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김일성주석과 반일민족해방투쟁사』 중에서 

제 4 장

김일성주석과 1940년대 전반기 반일민족해방투쟁

5. 반일애국력량과의 단합을 위하여

전민족의 단합과 반일애국력량의 총집결로 조국해방을 이룩하려는것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 항일혁명의 전기간 시종일관하게 견지해오신 로선이였고 전략적방침이였다. 주석께서는 항일대전을 시작하신 첫날부터 해내외에서 활동하는 모든 반일애국력량과의 단합을 모색하여 온갖 심혈과 로고를 바치시였고 그것은 1940년대 전반기에도 변함없이 계속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1940년대 전반기 조선민족해방운동에서 공산주의운동과 민족주의운동간의 관계에서 나타난 기본특징에 대하여 지적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한때 민족주의운동은 공산주의운동과 함께 우리 나라 민족해방투쟁에서 2대구성부분을 이루고있었습니다. 조선민족해방투쟁은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시작되였습니다. 1940년대 전반기에도 민족주의는 여전히 하나의 사조로 남아있었고 민족주의운동세력도 미약하나마 하나의 반일애국력량으로 존재하였습니다.》김일성동지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계승본) 8권, 404페지〕

주석께서 교시하신바와 같이 조선민족해방투쟁사에서 1920년대는 공산주의운동과 민족주의운동이 2대구성부분을 이루고있던 시기라면 1930년대는 민족주의운동의 상층이 변질되고 전향됨으로써 전반적으로 민족주의운동이 약화되던 시기였고 1940년대 전반기까지는 그 약화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세력이 여전히 하나의 사조로 남아있었고 민족주의운동세력도 미약하나마 하나의 반일애국력량으로 존재하고있던 시기였다. 따라서 개량주의세력을 제외한 다수의 운동자들은 의연히 반일의 기치를 들고 국내와 해외에서 일본제국주의자들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고있었고 민족운동세력은 국내의 인민들과 해외의 교포들속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가지고있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이때에도 애국적이며 진보적인 민족주의자들과의 단결을 중요한 로선으로 내세우시고 그 실현을 위해 변함없이 노력하시였다.

한편 반일민족운동자들도 조선인민혁명군과의 련대를 이룩하려고 여러모로 시도하게 되였다. 지난날 공산주의자라면 덮어놓고 배척하고 경원시하던 사람들도 점차 태도를 달리하게 되였다.

조선인민혁명군과의 련합을 성사시키기 위한 반일독립운동자들의 움직임이 보편적인 현상으로 되여 하나의 뚜렷한 흐름을 이루게 된것은 1930년대 후반기부터였다. 1936년 5월 조국광복회가 창립되고 민족의 총동원을 호소하면서 통일전선운동을 힘있게 전개해나가게 되자 민족주의자들은 그에 적극적인 자세로 호응해나서게 되였다. 김활석의 휘하에 있던 독립군의 잔존세력이 최윤구를 선두로 조선인민혁명군에 스스로 편입한것은 그 가장 대표적인 실례로 된다.

그러면 민족운동진영이 종전의 배타적인 립장에서 벗어나 어떻게 되여 조선인민혁명군과의 합작을 그처럼 중시하게 되였는가.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여 조선인민혁명군의 권위가 높아지고 그 영향력이 확대된데 있었습니다. 항일무장투쟁은 조선민족해방운동에서 주축을 이루고있었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반일민족해방전선의 주력군이였고 민족의 독립의지와 신념의 최고대표자였으며 항일혁명의 조직자, 령솔자였습니다.》
김일성동지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계승본) 8권, 405페지〕

민족해방운동선상에는 여러 갈래의 반일세력이 있었지만 그가운데서 적들에게 제일 심대한 타격을 가한것이 바로 조선인민혁명군이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제일 두려워한 존재도 조선인민혁명군이였고 대중이 제일 큰 기대를 가지고 바라본 무장력도 조선인민혁명군이였다. 조선인민은 일제를 조국강토에서 몰아낼수 있는 실제적인 군사력은 조선인민혁명군밖에 없다고 보게 되였다.

김구를 보좌하고있던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보천보전투에서 일제가 녹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환성을 올리며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나니 조선인민혁명군의 투쟁에 대해서 상당한 정도로 큰 기대와 관심을 가지고있었다. 그때 남경에 있던 조선민족혁명당의 기관지도 《조선혁명무장운동의 희소식》이라는 제목으로 보천보전투를 상세히 소개하였다. 편집집단은 그 신문자료를 함흥에 있는 《조선일보》 지국에까지 발송한바 있었다. 그것은 주의주장을 초월하는 범민족적인 지지와 격려, 련대의 표시였다.

8.15직후 로스안젤스에서 발간되던 《조선독립》이라는 교포신문이 김구를 비난하는 기사를 실은 일이 있다. 내용인즉 미국에 사는 교포들이 김구의 호소에 호응해서 김일성부대와 조선의용군을 위해 거액의 군자금을 마련해보냈는데 헌금을 호소한 김구자신은 전란을 구실로 그 돈을 김일성부대에도 조선의용군에도 보내지 않고 중도에서 다 써버렸다는것이였다.

김구가 군자금을 보내지 못한것은 리해할만 한 일인것이다. 돈을 전달하자면 조직선을 타야 하는데 조선인민혁명군의 조직선을 찾기가 그때로서는 힘들수 있었던것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김구가 조선인민혁명군을 위해 헌금을 호소했다는 사실을 통해서 그가 백두산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무장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여러모로 애썼다는것을 알게 되였다고 하시였다.

해외의 민족운동단체들에서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높아지고 련공의 움직임이 전례없이 활발해지게 된것은 조국광복회의 기폭이 단합의 견인력으로 힘있게 작용한 사정과도 관련되여있었다.

그 당시 중국관내에 있던 반일애국력량은 주의주장과 투쟁방식의 차이로 서로 힘을 합치지 못하고 분렬되여있었다. 그들은 크게 두파로 갈라져있었는데 하나는 민족주의파라고 하는 김구파였고 다른 하나는 인민전선파라고 하는 김원봉파였다. 김원봉파는 공산주의계렬에 가까운 독립운동좌파였다.

두파는 장개석국민당과 국민정부군사위원회, 중국공산당과 저마다 독자적인 련계를 가지고있었다.

중국관내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자들과의 통일전선을 위해서는 두가지 문제점을 해결해야 하였다. 우선 관내의 반일민족단체들자체가 하나의 력량으로 단합되여야 하였다. 다시말하여 각이한 주의주장과 활동방식을 가진 단체들이 호상간의 차이점을 무시하고 항일애국의 기치밑에 단일전선을 형성해야 하였다. 그다음은 그 단일전선에 망라된 모든 반일력량과 조선인민혁명군과의 합작을 새로운 기초우에서 실현해야 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조국광복회를 창립하신 이후 이런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시종일관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시였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다음부터는 중국관내운동과의 련대를 위해 더 적극적이고 주동적인 활동을 벌리시였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후 중국에서 2차국공합작이 실현된 배경을 타고 서로 작은 당으로 분립되여있던 김구계렬과 김원봉계렬이 1940년 9월에 지난날의 대치상태에 일단 종지부를 찍고 단일전선형성에 성공하여 공동선언까지 발표하게 되였다. 그 공동선언에는 조국광복회창립선언과 10대강령에서 제시된 사항들과 동일한 내용들이 많이 포함되여있었다. 림정은 그후 김원봉계렬을 인입하여 좌우합작이 이루어지게 되였다.

주석께서는 민족운동내부에서 일어난 이러한 변화에 대해 주의를 돌리시였다. 주석께서는 1940년대 전반기에도 국내와 일본에 있는 반일애국력량의 결속을 위해서 노력하시는 한편 만주와 관내에 있는 반일애국력량을 동원하기 위한 활동을 여러 경로를 통하여 적극적으로 전개하시였다.

당시 일제의 패망이 가까와오는 격변하는 정세는 국내와 해외에서 활동하는 모든 반일애국력량이 하나로 결속되여 일제와의 최후결전을 준비할것을 요구하고있었다. 주석께서는 국내외의 광범한 애국력량을 하나로 묶어세워 강력한 전민항쟁력량을 준비해나가는것을 시대가 부여하는 력사적사명으로 받아들이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 중국관내 반일애국력량과의 련계를 확립하는데서 주목을 돌린 단체의 하나는 상해림시정부였다.

일본군이 중국본토를 침공한 후부터 림정은 거처를 빈번하게 옮겼다. 국민당정부를 따라 소재지를 자꾸 바꾸다보니 실제로는 간판이나 간신히 유지할 정도로 고달픈 처지에 있었다.

1940년대에야 림정은 방랑생활을 끝내고 장개석정부의 소재지인 중경에 정착하게 되였다. 그때부터 그들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할수 있게 되였다.

림정이 광복군을 조직한것도 중경에 있을 때의 일이였다. 림정이 자기 산하에 광복군과 같은 무장력을 내온것은 그들의 활동에서 하나의 전진이였다고 할수 있다. 그때 광복군관계자들은 자신들이 주관한 한 출판물에서 김일성주석과 양정우, 조상지 등의 이름을 찍어가면서 조선인민혁명군의 투쟁과 동북항일련군의 활동내용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세력은 력사로 보나 구성으로 보나 무장장비로 보나 청소한 무장력이였다. 림정관계자들자신도 자기네 무장력의 발전을 한도가 있는것으로 보았다. 리청천이 해외반일력량의 실태를 분석하면서 림정의 주도권확립이 어렵다고 한것이라든가 림정은 대처할 아무런 준비도 없이 8.15 해방을 맞이한다고 솔직히 고백한것은 그런 실정의 반영이였다.

하지만 주석께서는 그들과도 제휴를 실현하려고 노력하시였다. 김구계렬과의 합작이 성사되면 조국해방을 위한 최후작전이 전개될 때 그들의 무장력도 동원할것이라고 예견하셨기때문이였다.

다음 김원봉은 의렬단이라는 단체를 조직해가지고 중국관내와 동북지방은 물론 국내를 무대로 암살과 파괴활동을 전개하였다. 그후 조선의용대라는것을 조직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조선의용대의 규모와 갖춤새는 그닥 변변치는 않았지만 힘으로 일제를 타승하려는 그들의 지향을 중시하시였다.

주석께서는 화북에 있던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존재에 대해서도 일정한 관심을 돌리시였다.

그때 거기에서 무정이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는데 그는 중국의 홍군건설과 해방투쟁에도 기여를 한것으로 알려져있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무정이 조국에 돌아와 자신과 처음 만났을 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고 회고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무정은 나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 김장군소문을 많이 들었다, 그때마다 힘이 났다, 왜놈오랑캐들을 벌벌 떨게 하는 장수가 조선에 있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몸은 비록 8로군에 있었지만 내 마음은 언제나 백두산쪽에 가있었다, 조선의용군이 김장군부대와 합류하는 방법은 없겠는가, 조선의용군과 조선인민혁명군이 공동으로 일제를 격멸할수는 없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김일성장군과 손을 잡아보려고 여러모로 애썼다고 하였습니다.》
김일성동지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계승본) 8권, 413페지〕

무정뿐이 아니였다. 1940년대에 연안에 있던 허정숙도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즉 연안에서 활동한 조선인운동자들가운데 한다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다 조선인민혁명군을 그리워했다. 자기도 주은래와 주덕에게 여러차례에 걸쳐 만주로 가게 해달라고 청원까지 했다가 중국사람들한테서 민족주의를 한다는 비판까지 받았다고 하였다. 중국관내에서 활동하던 애국자들가운데는 공산주의자들도 있었고 민족주의자들도 있었으나 그들은 주의주장에는 관계없이 모두가 조선인민혁명군과의 련대, 합작을 지향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중국공산당의 영향하에 있건 장개석의 보호에 있는 사람이건 그런것은 상관치 않으시고 애국을 지향하는 인사들은 다 합작대상으로 보시였다. 중국관내와의 련계를 위해서는 여러 통로를 리용할수 있었다. 쏘련의 군사당국이나 코민테른선을 리용할수도 있었고 동북항일련군측에서 중국관내에 파견하는 련락선을 리용할수도 있었고 또 조선인민혁명군자체가 련락원을 필요한 방면에 직접 파견할수 있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중국 동북에서 무장투쟁을 할 때 중국관내와 련계를 취하면서 리용한 선가운데는 료하, 동강방면의 동북항일련군 제7군 교통로가 있었으며 신강성 이리와 감숙성의 란주, 연안으로 통하는 국제통로가 있었다. 다른 하나의 선은 만주의 동변도로부터 만주와 중국의 국경선을 련결하는 유격로도 있었다.

원동의 훈련기지에는 그 당시 중국관내에서 홍군의 사단장으로 있다가 쏘련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후 연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국제련합군에 와있던 사람들과 중국공산당련락원이 있었다. 주석께서는 그들이 중국관내로 들어가게 되면 연안과 중경에서 활동하는 조선사람들에게 보내는 서한을 맡기기로 작정하고있었으나 그들은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그 기회를 얻지 못하고말았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 동북지방에 소부대공작을 나가는 편을 통해서도 관내와의 련계를 시도하셨고 국내에 있는 지하조직선을 통해서도 관내인사들과 접선하려고 노력하시였다.

김일성주석께서는 또한 《ㅌ.ㄷ》성원인 강병선이 주관하던 신의주의 지하조직에 중국관내와의 련계를 확보할데 대한 지령을 내려보내시였다. 그 지령에 따라 신의주의 지하조직은 천진에 있는 한 공작원에게 중경과 연안쪽에 조선인민혁명군의 련락통로를 개척할 과업을 주었다. 그 사람이 조선인민혁명군과 중경, 연안과의 합작을 위한 중간련락지점을 만들려고 노력하였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중국관내의 반일애국력량과의 련계를 모색하고있을 때 중경에 있던 반일애국력량도 조선인민혁명군과의 합작을 실현하기 위해 따로 활동하였다. 김구의 비서로 있던 안중근의 조카 안우생의 회상에 의하면 김구도 조선인민혁명군에 련락원을 파견하였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련락원은 만주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중도에서 8.15를 맞이했다는것이다.

1942년 12월에는 림정파견원의 자격으로 김가성을 가진 사람이 목단강까지 왔다가 조선인민혁명군을 찾지 못하고 중경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일제는 조선인민혁명군과 중국관내에 있는 중국공산당에 소속된 조선사람들이 중강진, 림강, 혜산진, 통화부근을 중심으로 해서 서로 련락하고있다고 전하고있다.

주석께서는 국제련합군시절에 소부대공작을 하시면서 종교세력에도 관심을 돌리시였다.

1942년말에 녕안현 동경성에 있던 대종교본부의 3세교주 윤세복을 비롯하여 많은 교인들이 경찰에 검거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대종교의 교인들은 자기네 교의 사명이 일본과 만주국의 기반에서 벗어나 조선민족에 의한 배달국의 재건을 기도하는것이라고 하면서 반일활동을 전개하였다. 대종교의 한 간부는 대동아전쟁에서 일본의 패망은 불가피한 운명이며 따라서 이 기회에 조국해방의 시기를 앞당겨야 한다고 하면서 버마에 바모가 있다면 조선에는 김일성주석이 있다, 조선민족의 행복은 독립에 의해 이룩될것이라는것을 드러내놓고 주장하였다. 소부대공작을 나갔던 성원들을 통해 목단강성 경무청이 대종교요원들을 마구 체포한다는 소식을 들으신 주석께서는 녕안현에 총본부를 두고있던 애국적종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할데 대한 과업을 주시였다.

대일작전을 준비하던 나날에 주석께서 주목하신 국내의 반일민족단체는 려운형이 조직한 조선건국동맹이였다.

건국동맹은 1944년에 나온 반일지하단체이다. 이 동맹은 려운형의 고향인 경기도 양평일대의 농민을 기본으로 하여 무은 농민동맹이라는 산하조직도 가지고있었다.

1944년이면 민족주의단체들에 대한 탄압이 극도에 이르렀던 시기이다. 이런 때에 서울일대에서 조선건국동맹이라는 반일단체를 내온것은 과시 려운형다운 배짱이였다.

건국동맹의 비밀이 얼마나 철저히 지켜졌던지 서울에 있는 조선인민혁명군 공작원들도 얼마동안은 자기네 코앞에서 그런 조직이 활동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냈다. 주석께서는 1945년에 가서야 겨우 건국동맹의 존재를 아시게 되였다.

려운형은 조선건국동맹을 내온 다음 인차 김일성주석께도 사람을 보내고 조선독립동맹에도 련락원을 파견했으나 아쉽게도 그가 보낸 련락원은 조선인민혁명군의 행방을 찾지 못하고 돌아가게 되였으며 연안쪽에 있는 조선독립동맹인사들만 만나게 되였다. 려운형의 련락원이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간것은 그분께서 원동의 훈련기지에서 활동하시였기때문이였다.

려운형이 보천보전투가 있은 때로부터 주석을 만나려고 각방으로 애를 쓴것처럼 수령님께서도 려운형과의 합작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시였다. 려운형과의 사업은 서울에 가있는 정치공작원이 담당하게 되여있었다. 정치공작원은 품을 들여서라도 려운형과 접촉을 해보라는 과업을 받았는데 공작원의 보고에 따르면 상대가 도무지 곁을 주지 않아 그와 한번도 속깊은 말을 나누지 못했다고 한다.

려운형은 건국동맹안에 군사위원회를 내오고 무장투쟁으로 일제의 배후를 교란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웠는데 이것은 조선인민혁명군이 지향하고있던 전민항쟁로선에 부합되는것이였다.

중국관내의 모든 반일애국력량과의 합작을 위한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은 응당한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그것은 일본이 너무나도 빨리 패망했기때문이다. 그리하여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와 국내의 항쟁조직들이 련합하여 조국해방을 위한 최후작전을 벌릴 때 중국관내의 무장력은 거기에 직접 참가하지 못하게 되였던것이다.

김구는 이것을 매우 아쉬워하였다. 그는 왜적의 항복이 자기에게는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도 하늘이 무너지는듯 한 일이였다고 하면서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준비를 한것이 다 허사로 돌아갔다고 통탄하였으며 자기네가 이번 전쟁에 한 일이 없기때문에 발언권이 약할것이라고 걱정하였다.

그러나 합작을 위한 쌍방의 노력이 그렇게 허사로 돌아갈수는 없었다. 당장에는 결실을 맺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느때에 가서든지 꼭 은을 내기마련이였다. 민족해방을 위해 바치는 노력에는 력사가 꼭 보상을 하기마련인것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대일작전을 준비하던 나날에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려는 의지가 련마되고 공고한것으로 되였기에 해방후 그처럼 복잡했던 정세속에서도 각계각층 반일력량을 통일전선의 광장에 집결시킬수 있었다고 회고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외세의 위협을 항시적으로 받아오고있는 우리 민족의 좌우명은 무엇보다도 민족대단결로 되여야 합니다. 민족의 흥망성쇠여부는 우리 민족모두가 이 좌우명에 얼마나 충실한가 하는데 전적으로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상과 리념, 정견과 제도에 앞서 민족을 우선시하는 시종일관하고 공명정대한 정책의 깊은 력사적뿌리와 크나큰 업적과 고귀한 경험이 있기에 우리는 오늘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을 내놓고 온 민족을 통일위업에로 힘있게 불러일으킬수 있는것입니다.》김일성동지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계승본) 8권, 422페지〕

반일애국력량과의 단합을 위한 위대한 수령님의 로고는 력사의 밑거름이 되여 해방된 조국땅에서 각계층을 망라하는 통일전선의 결성으로 빛을 보게 되였던것이다.

력사적사실이 보여주는바와 같이 주석께서 일찍부터 점을 찍어두시였던 대상들은 해방후 모두 통일전선의 기치하에 모여들었다. 1948년 4월에 있은 남북련석회의에 김구, 김규식, 조소앙, 최동오, 엄항섭, 조완구, 김월송… 등 이름있는 민족주의자들이 참가한것은 그것을 웅변적으로 증명해주고있다. 따지고보면 결국 김구의 림정인사들모두가 수령님의 품에 안기게 되였던것이다.

건국동맹의 주인공인 려운형도 평양에 와서 수령님을 만나뵙고 돌아갔으며 조선독립동맹의 동료들과 함께 김원봉도 평양에 와서 중요한 국가직책에서 사업하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