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김일성주석과 반일민족해방투쟁사』 중에서 

제  2  장

1920년대 반일민족해방투쟁사 평가

1. 로동운동의 발전과 초기공산주의운동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3.1운동이후 반일민족해방운동에서 일어난 변화는 새 사조가 급속히 전파되고 그런속에서 우선 근로대중의 로동운동이 발전하게 되였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나라 민족해방투쟁이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운동에로 방향전환을 하는데서 3.1인민봉기가 분기점의 역할을 하였다는것은 세상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3.1인민봉기를 통하여 부르죠아민족주의가 더는 민족해방투쟁의 기치로 될수 없다는것을 뼈저리게 느낀 선각자들속에서 새 사조를 따르는 기운이 급속히 자라났으며 그들의 활동에 의하여 맑스-레닌주의가 빠른 속도로 전파되였다.

3.1인민봉기가 있은 이듬해에 서울에서는 로동공제회라는 로동단체가 출현하였으며 련이어 농민단체, 청년단체, 부녀단체와 같은 대중조직들이 속출되였다.

이런 조직들의 지도밑에 우리 나라에서는 1920년대초부터 무산민중의 권익을 옹호하며 일제의 식민지정책을 반대하는 대중투쟁이 힘있게 벌어졌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131∼132페지)

김일성주석께서는 1920년대 로동운동의 기본특징을 근로대중의 권익옹호와 일제식민지정책을 반대하는 대중투쟁의 성격을 가진다고 결론지으시였다.

로동운동의 새로운 특징을 밝히시면서 주석께서는 먼저 조선로동계급의 형성과정과 로동운동발전에서 20년대 운동의 특징을 명확히 규정하시였다.

주석께서는 20년대 로동운동의 지위를 보여주기 위하여 그것을 조선에서 근대적로동계급과 로동운동의 발생, 발전의 력사를 개괄하는것을 통해서 분석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나라에서 근대적인 산업로동이 발생한것은 19세기 말엽 개방정책의 흐름을 타고 외국자본이 쓸어들어오기 시작한 다음부터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 369페지)

조선에서 산업로동의 시초를 18세기로 보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때는 근대산업이 아직 맹아적형태라고 보아야 한다. 봉건조정이 문호를 개방한 때로부터 거침없이 밀려들어오는 외국자본의 사태속에서 항구건설, 철도부설, 공장의 출현, 광산의 개발 등이 진행되면서 근대적로동자의 대렬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산업로동의 발생발전은 로동단체의 조직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1890년대말에 첫 부두로동조합이 생겼고 뒤이어 의형제나 부조계 형태의 조합형태를 가진 로동단체들의 출현을 보게 되였다. 《을사5조약》이 조작된 이후시기부터 근대적로동조합들이 평양, 진남포, 군산을 비롯한 전국각지에서 결성되기 시작하였으나 그것들은 거의다 자연발생적으로 조직되였을뿐아니라 공장별조합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1910년대는 자본임금로동관계에서의 마찰을 반영한 로동쟁의가 전국적판도에서 벌어지게 되였다. 이는 계급의 리익을 위한 로동자들의 집단적투쟁을 의미하는것이였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어와서는 로동공제회 이외에도 로동대회, 로동련맹회와 같은 전국적인 합법적로동단체들이 조직된 이후 로동자들의 투쟁은 단순한 권익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일제침략을 반대하는 애국적정치운동과 결합된 투쟁으로 되면서 질적발전을 이룩한 로동운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였다.

이것은 로동계급의 투쟁이 민족해방운동의 력량관계의 변화과정을 추진해나가면서 그것을 질적으로 높은 단계에로 이행시킬수 있는 전제조건이 성숙되여가고있다는것을 보여주었다.

1920년대 조선에서 로동운동은 상대적으로 매우 빨리 발전한 특징을 가진다. 운동의 빠른 발전은 조선의 로동계급이 일본자본의 류입과 식민지산업의 일정한 발전에 따르는 로동자수의 증가, 로동조건의 식민지적상황 즉 일제와 일본인자본의 식민지초과리윤획득을 위해 강요된 기아적저임금과 장시간로동 등으로 가장 렬악한 처지에 놓이게 되고 이와 같은 처지는 일제의 지배가 자본주의적관계를 통해 관철되는 결과였다. 그러므로 로동계급은 일제와 그 자본에 대한 가장 적극적이고 혁명적인 저항자일수밖에 없었다.

1920년대 로동운동은 빨리 성장하였을뿐아니라 그 투쟁성이 높이 표현되였다는것이 또한 특징이다. 1920-1924년의 로동자들의 파업투쟁에는 1921년 부산부두로동자총파업, 1923년의 경성고무공장녀공들의 파업과 평양양말공장로동자총파업, 1924년 군산도정로동자파업, 평양인쇄직공파업 등을 비롯하여 비교적 규모가 큰것들만 살펴보아도 280여건에 약 2만 3천여명이 참가하였다. 파업투쟁은 일본인, 고용주 및 이와 결탁한 조선인예속자본가를 반대하는것이였기때문에 순전한 경제적인 요구만을 제기하는 파업도 정치적성격을 띠지 않을수 없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 분석하신바와 같이 1920년대의 청소한 조선로동운동이 단순한 로동조건개선을 위한 쟁의가 아니라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는 애국적정치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된것은 조선로동계급의 사회력사적특질에서 규정되는것이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 370페지 참고)

첫째로, 조선의 로동계급은 독자적계급으로 형성된이래 처음부터 반제반봉건투쟁의 담당자로 되게 된것이다. 그러므로 로동자들의 투쟁은 항상 일제와 그와 결탁된 자본을 반대하여 그리고 그것을 매개로 식민지통치를 감행하는 일본지배자를 반대하여 전개되였다. 이로 하여 로동운동은 시초부터 반제성을 기본으로 하는 애국적정치운동의 성격을 띠지 않을수 없었다.

둘째로, 조선의 로동계급은 높은 혁명성을 지니고있었다. 조선에서는 자본주의발전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으며 따라서 로동자들의 문화기술수준도 낮았다. 그러나 로동계급의 전신인 농민이 오랜 투쟁과정을 통하여 높은 혁명적자질을 가지고있었으며 제국주의지배하에서의 로동자들의 렬악한 생활처지는 그들의 혁명화를 비상히 빠르게 하였다. 거기에다 로동운동은 유럽의 로동운동과는 달리 운동내부로부터 사회민주주의의 분렬파괴책동을 겪지 않았다.

이로 하여 로동계급은 순결한 혁명성을 강하게 지니게 되였으며 민족해방운동의 주력군을 이루면서도 그 주력군과 전체 민족력량을 반제반봉건투쟁에로 이끄는 령도계급을 이루는 애국적정치운동의 주체로 성장하였음을 보게 된것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농촌에서 민족적 및 계급적모순이 격화되여 농민운동은 로동운동과 함께 민족해방운동에서 주력군의 구성부분으로, 주요한 반제반일력량으로서의 성격을 갖추게 되였다는것을 밝히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일제의 반동적인 농업정책은 우리 나라 농촌에서 농민들의 생활을 령락시키고 민족적, 사회적, 계급적모순을 격화시키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 323페지)

일제의 농업정책은 보다 악독한 성격을 띤 구조적인 식민지지주소작제에 기초하는것이였으므로 농촌에서 사회적모순을 격화시키지 않을수 없었다.

일제의 략탈적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시점에서 지난 시기의것과는 성격을 같이하면서도 보다 악독한 지주소작관계가 자리잡게 되였다. 일제는 일본인지주 또는 농장, 회사의 토지략탈과 소작료징수를 강제로 진행할수 있게 하기 위해서 지주가 소작지를 자유로 이동시킬수 있게 하였다. 그리하여 오랜 력사적유산이자 획득물인 농민들의 경작권은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되고 농민은 단순한 임대차관계의 계약당사자로 전락된 반면에 지주의 권한은 확대되고 소작권이동이 빈번해지고 소작권이동을 지레대로 하여 고률소작료가 정착하여 봉건시기의 반작반수보다도 훨씬 높은 6∼8할의 소작료가 적용되게 되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이러한 변화가 1920년대 농민운동의 형태를 규정하게 되였다고 지적하시면서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일제통치하의 우리 나라 농민운동에서 주류를 이룬것은 소작쟁의였다. 1920년대의 소작쟁의는 대체로 소작권의 확보와 소작료감하문제를 비롯한 경제적구호를 들고 진행되군 하였다.》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 323페지)

소작쟁의가 일제식민지시기 농민운동에서 주류를 이루게 된것은 일제의 악독한 농업정책의 론리적귀결이였으며 소작쟁의에서 소작권확보와 소작료감소문제 같은 경제적구호를 들고 투쟁하는것 역시 농촌에 정착한 민족적 및 계급적모순을 반영하는것이였다.

그러므로 소작쟁의를 중심으로 하여 벌어진 식민지지주제를 반대하는 농민들의 투쟁은 바로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과 직결되는것이였다. 그것은 일본인토지소유가 조선인소유보다 더 많았다는것때문만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식민지지주제를 안받침해주는것이 곧 일본제국주의의 지배권력이였기때문이다. 이것은 1920년대 농민운동이 반일민족해방운동의 중요한 구성부분을 이루지 않을수 없는 필연적조건임을 말하여주는것이다.

소작쟁의가 주류를 이룬 농민들의 투쟁은 급속히 발전하였으며 소작인조합을 비롯하여 소작상조회, 농우회, 작인동맹, 농민부와 같은 농민단체들이 출현하여 농민들의 투쟁을 지도하게 되였다. 그중에서도 농민부는 전국적성격을 띠는 농민단체였다.

1920년대 로동운동과 농민운동이 독자적인 력량으로 력사무대에 등장한것은 민족해방운동사의 시각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사변이였다.

일제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지배는 가장 반동적인 지주제도에 기반하는 지주소작관계의 부식 그리고 식민지자본주의를 통한 식민지적자본임금로동관계의 출현이라는 두 기둥으로 하여 감행되였는데 로동운동과 농민운동은 그것들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가장 적극적이고 선진적사회력량의 출현을 의미하였으며 가장 강력한 반제력량의 등장을 의미하였다. 이것은 당시 조선의 반제반봉건투쟁이 강력하고도 새로운 사회력량을 운동주체로 하여 발전하는 새로운 시기가 시작되였다는것을 확인하는것이다. 그리하여 다른 사회운동 나아가서는 민족해방운동도 로동운동을 외면하거나 그것에 의거하지 않거나 련대하지 않고서는 자기발전의 가능성을 가질수 없는 시대가 시작되게 되였던것이다.

조선에서의 로동운동이 반제민족해방운동의 적극적력량을 이루게 되는 력사적필연성을 론증하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의 여러 명제들의 의미를 정확히 인식함으로써만 남조선의 근대사학계가 그간 이 문제를 다루는데서 나타냈던 허무주의적편향을 옳바로 극복해나갈수 있다.

남조선의 근대사학계에서는 오래동안 로동운동이나 사회주의운동이 지향하는것은 어디까지나 계급해방이며 따라서 독립을 목표로 하는 민족운동의 범주에 속할수 없다는 론리하에 로동운동이나 사회주의운동을 민족운동사연구의 령역에서 배제해왔다. 이 론리에 의하면 로동운동이나 사회주의운동이 민족해방의 구호를 웨친 리유는 단지 계급해방을 실현하기 위한 전술상의 고려에서 출발한것이였다는것이다. 이것은 력사적진실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외곡인것이다.

그 론리는 민족의 독립과 계급해방 량자를 전혀 다른것으로 분리되여있는 관계로 파악하고 민족의 독립은 민족주의운동이, 계급해방은 로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이 추진했다는 식의 치졸한 이분법적론리에 불과한것이다.

김일성주석께서 로동운동이 반제민족해방운동의 가장 적극적인 혁명력량을 이루게 된다고 하신 명제는 식민지지배하에서 식민지현실에 대한 가장 과학적인 분석에 기초한것이다. 따라서 반일민족해방운동은 서로 결합되여있는 민족문제와 계급문제를 동시에 해결해가는 반제반봉건의 과정으로 전개되지 않을수 없었으며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의 량자를 실현해나갈수 있는 새로운 사회세력, 사회운동으로서의 로동운동과 농민운동이 민족해방운동, 반제반봉건투쟁의 중심세력으로, 운동의 지도적주체로 등장하는것은 필연적인 귀결이였다.

로동운동의 출현과 발전에 따르는 력사적요청으로 제기된것이 공산당에 의한 그에 대한 지도였다.

이에 대해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로동운동을 비롯한 대중운동의 발전추세는 이를 통일적으로 령솔할수 있는 강력한 정치적지도세력을 요구하였으며 이런 력사적요구를 반영하여 1925년 4월 서울에서는 조선공산당이 창건되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132페지)

로동운동발전에 따르는 력사적요구에 의해서 1925년 4월에 조선공산당이 창건된것은 공산주의운동뿐아니라 민족해방운동발전에서 하나의 리정표로 되는 사변이였다.

식민지민족해방운동은 국가주권의 회복과 동시에 제국주의지배로 인하여 생긴 식민지문제의 총체적해결을 과제로 한다. 그때문에 직접적인 주권회복투쟁뿐아니라 로동운동, 농민운동 등 식민지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여러 계급, 계층의 투쟁이 민족해방운동의 중요한 구성부분으로 되는것이다.

그런데 로동운동, 농민운동 등 새로운 대중운동은 사회주의운동(공산주의운동)의 성숙정도에 의해 그 발전이 규제되는것만큼 대중운동의 지도를 담당한 공산주의운동 역시 민족해방운동의 발전을 규정하는 요소로 되는것이다.

일제시기 민족해방운동사에서 발전의 규정적요소로서의 공산당의 출범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큰것이였다. 그것은 공산주의운동이 일제하에서 로동자, 농민의 혁명운동에 대한 지도를 담당해야 할 세력이며 광범한 반제국주의적운동세력을 결집하여 민족해방운동을 단결시키고 앙양시키는데서 중심이 되여야 할 세력이기때문이다. 이러한 력사적요구를 반영하여 1920년대에 이르러 공산주의운동이 우리 나라에서도 출범하기 시작하게 되였다. 그것은 3.1운동이후 부르죠아민족운동이 혁명적으로 진출하는 대중운동을 지도할수 없게 되였고 새로운 대안으로 사회주의가 민족해방의 리념으로 전파되면서 그 리념을 받아들인 공산주의자들이 점차 민족해방운동의 무대에 진출하는 과정이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공산당창건은 하나의 전환점이였다.

조선공산당창건을 전후한 조선의 공산주의운동은 흔히 초기공산주의운동으로 불리우는데 그것은 이 시기의 공산주의운동이 유년기의 공산주의운동으로 평가받고있기때문이다.

초기공산주의운동의 력사적공적과 제한성문제는 당시부터 큰 론난의 대상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초기공산주의운동을 평가함에 있어서는 그 전향적의의와 제한적인 문제점을 전체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조선공산당은 창건후 현실에 부합되는 지도사상이 없고 대렬이 통일되지 못하고 대중속에 튼튼히 뿌리박지 못한 근본적인 제한성으로 하여 로동계급의 전위대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하였으나 그 창건은 신구사조의 교체와 민족해방투쟁의 질적변화를 보여주는 의의있는 사변으로서 로동운동과 농민운동, 청년운동을 비롯한 대중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발전을 추동하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132∼133페지)

주석께서 가르치신대로 초기공산주의운동의 성과와 한계에 대한 평가문제는 공산당의 창건이 대중운동 및 민족해방운동발전의 추동력으로 된 측면과 운동상에서 근본적인 제한점을 가지고있었던 측면을 다같이 고려하여 전면적인 평가를 주어야만 하는것이다.

1925년 4월에 창건되여 1928년 여름의 코민테른 제6차대회이후에 해체되는 조선공산당의 력사적지위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중요한것은 우선 조선공산당이 로동운동 및 민족해방운동발전의 합법칙적요구에 순응하여 창건되여 운동을 전진시켰다는것을 전제로 하는 립장에서 문제를 고찰하는것이다.

1920년대 초반 사회주의사상의 보급, 로동운동을 비롯한 대중운동의 발전과 단체의 결성 등 반일민족해방운동은 급속히 전진하였다. 특히 1924년에 이르러 좌익진영의 주도하에 대중운동은 조선로동총동맹, 조선청년총동맹, 조선녀성동우회, 조선형평사 등 전국적인 통일조직을 조직하기에 이르게 된다. 로동계급을 비롯한 이러한 대중운동의 사상, 조직적발전은 로동계급의 전위당을 필연적으로 요구하게 되였고 그것은 동시에 민족해방운동발전을 위한 요구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조선공산당의 창건은 조선의 로동운동과 민족해방운동발전의 필연적귀결이고 합법칙적산물로 되였다.

조선공산당은 창건후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근로대중속에 사회주의사상을 가일층 보급하고 로동운동을 지도하여 조선의 민족해방운동이 공산주의자에 의하여 지도되는 새로운 력사의 장을 열어놓게 되였다.

조선공산당이 존재하는 기간 6.10만세시위투쟁과 같은 큰 규모의 반일투쟁을 지도하여 민족의 기개를 과시하였고 민족주의자들과의 합작으로 《신간회》와 같은 협동전선체도 만들어 반일애국력량을 집결시키는 사업에도 이바지하였다. 이러한 투쟁성과들은 조선공산당이 창건되고 당에 의하여 로동운동과 농민운동을 비롯한 여러 대중운동이 지도되여나간것이 조선공산주의운동활동의 전향적성격과 민족해방운동발전을 일정하게 추동하였다는것을 보여주는것이다. 이것은 조선공산당의 력사적지위를 규정짓는 첫째 측면이다.

다른 한 측면에서는 조선공산당의 제한성을 정확히 인식하는 립장에서 문제를 고찰해야 한다.

조선공산당이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당지도부의 파쟁으로 하여 몇해가 지나지 않아 코민테른으로부터 제명처분을 받고 해산된것은 당의 조직과 활동에서 본질적인 결함을 가지고있었음을 보여주는것이다. 여기서 문제로 되는것은 조선공산당의 창건자체가 아니라 조선공산당에 참여한 공산주의자들이 공산주의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객관적요구에 옳게 부응하지 못한 운동주체내부에 있는 결함에 관한 문제인것이다.

조선공산당은 자기 존재기간 인테리, 학생이 중심이 되여 로농대중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고 파쟁성이 심하여 조직적으로 사분오렬되고 사상적으로 교조주의와 사대주의에 빠져있는 미숙성을 보여주었다. 특히 심한 분파성과 분파투쟁은 혁명운동에 옳은 지도를 보장하지 못하고 당을 와해시킨 가장 주되는 내적요인이였다.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종파성은 당이 창건되기 이전에 존재했던 분파적사상단체에서부터 매우 심하게 나타났었다.

당시 사상단체라는 인테리중심의 특징적인 결사운동이 시작되면서부터 분파성은 고질적인 병집으로 되였는데 그 대표적인것은 1921년 이르꾸쯔크에서 생긴 《고려공산당》(세칭 이르꾸쯔크파), 상해에서 생긴 《고려공산당》(세칭 상해파), 국내에서 생긴 《서울청년회》(세칭 서울파), 1922년에 생긴 《신사상연구회》에 토대하여 1924년에 생긴 《화요회》(세칭 화요파), 1923년 일본에서 결성된 《북성회》의 국내조직으로 1924년에 나타난 《북풍회》(세칭 북풍회파), 1925년 《북성회》에서 다시 갈라져나온 《일월회》(세칭 엠엘파의 전신) 등이였다.

분파투쟁은 당을 결성할 때 중요한 분파의 하나인 《서울파》를 배제하고 다른 한 중요분파인 《화요파》를 중심으로 당을 배타적으로 창건함으로써 더욱 심해지게 되였다. 당의 존재기간에는 분파투쟁이 당권파와 《서울파》간의 분파투쟁, 그리고 《화요파》와 《엠엘파》간의 당내투쟁으로 전개되다가 당해체후에는 《서상파》(《서울파》와 《상해파》의 합동파), 《엠엘파》, 《화요파》 등이 분파활동을 경쟁적으로 벌려 분파적대립을 보다 격화시켜 종파성은 1920년대 조선공산주의운동의 결함을 규정한 본질적요인이 되게 되였다.

분파투쟁은 조선공산당을 사상, 정치적으로 부식시켜 맑스-레닌주의를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창조적으로 적용하는데는 미치지 못하게 만들었고 당내 종파분자로 하여금 사회주의리론을 반대파를 공격하는 도구로 리용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당내 종파분자들의 리념과 로선은 몇개의 리념적틀거리속에 고착되게 되였는데 그 첫째가는 리념적틀거리는 우심한 사대주의사상이였다.

종파분자들의 사대주의사상에서는 코민테른에 대한 사대주의가 주되는 경향성으로 표현되였는데 그들은 조선의 현실에 대한 적합성, 불적합성을 고려하지 않고 코민테른의 지시라면 절대적으로 맹종하였으며 코민테른의 승인이나 얻고 그 권위를 빌어 자파의 권위를 돋보여 반대파를 제압하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코민테른 제6차대회에서는 《엠엘파》의 4차조선공산당대표와 《서울파》의 《춘경원》공산당(1927년 조작)대표가 함께 몰려가 감자도장으로 날조한 문서를 들이대고 서로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코민테른의 승인을 배타적으로   구걸한 추태를 보였는데 이것은 모두가 코민테른에 대한 사대에 얼마나 빠져있었는가를 단적으로 시사해주는것이였다.

그들의 사대주의는 민족허무주의사상과 맥을 같이하고있었다. 그들은 민족의식을 갖는것은 계급적근본에서 잘못된것이며 그것을 철저히 말살해버려야 한다는 관념까지 드러내고있었다.

추상적으로 《민족》, 《민족의식》, 《민족애》, 《배달겨레》를 강조하는것은 계급의식을 모호하게 하고 사회주의운동을 무력하게 만들고 교란시키려는 작간이라고 비방하였다.

사대주의사상과 민족허무주의사상은 종파분자들의 또 하나의 리념적경향성인 교조주의를 낳게 되였다. 조선의 력사와 현실을 외면하고 코민테른의 지령만을 금과옥조로 섬긴 종파분자들에게는 교조주의가 고질적인 사고방식으로 자리잡게 되였고 따라서 그들은 다른 어느 나라 공산주의자들에게서도 보기 어려운 립장변화를 드러내놓았다.

그들의 교조주의는 한때는 《민족해방운동우선론》, 《총체적무산자론》을 제창하면서 계급적립장을 포기하고 청산주의로까지 타락하다가 다음에는 계급투쟁우선론을 제창하면서 실지에 있어서는 민족해방의 과제를 부정하는 계급투쟁만능론, 계급지상주의에로 나아가게 되는데 이것은 로선상의 일관성이 결여되고 좌우경적편향속에서 방황하였음을 보여주는것이며 조선공산당안에 사상리론적 및 전략전술적기초가 정립되여있지 못하였다는것을 보여주는것이다.

이상의 모든 사실은 민족해방운동발전의 합법칙적요구에 따라 출현한 조선공산당의 문제 그리고 그 제한성문제를 편향없이 다루어 조선공산당의 력사적지위를 바로 정립하는 문제는 당력사에서 나타난 긍부정면을 전체적으로 분석할데 대한 김일성주석의 교시에 철저히 립각할 때에만 가능하다는것을 보여주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