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김일성주석과 반일민족해방투쟁사』 중에서 

제  3  장

1930년대 반일민족해방투쟁

12. 또다시 국내에로

1937년은 항일혁명의 전성기였다.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의 백두산지구진출이 일으킨 파도를 타고 력사적인 전환의 시대에 들어선 조선민족해방운동과 공산주의운동은 전례없는 폭과 심도를 가지고 앙양일로의 길을 걷고있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조선혁명은 사나운 도전에 부딪치여 또다시 시련을 겪게 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이 백두산지구를 떠나 무송, 몽강현일대에서 활동하는 사이 《혜산사건》으로 백두산지구에 나온 후 한해남짓한 기간 꾸려놓은 지하조직들이 파괴되고 수많은 혁명가들이 희생당하게 되였다.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가 백두산지구를 떠나 무송, 몽강현일대로 이동하게 되는 직접적계기가 된것은 코민테른에서 하달된 열하원정에 대한 지시와 관련되여있었다.

열하원정이란 간단히 말해서 동북지방의 항일무장부대들이 료서와 열하방면으로 진출하여 동정하는 팔로군부대들과의 련합작전으로 중국관내로 쳐들어가는 일본침략군을 제압한다는것이였다. 코민테른이 추구한 이 전략적목적은 북상해서 다시 동정하는 팔로군과 서정하는 항일련군부대들이 열하계선에서 합류함으로써 중국관내와 동북지방에서의 항일투쟁의 일체화를 실현하며 전반적항일운동에서 새로운 앙양을 일으켜나간다는것이였다.

주석께서는 국내혁명을 일대 앙양에로 이끌어야 할 중대한 시기에 나선 열하원정계획이 무모한것임을 꿰뚫어보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국제당이 원정을 하라고 강요했지만 나는 처음부터 그것을 무모한것이라고 보았습니다.》김일성동지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계승본) 7권, 77페지〕

열하에로의 원정계획은 코민테른의 지령으로 떨어졌으나 그것을 작성하고 시달한 사람은 왕명이였다. 한때 중국공산당의 지도적직위에 있던 왕명은 모스크바에 가있으면서 중국의 실정에 맞지 않는 로선들을 계속 작성하고 시달하였다. 왕명의 로선에서 주되는 오유는 《국제로선》이라는 미명하에 강요된 좌경이였다. 그가 작성한 열하원정계획 역시 좌경모험주의적인것이였다.

코민테른은 열하원정과 관련한 새 지령에서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가 그전날 항일련군 1군이 차지하고있던 해룡, 길해선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서 장춘을 반달형으로 포위하는 작전에 직접 참가하며 열하쪽으로 진격하는 1군의 활동을 적극 지원할데 대해 요구하였다. 이 요구대로 한다면 조선인민혁명군은 항일혁명의 책원지인 백두산근거지를 떠나 멀리 서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계획은 군사적면에서 보아도 매우 비현실적인것이였다. 왜냐하면 그것이 유격전의 요구에 맞지 않는것이였기때문이다. 유격대가 산악지대를 떠나 벌방으로 진출한다는것은 고기가 물을 떠나 뭍에 오르는것과 같은 위험천만한 모험이였다. 항일련군부대들이 본래의 활동구역을 떠나 열하나 료서까지 가려면 적의 요충지들이 집결되여있는 남만철도계선의 넓은 평원지대를 통과해야만 하였다. 그 광활한 평지에서 대포나 땅크와 같은 중무기를 가지고있는 적의 정규군과 조우하면 경무기밖에 없는 유격대에게는 승산이 없는 전투를 하게 되여있었다.

모험주의적 열하원정지시가 하달된 중대국면에서 김일성주석께서는 주체성을 고수하시면서도 코민테른의 의도에 도움을 주는 원칙적립장을 지키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국제당이 내린 지령들가운데는 현실에 부합되지 않는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번 그 지령들을 심중하게 대했으며 그것을 우리 혁명의 구체적실정과 결부시켜 리행하면서 국제적리익과 민족적리익이라는 량자를 옳게 결합시키기 위하여 용의주도하게 사색하고 령활하게 행동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김일성동지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계승본) 7권, 87페지〕

주석께서는 열하원정계획이 중국동북지방의 혁명운동발전에 리롭지 못할뿐아니라 조선혁명의 견지에서 볼 때에도 매우 일면적이고 해독적이라고 간파하시면서도 그 집행에서는 신중성을 기하시였다. 주석께서는 당분간은 림강, 무송, 몽강일대에서 류동작전을 전개하면서 조선혁명을 추진시키기 위한 정치군사활동을 하다가 적당한 시기에 1군이 이동한 방향으로 서서히 움직이게 하시였다.

그러나 1938년 봄 양정우가 이끄는 1군의 부대들은 원정을 개시하자마자 포위속에서 고전을 겪게 되여 열하에로의 서정계획을 철회하게 되였다. 이에 주석께서는 일부 부대를 이동시켜 1군을 포위하고있는 적의 력량을 분산시키는 작전을 진행하시였다. 림강, 무송, 몽강일대에서 조선인민혁명군부대들이 울린 총소리는 1군의 어려운 처지를 개선하는데서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열하원정실패의 원인을 교훈적시각에서 과학적으로 분석하시였다.

주석께서는 그 원인은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고있는것처럼 일만통치질서의 수립과 적력량의 압도적우세라는 객관적조건에 있었던것이 사실이라고 지적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그것을 객관적조건에서만 찾아서는 안된다는것을 아울러  지적하시였다. 원정의 주체는 동북의 항일련군부대들이였고 원정을 로선으로 강요한 코민테른도 넓은 의미에서는 원정의 주체였다. 그런데 코민테른은 로선작성과 지도에서 주관주의를 범했고 항일련군부대들은 그 집행과 실천에서 맹목적이였다. 결국은 코민테른의 주관주의와 모험주의가 원정실패의 기본원인으로 되였던것이다.

김일성주석께서 몽강현 대갑랍자밀영에 이르렀을 때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가 백두산근거지에서 잠시 이동해온 사이에 당조직건설사업과 조국광복회조직건설사업에 심각한 손실을 당하게 되였다는 보고를 받으시게 되였다. 《혜산사건》의 상보를 받으신 주석께서는 무엇이라고 표현할지 모를 크나큰 통분의 정을 누를길 없으시였다. 주석께서는 시급히 마동희 등 공작원을 파견하시여 사태를 수습하도록 하시였다.

1938년 가을 몽강현 남패자에서는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의 군정간부들의 회의가 10여일동안 진행되였다. 회의에서는 열하원정의 좌경모험주의적인 본질, 그 결과가 신랄하게 비판분석되고 원정의 심각한 후유증을 가시기 위한 대책이 론의되였다.

회의에서는 적들의 대규모적공세에 대처하여 조선인민혁명군부대들이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국경지대에 진출하여 군사정치활동을 적극적으로 벌릴데 대한 문제와 파괴된 조국광복회조직을 복구정비하고 대중정치사업을 더욱 적극화할데 대한 문제들이 토의되고 결정되였다.

회의에서는 또한 조선인민혁명군부대들을 방면군으로 편성하고 그 지휘관들을 임명하였으며 부대들의 활동구역을 분담하였다.

남패자회의 중요성과 관련하여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력사학자들이 남패자회의의 정치군사적의의를 잘 서술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패자회의는 남호두회의와 함께 조선혁명과 동북혁명의 주체성을 강화하는데서 큰 몫을 담당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혁명의 주체성이란 무엇입니까. 독자적인 판단과 결심을 가지고 자기 나라의 특성과 실정에 맞게 혁명을 자주적으로 해나간다는것을 의미하는것입니다.

남패자회의를 계기로 하여 조선혁명은 질적으로 한걸음 더 비약하였습니다.》김일성동지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계승본) 7권, 100∼101페지〕

조선혁명의 주체성을 강화하는데서 한걸음 더 질적으로 비약하게 된 남패자회의를 계기로 조선인민혁명군의 전체 대원들이 크나큰 고무를 받게 되였다. 이 고무가 있음으로 하여 그들은 그때로부터 시작되는 고난의 행군과 같은 력사에 류례없는 시련을 능히 이겨내는 힘을 가지게 되였던것이다.

1938년 12월초부터 이듬해 3월말까지 몽강현 남패자에서 장백현 북대정자에 이르는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의 행군을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른다.

고난의 행군이 진행된 1938년말-1939년초로 말하면 항일무장투쟁력사에서 가장 어려운 시련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조국진출을 위한 압록강연안에로의 행군을 단행하게 된것은 투쟁의 길에 닥쳐온 역경을 순경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였다.

앉아서 걱정만 해가지고서는 문제를 해결할수 없었다. 물론 밀영같은데 들어가서 배겨있으면 한해겨울을 무사히 보낼수도 있고 력량을 보존할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 현상유지나 해가지고서는 조성된 난국을 타개할수 없었다. 《혜산사건》으로 해서 수많은 지하조직들이 파괴되고 적들이 인민혁명군이 다 망했다고 허위선전을 하여 서간도지구와 국내인민의 사기가 저락된 때에 혁명을 다시 앙양시키자면 고난의 행군을 해서라도 하루빨리 국내에로 진출하여야만 하였다.

남패자에서 북대정자까지는 도보로 대엿새면 가닿을수 있는 거리에 있었으나 고난의 행군은 적들과 싸우느라고 무려 100여일이나 되는 품을 들여야 하였다. 일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주력부대에 《토벌》력량을 총집중하였다. 1군은 다 녹고 얼마 없다, 남은것은 김일성부대뿐이다, 여기에 전 력량을 집중하라고 야단법석하였다. 남패자를 겹겹으로 포위하고있던 적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이동이 시작되자 즉시 추격을 시작하였다. 추격과 포위가 계속되고 그런 정황속에서 싸움을 계속하게 되니 행군의 간고성이란 이루 말할수 없었다. 거기에다 엄혹한 자연과의 투쟁, 극심한 식량난과의 투쟁, 무서운 병마와의 투쟁, 고난을 이겨내기 위한 자기자신과의 투쟁이 겹치면서 엉켜졌으니 참으로 고난의 행군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진 시련과 난관으로 일관된 행군이였다.

고난의 행군은 부대의 이동을 위한 단순한 고난의 행군이 아니라 옹근 하나의 전쟁과 맞먹는 규모가 큰 군사작전이였다. 간고한 항일무장투쟁의 축도였다고 말할수 있다. 이 행군과정에 항일유격대는 군인으로서 겪을수 있는 고통을 다 겪었고 인간으로서 체험하게 되는 온갖 시련을 다 이겨내게 되였다.

주석께서는 그처럼 어려웠던 고난의 행군이 승리적으로 결속된 요인이 무엇이겠는가에 대하여 몇가지 점을 들어 설명하시였다.

첫번째 요인으로서 지적된것은 백절불굴의 혁명정신과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혁명정신, 혁명적락관주의정신이다.

이런 정신적요인들이 조선인민혁명군으로 하여금 무서운 곤난을 겪으면서도 비관을 모르고 승리의 앞날을 내다보며 만난을 이겨낼수 있게 하였다.

다음 요인으로는 혁명적인 동지애를 들수 있다. 혁명적동지애는 항일혁명 전 로정을 관통해온 승리의 중요한 요인이지만 고난의 행군과정에서는 유격대원들의 도덕의리가 그 어느때보다도 집중적으로 발양되였다.

《한홉의 미시가루》와 같은 혁명일화는 그 시기에   창조된 무수한 미담들중의 하나이다. 전령병들이 사령관을 위해 배낭속에 미시가루를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였는데 털어서 한홉밖에 되나마나하자 주석께서는 그것을 혼자서 잡수실수 없었다. 그래서 대원들과 나누어 잡수셨는데 이것이 후대들에게 전설같은 이야기로 전해지게 되였다.

대원들은 100여일에 걸친 행군의 전 행정에서 모두가 그때의 그 정신으로 살며 싸웠기때문에 굶어죽지 않았다. 해진 옷을 입고 혹한속을 헤치고 다녔지만 늘 몸이 훈훈했고 마음은 후더웠다. 유격대원들이 한사람도 굶어죽지 않고 얼어죽지 않고 불사신처럼 살아남을수 있은 비결이 거기에 있었다.

다음으로 들어야 할 요인은 유격대에 대한 인민의 사랑과 지원에 있었다. 행군대오는 그 어려운 속에서 언제나   인민의 사랑과 도움을 받았다. 쌀이나 소금이나 신발이나 천과 같은 긴요한 물자를 가지고 사선을 헤치고 유격대를 찾아온 고마운 사람들의 미담 또한 전설처럼 전해지고있다.

끝으로 들어야 할 요인은 주석께서 부닥치는 정황에 맞는 령활한 유격전법들을 능동적으로 활용하신데 있었다. 강한 공격과 진드기처럼 추격하는 적의 전법에 갈지자로 로정을 잡는 전법으로 길이 꺾이는 요소마다에서의 기습으로 적에게 무리죽음을 주는 신묘한 전법, 앞의 적과 뒤의 적이 서로 맞불질을 하게 《승천입지》하는 전법, 집중행군과 분산행군의 배합, 적의 포사격권내에 있는 벌판을 백주에 대담무쌍한 강행군으로 극복하는 전법 등 령활한 전법이 있어 그 불리한 정황속에서도 유격대의 행군로가 열리게 되였던것이다.

고난의 행군을 통하여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한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조국의 아들, 인민의 아들이며 자기 민족과 민족해방위업에 가장 충실한 혁명투사들임을 다시한번 세상에 보여주었다. 그들은 고난의 행군을 하면서 자신들의 인격을 높은 경지에서 련마하였다. 이 행군과정에서 형성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아름다운 영상은 조선민족모두가 따라배워야 할 애국자의 전형으로 되였다. 이것이 바로 고난의 행군이 거둔 중요한 성과이며 항일혁명이 이룩한 가장 큰 업적중의 하나로 된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고난의 행군을 승리적으로 마치시고 1939년 4월 북대정자에서 조선인민혁명군간부회의를 소집하시고 《적극적인 반격전으로 일제침략자들을 련속 타격하고 조국으로 진군하자》는 연설에서 남패자회의에서 확정된 조국진출방침을 재확인하시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정치군사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지향점은 조국진군이였다. 즉 크고작은 군사작전을 많이 전개하면서도 그 총적인 지향점은 항상 조국진출과 조국해방이라는 목표에 두고 거기에 모든 력량을 집중해왔었다.

더우기 1939년 5월이라는 시점에서 조국진출은 보다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있었다. 당시는 《혜산사건》으로 하여 서간도지방의 혁명조직들과 함께 국내 북부일대의 일부 혁명조직들이 큰 피해를 입고있었으며 살아남은 적지 않은 조직들도 핵심적인 조직을 대부분 잃고있었고 또 피해를 면한 혁명조직들은 위축된 상태에 있었다. 거기에 적들은 《혜산사건》후 조선인민혁명군이 망했다는 선전을 계속하고있었다.

이와 같은 조건에서 항일혁명을 앙양시킬수 있는 최상의 방도는 조선인민혁명군의 대부대가 국내에로 진출하여 적들을 치고 내외에 자기 존재를 시위하는 길밖에 없었다.

조국진출의 절박성은 또한 파괴된 혁명조직들을 복구하고 그것을 확대하자는데 있었고 당조직건설과 통일전선운동을 더 잘하여 인민대중을 전민항쟁에로 추동하자는데 있었다.

국내진출의 공격목표가 될 후보지로서는 함경북도 무산지구가 선정되였다. 보천보전투가 있은 후 그 지대는 적들이 악질적인 수비대무력을 몇배로 증강한 곳이였다. 이런 지대로 대부대가 진출하여야 국내인민들에게 주는 영향력이 더 커질수 있었던것이다.

김일성주석께서는 북대정자회의후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를 친솔하시고 지체없이 춘기반격전으로 이행하여 압록강류역의 여러 지점에서 적들을 련속적으로 타격하는 전투를 전개하시였다. 그리고 5월 상순에는 간백산밀영에서 조국진군작전계획을 완성하시는것과 함께 지휘간부회의를 소집하시고 국내진공작전을 수행한 다음 백두산동북부일대에 새로운 근거지들을 창설하며 국내각지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의 정치군사활동을 보다 적극화할데 대하여 지적하시였다.

주석께서는 1939년 5월 18일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를 친솔하시고 5호물동에서 압록강을 건느시여 국내에로 진출하시였다.

조국에서의 첫날 밤을 청봉에서 숙영하게 되였다. 숙영준비를 끝낸 대원들은 정치선전을 목적하여 나무껍질을 벗기고 구호들을 가는 곳마다에서 써놓았는데 항일투사들의 숨결이 배여있는 그 구호나무들이 오늘까지도 정히 보존되여 그날의 투사들의 숭고한 넋을 전하여주고있다.

부대는 다음날 건창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적들은 숱한 수비대와 경찰대를 투입하여 밀림속을 샅샅이 수색하기 시작했다. 은밀성을 보장하며 부대의 무산지구에로의 진출을 보장하는것은 국내진공작전의 성공을 좌우하는 문제로 나서게 되였다.

부대가 건창을 떠나 베개봉에 이르렀을 때 그 동쪽의 원시림속에 신설도로가 있다는것을 발견하게 되였다. 그 길로 말하면 갑산과 무산의 무인지경을 련결하는 비상경비도로로서 《갑무경비도로》로 불리우고있었고 준공검사를 기다리는중에 있던 도로였다.

김일성주석께서는 이때 일행천리전술로 무산지구로 신속히 진출할데 대한 대담한 행동방침을 내놓으시였으며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를 거느리시고 대낮에 삼지연을 거쳐 100여리를 보무당당한 행군으로 극복하시고 두만강기슭의 무포에 도착하시였다.

무포숙영지에서 주석께서는 대홍단지구로 진격할데 대한 차후 행동방침을 밝히시고 부대가 신사동과 신개척일대에서 군사정치활동을 전개하게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도 신사동으로 진출하시여 5월 22일 인민들앞에서 《조국의 광복을 앞당기기 위하여 반일투쟁에 적극 떨쳐나서자》라는 력사적인 연설을 하시였다.

조선인민혁명군부대는 위대한 수령님의 지휘하에 5월 23일 유격대의 무산지구진출을 저지시켜보려고 발악하던 적들을 신묘한 유인매복전술로 전멸시키는 커다란 군사적승리를 거두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대홍단에서 울린 총소리 역시 거대한 전략적의의를 가진다는데 대하여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무산지구전투는 보천보전투와 함께 우리가 국내에서 진행한 군사작전들가운데서 가장 규모가 크고 의의가 큰 전투였습니다. 보천보전투가 조선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것을 시위한 전투였다면 대홍단전투는 적들이 전멸당했다고 선전하던 조선인민혁명군이 건재해있을뿐아니라 오히려 더욱더 강대한 력량으로 자라나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계속 철추를 내리고있다는것을 실지로 보여준 력사적인 전투였습니다.》김일성동지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계승본) 7권, 235페지〕

무산지구의 총소리는 기가 죽었던 국내의 인민들에게 항일혁명이 계속 상승일로를 걷고있다는 신심을 주고 《혜산사건》의 여파로 하여 일시적으로나마 위축되였던 국내혁명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준 강심제와도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것은 또한 조선인민혁명군이 다 망했다고 떠들어대던 적들의 선전이 완전히 허위라는것을 만천하에 폭로하게 되였다. 무산지구전투가 있은 뒤로 국내의 각계각층의 광범한 인민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이 건재하는 한 조국해방의 새날은 반드시 오고야만다는 확신을 가지고 항일혁명의 흐름속에 뛰여들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무산지구진공작전후 투쟁무대를 백두산동북부일대에로 옮기시고 이 일대를 혁명의 전략적기지로 축성하기 위한 사업을 추진시키시는 한편 무산, 연사지구를 비롯한 북부국경일대와 국내깊이에 혁명의 보루를 쌓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시였다.

백두산동북부지대와 북부국경지대에 눈에 보이지 않는 강력한 전략기지가 축성됨으로써 당시의 그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항일혁명의 근거지는 보다 넓은 지역에로 확대되였으며 이 기지에 의거하여 일제와의 최후결전을 성과적으로 전개할수 있는 준비가 예견성있게 갖추어지게 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적극적인 군사정치활동에 극도로 당황한 일제는 1939년말부터 수십만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동남부치안숙정특별공작》이라는 대규모《토벌》작전을 감행하여나섬으로써 항일혁명앞에는 또다시 어려운 시기가 닥쳐오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이때를 회고하시여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가 무장투쟁을 하면서 제일 고생을 많이 한 때가 어느 때인가 하면 1930년대말부터 1940년대초까지입니다. 고난의 행군도 어려웠고 일제가 <치안숙정특별공작>의 명목밑에 동남부   3개 성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을 감행하던 때에도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동남부 3개 성이란 길림성, 통화성, 간도성을 말합니다. 매 단계의 투쟁이 다 간고하고 복잡했지만 이 시기에 겪은 고생은 정말 잊을수가 없습니다.》김일성동지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계승본) 7권, 310페지〕

주석께서는 적들의 대규모《토벌》에 대처하여 백두산동북부의 광대한 지역에서 대부대선회작전을 진행하여 적의 《토벌》을 격파하도록 하시였다.

대부대선회작전은 주로 밀영을 중심으로 전개하던 종래의 군사정치활동과는 달리 대부대로 이미 지정된 비밀로정을 따라 광활한 지역을 부단히 선회하면서 적들이 예견하지 못한 곳에 불의에 나타나 적을 치고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며 적들이 밀려오면 신속히 다른 곳으로 기동하여 활동하는 신출귀몰하고 림기응변하는 작전이였다.

대부대선회작전은 조선인민혁명군으로 하여금 주도권을 지속적으로 견지하고 수량적, 기술적우세를 가진 적을 이리저리 끌고다니면서 타격소멸하는 령활한 작전이였고 조선인민혁명군의 력량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적의 《토벌》공세를 분쇄하고 항일무장투쟁을 끊임없이 확대발전시켜나갈수 있게 한 작전이였다.

1939년 12월의 륙과송전투와 쟈신즈전투, 1940년 2월에 진행된 대마록구전투, 3월에 진행된 홍기하전투는 이 시기의 대표적인 전투들이였다. 홍기하전투는 일제의 악명높은 《정예부대》로 알려졌던 마에다부대를 전멸시킨것으로 유명해진 전투였다.

1930년대 후반기 조선인민혁명군의 군사활동에서 특기해야 할 사건으로 되는것은 사회주의국가인 쏘련에 대한 군사적침공을 획책하는 일본침략군의 배후를 타격한 전투들이였다.

김일성주석께서는 1930년대 중반에 쏘련당국이 재쏘조선족출신자들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킨 사태를 두고 망국민의 설음을 통절히 느끼신바있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1930년대 중엽에 원동에 살던 조선사람들을 중앙아세아지역에 집단적으로 이주시키는 조치가 취해지고있었습니다. 쏘련사람들은 까자흐스딴이나 우즈베끼스딴경내에로의 조선족의 집단적이주가 자위를 위해 불가피하게 취해진 조치라고 설명하였지만 조선사람들은 그것을 좋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나 역시 그 소식을 듣고 망국민의 설음을 뼈에 사무치게 느끼였습니다.》김일성동지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계승본) 7권, 374페지〕

그렇지만 주석께서는 대의를 위해 첫 사회주의국가인 쏘련을 무장으로 옹호하자는 구호를 들고 싸우시였다.

장고봉(하싼호)사건(1938년) 당시에 조선인민혁명군의 림강일대에서의 배후교란작전, 노몽한(할힌골)사건(1939년) 당시의 대사하, 대장강에서의 전투 등은 피로써 쏘련을 돕는 대표적인 싸움들이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쏘련지원작전은 민족혁명과 세계혁명을 빛나게 결합시킨 모범을 다시금 보여준 의의깊은 사변들이였다.

쏘련을 적극적으로 도와준 배후교란작전은 쏘련을 위한 일인 동시에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쏘련사람들이 조선공산주의자들의 국제주의에 대하여 국제주의로 대답하였기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