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김일성주석과 반일민족해방투쟁사』 중에서 

제  3  장

1930년대 반일민족해방투쟁

11. 중일전쟁과 전민항쟁준비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 중일전쟁의 도화선이 된 로구교사건에 대한 충격적인 소식에 접하시게 된것은 추격하여온 적들을 완전히 괴멸시킨 간삼봉전투가 있은 직후인 1937년 7월 중순경이였다.

주석께서는 격변하는 정세를 예리하게 분석하시였으며 거기에 맞게 주동적이며 적극적인 전략전술을 작성하시였다.

중일전쟁은 일제가 화북이나 먹고 물러앉을 국지전이 아니였다. 또 만주사변처럼 몇달동안에 속전속결될 성격의 싸움도 아니였다. 이 전쟁은 그자체가 장기전으로 넘어갈수 있는 불씨를 안고있었으며 지역전쟁 나아가서는 세계적인 대전으로 확대될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있었다.

그리고 일제가 전쟁초기에는 중국의 항전력량에 생긴 공백을 리용하여 일시적우세를 차지할수 있지만 조만간에 무서운 함정에 빠지고 종국적으로는 멸망하게 되리라는것은 명백한것이였다.

여기에서 주석께서 선택하신 전략전술의 기본은 맞받아나가는 공격전술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혁명발전의 여러 단계에서 우리가 주로 맞받아나가는 공격전술을 써온것은 나 개인의 취미나 성격때문이 아니라 복잡하고 시련에 찬 우리 혁명이 제기한 요구였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후 세계를 뒤흔드는 복잡한 정국의 소용돌이속에서 우리가 만일 방어나 후퇴, 우회하는 방법에만 매달렸다면 우리앞에 가로놓였던 난국을 타개할수 없었을것이다.》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 302페지)

주석께서 결심하신 맞받아나가는 전술에서 핵을 이루는것은 중일전쟁에 대처하여 혁명의 주체적력량을 결정적으로 강화하며 적배후에서의 교란작전을 주동적으로 강화하여 일제의 종국적파멸을 예견한 전민항쟁준비를 다그치는것이였다. 그러기 위해 당면해서는 백두산서남부일대와 국내에 더 많은 지하조직을 내오며 조선인민혁명군의 정치공작소조들로 하여금 랑림산맥을 리용하여 근거지를 꾸리는것과 함께 국내도처에 생산유격대와 로동자돌격대를 조직하며 정치공작원들을 국내에 파견하여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을 확대하여야 하였다.

적배후교란작전은 크게 두가지 방향에서 벌리기로 하였다. 하나는 랑림산맥에 의거하여 밀영망을 포치하고 국내도처에 생산유격대와 로동자돌격대를 조직하는 방법으로 전민항쟁의 군사적기반을 마련하며 국내에서 여러가지 형태의 대중투쟁을 통하여 일제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것이였고 다른 하나는 유격전의 방법으로 일본침략군의 중국관내에로의 기동을 장애하고 그들의 작전을 파탄시키는것이였다.

이와 같은 전략전술적방침에 따라 조선인민혁명군부대들의 부분적인 개편과 실정에 맞는 활동지역분담이 진행되였다. 항일유격대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일본군부는 그에 대한 대응책을 세우느라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조직선을 통하여 국공합작을 위한 려산회담에서는 주은래와 장개석사이에 조선반도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의 항일활동을 적극화할데 대한 기대가 표명되였다고 전하여왔다. 한편 공헌영(왕년의 왕덕림부대의 부사령, 당시에는 동북의용군 총사령)의 부하가 남경정부의 밀사로서 쏘련을 경유하여 동북에 들어와 중국관내에서의 투쟁과 동북에서의 투쟁을 하나로 련결시킬 필요를 강조하면서 로농홍군이 국민혁명군의 팔로군으로 개편된 조건에서 동북에서의 항일무장부대들의 활동도 총적인 작전적구성속에 포함되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김일성주석께서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중국관내실정과 동북실정의 구체적차이점과 동북지방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의 상대적독자성을 설명하시면서 대방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시였다. 결국 남경정부밀사는 주석의 견해가 타당하다는것을 인정하면서 자기의 제의를 철회하고 앞으로의 밀접한 련계와 협조에 대한 기대를 표시하였다. 이에 대해 주석께서는 일제의 배후를 철저히 타격할데 대한 조선인민혁명군의 방침을 지켜나가리라는것을 공약하시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중일전쟁 첫 시기부터 국내진공작전의 승리를 공고히 하면서 적배후교란작전을 과감히 전개하였다. 장백현 19도구와 13도구에서의 전투를 시초로 휘남현성전투 등 수많은 배후교란작전이 꼬리를 물었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관내의 민족혁명당의 기관지 《전도》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적배후교란작전을 두고 《이것은 확실히 조중 량국민족의 위대한 련합전선의 제일성》이라고 썼다. 또 미국에서 발행되는 교포신문 《신한민보》 1937년 9월 30일부는 《이제 최근 천진통신을 의거하건대 그 보도가 자못 소상함이 아래와 같으다. 조중의용군중에 가장 용맹스럽게 싸움잘하는 군사는 조선인 김일성장군… 통솔하의 무장부대인데 전혀 조선인으로 편성된 사단이라 한다.

쏘련군사가의 관측은 <만일 일조에 중일량국이 정식 선전하면 일본이 만주 한모퉁이의 의용군을 당해내려도 군사 20만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그 말을 믿을수 있다고 하면 그들의 실력이 몹시 위대한것이 아니냐.》라고 썼다. 이 자료는 김일성주석령솔하의 군사력이 일제의 대병력을 중국관내침략에서 끌어내는 위대한 존재로 되고있음을 단적으로 시사하는것이다.

한편 김일성주석께서는 1937년 9월에 중일전쟁에 대처하여 전체 조국동포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발표하시고 많은 정치공작원들을 국내에 파견하시는 조치를 취하시였다.

9월에 발표하였다고 하여 9월호소문이라고 불리우는 그 호소문에서는 크게 두가지 문제에 의의를 부여하였다.

9월호소문에서 중요하게 제기한 문제의 하나는 중일전쟁과 조선혁명과의 호상관계에 대한 바른 인식을 줌으로써 조선민족이 신심을 잃지 않고 반일투쟁을 강화해나가도록 하는것이였다.

당시 신문이나 보는 사람들중에는 중일전쟁이 진전되고 일본군의 전과가 확대되여가자 독립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비관론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 반영으로서 같은 해 8월초부터 최남선, 윤치호, 최린 등은 내외신문들에 일제와의 타협을 설교하는 글들을 련속 발표하였다. 주석께서도 그 글들에 주목하셨다고 회고록에서 쓰시였다.

최남선은 일본의 존재와 그 발흥은 곧 아시아의 기운이요, 동방의 빛이라고 하면서 동방 제민족은 일본을 맹주로 하여 대동단결해야 한다고 썼다.

3.1독립선언문 기안자의 한사람인 최남선은 일찌기 백두산을 동방만물의 최대의 의지, 동방문화의 최요핵심, 동방의식의 최고연원, 동방대중의 원척이며 그 활동의 주축이라고 하였다. 그러던 사람이 돌변하여 일본의 존재가 아시아의 기운이고 동방의 빛이라고 하니 놀라운 일이였다.

최린은 내선일체로 《국민적적성》을 발휘하여야 한다고 력설하였다. 3.1독립운동발기자이며 33인에 속하는 사람의 발언치고는 너무나도 배신적이고 매국적이였다.

윤치호는 조선민족과 일본민족은 같은 배를 탄 동일운명에 처해있다고 주장하였다. 조선의 근대력사에 밝은 사람들은 구한국시대의 고관이였던 윤치호를 잘 안다. 그는 높은 관직을 가지고있던 사람이였으나 《한일합병》을 견결히 반대하였다. 그래서 감옥밥도 먹어보았다. 7.7사변 당시 그는 칠순을 넘긴 고령이였다. 이런 늙은이가 그 무슨 영달을 바라거나 목숨이 아까와 새삼스레 일제에게 아부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 늙은이는 해방이 되자 얼굴을 들고 하늘을 볼수가 없어 80이 넘은 나이에 자살하였다. 자결로써 자기 치욕을 씻으려고 한것을 보면 그가 량심인이였던것은 틀림없다. 그런 사람이 왜적에게 전향하게 된것은 일본을 과대평가한데다가 정세의 추이를 잘못 판단한탓으로 볼수 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정세의 추이를 근시안적으로 보면 절망할수 있으며 정세추이를 전망적으로 고찰하면 독립전쟁의 절망이 아니라 그 밝은 전망을 내다볼수 있으며 따라서 장차 일제와의 결사전을 벌릴수 있는 거족적인 전민항쟁준비를 다그쳐야 함을 강조하시였다.

9월호소문에서 중요하게 제기된 다른 하나의 문제는 전민항쟁준비의 전략적방도를 밝혀주는것이였다.

호소문은 중일전쟁이 조선민족에게는 하나의 유리한 기회이므로 일단 유사시에 가장 단호하게 행동할 준비를 해야 한다, 후방에서 무장폭동과 파괴공작의 실현을 위한 전위적집행조직으로서 생산유격대와 로동자돌격대를 조직하는것이 특별히 중요하고 긴요하다, 전인민적인 항쟁시기가 도래할 때에는 조선인민혁명군의 군사행동에 합세하여 일본군을 완전히 패배시켜야 한다는것이 강조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9월호소문을 자기자신에 대한 요구로 받아들이시고 전민항쟁준비의 돌파구를 여시기 위하여 호위대원들만을 인솔하시고 직접 국내에로 진출하시기로 하였다. 첫 목적지는 함경남도 신흥지구, 두번째는 풍산지구였다.

국내진출의 첫 목적지로 신흥지구가 선택된것은 바로 이 지구가 함흥, 흥남 등 조선로동계급이 가장 많이 집결되여있는 큰 공업도시를 끼고있었기때문이였다. 부전령산맥 남쪽기슭에 자리잡고있는 신흥지구의 울창한 수림속에는 이미 여러개의 밀영들이 꾸려져 소부대의 활동거점으로 리용되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신흥지구진출은 극도로 침체되였던 조선의 로조, 농조운동을 중일전쟁이 발발한 정황에 맞게 다시 되살리고 로선상 전환을 일으키는데서 하나의 계기로 되였다. 로선상 전환으로 과거 로동운동의 경험중에서 장점은 취하고 약점은 퇴치하는 방법으로 로동운동의 새 항로를 개척하고 쓰라린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을 새 장이 열리게 되였다.

제2목적지인 풍산에 이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 천도교 도정 박인진을 만나시고 조국광복회조직에 망라된 천도교인들을 비롯한 전민족을 전민항쟁준비에 나서도록 인도하시였다.

신흥을 거쳐 풍산에 이르는 길은 지도상의 직선거리로 보아도 8백리가 넘는 로정이였는데 그 험한 길을 헤쳐가신 김일성주석의 현명한 령도로 하여 전민항쟁준비가 본격적으로 벌어지는 력사의 새 장이 시작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조국의 산과 들에 가을빛이 짙어가던 그때 조국광복의 대강을 안고 멀고 험한 길을 소문없이 걸어간 우리의 조국편답은 헛되지 않았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 381페지)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 신흥, 풍산지구를 돌고나신 뒤에 부전, 함흥, 흥남, 원산, 단천, 풍산, 신흥을 비롯한 국내각지에서는 전민항쟁세력이 급속히 장성하게 되였다.

황수원언제공사장에서 로동자돌격대가 무어진데 뒤이어 후치령생산유격대가 조직되였고 여러 공장들에서는 련이어 파업이 일어나고 인부들의 집단탈주사건이 벌어졌다.

함흥-신흥지구의 여러 공장, 탄광들에서도 로동자돌격대가 조직되여 곳곳에서 태업과 오작시공, 폭발사고들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함흥 만세교 란간과 동흥산의 구천각에 9월호소문과 관련한 선전문이 나붙은것도 그무렵이고 《김일성이 함흥거리에 나와 리발을 하고갔다.》, 《김일성이 일본륙군병원에 입원했다.》는 등의 소문이 나돈것도 그때였다.

함흥, 흥남지구 공작원들은 잠복중에 있는 로조관계자들을 100여명이나 찾아내여 그들을 모두 조국광복회에 흡수하였다. 흥남지구로조는 로동자돌격대의 원천지로 되였다.

조선의 산업지대들에는 어디에나 조국광복회의 조직이 뿌리박게 되였고 그 조직들의 영향밑에서 로동계급의 투쟁이 힘차게 벌어졌다. 이것은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조선인민에 대한 폭압과 략탈에 광분하던 일제에 대한 항거의 표시였다.

9월호소문이 발표된 때로부터 5∼6년이 지난 어느날 신문지상에 조선청년학생들에게 학도병진출을 권고하는 조만식의 권고문이 실렸는데 그 글은 세상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조만식까지 전향하면 천하의 민족운동지도자들중 전향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그때 사람들은 그런 의혹을 품게 되였다.

하지만 로동계급은 주석께서 밝히신 전민항쟁준비를 다그쳐나갔다.

전민항쟁준비를 본격적으로 벌리기 위해서는 농민운동을 재조직하는것이 중요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중일전쟁의 개시는 우리에게 전민항쟁준비를 가속화할수 있는 가능성을 주었다. 이 준비작업에서 우리 나라 인구의 80%이상을 차지하고있는 농민대중을 어떻게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는가 하는것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있었다. 로동계급과 함께 국내의 농민대중을 혁명화하는것은 항일혁명수행에서 우리가 선참으로 틀어쥐고나가야 할 중요한 생명선이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 329페지)

국내농민운동에 대한 조선인민혁명군의 지도는 여러 갈래의 선을 통하여 실현되였지만 여기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것은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에서 선발된 정치공작원들과 서간도지방의 조국광복회조직들에서 육성된 지하조직원들이였다.

조선인민혁명군 정치공작원들과 견실한 농조지도자들의 공동의 노력에 의하여 농민운동에서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국내농조조직들의 동향에서 주목할만 한것은 길주농조의 신문 《붉은 추모》가 한 특집기사에서 《김일성부대를 적극 지원하자!》는 구호를 실은데서 표현된것처럼 항일유격대에 대한 열렬한 동경이 보편화된것이였다.

농민운동에 대한 조선인민혁명군의 지도가 미치기 시작한 때로부터 국내의 농민운동에서는 획기적인 로선상 변화가 일어나게 되였는데 계급투쟁일면에 치우치던 종래의 방식에서 벗어나 주되는 공격의 화살을 일본제국주의에 돌리게 된 변화, 농조조직건설에서 관문주의가 극복되고 농조조직에 결속시키는 대상의 폭이 전례없이 넓어진 변화, 농조조직들의 활동에서 독자성을 보장하면서도 지방호상간에 일정한 련계를 가지고 실정의 통보로부터 시작하여 투쟁방법의 선택과 투쟁목표의 설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공동보조를 취하게 된 변화 등은 가장 중요한 변화들이였다.

농조의 혁명적개편과 농조운동의 새로운 활성화로 함경북도와 함경남도의 많은 지역들에 어제날의 농조조직들을 바탕으로 하는 조국광복회조직들이 수많이 생겨났으며 신의주지회를 비롯하여 많은 조국광복회 하부조직들이 압록강중류지대의 농민들속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해갔다.

뿐만아니라 평양, 남포, 철원, 서울, 인천, 대구, 부산, 전주, 광주에 있는 조국광복회조직을 거점으로 조선반도 중부와 남부의 농민들속에서도 각이한 명칭을 가진 혁명조직이 나오게 되였다.

조직건설사업과 함께 의식화사업이 활발히 벌어져 조국광복회10대강령의 취지가 농민대중속에 깊이 침투하게 되였다. 백두산의 무장투쟁에 호응하여 전민항쟁에 궐기할것을 호소하는 선전활동 역시 널리 진행되였다.

조선에서의 농민운동은 항일무장투쟁과 밀착한 새로운 발전단계에 들어서게 되였다. 전국도처에서 조국광복회산하에 수십수백만의 농민대중이 결속되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