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김일성주석과 반일민족해방투쟁사』 중에서 

제 4 장

김일성주석과 1940년대 전반기 반일민족해방투쟁

6. 전민항쟁준비를 위한 조직선은 일본땅에도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다그치고있던 1940년대 전반기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국내에 강력한 전민항쟁력량을 꾸리는 한편 일본본토안에서도 혁명조직들이 전민항쟁운동의 일익을 담당할수 있도록 하는데 특별한 주목을 돌리시였다.

일본땅에서의 공작활동은 두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였다. 한편으로는 이미 조직되여있는 조국광복회의 조직들과 여러 형태의 반일조직들을 조선인민혁명군이 최후공격작전을 개시할 때 그에 합세할수 있도록 정비하면서 새로운 조직을 계속 늘여나가는것이였고 다른 편으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특수공작원들이 일제의 아성에 깊이 침투하여 적들의 군사정보를 정찰함으로써 대일군사작전의 승리를 마련하기 위한 준비사업을 본격화하는것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전민항쟁을 준비하면서 일본본토를 특별한 시선으로 주시하시게 된 리유를 재일교포운동을 력사적으로 개괄하시는 기초우에서 분석하시였다.

일본땅에는 조선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꾸려놓은 조직들이 일찍부터 많이 생겨났었다. 공산주의조직, 민족운동조직, 계몽조직, 학생조직을 비롯해서 그 조직들은 다양한 모습을 보이였다.

일본에서 벌어진 반일운동에서도 청년학생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들이 재동경조선인류학생학우회라는 간판을 가진 조직을 뭇고 3.1운동전야에는 독립선언서를 작성했고 그것이 국내에로 알려지면서 독립운동자들에게 큰 충격을 준바 있었다.

일제가 조선을 병탄했을 때에는 그에 대한 항거의 표시로 도꾜와 교또에 가있던 많은 류학생들이 집단적으로 귀국했는데 이것은 그들 청년학생들의 저항정신의 일단을 시사해주는것이였다.

민족운동의 형태를 띠고 전개된 청년학생운동은 청원과 시위, 실력양성이라는 소극적인 투쟁형태로 적들과 맞서고있었지만 재일동포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였었다.

이름난 무정부주의자인 박렬도 일본에 가있던 류학생출신이다. 그는 일본천황에 대한 살해음모를 하였다는 죄로 무기징역형을 받은 사람으로서 20여년의 복역후 8.15가 되여서야 출옥했었다. 1925년초 조선공산당을 창건한 사람들가운데는 적지 않은 일본류학생출신들이 있었다. 일본땅에 맑스주의가 전파되자 그들은 여러 사상단체와 조직들을 내오고 새 사조를 연구보급하는 사업을 진행하였다. 1930년대초에 일본에 있는 조선사람들의 공산주의단체는 30여개에 달했고 거기에 망라되여있는 인원은 수천명을 헤아리고있었다. 공산당조직들은 일본공산당의 한개 지부형태로 존재하였다.

새 사조의 영향하에 재일동포들속에서는 로동운동도 발전하였다. 오사까에는 동아합동조합이라는 명칭을 가진 민족기업단체도 있었다. 종교조직들도 적지 않게 조직되였다. 그리고 신간회 지부도 있었다.

이처럼 재일교포들속에는 여러가지 형태의 조직들이 조밀하게 존재해있었으나 그것들은 주의주장도 각이하고 활동방식도 서로 제나름이였다. 계몽, 호상친목, 호상부조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조직도 있었다.

그렇지만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전민항쟁의 시각에서 볼 때 그 하나하나가 다 큰 밑천으로 된다고 간주하시였다. 이러저러한 조직들은 모두가 일제의 심장부에 박혀있는 시한탄과 같은 존재들이며 이 폭탄에 불을 달아줄 사명이 조선인민혁명군에 부여되여있는것으로 여기시였다.

일본에 공작원을 파견하는것은 반일교포운동과 항일무장투쟁을 한맥락에서 이어주고 일본각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산만무질서하게 진행되는 교포들의 대중운동에 대한 통일적지도를 보장하는 동시에 이 운동을 새로운 정세에 부합되게 질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시급히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문제였다.

일본에 공작원을 침투시키는 통로로는 주로 부산항로와 청진항로를 리용하였다. 장기적으로 깊숙이 박아넣어야 할 중요한 정치공작원들은 제3국의 항구들을 리용하여 멀리 에돌아가게 하였다. 일본에 제일 쉽게 드나들수 있는 계층은 류학생들이였다. 당시 돈깨나 있는 사람들이 트렁크나 고리짝을 메고 일본류학을 가는것은 하나의 추세였다.

김정숙녀사께서는 위대한 수령님으로부터 공작원으로 활동할수 있는 유망한 류학생을 물색해볼데 대한 과업을 받으시게 되였다.

그후 김정숙녀사께서는 풍산지방에서 일본에 건너가 고학을 하는 청년들이 도꾜에 류학생조직을 가지고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시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그에 대한 보고를 받으신 후 김정숙녀사께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주시면서 풍산출신의 류학생들과  손을 잡고 도꾜에 있다는 그들의 조직을 조선인민혁명군의 영향밑에 있는 산하조직으로 전환시킬 방도를 세워보라고 하시였다.

김정숙녀사께서 주병포에게 사령부의 의향을 전달해주신 다음 그와 함께 도꾜의 류학생조직을 장악하기 위한 방도를 상론하시였다. 주병포가 일본에 파견할 책임자로 선발한 대상이 바로 리인모였다.

도꾜에서 풍산출신 류학생들이 무은 조직이란 풍우동경고학생친목회를 말한다. 풍우회라는것은 풍산에서 간 벗들이란 뜻이다. 이 친목회는 이따금씩 모여앉아 시국담도 나누고 신세타령도 하고 독후감도 발표하고 때로는 무직업회원들에게 일자리를 알선해주는 일을 해왔었다. 좀 정치적색갈을 띤것이 있었다면 《내선일체》도 가짜다, 《동조동근》도 헛나발이다, 《일시동인》도 개수작이다 하고 일본놈들을 욕질하는것뿐이였다.

리인모는 도꾜에 가자 바람으로 이 조직에 백두산바람을 불어넣었다. 친목회성원들은 조국광복회10대강령과 창립선언을 보고 큰 충격을 받게 되였다. 목표도 방향각도 없이 울분속에 모대기기만 하던 친목회는 반일애국단체로 개편되게 되였다.

당시 일본대학들에 가서 공부하고있던 조선류학생들은 백두산에서 싸우는 조선인민혁명군을 지지하고 조선인민혁명군과 합세하기 위하여 여러모로 노력하고있었다. 반일지하조직은 고등학교, 전문학교. 중학교들에도 적지 않게 있었다. 1944년 상반년에 일제경찰에 발각되였던 가나자와조선인학생민족주의그룹도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의 정치공작원들이 꾸려놓은 항쟁조직이였다.

청진에서 활동하던 조선인민혁명군 정치공작원이 가나자와중학교로 류학가는 학생들속에 공작원을 박아넣은 후에 이 학교에는 무명조직이 생겨나게 되였다.

조직에 이름을 붙이지 않은것은 있을수 있는 적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 조직 역시 최종목적은 결정적시기에 무장봉기로 인민혁명군의 국내진출에 호응하자는것이였다.

일제경찰이 밝힌 자료에 의하면 《이 무명조직에 망라된 성원들은 북조선출신의 독립운동자 김일성이 백두산을 근거지로 해서 빨찌산을 조직하여 조선독립을  위해 싸우고있고 또 우수한 조선동포들을 훈련시키고있다고 하는데 자기들도 그밑으로 달려가 독립운동에 협력하고저 한다.》고 하였다.

일본에 여러갈래의 반일항쟁조직들이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백두산쪽에 와서 조선인민혁명군투쟁에 합세할것을 공공연히 자기의 투쟁목표로 내세운 조직은 몇이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항쟁조직들이 조선인민혁명군의 투쟁소식에 힘을 얻고 조선인민혁명군이 최후공격작전을 전개할 때 그에 호응할 기세로 싸웠지만 일제경찰의 탄압을 고려하여 그러한 투쟁목적을 공개적으로 로출시키지 않고있었던것이다. 오사까에는 고학생들로 된 충성회라는 조직이 있었다. 제주도출신류학생들이 오사까에서 제주도에서 온 청년들로 동인야학을 조직하고 거기에서 육성된 사람들로 반일친목단체를 무었다가 조선인민혁명군에서 파견한 공작원들로부터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입수한 다음 반일친목단체 성원들과 일본대학 야간중학부 학생들로 충성회라는 새로운 조직을 뭇게 되였던것이다.

이 회는 취지에서 쏘, 일이 개전하면 즉시 조선으로 돌아가 동포청년들을 지도하여 일본에 저항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며 김일성주석이 본격적으로 반기를 휘날릴 때는 이에 호응하여 과감히 일떠설것이라고 했다.

충성회가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자 그 관계자들은 서울에 돌아와 조선인민혁명군에서 파견한 국내공작원들과 손을 잡고 혁명활동을 계속하였다.

류학생들의 반일지하조직은 심지어 일본의 신학교들에도 있었다. 대표적인것이 고베에 있는 중앙신학교 조선인학생민족주의그룹이였다. 이들의 투쟁에서 주목되는것은 백두산에서 싸우는 조선인민혁명군을 장래가 크게 기대되는 독립운동자라고 찬양하면서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애국심을 키워나간것이였다.

오까야마 6고등중학교에 조직되였던 조선인학생친목회도 조국광복회 하부조직으로 개편되였다.

개편사업을 주도한 사람은 도꾜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공작원의 영향을 받은 민덕원이였다. 그는 나라의 해방은 조선동포들앞에 나선 지상의 과업이라고 하면서 조국광복회는 민족의 모든 애국력량을 조국해방을 위한 성전에 결속시킬것을 호소하였으며 류학생들도 일제에게 끌려온 불행한 조선동포들을 계몽하고 의식화하여 반일조직에 묶어세웠다가 일본내부에서 혼란이 닥치면 일제히 들고일어나 독립을 성취하자고 하였다.

6고사건에는 흥미있는 점이 많았다. 6고의 조직핵심들이 자기네 동생들과 동생의 친구들이 일본의 선전에 속아서 소년항공대에 입대하려고 할 때 그들에게 김일성부대에 찾아가라고 권고하였는데 그것도 흥미있는 일의 하나였다. 그때 조직핵심들의 선전에 공감한 여러명의 청소년들이 만주로 떠났다가 조선인민혁명군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반일항쟁조직은 로동자들속에도 많았다. 일본의 주요공업지대인 도꾜-요꼬하마지구, 오사까-고베지구, 그리고 혹가이도나 니이가다 등 동포들이 많이 가있던 곳에 로동자들로 조직된 항쟁조직이 적지 않았다.

도꾜-요꼬하마지구의 조직들중에서 이채를 띠는것은 도꾜에서 조직된 동맹회이다. 동맹회는 로동자들을 골간으로 하고 거기에 고학생들을 망라하여 꾸린 반일조직이였다. 이 조직은 일본천황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파벌을 반대배격하였으며 조선애국자들의 활동, 조선인민혁명군의 투쟁을 찬양하였다.

동맹회의 전략은 적의 지원병제도를 역리용하여  일단 군사훈련을 받아두었다가 유사시에는 일제에게 총부리를 돌리자는것이였다. 동맹회는 로동자들과 학생들속에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에 대한 선전을 많이 하였다. 동맹회는 조선의 독립이 공산주의운동을 통해서만 성취할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원래 도꾜-요꼬하마지구는 1920년대에 재일본조선로동총동맹이 발족하여 활동하던 곳이다. 이 로총은 오래전에 해산되였으나 그 그루터기를 타고 로동운동이 미미하게나마 이어졌는데 여기에 백두산바람이 불어오자 기성조직은 혁명조직으로 개편되고 조직이 새로 태여나는 회오리가 일어난것이였다. 공작원들이 많이 파견된 곳은 혹가이도지방이였다. 혹가이도에 침투한 공작원들중에는 김태현이라는 가명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여러 탄광, 광산, 비행장, 수력발전소, 건설장에 징용된 조선로동자들을 반일조직에 결속시켜나갔다. 그는 로동자들속에서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깊이 침투시키고 강령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조직을 꾸려나갔는데 그들이 여러 고역장들에서 파업투쟁의 앞장에 선 주인공들로 되였다. 유바리탄광 로동자들의 폭동은 바로 그 공작원이 조직한것이였다.

전후시기 조선인강제련행진상조사단이 편찬한 책에는 혹가이도의 한 토목공사장에 침투한 공작원이 조선로동자들속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에 대해 소개, 선전하고 그들을 반일투쟁에로 분기시킨 사실들이 게재되여있는것을 볼수 있다.

혹가이도의 삽뽀로에 들어간 다른 한 공작원은 군사기지건설장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로동자들속에서 지하조직을 꾸리고 그 대렬을 점차로 확대하면서 무장봉기를 위한 준비까지 진척시켰다. 공작원들은 혹가이도에 있는 대학을 비롯한 각급 학교들에서도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일본의 주요공업지대인 오사까-고베지구는 조선인민혁명군 공작원들의 영향이 많이 미친 곳이였다. 이 지구에는 효고현 아마가사끼에서 조직된 협화훈련대, 특별청년회를 비롯한 많은 지하조직이 활동하였다. 협화훈련대, 특별청년회의 활동과 관련된 구일본의 비밀문건 《내선관계월보》 소화 20년(1945년 6월)에는 김일성주석휘하의 공작원에 의해 훈련한 조직핵심이 《… 일대조직을 결집하고 김일성일파의 조선침공에 내선호응하여 일제히 봉기를 일으켜야 할것…》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도꾜-요꼬하마, 오사까-고베, 혹가이도지구외에도 전민항쟁준비를 위한 조직은 여러 지역에 수많이 꾸려졌다. 례컨대 니이가다철공소에 조직된 《김일성대》는 강력한 반일력량을 형성하고 주요군수품생산을 방해함으로써 적의 전쟁수행능력을 약화시켰으며 새로 들어온 수십명의 징용로동자들을 집단도주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교또의 로동청년들은 장차 백두산을 근거지로 하여 독립계획을 실현할 목표를 세우고 여러 공장들에 반일조직을 내왔다. 북으로는 혹가이도로부터 남으로는 규슈에 이르기까지 일본땅 어디에나, 그리고 대학생으로부터 신학교의 학생에 이르기까지, 로동자로부터 징용로동자에 이르기까지 조선동포들이 있는 곳에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조직이 박혀지게 되였다.

일본땅은 전국에 조밀하게 꾸려진 조선동포들의 항쟁조직들에 의하여 분출직전의 활화산우에 놓인 형세가 되였다.

국내, 동북, 중국관내, 일본 등 모든 곳에 살고있는 조선민족성원들은 백두산에 모든 기대를 걸고 전민항쟁의 앞날을 내다보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이와 같은 력사발전의 추이를 개괄하시면서 그렇게 된 원인을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무장투쟁이야말로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는 유일한 방도라고 확신한 우리 인민의 일치한 립장과 관점은 조선의 모든 애국력량을 인민혁명군의 두리에 묶어세울수 있게 하는 요인으로 되였다고 볼수 있습니다.

조선사람들이 달래 백두산을 쳐다본게 아닙니다. 거기에 혁명군이 있었기때문에 백두산, 백두산 하고 말끝마다 외운겁니다. 옛날에는 백두산이 조종의 산으로서 민족의 사랑을 받아왔지만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거기에서 항일대전을 벌린 다음부터는 혁명의 성산으로서 민족의 사랑을 받아오고있습니다.

우리가 무장투쟁을 빨리 발전시키고 그것을 주축으로 하여 주체적혁명력량을 튼튼히 꾸려온것은 참으로 큰 의의를 가집니다. 항일혁명의 전 로정이 보여주는바와 같이 식민지민족해방투쟁에서는 기본의 기본이 무장투쟁입니다.》김일성동지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계승본) 8권, 441페지〕

항일대전의 력사는 무장투쟁을 높은 수준에서 발전시켜야 인민들도 그만큼 빨리 각성하게 하고 각계각층의 광범한 대중을 제국주의침략자들을 반대하는데로 용이하게 동원할수 있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망국으로 하여 심하게 상처를 입었던 조선인민의 민족적자부심, 자긍심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 백두산에서 무장투쟁을 벌리신 다음부터  백배, 천배로 증대되였다. 그것은 지난날의 민족적자부심과는 대비도 할수 없는 높은 형태의 민족적자부심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민의 민족적자부심, 자긍심, 조국애는 백두산에  그 시원을 두고있다고 말해야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