잘 벌려온데 대하여 지적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이번에 애국인사들을 평양으로 데려올 때 서울에 있는 안재홍, 오하영선생을 비롯하여 입북의사를 표명한 <국회의원>들과 … 전기 <국회>의 <소장파의원>들도 다 데려와야 하겠습니다. 그들은 한때 친미반공의 일선에서 나라와 민족을 배반하는 길을 걸었지만 지금은 … 나라의 평화적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애국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서울에 있는 남조선의 애국적정계인사들이 비록 우리와 정견은 다르지만 그들의 민족적량심과 애국적지조를 소중히 여기고있습니다. 지난날 반공일선에 섰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오늘 나라와 민족을 위한 애국의 길에 나선다면 과거를 불문하고 손잡고나가자는것이 우리의 일관한 립장입니다.

내무성에서는 이번에 입북하는 남조선정계인사들의 신변안전을 철저히 보장하여야 하겠습니다.

남조선정계인사들이 평양으로 들어올 때 김규식, 조소앙, 안재홍선생과 같은 이름있는 정치인들과 년로한분들은 다 고급승용차를 리용하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취해주신 구원조치에는 급변하는 전쟁형세에 대처하여 전쟁피해와 적들의 학살만행으로부터 그들의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은정깊은 사랑이 담겨져있었다.

9월 중순에 인천상륙작전을 획책한 미군이 맹폭격을 하며 서울을 강점한다면 년로하여 움직임이 민활하지 못한 그들이 폭격피해를 받을수도 있을뿐아니라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엄항섭, 최동오, 윤기섭, 오하영, 안재홍 등 련공애국인사들과 출옥한 《국회소장파의원》들이 선참으로 색출대상으로 체포, 투옥, 학살되리라는것은 불을 보듯 명백한것이였다.

미제와 리승만도당이 9월 28일 서울에 다시 들어온 때로부터 그 이듬해 1월 4일까지의 기간에만도 이른바 《부역자처단법》(인민군대를 환영하고 협조한 애국자들을 《부역자》로 몰아 처단한 파쑈악법)에 걸어 무려 7만 2 390여명의 애국자들과 무고한 인민들을 고문학살한 사실이 이를 더욱 명백히 해주었다.

이러한 위기일발의 순간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베푸신 입북조치야말로 폭사와 학살의 위험으로부터, 불순분자들의 암해책동으로부터 그들모두의 운명을 구원해주시는 사랑의 손길이였다.

진정 지난날의 과거는 어지러워도 오늘날 나라의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애국의 길에 들어선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가리지 않고 한품에 안아주고 끝까지 운명을 책임지시려는 위대한 수령님께서만이 내리실수 있는 대용단이였고 중대조치였다.

 

다시 차린 환갑연

 

조국해방전쟁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가 끝난 후인 주체40(1951)년초였다.

당시 허헌선생이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의 두터운 신임과 배려를 받는데 대하여 항상 시비를 걸고 질투하던 일부 사람들은 1950년 후퇴후의 복잡한 정황을 구실로 그를 곤난한 지경에 빠뜨렸다.

그자들은 최고인민회의 의장인 허헌선생이 해당한 물질적대우를 받을수 있도록 실제적조치를 취할 대신에 얼마동안 일부러 모르는척 하였다.

이 사실을 아시게 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크게 노하시였다.

그이께서는 허헌선생에게 극진한 배려를 돌려주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허헌동지는 얼마나 좋은분입니까. 우리 당은 허헌동지를 아끼고 사랑합니다. … 지금까지 허헌동지가 굳이 사양하는 관계로 한해 또 한해 미루어온 환갑을 금년에 차립시다. 이제 돌아오는 허헌동지의 생일에 환갑연을 차려드립시다.…》

허헌선생의 생일 예순여섯돐인 그해 6월 11일이 왔다.

당시 전선형편은 매우 긴장되여있었다. 전쟁 1년동안에 군사적으로나 정치도덕적으로 참패를 거듭한 미제는 저들의 패배를 만회해보려고 이른바 《하기공세》를 미친듯이 다그치고있었으며 조선전선에 병력과 포화력, 비행대와 함대를 대대적으로 증강하면서 전선을 돌파하려고 동서해상으로부터 상륙작전을 감행할 기회를 노리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허헌선생의 환갑연을 마련하여주시던 바로 그날 최고사령부의 밤나무숲 그늘에서는 먼지와 흙탕을 뒤집어쓰며 달려온 전투용승용차들이 뜨겁게 달아오른 차바퀴를 식히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긴장된 전선형편과 관련하여 각 군단, 사단의 군사간부들과 정치일군들을 불러 적들에게 섬멸적타격을 주기 위한 조국해방전쟁 제4계단의 전략전술을 밝히시던 바로 그 시각에 평양시교외의 한 민주선전실에서는 창문에 방공막을 드리우고 당과 정부의 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허헌선생의 환갑연이 열렸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마련하여주신 환갑연을 맞고보니 한가지 서운한것이 있었다. 그것은 위대한 수령님을 한자리에 모시지 못한것이였다.

그날 그이께서는 긴장된 전선형편때문에 참석하실수 없음을 알리시면서 선물을 보내시였다.

그 다음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신의 승용차를 허헌선생에게 보내시여 그를 최고사령부에 부르시였다.

《허헌선생님, 죄송합니다. 어제는 제가 몸을 뺄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선생님의 환갑연을 다시 차렸습니다. 제가 섭섭해서 그럽니다.…》

《장군님!…》

그는 입술이 떨려 그뒤를 잇지 못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재차 마련해주시고 친히 참석하신 그 자리에는 최고사령부회의로 전날 환갑연에 갈수 없었던 군사간부들과 정치일군들이 모두 참가하였다.

그는 갈리는 음성을 겨우 가다듬으며 그이께 비로소 인사를 올렸다.

《장군님! 어제 저를 위해서 그처럼 성대한 자리를 마련하여주시고도 … 또 이렇게 … 참으로 이 은혜야말로 … 죽어서 백골이 되여도 잊을수 없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두손을 다정히 잡아주시고나서 축배잔을 드시며 자리에 앉은 일군들을 향해 말씀하시였다.

《…우리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이며 최고인민회의 의장이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단 성원이며 법제위원회 위원장이며 종합대학 총장인 허헌동지의 환갑연을 겸한 탄생 예순여섯돐을 기념하면서 동지의 건강을 위하여, 금후 사업에서의 보다 높은 성과를 위하여 이 잔을 들것을 제의합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손수 잔에 술을 부으시여 허헌선생에게 권하시면서 《선생님, 조국통일을 위하여, 통일의 그날까지 오래 앉아계셔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한량없는 은정에 눈물적시며 그는 목메인 목소리로 수령님께 맹세다졌다.

《장군님! 바다보다 넓은 장군님의 은덕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하여 저의 여생을 바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