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김일성주석과 반일민족해방투쟁사』 중에서 

제 4 장

김일성주석과 1940년대 전반기 반일민족해방투쟁

1. 조국해방의 전략과 국제련합군

반일민족해방투쟁의 1940년대 전반기부분을 인식하고 연구하는데 있어서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의 출판은 특별히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남조선의 력사학계에서는 이 시기의 력사가 거의나 공백상태에 있다.

남조선에서는 이 시기가 일제의 파쑈적폭압이 절정에 달하고 민족말살정책이 기승을 부려 모든것이 침체되고 답보하고 숨막히던 수난의 력사로,암흑의 력사로서만 취급되여왔다.

절망이 지배한 력사로서만 취급되였으므로 민족운동사적시각에서의 서술은 설자리를 완전히 잃고있는것을 볼수 있다. 중경으로 이동한 림정의 움직임을 얼마간 적어넣는것이 고작이다.

1940년대 전반기력사에 대한 이와 같은 자기 부정적견해는 력사적진실이 아니다.

회고록에서의 회고자료들은 1940년대 전반기의 조선의 력사가 피동의 력사도 침묵의 력사도 아니였고 저항과 투쟁으로 일관된 영광의 력사이며 제힘으로 해방의 길을 개척하여 마침내 조국해방의 위업을 성취한 승리의 력사임을 웅변으로 말하여주고있다.그리고 민족해방투쟁사가 조국해방의 위업을 성취하는데로 이어지게 한 힘의 원천이 된것은 항일무장투쟁이 민족사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변함없이 승리적으로 전진해온 바로 거기에 있다는것을 말하여준다.

그러므로 남조선근대사학계에서의 이 부분 력사연구는 새로운 출발점에서 근본적으로 갱신된 력사연구의 견지에서 진행되여야 하리라고 본다.

1940년대 전반기에 들어서면서 조선반도를 에워싼 국제정세는 급격하게 그리고 심각하게 변화하는 국면을 보이였다.중일전쟁의 진흙탕속에 깊숙이 빠져들어간 일제는 유럽에서 세계대전이 발발한 정세를 리용하여 동남아시아에 대한 침략전쟁을 감행하여나섰고 쏘련-도이췰란드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는 충격적사변들이 있었다.

일본은 쏘련과 중립조약을 체결하는 리면에서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항일유격투쟁에 대한 가장 대규모적인 《토벌》작전을 감행하여나섰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내외정세의 이러한 변화는 당면한 적의 대《토벌》을 격파하기 위한 전술적인 대책과 함께 급변하는 정세의 요구에 맞는 전략로선을 정립할것을 요구하고있다는것을 제때에 통찰하시였다.

주석께서는 적의 대《토벌》로 정세는 매우 어렵고 불리했지만 주도권만을 틀어쥐여야 하며 주도권을 지속적으로 장악하자면 종전의 대부대선회작전을 되풀이할것이 아니라 적의 력량을 분산시키기 위해 분산활동으로 넘어가 적을 도처에서 타격해야 할것이라고 통찰하시였다.이로부터 조선인민혁명군부대들을 소부대화하여 도처에서 과감하고 령활한 련속타격,반복타격,동시타격을 하는것이 1940년대 전반기의 주되는 전술적투쟁형식으로 되게 되였는데 이 소부대분산활동은 빨찌산부대들이 대부대활동으로부터 소부대활동에로 이행하기 위한 시험단계,준비과정으로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다음으로 급변하는 정세는 항일혁명이 새로운 전략적시기로 들어가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고있다는것을 통찰하시였다.

정세의 변화 특히는 유럽에서의 전쟁을 기화로 전쟁을 동남아시아에로 확대하려는 일본의 당면한 기도는 일제의 최후멸망을 재촉하게 될것이라고 내다보시고 조국해방의 력사적위업을 성취할 날이 가까와오고있다고 결론하시게 되였다.그리고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해야 할 전략적준비를 담당할수 있는 주체적력량도 준비되여있다는것을 확신하시였다.

남호두회의가 있은 후 조선인민혁명군은 정치사상적으로나 군사기술적으로 급속히 성장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수적으로는 비록 적들보다 적었으나 수십배 또는 수백배 되는 대적과의 전쟁에서 항상 주도권을 장악하고 승리하였고 그 과정을 통해 그 어떤 정황에도 능숙하게 대처할수 있는 다양한 전법과 전술을 소유한 강군으로 성장하게 되였다. 조선인민군혁명군은 전반적항일혁명수행에서 확고한 령도적지위를 차지하고 핵심적역할을 지속적으로 증대시킬수 있게 되였다. 이것은 새로운 전략적단계의 과제를 능히 담당할수 있는 주체적핵심력량이 믿음직하게 준비되여있다는것을 말하여주는것이다.

거기에다 인민대중의 의식화, 조직화가 촉진됨으로써 그들을 정치사상적으로 준비시키는 사업에서도 큰 성과가 이루어졌다. 조국광복회산하 회원이 20여만을 헤아리였다. 국내에는 또한 로동자돌격대나 생산유격대와 같은 반군사조직도 많았다. 그런 조직들이 모체가 되여 도처에서 전민항쟁을 위한 무장부대들이 조직되고있었다. 비조직군중의 경우에도 그 반일적동향이 아주 좋았다.

이와 반면에 일제는 군사, 정치, 경제의 모든 분야에서 나타나고있는 징후로 보아 전쟁을 수행할수 있는 잠재력이 고갈되고있다는것이 명백하였다.

이 모든것을 깊이 통찰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무모한 전투로 인한 손실을 피하면서 주동적인 행동으로 주체적력량을 보존축적하는것이 항일혁명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과업으로 되여야 한다고 결론하시였다.

조국광복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한 전략적방침은 1940년 8월 10∼11일에 진행된 소할바령회의에서 채택되였다.

소할바령은 돈화현과 안도현의 경계를 타고 뻗어내린 할바령의 꼬리부분에 위치하고있는 지점이다.

이 회의는 항일혁명이 시련을 겪고있을 때 조선민족해방투쟁과 공산주의운동이 안고있던 역경을 순경으로 전환시키고 화를 복으로 바꾸기 위하여 주석께서 바치신 피타는 열정의 산물이였다.

회의과정에 크게 론의된 문제는 앞으로의 전략적단계를 혁명적대사변의 시기로 규정할수 있겠는가 하는 가능성여부에 대한 문제였다. 주석께서는 그렇게 규정할수 있는 현실적가능성을 주는 주객관적요인을 과학적으로, 전면적으로 분석하시였으며 그것은 회의참가자들의 일치한 지지를 받았다.

회의에서는 다음으로 대사변의 전략적시기에 실행하여야 할 전략적과업에 대하여 토의하고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한 준비사업에서 항일혁명의 중추적력량인 조선인민혁명군의 력량을 보존축적하면서 그들을 유능한 정치군사간부로 육성하는것을 새로운 전략적과업으로 규정하였다.

대사변은 적아쌍방의 정치군사적잠재력이 최대한으로 동원되는 최후결전을 전제로 하는데 그런 결전에서 승리자가 되자면 모든 유격대원들이 유능한 정치군사간부로 되여야만 하였다. 조국이 해방되면 바로 그 대원들이 핵심이 되여 새 조국건설도 해야 했던것이다.

회의에서는 끝으로 이상의 전략적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대부대작전으로부터 소부대작전으로 이행할데 대한 새로운 투쟁방침이 제시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소할바령회의의 커다란 력사적의의에 대하여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소할바령회의는 항일무장투쟁의 중요한 전략적로선들을 제시한 1931년 12월의 명월구회의, 1936년 2월의 남호두회의와 더불어 우리 혁명이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던 시기에 전략적로선을 바꾸기로 결정한 력사적인 회의입니다.

만일 그때 우리가 대세의 흐름을 제때에 보지 못하고 목전의 성과에만 급급하여 대부대활동을 계속했더라면 력량도 보존하지 못하고 자기 존재를 끝마쳤을것이며 력사에 순국한 렬사들로만 남아있게 되였을것입니다.》김일성동지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계승본) 8권, 18∼19페지〕

소할바령회의는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며 급변하는 국제정세속에서도 조선혁명을 자주적으로 전진시키며 항일무장투쟁의 어려운 국면을 타개하고 최후승리의 길로 이끌어나갈수 있는 담보를 마련한 회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의 모든 부대들이 소할바령회의방침에 따라 도처에서 소부대활동을 벌릴 때인 1940년 10월 중순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남호두회의후 두절되였던 코민테른으로부터 두번째 련락을 받으시였다. 첫번째 련락은 한해전인 1939년 10월에 있었다.

김일성주석께서는 이와 관련하여 회고록에서 이 시기 조선인민혁명군과 코민테른과의 접촉과정에 대해 개략적인 설명을 주시였다.

1차접촉때로 말하면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가 화라즈밀영에서 대부대선회작전을 위한 준비를 하고있던 때였다. 사선을 헤치고 천신만고끝에 밀영을 찾은 코민테른의 련락원(쏘련원동군소속)은 코민테른으로부터의 다음의 두가지 련락내용을 전달하였다. 하나는 코민테른이 소집하는 만주빨찌산지휘관들의 회의에 대표를 파견해달라는것이였고 다른 하나는 동북의 조선인민혁명군이 당분간 대부대활동을 고려해달라는것이였다.

주석께서는 적의 대《토벌》이 눈앞에 박두하고있는 때에 사령관이 부대를 두고 쏘련으로 들어갈수 없다는것, 당시의 상황에서는 대부대활동을 중단할수 없다는것을 밝힌 립장을 련락원에게 알려주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에 급작스럽게 코민테른이 관심을 높이게 된 리유에 대하여 설명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동북혁명이나 조선혁명에 어딘가 랭담하고 무관심했던 국제당이 어떻게 되여 1939년에 이르러서는 련락원을 보내여 우리를 쏘련에 초청하는 이례적인 조치까지 취했겠습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이런 변화는 일본의 대쏘침략이 기정사실로 되고있던 쏘련의 군사정치정세의 요구로부터 이루어진것이라고 평할수 있습니다.》김일성동지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계승본) 8권, 49페지〕

장고봉사건과 할힌골사건후 일제의 대쏘침략기도가 현실화된 조건에서 코민테른에서는 쏘련의 익측과 배후에서 무장으로 지원할수 있는 동맹자문제가 절박하게 제기되였는데 그러한 동맹자로서는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밖에 없었던것이다. 코민테른의 새로운 접촉은 이러한 정황으로부터 출발한것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쏘련을 무장으로 옹호하는 근본립장에서는 변화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조선혁명의 실정까지 고려하지 않고 코민테른의 제의를 무턱대고 받아들이는 립장에 서지 않으시였다. 주석께서는 코민테른의 요구를 보류하시고 대부대활동을 중지하지도 않으시였으며 쏘련으로 들어가지도 않으시였다. 오히려 조선인민혁명군은 만주에 그대로 틀고앉아 이미 선정한 시간표대로 대부대선회작전을 결단성있게 내밀어 적의 공세를 여지없이 짓부셔버리는 승리를 거두었던것이다.

두번째 접촉에서 코민테른의 련락원은 12월에 코민테른이 하바롭스크에서 소집하는 동북의 모든 항일무장부대들의 지휘관이 참가하는 회의에 참가해달라는것과 만주에서 활동하는 모든 항일무장부대들이 대부대활동으로부터 소부대활동으로 넘어가며 쏘련의 원동지역에 기지를 정하고 력량을 수습재편성할수 있도록 조속히 들어오라는것을 전달해왔다.

코민테른에서 소집하는 회의는 동북항일운동의 발전방향을 토의하는 중요한 회의였으므로 주석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을 대표하면서 동시에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과 남만성위를 대표하여 회의에 참가하기로 하시였다. 그리고 소부대활동과 관련한 코민테른의 요구는 이미 소할바령회의결정과 일치되는 문제로 되였다. 이 시기 군사정치정세는 1939년말∼1940년초에 대부대활동을 전개하던 시기보다 훨씬 더 엄혹하여 소부대활동이 가장 효과적인 투쟁방법으로 될수 있는 시기였다.

김일성주석께서는 련락원에게 조선인민혁명군이 이미 항일무장투쟁자체의 요구로부터 소할바령에서 회의를 열고 력량보존과 소부대활동에로 이행할데 대한 방침을 채택한데 대해 통보하시였으며 쏘련으로 들어오라는 요구에 대해서도 앞으로 고려해보겠다고 하시였다.

그렇지만 주석께서는 쏘련으로 들어가는것을 서두르지 않으시였다. 중요한 문제인만큼 심사숙고해야 했기때문이다. 우선 원동으로 들어가는 경우 얼마동안 체류하는가 하는것이 문제였다. 얼마간 있다가 나오는가 아니면 오래 머무르게 되는가, 원동에 기지를 정하고 장기적으로 머물러있는 경우 무장투쟁을 어떤 방식으로 계속할수 있겠는가, 필요한 때 유격대가 국내나 만주로 마음대로 진출할수 있겠는가, 국내운동에 대한 지도는 앞으로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고 그에 따르는 여러가지 대책이 필요하였던것이다.

여러 경우를 모두 타산한 대책적인 준비가 진행되였다. 주석께서는 코민테른이 소집하려고 하는 조, 중, 쏘 세 나라 군사지휘관들의 회의취지가 명백하고 또 동북항일련군의 다른 지휘관들도 이미 도착했다고 하는 실정에서 쏘련경내에 들어가 회의에 참가할것을 결심하시였다.

주석께서 원동으로 들어갈 준비를 마무리하시고 처창즈치기를 떠난것은 1940년 10월말경이였고 쏘련경내에 들어서신것은 11월이였다.

김일성주석께서 참석하신 흔히 말하는 하바롭스크회의는 1940년 12월에 소집되여 1941년 3월중순까지 계속되였다.

회의는 좌담회형식으로 진행되였는데 보고라는것이 따로 없었고 동북항일련군의 각 로군 대표들이 자기사업정형을 통보하는 형식으로 상정된 문제의 협의에 필요한 인식과 리해를 서로 촉진시키도록 하였다. 주석께서는 제1로군과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정형에 대하여 통보하시였다.

회의 첫단계에서는 동북항일련군과 조선인민혁명군, 각 성당위원회 책임간부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조건에서 각 로군과 성위간의 련계와 코민테른 및 쏘련과의 관계에서 공동보조를 취하기 위한 대책적문제를 놓고 여러날 진지하게 협의하였다. 그런 다음 1941년 1월초부터 코민테른 및 쏘련의 당국자들과 함께 만주에서의 항일유격활동의 장래문제와 쏘련원동군당국과의 호상지지와 협조의 내용 및 방식문제를 기본으로 협의하게 되였다.다시말하여 동북항일련군과 조선인민혁명군의 장래활동방향에 관한 문제를 중심의제로 론의하게 된 회의에서는 조선과 동북에서의 유격투쟁과 쏘련군대와의 호상관계를 어떻게 맺으며 그것을 새로운 정세의 요구에 맞게 어떻게 적응시키고 강화발전시켜나가겠는가 하는것을 기본으로 협의하게 되였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쏘련측은 도이췰란드, 일본, 이딸리아를 비롯한 파쑈세력이 반공련합을 형성하고있고 제2차 세계대전이 계속 확대되고있는 조건에서 련합한 파쑈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공동투쟁을 강화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실제적인 조치가 필요하며 그러한 조치로서는 동북항일련군이 독자성을 포기하고 쏘련군과 통합하는것이 바람직하다는 의향을 표시하였다. 이것은 본질에 있어서 동북항일련군의 지휘권에 관한 문제가 상정되였음을 말해주는것이였다. 이 문제를 둘러싼 쏘련군측과 항일련군측의 상반되는 립장으로 하여 회의는 어수선한 분위기속에서 진행되게 되였다.

쏘련의 그와 같은 제의는 한해사이에 급변한 세계정치의 정세와 원동의 군사정세에서 일어난 극적인 변화를 배경으로 하여 제시된것이였다. 쏘련은 어떻게 하나 도이췰란드와 일본으로부터 동서에서 공격을 당하는 최악의 사태를 피해야 했는데 정세는 그것이 성숙되여가는 형세를 보이고있었다. 쏘련측이 제출한 협동안을 보면 정세의 긴박성으로부터 오는 그들의 초조한 심리상태가 엿보이는것이였다.

그 당시 일본이 만주에 있는 항일무장부대들이 마치 쏘련의 사촉과 지령을 받고 활동하는것처럼 선전하면서 쏘련으로 침공하기 위한 구실을 찾으려고 하고있던 실정에서 쏘련측이 원동군과 동북항일련군을 하나로 합치는 군사체계의 창설을 제안하게 된것은 한편으로는 일본에 쏘련침공의 구실을 주지 말자는것이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일작전이 벌어지게 될 경우 원동군과 협동할수 있는 동맹자를 얻으려는데 목적이 있었던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쏘련측 제안에도 리해할만 한 점이 없지 않았다.

두 무력의 통합문제를 두고 회의장안팎에서는 격렬한 론의가 벌어졌다. 동북항일련군의 지휘관들은 통합은 절대로 안된다, 쏘련측은 남의 사정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자기네 생각만 한다, 그들의 립장은 매개 나라 혁명의 독자성을 존중할데 대한 혁명적원칙을 무시하는것이다 등의 주장으로 쏘련군측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쌍방의 견해가 대립하자 쏘련측은 이 문제와 관련해 김일성주석의 의향을 몹시 알고싶어하게 되였다.

주석께서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립장을 표시하시였다. 당신들이 제출한 제안은 일리있는 제안이다, 그런 제안을 내놓게 된 당신들의 형편을 리해한다, 그러나 이 요구는 아직 일방적이고 시기상조이다, 일본군이 쏘련침공의 기회를 노리는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전쟁이 당장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승리한 나라의 혁명을 보위하는것도 중요하지만 승리하지 못한 나라의 혁명을 추진시키는것도 그만 못지 않게 중요하다, 당신들은 동북항일유격운동을 경시하는것 같다.…

그러자 쏘련측은 주석께 어떤 형태의 통합도 다 반대하시는가고 물어왔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대답을 주시였다. 아니다, 쌍방에 리로운 련합과 행동방식이야 왜 반대하겠는가, 내가 반대하는것은 어느 일방이 타방을 무시하거나 타방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무리한 통합이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중국동지들과 함께 항일련군을 뭇고 공동투쟁을 하면서도 자기의 독자성을 그대로 유지하고있다, 그러니 공동투쟁을 해도 말썽이 없다, 나는 조선인민혁명군을 항일련군에 용해시키는것도 반대하지만 쏘련군대에 배속시키자는것도 반대한다, 그것은 형식과 내용에서 우리의 독자성을 무시하는것으로 되기때문이다.…

주석의 말씀을 주의깊게 듣고나서 쏘련측은 김일성동지께서 공회전을 거듭하고있는 우리의 론쟁에 종지부를 찍고 회의를 결속할수 있는 실마리를 주었다, 우리는 오늘 동지의 말씀에서 아주 좋은 시사를 받았다고 하였다.

한편 항일련군측을 대표하는 주보중과 장수전도 제기된 문제에 대한 주석의 견해를 물어보게 되였다.

주석께서는 거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대답을 주시였다.나는 각자의 독자성만 인정해준다면 여러 무장력의 국제적인 련합을 반대하지 않겠다, 문제는 어떤 형태의 련합인가 하는것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시간을 두고 좀더 연구해보아야 한다, 쏘련측의 제안이 일방적인것이기는 하지만 씨앗은 있다, 그러니 무턱대고 배척하지 말자.…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의 주장은 회의에서 지지를 받게 되였다. 회의과정에 발현된 주석의 원칙적인 립장은 조선, 쏘련, 중국 세 나라 혁명무장력사이의 단결과 협조를 실현하는데서 커다란 긍정적작용을 하게 되였다.

하바롭스크회의에서는 혁명력량을 보존축적하며 대규모적인 유격투쟁으로부터 소부대활동으로 이행할데 대한 조선인민혁명군의 전략적방침이 새로운 정세의 요구에 부합되는 정확한 방침이라는것을 확인하고 동북항일련군과 조선인민혁명군의 모든 부대들이 력량보존에 중점을 두고 소부대활동을 전개할데 대해 진지하게 협의하였다.

회의는 론의끝에 앞으로의 활동에서 기본은 소부대활동,군중공작,조직건설,실력배양에 두기로 하였다. 이것은 소할바령회의에서 토의결정한 방침과 일치하는것이였다.

쏘련측은 회의에서 자기 나라 경내에 동북항일련군과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기지를 제공하겠다고 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은 그들이 마련해주는 장소를 또 하나의 림시기지로 삼고 조선과 만주의 광활한 판도에서 소부대활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하바롭스크회의가 있은 다음 쏘련은 원동지역에 두개의 기지를 제공해주었다. 하나는 연해주 남부의 워로쉴로브근처의 남야영이였고 다른 하나는 하바롭스크부근에 설치된 북야영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그때 조선인민혁명군 사령관으로서 남야영을 책임지고 활동하시였으며 얼마후에는 1로군에서 온 일부 력량을 하나로 묶어 제1지대를 조직하고 그 지대장으로 있으면서 소부대활동을 적극화할 대책을 세워나가시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이 원동에 새로운 림시기지를 꾸린 다음 국내와 만주일대를 종횡하면서 소부대활동을 활발히 전개해나가게 된것은 항일무장투쟁력사에서 하나의 전환이라고 할수 있다. 물론 이것은 아직은 잠정적인 조치였지만 항일혁명의 최후승리를 마련하기 위한 투쟁을 보다 높은 단계에로 발전시킬수 있는 중요한 첫걸음으로 되였다.

하바롭스크회의가 있은 후 조선인민혁명군이 원동의 림시근거지에서 군정훈련도 하면서 백두산을 비롯한 국내 여러곳에 튼튼히 꾸려놓은 비밀근거지를 거점으로 삼고 국내무장투쟁과 혁명운동을 다같이 추진시켜나감으로써 조국해방의 새날을 앞당기게 되였다.

이 시기에 조선인민혁명군은 력량을 보존하기 위해 대규모의 전투는 피하고 대신 대중정치공작과 정찰활동에 큰 힘을 넣었다. 국내에 많은 소부대와 소조, 정치공작원들을 파견하여 전민항쟁준비도 하였다.

소부대와 소조의 인원은 경우에 따라 각이했으나 소부대는 보통 10명안팎으로부터 수십명으로, 소조는 수명정도로 편성하였다. 무장은 사명과 임무에 맞게 간편하게 하였다.

소부대와 소조를 편성한 다음에는 해당한 임무와 활동구역이 제시되였다. 임무분담에 따라 정치사업을 기본으로 하는 소부대, 소조를 두는가 하면 전투를 기본으로 하는 소부대, 소조도 두었으며 정찰을 기본으로 하는 소부대, 소조도 두었다. 그러되 그 분공은 고정불변한것이 아니였다. 상황에 따라 정찰소조가 정치사업을 하기도 하고 전투를 기본으로 하는 소조가 정찰과 정치사업을 동시에 담당하는 식으로 다른 임무를 겸해서 수행하기도 하였다.

부대편성이 종료된 후에는 소부대나 소조들이 의지할 림시비밀근거지들을 정하고 꾸리는데 힘이 돌려지게 되였다. 소할바령회의이후 건설된 대표적인 림시비밀근거지들로는 연길현 도목구부근기지, 화룡현 맹산촌부근기지, 안도현 황구령기지, 왕청현 쟈피거우기지 등이 있었다. 국내에도 경흥(은덕, 선봉), 무산, 라진으로부터 종심깊이에 이르기까지 많은 림시비밀근거지들을 건설하였다. 이 기지들에는 소부대가 있을 밀영과 통신련락소, 비밀회합장소, 경리용물자보관소 등을 두었다.

소부대, 소조들의 활동내용도 매우 다양하였다. 국내와 동북일대에서 파괴된 당조직들과 지하혁명조직들을 복구하고 확대하며 남아있는 무장부대들을 수습, 재편성하는 사업, 전민항쟁조직들에 대한 체계적이고 통일적인 지도를 확립하는 사업을 진행하였다. 동시에 적극적인 습격전과 매복전, 파괴전으로 적의 후방을 교란하고 전쟁능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투쟁, 적의 군사시설과 기지, 요충지들에 대한 군사정찰활동과 적통치체계와 적군내부를 혼란시키기 위한 투쟁 등을 폭넓게 전개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백두산과 원동의 림시기지들을 왕래하시면서 국내와 동남만에 대한 소부대활동을 지도하시는 한편 원동기지에서의 군정학습도 동시에 추진시켜나가시였을뿐아니라 1941년 4∼8월과 9∼11월간에는 몸소 소부대를 거느리시고 국내와 동북지방에 나가시여 활동하시였다. 주석께서는 소부대들과 소조들의 련계를 지어주시고 그들에 대한 통일적지도를 주시며 수집한 정찰자료를 종합하는 등의 사업을 진행하시였다.

이때 간백산밀영에 가신 주석께서는 소부대와 정치공작소조, 혁명조직책임자들을 부르시여 조성된 정세의 요구에 맞게 주체적립장을 견지하며 자기 힘으로 항일혁명을 완수하도록 사상교양사업을 강화할데 대해 가르치시였다. 그리고 국내와 서간도일대에서 우수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원동의 기지에 데려다가 훈련시키기 위한 준비와 그밖의 많은 력량을 백두산밀영과 간백산일대에서 육성하여 전민항쟁에 대처하기 위한 사업을 조직해나가도록 하시였다.

온 동북땅과 조선의 북부국경지대는 소부대와 소조들의 활동으로 죽가마처럼 끓어번지게 되였다.

이전에는 소부대, 소조들이 주로 조선의 북부국경지대와 동북지방에서 활동하였지만 이 시기부터는 국내종심깊이에로 뚫고들어가 조선 남단의 군사요충지들과 멀리 일본본토에까지 활동지역을 확대해나갔다.

《동남부치안숙정특별공작》과 대규모적인 《토벌》작전으로 유격대를 다 소멸한것처럼 허장성세하던 일만군경은 조선인민혁명군의 령활한 소부대작전앞에 궁지에 몰려 갈팡질팡하게 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소부대활동은 국내외에 혁명군은 이전날처럼 여전히 건재해서 적들을 족치고있으며 승리만을 거듭하고있다는것, 혁명군의 두리에 전민이 단결하여 거족적인 항쟁을 전개한다면 얼마든지 일제를 타승하고 조국해방의 새날을 앞당기게 된다는것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1941년에 들어가 정세는 다시금 급변하였다. 1941년 6월에 쏘련-도이췰란드전쟁이 발발하였다. 12월에는 태평양전쟁이 터졌다. 그해 4월에 쏘련과 일본사이에는 중립조약이 체결되였으나 두 나라의 뿌리깊은 모순관계로 하여 그것이 전쟁으로 번져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이러한 정세속에서 일제와의 마지막결판을 짓자면 주체적력량을 강화하는것과 함께 국제반파쑈력량과의 련대를 위해서도 응당한 노력을 경주하는것이 요구되였다. 이 문제는 쏘련의 원동이 조선과 쏘련, 중국 세 나라 항일세력의 중요한 집결처로 되고있었고 조선인민혁명군의 기본집단이 동북항일련군과 함께 원동의 림시기지를 리용하면서 싸우고있는 조건에서 중요한 문제가 아닐수 없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이와 관련하여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쏘, 중 두 나라 무장력과의 협동을 잘해나가는것은 우리 혁명의 주체를 강화하고 그것을 확대공고히 하기 위한 국제적환경을 마련하는데서도 반드시 중시하지 않으면 안될 전략적인 문제였습니다.》김일성동지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계승본) 8권, 236 페지〕

조선인민혁명군은 자신의 독자성은 독자성대로 유지하면서 중국의 무장부대들과 함께 동북항일련군을 편성하고 공동투쟁을 해온 훌륭한 경험을 가지고있었다. 조선과 중국 두 나라 무장력이 원동에 또 하나의 기지를 가지고있고 또 쏘련원동군이 조선인민혁명군의 익측에 있는 조건에서 이미 이룩한 공동투쟁의 경험을 발전시켜 공동항일의 폭과 심도를 보다 넓히고 그것을 높은 단계로 발전시켜야 하였다. 이것은 조선혁명자체를 위해서 필요할뿐아니라 중국이나 쏘련의 대일전략과도 일치하는것이였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면 쏘련과 중국 두 나라 무장력과의 관계를 어떤 형태로 어떻게 가지는가 하는것뿐이였다. 이 문제를 푸시기 위하여 주석께서는 국제련합군편성에 관한 구상을 무르익히시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나는 조선, 중국, 쏘련 세 나라 무장력의 리상적인 련합형태를 국제련합군으로 보았습니다.》김일성동지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계승본) 8권, 237페지〕

국제련합군의 구상은 쏘련측과 중국측으로부터 매우 적중한 대안으로 된다는 반응을 불러일으키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1942년 7월 22일 주보중, 장수전, 아빠나쎈꼬원동군사령관과의 회합에서 세 나라 무장력의 련합문제를 최종적으로 토의하고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의 독자성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전제하에 국제련합군을 창설할데 대하여 결정하게 되였다.

세 관계측의 협의에 따라 국제련합군에 대한 각종 무기와 군사장비, 피복과 식량을 비롯한 물자공급은 쏘련측이 담당하기로 하였고 형식상 국제련합군을 쏘련원동군 독립88려단으로 부르도록 하고 부대의 대외번호는 8461보병특별려단으로 하였다. 국제련합군은 그 존재와 활동의 비밀을 보장하며 위장을 철저히 하기 위해 축소하여 편성하는 원칙을 세워 려단규모로 조직하게 되였던것이다.

김일성주석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 1로군 력량으로 편성된 제1지대의 지휘를 맡으시게 되였으며 지대는 북야영에 집결하게 되였다. 제1지대는 그 내용으로 볼 때는 국제련합군의 조선부대였다.

국제련합군이 편성됨으로써 원동의 군사정치정세는 국제혁명의 편에 유리하게 전변되였다.

쏘련은 일본의 침략책동에 주동적으로 대처할수 있는 군사정치적력량을 확보하고 조선과 중국 동북지방에서의 군사작전수행에 전면적으로 복무하는 새로운 특수부대를 가지게 되였다.

국제련합군의 존재는 조선혁명과 중국혁명에도 유리한 환경을 마련해주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쏘련원동군과 함께 활동하게 됨으로써 정규무력의 테두리속에서 조국해방작전에 필요한 현대적인 작전수행능력과 장비를 갖출수 있게 되였다. 또한 쏘련경내에서 대사변이 도래할 때까지 조국해방의 과업을 자체로 수행할수 있는 충분한 군사정치적준비와 실력을 갖출수 있게 되였던것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세계의 여러 출판물에 자신께서 쓰딸린그라드격전이나 베를린공격작전에 참가하였다고 하는것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적지 않은 나라의 인명사전들은 내가 조선사람들로 꾸려진 큰 부대를 이끌고 쓰딸린그라드격전에 참가했고 거기서 공을 세워 적기훈장을 수여받았다고 소개하고있습니다. 어떤 글들은 내가 베를린공격작전에도 제1선부대로 참가하였다고 쓰고있습니다.

나는 쏘련정부로부터 적기훈장은 받았지만 쓰딸린그라드격전이나 베를린공격작전에 참가한 일은 없습니다. 그 사전의 필자들이 어디서 그런 자료들을 입수했는지 모르겠습니다.》김일성동지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계승본) 8권, 243페지〕

국제련합군의 존재는 조선과 쏘련, 중국 세 나라 무장력의 련합을 두려워하던 일본제국주의자들을 전률시켰으나 반대로 조선인민에게는 크나큰 신심을 안겨주게 되였다.

국제련합군이 편성된 후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의 소부대활동은 보다 활발히 전개되였다. 다가오는 대일최종작전을 내다보고 그 수행에 이바지할수 있는 군사정치활동과 전민항쟁준비에 모를 박으면서 활동의 폭과 심도를 확대해나가게 되였다.

국제련합군 조직후 소부대활동에서 특징적인것은 소조활동을 위주로 하면서도 여기에 규모가 비교적 큰 소부대활동을 배합하는 원칙을 견지한것이였다. 이 원칙에 따라 군사작전에서도 소조들에 의한 활동에 주력하면서 여기에 소부대에 의한 습격전과 매복전이 적절히 배합되였다.

국제련합군에 편성된 조선인민혁명군은 다른 한편으로 현대전에 대처한 전투정치훈련을 강화하면서 대일작전준비를 급속도로 촉진하는데 주력하였다.

이와 같이 국제련합군의 편성은 항일무장투쟁의 발전에서 새로운 력사적리정표로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1940년대에 이르러 항일혁명투쟁은 조국광복위업수행에서 결정적국면을 열어놓을수 있는 새로운 발전단계에 들어섰습니다. 이 시기의 투쟁에서 중요한 내용의 하나로 된것은 우리가 1942년 여름부터 쏘련경내에서 중국, 쏘련의 전우들과 함께 국제련합군을 편성하고 일제를 최종적으로 격멸하기 위한 정치군사적준비를 백방으로 강화해나간것이였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쏘련, 중국의 무장력과 함께 국제련합군을 편성하고 공동투쟁을 벌린것은 조선혁명발전의 새로운 단계를 의미하는것이였다고 평가할수 있습니다.》김일성동지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계승본) 8권, 232페지〕

내용상으로 볼 때 조선혁명은 원래 일제를 축출하고 조국을 해방하는것을 당면과제로 내세웠다. 국제련합군이 편성됨으로써 조선혁명은 조국해방의 위업과 함께 일본제국주의자체를 종국적으로 괴멸시키기 위한 세계사적인 과제를 겸하여 수행하게 되였다.

국제련합군의 편성으로 하여 항일무장투쟁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국제련합군편성을 분기점으로 하여 조선혁명은 중국혁명력량과의 공동투쟁단계로부터 조선과 중국, 쏘련 세 나라 무장력의 련합을 내용으로 하는 폭넓은 공동투쟁단계에로 세계반제반파쑈투쟁의 거창한 흐름에 합류하는 새로운 공동전선단계로 이행하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