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김일성주석 통일일화』 중에서

 

4. 통일애국의 한길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라가 분렬된 첫날부터 조국통일의 기치밑에 민족의 대단결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현명하게 령도하시여 조국통일운동을 전민족적인 운동으로 확대발전시켜나가시였습니다.》

김 정 일

 

 

허헌선생이 받은 회답편지

 

주체34(1945)년도 다 저물어가고있던 12월 어느날, 서울에서 살고있던 허헌선생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 보내신 친필편지를 받게 되였다.

《허헌선생에게》

꿈속에서도 그립던 위대한 수령님의 활달하신 친필에 접하는 순간 허헌선생의 가슴속에서는 세찬 격정의 파도가 일었다.

(아, 얼마나 기다리던 장군님의 손길인가!)

당시 미국은 남조선을 저들의 식민지로, 군사기지로 만들기 위하여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명맥을 틀어쥐고 파쑈적인 《군정통치》를 실시하였으며 남조선인민들의 민주주의적권리를 가혹하게 유린말살하였다. 한편 혁명의 배신자들, 정치적투기업자들은 저마다 《혁명가》, 《애국자》로 자처하면서 정세를 더욱 혼란시키고있었다.

남조선의 이러한 사태는 난국을 타개할 정확한 로선과 령도를 절박하게 바라마지 않았으며 이 요구를 옳게 해결하는가 못하는가 하는것은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좌우하는 관건적인 문제였다.

그리하여 허헌선생은 남조선정세를 개탄하고 이를 수습하실분은 김일성장군님뿐이시므로 하루속히 서울에 오시여 혼란된 사태를 바로잡으시고 나라와 겨레를 옳은 길로 이끌어주실데 대한 간절한 심정을 담은 편지를 위대한 수령님께 올리였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해방직후 복잡한 정세하에서 인민들을 새 조국건설에로 이끄시기에 그토록 분망하신 가운데서도 시간을 내시여 친히 허헌선생에게 회답편지를 보내주신것이였다.

마침내 마음을 안정시킨 선생은 한없이 뜨거운것을 머금으며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이 담겨진 편지를 한자한자 읽어내려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편지에서 허헌선생이 과거 조국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조선혁명가들의 항일무장투쟁을 진심으로 동정하고 지지하여준데 대하여 감사를 전하시였다.

그이께서는 나라에 조성된 정세를 심오하게 분석하시고 우리는 반동들이 우리 나라에 수립하려는 부르죠아정부와 부르죠아민주주의의 반동적본질을 똑똑히 알고 그것을 반대하여 견결히 투쟁할뿐아니라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모든 힘을 다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북조선인민들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에 확고히 들어서고있는데 대하여 구체적으로 지적하시였다. 그리고 남조선인민들도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원쑤들의 책동을 짓부시면서 견결히 싸워야 한다고 지적하시였다.

허헌선생은 온 심혼을 위대한 수령님의 편지에 쏟았다.

편지의 한글자한글자는 캄캄한 밀림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일 때 희망의 언덕에로 이끌어주는 빛발처럼 안겨오고 사막에서 목마를 때 오아시스의 샘물처럼 가슴에 흘러들어 순간도 눈길을 뗄수가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편지에서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광범한 민주력량의 단결을 강화하는것입니다.》라고 하시면서 그렇지 못한 남조선의 실태를 심각하게 지적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옳은 립장에 서서 반동분자들과 파벌을 반대하여 적극 투쟁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따라나설것이라고 대중전취를 위한 구체적인 방향과 방도에 대해서도 가르쳐주시였다.

끝으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선생이 건강할것과 선생의 애국사업에서 큰 성과가 있을것을 진심으로 바란다고 하시며 어떤 기회에든지 선생과 만나고저 한다고 쓰시였다.

편지를 다 읽고난 허헌선생은 가슴벅차오르는 감격으로 하여 진정할수가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편지는 나라의 진정한 민주주의적발전과 민족의 통일을 지향하는 모든 남조선인민들과 애국적민주인사들에게 휘황한 진로를 열어준것이였다.

허헌선생은 한없이 고귀한 친필로 남녘의 겨레들을 손잡아 이끌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께 충심으로부터 가장 뜨거운 인사를 올리였다.

《위대하신 김일성장군님, 고맙습니다. 장군님의 가르치심대로 조국통일을 위하여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그후 허헌선생은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대로 애국적민주인사들과 손잡고 남조선사회의 민주주의적발전과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억세게 싸웠다.

 

 

몽양이 찾은 진리

 

주체35(1946)년 2월 어느날 당시 서울에서 조선인민당 위원장으로 활동하던 몽양 려운형이 평양을 찾아왔다.

그가 사선을 헤치고 평양으로 찾아온것은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뵈옵고 가르치심을 받기 위해서였다. 오로지 김일성장군님께서만이 남조선인민들이 나아갈 앞길을 명확히 밝혀주실수 있다고 생각하였기때문이였다.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그의 이러한 숭배심은 오랜 세월 걸출한 영웅을 찾아헤맸던 파란많은 체험을 통해 얻은 확고한 신념이였다.

일찌기 청년시절에 독립의 뜻을 품고 3. 1운동에도 참가하여 만세도 불렀고 동방민족의 자결권을 위한 국제회의장에 달려가서 약소민족의 설음도 하소했으며 민족주의에 뜻을 두고 《상해림시정부》에도 찾아갔는가 하면 또 선진사상에 기대를 걸고 공산주의운동가들도 찾아가 만났던 몽양이였다. 또 한때는 민족해방의 진로를 찾으려고 동남아일대를 편답하면서 이름난 민족운동자들과 무릎을 마주하고 반침략투쟁방도도 모색했고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을 만나 민족자결문제를 두고 의논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어디에서도 조선민족해방의 진로는 찾을수 없었다.

꿈속에서도 해빛을 그리며 어둠속을 헤매던 몽양이 비로소 조선독립의 려명을 찾은것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영웅적항일전쟁을 벌리신다는 소식에 접한 때부터였다. 그는 무릎을 치며 이제야 민족이 그토록 갈망하던 절세의 영웅이 저 백두산에 오르시였으니 조선의 맥박이 뛰게 되였다고 기뻐했다. 그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보천보전투에서 일제에게 큰 참패를 안기시였을 때 자기가 사장으로 있는 신문 《중앙일보》에 이 특별보도를 크게 싣게 하고 편집인들과 함께 집에 돌아와 위대한 수령님의 무훈을 축하하는 축배까지 들었었다.

그래서 민족사에서 처음으로 맞이한 걸출한 영웅이신 위대한 수령님만을 굳게 믿고 따를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했던 려운형선생이였다.

이러한 몽양이기에 해방후 남조선에 조성된 난국을 타개할 방도를 가르쳐주실분은 오직 위대한 수령님밖에 없으며 그이께서만이 력사와 민족의 요구에 과학적해답을 주실수 있을것이라고 믿고 떠났던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2월 11일 몸소 려운형선생을 만나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너그러우신 인품에 끌려 려운형선생은 어려움도 잊고 그간 남조선에서 겪은 고충과 애로를 솔직히 말씀드리면서 지금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나서서 자기의 주장을 웨치고있는데 해방된 조선이 나아갈 길을 장군님께서 밝혀주실것을 간절히 말씀드렸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청을 쾌히 받아들이시여 그가 알고싶어 하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밝혀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우리 인민은 절대로 일부 사람들이 부르짖는 미국식《민주주의》의 길을 걸어서도 안되며 당장 사회주의혁명을 하여도 안된다는것을 밝히시고 조선혁명의 성격으로부터 출발하여 우리는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는 조선식민주주의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조선식으로 건국사업을 해나가야 합니다. 조선사람에게는 미국옷도 맞지 않고 쏘련옷도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맞지도 않는 다른 나라의 옷을 입을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맞는 조선식옷을 만들어 입어야 합니다.》

그러시고는 조선인민은 조선식민주주의의 요구에 맞게 진정한 인민의 정권을 수립하고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을 철저히 수행함으로써 부강한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여야 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건국사업에서 절대로 외세에 기대를 걸어서는 안된다고, 우리는 외세를 믿을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조선민족의 단합된 힘을 믿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건국사업을 성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서는 전 민족이 하나와 같이 굳게 단결하여야 합니다. 공산주의자이건 민족주의자이건, 정견의 차이가 있건 없건 관계없이 제국주의와 봉건을 반대하며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각계각층의 모든 애국적인민들이 굳게 단결하여야 새 민주조선을 건설할수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각계각층의 모든 애국적민주력량을 튼튼히 묶어세우려면 민주주의적인 통일전선을 굳게 형성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통일전선사업에서 나타나고있는 편향을 바로잡고 하루빨리 남조선에서 민주주의적인 통일전선을 튼튼히 형성하는데서 중요하게 나서는 문제들에 대하여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려운형선생은 조선식이라는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에서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는 분명 그이의 말씀에서 기성의 리론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위대한 자기 인민의 힘을 느꼈던것이다.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은 려운형선생의 가슴에 절절히 울리였다. 참으로 난생처음 들어보는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애국의 진리, 투쟁의 진리, 혁명의 진리였다.

 

미루신 점심식사

 

주체37(1948)년 4월 1일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북조선인민위원회와 평양시인민위원회 책임일군협의회를 소집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남북련석회의준비와 관련하여 동무들을 불렀다고 하시면서 벌써 남조선에서 일부 대표들은 미제와 리승만도당의 탄압과 온갖 방해책동을 물리치고 용감하게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찾아오고있다고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일군들을 둘러보시며 대표들가운데서 일부 사람들은 북조선에서 우리가 하는 일이 어떤가 한번 가보자고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을것이라고, 어쨌든 그들이 우리를 찾아온것만큼 우리는 그들을 진실로 동포애적심정으로 따뜻하게 맞아주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아무러한 불편도 느끼지 않도록 그들의 생활을 정성껏 돌봐주어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대표들이 북조선에 들어올 때 려행하는 손님들처럼 마음놓고 좋은 옷차림에다 려장까지 갖추어가지고 올리는 만무하니 그들이 들어오는 즉시로 매 사람에게 옷과 신발을 비롯하여 내의와 세면도구에 이르기까지 다 공급할수 있도록 세심한 관심을 돌려야 하며 깨끗한 침실에서 편안하게 생활하도록 잘 돌봐주어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였다.

총칼이 숲을 이룬 암흑의 땅에서 민족통일의 위업을 위하여 만난을 무릅쓰고 들어오는 남조선대표들을 뜨거운 동포애적심정으로 맞아주시려는 그이의 한없이 숭고한 민족애에 감격하여 일군들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협의회는 점심시간이 다되여 끝났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서시며 일군들에게 시내를 한바퀴 돌아보자고 하시였다.

그러자 일군들은 그이의 건강이 념려되여 누구나 마음속으로 이 일만은 뒤로 미루시기를 간절히 바랐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의 심정을 헤아리신듯 너그럽게 웃으시며 식사시간이 좀 늦어지더라도 회의준비에서 미흡한 점이 없는지 시내를 돌아보면서 더 알아보자고, 먼저 회의장소인 모란봉극장부터 가보자고 하시며 차에 오르시였다.

얼마후 모란봉극장에 이르신 그이께서는 봄정기 그윽한 모란봉의 수려한 모습을 이윽히 바라보시며 깊은 생각에 잠기셨다가 모란봉은 예로부터 명승지로 이름높아 많은 시인들이 그 아름다움을 시에 담아 노래한 곳이며 우리 인민의 애국의 넋이 깃들어있는 유서깊은 곳이라고, 모란봉에 유원지를 꾸리고 훌륭한 극장까지 건설하여놓으니 인민들이 얼마나 좋아하는가고, 남조선대표들도 이 극장에 와보면 느끼는 심정이 북조선인민들과 다를바 없을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극장의 외부를 보시며 천천히 극장안으로 들어가시였다.

그이께서는 극장안에 들어서시여 훌륭하게 꾸려진 내부를 돌아보시며 수행한 일군들에게 해방후 어려운 조건에서도 모란봉극장을 건설하여놓은것은 어느모로 보나 잘한 일이라고, 모란봉극장은 그 규모로 보아 련석회의를 하기에 적당한 장소라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무대에 오르시여 연탁도 보아주시고 객석에 내려서시여서는 의자도 짚어보시면서 의자를 모두 흰 천으로 씌우면 회의장이 더 환해보일것이라고 하시였다.

이윽고 모란봉극장에 대한 현지지도를 마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평양역쪽으로 가보자고 하시였다.

일군들은 이제는 시간도 퍼그나 지났으므로 그이께서 쉬시도록 말씀드리려 하였으나 그이께서는 피로도 잊으신채 그대로 차에 오르시였다.

차는 모란봉기슭을 떠났다. 차창밖으로는 새 조국 건설에 떨쳐나선 사람들의 열정에 넘친 모습들과 력사적인 남북련석회의준비로 들끓는 사람들의 희망찬 모습들이 언뜻언뜻 흘러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모습들을 조용히 바라보시며 곁에 앉은 일군에게 상점들에서는 남조선대표들에게 친절히 봉사를 하며 서점들에서는 해방후 북조선에서 출판한 도서들을 다 내다놓고 련석회의대표들에게 팔아주는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시였다.

잠시후 평양역에 이르신 그이께서는 차에서 내리시여 역구내를 돌아보시였다.

그이께서는 기관차를 제때에 수리정비하고 객차들을 깨끗이 거두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련석회의대표들이 평양으로 올 때 그들에게 도중역들에서 지방특산물을 공급하기 위한 사업도 조직하는것이 좋겠다고, 철도에서 경각성을 높여 남조선대표들이 타고오는 렬차에서 사고가 발생하지 않게 하며 중간역들에 대한 경비대책을 철저히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 평양역에 대한 현지지도를 마치시였을 때는 점심시간이 훨씬 지났다.

일군들은 그이께서 이제는 댁으로 가실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이께서 타신 차는 댁으로가 아니라 다시 북조선인민위원회청사를 향해 달려가는것이였다.

이처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력사적인 민족회합의 성과적보장을 위해 끼니도 휴식도 뒤로 미루시고 모든 시간과 사색과 정력을 고스란히 바쳐가시였던것이다.

 

비단천초대장

 

주체37(1948)년 4월초 어느날이였다.

그날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할 남조선대표들에게 보낼 초대장을 쓰고있던 일군들은 한자한자에 정성을 기울이느라 밤늦도록 손에서 붓을 놓지 못하고있었다.

그런데 자정도 훨씬 지났을 때였다. 갑자기 문기척소리와 함께 조용히 문이 열리더니 천만뜻밖에도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 방안에 들어서시는것이였다.

순간 일군들은 한자리에 못박힌듯 서버리고말았다. 그이께서 자기들을 찾아오시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던것이다.

그러니 이 한밤중 자기들의 일터에서 위대한 수령님을 뵈옵게 된 그들의 감격이 오죽하였겠는가.

그들은 넘치는 환희와 기쁨에 몸둘바를 몰라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을 둘러보시며 밤도 깊었는데 모두들 수고한다고 하시며 그들이 초대장을 쓰고있던 책상앞으로 다가오시였다. 그러시고는 그들이 만든 초대장을 한손에 드시여 펼쳐보시더니 이만하면 괜찮게 되였다고 말씀하시였다.

별로 잘 만들지도 못한 초대장을 두고 그이께서 분에 넘친 치하를 해주시니 일군들은 황송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사실 그들은 정성을 들여 초대장을 만드느라고 했지만 하얀 비단천에 붓으로 일일이 쓰자고 하니 조급성만 앞서고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한동안 초대장을 유심히 들여다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이 초대장은 우리가 남반부의 정당, 사회단체대표들에게 처음으로 보내는 공식초대장입니다. 그런것만큼 우리의 성의가 다 반영되여야 하겠습니다.

지금 써놓은것도 잘되였지만 이제부터 쓰는것은 좀더 정성들여 잘 써야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초대장을 받으면 우리의 성의있는 노력에 감동되여 하루빨리 우리를 찾아오고싶은 충동을 받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초대장을 쓰는 사업이 회의성과와 직접 관련되여있는것만큼 절대로 실무적인 일로 생각하지 말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러시고는 일군들의 어깨를 다정히 눌러앉히시며 어서 초대장을 계속 쓰라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일군들이 쓰는 글자의 배렬과 간격, 글자획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바로잡아주시면서 그들과 함께 그 방에서 새날을 맞이하시였다.

얼마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북남조선의 모든 애국적인 정당, 사회단체대표들과 개별적인사들에게 초대장을 띄우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남조선대표들에게 보내는 초대장은 분렬주의자들의 악랄한 방해책동을 고려하여 직접 사람을 파견하거나 국제우편의 형식으로 보내도록 하시였다.

조선의 특산인 비단천에 붓으로 한자한자 정성스레 쓴, 첫눈에 봐도 애국충정과 민족지성의 기대와 념원이 절절히 흘러넘치는 초대장이 전달되자 그 파문은 대단하였다.

애국적인 정당, 사회단체들에서는 련석회의에 참가할 대표를 선출한다, 초대장을 받은 개별적인 인사들은 려장을 꾸린다 하면서 그 준비사업에 분망하였다.

일찌기 반공벽을 든든히 쌓고 살아왔으며 해방직후 한때는 북반부의 시책들을 비방중상하면서 숱한 테로, 암해분자들을 들여보내여 죄행을 저지르게 한 백범도 비단천초대장을 받아안고는 초대장을 한없이 고귀한 믿음의 증서로 품속에 깊이 간직하고 《민족통일에 이바지할수 있다면 38°선을 베고 쓰러져도 좋다.》고 하면서 평양을 향해 결연히 서울을 떠났다.

정녕 비단천초대장은 회의에 참가하라는 한갖 통지서가 아니였다.

그것은 온 민족을 통일애국의 한길로 이끌어주는 태양의 해발이였다.

 

백범이 흘린 눈물

 

주체37(1948)년 4월 20일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하여 평양에 도착한 백범 김구를 만나주시였다.

백범일행이 일군들의 안내를 받으며 위대한 수령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가니 그이께서는 몸소 문밖에까지 나오시여 그들을 기다리고계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렁우렁하고 친근하신 음성으로 《김구선생!》 하고 불러주시며 뜨겁게 손을 잡아주시였다.

만면에 환한 미소를 담으신 그이께서는 《오시느라고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고령에 계시는분이 조국통일위업을 위해 먼길을 와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더없이 겸허하게 말씀하시며 그를 방으로 안내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선생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련석회의를 시작하였다가 도착하지 않아서 오늘 하루 휴회를 하였다고 하시며 이제 선생이 오셔서 회의는 더욱 빛을 내게 되였다고 크나큰 기대와 믿음을 표시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패기와 정열이 넘치는 젊으신 모습, 예지로 빛나는 준수하고 환하신 존안, 한없이 겸허하고 고결하신 덕망과 인민적풍모에 감복된 백범은 그저 《예, 지당한 말씀입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몸둘바를 몰라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백범에게 련석회의 첫날회의소식을 알려주시고나서 남조선에서 리승만도당의 《독촉》(《대한독립촉성국민회》)과 김성수계의 《한국민주당》을 제외하고는 애국적정당, 사회단체가 거의다 참가하였으며 회의에서는 이미 선생과 서신으로 교환한 내용에 근거하여 조선의 정치정세를 토의하고 남조선《단독선거》와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기 위한 투쟁대책을 세우게 된다고 하시면서 만일 선생이 회의안건에 의견이 있으면 다시 토의하여 회의에 제기할수 있다고 말씀하시였다.

한없이 부드럽고 소탈하신 그이의 말씀에 더욱 감복한 백범은 회의안건에 의견이 있는것이 아니라고,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하면서 《장군님께서 력사적인 련석회의를 마련하시기에 로고가 많으셨겠습니다.》라고 자기의 심중을 터놓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수고야 오히려 년로하신 김구선생이 먼길을 오시느라 많이 하였다고 하시면서 련석회의는 4월 23일까지 하고 그다음에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지도자들의 회합도 있겠으니 무리하지 말고 푹 쉬신 후 일을 보도록 하라고, 통일적인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려면 우선 건강해야 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평양에 머무르는 동안 불편한 점이 있으면 제기하라고 이르신 후 자신의 서기와 부관으로 일하는 일군들을 김구선생의 비서, 호위부관으로 사업하게 했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백범의 감동은 극도에 달했다.

(자신의 서기와 부관까지 보내주시다니! 이것이야말로 김일성장군님께서 나에게 모든것을 다 주신것이 아닌가! 세상에 이런 믿음이 또 어디에 있을손가!)

그이를 만나뵙고 숙소로 돌아가는 승용차안에서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백범은 혼자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토록 큰 세기적위업을 이룩하신 김일성장군님께서 그렇게 젊으신 령장이시였구나!》

이날 오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백범일행이 든 숙소를 방문해주시였다. 차에서 내리신 그이께서는 만면에 환한 웃음을 담으시고 마당에 나와 마중하는 백범일행이 미처 인사도 올리기 전에 먼길을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다고 일일이 뜨겁게 손잡아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앓는분들은 없는가, 불편한 점들은 없는가고 세세히 알아보시면서 그들이 들어있는 방들을 돌아보시고는 《방들이 좁아서 불편하시겠는데 널리 량해해주십시오.》라고 더없이 겸허하고 부드럽게 말씀하시였다.

응접실에 이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모두들 앉으라고 자리를 권하신 후 김구선생을 비롯한 여러분들이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고 이렇게 와주어서 남북련석회의가 더욱 빛나게 되였다고 거듭 치하하시면서 미제와 리승만매국도당의 분렬책동으로 하여 나라가 둘로 갈라질 위험에 처한 이 난국을 우리가 타개해야지 누가 타개하겠는가, 우리의 민족을 영구분렬하려는 매국적인 남조선《단독선거》를 조선인민의 굳게 뭉친 힘으로 반대배격하고 민주주의적인 통일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이 일에서 김구선생을 비롯한 민족주의세력이 지니고있는 임무는 무거우며 이번에 김구선생이 수고를 하여야 하겠다고 고무해주시였다.

이날 숙소를 나서시기에 앞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군들에게 김구선생은 년로한분이니 잘 돌봐드려야 한다고 하시면서 아침마다 건강검진도 하고 보약도 쓰게 하며 음식도 구미에 맞게 해드리고 북쪽에 있는 친척들도 만나게 하는 등 선생이 요구하는것은 다 풀어드려야 한다고 간곡히 말씀하시였다.

나라의 크고작은 일들을 돌보시며 민족의 장래가 달려있는 대민족회의를 조직지도하시는 그처럼 바쁘신 김일성장군님께서 자기들의 숙소에까지 찾아오시여 신변과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세심히 돌보아주시니 백범은 달아오른 눈굽을 꾹꾹 찍었다.

그의 눈물은 머리에 백발을 얹은 이날에야 비로소 그처럼 갈구하던 민족의 태양의 품에 인생의 닻을 내리게 되였다는 기쁨과 안도감이 불러낸 눈물이였고 이제는 조선민족의 창창한 앞날을 기대할수 있게 되였다는 확신에서 오는 눈물이였다.

 

《조선사람은 조선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어야 합니다》

 

력사적인 4월남북련석회의가 성과적으로 끝난 다음날인 주체37(1948)년 4월 24일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모란봉극장으로 가시여 남조선대표들과 함께 련석회의경축공연을 관람하시였다.

남조선대표들은 한결같이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통치밑에서 오래동안 버림받고 파묻혔던 민족문화예술을 찾아내여 시대의 요구와 인민들의 생활감정에 맞게 더욱 발전시킨 공연을 보면서 민족문화예술을 개화발전시키신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와 업적에 대하여 거듭 탄복하였다.

공연무대에는 우아하고 황홀한 전통적인 민속무용들도 올랐다.

이때 무용을 보면서 벙글거리던 김규식선생이 위대한 수령님께 나직이 말씀올렸다.

《우리 나라 곡과 장단에 맞추어 추는 조선춤이 제일 좋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웃으시며 머리를 끄덕이시였다.

《그렇습니다. 조선사람에게는 조선춤이 제일 좋습니다. 노래도 조선선률에 맞추어 부르는것이 더 듣기 좋습니다. 우리 나라 곡과 장단에 맞추어 흥겹게 추는 저 춤이 얼마나 보기 좋습니까.

응당 조선사람은 조선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어야 합니다.》

조선사람은 조선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어야 한다!

얼마나 의미심장한 말씀인가.

그것은 북과 남의 전체 인민이 외세를 믿지 않고 자주의 한길을 걸어나갈 때 비록 험난한 길과 중첩되는 난관이 가로놓인다 해도 반드시 통일위업을 성취할수 있다는 깊은 뜻이 담겨져있는 가르치심이였다.

그이의 말씀에 한생을 반공과 숭미사대로 살아온 김규식선생은 참으로 많은것을 생각하였다.

그는 어린 나이때 미국에 가서 로보노오크대학과 프린스톤대학원을 마치고 1905년 25살에 귀국하여 언더우드의 비서로, 서울그리스도교청년회 총무를 거쳐 언더우드가 세운 경신중학교 교감도 하였다. 그리고 해방후에는 언더우드2세가 하지의 정보담당 정치고문인것으로 하여 자연히 하지와도 가까이 지내게 되였으며 미국의 도움으로 독립국가를 세울수 있다는 숭미사대주의에 빠져있었다.

그리하여 조선민족혁명당 주석의 자리에서도 사퇴하고 미국의 조종밑에 1946년 2월에 조작된 미국의 꼭두각시기구인 리승만을 《의장》으로 하는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의 부의장자리에 앉게 되였다.

그러나 그후 그는 미국의 본심을 꿰뚫어보고 미국에 대한 환상에서 깨여나 남의 장단에 춤을 춘 자신을 돌이켜 반성하면서 민족자주련맹을 결성하고 통일애국의 길에 나서게 되였던것이다.

하기에 그는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을 심장깊이 새겨안으며 이렇게 웨쳤다.

(아무렴, 조선사람은 조선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어야지! 정말 뜻이 깊은 말씀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