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김일성주석과 반일민족해방투쟁사』 중에서 

제  3  장

1930년대 반일민족해방투쟁

10. 보천보전투

보천보전투는 민족사에 특기할만 한 력사적사변으로서 당시부터 널리 알려진 사건이였다.

그러므로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보천보부분을 다루시면서 보천보전투의 력사적측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연구하고 이야기하였지만 이 전투를 직접 조직하고 지휘한 자신에게는 정신적체험이나 추억거리들이 적지 않다고 전제하시고 정신적체험이나 추억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문제에 한정하여서만 회고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우선 보천보전투의 동기에 대하여 중요하게 서술하시였다.

이에 대하여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보천보전투에 대하여서는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고 대하였다. 적측의 손실이라든가 피해정도 같은것은 이미 전투직후에 지상을 통해 소개되였으니 새삼스럽게 확인할것도 없었지만 그 작전의 동기에 대해서만은 누구나 호기심을 가지고있었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 149∼150페지)

작전의 동기는 민족사적, 항일무장투쟁사적견지에서 작전의 목적에서부터 분석되여야 한다.

이에 대하여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가 보천보전투를 조직한 목적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 민족재생의 전기를 마련하려는데 있었고 좁은 의미에서 보면   항일혁명투쟁에서의 결정적인 단계, 질적비약을 이룩하자는데  있었다고 말할수 있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 150페지)

보천보전투의 목적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 민족사의 전기를 마련하자는데 있었다. 조선에서 현대의 민족사는 일제가 강요한 피눈물로 얼룩진 력사인 동시에 그에 대한 민족의 항전의 력사였다. 항일무장투쟁은 피눈물의 력사에 종지부를 찍고 항일의지를 관철하기 위한 선택이였다. 무장으로 민족재생의 서광을 비쳐 조국해방을 향한 민족사의 전기를 마련하자는것이 보천보작전의 대의였다. 좁은 의미에서 본 보천보전투의 목적은 항일무장투쟁에서 새로운 질적단계를 열자는데 있었다. 1930년대 전반기까지의 유격대의 주되는 활동판도는 만주지방이였다. 반일인민유격대창건을 전후하여 국내에로 여러번 진출한바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한된 활동이였다.

또한 1930년대 전반기의 활동은 주로 힘을 축적하는 단계였다. 그러던것이 무장대오는 여러개의 사단을 이룰만큼 성장하였다. 따라서 무장투쟁을 국내깊이에로 확대하여 총소리를 내여 전반적항일혁명을 앙양시키는것은 합법칙적요구로 나서게 되였다. 보천보전투는 이 합법칙적요구의 구현이였다. 남호두회의에서 천명된 로선의 구현과정이였다.

크게 성장한 무장대오를 가지고 국내에로 나간다는것은 대단한 의의를 가지는것이였다. 백두산에 틀고앉아서 랑림산에도 1개 사단, 관모봉에도 1개 사단, 태백산에도 1개 사단, 지리산에도 1개 사단 하는 식으로 사방에다 무장부대를 파견해서 근거지를 건설하고 적들을 연거퍼 답새기면 조선반도를 죽가마처럼 끓게 할수 있었으며 2천 300만 조선민족을 전민항쟁의 마당으로 모조리 불러낼수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민족자체의 힘으로 조국해방의 숙원을 성취할수 있는 대통로를 열어놓을수 있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이러한 목적을 가진 국내진공작전의 절박성을 절감하시게 되였다. 그것은 국내에서의 조선말과 글의 말살정책이 위험계선을 넘어서고있다는 정보가 백두산에까지 들어오고있었던 사정과 크게 련관되여있었다.

민족어는 민족의 정신이 구현되여있는것이였고 민족어가 말살당한다는것은 민족의 정신적존재가 말살된다는것을 의미하였다. 사태는 수수방관할수 없는것이였다.

일제의 민족어말살정책이 감행되는데다가 일제는 조선의 공산주의운동마저 끝장났다는 외곡된 정보를 파급시키는데 광분하였다. 주석께서는 이것을 리재유체포사건의 소식에 접하시면서 직감하시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1937년 5월초에 조선공산주의운동의 거물 리재유가 체포되였다는 《매일신보》특간호의 상보를 접하시게 되였다. 그것은 옹근 4면짜리의 대대적인 특집이였다. 거기에는 경찰에 여섯번이나 체포되였다가 여섯번 다 탈출한바있는 리재유가 일곱번째로 체포된데 대한 경위와 그에 대한 소개가 지나치다고 할만치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신문은 리재유를 《조선공산주의운동괴멸의 최후진》이니, 공산주의운동 《20년력사 최후거물》이니 하면서 그의 체포로써 조선공산주의운동이 영영 끝나게 되였다고 요란하게 떠들고있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리재유가 조선공산주의운동에서 이름난 투사였다는것을 평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그는 삼수사람이였다. 일본에 건너가서 고학을 하다가 로동운동에 참가하였으며 귀국후에는 서울을 활동무대로 하여 공산주의운동을 하였는데 주로 태평양로조조직들을 맡아가지고 함흥일대에까지 드나들면서 각 지방의 로조, 농조운동을 지도하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 156∼157페지)

그러나 주석께서는 리재유의 체포를 가지고 조선공산주의운동이 최종적으로 막을 내린것처럼 과장하여 선전하는것은 공산주의운동도 혁명도 이제는 절망적인것으로 되였다는 거짓을 믿게 하기 위한 일제당국의 지능적인 속임수라는것을 대번에 간파하시였으며 혁명운동을 구원하기 위해서도 국내진공을 더는 미룰수 없는것이라고 판단하시였다.

1937년 봄에 진행된 서강회의에서는 국내진공작전에 대한 방침이 결정되였다. 혜산을 공격하기 위하여 5월 중순경 장백현 19도구 지양개등판에 당도한 위대한 수령님의 친솔부대는 두만강연안의 북부국경일대에로 진출하게 되여있는 최현의 4사부대가 적의 완전포위에 들었다는 놀라운 소식에 접하게 되였다. 수령님께서는 포위환속에 든 아군도 구원하고 국내진공의 목적도 다같이 성취하기 위하여 적의 력량을 끌어내기 위해 공격목표를 혜산으로부터 보천보로 옮기는 신속기발한 대응책을 세우시게 되였다.

1937년 6월 3일 밤 친솔부대는 구시물동에서 압록강을 건너 곤장덕에 올랐다. 구시물동을 건늘 때 물동의 소연한 물소리가 부대의 도하를 감싸주었다.

이때를 회고하시면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근대조선의 소란스러운 민족사가 그 물소리속에 응축되여 만단사연을 속삭여주는듯 하였다.》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 171페지)

6월 4일 날이 어두워지자 부대는 곤장덕을 내려 보천보시가로 접근하였다. 거리에 들어서자 대오는 여러 단위로 분산되여 소정된 위치를 차지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거리초입에 있는 황철나무아래에 지휘처를 정하시였다. 거기에서 중요공격목표인 경찰관주재소까지의 거리는 불과 100m안팎이였다. 시가전을 하는 경우 지휘처와 시가와의 거리가 이처럼 가까운 실례는 거의 없었다. 이것이 보천보전투가 가지고있는 중요한 특징이였다.

정각 10시,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권총을 높이 쳐드시고 방아쇠를 당기시였다. 10여년세월 조국의 동포에게 말하고싶었던 모든 사연들이 그 한방의 총성에 담겨 밤거리에 울려퍼졌다. 그 총소리는 시인들이 노래하듯이 어머니조국앞에 드리는 상봉의 인사였고 강도 일제를 징벌의 마당으로 불러내는 호출신호였다.

그 총성을 신호로 하여 사방에서 경찰관주재소며 산림보호구를 비롯한 적기관들을 들부시는 사격소리가 자지러지게 울리였다. 순식간에 온 거리가 발칵 뒤집히였다. 얼마후에는 여기저기서 불길이 타래쳐오르기 시작했고 적통치기관들이 일시에 화염에 휩싸여 온 거리가 환하게 밝아졌다.

주석께서는 삽시에 모여든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필승의 사상으로 일관된 반일연설을 하시였다. 연설을 마친 다음 주석께서는 화광이 충천하는 거리를 떠나시였다. 가는 심장과 남는 심장이 리별앞에서 소리없이 흐느끼였다.

보천보전투는 대포도 비행기도 땅크도 없이 진행한 자그마한 싸움이였다. 보총과 기관총에 선동연설이 배합된 평범한 습격전투였다. 사상자도 많지 않았다. 유격대측으로 볼 때에 전사자는 없었다. 너무나도 일방적으로 진행된 기습전이였다.

그러나 이 전투는 유격전의 요구를 최상의 수준에서 구현한 전투였다. 전투목표의 설정과 시간의 선택, 불의의 공격, 방화를 통한 충격적인 선동, 활발한 선전활동의 배합 등 모든 과정이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립체적으로 맞물린 빈틈없는 작전이였다.

이것은 군사적면에서 본 작전에 대한 평가이다. 그러나 전투나 전쟁의 가치는 군사적의의에 의해서만 규정지어지는것이 아니라 그 정치적의의에 있어서도 규정된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보천보전투는 헤아릴수없이 큰 작전이였다고 말할수 있다.

보천보전투는 민족사적의의를 가지는 파문을 일으켰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해와 달도 빛을 잃어가던 조국땅에 있어서 보천보 밤하늘에 타오른 불길은 민족의 재생을 예고하는 서광이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 176페지)

민족재생의 서광이 비쳤으니 민족의 감격과 흥분은 온 강산을 진감시키였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성일보》를 비롯한 국내의 주요신문들은 일제히 인상적인 표제를 달고 보천보전투소식을 전하였다.

《도메이》통신, 《도꾜니찌니찌신붕》, 《오사까아사히신붕》 등 일본의 출판보도물들과 《만주일일신문》, 《만주보》, 《대만일일신보》를 비롯한 중국의 신문들도 이 전투를 광범히 취급하였다. 쏘련의 따스통신은 물론 《쁘라우다》와 《크라스노예 즈나먀》도 이 전투를 위해 지면을 아끼지 않았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보천보전투가 가지는 가장 주요한 의의는 조선이 다 죽었다고 생각하던 우리 인민들에게 조선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것을 보여주었을뿐아니라 싸우면 반드시 민족적독립과 해방을 이룩할수 있다는 신심을 안겨준데 있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 177페지)

보천보전투는 일본제국주의식민지통치를 끝장내고 민족적독립과 자주권을 되찾으려는 조선민족의 억센 의지와 불굴의 정신을 내외에 널리 보여주었다. 이 전투를 통하여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자기 활동의 전 로정에서 시종일관 고수해온 투철한 반제적립장과 자주적립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으며 철저한 실행력과 위력한 전투력을 시위하였다.

또한 이 전투를 통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하고있는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조국과 민족을 가장 열렬히 사랑하는 진실하고 참된 애국자들이며 민족해방위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해나갈수 있는 가장 헌신적이고 책임적인 투사들이라는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국내인민들로 하여금 무장투쟁을 주축으로 하는 항일혁명의 광장에 거족적으로 달려나올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이 전투가 국내인민들과 각계 인사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는것은 몽양 려운형이 보천보를 들이쳤다는 소식을 듣고 흥분한 나머지 그달음으로 전투현장으로 달려가 본데서도 잘 알수 있다. 해방후 그가 공화국북반부에 왔을 때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뵈온 자리에서 《유격대가 보천보를 쳤다는 소식을 듣고보니 20여년세월 왜놈들치하에서 수모를 당해온 망국민의 설음이 순간에 다 녹아버리는것 같았습니다. 내 그때 보천보에 가보고 무릎을 쳤지요. 이제는 됐구나, 단군조선이 살아있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절로 나지 않겠습니까.》라고 한바있다.

백범 김구의 서기(림시정부시기)로 있었던 안우생의 증언에 따르면 김구도 보천보전투에서 이만저만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날 김구는 신문을 뒤적이다가 보천보전투소식을 읽게 되였는데 어찌나 흥분했던지 창문을 열어제끼고 배달민족은 살아있다고 몇번이나 고함을 질렀다는것이다.

김구는 그때 안우생에게 지금은 시국이 험한 때이다, 중일전쟁이 림박하니 운동을 한다던 사람들은 뒤골목으로 다 자취를 감추었다, 이런 판국에 김일성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에까지 쳐들어가서 왜놈들을 정면으로 후려친것은 얼마나 장쾌한 일인가, 이제는 우리 림시정부가 김일성장군을 후원해야겠다, 수일내에 백두산쪽으로 사람을 보내자고 하였다.

이 일화는 김구를 비롯한 해내외의 명망높은 인사들이 보천보전투를 계기로 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하는 공산주의자들을 얼마나 신뢰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실례로 된다. 이런 풍조는 반일민족통일전선에 각계각층의 애국적인 인사들을 결속시킬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지어주었다. 보천보의 밤하늘에 타오른 홰불은 조선의 모든 애국적인사들에게 참된 인생의 좌표를 밝혀주는 등불로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