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김일성주석과 반일민족해방투쟁사』 중에서  

 

제   1   장

19세기 후반기-20세기초의 반일민족해방투쟁사에 대한 평가

6. 애국문화계몽운동의 지향점

조선에서는 의병이 국권회복을 위하여 투쟁하고있을 때 동일한 목적을 위해 동일한 시기에 애국문화계몽운동이 활발히 벌어졌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이 운동을 당시의 반일민족해방운동의 중요한 일환으로 보시였다. 그것은 이 운동이 민족해방운동을 추동하는 힘으로서의 사람들의 애국심을 분발시키는 과정으로 보셨기때문이다.

애국문화계몽운동은 언론, 출판, 교육, 학문, 학회운동, 정치운동 등 여러 분야에 걸쳐서 진행되였으며 그 추진력도 갑오개혁후부터 크게 성장하기 시작한 도시주민들속에서 형성된 새로운 사회층으로서의 교원, 언론인, 학자, 전문가, 종교성직자 등 지식인이 위주가 된 운동으로 전개되였다. 운동의 지역적중심도 변하였다. 갑오농민전쟁시기까지 투쟁의 중심은 삼남지방이였지만 계몽운동시기에는 서북지방이 운동의 중심마당으로 바뀌였다. 이와 같은 변화들로 하여 운동을 이끌어나간 리념적지도자나 대표적인물로는 모두 민족주의자들이 진출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애국문화계몽운동에 대하여 언급하시면서 다음의 두가지 문제를 주요하게 지적하시였다.

계몽활동가로서의 신채호의 활동에서 찾아보게 되는 리념적경향성에 대한 문제가 첫째이고 애국문화계몽운동에서 교육운동 특히는 사립학교운동이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에 대한 분석이 둘째이다.

민족주의자인 단재 신채호는 애국문화계몽운동시기의 중요한 대표적인물의 한사람이다.

그는 20세기초에 이름있는 문장가, 학자로서 언론계에 나서서 《대한매일신보》 등을 통해서, 울라지보스또크망명후에는 《해조신문》을 통해서 반일애국의 필봉을 높이 들었다. 그는 또한 잡지 《서우》, 《서우학회월보》 등을 발행하여 반일사상을 고취하는 언론활동과 학회운동발전에 기여하였다. 당대 서북지방 교육계의 원로격이였던 남강 리승훈과 막역한 친분관계를 가지면서 교육운동발전에도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1907년에 지하정치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고 민족주의운동을 적극적반일에로 추동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다방면적이고 정력적이면서도 열정적인 활동에 일관되는것은 조국애를 고취하며 민족의 계몽을 위하는데 있었다고 밝히시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4페지 참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신채호의 계몽활동에서 나타난 지향을 애국심을 고취하는 노력과 민족을 계몽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요약하시였는데 그 두가지 측면은 애국문화계몽운동전반을 특징지을수 있는것이였다.

그것은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성격의것이였다. 지금은 애국과 민족이라는 말이 흔히 쓰이는 낱말로 되고있지만 계몽기 이전 시기에는 찾아볼수 없는 말이였다. 수수천년의 오랜 세월 사람들의 륜리도덕관은 임금을 섬기고 사직을 보존해야 한다는 봉건적관념에 깊이 물젖어있었다. 군주권이 망조를 드러내고있던 시국에서 그런 봉건적륜리관은 시대의 요청에 부응할수 없는것이였다.

그리하여 계몽운동가들은 봉건적륜리도덕관을 타파하고 애국의 구호를 높이 들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그것은 나라사랑이라는 도덕륜리관의 정립없이는 국권회복을 바랄수 없었던 조선의 현실이 가져온 필연적결과였다.

이 시기에 나섰던 민족의 계몽이라는 과제도 그러한 애국적립장에서 출발한것이다. 유럽에서는 근대시기의 과제가 과학지식의 보급과 종교적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과제를 안고있었지만 당시 조선의 현실적조건에서는 그것에 국한될수가 없었다. 보다 중요하게는 사람들을 민족적으로 각성시켜 그들이 반침략, 반외세의 주체로서의 자각을 가지게 하는것이였다.

김일성주석께서 애국문화계몽운동에 대하여 언급하시면서 가장 큰 관심을 돌리신 분야는 교육운동이다.

애국문화계몽운동시기 교육운동의 앞장에는 안창호, 리동휘, 리상재, 유길준, 남궁억과 같은 인사들이 서있었다. 김구나 안중근과 같은 의사들도 시작은 교육사업으로부터 독립투쟁의 길에 나서게 되였다.

그래서 당시의 민족운동지도자들은 례외없이 교육사업을 독립운동의 출발점으로 삼고 거기에 온갖 재력과 심혈을 다 기울이였다.

온 나라를 휩쓸고있던 교육문화운동의 열풍속에서 수천개의 사립학교들이 태여나 봉건의 구속에서 잠들고있던 이 나라의 지성에 불을 달아주었다. 공자, 맹자의 교리를 가르치던 서당들이 신학문을 배워주는 사립학교들에 자리를 내놓게 되거나 학당, 의숙으로 개편되여 후대들에게 애국의 정신으로 분발하라고 부르짖었다.

서북지방에서 설립된 사립학교들가운데서 당시에 유명했던것은 위대한 수령님의 외할아버님이 설립한 창덕학교와 안창호가 주관한 평양의 대성학교였으며 리승훈이 설립한 정주의 오산학교 역시 이름있는 학교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창덕학교는 서선지방의 사립학교들가운데서도 비교적 규모가 크고 현대화된 학교로서 학생수가 200명이상 되였다. 당시로서는 작은 학교가 아니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83페지)

창덕학교라는 학교이름은 애국적륜리도덕을 가르쳐주는 학교라는 뜻이다. 다시말하여 애국심을 분발시키는 학교라는 의미를 가진다. 당시 학교가 하나 있으면 그것을 거점으로 주변인민들을 빨리 계몽시켜나갔으며 때문에 평양지방의 인민들과 유지들은 창덕학교를 매우 중시하였고 여러모로 학교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평양의 유명한 녀성자선가였던 백선행도 창덕학교에 거액의 자금을 희사했다는 일화가 지금도 전해지고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배움의 천리길》을 걸으신 후 다시 《광복의 천리길》을 떠나시는 1923년 4월부터 1925년 1월에 이르는 2년 가까운 기간 창덕학교에 적을 두시고 조국광복의 원대한 뜻을 키우시면서 당시의 조국현실과 사립학교교육의 현실을 체험하시게 되였다.

김일성주석께서는 당시 사립학교현실을 체험할수 있게 한 창덕학교시절을 회고하시면서 애국문화계몽운동의 애국적성격에 대한 심오한 과학적분석을 주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구한국말기와 <한일합병>후 우리 나라에서는 구국투쟁의 일환으로 애국적인 교육운동이 맹렬하게 전개되였다. 국권상실의 수치스러운 본원이 나라의 후진성에 있다는것을 눈물겹게 통감한 선각자들과 애국지사들은 교육이야말로 자강의 기초이고 근본이며 교육을 발달시키지 않고서는 나라의 독립도 사회의 근대화도 실현할수 없다는것을 절실히 깨닫고 도처에서 사립학교운동을 벌리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82페지)

수령님께서는 이 교시에서 교육사업을 비롯한 계몽운동은 첫째로, 애국적선각자들이 망국의 교훈을 자각한데로부터 출발하였다는것, 둘째로, 새 세대를 애국심으로 키우는 교육은 자강의 기초이고 근본이라는 사상, 셋째로, 후대들을 애국심으로 키우지 않고는 나라의 독립과 사회의 근대화를 실현할수 없다는 사상을 제시하시였다.

조선이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망국의 비운을 겪게 된 그 근본적인 원인은 나라의 후진성에 있었다는 선각자들의 자각은 정당한것이였다. 근대의 시대적요구에 따라 남들이 공업과 기술을 발전시키고 계몽과 교육에 힘쓰며 국력배양에 힘쓰고있는 시대가 되였는데도 부패무능한 통치배들은 구태의연하게 봉건적꿈에서 깨여나지 못하고 음풍영월로 허송세월하고있었으니 후진국의 처지에 있던 《은둔국》에 침략의 마수가 뻗칠 때 망국의 비운을 감수할수밖에 없었던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다음으로 나라의 후진성을 극복하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강하여야 한다는것을 자각하고 교육을 자강의 기초로, 근본으로 내세운것도 계몽운동의 애국적지향을 표현하는것으로 보시였다.

계몽운동시기에는 자강불식하여야 한다는 말이 많이 강조되였다. 자강불식이란 말은 쉬임없이 스스로를 다잡아 자기 힘으로 자기를 강하게 한다는 말로서 강자가 되라는 구호였다.

강자가 되지 않고서는 후진성극복의 과제도, 국권회복의 과제도 해결될수 없었다. 그 과제들의 해결은 력사적과제의 담당자인 사람들의 애국심을 분발시키지 않고서는 불가능한것이였다.

사람들의 애국심을 키우는 교육이 자강의 기초로, 근본으로 되여야 한다고 본 애국문화계몽운동참가자들의 견해는 그 운동의 애국적지향점을 보여주는것이 아닐수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애국문화계몽운동의 애국적지향점을 분석하시면서 사람들의 애국심을 키우는 교육사업을 떠나서는 나라의 독립과 사회의 근대화가 불가능하다는 명제를 제시하시였는데 근대화문제에 대한 수령님의 론리는 매우 중대한 문제점을 제시해주는것이였다.

수령님께서 내놓으신 명제에 일관되는 론리는 근대화의 과제가 밖으로부터의 이식에 의해서 해결되는것이 아니라 안으로부터의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것이다. 다시말하여 근대화는 그 근본원리에서 밖으로부터 주어지는것이 아니라 안으로부터의 성숙을 통해서만 이룩된다는 근대화의 철리를 밝혀주신것이다.

오늘 패망한 일본군국주의자들이 재침의 야욕을 위해 조선에 대한 저들의 식민지지배가 근대화를 도와주었다는 터무니없는 강도적궤변을 늘어놓고있는 조건에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밝히신 근대화의 철리를 바로 인식하는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회고록에서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 근대화문제의 핵심은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키는 문물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자주적발전에 관한 문제라고 인식하는 관점과 립장을 10대의 어리신 나이부터 확고히 견지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천리길을 걸을 때의 인상가운데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것은 4년전까지 등잔불을 켜고 살던 강계시내에 전등불이 환한것이였다. 강계사람들은 전기가 들어왔다고 좋아하였지만 나는 왜색이 짙어가는 거리풍경을 보고 쓸쓸한 생각을 금할수 없었다.》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80페지)

주체적립장에 서지 못하면 제국주의지배자에 의한 전등가설을 놓고 마치 근대화가 실현되여가는듯 한 인상을 가질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제국주의가 식민지에서 초과리윤을 짜내기 위한 수탈정책의 한 고리였고 침략의 수단이였을뿐이다. 그것은 나라의 예속화과정을 심화시키는 현상이였다. 우리의 자본, 우리의 기술, 우리의 힘으로 실현되여 자주적발전의 산물로 되는 그런 전등만이 근대화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것이다. 이 경우에 외부로부터의 기술도입이 필요할수 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주적발전의 견지에서 고려되여야 하는것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 어리신 나이에 전등풍경앞에서 쓸쓸한 생각을 금할수 없었던것은 근대화문제에서의 그이의 확고한 주체적인식을 말하여주고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처럼 주체적근대화관점을 지니고계셨기에 애국문화계몽운동이 민족자신의 힘으로 사회의 근대화를 실현하려고 노력한것을 그 애국적지향의 표현으로 평가하시였던것이다.

애국문화계몽운동, 창덕학교와 관련되는 회고록부분에는 수령님의 출중한 세계관형성과정을 보여주는 두가지 혁명일화가 있다.

첫번째 혁명일화는 창덕학교시절에 있었던 위대한 수령님과 외할아버지사이에 오고간 대화이다.

창덕학교에서 애국심을 키우는 교육에 힘쓰고있던 외할아버지는 어느날 그이께 창덕학교에서 안중근과 같은 인물이 한명만 나와도 영광이니 공부를 열심히 하여 훌륭한 애국자가 되라고 말씀하였다. 외할아버지의 이 말씀에는 창덕학교교육이 애국주의로 일관된 교육을 실시하고있다는것과 새 세대들이 애국의 큰뜻을 지니도록 왼심을 쓰고있었다는것을 생동하게 보여주고있다.

외할아버지의 분부를 받아들이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대답을 하였다고 회고하시였다.

《나는 안중근과 같은 유명한 렬사는 못돼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애국자가 되겠다고 대답하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83페지)

위대한 수령님의 겸허하신 대답속에는 자신께서는 유명한 렬사가 되는것을 바라지 않으며 애국자가 되는것을 바라며 독립을 위해서는 몸을 아끼지 않는 헌신의 애국자로 되는것이 소원이라는 그이자신의 숭고한 인생관이 비껴있는것을 볼수 있다.

동시에 수령님의 대답은 자신께서는 안중근의 애국적의거는 훌륭한것이라고 보지만 그가 택한 개인테로의 방도로서는 문제를 해결할수 없으며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는 애국적인민대중의 힘에 의해서만 달성될수 있다는 뛰여난 혁명관, 세계관이 형성되고있었음을 보여주는것이다. 의사들의 성공한 테로에 현혹되여 테로찬미의 사조가 온 나라를 휩쓸고있던 때에 수령님께서 테로는 좋은것이 못된다는 확고한 견해를 가지신것은 그이의 세계관이 얼마나 선진적인 사상의 높이에서 형성되고있었는가를 뚜렷이 보여주고있다.

다음의 실례는 새로 력사무대에 등장한 로동자들의 파업투쟁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견해를 말해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내가 조국에 나온 그해 여름 평양에서는 양말공장 로동자들의 총파업이 있었다. 그때 신문들이 이 사건을 크게 보도하였다.

나는 그 소식을 들으면서 일본이 비록 기만적인 <문화통치>에 매달리고있지만 조만간에 3.1인민봉기보다 더 큰 반항에 부딪치게 될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92페지)

위대한 수령님께서 창덕학교에서 공부하시게 된지 얼마 안된 1923년 7월 21일부터 평양양말공장산하 여러 분공장 로동자들을 망라한 총파업투쟁이 벌어지게 되였다. 로동자들은 완강한 의지로 임금인상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두달동안에 걸치는 투쟁을 벌려 마침내 요구를 관철하게 되였다. 투쟁에 대해 조선로동련맹을 비롯한 광범한 사회계가 지지와 후원을 보내고 《최후까지 싸우라》고 격려하여 투쟁은 시간과 함께 확대되여갔었다. 《동아일보》 1923년 8월 29일부는 이 투쟁과 관련하여 《이 문제는 적어도 조선 또는 세계적으로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할만 한 사변》이라고 론평한데 이어 《목하 평양시내는 자못 분요한 공기에 싸여있다.》고 투쟁의 전투성과 첨예성에 대해 전하였다.

김일성주석께서는 련일 들어오는 파업투쟁소식을 깊이 분석연구하시였다. 파업투쟁에 대한 연구, 분석은 그이께서 견지하신 로동운동에 대한 확고한 련대성을 보여주는것이였다. 그러한 련대적립장은 식민지하의 피착취, 피압박대중이라는 처지의 공통성, 파업투쟁이 민족해방투쟁의 새로운 단계를 예고하는 메아리로 된다는 과학적예견성이 결합되여 이루어진것이였다.

주석께서는 투쟁자료를 통해서 로동계급의 선진성, 단결성, 조직성, 완강성 등을 깊이 새기시였다.

김일성주석께서는 파업투쟁이 일제의 간교한 《문화통치》의 기만성을 낱낱이 폭로하고있는것을 고찰하시면서 로동계급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반제력량이며 로동계급은 민족해방투쟁의 미래를 대표한다는 결론에 이르시였으며 로동운동이 앙양될 때 3.1인민봉기보다 더 큰  민족적저항이 불가피하다는 확신과 신념을 지니시게 되였다.

세계혁명운동사를 살펴보면 모든 로동운동지도자나 혁명가는 례외없이 사회주의서적을 연구하면서 로동계급의 세계관을 터득하게 됨을 보게 된다. 그러나 주석께서는 사회주의서적을 접하시기 이전에 진행하신 로동운동의 현실연구를 통해서 로동계급의 혁명적세계관을 터득하기 시작하였으니 이는 김일성주석이시야말로 하늘이 내신 절세의 위인이심을 실증하여주는것이다.

몇해후 주석께서는 민족주의사조가 지배하던 화성의숙을 중퇴하시고 새로운 투쟁무대에 나서시게 되는데 이날을 가져오는 세계관적기초는 이미 창덕학교시절부터 쌓여지기 시작한것이였다.

수령님의 창덕학교시절은 전환적사상탐구의 력사가 시작되는 시절이였고 창덕학교를 낳은 애국문화계몽운동은 모든 조선사람들의 애국심을 키우는 중요한 계기가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