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김일성주석과 반일민족해방투쟁사』 중에서   

제   1   장

19세기 후반기-20세기초의 반일민족해방투쟁사에 대한 평가

7.  3.1운동과 부르죠아민족운동의 종말

1919년에 거족적인 3.1운동이 폭발하였다. 노도같이 밀려가는 어른들과 함께 시위대렬에서 웨친 만세의 메아리는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한생에 잊을수 없는 깊은 추억을 남기였다.

그날을 돌이켜보시면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비운의 조국강산을 뒤흔들며 세계만방에 울려가던 독립만세소리는 온 여름 내 귀전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 만세소리는 나로 하여금 나이보다 일찍 철들게 하였다. 시위군중과 무장경찰의 격투로 불꽃을 일으키던 보통문 앞거리에서 나의 세계관은  새로운 단계에로 도약하였다. 어른들의 틈바구니에서 발돋움을 하며 독립만세를 부르던 그 시각에 나의 유년시절은 벌써 끝났었다고 말할수 있다.

3.1인민봉기는 나를 인민의 대오속에 세워주고 나의 망막에 우리 민족의 참다운 영상을 새겨준 첫 계기였다. 내 마음속에 우뢰가 되여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던 독립만세의 메아리에 귀를 기울일 때마다 나는 우리 인민의 백절불굴의 투쟁정신과 영웅성을 두고 다함없는 자부심을 느끼군 하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43∼44페지)

김일성주석께서는 몸소 3.1운동을 체험하시면서 세계관에서의 도약을 이룩하시게 되였다. 새로운 단계에로의 세계관의 도약이란 조선민족의 백절불굴의 투쟁정신과 영웅성을 절감하게 되면서 생겨난 자부심이며 민족의 위대한 힘을 절감하게 되면서 생겨난 투철한 민족관이였다. 이 세계관적도약으로 그이의 정신년령에서는 유년시절이 끝나고있었던것이다.

그후 주석께서는 조선의 실정과 력사적현실로부터 출발하여 민족의 진로를 모색하고 설계하시면서 우리 민족의 투쟁력사에 대하여 깊이 분석하시였으며 3.1운동의 력사에 대해서도 거대한 관심을 돌리시였다.

주석께서 3.1운동의 력사적경험을 분석하시면서 력점을 둔 분야는 왜 3.1운동으로 하여 부르죠아민족운동이 종말을 고하고 조선민족의 민족해방운동이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지 않으면 안되였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래서 회고록에서도 3.1운동에 대하여 언급하시면서 이 문제에 기본을 두고 심오한 분석을 전개하시였다.

부르죠아민족운동이 종말을 고하게 되였다는것은 민족주의리념이 더는 민족운동을 이끌어나가는 기치로 될수 없게 되였다는것을 의미하며 3.1운동이 그 계기점이 되였다는것은 운동을 지도한 상층지도층이 민족해방운동을 승리적으로 추진시킬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것을 보여주었다는것이다.

3.1운동은 19세기 후반기 민족해방운동의 총화라고 할수 있는 민족적봉기였고 대중적봉기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천도교, 기독교, 불교를 비롯한 종교계인사들과 애국적인 교원, 학생들의 주도하에 3.1인민봉기는 면밀하게 계획되고 추진되였다. 갑신정변과 위정척사운동, 갑오농민전쟁, 애국문화계몽운동, 의병투쟁을 통하여 줄기차게 이어지고 승화되여온 우리 인민의 민족정신은 마침내 자주독립을 부르짖으며 화산처럼 분출하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36페지)

반세기이상에 걸치는 줄기찬 민족운동의 흐름에서 축적된 힘과 형성된 민족정신에 기초하였기에 자주독립에 대한 대중적요구는 화산처럼 분출하였던것이다. 이 분출된 힘을 이끌어 일제와의 결전을 벌려야만 독립의 길을 개척할수 있었다. 그러나 민족주의상층은 인민대중의 이 거센 힘을 발전시키기를 거부하였다.

물론 3.1운동의 발단을 열어놓는데서 천도교, 그리스도교, 불교계와 33인의 민족대표가 크게 공헌한것은 사실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3.1인민봉기의 주력군은 물론 광범한 로농대중과 청년학생, 지식인계층이였다. 하지만 그 봉기를 발단시켰던 민족대표들가운데 기독교도, 불교도들과 함께 천도교인이 들어가있었으며 당초의 발기를 천도교측에서 하였다는 사실과 300만이나 되는 전국 천도교도들의 과반수가 시위투쟁에 떨쳐나섰던 사실들은 그 반일투쟁에서 천도교측의 역할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잘 보여주고있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5권, 394페지)

민족대표자로 불리운 운동의 지도부상층은 대중의 저항의지를 보려고 하지 않았을뿐아니라 망국의 쓰라린 력사적 교훈도 외면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운동의 상층지도인물들의 기본적립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그런데 3.1운동을 지도한 상층인물들은 이와 같은 력사의 교훈을 망각하고 우리 인민의 앙양된 투쟁기세에 부합되지 않게 처음부터 운동의 성격을 비폭력적인것으로 규정하였으며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조선민족의 독립의지를 내외에 천명하는것으로 그치고말았다. 그들은 운동이 그 이상 확대되여 민중이 주도하는 대중적투쟁으로 전환되는것을 바라지 않았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40페지)

민족운동의 일부 지도자들은 《청원》의 방법으로 나라의 독립을 해결해보려고 하였다. 윌슨의 《민족자결론》이 세상에 나오자 그들은 미국을 비롯한 협상국대표들에 의해 빠리의 강화회의에서 조선독립이 결정될수도 있다는 환상을 가지고 구차스러운 청원운동을 벌리였다. 미국이 일본과 공모하여 일본에 대한 조선독립의 말살을 위해 크게 협조하였다는 력사적사실을 외면한 이 사실자체가 그들이 민족해방운동력량의 지도세력으로 될수 없다는것을 보여주는것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3.1인민봉기를 주도한 지도자들의 계급적제한성은 그들이 일본의 식민지지배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데까지 도달하지 못했다는 점이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42페지)

그들은 일본의 식민지지배질서를 인정하는 한계내에서 자기 계급의 리익을 보장할수 있는 약간의 양보를 받아내자는데 운동의 목적을 두고있었다. 이것은 후일 그들중 적지 않은 사람들을 개량주의자로 전락시키게 하였거나 심지어는 일제와 타협하면서 《자치》를 고창하게까지 한 리념적바탕으로 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선에서는 개량주의를 타파할만 한 선진사상이 없었으며 그런 선진사상을 자기 계급의 지도리념으로 삼고 투쟁할만 한 산업프로레타리아트의 대군이 없었다. 청소한 조선의 로동계급은 아직 자기의 사상을 새로운 시대사상으로 내세우고 그 기치밑에 광범한 근로대중을 묶어세울 사명을 지닌 자기의 정당을 가지지 못하였었다.

3.1운동당시의 조선의 계급관계와 민족주의상층이 지도성을 상실한것과 관련하여 제시하신 김일성주석의 분석은 이 문제와 관련된 남조선근대사학계의 제기되는 문제를 바로 해명할수 있는 앞길을 밝혀주고있다.

이 문제와 관련해 남조선근대사학계에서 나타난 제 문제는 우선 33인 민족대표에 대한 평가문제이며 그 핵심적문제점은 그들이 민족운동을 이끌어나가는데서 논 역할을 어떤 시각에서 평가해야 옳은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남조선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평가에서 그들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긍정론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부정론이라는 상반되는 견해가 있다.

긍정론자는 민족대표야말로 3.1운동의 리념적, 조직적지도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당시 학생운동세력이 민족대표와 별도로 운동준비단계부터 독자적으로 대중운동을 구상, 추진하였으며 33인이 당초의 방침을 바꾸어 태화관에서 일제에게 자수해버렸고 운동의 전개과정이 민족대표의 의도와는 다른 대중적, 폭력적형태로 귀결되였다는 점을 상기할 때 설득력을 가질수 없다.

이와는 달리 부정론자들은 33인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환상을 품고 독립운동을 준비하기는 하였으나 대중의 혁명적진출을 두려워하여 태화관에서 간단하게 독립선언식을 가진 후 일제에게 투항해버렸으며 비폭력을 운동방침으로 내세움으로써 운동이 실패하도록 이끌었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33인이 3.1운동을 지도했다고 볼수 없다는것이다.

긍정론의 견해에는 민족대표의 역할을 확대평가함으로써 8.15후의 남조선우익보수세력의 립지를 강화하고 3.1운동이 《대한민국정부》가 계승한 정통성의 력사적근거로 된다는 조작을 위한 정치적저의와 련관되여있는것이다.

민족대표에 대한 부정적평가에 대응하여 1970년대 이후에 제한적긍정론이 대두되였는데 이 역시 설득력이 없는것이다. 제한적긍정론은 크게 보아 첫째, 33인의 비폭력주의는 무장력을 갖출수 없는 당시 조건에 적합한 대중적, 창조적투쟁방법이였다는 조건론, 둘째, 33인이 윌슨의 민족자결선언과 빠리강화회의에 청원한것은 주체적, 능동적으로 외교를 활용했다는 주체적활용론, 셋째, 3.1운동의 대중적성격을 부정할수 없지만 적어도 시초단계에서는 지도력을 발휘했다는 제한적지도론 등으로 나누어볼수 있다.

첫째 론리인 조건론에 대하여 말한다면 문제의 본질이 조건과 전술상의 문제가 아니라 33인이 대중의 주체적력량에 의거하여 독립을 달성하려는 의식이 부족되여있었다는데 있다. 폭력에 대비되는 비폭력이 문제인것이 아니라 비폭력에 숨겨져있는 타협성, 외세의존적, 반인민적립장이 문제인것이다.

다음으로 주체적외교활용론 역시 외교 그자체에 문제의 본질이 있는것이 아니라 33인이 제국주의본성을 리해하지 못한데로부터 민족의 운명을 그르치는데 동조하였다는데 문제가 있다는것을 간과하고있는것이다. 그들은 제국주의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여 《윌슨의 정의감》, 《렬국의 자비심》, 《일본의 리성》에 기대를 걸고 청원외교를 할만큼 그들이 외교를 주체적으로 활용했다는것은 33인의 주관일수는 있어서도 아무런 객관적정당성도 없는것이다.

민족주의운동의 상층부가 그렇게 행동한것은 그들의 머리에 숭미사대주의사상이 그만큼 뿌리깊이 자리잡고있었기때문이였다. 무능한 봉건통치배들은 지난날 나라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큰 나라들을 쳐다보면서 그들의 힘을 빌어 국운을 타개해보려고 했는데 그 버릇이 민족주의운동상층에도 그대로 흘러들게 되였던것이다.

세번째 론리인 제한적지도론은 3.1운동에서는 운동시작에서부터 대중투쟁이 33인의 운동의도와 구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극복하면서 전민족의 투쟁으로 전개되였다는 력사적사실자체가 33인의 역할을 제한적지도라는 범위에서 평가하려는 견해의 부당성을 론박하고있는 점에 비추어 설득력을 못 가지는것이다.

민족대표문제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문제의 또 하나는 그들의 계급적기반을 어떻게 리해하는가 하는것이다. 남조선에서는 33인이 중인계급출신과 근대적지식인, 상공업종사자 등 근대적시민계급에 속하는 인물들이라는 분석이 있을뿐 그 계급적기반에 대해서는 정리된 견해가 없다.

민족대표의 계급적기반은 근대적시민계급이라는 추상적범주로서가 아니라 보다 구체적으로 민족부르죠아지 상층의 리익을 대표하는 계급의 대변자라는 구체적범주로서 파악되여야 하는것이다.

이로부터 김일성주석께서는 3.1운동을 지도한 상층인물들을 부르죠아민족주의자라고 정식화하여 규정하시였다.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42페지 참고)

총괄적으로 말하여 33인 민족대표에 대한 평가는 김일성주석께서 교시하신바와 같이 그들은 3.1운동을 발단시키는데 이바지한 애국적인물들이지만 민족운동을 주도해나갈수 없는 수준에서 스스로의 계급적제한성을 보여준 상층세력의 대표자였다는 이 선에서 정리되여야만 하는것이다.

3.1운동이 조선의 근대민족운동에서 분수령적지위를 차지하게 되는것은 부르죠아계급의 지도성문제에서 본질적약점이 드러나고 로동자, 농민이 운동을 주도해나가는 기본력량으로 되게 된것과 관련되는것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3.1인민봉기는 부르죠아민족주의자들이 더는 반일민족해방운동의 지도세력으로 될수 없다는것을 보여주었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42페지)

부르죠아민족운동의 시기가 종말을 고하였다는것은 운동주도세력의 주체가 교체되였음을 의미하는것이다. 3.1운동은 부르죠아민족운동시기에 존재하던 여러 갈래의 리념상대립과 운동조류의 다원성을 극복하고 처음으로 되는 각계각층, 각파가 총 망라된 전민족의 운동으로 되면서 동시에 새로운 운동주체가 등장하는 운동으로 되였다. 새로운 운동주체로 등장한 계급은 당시 사회의 기층대중이였던 농민과 로동자였다.

3.1운동의 주력은 일제의 지배정책에 의하여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농민들이였다. 이들은 집회, 결사의 자유를 박탈당한 가운데 사선을 뚫고 전국적판도에서 투쟁을 전개하였다. 시위에는 격문, 종이연, 풍선, 봉화, 홰불신호 등의 방법이 리용되였으며 대중속에 있는 지도자로서 《만세꾼》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이들은 낫, 괭이, 몽둥이 등을 들고 헌병주재소와 면사무소, 우체국을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는 등 일제의 지배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또한 지적부, 호적부, 지세명기장 등 문서를 불사르는 등 자신의 생활과 관련된 문제도 투쟁대상으로 삼았다. 농민들은 민족자결에 립각한 자주독립의식과 생활상의 요구에 대한 변혁의지를 가지고 투쟁을 전개하였지만 뚜렷한 목표로서의 반봉건투쟁을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한편 로동자들은 전체 인구가운데서 비률이 얼마 되지 않았을뿐아니라 여러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3월 2일 서울 종로에서의 시위, 황해 겸이포(송림)의 미쯔비시제철소 그리고 서울의 전차종업원, 철도국, 연초회사 등에서 파업이 련이어 일어났다. 3월 22일에는 로동자대회를 열고 조직적인 봉기를 계획하고 로동회보를 배포하기도 하였다. 3월 중순이후에는 광산로동자들이 합세하면서 주재소습격 등 폭력적인 양상을 띠였으며 이들의 운동은 1919년 한해동안 101건, 1만 1천여명이 반일운동에 참가하였다.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근로대중은 비타협적, 주체적태도를 가지고 운동을 주도해나갔다. 운동초기부터 일제권력의 타도를 위한 폭력적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초기운동과정을 통해 비폭력로선의 부당함을 절감하게 되면서 그 양상은 더욱 적극성을 띠면서 확산되였다. 비록 자연발생적이고 비조직적으로 투쟁이 진행되고 대중의 리념 역시 부르죠아민족주의운동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대중은 조선민족의 의지를 만방에 과시할수 있었다.

그들은 투쟁을 통해 조선민족이 남의 노예로 살기를 원치 않는 자주정신이 강한 민족이며 나라를 찾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기개와 열렬한 애국정신을 가진 민족임을 과시하였다.

대중은 운동과정을 통해 부르죠아민족운동의 리념, 지도성, 운동론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민족해방운동의 주체로서의 자신을 자각하였고 새로운 투쟁리념을 모색하게 되였다.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인민대중은 3.1운동을 통하여 계급적, 민족적자각을 크게 높이였다. 3.1운동을 계기로 자연발생적인 생존권투쟁에 머물러있던 이전의 활동방식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조직적이고 비타협적인 투쟁을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로동운동, 농민운동 등의 급속한 발전이 이루어지는 속에서 투쟁리념으로서의 사회주의사상이 대중속에 급속히 뿌리내리는 전제가 이루어지게 되였다.

3.1운동을 계기로 로농대중의 운동이 질, 량적으로 크게 성장한데 비해 민족주의자들의 제한성과 취약성이 전면적으로 드러나게 되여 운동을 주도하지도 추동하지도 못하게 된것은 민족해방운동의 지도세력이 교체되여야 할 력사적필연성을 보여주는것이였다.

3.1운동을 거치면서 민족해방운동에서 민족주의자들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쇠퇴되고 사회주의세력이 지도하는 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시기가 열리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