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김일성주석과 반일민족해방투쟁사』 중에서 

제  2  장

1920년대 반일민족해방투쟁사 평가


3. 민족주의운동의 정치적좌절, 독립군과 민족개량주의

3.1운동과 관련하여 부르죠아민족주의상층의 영상이 흐려지고 새 사조가 등장하였으며 나라가 일제의 완전한 식민지로 화한 정세에서 민족주의운동의 정치적좌절과정이 진행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정치적좌절의 기본방향은 두 조류에로의 분렬이 진행되는것이라고 특징지으시였다.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민족주의좌파》, 《민족주의좌익진영》, 《독립운동좌파》, 《민족주의우파》, 《민족주의진영의 보수세력》으로 구분하시였다. 좌우파로의 대립이 곧 민족주의운동와해의 기본내용인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좌파와 우파는 각기 자체의 공통성을 가지는데 좌파에게 공통되는것은 일제에 대한 적극적저항의 립장에 서는것이고 우파에게 공통되는것은 무저항주의의 립장에 서는것이라고 가르치시였다.

망국직후 중국의 청도에서 열린 민족운동자들의 회합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좌우파에로의 대립경향은 1920년대에 들어와서는 완연히 자기 모습을 드러내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이 두 조류의 정치적동향과 변화과정에 대하여 깊이 밝혀주시였다. 주석께서는 먼저 민족주의좌파에 대하여 분석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1920년대를 념두에 두시면서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그때까지의 민족해방투쟁에서 우리가 그중 높은 형태의 투쟁이라고 본것은 독립군들의 무장투쟁이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38페지)

당시의 이 투쟁에는 민족주의좌익진영에서 가장 적극적인 반일운동자들과 애국자들이 참가하였고 일제와의 혈전을 지향하고있었다. 때문에 당시까지의 민족해방운동에서 가장 높은 형태로 된다고 보시였다.

민족주의좌파가 독립군부대를 조직해가지고 무장투쟁을 시작한것은 독립전쟁을 해야 나라를 찾을수 있다고 믿었기때문이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38페지 참고)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이와 같이하여 시작된 독립군투쟁을 력사적으로 분석하시면서 1920년대 전반기에는 국내와 압록강연안에서 일제를 반대하는 실제적인 군사활동을 벌려 일정한 성과를 이룩하게 되였다고 평가하시였다. 주석께서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협동하여 싸워서 청산리전투에서 군공을 세운 독립군 북로군정서의 총사령 김좌진이 왕청에 본거지를 가지고있을 때 그가 은색 세루군복에 군도를 차고 청총말을 타고 지나갈 때에는 길가던 사람들이 왕의 행차라도 맞이하듯 절을 한것은 독립군이 청산리전투에서 세운 전공에 대한 인사였다고 인상적인 평가를 주시였다.

이 시기 독립군은 군사행동을 일정하게 하였을뿐아니라 무장투쟁의 후비를 키우는 사업도 진행하였다. 만주지방에는 일반학교들과 함께 여러개의 무관학교들을 세웠는데 신흥강습소(류하현), 십리평사관학교(왕청현), 소사하훈련소(안도현), 화성의숙 등이 그 대표적인것이였고 무관학교설립운동에서는 량기탁, 리시영, 오동진, 리범석, 김규식,  김좌진과 같은 독립운동의 거두들이 중심적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독립군들이 쇠퇴몰락과정을 걷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이 시기에 와서는 독립군들도 맥을 못추고 세력다툼만 하였다. 1920년대 전반기에 국내와 압록강연안에서 종종 벌리던것과 같은 실제적인 군사활동은 거의나 하지 않고 관할구역에 틀고앉아 군자금이나 거두며 돌아다니는 형편이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154∼155페지)

그 당시 동북3성에서 움직이고있던 여러 갈래의 군소독립운동단체들은 3부로 통합되여 만주에는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라는 3부가 존재했는데 이 3부는 각기 자기 관할구역을 설정하고 그안에서 백성들로부터 군자금이나 강제적으로 걷어들이고 세력권확장을 위한 파쟁만을 일삼게 되였다.

독립군활동이 이렇게 하강선을 걷게 된 원인에 대하여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그러나 독립군의 투쟁은 이러한 초지를 끝까지 관철할만 한 과학적인 전략전술을 갖추지 못하였고 독립전쟁을 끝까지 해나갈수 있는 강력하고 세련된 지도부를 가지지 못하였으며 그 투쟁을 인적, 물적, 재정적으로 뒤받침할수 있는 튼튼한 대중적지반을 꾸리지 못하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39페지)

김일성주석께서는 이 모든것은 결국 민족주의의 계급적제한성에서 나오는 필연적결과로 보시였다.

주석께서는 독립군에 대한 평가를 독립군무관학교의 하나인 화성의숙에 적을 두신 시기에 몸으로 느끼시고 실생활을 통하여 체험하신 생동한 력사적현실의 증견자로서 내리신것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화성의숙의 제한성은 민족주의운동자체의 제한성을 그대로 말해주고있었다. 나는 화성의숙을 통하여 민족주의운동의 전모를 살펴볼수 있었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154페지)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체험자, 증견자의 립장에서 회고록에서 독립군의 력사와 생활의 전모를 구체적으로 평가, 분석하시였다. 그러므로 회고록에서 정리된 독립군운동사에 대한 서술부분은 남조선근대사학계가 이 부분 력사서술에서 범하였던 탈선과 외곡을 바로잡을수 있는 지침으로 된다.

남조선근대사학계에서의 독립군운동에 관한 연구는 일찍부터 《국사편찬위원회》 등의 《정부》기관 및 《정부》부서로부터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지원받는 관제연구단체들에 의해 진행되여왔다. 그때문에 연구분량도 대단히 많았다. 공식적으로 간행된 민족운동사서적의 내용중에서 60∼70%가 독립군운동으로 채워져있는 형편이다. 력대의 남조선당국자들이 독립군운동사를 이토록 중시하는 리유는 독립군운동이 리조말기의 의병투쟁을 이은 정통줄기이며 그것이 다시 림시정부의 지도를 받는 광복군으로 이어져서 결국 남조선군의 기원이 된다고 보는 외곡된 관점을 정당화하려는 정치적의도에서 나온것이였다.

지난날의 남조선집권자들이 운운하는 《정통성》문제와 관련하여 정책적견지에서 추진된 관변연구에서는 간과할수 없는 경향성을 보여주고있는데 그것은 첫째, 이른바 《정통성》조작의 정치적의도가 개입된것, 둘째, 만주에서의 조선민족해방운동사를 다만 독립운동단체들의 형성, 전개과정으로만 파악하여 만주에서의 조선민족해방운동사를 독립군사와 동일시하고있는 력사적허구에 기초하고있는것, 셋째, 독립군운동의 부르죠아민족운동사적범주성을 외면하면서 그 력사적지위를 근원적으로 외곡하고있는것 등이라고 보아진다.

남조선의 관변연구가 보이는 이같은 경향성에 대해 최근에 와서 새 세대 젊은 학자들이 강한 비판적시각에서 이 문제를 해명하기 시작한것은 지극히 당연한 추세라고 해야 할것이다.

독립군운동사를 재확정하는데서 그 성공적해결의 관건이 되는것은 애국적민족주의운동으로서의 독립군운동의 성격과 민족주의운동으로서의 그 계급적제한성을 전면적으로 밝히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의 분석을 지침으로 하여 진행하는데 있다.

독립군운동을 이끌어간 리념은 근대적공화제를 지향하는 공화주의적계렬로부터 시작하여 복고적민족주의, 대종교적민족주의에 이르기까지의 심한 다양성을 보이였으나 그 모든 리념은 민족주의라는 하나의 공통된 사상의 틀속에 있었으며 따라서 민족주의적리념에 의해 지도되였던 독립군운동 역시 민족주의운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운동이였고 그 제한성을 면할수 없는 운동이였다. 독립군과 독립군운동단체들이 통일적인 리념을 갖지 못하고 그들 내부의 리념적갈등을 극복하지 못한것은 허다한 독립군운동단체들이 형성기부터 소멸기까지 분파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리합집산을 거듭한 주되는 리유였다.

독립군은 이와 같은 리념적미숙성과 리념적갈등에서 생겨난 분파성을 끝내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분파성으로 동족상쟁의 비극까지 빚으면서 형식만의 통합과 분리를 거듭하는 가운데 내부에서의 분쟁, 대중과의 리탈로 인해 쇠퇴몰락하게 되였다. 따라서 독립군운동의 성격을 보다 깊이 인식하고 쇠퇴몰락의 주되는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회고록에 준하여 민족주의운동으로서의 제한성을 극복 못했던 독립군운동의 본질적성격과 그 반영으로서의 지도층의 계급적성격, 지도부와 사병간의 관계, 독립군과 인민대중과의 관계 등을 전체적으로 분석하는 과정속에서 밝혀내야 하는것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1920년대 민족주의좌파세력에는 3.1운동에 참여했던 종교계인사들도 있었다는것을 이때까지 력사학계에서조차 알지 못했던 자료에 기초하여 론증하시였다.

그 자료에 의하면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회에 참가한 조선대표단의 성원중에는 이름있는 그리스도교목사였던 현순도 포함되여있었다. 그는 서울 정동 감리교교회 3대담임목사였고 조선예수교대표회의 대표로 회의에 참가할 때에는 강병조, 조상섭, 손정도, 김인전, 송병조 등 목사들의 인장이 찍힌 위임장을 받아가지고있었다. 그는 로씨야공산당의 해당 부서가 작성한 조사표에 《목적과 희망》이라는 란이 있었는데 거기에 자필로 《조선독립을 목적하고 공산주의를 실시함을 희망함》이라고 명기하고있었다.

천도교 3세교조 손병희가 사망한 다음 1922년 7월 천도교의 소장파혁신세력은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고 이 위원회는 비밀지하혁명조직인 천도교비상혁명위원회로 재조직되였다. 이 위원회는 씨비리의 치따부근에 있는 3개의 금광구역을 리용하여 인부를 채용하는 형식으로 2년안에 1천명정도의 군사를 키우며 나아가서는 15개 혼성려단의 고려국민군을 창설하려고 계획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천도교의 비밀조직은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로농쏘베트정부가 적극적인 지원을 줄것을 호소하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5권, 400페지)

천도교혁신세력은 1924년초에 원동의 울라지보스또크에 동학 1세교주 최제우의 손자벌이 되고 2세교주 최시형의 아들인 최동희를 천도교비상혁명위원회 외무위원장의 자격으로 파견해서 쏘베트로씨야와 코민테른의 인물들을 상대로 일련의 외교활동을 벌리게 하였다.

그는 코민테른에서 동양부사업을 보고있던 가다야마 센과 인젤손을 비롯한 여러 활동가들에게 편지를 보내여 조선의 독립을 편견없이 적극 지지해주고 지원을 해줄것을 요청하면서 천도교는 조선에서의 혁명발발시 동으로는 일본의 사회혁명세력, 북으로는 쏘베트로씨야 및 코민테른과 깊고 밀접한 련계를 취하여 조선, 일본, 로씨야가 삼각형으로 련쇄적활동을 할 계획이라는것을 밝혔으며 《빈천민중의 충복인 천도교》와 《로동계급의 전위인 코민테른》간의 적극적련락은 동양혁명을 전적으로 담보한다고 력설하였다. 그는 또한 로씨야의 외무인민위원 치체린에게 편지를 보내여 15개 혼성려단으로 고려국민혁명군을 조직할수 있도록 총포, 폭발물, 탄약, 기병장비, 운수수단들을 보장해줄것을 요청하였다.

회고록에서 소개된 이 자료는 천도교혁신세력이 동학운동으로부터 시작된 그 애국애민의 열정과 울분을 그대로 반일투쟁에 바쳐보려고 어지간히 모대기고있었고 천도교상층의 증오를 받으면서도 국제혁명과의 련계속에 무력항쟁을 벌려보려고 여러모로 애를 썼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김일성주석께서는 김구 같은 사람도 민족주의좌파에 속하는 인물로 평가하시였다. 김구가 극우반동적리념의 소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민족주의좌파에 속하는 리유를 그가 무장항일의 주장자였다는 사실로 설명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김구는 일찍부터 무력항쟁을 모색한 사람이였습니다.》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계승본) 8권, 406페지〕

1920년대초에 그가 조직한 로병회라는 단체도 사실은 무력항쟁을 지향한 단체였다. 그는 무저항주의적인 실력배양이나 외교적인 방법으로 독립을 성사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을 곱게 보지 않았다. 그의 한은 군대를 큼직하게 꾸려가지고 무장투쟁을 본때있게 벌리지 못하는것이였다. 그가 무장항일을 지향하고 개량주의적독립대안을 배격하였다는 점에서 그는 민족주의좌파에 속한 애국자였다고 보아야 하는것이다.

김일성주석께서는 1920년대 민족주의좌파의 리념적대변자는 신채호였다고 보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로선상으로 보면 신채호는 무력항쟁의 제창자였다.》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4페지)

이미 애국문화계몽운동시기부터 조선의 민족주의운동의 리념적지도인물로 등장하였던 그는 망국후에는 인민대중의 립장에서 민족운동을 발전시키려는 지향을 더욱 뚜렷이 하였다.

그는 인민의 애국심을 계발시키기 위하여 상해, 베이징 등지에서 활동하면서 국사서술과 문학작품창작에 정열을 바쳐 민족의 유구한 애국전통과 민족의 찬란한 문화를 소개하고 조국애를 고취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력사책으로는 《국사신론》(1910), 《조선상고사》(1915), 《조선사연구초》 (1925)가 있고 문학작품으로서는 소설 《꿈하늘》, 《룡과 룡의 대격전》 등이 있다.

정치로선에서 단재는 무력항쟁을 제창하면서 리승만의 외교론과 안창호의 준비론을 배격하였다. 《조선혁명선언》(1923)은 그의 대표적인 정치론설이다. 그는 거기에서 일본제국주의통치를 정치, 경제, 문화, 정신의 모든 령역에서 철저히 파괴하고 근로대중의 투쟁으로 인민의 나라를 세울것을 제창하였다. 그의 이러한 견해는 항일저항을 지향하는 민족주의좌파세력의 의사를 대변하는것이였다.

일부 인사들이 리승만을 상해림시정부의 수반으로 내세웠을 때 신채호가 분격을 참지 못하고 그것을 정면으로 배격해나선것도 평소부터 리승만의 위임통치론과 자치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기때문이였다. 《리승만은 리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리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리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다.》 이것은 그가 림시정부를 조각하는 자리에서 폭탄같이 내던진 유명한 말이다. 그는 이 말을 남기고 림시정부를 단호히 탈퇴하였다.

김일성주석께서는 민족주의우파의 리념적기초에는 무저항주의가 놓여있다고 분석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무저항주의가 소부르죠아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대두하게 된 시대적배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당시로 말하면 세계적인 대경제공황의 징조가 생활의 여러 분야에서 나타나 사람들을 불안과 공포에 떨게 하던 때였다. 극도로 파쑈화된 제국주의가 대두하여 인간의 자주성을 총칼과 올가미로 참혹하게 교살하고있었다.

소부르죠아지식인들은 철갑으로 무장한 제국주의의 위력앞에서 전률하였다. 이런 시대적분위기속에서 그들이 찾아낸 정신적도피처가 바로 무저항주의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289페지)

자본주의의 위기로 사람들이 불안과 공포에 떨게 되고 무장한 제국주의포악성에 질겁한 소부르죠아지식인들이 정신적인 마지막안식처로 찾아낸것이 바로 무저항주의였다. 무저항주의는 혁명적의지가 없는 사람들이 제국주의의 공세앞에서 겁을 집어먹고 찾아가는 정신적도피처였다. 반혁명에 맞설 힘도 없고 의지도 없으니 결국은 무저항주의를 부르짖게 되는것이다.

김일성주석께서는 길림시절에 《조선일보》 지상에서 조선의 한 무저항주의자가 인디아의 간디에게 보낸 편지에 대하여 거기에 회답을 보내온 간디의 편지를 읽을 기회가 있었다고 하시면서 그 편지의 내용을 회고록에서 다시 소개하시였다.

사랑하는 친구여!

나는 당신들의 편지를 받았나이다. 내가 보낼 유일한 부탁은 절대적으로 참되고 무저항적인 수단으로 조선이 조선의것으로 되기를 바란다는것뿐입니다.

     1926년 11월 26일 사바르마티에서 엠.케이.간디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조선사람들에게 무저항적인 방법으로 독립을 이룩할것을 설교하고있는 간디의 서한과 그것에 일부 민족운동자들이 공명해나선 사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영국의 지배를 저주롭게 여기면서도 단 한사람의 영국인도 해칠 생각이 없다고 하였고 영국정부의 조직적인 폭력을 억제할수 있는 힘은 조직화된 비폭력이라고 언명한 간디의 사상이 광범한 인도인민의 호응을 불러일으킨것은 그 사상을 관통하고있는 인도주의정신의 힘에 있었다고 말할수 있다. 그것이 인도의 실정에 어느 정도 부합된것이였는지는 모르겠다.

설사 그것이 타당한것이였다 할지라도 아세아와 구라파의 서로 다른 강국을 종주국으로 섬기고있던 조선과 인도가 같은 처방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할수는 없었다. 인도는 인도이고 조선은 조선이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4권, 113∼114페지)

일본과 영국의 식민지지배방식이 달랐고 따라서 조선과 인디아의 독립운동조건도 같지 않았던 환경에서 비폭력운동, 무저항운동을 조직화할수 있는 초보적인 정치적자유도 없었던 조선에서 인디아에서와 같은 무저항운동을 리상화한다는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것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조선에서의 무저항주의 리념의 상징적표현은 도산 안창호의 《자아인격완성론》의 골자를 이루는 《자아인격혁신론》을 통해서 알수 있다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자아인격혁신론>이란 우리 민족이 후진국으로서 왜놈들의 식민지가 된것은 인격과 수양이 낮은데 원인이 있는것만큼 정직하게 살고 성실하게 일하고 서로 화목해지도록 각자가 자기 인격을 높여야 한다는것이다.

안창호의 주장에는 어딘가 <자아완성론>에서 표현된 똘스또이의 사고방식이나 자기자신을 개조하고 단련하지 않는 한 인간은 자유를 얻을수 없다고 본 간디의 견해와 비슷한데가 있었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289페지)

안창호의 사상과 똘스또이나 간디의 사상사이에는 서로 류사한 점이 있었고 3자간에는 무저항주의라는 면에서 공통성을 가지는것이였다. 그러나 안창호의 사상이 인민대중의 지지를 받을수 없는것은 조선사람들속에서는 비폭력불복종운동 같은것으로 탐욕스러운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서 독립을 선사받을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환상가가 없었기때문이다. 조선이 처한 현실적조건에서는 그러한 무저항주의적환상으로부터는 민족해방운동에서 개량주의에로 넘어가는 결과만을 가져올수 있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무저항주의가 개량주의로 표현되였다.》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289페지)

무저항주의가 비폭력을 주요한 수단으로 삼는 조건에서 그것은 민족성을 개량한다거나 제국주의지배자에 대한 평화적인 청원으로 그 어떤 양보를 얻어보려고 하는 개량주의로 표현되지 않을수 없었다. 개량주의는 독립에로 가는 유일하고 합법칙적인 대안인 무장항쟁과는 량립할수 없는것이였다. 그것은 일제의 탄압에 질겁하거나 민족의 혁명적궐기에 공포를 느끼는 민족주의자들속에서 표현되는 정치적립장이였다.

민족운동자들이 개량주의의 길을 걷게 되는것은 제국주의와의 투쟁에서 후퇴를 의미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그들은 <민족개량>과 <실력양성>의 보자기를 쓰고 교육과 산업의 <진흥>을 떠들었고 각개인의 <자아수양>을 떠들었으며   <계급협조>와 <대동단결>, <민족자치>를 떠들었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156페지)

김일성주석께서 밝히신바와 같이 개량주의의 표현은 교육과 산업의 《진흥》을 통한 실력양성운동이였다.

김일성주석께서는 자강론의 변형인 실력양성론은 개량주의의 리론적지탱점이였다고 하시면서 그 본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실력양성의 간판밑에 진행된 개량주의운동은 리념상에서는 애국애족을 표방하였으나 방법상에서는 비폭력을 전제로 하는 보수적이고 소극적인 저항운동이였다. 총독부가 허용하는 한도에서 민족의 경제력을 육성하여 일본제국주의의 경제적침략에 대항하려는 그들의 지향은 사실 망상이나 다름없었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292페지)

일본이 자기를 매장할 민족산업의 발전을 허용하지 않으리라는것은 초보의 초보에 속하는 상식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을 창설하고 국산품을 애용하면 민족의 살길이 열린다고 보았으니 이보다 더한 천진란만하고 비현실적인 생각은 없을것이다. 이것은 개량주의길로 타락한 민족운동자들이 제국주의의 속성을 옳게 보지 못하였거나 외면한 결과였다. 따라서 그들이 무력항쟁이라는 선택대신에 방향을 바꾸어 평화적인 문화운동으로 이행한것은 투쟁방법상에서의 후퇴를 의미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실력양성은 어디까지나 독립투쟁을 추진시키는 하나의 과정으로 되여야지 그자체가 혁명전체를 대신할수는 없었다.》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293페지)

김일성주석께서는 민족주의자들의 개량주의운동이 투쟁방법상에서의 후퇴를 의미한다고 규정하시면서도 그들을 개량주의운동일반과 완전히 동일시하는것을 반대하시였으며 개량주의운동가운데는 일제의 저항에 부딪친 개량주의와 일제의 설교를 그대로 수용한 개량주의가 있다는것을 지적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일제의 저항에 부딪친 개량주의에 대하여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민족운동을 개량주의의 방향으로 유도한 근대지식인들은 심지어 국채보상운동을 통하여 모은 돈으로 조선사람이 주관하는 민립대학까지 설립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총독부는 독립인재양성의 온상으로 될수 있는 민립대학의 설립을 허가해주지 않았다.

비폭력적인 물산장려운동도 역시 일제의 저항에 부딪치였다. 조선사람이 일본이 내려먹이는 상품을 쓰지 않고 국산제만 사용하는데 대하여 총독부가 눈을 감아줄리는 만무한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이 운동을 일화배척의 목적을 가진 반일운동으로 보고 독을 품고 방해하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291∼292페지)

민립대학창설운동이나 물산장려운동 같은것은 무력항쟁을 외면한 소극적이고 불철저한 운동이기는 하였으나 일제의 리해관계와 대립되는 반일운동의 성격을 지니는것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이와는 달리 일제의 설교를 수용한 개량주의에 대하여 다음의 실례를 들어 설명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일제는 <문화통치>를 표방하면서 조선사람들이 나라의 독립을 원한다면 정치적으로 일본의 통치를 반대하여나설것이 아니라 그에 협력하여야 하며 일본의 식민지통치밑에서의 자치권을 얻기 위해 힘써야 하며 문화를 향상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키며  민족성을 개량해야 한다고 설교하였다.

이 설교를 통채로 받아문것이 바로 자산계급출신의 민족운동지도자들이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155∼156페지)

일제의 《문화통치》에 의도적으로 순응하여 독립의 목표를 포기하고 자치운동과 민족성개조운동을 벌린 개량주의는 일제의 리해관계와 합치되는것이였고 민족운동과의 실제상의 결별을 의미하는것이였다.

김일성주석께서는 개량주의적경향을 가진 운동자들속에는 이런 두 류형이 존재하기때문에 비록 개량주의적투쟁방법을 모색하거나 실천하였다 하더라도 반일운동의 범주에 속하는 개량주의자는 애국애족의 뜻을 간직한 민족주의자로 보시였다. 그렇기때문에 그런 류형에 속하는 개량주의운동의 대표자인 도산 안창호를 애국자로 보시는 립장을 변함없이 간직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는 안창호란 인물자체에 대해서는 독립운동에 일생을 고스란히 바친 청렴하고 량심적인 애국지사로 존경하고있었지만 그의 리론에 대해서는 환영하지 않았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39페지)

김일성주석께서는 민족주의사상의 핵을 이루는 애국애족의 뜻을 잃지 않는다면 그들이 비록 개량주의적편견을 가지고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옳은 길로 이끌어주어 독립을 위한 길을 함께 개척해나가야 한다고 인정하시였다.

김일성주석께서는 일제의 설교를 통채로 수용하여 애국애족의 립장에서 물러선 개량주의의 리념적대표자인 리광수에 대해서는 매우 엄하게 비판하시였다.

주석께서는 춘원 리광수가 개량주의로 타락하는 직접적계기는 그의 《민족개조론》(1922)과 관련되여있다고 보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민족개량주의를 류포시키는데서 리광수의 <민족개조론>이 많은 작용을 하였다. 이 론문을 읽으면 개량주의의 본질을 알수 있고 그 위험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쉽사리 판단할수 있다.》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290페지)

《민족개조론》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사상으로 구성되여있다.

첫째로, 3.1운동이후 《조선총독부》에 의해 크게 선전된 《독립불가능론》을 근거로 조선민족의 성격의 결함, 인종적렬악, 저능을 《과학》의 미명하에 제시하고 조선민족이 식민지민족으로 전락하여 못살게 된것은 조선민족의 잘못이라고 지적함으로써 민족해방운동의 근거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둘째로, 민족해방운동을 부정하고 독립운동자들을 비난함으로써 민족해방투쟁을 포기하도록 설교하였다.

셋째로, 모든 활동은 비정치적이여야 한다고 못박음으로써 일제의 후견아래서 문화운동을 전개할것을 주장하였다.

김일성주석께서는 그중에서도 민족의 렬등성을 설교한 부분을 가장 나쁜것으로 보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내가 <민족개조론>을 읽고 제일 불쾌하게 생각한것은 리광수가 조선민족을 렬등한 민족처럼 여기고있는 점이였다. 나는 우리 나라가 후진국이라는 생각은 해봤지만 조선민족을 렬등한 민족이라고 여긴적은 한번도 없었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290페지)

조선민족은 세계최초의 철갑선과 금속활자를 창조한 문명하고 슬기로운 민족이며 동방문화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자랑스러운 민족이다. 조선민족은 일본문화의 개척에도 적지않은 공헌을 하였다. 외적의 침해를 용납하지 않는 조선민족의 자위정신은 일찌기 아시아만방에 명성을 떨치였고 백지처럼 깨끗한 우리 인민의 도덕은 세계의 찬탄을 자아냈다.

지난날 리광수는 소설가로 등장하여 명성이 높았던 인물이고 또 3.1운동전야에 일본 도꾜에서 《2.8독립선언서》 작성에도 참가하였기때문에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있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그는 우리 나라 현대소설의 개척자라고 불리울만큼 새로운 양상의 소설을 많이 써냈다.

그러나 <민족개조론>으로 하여 리광수에 대한 대중의 애정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291페지)

그의 소설에서는 개량주의적악취가 풍기기 시작하였으며 나중에는 《혁명가의 안해》(1936)와 같은 반동적인 작품까지 내놓게 되였다. 주석께서는 항일무장투쟁시기 부대를 인솔하시고 남만으로 가시는 도중 무송에 들리신 기회에 그 소설을 읽게 되였다고 하시면서 그 소설의 내용을 호되게 비판하시였다. 소설은 공산주의자인 남편이 병치료를 하고있을 때 그의 안해가 병치료를 해주러 다니는 의학전문학교 학생과 치정관계를 맺고 음란한 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르는 추잡한 생활을 그리였다. 소설에서는 건전한 리성을 가지고서는 상상조차 할수 없는 희세의 창녀를 조작해내고 그에게 《녀류혁명가》의 모자를 씌워 혁명가들을 모독하고 공산주의운동을 비방하였다. 소설은 타락, 변절한 리광수의 정신상태를 그대로 반영하고있었다.

리광수는 《민족개조론》에 뒤이어 1924년에는 《민족적경륜》을 발표하였다. 《민족적경륜》은 《우리는 조선내에서 허하는 범위내에서 일대 정치적결사를 조직하여야 한다는것이 우리의 주장》이라고 피력하여 일제가 허락하는 범위에서의 자치운동의 기치를 선명히 내걸고 자치운동을 벌릴 정치결사를 만들것임을 천명하였다.

《민족개조론》과 《민족적경륜》을 리념적기초로 한 민족개량주의는 반제투쟁에 대한 전면적거부사상이였고 독립운동을 포기, 부정하는 사상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민족개조론>은 일본제국주의강점자들에게 보내는 리광수의 공개전향문이나 다름없었다. 이 전향문을 쓴 대가로 그는 지난날 독립운동에 참가한 사람으로서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총독부 코앞에서 뻐젓이 올방자를 틀고앉아 련애소설들을 써내고있었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291페지)

독립운동을 포기한 민족개량주의는 제국주의에 대한 투항변절의 대명사로 되였고 따라서 그것을 민족주의의 범주에서 제거하는것은 매우 정당한 립장이라고 할수 있다.

김일성주석께서는 민족개량주의의 이와 같은 친일적본성을 깊이 통찰하시고 그것이 미구에 전면적인 투항, 변절하리라는것을 과학적으로 예견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그것은 식민주의자들과의 평화적공존이나 타협을 전제로 하는 운동이였다. 평화적공존이나 타협속에서는 어차피 변질현상이 생기기마련이다. 실지로 개량주의자들가운데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후날 민족운동대렬에서 도피하든가, 전향하여 일제의 앞잡이가 되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292페지)

개량주의자들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전향, 변절하였다고 하여 민족주의운동이 소멸된것은 아니였다. 전반적으로 민족주의운동은 쇠퇴몰락하는 길을 걷고있었으나 반일민족해방운동을 계속하고있었다. 민족주의운동은 공산주의운동과 함께 중요한 투쟁조류로 되고있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한때 민족주의운동은 공산주의운동과 함께 우리 나라 민족해방투쟁에서 2대 구성부분을 이루고있었습니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계승본) 8권, 404페지〕

민족주의운동이 공산주의운동과 함께 반일민족해방운동의 2대구성부분을 이루고있던 시기는 바로 1920년대였다고 말할수 있다.

그러나 민족주의운동이 공산주의운동에 대한 응당한 리해를 표시하지 못하고 초기공산주의자들이 민족주의운동을 비프로레타리아운동으로 경원시하거나 적대시한것은 민족해방운동발전에서의 최대의 장애로 되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