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김일성주석과 반일민족해방투쟁사』 중에서 

제  2  장

1920년대 반일민족해방투쟁사 평가

4. 《신간회》의 경험

민족의 대단결은 민족해방운동에서 승리하기 위한 기본담보로 된다. 민족의 대단결이 그처럼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지상의 과제로 나서기때문에 《신간회》의 경험을 바로 인식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1920년대에 있어서 민족주의운동과 공산주의운동의 호상관계에 대하여서도 분석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공산주의운동내부에서는 민족주의가 금물이였고 민족주의운동내부에서는 공산주의가 금물이였다. 이런 경향은 민족력량을 공산주의와 민족주의의 두개 진영으로 분렬시키는 결과를 빚어냈다.

리성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다 그것을 가슴아프게 생각하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45페지)

민족운동에서 민족력량이 공산주의운동과 민족주의운동으로 갈라지게 된것은 서로가 서로를 랭대하고 적대시하는것으로 표면화되고있었지만 그것은 보다 깊이있게 분석해볼 때 민족의 해방, 민족의 리익에 사상과 주의주장을 앞세운 론리적귀결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한 결과가 제국주의지배자에게만 어부지리를 주고 민족에게는 백해무익할뿐아니라 운동의 좌절만을 가져다주는것이였으니 그것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였다.

그것이 민족해방운동의 갈등구조로 되기 시작하자 민족단합의 기운이 고조되고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두 진영에서부터 통합의 실현을 위한 움직임이 나타난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신간회》가 나오게 된 정세와 동기에 대해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조선의 근대력사에서 주의와 주장을 초월하는 민족의 대동단결문제가 처음으로 론의되기 시작한것은 1920년대 중기이후부터였다. 그 당시 우리 나라 민족해방투쟁무대에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로 대표되는 두개의 세력이 존재하고있었다. 일제의 폭정과 수탈이 강화될수록 민족해방운동을 지도하던 선각자들은 애국력량의 단합과 민족대단결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런 필요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초기공산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들과의 련합을 모색하였고 민족주의자들은 공산주의진영과의 제휴를 시도하였다.

민족해방과 민족자주권의 부활에 동일한 리해관계를 가지고있는 두 진영 지도자들의 공동의 노력에 의하여 1927년 2월에 서울에서는 우리 나라 력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통일전선조직으로 신간회가 창립되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4권, 442페지)

《신간회》는 주의와 주장을 초월하는 민족의 대단결문제가 조선근대사상에서 처음으로 해결되여 결성된 통일전선조직이였다. 당대의 애국인사들과 사가들이 《신간회》를 가리켜 민족단일당이라고도 부를만큼 이 단체에 대한 인민들의 기대와 신뢰는 컸다. 《신간회》가 창립되자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두 세력의 갈등에 불만을 느끼고있던 인민대중은 환호를 올렸다.

주의주장의 차이로 하여 서로 사이가 버그러졌던 공산주의운동자들과 민족주의운동자들이 때늦게나마 통일단합의 필요를 인식하고 단일민족협동전선을 내온것은 인민들의 념원과 시대적요구에 부합되는 하나의 큰 경사였다고 말할수 있다.

조선에서 민족협동전선의 최초의 산아라고 할수 있는 《신간회》는 그 취지와 목적이 애국적이고 반일적이였다.

민족을 대표한다고 말할수 있는 량대세력의 공동전선이 실현됨으로써 《신간회》는 창립초기부터 전민족을 대표하는 거족적인 유일조직으로 되였다. 이 단체의 창립취지는 그 발기인들이 《고목신간》이라는 뜻에서 《신간회》라고 한 명칭자체에 잘 반영되여있다. 명칭이 말해주는바와 같이 《신간회》는 새로운 기초우에서의 민족력량의 총결집을 지향했었다.

리상재, 홍명희, 허헌과 같이 대중의 신망이 높은 진보적애국지사들에 의해 조직되고 추진되고 운영된 《신간회》운동은 민족의 정치경제적각성을 촉진하고 민족적단결을 공고히 하며 일체 기회주의를 반대한 강령의 내용도 혁신적이고 혁명적이였으며 회원들의 직업별구성도 다양하였다. 《신간회》에는 로동자, 농민, 려관업자, 사진업자, 기자, 상업가, 의사, 회사원, 교사, 대서업자, 목축업자, 인쇄업자, 어업자, 운수업자, 직공, 재봉공, 학생, 변호사, 저술가, 은행원, 교역자 등 각양각색의 직업을 가진 3만 7천여명이 망라되였다.

이러한 합작으로 민족의 총력을 하나로 묶어세우려고 한 그 훌륭한 취지와 목적에도 불구하고 《신간회》는 1931년 5월에 자기의 존재를 끝마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신간회》의 해산원인이 력사적으로 론의되여온 제반 문제들에 주의를 돌리시면서 《신간회》의 력사적경험을 통하여 무엇을 기본적인 교훈으로 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명확히 밝혀주시였다.

김일성주석께서는 무엇보다도 《신간회》의 해산원인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두 세력이 각각 자기 책임을 부인하고 상대측에만 그 책임이 있는듯이 보는 잘못된 립장에 대하여 지적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해산원인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교훈을 찾는것은 좋은 일이지만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놀음을 하는것은 아름답지 못한 일이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4권, 444페지)

《신간회》해산문제를 놓고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개량주의자들이 끼여들어 《신간회》사업을 방해한것이 해산의 기본원인이며 따라서 《신간회》해산은 민족주의와의 통일전선이란 불가능한 일이며 《신간회》운동은 그 불가능성을 실증한 점에 의의가 있었다고 하였다. 이에 맞서 개량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이 민족해방보다도 계급투쟁의 관점에 서있기때문에 그들과의 통일전선은 불가능하며 《신간회》운동은 그 불가능성을 실증한 점에 의의가 있었다고 고집하였다. 문제를 객관적으로 분석한다는 사람들까지도 그 해산원인은 첫째로, 상층의 분렬 즉 상층이 공산주의자, 민족주의자, 민족개량주의자들로 분렬되여있었고 둘째로, 지도권을 탈취한 민족개량주의자들이 《신간회》를 기회주의의 길로 이끌어가려고 한데서 찾았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이상의 주장들은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와의 통일전선의 민족사적의의를 령으로 격하시키며 《신간회》라는 조직의 의의자체를 부정하는 허무주의적태도의 발로로 된다.

《신간회》가 해산된 원인은 무엇보다도 조선민족의 반일항쟁력량이 하나로 단합되는것을 두려워한 일제가 그 내부에 쐐기를 박아 분렬을 꾀하고 개량주의적상층을 매수한데 있었다. 적들의 암해책동과 파괴공작을 물리치고 《신간회》를 능숙하게 운영하고 이끌어나갈만 한 중심적인 지도력량이 없는것도 하나의 주요한 해산원인이였다.

해산원인을 이렇게 분석한다고 하여 그것은 《신간회》해산이 숙명적인것이였다는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두 력량이 애국이라는 대전제로 견고한 결합을 이룩했더라면 설사 안팎의 파괴작용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처럼 쉽사리 허물어지지 않았을것이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46페지)

문제는 애국애족을 대전제로 하여 견고한 단합을 이룩하지 못한데 있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신간회》운동경험의 기본적교훈에 대하여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민족을 우위에 놓지 않고 리념만 절대화하게 되면 진정한 합작이 이루어질수 없다. 민족해방이라는 대전제를 첫자리에 놓는다면 어떤 계층과도 손을 잡을수 있다는것이 그 당시 나의 견해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46페지)

사상을 절대화할것이 아니라 민족을 우위에 놓고 민족해방이라는 대전제를 첫자리에 놓아야 견고한 통일전선을 형성할수 있는 담보가 있다는것이 김일성주석의 변함없는 견해이고 립장인것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그러한 립장으로부터 자신께서는 《신간회》가 해산된것을 몹시 분하게 여기시였으며 애국적민족의 통일을 실현하는 대업을 청년공산주의자들이 하여야만 한다는 력사적사명을 통감하게 되였다고 하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