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김일성주석과 반일민족해방투쟁사』 중에서 

제  2  장

1920년대 반일민족해방투쟁사 평가

2.   6.10만세운동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반일민족해방투쟁사에서 6.10만세운동이 차지하는 력사적지위에 대하여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6.10만세시위투쟁은 3.1인민봉기후 민족해방투쟁무대에 새롭게 등장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조직된 대중적인 반일시위투쟁이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131페지)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 6.10만세운동의 소식에 접하시게 된것은 무송을 떠나시여 화성의숙으로 옮기신 때였다.

이때를 회고하여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나는 그때 6.10만세운동의 결과를 놓고 제나름대로 분석해보았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135페지)

바로 이와 같이 주석께서는 이 투쟁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시고 분석적인 고찰을 통해서 몇가지 중요한 결론을 찾으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우선 갓 태여난 공산당이 순종의 장례일을 계기로 대중적시위를 조직할데 대하여 계획한것은 적절한 조치이라고 분석하시였다.

1926년 4월 25일 조선왕조의 마지막왕이였던 순종이 사망한것은 민족의 반일감정이 격발되는 하나의 계기로 되였다. 왕의 부고를 접한 조선사람들은 상복을 차려입고 남녀로소 할것없이 대성통곡하였다. 나라가 망한 다음에도 순종이 마지막왕으로서 조선왕조를 상징하고있었는데 그마저 없어지니 쌓이고쌓였던 망국의 설음이 다시금 울음으로 폭발하게 되였다. 군악을 울리며 학생들이 부르는 노래소리에 군중은 더욱 슬피 울었다.

  잘 있거라 창덕궁아

  영원히 무궁히

  나는 간다 북망산천

  쓸쓸한 곳으로

  인제 가면 언제나

  또다시 오려나

  2천만의 백의동포

  무궁하여라

그 통곡소리가 일본강점자들에게는 폭탄과 같은 자극을 주었다.

조선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우는 곳이 있으면 즉시에 일본기마경찰대가 출동하여 총칼과 곤봉을 휘둘러 야만적으로 해산시켰다. 소학교아이들까지도 가차없는 곤봉세례를 받았다. 나라가 망해도 슬퍼하지 말고 왕이 죽어도 울지 말고 입을 다물고있으라는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단통치로부터 문화통치에로 넘어간 총독정치의 진면모였다.

일본통치자들의 포악무도한 탄압만행은 불길처럼 타번지는 우리 민족의 반일감정에 기름을 쏟아붓는 격이 되였다. 민족의 반일기운이 고조된 상황을 포착하여 전국적반일시위를 벌리기로 한 공산당의 계획은 투쟁에 유리하게 조성된 정황을 대규모투쟁촉발의 계기로 주동적으로 리용하려는 적절한 조치라고 말해야 할것이다. 공산당은 순종의 장례식날을 6월 10일로 한다는 궁내부보도가 나오자 당의 총력량을 동원하여 6.10투쟁의 조직에로 돌입하게 되였다.

김일성주석께서 지으신 결론의 또 하나는 종파주의의 극복없이는 투쟁의 승리가 기약될수 없다는것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6.10만세운동은 종파를 극복함이 없이는 공산주의운동의 발전도 반일민족해방투쟁의 승리도 이룩할수 없다는 심각한 교훈을 남기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135페지)

만일 공산주의자들이 파벌관념을 버리고 통일적으로 이 투쟁을 조직하고 지휘하였더라면 투쟁은 전체 공산주의운동력량이 참여하고 보다 큰 거족적인 투쟁으로 확대발전되였을것이며 일제에게 보다 큰 타격을 주었을것이였다.

시위투쟁준비위원회에 끼여있던 종파분자들에 의하여 비밀이 알려졌고 반일시위준비에서부터 적들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게 되였을뿐아니라 시위에 대한 만단의 대책을 세울수 없게 하였다. 3.1운동때의 선례가 있는데다가 그러한 비밀루설까지 있어 일본군경은 초긴장속에서 장례식날을 맞게 되였던것이다.

그리하여 6월 10일 당일에 순종의 상여가 종로를 지나갈 때 수만명의 서울시민들이 《조선독립 만세》, 《일본군대 물러가라!》, 《조선독립운동자들은 단결하라!》는 구호를 웨치면서 대중적인 시위가 시작되자마자 대기태세에 있던 적의 무장군경의 탄압을 받게 되였다. 다시 폭발한 독립만세시위는 결국 일제의 야수적탄압을 이겨내지 못하고 실패하게 되였다.

6.10만세운동을 발단으로 조선공산당지도부의 주요인물들은 대부분 검거되였다. 투쟁과정에 200여명의 공산주의자들과 청년학생들이 체포구금되였다. 그리하여 제1차 조선공산당은 실제상 와해상태에 빠지게 되였다.

력사적경험은 부르죠아민족주의자들의 사대주의사상이 3.1운동을 실패하게 한 근본원인의 하나라면 초기공산주의자들의 분파행위는 6.10만세운동을 말아먹은 기본화근임을 보여주고있다.

김일성주석께서 분석하신 결론의 다른 하나는 부르죠아민족주의자들이 3.1운동시기에 발로시킨 운동지도에서의 결함을 공산주의자들이 또다시 반복한 오유와 관련되는 문제였다.

이와 관련하여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내가 이상스럽게 생각한것은 이 투쟁의 조직자들이 왜 3.1운동당시의 평화적방법을 그대로 되풀이하였는가 하는것이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135페지)

평화적의사표시로 독립의 목적을 성취할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부르죠아민족주의자들의 헛된 기대가 3.1운동을 실패에로 몰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초기공산주의자들이 동일한 과오를 되풀이하고있는것은 참으로 리해할수 없는 일인것이다. 만세나 부르고 삐라나 몇장 뿌리는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할수 없었다. 그들은 만세를 부르는 시위에 뒤이어 투쟁을 어떻게 발전시키겠는가 하는 후속조치에 대하여 전혀 생각하지 않았으며 일제의 야수적탄압에 대처하여 력량을 어떻게 보호하고 거기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맞설것인가에 대해서도 전혀 준비를 하지 않았었다. 대중을 한번 싸움마당에 내세우자면 그들을 충분히 교양하고 조직화하며 훈련을 잘 주어야 하는것이다. 그런데도 6.10만세운동을 조직하고 지도한 사람들은 사전에 철저한 준비도 없이 총을 든 군경들앞에 적수공권의 군중을 수만명이나 내세웠으니 그 결과는 비참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것은 초기공산주의자들의 운동지도상에서의 미숙성과 경험의 빈곤을 그대로 드러내보이는것이 아닐수 없다.

6.10만세운동은 공산주의자들이 지도한 최초의 대중적반일운동으로서 일제에게 정치도덕적타격을 주고 공산주의자들이 민족해방을 위하여 싸우는 투사라는것을 실천으로서 보여준 의의있는 사변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초기공산주의자들의 정치적미숙성과 운동지도에서의 제한성으로 하여 자기 목적을 관철시키지 못한 실패한 투쟁으로 되게 되였다.

6.10만세운동의 실패에서 김일성주석께서는 큰 충격을 받게 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일어설 때마다 무리죽음을 내고 좌절당하군 하는 반일운동을 생각하면 분해서 잠도 오지 않았다. 그 실패는 내 피를 끓게 하고 일제를 때려부시고 조국을 찾아야 하겠다는 나의 의지를  더욱 굳게 해주었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135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