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김일성주석과 반일민족해방투쟁사』 중에서  

 

제   1   장

19세기 후반기-20세기초의 반일민족해방투쟁사에 대한 평가 

4.  19세기 후반기 반침략반봉건투쟁에서 최고봉을 이룬 갑오농민전쟁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갑오농민전쟁에 대한 자신의 견해는 어리실 때 녹두장군에 대한 가정설화를 통해서 그가 농민전쟁의 주인공이며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절개를 굽히지 않은 용감무쌍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인상지어지게 되였다고 쓰시였다. 그리고 창덕학교시절에 이르러서는 녹두장군의 비극적인 최후를 통해서 조선의 국정을 도탄속에 몰아넣은 봉건조정의 사대주의와 무능력을 두고, 일청 두 나라의 야심과 내정간섭을 두고 치솟는 분노를 느끼시게 되였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나는 동학당란이야말로 근대 우리 나라 반침략반봉건투쟁의 력사를 빛나게 장식한 큰 사변이며 이 전쟁이 배출한 용사들이야말로 근대조선민족의 정치생활과 정신생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수리개들이라고 생각하였다. 갑오풍운의 총아 전봉준은 내 가슴속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한점의 불꽃으로 남아있게 되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5권, 379페지)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그후 주체사상을 창시하시고 주체적인 근대사관을 정립하시면서 갑오농민전쟁이 우리 나라 근대력사에서 차지하는 력사적지위를  과학적으로 밝히시고 농민전쟁사연구에서 나타났던 여러 문제에 대하여 심오한 해명을 주시였다.

주석께서는 조선근대사에서 갑신정변과 같은 우로부터의 변혁시도를 허무주의적으로 대하여서도 안되지만 밑으로부터의 혁명적변혁운동이 가지는 의의를 옳게 리해하는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지적하시였고 밑으로부터의 혁명적변혁운동의 대표적사례로 되는것이 갑오농민전쟁이라고 보시였다.

우로부터의 개혁운동이 세계사적보편성을 이루는 부르죠아적성격을 띤다는것은 결코 그 운동이 부르죠아민족운동의 주되는 흐름이라는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조선 근대변혁운동의 주류로 자리잡은것은 아래로부터의 변혁운동, 농민적변혁운동이다. 우로부터의 개혁운동에만 부르죠아변혁적의미를 부여하여 개명관료들의 개혁운동만을 부르죠아민족운동의 대표적흐름으로 간주하려는 경향은 마땅히 비판극복되여야 하는것이다. 밑으로부터의 혁명적변혁운동이 가지는 의의를 옳게 리해하여야 한다는것은 바로 그런 시각에서 문제를 고찰해야 함을 의미하는것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무엇보다도 갑오농민전쟁이 19세기 후반기의 조선력사에서 차지하는 지위에 대하여 지적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천도교사회에서 동학제1혁명이라고 부르는 갑오농민전쟁은 19세기 후반기 우리 인민의 반침략반봉건투쟁에서 그 규모에 있어서나 격렬성에 있어서 최고봉을 이룬 농민전쟁이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5권, 392페지)

갑오(1894)년의 농민투쟁을 농민전쟁으로 보는것은 가장 정확한 성격규정으로 된다. 그것은 그 투쟁이 종전에 보던 민란의 규모를 벗어나는 계급전쟁의 면모를 띠였을뿐아니라 봉건말기에 합법칙적으로 발생하는 농민들의 대규모적인 혁명적진출로 되기때문이다. 농민전쟁이라는 성격규정은 중세말기에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세계사적합법칙성을 밝혀주는것이다. 갑오농민전쟁은 이러한 합법칙성을 반영하는 투쟁이였을뿐아니라 조선의 특수성을 반영한 반침략반봉건투쟁으로서의 농민전쟁으로 된다. 갑오농민전쟁은 그 규모와 격렬성에 있어서 19세기 후반기 조선의 반침략반봉건투쟁에서 최고봉을 이루는 력사적사변이였다.

김일성주석께서는 그것이 19세기 후반기 조선의 부르죠아민족운동에서 최고봉을 장식한 투쟁이였을뿐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커다란 사변적의의를 가진다는것을 지적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갑오농민전쟁은 19세기 아세아 반제민족해방투쟁의 새벽종을 울린 하나의 력사적사변으로서 중국의 태평천국농민전쟁, 인도의 시파이폭동과 더불어 아세아 3대항전으로 특기할만 한것이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5권, 393페지)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갑오농민전쟁의 발생발전과정에 대하여서도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갑오농민전쟁은 천도교상층에 의하여 계획되거나 그의 지령에 따라 발발된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부패무능한 봉건특권층의 전횡, 야수적인 수탈에 분노한 농민들의 폭동이였고 반정부농민전쟁이였다. <제폭구민>, <척양척왜>, <보국안민>의 기치밑에 일어났던 갑오농민전쟁은 동학상층부와는 무관계하게 전봉준을 위시한 농민폭동지도자들에 의하여 개시되였다. 폭동지도자들은 자신이 속해있는 동학조직을 리용하여 각 지방의 동학포조직과의 련계밑에 고부농민폭동(고부민란)을 전면적인 농민전쟁으로 확대발전시켰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5권, 392∼393페지)

농민전쟁의 경위가 본질적으로 요약되고있는 이 함축된 서술을 통해서 농민전쟁연구에서 력사적으로 론의되고있던 문제를 과학적으로 밝힐수 있는 열쇠를 발견하게 된다.

첫째로, 농민전쟁이 19세기 90년대 중반의 내외정세, 주객관적조건으로 하여 폭발한 사변이 아니라 19세기 하반기이래의 농민폭동(민란)의 연장선에서 발발된 사변으로 보아야 한다는것이 명백히 되였다.

갑오농민전쟁의 바탕에는 우리 나라 농촌사회에서의 지주층과 농민층의 심각한 대립관계가 놓여있다. 그러한 대립관계는 리조말기에 이르러 지주제의 확대발전과 농업의 발달에 따라 사회가 지주, 부농, 소농, 빈농, 임금로동자라는 다양한 계층으로 재편성되는 가운데 형성된것이다. 또한  봉건적수취체제는 군, 현단위로 세금을 징수하는 총액제의 원리를 채택하고있었기때문에 그 부담은 직접적생산자인 농민에게 집중되였다. 특히 가난한 농민들의 몰락은 더욱 가속화되였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여러 계층은 지대, 조세, 임금 등을 둘러싸고 대립하게 되였다.

개항과 더불어 형성된 불평등무역구조는 농촌을 더욱 파괴시켰다. 소수 지주층은 대일쌀수출을 통하여 많은 리익을 얻어 토지를 사들였으나 다수 농민들은 자본주의적류통경제에 말려들어 궁박판매를 하지 않을수 없어 가난과 몰락의 길을 걸을수밖에 없었다.

이같은 배경속에서 1862년의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한 농민폭동이 일어나 이른바 《민란의 시대》를 열어놓게 되였다. 이 농민폭동은 봉건제의 위기가 심화되는 가운데 봉건적착취(삼정착취)가 강화되여 봉건적사회모순이 전면화되는 과정에 전국적규모에로 확대된 농민투쟁이였다. 지주제가 강화되면서 소유관계를 둘러싼 지주와 소작인간의 계급대립이 첨예화되고 상품화페경제의 농촌침투로 대다수의 농민이 빈농으로 몰락하고있던 상태에서 1862년 투쟁에서는 빈농층이 부농층의 통제에서 벗어나 구체적으로 반봉건항쟁을 벌리게 되는데 이러한 하층농민층의 성장은 우리 나라 반봉건농민운동사에서 한단계의 발전을 의미하는것이였다.

성장한 농민폭동은 개항이후에도 《민란의 시대》를 줄기차게 이어갔을뿐아니라 봉건지배층과 일본침략자에 대한 저항의식이 높아진 반봉건, 반침략투쟁으로 발전해나갔으며 마침내 농민전쟁에 흡수발전되여나가게 되는것이다.

둘째로, 오랜 쟁점으로 되여오던 농민전쟁과 동학과의 호상련관성문제가 명백히 밝혀지게 되였다.

갑오농민전쟁과 동학과는 불가분리적인 관련속에 있다.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갑오농민전쟁을 당시 표현대로 《동학당란》이라고 부르기도 할만큼 동학교도들이 대중적으로 투쟁에 참가한 사변이라고 가르치시였다. 그렇다고 하여 그것은 갑오농민전쟁이 동학상층에 의하여 계획되거나 그의 지령에 따라 발발되였다는것을 말하여주는것이 아니다.

동학상층은 폭동이나 전쟁과 같은 폭력일반에 대해서 찬성하지 않았다. 그들이 조직한 동학운동의 가장 높은 형태는 1893년 교조신원을 위한 보은취회였는데 이것은 동학의 합법성을 인정해줄것을 청원하는 평화적, 비폭력적 대중동원의 성격을 지니는것이였다. 보은취회에서 표현된 동학도들, 농민들의 반봉건, 반정부적지향을 농민폭동에로 이끌어낸것이 바로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폭동지지세력이였다. 그들은 보은취회에서 《보국안민》, 《척양척왜》의 구호를 내거는데로 인도했고 동학상층부와는 무관계하게 《제폭구민》, 《척양척왜》, 《보국안민》의 기치밑에 농민들, 동학도들을 폭동에로 조직동원하였던것이다.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폭동지도자들은 자신이 속해있는 동학포조직과의 련계밑에 남접산하의 농민들, 동학도들을 투쟁에로 조직동원함으로써 고부농민폭동을 전면적인 농민전쟁으로 확대발전시킬수 있게 되였다. 때문에 남접군이라고 불리우기도 하는 농민군은 북접조직을 장악하고있던 동학상층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출현한것이였다.

동학조직을 리용하여 농민군을 어렵지 않게 조직할수 있었던것은 농민들의 지향과 동학교리의 리념적지향이 동일한것이였기때문에 서로가 다같이 《제폭구민》, 《척양척왜》, 《보국안민》의 기치밑에 일체화될수 있었다.

때문에 갑오농민전쟁이 종교의 외피를 쓰고 진행되였다는 설은 정확한 표현이라고 볼수 없는것이다. 일제식민지하에서부터 일부 력사학자들속에서는 엥겔스의 《도이췰란드농민전쟁》에서 나오는 종교의 외피를 쓴 농민전쟁이였다는 지적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동학농민전쟁에 그대로 적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16세기의 도이췰란드농민전쟁은 종교개혁운동의 환경속에서 일어난것이였고 사람들의 생활에 종교가 깊이 침투되여있던 조건에서 농민들의 요구가 종교적외피를 통해서 표현되였었다. 그러나 갑오농민전쟁에서는 동학교리의 리념적지향성도 외피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표현되여있었고 농민들의 경우에도 그러한것이였다.

셋째로, 농민전쟁의 동력문제에 대한 과학적해답이 주어지게 되였다. 갑오농민전쟁이 봉건적인 전횡과 수탈을 반대하고 일본침략을 반대한 반봉건, 반침략투쟁으로서의 농민폭동이였고 농민전쟁이였다고 하는것은 농민전쟁이 농민대중의 투쟁으로 확대된것을 의미하는것이다.

남조선의 근대사학계에서는 상품화페경제의 확대에 따르는 농민층의 분화를 과도하게 중시하면서 농민전쟁주도층이 부농층의 리해관계를 대변하는 세력으로 보는 일부 견해가 발견되는데 그것은 농민전쟁의 주체세력에 대한 리해에서 편향을 범한것이 아닐수 없는것이다.

농민전쟁에는 농민을 비롯한 천민, 상인, 수공업자, 하급관리 등 기층민중이 주로 참가하였고 전쟁이 반침략적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였을 때에는 군인, 관리, 유생 등 지배계급에 속하는 일부 사람들까지도 합세하였지만 총체적으로는 농민일반이 투쟁주체로 되였다고 보아야 하는것이다.

이 시기에는 계급문제와 민족문제가 함께 결합되여있었으므로 그에 대응하는 투쟁의 주체는 농민일수밖에 없는것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농민전쟁이 실패한 원인들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시였다.

주석께서는 농민전쟁이 민족위기의 시기에 진행되였음에도 불구하고 애국력량의 단합을 이룩해내지 못한것을 매우 가슴아파하시면서 거기에서 실패의 중요한 원인을 찾으시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농민군자체의 단합과 행동통일을 실현하지 못한것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단결하여 싸워야 승리하고 단결하지 못하고 사분오렬되면 조국의 광복도 이룰수 없고 백전백패한다는것은 력사가 우리에게 가르치고있는 쓰라린 교훈이다, 만일 갑오농민전쟁의 최전성기에 호서지방의 북접군을 총지휘하고있던 최시형이 호남의 남접군을 지휘한 전봉준의 련합제기를 제때에 받아들이고 서울진격을 방해해나서지 않았더라면 력사는 얼마간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동학당란이 실패로 끝난 주요한 원인의 하나는 각지, 각계의 모든 애국력량이 일치단결하여 싸우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제멋대로 싸웠다는데 있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5권, 361페지)

농민전쟁의 최전성기에 남접군, 북접군의 농민군력량은 전체적으로 수십만을 헤아리고있었다. 이들이 일치단결하여 서울로 진격했다면 승리는 의심할바없이 농민군측에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력량을 단합하여 서울로 쳐들어갈데 대한 전봉준의 제의는 동학상층부의 최시형에 의하여 즉각적인 호응을 받지 못하고 시간을 지연시키게 되였으며 이로 하여 일본군은 청나라군과의 전투에서 국면을 호전시키고 농민전쟁에 무력으로 개입할수 있는 시간적여유를 가지게 되였던것이다.

그래서 《거병입경, 진멸권귀》의 목적이 조기에 달성되지 못하였을뿐아니라 서울로 향한 농민군은 완전준비를 끝내고 대기하고있는 일본군의 총구아래에 들어가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지난날 수천수만명을 헤아리는 전봉준의 동학군은 우금치라는 고개에서 천명의 일본군을 당해내지 못해 지리멸렬되였다. 그때 일본군은 신식총으로 무장하고있었다. 동학군은 100명이  한놈씩만 제껴도 공주를 치고 서울까지 내처 달려갈수 있는 유리한 형세였는데 무장이 약하고 군세가 약하여 참패하고말았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151페지)

또한 민족적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전쟁에는 전체 민족성원 누구나가 외세와의 투쟁에 합세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부내의 개명관료집단은 보수량반세력 및 외세와 합세하여 농민군을 적대하는데로 나가게 되였다. 그리하여 조선을 위하여 비록 사상은 다르지만 함께 손잡고 싸우자고 한 전봉준의 관군에 대한 호소는 물거품이 되고말았다.

조국의 산야를 피로 적신 갑오농민전쟁이 보여주는 핵심적인 교훈은 민족이 단합하지 않고서는 난국을 타개할수 없다는것이다. 갑오농민전쟁이 실패한것은 객관적으로는 일, 청 량국의 개입으로 인한 외세의 간섭이 류혈적무장탄압에로 이어진데 있었으나 주되는 실패요인은 항쟁력량의 총단합이 이루어지지 못한데 있었던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