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김일성주석과 반일민족해방투쟁사』 중에서  

 

제   1   장

19세기 후반기-20세기초의 반일민족해방투쟁사에 대한 평가

3. 갑신정변의 력사적지위

앞에서 이야기된것처럼 조선부르죠아민족운동은 특수한 조건에서 진행된것으로 하여 그 과정은 반봉건과제와 반침략과제를 다같이 해결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되였다. 이와 련결되면서 운동은 밑으로부터의 대중적변혁운동과 함께 우로부터의 부르죠아개혁운동이 다같이 조선적특성을 띤 흐름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특성으로 하여 조선에서의 근대에로의 이행과정은 유럽이나 기타 지역에서 찾아볼수 없는 복잡성을 안게 되였고 부르죠아개혁운동으로서의 1884년 갑신정변의 경우에도 례외로 될수 없었다.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에서 력사적으로 형성된 기본쟁점은 그 자률성문제를 둘러싸고 생겨났다.

과거 식민사관에서는 갑신정변의 기본성격을 자률성에 기초하는 변혁운동이 아니라 외적(일본의 영향과 지도에 의한)인 영향의 산물로서 평가되고있었다. 이것은 의심할바 없는 제국주의적력사외곡이 아닐수 없었다.

8.15후 이같은 식민사관적관점은 극복하였으나 공화국북반부의 근대사학계에서는 개혁운동의 자률성과 개화파가 일본인들과 손을 잡았던 련관성문제를 대치시킴으로써 공화국의 력사학자들도 갑신정변에 대한 그릇된 평가를 하고있었다.

일찍부터 갑신정변의 력사적지위의 중요성을 헤아리고계시던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민족주체적시각에서 이 문제를 과학적으로 해결할수 있는 방법론을 명확히 제시하여주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해방후 우리 나라 학계에서도 오래동안 김옥균에게 친일파라는 딱지를 붙이였다. 그가 정변준비과정에 일본사람들의 도움을 받은것이 친일의 표적으로 되였다. 우리는 이것을 공정한 평가라고 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력사학자들에게 김옥균의 개혁운동에서 인민대중과의 결합에 주의를 돌리지 않은것은 물론 잘못이다, 그렇지만 일본의 힘에 의거하였다고 그것을 친일로 평가하면 허무주의에 떨어진다, 그가 일본의 힘을 리용한것은 친일적인 개혁을 단행하자는데 목적이 있은것이 아니고 당시의 력량관계를 면밀히 타산한데 기초하여 그것을 개화당의 편에 유리하게 전환시키자는데 있은것이다,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전술이였다고 말해주었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24페지)

주석께서는 개화파가 가졌던 일본인들과의 련계문제를 당시의 정치적력량관계를 개화파에 유리하게 전환시키려는 불가피한 전술적문제이라고 가르치시였다. 즉 개혁의 길을 차단하려는 봉건정부내의 수구파와 그 배후에 서있는 청나라세력을 견제하고 개화파의 정변계획을 성사시키는데 유리하게 력량관계를 조정하려는데 그 련계의 목적이 있었던것이다.

력사적사실은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가 우리 나라를 일본의 위성국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주독립적인 근대적국가체계를 세우기 위하여 정변을 단행하였다는것을 너무도 명백히 보여주고있는것이다.

우로부터의 부르죠아혁명운동의 시초로서의 갑신정변은 조선사회발전의 합법칙적과정이였고 세계사의 보편적흐름이 조선의 부르죠아민족운동사에도 그대로 흘러들고있음을 보여주는 사변이였다.

갑신정변이 김옥균 등 혁신관료출신의 개화파를 중심으로 개화자강을 내세우고 진행한 우로부터의 근대부르죠아혁명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데 대해 규정한것은 이 분야에서의 력사에 대한 완전한 재평가이다.

정변시기에 발표된 개화파의 14개 조 개혁강령은 자주독립, 신분평등, 경제개혁(지조법개혁, 환곡제페지, 국가재정의 일원적관리, 보부상제도의 페지), 정치개혁(내각회의에 의한 정령의 의결), 문화개혁(규장각 등 특권문화기관의 혁파)에 대한 지향성을 보여주었다. 정강은 혁신적봉건관료들의 시각에서 작성된 개혁정강이라는 제한성을 가지지만 봉건적국가제도에서 근대자본주의국가나 사회제도로 이행할수 있는 가능성을 내다본것이였다.

갑신정변에 대한 재평가에서는 그 부르죠아변혁적성격과 함께 자주독립적성격이 강조되였다. 그것은 19세기 80년대 개화사상의 성격과 그 실현방도에서 자주독립을 일관하게 강조하고 앞세우고있는 력사적사실자체에 대한 과학적분석에 기초한것이다.

그러나 남조선학계에서 지난날 적지 않은 연구자들이 갑신정변의 성격을 론의하는데서 일본의 문명개화론, 청의 양무개화론과 변법변혁론의 영향에 대해서 강조하고있는것을 볼수 있는데 그런 견해는 아직 연구가 피상적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데서 오는것이다.

일본의 문명개화론은 이미 침략자의 위치에 서게 된 일본의 립지를 반영하는것이였고 청의 양무개화론이나 변법변혁론은 민족적위기가 우리 나라보다 심각하지 않은 단계에서 제기된것이였다. 그러므로 일본의 그것은 근대화로 가리워진 침략의 론리였고 청의 그것들은 반침략자주독립의 문제보다 근대화가 우선시되는 립장에서 출발하는것이였다. 그렇지만 우리 나라의 개화세력은 자주독립을 저변에 깔면서 반침략과 반봉건을 결합시킨 립장에서 출발한것이며 바로 여기에 개화파정변의 자주독립적성격이 강하게 부각되는 근거가 있는것이다.

갑신정변의 준비와 실천시기에는 개혁의 방법문제에 관해서 개화세력모두가 김옥균의 립장에 동조한것은 아니였다. 때문에 개화파세력내에서는 소위 온건개혁파와 급진개혁파가 갈라지지만 두파가 다 민족자주적, 자주독립적지향성을 갖고있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는것이였다. 그렇기때문에 후일 주로 온건개혁파가 주도하게 되는 갑오개혁 역시 민족자주적성격을 가지게 되는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교시하신바와 같이 갑신정변이 인민대중과 유리되고있었던것은 그것이 가지는 기본적인 한계점이였다. 그때문에 근대부르죠아혁명은 혁명이 아니라 개혁으로 나타나게 되였던것이다. 부르죠아개혁운동은 부르죠아혁명과는 기본적으로 구별되는 개념이다. 그것은 부르죠아지의 권력획득이 아니라 봉건지배층 내부의 개명적, 혁신적관료들의 권력획득을 위한것이고 국가를 매개로 추진된 위기로부터의 자본주의화의 길(아래로부터의 혁명의 길과는 구별되는)에서 일어난 개혁이기때문이다.

이러한 성격의 변혁이 일어나게 된것은 자본주의의 자생적발전을 억제하는 자본주의세계체계의 형성이라는 세계사적조건하에서, 또 당시의 사회경제적조건에서 부르죠아적권력획득조건의 성숙이 미약했기때문에 부르죠아지와 근로대중이 련합세력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부르죠아적세력을 대변하는 세력으로서의 개화파가 주체가 되여 변혁이 진행된 사정과 관련되는것이다.

근로대중과는 유리된 봉건정부안의 개명관료세력이 주체가 되여있었으므로 갑신정변에서는 봉건적토지소유관계의 근원적철페를 외면하고 지주제를 보존하는 기초우에서 자본주의화를 지향했던것은 당연한 론리였다. 여기에서 개화사상과 갑신정변의 기본적인 계급적제한성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 제한성을 확대평가하여 정변이 지니는 부르죠아적성격, 자률적성격을 축소시키거나 부정하는데로 나아가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세계사적으로 보아도 자본주의발전에서 이러한 현상은 근대에로의 이행과정에서 하나의 류형을 이루기때문이다.

갑신정변의 주체세력이 근로대중을 등지고있었던것은 또한 정변이 3일천하로 끝나게 되는 내적원인으로 되였으며 이로써 우리 나라에서의 부르죠아개혁운동으로서의 갑신정변은 실패한 운동으로서 력사에 기록되게 되였다.

그러나 부르죠아개혁운동은 조선력사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생겨나는것이므로 그것은 청일전쟁을 계기로 수구파정권이 무너진 환경에서 갑오개혁으로 다시 나타나게 된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갑오개혁후 을사조약이 조작되기까지의 10년남짓한 기간은 우리 나라에서 내정개혁의 파도가 일어난 시기로서 특징지으시였다.

이 가르치심에는 두가지 의미가 포함되여있다고 볼수 있다. 첫째는 1890년대 중반으로부터 1900년대 중반에 이르는 내정개혁에서 갑오개혁이 출발점으로 되여있다는 사상이고 둘째는 남조선근대사학계에서 매우 중시하는 광무개혁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이 두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조선에서의 우로부터의 부르죠아개혁운동의 후속과정을 검토해보아야 할것이다.

갑오(1894년)개혁에 대한 평가문제에 있어서는 갑신정변보다 더 복잡한 면이 있다.

오늘 공화국북반부의 력사학계에서는 갑오개혁이 외적요인에 의한것이 아니라 자률적요인에 의한것이라는것이 연구자들의 일반적견해로 되고있다. 이러한 공화국의 력사학계의 주체적 재평가는 역시 근대부르죠아개혁운동의 자률성에 관한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의 주체적평가에 기초하여 이루어진것이다.

갑오개혁을 주도한 주체세력은 군국기무처를 기본으로 한 개화세력의 혁신정권이였고 그것은 근대적개혁을 목적으로 한 진보적정권이였고 개화활동의 력사적축적에 의하여 수립된것이였다. 하지만 이 정권의 본질적약점은 자생적자본주의발달이 정체된것으로 하여 자본가계급의 강력한 정치경제적지지에 의거할수 없었던 점, 외세(일본)가 침입한 조건에서 개혁사업을 추진할수밖에 없었던 점, 농민군과 동맹하지 못하고 오히려 《란민》으로 몰아 탄압한 점, 사회개혁의 여러 고리중 규정적의의를 교육과 법에만 집착함으로써 개혁의 성과를 고수할수 없었다는 점 등이였다.

개혁을 위한 조치들은 사회발전의 합법칙적요구와 반제반봉건투쟁에 나선 농민의 지향을 반영한 근대적, 부르죠아적개혁으로서 그것이 가지는 근대적성격은 봉건관료기구가 근대적류형의 국가기구로 개편되였다는 점, 전제군주제를 대변한 정치체제는 도이췰란드, 일본의 립헌군주제에 비해 보다 발전된것이라는 점, 각종 봉건적차별제도들을 청산하고 사회생활의 근대화를 위한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점, 경제분야에서 자본주의적관계의 발전을 촉진시켰다는 점 등에서 찾아볼수 있다.

그러나 이 개혁은 농민군의 페정개혁요구를 적지 않게 반영하였지만 근본문제인 토지문제의 혁명적해결을 위한 어떤 내용도 담지 못하여 농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계급적제한성 즉 지주제를 중심으로 한 본래의 봉건제도에 내포된 모순을 해결함이 없이 이를 근대적농업체제로 전화시키려고 한 제한성을 가지며 봉건제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못하여 근대적개혁으로서의 미숙성과 불철저성을 면할수 없는 제한성을 가지는것이였다. 이에 편승하여 일본의 로골적개입이 진행됨으로써 군국기무처는 해산되고 친일내각이 서게 됨으로써 개혁의 자주적성격은 이때로부터 무산되게 되였다.

개혁조치의 성격을 옳게 리해하기 위하여 중요한것은 그 진보성에 대한 축소해석과 제한성에 대한 확대해석을 경계하는것이다. 례컨대 개혁이 일본점령하에서 진행되였다는 점만을 과대평가하고 청일전쟁으로 조성된 민족적위기라는 최악의 조건을 자주적사회변혁을 위한 하나의 기회로 삼으려고 한 개화파의 적극적의의를 보지 못하는 경향, 조세의 금납화조치가 미곡의 상품화를 촉진시켜 곡물의 대외류출을 강화하였다고 하거나 새 화페제도의 도입과정에서 외국화페의 통용을 인정한것은 일본의 금융지배를 초래케 했다거나 그밖의 차관도입시도 등을 통해 조선경제의 대일종속화를 심화시켰다는 결과론적인 확대해석은 금납화와 화페제도개혁, 도량형의 통일과 같은것이 조선후기이래 우리 사회의 내적발전속에서 추구해온 합법칙적력사발전의 결과이며 개혁의 구조와 내용에서 근대국가를 건설하고 토착부르죠아지를 육성하기 위한 일관성있는 근대적성격의 노력이였다는 점을 전혀 무시하는것으로 되는것이다. 김홍집 등 혁신관료들의 제한성은 어디까지나 철저히 비판되여야 하지만 그것으로 개혁의 진보성까지 외곡시켜서는 안되는것이다.

김일성주석께서 내정개혁문제에 언급하시면서도 갑오개혁과는 달리 광무개혁에 대하여 평가를 주시지 않은데는 깊은 뜻이 담겨져있다고 보아야  한다.

1897년에 시작된 광무개혁은 나라의 독립을 표방하고 황제권을 확립하였으나 이 외견상의 변화만을 보고서는 광무개혁이 독립국가의 체모를 실질적으로 갖추는 내정개혁으로 된다고 볼수 없는것이다.

황제권은 민권을 요구하는 근로대중의 지향을 탄압하고 전제주의적, 절대주의적체제를 강화하였고 농민군이 제기하였던 요구를 묵살하고 이른바 《구본신참》의 명색하에 지주제를 강화하여나갔다.

광무개혁의 시기로 말하면 3국간섭이후 조선반도를 둘러싼 침략렬강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진 상태에 있었으므로 자주독립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식민지화의 위험으로부터 조국을 구원할 기회로 삼아야 했었다. 그러나 통치층은 침략의 마수를 뻗치고있는 렬강들을 제각기 등에 업고 친일파, 친로파, 친미파 등으로 탈바꿈하여 나라와 민족의 리익을 팔아먹기에 여념이 없었다.

개항이후에 외국상품의 범람으로 파탄일로를 걷고있던 나라의 경제를 추켜세우기 위하여 무제한한 문호개방정책을 지향하고 보호무역주의를 엄격히 실시하고 민족자본성장을 위한 조건들을 지어주어야 하였다. 파탄된 경제를 수습하고 경제의 자본주의화를 지향한다고 하면서 식산흥업정책이 실시되였으나 관료자본, 상업자본의 일부 집중을 가져오고 기술도입에 기초한 공장이 일부 생겨났을뿐 경제전반은 외래자본주의침략의 압력으로 발전의 가능성을 상실하고말았다. 거기에다 군주권은 외세와의 관계에서 타협, 의존, 투항하면서 나라의 자원과 각종 리권을 외국인에게 팔아먹어 외국투자만이 성행하고 민족자본성장의 길은 봉쇄되고말았다.

그리하여 일제가 로일전쟁을 도발하고 강점야욕을 로골화하였을 때 거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할수 있는 아무런 힘도 못 가지게 되였다.

조선의 이러한 종속화과정을 두고 결코 근대화과정이라고 말할수 없다. 근대화지상주의에 빠진 사람만이 그렇게 말할수 있는것이다.

광무개혁을 두고 그것을 갑신정변에서 시작된 근대변혁운동의 론리적귀결로, 우리 나라에서 근대화의 시대를 펼쳐놓은 력사적과정으로 과대평가하는 경향은 마땅히 시정되여야 한다.

김일성주석께서 광무개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내세우지 않으신것도 그 개혁에서 자률성이 결여되고있는 본질적제한성과 관련되는것이라고 할수 있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