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김일성주석과 반일민족해방투쟁사』 중에서  

 

제   1   장

19세기 후반기-20세기초의 반일민족해방투쟁사에 대한 평가

5. 의병투쟁의 교훈

갑오농민전쟁은 실패하였으나 인민대중의 반침략, 반봉건투쟁은 새로운 투쟁에로 이어지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갑오농민전쟁은 일청 량군의 개입으로 인하여 비록 실패하였으나 각지로 흩어진 농민군은 그후 반일의병운동의 주력으로 되여 구국항전을 계속하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5권, 393페지)

농민전쟁실패후 밑으로부터의 대중적저항은 활빈당, 영학당, 서학당, 남학당운동으로 발전하다가 마침내 의병투쟁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의병투쟁은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서 무력항쟁을 선택하여 《왜멸복국》의 기본구호밑에 일제를 반대하여 투쟁하는것으로 하여 농민뿐아니라 재야유생, 일부 관료층을 비롯한 여러 계층이 투쟁에 련합하게 된다.이 시기 농민전쟁당시는 변혁로선을 달리했던 여러 흐름이 구국투쟁이라는 하나의 민족적투쟁에 합류하게 된다.이것은 이때에 와서는 조선에서 민족문제가 전면에 나서면서 조선근대화를 둘러싼 국내의 계급문제는 부차적인것으로 되였기때문이다.이 투쟁에 여러 사회층이 합류하였지만 련합된 모든 세력중에서 기본적인 항쟁력량은 농민이였고 농민전쟁후 각지로 흩어졌던 농민군이 의병운동의 주력으로 되였던것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반일의병투쟁의 경험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결론을 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먼저 1895년의 을미의병과 을미사변의 호상관계문제에 대하여 해명을 주시였다.즉 의병투쟁의 발단으로 된 을미년의 의병거사가 어찌하여 민비가 살해된 을미사변을 계기로 하여 일어나게 되였는가 하는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굴욕적개항정책과 사대주의로 인민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있던 민비가 살해된것이 어찌하여 대중적구국항전의 도화선이 되였는가 하는 문제인것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나는 어렸을 때 아버지한테서 을미사변(1895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분통을 금치 못하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4권, 110페지)

한 나라의 주권을 통채로 한손아귀에 거머쥐고있던 민비가 친로씨야파의 우두머리가 되여 일본세력을 반대하는 립장에 서게 되자 이에 당황망조한 일본의 통치자들은 조선주재 일본공사 미우라를 돌격대로 내세워 수비대무력과 경찰무력 심지어는 깡패들과 불량배들을 포함한 살인집단을 뭇고 그들을 동원하여 경복궁을 습격하게 하였다.일본도로 민비를 란도질한 미우라의 하수인들은 범죄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하여 시체를 불태워버리고 남은 그의 유골까지도 못속에 집어던지였던것이다.

그런데 민비는 당시 조선의 백성들이 그닥 숭상하지 않았고 고깝게 생각하고있었다.그것은 그가 개국으로 나라를 망친 장본인이라고 생각하고있었기때문이였다.그가 왕가의 며느리로서 외부세력과 결탁하여 시아버지인 대원군을 정권의 자리에서 몰아낸데 대해서도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민들의 감정은 민비살해사건을 다르게 보는데로 흐르게 되였다. 민비로 말하면 한 나라의 왕후였고 리왕조의 마지막왕 순종을 낳은 명성황후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이에 대하여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그러나 아무리 국민의 신임을 받지 못한 민비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정치는 정치이고 왕비는 왕비인것이다. 그는 우리 국민의 일원이였고 왕가의 주인이였으며 고종을 대변하여 국정을 다스린 국가권력의 대표자였다. 그러므로 을미사변을 도발한 일본지배층의 야만적행위는 곧 우리 인민의 자주권을 강도적으로 침해한것으로 되며 전통적인 왕가의 존엄을 침해한것으로 되는것이다. 국민의식이 강하고 존왕정신이 강하며 민족적자부심이 남달리 강한 조선사람들이 이것을 용납할리 만무하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4권,110∼111페지)

그리하여 민족적감정은 분화구를 헤치고 크게 폭발하게 되였고 의병항쟁이 막을 올리게 되였던것이다. 을미사변에 대한 민족적인 대답이 곧 을미년의 의병투쟁으로 나타나게 되였던것이다.

1895년부터 1914년까지에 걸치는 의병투쟁은 19세기 후반기이후의 부르죠아민족운동의 발전에 있어서 가장 장기적이며 광범한 민족력량이 동원되고 투쟁의 규모가 더욱 확대된 민족운동이며 밑으로부터의 혁명운동이였다.

전국을 무대로 하여 벌어진 의병투쟁이 완강성과 지구성을 가지고 전개되였음에도 불구하고 국권회복의 목적을 실현하지 못하고 그 일부세력만이 독립군으로 발전하고 전반적으로는 좌절의 운명을 면치 못하게 된것은 많은것을 시사해주고있다.

김일성주석께서는 주객관적인 여러가지 원인이 있었으나 그중에서도 대오의 리념적, 의지적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한것이 투쟁의 승리적결말을 기대할수 없게 하였다는 사실을 매우 중시하시였다. 의병대오의 리념적, 의지적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한것은 유생출신의 의병장들과 평민출신의 의병장들사이에 존재한 리념상의 대립과 모순이 있었기때문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반일항쟁의 첫 봉화를 들고 8도강산을 주름잡던 의병의 대오는 상하일치를 이룩하지 못하고 분렬되여있었다. 왕조정치의 회복을 바라는 유생출신의 의병장들과 기성질서의 개혁을 부르짖는 평민출신의병들사이에는 심각한 리념상의 대립과 모순이 존재하고있었는데 이것은 의병의 전투력을 높일수 없게 하였다.

구제도의 복구를 절대리념으로 삼고있던 일부 의병장들은 정부로부터 관직을 받기 위해 전공을 다투는 싸움까지 하여 대오를 분렬시키였다.

평민출신의 의병장들은 유생출신의 의병장들과 련합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의병의 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빚어냈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357∼358페지)

주석께서 말씀하신바와 같이 의병대오에는 두가지 종류의 모순과 대립이 있었는데 하나는 상하일치를 이루지 못한것으로 하여 생기는 상하간의 대립과 모순이며 다른 한 종류의것은 유생출신의 의병장들과 평민출신의 의병장들사이에 있은 대립과 모순이였다.

을미의병단계에서는 《위정척사》, 《상소운동》의 흐름을 계승한 애국적유생을 지도층으로 하여 농민전쟁때의 농민군잔여세력을 기본세력으로 하여 투쟁이 전개되였으므로 이때에는 상하간의 대립과 모순만이 존재하였다.

의병투쟁의 다음단계인 을사의병에서는 농민대중을 기본세력으로 하고 또 유생지도층이 존재하면서도 평민의병장이 등장하는 특징을 지니게 되며 정미의병단계에서는 해산군인이 수많이 참군한것과 함께 평민의병장이 수없이 등장하는 특징을 가지게 되였다. 그러므로 후기 의병투쟁의 시기에서는 평민의병장과 유생출신의병장사이에 리념상의 대립과 모순이 큰 문제로 되였다. 유생출신의 의병장들은 구태의연한 리념적테두리안에서 표류하고있었으나 평민의병장들의 경우에는 봉건적수탈의 반대, 신분제도반대, 근대적교육운동 지지 등에서 반봉건적요구를 담은 새로운 리념적지향을 가지게 되였다.

대오안에 리념적, 의지적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상하통일이 없는 형편에서 의병의 전투력은 강화될수 없었고 그것은 전쟁의 결말에 영향을 주지 않을수 없었다. 대오안에 리념적인 대립과 모순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의병투쟁과정에서는 유생출신의병장들이 민족과 력사앞에 지닌 자기의 책임을 다할수 없다는것이 시간이 흐를수록 명백한것으로 되여갔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유생출신의병장들의 제한성이 그들의 서울총공격시기에 나타난 의병장 리린영의 태도를 통해 명백하게 드러났다고 보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나는 전에 아버지한테서 13도창의대장 리린영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었다.

이 사람이 13도창의대장으로 추천된 과정을 보면 아주 극적이고 교훈적인데가 있었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325페지)

관동의병장들이 리린영을 자기네 의병부대의 지도자로 추대하려고 찾아갔을 때 그는 림종직전에 이른 늙은 아버지의 곁에서 병시중을 들고있었다. 리린영은 그때 의병은 다른 사람이 지휘를 할수 있으나 부모는 한번 돌아가면 다시 만날수 없다,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늙은 아버지를 두고 내가 어떻게 감히 집을 떠난단 말인가, 나는 불효자가 되고싶지 않다고 하면서 그 청을 사양하였다. 그러다가 나흘째 되는 날에야 그들의 청을 받아들이였다.

전국의 의병들은 앞을 다투어 리린영의 휘하에 모여들었는데 경기도 양주에 집결한 그 수는 무려 8천명에 달하였다. 얼마후에는 허위, 리강년의 부대까지 합세하여 창의군의 력량은 8천명으로부터 1만명으로 불어났다. 소총으로 무장한 3천명의 구한국군도 이에 합류하였다.

전국의 의병장들은 리린영을 13도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그의 진두지휘에 따라 서울로 진격하였다. 선봉은 세검정에까지 육박하고있었다. 서울로 쳐들어가서 일거에 일제통감부를 격파하고 을사5조약을 페기하자는것이 의병의 목적이였다.

이 작전계획에 따라 서울진격이 한창일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기별을 받은 리린영은 지휘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홀연히 고향으로 내려가고말았다. 그의 귀향은 선발대로 나섰던 허위의 패전소식과 함께 의병의 사기를 저락시키고 부대를 와해에로 몰아넣는 비참한 결과를 빚어내게 하였다.

이 극적인 사건은 유생출신의병장의 제한성을 적라라하게 보여주게 되였다. 그렇다고 하여 유생출신의병장들이 의병투쟁에 참가한 그 애국적동기의 순수성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자는것이 아니다. 그들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강렬했고 굳은 애국적절개를 가지고있었다. 그러한 대표적인물로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의병장 최익현의 실례를 드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최익현은 대마도로 잡혀갔어도 원쑤들의 음식을 먹지 않고 단식으로 순국하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16페지)

그러나 유생출신의병장들은 그 애국심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사상적제한성으로 하여 민족대업을 이끌어나갈 지휘관으로 될수 없었다는것을 리린영사건을 통해서 보여주었던것이다.

사건은 봉건적가치관, 효를 기본범주로 하는 유교의 륜리관에 문제가 있다는것을 낱낱이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당시에도 그렇고 그후의 력사학자들의 평가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던것을 볼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리린영을 쓸개빠진 의병장이라고 비난하면서 1만명을 통솔하는 의병대장이라는 사람이 그것도 서울진공이라는 대업을 앞두고 부친상을 당했다고 집으로 돌아갔으니 그게 무슨 사나이이고 애국자인가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리린영을 두둔하기도 하였다. 부친상을 당한 사람이 집에 돌아가 상제의 구실을 하는거야 응당한 일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그를 변호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이 문제를 교훈적인 각도에서 분석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나라와 가정을 다같이 사랑하는 그런 사람이라야 참다운 효자라고 할수 있다. 가정만을 중시하고 나라의 환난을 경시한다면 그런 사람을 어찌 효자라고 부를수 있겠는가. 이제는 우리도 효성에 대한 유교적가치관을 바로잡을 때가 되였다. 리린영이 만일 자기 책임을 다하여 목적을 성취하고나서 부친의 묘소를 찾아 술이라도 붓고 분향재배하였다면 그의 이름은 후손들앞에서 더 빛을 냈을것이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326페지)

이것은 봉건적도덕과 유교적효성관에 대한 가장 정당한 비판이며 봉건적륜리관을 혁명적륜리관으로 전환시킬수 있게 하는 값높은 지침으로 된다. 사람이 혁명을 한다고 가정을 망각한다는것은 힘든 일이며 그것은 또 있을수도 없는 일이다. 혁명도 인간을 위한것인데 혁명가들이 자기 가정을 무시하거나 부모처자의 운명에 무심할수 없는것이다. 문제해결의 열쇠는 바로 가정의 행복과 나라의 운명을 하나로 련결시키고 행동해야 한다는것이 우리가 찾아야 할 교훈인것이다.

유생출신의병장들이 시간과 함께 자기의 제한성을 보여준 반면에 평민출신의병장들은 력사앞에서 자기 모습을 돋보이게 하였다. 평소에는 우민이라 하여 천대받고 오직 량반계급의 교양의 대상으로만 되여온 상민, 평민출신의 의병장들은 왜군과의 치렬한 전투의 나날에 크게 성장하였다. 그들속에서는 용감하고 재능있는 군사지휘관들이 수많이 배출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그러한 재능있는 군사지휘관의 대표적인물로 홍범도를 추억하시였다. 홍범도는 평민(포수)출신의병장으로서 의병투쟁기간과 초기독립군활동기간에 걸쳐서 활동하였고 혁혁한 전공으로서 많은 사람들을 경탄시키였다. 특히 1907년 후치령전투, 다음해의 갑산읍습격전투 등에서 커다란 전공을 세웠다. 1917년에는 북만에서 조선독립군을 조직하고 그 총사령이 되였으며 1920년에는 봉오골과 청산리전투에서 혁혁한 대승리를 거두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평민의병장으로서의 홍범도의 군사적지략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비판하시면서 그를 뛰여난 지략의 소유자로 높이 평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홍범도를 지략은 없이 요령으로만 싸우는 장군이라고 숙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리치에 닿지 않는 소리였다. 그들이 말하는 요령이라는것도 근본을 따지고보면 결국 지략의 소산인것이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3권, 243페지)

김일성주석께서는 전쟁에서는 전투대렬의 통일과 상하일치를 보장하는것이 중요할뿐아니라 무장을 잘 갖추는것이 또한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의병무장의 상대적인 혹심한 락후성을 실패하게 된 요인의 하나로 보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의병의 무장도 동학군보다는 별로 나은것이 없었다. 의병들에게도 얼마간 신식총이 있었지만 그 량은 한정되여있었고 대부분의 성원들은 도창무기가 아니면 화승대를 사용하였다. 의병투쟁을 화승대와 38식보총의 싸움이라고 력사가들이 말하는것도 이런 리유때문이라고 생각한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151페지)

총탄 한방을 쏠 때마다 매번 손으로 불을 붙이지 않으면 안되는 화승총으로 분당 10발이상씩 쏠수 있는 38식보총을 제압하려면 얼마나 간고한 싸움을 해야 하는가 하는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화승대의 성능이 아직 의병들만 아는 비밀로 남아있을 때까지는 일본군대가 화승대의 총성만 듣고도 겁에 질려 달아나군 하였는데 성능을 안 다음부터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우습게 여기게 되였으니 승부가 어떻게 끝났을것인가 하는것을 짐작할수 있다.

거기에다 량반도덕과 계률에 밝은 유생출신의 의병장들은 전투중에도 대관을 쓰고 싸움을 하였으니 그들은 장구나 군복차림에 있어서까지도 상대방보다 락후한 처지에 있었던것이다. 이런 의병들을 일본군은 대포와 기관총으로 짓뭉개놓았던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심중한 교훈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