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김일성주석 통일일화』 중에서

 5. 뜨거운 동포애

 

《위대한 수령님께서 내놓으신 민족대단결의 사상과 리념, 수령님께서 지니신 숭고한 인간애와 민족애는 각계각층의 동포들을 민족적단합과 조국통일의 길에 과감히 나서게 한 힘의 원천이였다.》

김 정 일

 

 내각결정 60호

 

주체48(1959)년 9월, 례년에 없던 풍수해가 온 남녘땅을 휩쓸었다.

사나운 비바람에 곡식들은 물에 잠기고 강물은 바다가 되여 도시와 마을을 삼켜버렸다.

그리하여 수천명의 남녘동포들이 목숨을 잃게 되였고 80여만에 달하는 리재민들이 집과 생활도구와 농토를 잃고 생사기로에 놓이게 되였다.

눈비가 조금만 내려도 판자집에서 고생하는 남반부인민들을 걱정하시고 강물이 조금만 불어도 남반부인민들이 애써 지은 농사에 피해가 있을가 심려하시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남반부리재민들을 한시바삐 구원하시기 위하여 내각결정 60호를 채택하도록 하시였다.

우선 1차적으로 쌀 3만석, 직물 100만마, 신발 10만컬레, 세멘트 10만포대, 목재 150만재… 이렇게 결정서초안에 구호물자의 수량을 한자한자 적어나가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쓰라린 마음을 억제하시는듯 잠시 펜을 멈추시였다.

미제와 그 주구들에 의해 단 하루도 편히 살수 없었던 그들에게 자연재해까지 겹쳐들었으니 그들의 생활을 어떻게 하면 안정시킬수 있을가, 그러자면 또 무엇을 더해줄것인가,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기셨던 그이께서는 결정서에다 구원의 손길을 찾아 남반부리재민들이 북반부에로 넘어온다면 언제든지 안정된 생활을 보장해줄것이라는것을 더 적어넣으시였다.

주체48(1959)년 9월 23일 위대한 수령님의 뜨거운 동포애적사랑이 깃든 내각결정 60호가 채택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운명의 갈림길에 놓여있는 자기들에게 이처럼 뜨거운 구원의 손길을 펼쳐주시였다는 소식에 접한 남녘땅인민들은 그이이시야말로 자기들을 구원해주시는 민족의 태양이시고 생명의 은인이시라고 하면서 위대한 수령님을 끝없이 흠모하였다.

 

결혼문제까지 심려하시며

 

주체49(1960)년 9월 21일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개성방직공장을 현지지도하시면서 공장지배인실에서 협의회를 가지시였다.

남조선에서 들어온 동무들의 사업과 생활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료해하시던 그이께서는 공장의 한 일군에게 이 공장에는 의용군출신녀성간부들이 없는가고 물으시였다.

당시 민청(오늘의 청년동맹)위원장이 의용군으로 들어온 녀성동무라는 대답을 들으신 그이께서는 어느 동무가 민청위원장인가고 물으시며 참가자들을 둘러보시였다.

민청위원장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무는 고향이 어디입니까?》라고 물으시며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시였다.

민청위원장은 흥분이 앞서서인지 잠시동안 머뭇거리다가 고향이 서울이라고 말씀올렸다.

그러자 그이께서는 서울에서 언제 들어왔으며 서울에는 누가 있는가고 물으시였다.

《부모님과 동생 두명이 있습니다.》

《소식을 모릅니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낮은 음성으로 다시 물으시였다.

그렇게도 흠모하여마지 않던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는것만도 영광스럽기 그지없는데 이렇게 자기의 아픈 마음까지 속속들이 헤아려보시며 심려해주시는 그이앞에서 그는 끓어오르는 격정을 가까스로 누르며 부모님소식을 모르고있다고 말씀올렸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흐리신 안색으로 그를 한참동안이나 측은하게 바라보시다가 아픈 마음을 진정시켜주시려는지 말씀을 바꾸시여 동무는 의용군으로 들어왔는가, 어느 부대에서 복무했는가, 공부는 얼마나 했으며 언제 입당을 했는가고 그의 사업과 생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료해하시며 나이는 몇살이고 식구는 몇이나 되느냐고 물으시였다.

《저 혼자입니다.》

《결혼을 안했습니까?》

그는 자기 문제로 하여 그이께 또 근심을 끼쳐드린다고 생각하니 머리를 들수가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이찬 딸을 앞에 앉힌 어머니인듯 근심스런 얼굴로 그를 바라보시며 《결혼도 안하고 통일된 다음에 어떻게 부모님들을 만나겠소? 결혼을 하고 만나야지.… 결혼하고 고향에 나가면 부모님도 얼마나 기뻐하겠소.》라고 다정하게 타이르시였다.

지척에 놓인 서울, 한나절이면 가고도 남을 서울거리 어느 한 모퉁이에서 아침저녁으로 한살두살 딸의 나이를 손꼽아 세여보며 한숨지을 남녘의 부모님들을 대신하여 이렇듯 한 녀성의 결혼문제까지 육친의 정으로 돌봐주시는 위대한 수령님, 남편과 함께 부모님앞에 반갑게 인사드릴 통일되는 그날을 그려보시며 이토록 그의 결혼문제까지 념려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따뜻한 사랑앞에서 협의회참가자들모두는 가슴부풀어오름을 금할수 없었다.

 

남녘어민들이 받아안은 사랑

 

주체53(1964)년 7월 하순 어느날이였다.

《푸로시호》로 불리운 강한 태풍이 남조선의 서해안전역을 휩쓸어 경기도 강화도를 중심으로 한 서해안일대의 수많은 남조선어민들이 바다에서 조난당하여 무리죽음을 당하는 참상이 빚어졌다.

대체로 낡은 범선을 가지고 고기잡이를 하던 남조선어민들은 불의에 들이닥친 강한 태풍의 힘을 도저히 감당해낼수가 없었던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어민들이 배와 함께 바다깊이 수장되였으며 박살난 배의 나무쪼각을 그러안고 간신히 목숨을 건진 어민들은 풍랑에 실려 공화국북반부령해에로 밀려들어오게 되였다.

이러한 비보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즉시에 조선인민군 해병들로 하여금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그들을 꼭 구원하도록 긴급대책을 세워주시였다.

그리하여 사흘동안이나 표류하던 220여명의 남조선어민들과 30여척의 어선이 위대한 수령님께서 취해주신 뜨거운 동포애적조치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구원되였다.

북반부수역에 들어왔던 남반부어민들이 모두 구원되였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못내 기뻐하시며 허약자들과 부상자들을 지체없이 병원에 입원시켜 건강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잘 치료해주도록 이르시였다.

그러시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여 그이께서는 남반부어민들에게 옷과 신발은 물론 필요한 생활필수품들도 모두 공급해주고 북반부에 머무르는 기간 아무 불편없이 지내도록 온갖 편의를 다 돌봐주라고 간곡히 이르시였다.

그러던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한 일군을 부르시여 구원된 남조선어민들의 생활형편을 세세히 물으시였다.

일군이 남조선어민들의 생활형편과 그들과의 사업내용에 대하여 보고드리자 그이께서는 《그 사람들이 다 죽을번 하였습니다.》라고 하시며 안색을 흐리시였다.

일군이 그들속에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있다고 말씀올리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침중한 어조로 남조선에서 대학이나 고등학교를 나오고도 일자리가 없으니까 어부노릇을 한다고 가슴아프게 뇌이시였다.

그이께서는 생각깊으신 눈길로 일군을 바라보시며 남조선어민들이 빨리 나가서 고기잡이를 하겠다고 하지 않는가고 물으시였다.

일군은 남조선어민들이 어버이수령님의 배려로 난생처음 사람다운 대접을 받으면서 공화국북반부의 찬란한 현실을 보고 크나큰 감동에 휩싸여있다고 말씀올리였다. 그런데 하루라도 벌지 못하면 생계를 이어갈수 없는 남조선에서 사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은근히 근심을 놓지 못하고있다고 사실대로 보고드리였다.

그이께서는 아마 그럴것이라고 하시고나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나갈 때 쌀을 줍시다.》

이어 그이께서는 남조선어민들속에 공화국북반부에 있는 처나 어머니를 만나보자는 사람이 없는가고 일군에게 물으시였다.

사실 그때 구원된 어민들가운데는 공화국북반부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보았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슴속에 품고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일군이 그들의 이러한 소망을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위대한 수령님께 죄다 말씀올리자 그이께서는 한동안 깊이 생각하시며 아무 말씀 없으시다가 마음이 괴로우신듯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서시여 방안을 거니시였다.

얼마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일군에게로 몸을 돌리시며 저으기 갈리신 음성으로 남조선어민들이 북에 있는 부모처자들을 다 만나보게 하자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난당한 남조선어민들을 동포애의 정으로 따뜻이 돌봐주며 배들도 잘 수리해주어야 한다고 거듭 간곡히 이르시면서 참관과 견학일정도 짜주시고 떠나보낼 때 환송모임도 잘해주어야 한다고 당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남조선어민들에게 베풀어주신 사랑과 은정은 이에만 그치지 않았다.

구원된 어민들가운데 환갑을 맞게 되는 로인이 있다는것을 아시고 그에게 환갑상을 차려주도록 하시고 환갑날 입을 옷감까지 선물로 보내주시였으며 로인에게 시집갈 나이가 다된 딸이 있다는것을 아시고는 로인의 딸이 시집갈 때 입을 첫날옷감까지 보내주시는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참으로 조난당했다가 구원된 남조선어민들에게 돌려주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의 사랑과 배려, 그것은 남조선어민들과 그 가족들, 아니 온 남녘동포들에게 베푸시는 그이의 사랑이고 배려이며 깊고깊은 은정이였다.

하기에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을 안고 고향으로 향하는 남조선어민들은 온 남녘동포들의 한결같은 심정을 합쳐 불멸의 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높이 부르며 조국통일을 위해 투쟁할 불타는 결의를 다지였다.

 

기쁨보다 걱정을 앞세워준 기상통보

 

례년에 없는 왕가물이 계속되던 주체54(1965)년 7월초 어느날이였다.

각지 기상관측소에서 온 기상통보자료를 종합하던 기상수문국의 한 일군은 기쁨에 넘쳤다.

여러달째 지속되던 고기압이 밀려나고 마침내 저기압이 형성된것이다.

그 일군이 가물에 의한 농사피해때문에 걱정이 되시여 수시로 전화를 걸어오시는 위대한 수령님께 기쁨을 드릴수 있게 되였다고 생각하고있을 때 마침 전화종소리가 울렸다.

송수화기를 드니 아니나다를가 위대한 수령님께서 걸어오시는 전화였다.

《날씨가 흐렸는데 어디서 오는 저기압이요?》

《내몽골쪽에서 오는 저기압입니다.》

《내몽골쪽에서?》

《예, 그렇습니다.》

《남쪽에서 오는 저기압이 아니구만…》

그이께서는 서운하신듯 이렇게 말씀하시는것이였다.

사실 계절로 보면 남쪽저기압이 밀려와야 하였고 그래야 비도 많이 내릴수 있었다.

일군은 그이께 자신있게 말씀드렸다.

《수령님, 그래도 래일부터는 비가 오겠습니다.》

그이께서는 강수량을 알아보시고나서 다시 물으시였다.

《이번 저기압이 우리 나라 전반지역에 다 미칠것 같소?》

《저기압세력이 약해서 중부조선까지나 미칠것 같습니다.》

《중부까지만 미친단 말이요?》

《예, 그렇습니다.》

그이의 말씀은 또 끊어졌다. 잠시후 《곤난하구만…》하는 그이의 실망하신듯 한 음성이 무겁게 울려왔다.

(그처럼 기다리시던 비가 온다는데 어째서 실망해 하실가?)

일군은 도무지 영문을 알수가 없었다.

《저기압이 중부조선까지만 미친다니 말이요.… 남녘동포들도 밥을 먹어야 할것이 아니요! 거기도 두달이나 가물었는데…》

순간 일군은 가슴이 뜨거워올랐다.

(아, 그래서였구나!)

일군은 그이의 걱정을 덜어드릴 생각으로 말씀드렸다.

《수령님, 이제 보름만 있으면 남쪽저기압이 밀려옵니다.》

하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근심어린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아직도 보름을 기다리란 말이요?… 하루가 새로운데…》

전화는 끊어졌다.

다음날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비가 내려 온 나라가 기뻐하였지만 오직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걱정속에 남쪽하늘을 바라보고계시였다.

 

명태떼를 두시고도

 

어느해 겨울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한 일군을 몸가까이 부르시여 가르치심을 주시다가 올해에 농사가 잘되여 쌀풍년이 든데다가 어장에 고기떼가 와글와글하여 물고기풍년까지 들었다고 호담하게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동해안에 폭이 한 3 000m나 되고 길이가 약 5 000m나 되는 명태떼들이 와글와글거린다고 말씀하시였다.

인민생활을 윤택하게 하기 위하여 끊임없는 로고와 심혈을 기울여오신 위대한 수령님이시였기에 동해안의 물고기떼를 보시고 그리도 기뻐하신것이였다.

그러시다가 문득 말씀을 끊으시고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기시더니 그런데 참 걱정이요라고 심려어린 음성으로 조용히 뇌이시는것이였다.

그 일군은 아마 수산부문 지도일군들이 조직사업을 잘하지 못하였거나 물고기잡이와 관련한 문제에서 난관이 제기된것이라고 짐작하면서 그이의 다음 말씀을 기다렸다.

그런데 걱정어린 표정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한손으로 가볍게 다독이실뿐 그이께서는 그냥 깊은 생각에 잠겨계시였다.

이윽고 눈길을 드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남조선어장에는 물고기가 없어 요즘 어민들이 고기를 전혀 잡지 못한다는데 어떻게 생계를 이어가겠소라고 말씀하시는것이였다.

일군은 그만 가슴이 뭉클하여 무어라 말씀을 드릴수가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어장에 욱실거리는 물고기떼를 두고도 남조선어민들의 생활이 걱정되시여 그토록 마음을 놓지 못하고계시였던것이다.

 

사랑의 구호조치

 

주체73(1984)년 8월말과 9월초에 걸쳐 남조선에서는 례년에 드문 대홍수가 났다. 남조선당국의 공식발표에 따르면 수해로 300여명이 죽고 20만 7 000여명의 리재민이 났으며 3만 6 700여채의 살림집이 파괴되는 참상이 빚어졌다. 서울을 비롯한 피해지역에서 거처할데없이 한지에 나앉은 리재민들은 당장 먹을것, 입을것이 없어 아우성을 치고있었다.

그무렵인 9월 8일 평양의 2. 8문화회관(당시)에서는 공화국창건 기념보고회가 성대히 개최되기로 예정되여있었다. 바로 이 회의를 앞둔 시각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남조선의 대홍수와 피해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으시였다. 남조선인민들의 큰물피해소식을 들으신 그이께서는 몹시 착잡한 심경에 사로잡히시였다. 집을 잃고 한지에 나앉아 허기진 배를 그러안고 있을 남녘형제들의 가긍한 정상이 가슴아프게 안겨오셨기때문이였다. 그이께서는 해당 부문 일군들을 부르시여 남조선당국이 최종집계하여 발표한 리재민수를 알려주시면서 5명을 한가족으로 계산하여 세대당 쌀은 250kg, 천은 17m씩 차례지게 하고 3만동의 살림집을 지을수 있는 세멘트와 각종 질병의 예방과 치료에 쓸 의약품들을 보내주자고 말씀하시였다.

7천만 온 겨레를 한품에 안으신 민족의 위대한 어버이만이 베푸실수 있는 사랑의 구호조치였다.

남조선리재민들을 구제한다고 요란스레 떠든 미국이 던져준 《구호금》은 겨우 2만US$, 일본의 《구호금》은 10만US$였으며 당시 적십자의 인도주의구제력사에서 가장 많았다고 한 1983년에 수해를 입은 인디아가 스웨리예로부터 받은 구제금도 겨우 75만US$였다.

이에 비하면 공화국의 구호물자는 금액상으로 무려 1 800만US$였으니 민족을 위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과 은정은 정말 아낌을 모르는것이였다.

공화국의 성의있는 노력에 의해 쌀 5만석, 천 50만m, 세멘트 10만t, 의약품 759지함의 구호물자는 수백대의 화물자동차와 대형짐배들에 실려 북의 열광적인 환송과 남의 목메인 환영속에 륙로로는 판문점, 바다로는 인천, 북평을 거쳐 남녘수재민들에게 전해지는 커다란 민족사적사변이 펼쳐졌다.

이 구호물자는 불행을 당한 남녘동포들에게 보내는 뜨거운 혈육의 정, 더우기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주석께서 남녘의 겨레들에게 기울이시는 어버이사랑의 결정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