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김일성주석과 반일민족해방투쟁사』 중에서 

제 4 장

김일성주석과 1940년대 전반기 반일민족해방투쟁

3. 전민항쟁준비의 불길은 온 강토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는 항일혁명을 시작한 첫날부터 시종일관 전민항쟁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때 우리가 말한 전민항쟁이란 전민을 혁명화하여 항일혁명에 총동원시킨다는 뜻이였습니다. 다시말하여 온 나라, 온 민족을 망라하는 거족적이며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반일항전으로 나라의 해방을 실현한다는것을 의미하였습니다.》김일성동지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계승본) 8권, 342페지〕

전민항쟁준비가 본격적으로 추진된것은 유격대가 백두산에 틀고앉아 무장투쟁을 압록강연안과 국내에로 확대하던 때부터였으며 온 민족의 총동원으로 나라의 해방을 이룩할것을 호소한 조국광복회10대강령은 사실상 전민항쟁선언이나 다름없는것이였다.

전민항쟁방침이 독자적인 로선으로 제시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실무적조치들이 취해지기 시작한것은 중일전쟁이 일어난 다음부터였다. 9월호소문은 전민항쟁호소문이였다고 할수 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최후결전의 날이 다가옴에 따라 전민항쟁을 위한 작전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시였다.

주석께서는 국내에서의 당조직건설과 대중단체건설정형, 그리고 비밀무장조직들의 활동정형을 료해하신데 기초하여 조국해방의 3대로선을 내놓으시였다. 조국해방의 3대로선이라는것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총공격과 그에 배합한 전인민적봉기, 그리고 배후련합작전으로 조국해방의 력사적위업을 성취할데 대한 로선이였다.

조국해방의 3대로선은 현실적가능성이 충분한 로선이였다. 그것은 당시의 민심을 두고 그렇게 판단할수 있었던것이다.

그 당시의 민심은 몽땅 조선인민혁명군에로 쏠리고있었다. 백두산을 쳐다보는 사람도 많았지만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유격대에 찾아가서 김일성주석의 부하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였다. 《징용》, 《징병》을 기피한 사람들도 산속에 들어가 야장간을 꾸리고 왜놈들과 결판을 낸다고 하면서 무기를 만들었다. 왜놈치하에서는 지긋지긋해서 더는 못살겠다, 김일성빨찌산부대가 쳐들어올 때는 우리도 들고 일어나서 왜놈들에게 철추를 내리자, 죽든지 살든지 결판을 내자는것이 그때의 민심이였다.

부산과 시모노세끼를 오가는 관부련락선 《고안마루》 3등선실 천정에 《조선독립대장 김일성》이라는 글발이 나타나고 서울 남대문에 《근일 김일성대장 조국개선》이라는 《불온락서》가 발견되여 일본관헌들이 와짝 떠들던 때가 바로 이무렵이다.

1940년대 전반기에 이르러 각계각층의 광범한 대중은 더욱더 위대한 수령님께 민족의 운명을 의탁하고 조선인민혁명군이 조국을 해방시킬 날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이것이 바로 인민의 지향과 소망이 담겨있는 민심이였고 조국해방 3대로선은 이와 같은 민심의 흐름을 참작한데 기초하여 내놓은 로선이였다.

최후결전을 위한 작전계획의 기본내용은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가 신속히 국내에 진출하여 모든 도들을 차지하고 거기서 전투행동을 벌리는 한편 전국에 호소문을 내여 로동자, 농민, 청년학생들을 집결시켜 무장대오를 조직하도록 하며 여기에 배합하여 전인민적무장봉기를 일으켜 일거에 적들을 요정내고 나라를 해방한다는것이였다.

여기서 문제로 되는것은 결정적인 시기에 대중을 항쟁마당에 불러내는것인데 그것은 어려울것이 없었다. 3.1운동때에는 독립만세를 부르느라고 200여만이 떨쳐나섰는데 최후결전을 한다고 하면 가늠할수 없게 많은 대중이 항쟁마당에 달려나올것은 명백한 일이였다.

김일성주석께서는 전민항쟁준비를 다그치시면서 다음과 같은 몇가지 문제에 특별한 주목을 돌리시였다.

하나는 국내에 있는 비밀근거지들을 전민항쟁의 군사정치적거점으로 더욱 튼튼히 꾸리면서 새로운 림시비밀근거지들을 건설하는것이였고 다른 하나는 국내에 보다 많은 소부대들과 소조들, 정치공작원들을 파견하여 새로운 정세의 요구에 맞게 전민항쟁력량을 조국해방작전에 철저히 준비시키는것이였다. 또 다른 하나의 문제는 국내의 전민항쟁력량에 대한 통일적지도를 실현하는것이였다.

그리하여 주석께서는 전민항쟁과 관련된 로선을 제시하시면서 랑림산줄기를 비롯한 큰 산맥들에 조선인민혁명군부대들의 활동기지, 작전기지, 후방기지, 전민항쟁력량의 무력적지탱점으로 될수 있는 비밀근거지들을 축성하는 사업에 선차적인 주의를 돌리시였다.

백두산줄기를 중심으로 하는 압록강연안과 랑림산맥, 부전령산맥을 중심으로 하는 북부내륙지역을 비롯하여 서부지역과 중부지역 등 전국도처에 수많은 비밀근거지들이 축성되게 되였다.

뿐만아니라 최후결전이 박두한 조건에서 그와 같은 비밀근거지외에 조국해방작전수행에서 전략전술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전국의 주요요충지들에 여러가지 형태와 규모로 림시비밀근거지들이 건설되였다. 근거지건설이 선행되면서 국내에 수많은 소부대와 소조들, 정치공작원들이 파견되여 두만강, 압록강연안의 국경지대뿐아니라 서울을 포함한 중부일대와 부산, 진해를 비롯한 남해안일대, 멀리는 일본본토에까지 침투하여 정치, 군사활동을 활발히 벌리였으며 광범한 대중을 전민항쟁에로 준비시키였다.

국내항쟁운동에 대한 통일적지도를 실현하는데도 큰 힘이 돌려지게 되였다.

국내당공작위원회가 결성된 후 조선에서는 당소조들이 조직되여 대중단체들에 대한 지도가 보장되여왔는데 1930년대말부터는 여러 지역에 산발적으로 꾸려진 당소조들과 반일대중조직들에 대한 통일적인 지도를 실현할 사명을 지닌 지구당위원회들이 출현하여 지역적지도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하게 되였다.

김정숙녀사께서 조직하신 연사지구당위원회는 그 대표적례로 된다.

1940년대 전반기에는 평안남도일대에서 공산주의선각자들을 망라한 지구당위원회가 조직되여 활동하였는데 그 산하에 평양, 개천, 남포를 중심으로 여러 지역에 당소조를 두고있었으며 이 당소조를 통하여 도내 각지의 조국광복회 조직들과 전민항쟁조직들을 지도하였다.

함경북도에 조직된 청진지구당위원회는 일철을 중심으로 청진지구의 공장들에 수많은 당세포들을 두고있었다.

1940년대 전반기에 국내에서는 전민항쟁세력이 급격히 성장하게 되였다.

1942년 일제당국이 탐지해낸 국내의 반일지하조직만 해도 180여개나 되고 조직적력량이 50만이 넘는다고 하였다. 적들에게 로출되지 않은 조직까지 합치면 그 수는 훨씬 더 많았으리라는것을 능히 짐작할수 있다.

그 시기 국내외에서 활동한 반일단체들의 활동에서 보편적인 현상으로 된것은 대부분의 조직들이 정치적성격과 함께 군사적성격을 띤 조직들로 발전하고있었다는 점과 전민봉기와 무력항쟁을 중요한 투쟁목적과 과업으로 내세우고있었다는 점이였다.

이 시기 많은 투쟁단체들은 자기의 투쟁목적이 전민항쟁, 일체봉기, 무장폭동, 조선인민혁명군의 최후공격작전에 합세하는데 있다는것을 공개적으로 밝히였으며 조직명칭  자체를 《김일성대》라든가 《백두산회》라는 식으로 주석의 명함과 직접적으로 련결시켜 달았다. 서울에서 조직되여 제주도 모슬포와 국내각지, 그리고 일본에까지 그 세력을  확대한 《김일성대》는 목적으로나 활동방식으로 보아도  항일혁명의 마지막시기에 활동한 주목할만 한 전민항쟁조직이였다.

김일성대》라는 항쟁조직이 존재한다는것이 밝혀진것은 1945년 6월경이였다. 그때 니이가다현경찰부가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가있던 사람들속에서 《김일성대》라는 조직이 활동하고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여 그것을 없애려고 혈안이 되였었다.

이 조직은 광범한 반일대중을 결속하여 항쟁태세를 착실히 갖추고있다가 조선인민혁명군이 국내진공을 개시할 때 거기에 합세하여 조국을 해방하기 위한 최후성전에 참가하는것을 목적으로 내세우고 투쟁하였다. 조직은 주로 주요군수공장과 기업소, 항만과 군사건설장을 비롯한 로동현장들에 뿌리박고있었다.

구일본의 비밀문건에 의하면 《김일성대》는 대동아전쟁은 인차 일본의 패전으로 끝나며 일본의 패전과 더불어 조선은 독립한다는것, 패전후 조선의 정치형태는 부자도, 가난한자도 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행복을 누리는 정치형태로 된다는것, 그리고 《독립후의 조선의 최고지도자는 김일성》이라는것 등을 선전한것으로 되여있다.

지금 적지 않은 연구자들이 1942년 3월에 제주도의 한 비행장에서 있은 로동자들의 대규모적인 폭동을 《김일성대》의 배후조정에 의한것으로 보고있다. 이 대규모폭동에 대한 상보는 미국신문 《뉴욕 타임스》의 1942년  7월 18일부에도 게재되여있는것을 볼수 있다.

《백두산회》는 1942년 여름에 함경북도 성진(김책)에서 조직되였다. 일본경찰이 남긴 자료를 보면 이 조직은 와세다대학에 적을 둔 사람의 지도밑에 조직된것으로 되여있다. 주석께서 백두산을 근거지로 하여 싸우고있다는데로부터 그것을 조직의 이름으로 삼고 활동중이라는것이였다. 이 자료에는 조직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참군투쟁과 민족의식을 높이기 위한 활동을 벌렸다는 기록이 있다.

평양일대에는 조국해방단이라는 이름을 가진 항쟁조직이 있었다. 주석의 4촌동생인 김원주동지가 지도한 조직이였다.

조국해방단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조국해방작전에 합세하여 무장폭동을 주되는 목적으로 삼고있던 적극적인 항쟁조직이였다. 그들은 평양을 비롯한 조선 중서부의 공장지대들과 농촌에 들어가 로동자, 농민, 청년학생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군중들속에서 조직을 확대해나갔다. 조직망은 경찰기관과 적의 관공서에까지 뻗치고있었다.

국내의 항쟁조직들가운데서 그중 규모가 큰 조직으로서는 일철비밀결사와 경성제국대학출신들로 조직되였던 무장봉기준비결사를 들수 있다.

일철비밀결사는 조선인민혁명군의 한 소부대에서 파견한 정치공작원의 지도밑에 일철의 로동자들을 중심으로 무어진 조직이다.

1940년대에 들어서서 일철에 조직된 공산당재건조직은 공작원의 지도를 받으면서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공에 합세하여 무장폭동을 일으키는것을 기본목적으로 내세우고 그 준비사업을 진행하였다. 이 결사는 부윤지구에 비밀근거지를 꾸리고 무기와 식량, 의약품들을 저장하고 삐라와 소책자도 찍어냈다. 주요공장들에 행동대들을 조직하고 폭동개시신호, 날자, 무기탈취대상과 그 순차, 방법을 밝힌 구체적행동계획을 작성하였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영향밑에 활동하던 흥남지구의 항쟁조직들은 일본이 극비밀리에 개발해오던 대량살륙무기생산을 파탄시키기 위한 결사적인 투쟁을 벌려 패망할 때까지 끝내 그 개발에 성공할수 없게 만들었다.

전민항쟁조직은 일제침략군내부에도 있었다. 1944년에 진해해병단에 끌려간 청년들은 《사전에 김일성부대에 달려가 그 산하에서 조선독립에 기여하자》고 하면서 집단탈영을 단행하였다. 평양에 주둔하고있던 일본군 30사단에서도 청년들이 반일학도병무장대를 조직하고 조선인민혁명군에 집단적으로 합류할것을 기도하였다. 그들은 추석날을 계기로 일제히 탈영하여 일단 양덕군 북대봉기슭에 집결했다가 경찰서나 헌병대 같은것을 치는 방법으로 무기, 탄약, 식량을 보충하면서 산줄기를 타고 보천보근방의 산중에까지 가기로 하였었다. 그다음 거기서 활동거점을 꾸리고 징병, 징용, 기피자들로 대오를 보충하고는 유격투쟁을 전개하다가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와 합세하여 조국해방작전에 참가하려고 하였었다.

서울에서도 규모가 크고 잡도리가 만만치 않은 조직이 꾸려졌는데 서울지구에서 조직된 무장봉기준비결사에서 제일 주목을 끄는것은 많은 지식인이 참가한 일명 《성대비밀결사》였다. 경성제국대학 무장봉기결사도 조선인민혁명군에서 준비시켜 파견한 공작원이 이 조직을 움직이였다.

경성지구 무장봉기준비결사는 비밀활동거점을 꾸리고 무기구입과 출판물인쇄로부터 군사정보수집에 이르는 폭넓은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고 조직성원들에게 무기사용법을 습득시키고 군사훈련도 주었다.

식민지통치의 하수인을 길러내는 대학에서 무장봉기준비결사가 태여났다는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였다. 이 조직지도성원중의 한사람인 서중석은 해방후에도 남조선에서 혁명활동을 벌렸었다.

서울의 콩그룹도 공작원의 지도를 받게 되면서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배포하고 조선인민혁명군의 전과를 통보해주는 한편 서울일대의 여러 공장, 기업소들에 직종별 산하조직을 두고 투쟁을 준비하였다. 김삼룡이 여기에서 주되는 역할을 하였다.

이밖에도 함북도 무산광산의 청년로동자들로 무어진 백의사, 평북도 철산의 애국단, 평남도 순안철공소 반일무장대, 서울에 조직된 6.6동맹, 지리산에서 리현상이 조직한 무장소부대 등 수많은 조직들이 이 시기에 활동하였다.

1940년대 전반기에 진행된 항일무장투쟁은 이와 같이 조국해방을 앞두고 대중을 빈틈없이 준비시키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민족력량의 총동원이야말로 승리를 위해서 얼마나 큰 의의를 가지였는가를 이 시기의 투쟁이 보여주었다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력사의 경험과 교훈을 제시하시였다.

이에 대하여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민족내부의 애국력량이 최대한으로 단결되고 발동된 거족적인 반일항전, 이것이야말로 1940년대 전반기 우리 혁명발전의 새로운 모습인 동시에 특출한 성과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공산주의와 민족주의로 대치되여있던 두 세력이 이 시기에 와서는 리념의 차이를 뛰여넘어 다시 합작을 했다고도 볼수 있습니다.》

《주의주장과 리념을 따질 내기를 해가지고서는 민족적단합을 이룩하지 못합니다. 1940년대 전반기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맞을 때처럼 제나름의 주의는 묻어두고 공통성을 찾아 그것을 절대화하여야 합니다. 항일혁명의 경험과 교훈이 그래서 중요한것입니다.》김일성동지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계승본) 8권, 362∼363페지〕

1945년 8월에 일제의 통치체계가 왜 그렇게 빨리 허물어질수 있었는가. 그것은 전민항쟁조직들이 전국도처에서 들고일어나 일제가 틀고앉아있던 통치기관들을 철저히 분쇄해버렸기때문이였다.

이때 민족내부의 힘이 다 발동되였던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