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김일성주석과 반일민족해방투쟁사』 중에서 

제 4 장

김일성주석과 1940년대 전반기 반일민족해방투쟁

4. 민족의 얼을 지킨 지성인들  

1940년대 전반기 조선민족은 민족으로서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못하는가, 유린당한 민족성을 회복시키는가 못하는가 하는 운명의 갈림길에 놓여있었다.

조선의 애국적인 인민들과 지성인들은 이와 같은 비극적인 상황하에서도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 계시는 백두산을 우러러보며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줄기차게 전개하였다.

이때 조선의 지성인들앞에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민족말살정책에 저항하는가 아니면 복종하는가 하는 두갈래의 길밖에 없었다. 물론 대부분의 지성인들이 저항의 길을 택하였었다.

그러나 일부 지성인들중에는 현실을 도피하는 방법으로 민족을 외면해버린 사람도 있었고 굴복하여 일신의 《영달》을 얻은 사람도 있었다. 개중에는 일제의 《동화정책》을 쌍수를 들어 지지하고 협조한 사람도 있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원동기지에 계실 때에도 국내에서 발행되는 출판물들을 자주 보시면서 누가 애국을 하고 매국을 하는가, 누가 벼슬길에 오르고 누가 감옥행을 했고 누가 전향을 했고 누가 교수대에 올랐는가 하는데 대해 파악하고계시였다. 그러시면서 그때의 이름있던 지성인들이 택한 길에 대해 민족적립장에서의 평가를 구체적으로 주시였다.

김일성주석께서는 먼저 리광수의 친일소행을 격분해하시며 단죄하시였다. 주석께서는 그때 《매일신보》에 실린 그의 글을 읽고 그 독후감을 아래와 같이 정리하시였다.

리광수는 그 글에서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식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것이다, 성을 가야마라고 고치는것이 좀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생각했기에 창씨를 나름대로 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즉 일본의 신무천황이 왕위에 오른 고장의 산이름을 따서 가야마라고 성을 갈았다고 하였다.

김일성주석께서는 그 글을 읽어보니 조선사람의 체면이나 자존심 같은것은 찾아볼수 없으니 사람이 변해도 아주 너절하게 변했다고 하시였다. 《민족개조론》에서는 두루마기와 저고리만 벗었다면 그 글에서는 아예 바지와 속옷까지도 다 벗어버리고 공공연히 친일을 선언했다고 락인하시였다.

해방후 리광수는 자신의 친일을 《민족보존》을 위한 애국적인 소행으로 묘사했는데 지원병제를 찬양한 그가 《민족보존》에 대해 운운하는것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일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리광수와는 대조적인 불교인이며 시인인 한룡운의 애국지조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시였다.

3.1운동시기 33인중의 한사람이였던 그는 조선의 독립은 청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민족스스로의 결사적인 행동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행동파였다. 적들에게 체포되였을 때에도 그는 변호사도 사식도 보석도 다 거절하였다. 그는 대부분의 민족대표들이 겁에 질려 동요하는 기미를 보이자 감방의 변기들을 들어 내동댕이치면서 이 더러운것들아, 너희들이 민족과 나라를 위한다는 놈들이냐 하고 고함을 쳤다고 한다.

후날 일본사람들은 그를 매수하려고 국유지를 떼주겠다고 구슬렸으나 그는 그것도 단호히 거절하였다. 동료들과 친지들이 돈을 모아 서울 성북동에 자기 집을 지어줄 때에는 총독부 돌집이 보기 싫다고 하면서 기어이 그와 반대방향으로 집을 짓게 했던것이다.

김일성주석께서는 이 대목에서 한룡운이 서울거리에서 리광수와 해후했을 그때의 일화를 소개하시였다.

한룡운과 리광수는 가까운 사이였다. 그가 하루는 종로네거리에서 리광수를 만나게 되였다. 리광수가 청년들에게 학도병출전을 권유하며 돌아다니던 그무렵이였다. 그런데 그날은 한룡운이 리광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가려고 했다. 어안이 벙벙해진 리광수는 한룡운을 붙잡고 내가 춘원이다, 나를 모르겠는가고 하였다. 그러자 한룡운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자기가 알고있는 춘원 리광수는 이미 죽고 이 세상에 없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것은 민족혼을 저버린 리광수한테 내린 사형선고였던것이다.

김일성주석께서는 최남선이나 최린도 리광수와 다름없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리광수와 최남선은 지식으로 말하면 제노라는 사람들이였습니다. 그렇지만 신념이 없는 지식이나 글재주는 어디에도 쓸모가 없습니다.》김일성동지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계승본) 8권, 390페지〕

주석께서는 그런따위의 인간들이 민족을 반역하고있을 때 애국적인 학자들과 교육자, 문예인들, 언론인들을 비롯한 지성인들은 그런자들에게 침을 뱉으면서 완강하게 민족의 지조를 지켰다고 하시면서 그러한 실례로서 작가 리기영을 드시였다.

리기영은 《카프》사건으로 두차례나 감옥생활을 한 사람이다. 림화와 같은 사람은 감옥밥을 먹고나서 인차 변절했지만 그는 감옥문을 나선 다음에도 애국적인 문인으로서의 지조를 버리지 않았다.

그가 형무소문턱을 넘어선 다음 실업자가 되여 서울장안을 방황하던 그 당시는 일제가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이라는것을 공포하고 사상범으로 몰던 애국자들과 진보적인사들을 사상범보호관찰소 지붕밑에 마구 밀어넣을 때였다. 그리고는 친일사상에 의한 《보국》을 강요하였다. 《보국》이란 곧 전향을 의미하는것이다.

리기영도 사흘이 멀다하게 경찰기관에 끌려가 전향을 강요당하였다. 적들은 그에게도 일본말로 작품을 쓸것과 일본말로 친일강연을 할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성미가 송죽같은 그한테는 어떤 강압도 통하지 않았다. 적들이 《국민문학》을 강요할 때 그는 오히려 조선글로 소설을 써내여 그들의 《황민화》정책에 대답하였다. 《요시찰인》으로 등록된 후의 그의 살림살이가 몹시 궁색했다. 어찌나 돈에 쪼들렸는지 둘째아들이 죽었을 때에도 장례비가 없어 그 애의 시신을 옆에 두고 《돈》이라는 단편소설을 썼다고 한다.

리기영은 경찰의 성화를 받다못해 가족들을 데리고 금강산밑에 있는 산골로 피하였다. 그러나 감시의 눈초리는 산골에서도 계속 그의 뒤를 따라다니였다. 친일분자들의 돌팔매질에 그의 집 문짝이 여러번 박살나게 되였다.

하지만 그는 애국적지성인으로서의 대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밤이면 산에서 피신생활을 하는 징병, 징용기피자들이 그의 조언을 들으려고 마을로 내려왔다. 그럴 때마다 그는 그들에게 소나 말처럼 풀을 뜯어먹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산에서 내려오지 말고 왜놈들에게 저항하라고 선동했다고 한다.

민족의 얼을 빼기 위한 일제의 《동화정책》을 반대하여 그처럼 견결히 싸운 애국적지성인은 그밖에도 많이 있었다.

한몸을 불태워 민족의 혼을 지키고 민족정신을 깨우쳐주려는 애국지사들과 지성인들의 불굴의 저항정신을 보시면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그들의 얼을 지켜주고 그 개개의 넋을 하나로 묶어세워 전민항쟁력량의 중요한 일원으로 내세워주어야 하겠다는것을 보다 절박하게 느끼시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이에 대하여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민족의 얼을 고수하는 문제와 전민항쟁준비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놓여있었습니다.민족의 얼을 지키는 문제는 전민항쟁준비의 정신적기초일뿐아니라 그 중요한 일환이였습니다. 민족의 얼을 고수하기 위한 투쟁이 없이는 전민항쟁대오에 광범한 애국력량을 묶어세울수도 없었습니다.》
김일성동지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계승본) 8권, 393페지〕

주석께서는 민족의 력사와 문화와 전통을 지켜야 할 지식인들의 사명을 중시하시고 국내외의 지식계층속에 공작원들을 파견하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국내로 떠나가는 정치공작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상을 강조하시였다고 회고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나는 국내로 떠나가는 정치공작원들에게 어머니가 있어서 자식이 있는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민족의 품에서 태여나며 죽어서도 민족을 떠날수 없다, 우리는 누구나 민족이라는 한집안에서 하나의 피줄로 이어져있다, 그러므로 민족을 지키는 투쟁에서는 주인과 손님이 따로 있을수 없다, 혁명도 민족을 위해 하는것이며 무장투쟁도 민족을 지키기 위해 하는것이다, 우리가 되찾자고 하는것은 조국의 땅덩어리만이 아니라 우리의 력사와 문화, 민족 그자체이다, 때문에 동무들은 전민이 무장을 잡는것과 전민이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밀접히 결합시켜 전민항쟁준비를 잘하며 학자들, 교육자들, 언론인들, 문예인들을 비롯한 광범한 지식계층속에 조국광복회조직을 확대하여 그들모두가 민족의 얼을 지키는 불꽃이 되고 총탄이 되게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군 하였습니다.》
김일성동지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계승본) 8권, 394페지〕

1938년말에 《동아일보》는 서울연희전문학교에 《적색연구회》라는 비밀결사가 있었다는 혐의로 그 련루자들이 검거되였다는 기사를 실어 독자들의 관심을 모은바 있다. 백남운도 그 적색연구회의 조직성원이였다.

굴복하면 사람대접을 받고 저항하면 짐승취급을 당하던 험악한 세월에 백남운은 지성인으로서 민족성을 고수하고 견지하는 저항의 길을 선택하였던것이다.

그는 일본에 가서 고학으로 상과대학을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교단에 선 지성인이였다. 《조선사회경제사》는 그의 대표적력작이다. 일제가 민족경제를 압살하고 민족말살을 위해 혈안이 되였을 때 그가 조선의 사회경제사를 쓴것은 대단히 애국적인 행동이였다.

서울연희전문학교에는 경제연구회라는 합법단체가 있었는데 이 단체를 혁명적인 색채가 짙은 조직으로 발전시키는데서의 주동인물이 백남운이였다. 즉 그는 동료교수들과 함께 단순한 학술연구단체였던 경제연구회를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적색연구회라는 정치적색채가 짙은 조직으로 발전시켰던것이였다.

조선인민혁명군에서 파견한 정치공작원과의 련계가 이루어진 때로부터 적색연구회의 모든 활동은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실현하는데로 움직이였다. 방학때에는 이 단체의 성원들이 모두 대중속에 들어가 계몽활동을 하였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발행한 《최근에 있어서의 조선치안상황》이라는 관헌자료에는 적색연구회가 공산혁명달성의 목적밑에 연구토론회, 강습회, 독서회 등을 열어 회원들에게 공산주의사상의 주입과 선전을 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계속 해왔다고 씌여있다.

백남운은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무직으로 은거생활을 하면서 《리조실록》을 번역하였다. 그가 《조선사회경제사》를 저술한것이라든가, 경제연구회를 적색연구회로 발전시킨것이라든가, 《리조실록》을 번역하기로 마음먹은것은 다 일제의 《황민화》정책에 대한 도전이였다.

보천보전투소식을 들은 그해 겨울부터 난로에 불을 때지 않고 빈방에서 강짜로 지냈다는 사람이 백남운이다. 왜 난로에 불을 때지 않고 지냈는가 하니 김일성주석이하 빨찌산의 모든 장병들이 춘하추동 사계절 가랑잎을 덮고 한지에서 자고 먹는다는 소식을 듣고 송구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랬다는것이였다.

세계적인 유전학자이며 육종학자인 계응상도 애국적지조를 굽히지 않은 지성인이였다.

일본에서 고학하여 대학원을 마쳤을 때 그의 재능이 출중함을 안 일본각지의 대학들에서 오라고 초청하였고 대학시절의 지도교원도 그를 탐내였었다.

그러나 계응상은 그 모든 요청을 다 거절하였다. 일본군대의 꼴을 보지 않고 살수 있는 고장에 가서 누에연구를 계속하고싶은것이 그의 소원이였다. 그래서 그는 중국관내에로 들어갔다. 중일전쟁이 일어나 일본군이 광동을 점령한 그때에야 조국으로 돌아오게 되였다.

8.15해방후에는 미군정의 행실이 역겨워서 트렁크에 누에종자를 넣어가지고 평양으로 들어와 생산성이 높고 병에도 잘 견디는 훌륭한 누에종자를 수많이 만들어내는데 성공하게 되였다.

왜정말기 국내에서 민족의 넋을 지키기 위해 치렬한 투쟁을 벌린 조직가운데는 조선어학회도 있었다.

조선에서 민족어사전편찬사업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한것은 조선어학회가 조직된 후부터였다. 이 사업은 민족을 지키고 민족의 얼을 지키는데서 매우 중요한 사업이였다.

언어를 떠난 문화의 발전은 있을수 없다. 문화의 발전은 그 기저에 놓이는 언어와 문자의 합리적인 정리와 통일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언어와 문자를 합리적으로 정리하는데서 가장 유력한 수단으로 되는것이 바로 민족의 언어자원을 종합하고 집대성한 사전이다.

민족어사전을 편찬하는 사업은 품이 무한정 드는 일이였고 자금도 많이 요구하는 일이였다. 일본사람들의 눈을 피해가며 뒤골목에서 가만가만하는 일이여서 대중의 지원을 받을수도 없었다. 그런데 이 중임을 조선어학회성원들이 스스로 걸머지고 나선것이였다. 그 간고함이란 말할수 없이 컸다. 그들은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원고도 2부씩 만들어 따로따로 감추어두었다.

조선말이 일제의 극단적인 억압하에 있게 되였을 때 민족어 낱말들을 보물처럼 하나하나 모아서 사전에 올렸으니 얼마나 장하고 의로운 애국자들이였던가.

조선어학회는 비밀리에 대외활동도 적극 벌렸다. 1935년에 영국에서 열린 국제음성학회와 이듬해에 단마르크에서 열린 세계언어학대회에도 참가하여 일제가 조선말을 어떻게 말살하고있는가를 온 세상에 고발하였었다.

력사적으로 볼 때 조선에서 조선글을 다듬고 연구한 첫 기관은 세종왕이 세운 《정음청》이다. 세종이 최만리와 같은 사대주의학자들의 필사적인 반대를 물리치고 훈민정음을 권장한것은 대단히 잘한 일이였다. 그는 《룡비어천가》도 조선글로 짓게 하고 공문서로도 쓰게 하였으며 유교, 불교의 경전도 조선글자로 출판하게 하였다.

정음청이 페지되고 조선글이 버림을 받기 시작한것은 연산군때이다. 조선글은 수백년동안 잡초처럼 천대를 받다가 1894년 갑오개혁때에야 소생하게 되였다.

지난 세기말부터 겨우 빛을 보기 시작한 조선글을 이번에는 일제가 《국어상용》이요 뭐요 하면서 짓밟기 시작했는데 이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것이 다름아닌 조선어학회였던것이다.

그런데 조국의 독립과 조선말의 정리보급을 위해 투쟁해오던 이 단체가 1942년 가을부터 적들의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 학회에 망라되였던 수십명의 학자들과 관계자들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였다.

국내에 파견되였던 성원들로부터 그 소식을 아신 김일성주석께서는 분한 생각을 금할수 없으시였다. 쓰딸린그라드에서 쏘련군대가 도이췰란드군을 수십만이나 녹여냈다는 소식을 듣고 온 야영이 술렁술렁 끓던 때였지만 주석께서는 조선학자들이 수십명이나 붙잡혀 졸경을 치른다는 말을 듣고나니 밥맛조차 없었다고 회고하시였다.

체포된 학자들이 함흥감옥에서 많은 고생을 했는데 고문이 어찌나 지독했던지 몇사람은 예심과정에 감옥에서 순국하였었다. 일본경찰은 조선어학회를 반일독립단체로 지목하면서도 그 단체가 조선인민혁명군의 영향하에 있는 조직이라는것을 알아내지 못하였다. 수감된 학자들이 목숨을 바치고 피를 흘리면서 비밀을 끝까지 고수하였기때문이였다.

조선어학회내부에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조직선과 직접적으로 련결된 리극로를 비롯한 선각자들을 망라한 비밀지하조직이 틀고앉아있었다. 최일천이 서울에서 살고있는 리극로를 찾아간것이 1936년 가을과 1937년 여름이였는데 그때 조선인민혁명군의 한 조직에서 그에게 국내지식인들속에 조국광복회조직을 꾸릴 과업을 주어 파견했던것이다.

최일천은 장춘에 있는 《동아일보》지국장으로 서울에 들락날락하면서 조선인민혁명군으로부터 받은 과업을 훌륭히 수행하였었다.

리극로는 민족의 얼을 지키는데서도 내세울수 있는 인물이고 또 공산주의자들한테서도 사랑을 받고 민족주의자들한테서도 사랑을 받는 사람이였기때문에 주석께서는 1948년 4월 남북련석회의때 그를 주석단에도 앉히고 회의참가자들의  이름으로 전체 조선인민에게 보내는 《전조선동포들에게 격함》이라는 문건도 그가 읽게 하시였던것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조선어학회사업을 매우 높이 평가하시면서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조선어학회사건이 우리에게 준 충격이 대단히 컸습니다. 총칼도 교수대도 두려워하지 않고 피로써 민족의 얼을 지켜낸  지성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살아있는 조국, 살아서 싸우는 내 나라를 보았습니다.》김일성동지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계승본) 8권, 402페지〕

주석께서는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한 지성인들의 투쟁은 이밖에도 있었는데 그 실례의 하나가 경성제국대학 학생들의 투쟁이라고 지적하시였다.

왜정말기에 경성제국대학 학생들도 조직을 뭇고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였다. 이 조직에 망라된 애국적지성인들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반기를 들고 나섰다. 그들은 친일문인과 어용학자들의 잠꼬대 같은 주장에 반격을 가하는 한편 합법적인 연단을 통해 조선민족의 우수성을 널리 선전하였다. 선전의 기본내용은 조선민족은 락후한 민족이 아니라 지혜와 문명도에서 세계에 대고 자랑할수 있는 뛰여난 민족이며 어떤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자체의 민족성을 고수해나갈것이라는 그 점이였다.

그러나 언론만으로는 폭력을 휘두르는자들과 대항할수 없다는것이 지식인들이 얻은 교훈이였다. 그래서 그들은 큰 산줄기들에 근거지를 잡고 탄광, 광산로동자들과 산중에 숨어있는 징병, 징용기피자들로 무장대오를 조직하기 위한 준비사업을 다그치게 되였다.

수많은 청년학생들과 학자들, 종교인들, 교육자들, 문예인들, 언론인들이 전민항쟁조직에 망라되여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을 반대하여 싸워나가게 되였다. 조직에 망라되지 않은 지식인들도 신념을 가지고 적들의 동화정책에 항거해나섰다. 아무리 포악한 억압과 철쇄도 각성된 지성인들의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꺾을수 없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1940년대 전반기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한 지성인들의 투쟁을 더듬어보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력사에 이름을 남긴 성공한 지식인들은 례외없이 다 자기 조국과 민족앞에 충실하고 신념과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였습니다.》김일성동지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계승본) 8권, 403페지〕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 늘 지성인들에게 조국과 민족을 열렬히 사랑하며 그 어떤 역경속에서도 불굴의 의지와 혁명적신념을 간직할데 대하여 강조하신것은 그 불후의 진리를 모든 지식인들이 터득하도록 하기 위한것이였다고 말할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