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김일성주석과 반일민족해방투쟁사』 중에서 

제  2  장

1920년대 반일민족해방투쟁사 평가

5.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무산혁명운동에로의
  방향전환의 흐름-조선국민회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민족주의운동의 제한성이 드러나고 민족해방운동의 새 사조로서 공산주의사상이 확산되자 민족주의자들속에서는 사상적와해과정이 촉진되였다고 지적하시면서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민족주의자들중에서 보수적인 인물들은 여전히 고루한 틀에 얽매여 새것과 담을 쌓고있었지만 적지 않은 선진층 인물들은 새 길을 선택했으며 후날 우리와 손을 잡고 공산주의혁명을 하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50페지)

민족주의자들중에서 적지 않은 선진적인 인물들이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무산혁명운동에로 방향전환을 하게 된것은 1920년대이후의 민족운동에서 특기할 력사적사변이였다.

3.1운동이후 민족주의운동은 그 총체적인 제한성으로 하여 민족해방운동의 장래를 기약할수 없는 시대에 뒤떨어진 운동사조임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민족주의운동의 이러한 제한성으로 하여 사회주의운동, 공산주의운동이 새로운 시대적운동력량으로 등장하게 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운동내에서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운동에로의 방향전환을 시도하려는 새로운 흐름이 등장하게 되였다.

이러한 흐름은 민족해방운동발전에서 중대한 력사적의미를 갖는 새 사조임에도 불구하고 남조선에서는 민족해방운동연구에서 이 문제를 옳바로 인식할수 없게 하는 장애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국내운동, 만주운동, 중국관내운동을 지역적으로 분리해서 정리하는 틀이 형성되고있는것과 관련된다.

지역적운동으로 분리해서 독자적인 연구정리대상으로 분류하여 다루는 이 틀은 민족주의운동, 나아가서는 민족해방운동을 통일적으로, 전체적으로 인식할수 없게 만든다. 식민지시기 민족해방운동에서 지리적경계는 조건상의 차이로서만 의미를 지니는것이며 따라서 지역별운동사를 분리해서 리해할것이 아니라 전체 민족해방운동의 발전과정과의 련관속에서 리해해야 하는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조선에서는 이 분야에 대한 연구에서 지역적으로 분리하는것을 당연스러운것으로 받아들이게 한 틀이 형성됨으로써 큰 후유증을 남기게 되였다.

다시말하여 국내와 국외라는것은 단지 조건상의 차이일뿐이고 운동주체에서나 그 리념의 면에서는 차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의 연구의 거의가 국내와 국외의 운동을 별도로 다룸으로써 국내외의 민족주의세력을 단일시야에서 포착하지 못하고 국내운동과 국외운동을 단절시켜 고찰하여 운동전체를 통일적시야에서 다루지 못하고 민족해방운동의 변화과정을 정확히 파악할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한 후유증의 대표적례가 되는것이 국내와 만주일대에서 포괄적인 활동을 진행하였고 중국관내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친 조선국민회의 활동과 조선국민회에 의해서 지도된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무산혁명운동에로의 방향전환을 위한 중대한 력사적사조를 바로 포착하고 그 의미를 인식평가하는 연구를 진행하지 못한것이라고 할수 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조선국민회에 대해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조선국민회는 <한일합병>후 여러해동안 국내와 해외에서 아버지가 벌려온 정열적인 조직선전활동의 총화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28페지)

《조선국민회는 전체 조선민족이 일치단결하여 조선사람자체의 힘으로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며 참다운 문명국가를 세울것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로서 3.1인민봉기를 전후한 시기 조선의 애국자들이 무은 국내외의 조직들가운데서도 가장 규모가 큰 반일지하혁명조직의 하나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26페지)

1917년 3월 23일 평양의 학당골에서 고고지성을 울린 조선국민회는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이시며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무산혁명운동에로의 방향전환의 선구자이신 김형직선생님에 의해 결성되였다.

1917년이라면 국내에 비밀결사가 별로 없을 때였다. 《합병》후 조직된 독립의군부나 대한광복단, 조선국권회복단과 같은 단체들은 일제의 탄압에 의해 이무렵에 와서는 모조리 해산되였던 때에 조선국민회가 태여났던것이다.

조선국민회는 반제자주적인 립장이 투철한 혁명조직이였다. 단체의 취지서에는 장차 유미세력이 부식되고 일본이 그들과 패권을 다투게 된 시기가 닥쳐올것은 명백하므로 그 기회에 조선사람자체의 힘으로 독립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동지들의 결속을 도모하며 그 준비를 진행해야 한다고 밝히였다. 취지서가 말해주는바와 같이 조선국민회는 외부세력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과는 달리 조선독립은 조선사람 자체의 힘으로 이룩해야 한다는 자주적인 립장을 취하였다.

조선국민회는 조선에서 맑스-레닌주의가 보급되기 이전시기에 벌써 반일민족해방의 과업을 정확히 제시한 비밀정치조직이였으며 조선의 독립을 외세에 의존해서가 아니라 조선민족의 자주적힘에 의거하여 청원이나 개량의 방법으로가 아니라 정치적인 활동과 군사적인 활동을 적절히 배합한 적극적인 투쟁에 의하여 달성할것을 내세운 처음으로 되는 조직이였다.

조선국민회는 또한 튼튼한 대중적기반우에 선 조직이였다. 조선국민회에는 로동자, 농민, 교원, 학생, 군인(독립군), 상인, 종교인, 수공업자들을 비롯한 각계각층이 다 망라되였다. 그리고 조선국민회에는 평양과 강동, 성천, 순천, 대동군을 비롯한 평안도일대와 황해도, 경기도, 전라도, 경상도 등 전국각지의 독립운동자들과 애국적인민들이 망라되였으며 중국의 베이징, 상해, 단동 등 국외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자들과 애국인사들이 수많이 망라되였다.

김형직선생님의 탁월한 령도밑에 조선국민회는 3.1운동을 불러오는 전환적국면을 여는데서도 거대한 역할을 하였지만 그후에도 우리 나라 민족해방운동을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방향전환을 이룩하려는 새 사조를 이끄는데서 중대한 역할을 하게 되였다.

김형직선생님은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무산혁명운동에로의 방향전환의 선구자였으며 그 방향전환의 력사적필연성과 실천적방략을 정립하신 정치활동가이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로씨야에서 사회주의10월혁명이 승리한 다음부터 아버지는 공산주의사상에 공감하기 시작하였으며 그후 3.1운동을 계기로 하여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고 우리 나라 민족해방운동을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운동에로 방향전환시켜야 하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가지게 되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48페지)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오직 무산혁명, 민중혁명에 의해서만 민족의 해방을 이룩할수 있다는 사상을 밝히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3.1운동의 교훈이 보여주는것처럼 시위나 하고 만세나 불러서는 침략자들이 물러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독립군의 싸움만으로 나라를 찾을수도 없다. 온 강산이 왜놈의 감옥으로 되고  총칼의 숲으로 덮이였으니 전국 방방곡곡에서 거족적인 힘으로 침략자들과 싸워야 한다. 그러자면 우리도 로씨야처럼 민중혁명을 해야 한다. 민중이 총칼을 들고 일어나 원쑤와 싸워 나라도 찾고 착취와 압박이 없는 새세상도 세워야 한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47∼48페지)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이 무산혁명방침을 1919년 7월에 진행된 조선국민회 평안북도 조직대표들과 각 지역의 련락원들이 참가한 청수동회의에서 밝히시였다. 뒤이어 그해 8월 남만(서간도) 관전현 홍령구에서 진행된 조선국민회의 각 구역장들과 련락원들, 독립운동단체들의 책임자들이 참가한 관전회의에서 반일민족해방운동을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무산혁명운동에로 방향전환할데 대한 방침을 정식으로 선포하시였으며 시대의 변화에 보조를 맞추어 민족자력으로 일본제국주의를 타승하고 무산민중의 리익을 보장하는 새 사회를 건설할데 대한 과제를 제시하시였다.

이 방침은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력사에서 획기적이며 전환적인 의미를 지니는것이였다. 왜냐하면 그것이 부르죠아민족운동, 민족주의운동의 제한성을 똑똑히 인식하고 민족해방의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등장한 로동자, 농민의 대중운동으로 민족해방운동전반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전환적국면을 열려는 운동이였기때문이다.

무산혁명로선과 방향전환로선의 출발점으로 되는것은 민족자주적립장에서 민족해방운동을 추진시키려는 자주리념이였다. 1920년대 민족해방운동을 총괄해보면 외세의존적이며 사대적인 리념과 로선에 의해 운동이 지배되고있는것이 민족주의운동에서 나타나는 제한성의 궁극적원천으로 되고있었다.

국내민족주의운동에서는 총독부와 타협하면서 합법적테두리안에 운동을 국한시키려는 타협적이며 투항적인 민족개량주의사조가 확산되고있었으며 상해림시정부에서는 서방렬강정부들과의 외교적교섭을 통해 독립을 이룩해보려는 외세의존로선을 자기 활동의 기본으로 삼고있었으며 국내공산주의운동에서도 코민테른과 쏘련에 대한 의존사상, 사대사상이 운동의 발전을 제약하고있었다. 그러한 사정은 독립군운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독립군전략의 배경에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두가지 의도가 있었다. 하나는 독립군운동은 승산이 있건 없건간에 《원칙》과 《사명》에 따라 그 무엇도 서슴지 않고 해야 한다는 인식이였고 다른 하나는 독립군을 무어 무장활동을 벌림으로써 독립군을 국제적으로 하나의 대일교전단체로 인정받기 위한 수단으로 리용해야 한다는것이였다. 첫번째 의도는 자기 힘에 대한 불신에서 생긴것이였고 두번째의것, 즉 국제적인정을 목표로 삼는다는 의도는 결국 외세의존으로 운동을 귀결시키려는것이였다.

외세의존적인 견해와 로선이 모든 운동에 파고들고있는 상태에서 민족해방운동의 전환적앙양이란 기대하기 어려운것이였다. 외세의존적립장이냐, 민족자주적립장이냐 하는것은 민족해방운동전반의 성패를 결정하게 되는 운명적문제가 아닐수 없었다.

그러나 민족자주적립장에서 출발해야 한다는것은 필연적이고 응당한 문제이지만 민족해방운동을 자체로 강화할수 있는 힘의 원천이 없다면 탁상공론으로 이어질수밖에 없는것이다. 민족자주적립장에서 출발한 방향전환로선은 민족해방투쟁을 지속적으로 앙양시켜나가기 위해서는 외세의 힘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 특히는 인민의 힘에 의거해야 하며 새로운 사회운동세력, 민족해방운동세력으로 등장한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대중력량에 의거하여 민족해방운동을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그러자면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무산혁명운동에로의 방향전환을 실현하는것이 력사적요구로 나서는것이다.

방향전환로선은 또한 민족자주립장의 민족해방운동은 인민에게 의거하는 반일무장항전에 의해서만 성취될수 있다는 전망을 밝히고 무장대오의 조직, 무장대오의 대중속으로의 침투, 분산된 독립군단체들의 통합과 나아가서는 광범한 반일력량의 통일전선 등을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제시되였다.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무산혁명운동에로의 방향전환을 실현함에 있어서 조선국민회의 지도자 김형직선생님은 선도적, 선구자적인 역할을 수행하시였다.

《광복군 총영》(1920)을 비롯하여 무산혁명운동에로의 방향전환을 지향하는 무장대들을 창설, 지도하시였으며 여러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하기 위한 사업을 본격화하시였다.

《흥업단》, 《광복단》, 《태극단》, 《대진단》 등을 《광정단》으로의 통합(1922), 《광복군 총영》, 《한족회》 등 남만의 8단9회가 통합된 《통의부》의 창설(1923), 《통의부》를 모체로 《광정단》 등 여러 단체들을 통합한 《정의부》의 발족(1925), 《통의부》말기, 《정의부》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고려혁명당》의 결성(1926),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 3부통합움직임과 나아가서 전 동북지역에서 민족단일당을 이루려는 지향성이 강화되였다.

이러한 과정은 중국관내에 있는 민족주의세력들의 통합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였다. 1921년 7월에 진행된 상해에서의 김형직선생님과 려운형선생의 회합, 김형직선생님과 김규식선생의 회합이 있은 후 중국관내 독립운동내의 진보세력에 의한 민족력량단합기운이 고조되여 1920년대 중반이후 1930년대에 이르러 단합과 통일을 위한 움직임이 매우 활발해지게 되였다. 또한 1923년에 열린 국민대표자회의에서 《정의부》파견대표로 하여금 림시정부를 배격하고 새로운 또 하나의 《정부》를 조작하려는 기도를 반대하고 민족력량의 분렬을 막도록 하는 립장을 취하게 한것은 림시정부를 고수하려는 독립운동의 우익계인사들까지도 김형직선생님의 민족단합로선에 대한 커다란 공감을 자아내게 하였다.

여러 독립단체들이 밑으로부터 통합되여간 과정은 단순한 조직의 확대과정이 아니라 민족개량주의를 배격하고 무장투쟁을 지향하는 반일력량이 강화되고 무산혁명운동에로의 방향전환이 확실하게 되여나간 과정이였다.

1923년 가을 압록강연안일대에서 활동하는 조선국민회 조직책임자들과 여러 무장대표들이 참가한 포평회의에서 《민족개량주의와의 투쟁을 강화할데 대한 요령》이 발표된것은 당시 국내에서 연정회결성을 통하여 자치운동을 본격화하려던 민족개량주의자들의 움직임을 분쇄하고 민족운동에서 혁명적원칙을 고수하는데서 중요한 계기가 되였다.

또한 《고려혁명당》의 활동은 종래의 민족주의결사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던 진일보한 실태를 보여주게 되였다. 즉 이 조직에서는 무산혁명운동에로 방향전환을 한 세력이 크게 자리잡고있어 외부에서는 공산당과 같이 보는 사람이 많았다.

그후 3부통합으로 조직된 《국민부》(《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을 산하에 조직)에도 공산주의에로 방향전환을 한 세력이 매우 커서 이들은 《국민부》내에서 반《국민부》세력을 형성하고있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반《국민부》세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시였다.

《반국민부파인물들은 공산주의에 공감하면서 그와의 제휴를 기도하기도 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그들을 <제3세력>이라고 규정하였다. 민족주의자도 아니고 공산주의자도 아닌 새로운 중도세력이라는 뜻이다. 민족운동내부에서 반국민부파와 같은 <제3세력>이 대두하였다는것은 이 운동의 방향을 공산주의운동에로 전환시키기 위한 지향이 실천단계에 들어섰다는것을 실증해주었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42페지)

반《국민부》세력이 로농혁명강령까지 채택하게 되는것은 방향전환과정이 크게 성장하고 실천되고있는 산 증거였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방향전환을  발기하고  지도하신것은 조선민족해방운동사에 남기신 김형직선생님의 커다란  공적으로 된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운동에로 방향을 전환할데 대한 방침을 제시한것은 반일민족해방운동선상에서 아버지가 이룩한 또 하나의 업적이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48페지)

방향전환에 관한 방침이 반일민족해방운동에 남긴 력사적업적으로 되는 리유를 다음의 세가지 점으로 요약하여 말할수 있다.

첫째, 국내운동, 만주운동, 중국관내운동이라는 지역적페쇄성과 분리성을 극복하고 국내외의 전체 민족운동에서의 민족적단합을 촉진시키는 시초를 열어놓았다는데 있다. 그리하여 1920년대에 국내외에서 민족주의운동과 공산주의운동간의 장벽을 허물고 하나의 반일력량으로서 통일전선을 실현하려는 운동을 전반적으로 불러일으키는데서 력사적기여를 하게 되였다.

둘째, 민족주의운동의 제한성을 극복하기 위한 근본적인 대안은 민족주의운동의 방향을 무산혁명운동에로 전환시키는데서 마련될수 있다는것을 실천적경험으로 보여준데 있다.

셋째, 무장항전을 진행하는 민족주의운동세력안에 사회주의사상을 적극 류포시켜 장차 항일무장투쟁이라는 보다 높은 단계의 무장투쟁단계에서 민족주의적독립군대오가 공산주의자들과 협력의 길에 나설수 있는 전제를 마련하고 토대를 닦아놓은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