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선군의 어버이 김일성장군(2)중에서
 

 

  

 흔히 사람들은 불과 불이 오가는 전장에서는 오직 무자비한 파괴와 증오, 랭혹성만이 있을뿐이라고 생각해왔으며 그것을 불가피한것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숭고한 인덕의 화신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믿음으로 동서고금의 전쟁사에 일찌기 그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사랑과 믿음의 력사를 수놓아가시였다.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남조선의 애국적정계인사들에게 안겨주신 믿음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그이의 고매한 풍모를 보여주는 수많은 이야기들중의 하나로 오늘도 민족의 가슴속에 사랑의 전설로 전해지고있다.

전략적인 일시적후퇴가 시작될무렵 서울에는 수십명에 달하는 남조선의 애국적정계인사들이 있었다. 그들로 말하면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을 높이 받들어모시고 그이의 뜻을 따르는것이 민족을 위한 길, 통일애국의 길이라는것을 깨닫고 련공애국의 길을 걸어온 애국적인사들로서 그 대부분이 이전에 남조선의 정계와 군부 등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였다. 이들은 인민군대에 의하여 서울을 비롯한 남반부의 여러 지역이 해방되자 남조선 《정치인 및 국회의원협의회》라는 조직을 뭇고 방송과 신문을 통해 미제와 그 앞잡이들을 규탄하는 성명서, 담화, 호소문 등을 발표하면서 애국적활동을 벌려왔다.

그러나 조국앞에 닥친 준엄한 시련으로 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되였다.

북으로 갈것인가, 아니면 그냥 서울에 남을것인가.

이 인생의 갈림길에서 그들모두는 북으로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것은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을 따라 련공애국에로의 인생전환을 한 그들스스로가 내린 결심이였다. 이에 따라 남조선의 애국적정계인사들은 북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 남조선의 애국적정계인사들의 신변안전에 대하여 깊이 마음써오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이들의 후퇴사업을 직접 조직해주시고 최대의 관심과 배려를 다 돌려주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주체39(1950)년 9월 17일 해당 부문 일군들에게 남조선의 애국적정계인사들의 입북을 안전하게 보장할데 대한 지시를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현재 서울에 있는 남조선의 이름있는 여러 애국적정계인사들이 우리 공화국정부를 지지하여 평양에 들어올 의사를 표명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이 소망대로 평양에 무사히 들어오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미군병력이 인천에 상륙함으로써 서울일대에 위험한 정세가 조성되고 거기에 있는 남조선애국적정계인사들의 신변이 위태롭게 되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남조선정계인사들을 그대로 방임해둔다면 그들이 적들에게서 박해를 받고 참살당할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 그들을 구원하고 보호해주어야 합니다.》

계속하시여 그이께서는 서울에 있는 남조선의 애국적정계인사들이 비록 우리와 정견은 다르지만 그들의 민족적량심과 애국적지조를 소중히 여기고있다고 하시면서 지난날 반공일선에 섰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오늘 나라와 민족을 위한 애국의 길에 나선다면 과거를 불문하고 손잡고나가자는것이 우리의 일관한 립장이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그이께서는 내무성에서 입북하는 남조선정계인사들의 신변안전을 철저히 보장하며 그들이 평양으로 들어올 때 김규식, 조소앙, 안재홍선생과 같은 이름있는 정치인들과 년로한분들은 다 고급승용차를 리용하도록 할데 대한 문제, 자동차에 위장을 잘하고 밤에 떠나게 하며 예비자동차도 준비할데 대한 문제, 남조선정계인사들에 대한 환영사업을 잘 조직할데 대한 문제를 비롯하여 세부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해당 부문 일군으로부터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어린 말씀과 그이께서 취해주신 은정어린 조치에 대하여 알게 된 남조선의 애국적정계인사들은 한없는 격정과 환희에 휩싸였다.

그들모두는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의 입북구원조치에 눈시울을 적시면서 이구동성으로 마음속격정을 터뜨렸다.

김일성장군님 계시는 평양으로 갑시다. 입북해야 우리들은 구원될수 있소.》

드디여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엄항섭, 최동오, 오하영, 송호성을 비롯한 남조선의 애국적정계인사들은 승용차 5대, 군용자동차 2대에 나누어 타고 서울을 출발하였다. 후위에는 승용차 1대와 자동차 1대로 예비차까지 세웠다.

이렇게 남조선의 애국적정계인사들은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을 따르는 길에 민족의 번영과 개개 인생의 참된 가치가 있다는 정치적신념, 입북만이 살길이라는 스스로의 자각과 판단으로 북행의 길에 올랐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취해주신 세심한 조치가 없었더라면 그들은 며칠을 못 가 미제와 그 앞잡이들에게 체포, 투옥되여 고문, 학살되였을것이였다. 실지로 미제와 그 앞잡이들은 서울에 다시 기여든 9월 28일부터 그 이듬해 1월 4일까지의 기간에만도 이른바 《부역자처단법》(인민군대를 환영하고 협조한 애국자들을 《부역자》로 몰아 학살한 파쑈악법)에 몰아 무려 7만 2 390여명의 애국자들과 무고한 인민들을 고문학살하였던것이다.

정녕 위대한 수령님께서 취해주신 조치는 온갖 위험으로부터 남조선의 애국적정계인사들을 구원한 사랑의 손길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장풍, 토산, 수안 등 북행길의 로정마다에서 남조선의 애국적정계인사들을 따뜻이 맞아들이도록 하시였으며 일행이 무사히 평양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안전한 곳에 그들의 거처를 정하도록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 안긴 남조선의 애국적정계인사들은 활기에 넘쳐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들가운데는 이러저러한 생각으로 심중이 복잡한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전 《민정장관》 안재홍, 그리스도교목사 오하영, 전《국방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을 비롯한 인사들과 황윤호, 김병회 등 《소장파국회의원》들은 이제 위대한 수령님께서 남북련석회의에도 참가하지 않은 자기들을 어떻게 대해주실것인가 하는 위구심으로 가슴을 바재이고있었고 조선전쟁을 도발한 미제와 그 앞잡이들과 결별하고 서울에 남아 북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도 반신반의하던 2대《국회의원》들은 《오로지 김일성장군님의 관대하신 은총만을 믿을뿐이요.》라고 하면서 대세를 관망하는 태도를 숨기지 못하고있었다.

그렇지만 이 모든것은 헛된 위구였고 공연한 걱정이였다.

애국과 매국을 판가리하는 전쟁마당에서 용약 애국의 편, 민족의 편, 자주의 편으로 넘어온 이들의 소행을 귀중히 여겨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사소한 차별이나 간격도 둠이 없이 그들모두를 사랑의 한품에 안으시고 전시의 그 어려운 조건에서도 최대의 사랑과 은정을 다 돌려주시였던것이다.

그들이 위대한 수령님의 위인적풍모에 대하여 더더욱 절감한것은 그해 추석명절날이였다.

이날 그들은 뜻밖에도 추석명절연회상을 받아안게 되였다. 전선지휘로 바쁘신 나날을 보내고계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외지에서 추석명절을 맞는 그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해주신 이채롭고 풍성한 연회상이였다.

연회상을 마주한 남조선의 애국적정계인사들은 그이의 거듭되는 사랑에 너무도 격정이 북받쳐올라 목이 꽉 메여 창밖의 먼 하늘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하늘중천에 떠오른 쟁반같은 보름달, 타향살이인생들에게는 뇌리에 박힌 향수까지 다 불러낸다는 8월추석의 보름달이건만 이 시각 남조선의 애국적정계인사들이 바라본 평양의 추석보름달은 애틋한 향수가 아니라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경모와 고마움의 감정만을 불러일으켰다.

이날 남조선의 애국적정계인사들은 위대한 김일성장군님만을 따르는 길이 자기들이 나아갈 길, 재생의 길이며 북으로 들어온것이 천만번 옳았다는것을 더욱 굳게 확신하였으며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을 더 잘 받들어나감으로써 전쟁의 승리와 나라의 통일독립에 이바지할 결의들을 표명하였다.

이렇듯 공화국의 품속에 안겨 보람찬 생활을 누려오던 남조선의 애국적정계인사들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취해주신 조치에 따라 평양을 떠나 후방의 안전한 지대로 거처를 옮기게 되였다. 전선형편이 점점 긴장해졌던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때에도 이들의 후퇴정형에 대하여 일일이 료해하시고 온갖 대책을 다 세워주시였으며 그들이 타고가던 자동차가 적기의 사격으로 불타버렸을 때에는 전용렬차까지 보내주시였다.

그리하여 일행은 개천, 희천, 전천, 별하, 강계를 거쳐 만포까지 무사히 도착하였다.

만포역으로부터 10리쯤 떨어진 곳에 고개리라는 고장이 있었는데 여기가 남조선인사들이 생활할 곳이였다. 이곳은 기차굴을 가까이 하고있어 공습대피에 대단히 유리하고 산세 또한 수려한 아담한 마을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처럼 포성도 들리지 않고 경치도 좋은 고장에 남조선의 애국적정계인사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해주시고도 사소한 불편이라도 있을세라 친어버이심정으로 그들의 생활을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고급양복과 양단이부자리를 비롯한 여러가지 생활필수품들도 보내주시였으며 년로한분들에게는 바지저고리가 더 편하다고 하시며 조선옷일식을 만들어 보내주시였다.

뿐만아니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의 건강에 대하여 늘 마음쓰시면서 주실수 있는 온갖 사랑을 다 부어주시였다.

남조선의 애국인사 김규식선생이 받아안은 사랑은 그 하나의 실례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오래전부터 고질적인 신병으로 고생하고있다는것을 헤아리시여 그에게 전문의료일군까지 붙여주시고 산삼과 록용을 비롯한 귀중한 보약재들과 식료품까지 별도로 보내주시였다. 그러시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여 특별병원 원장에게 그의 치료를 잘할데 대하여 간곡한 당부까지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로부터 며칠후인 주체39(1950)년 11월 1일 김책부수상을 찾으시여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김규식선생은 비록 고령이지만 나라의 통일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여야 할분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건강한 몸으로 조국통일을 위한 애국성업에 크게 이바지할수 있도록 치료를 잘해주어야 합니다.》

그이께서는 특별병원 원장에게 지시하여 김규식선생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치료대책을 철저히 세우며 선생의 건강과 장수에 좋은 여러가지 보약과 필요한 약품들을 다 써보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하시면서 김규식선생의 숙식과 생활전반에 깊은 관심을 돌려 그가 사소한 불편도 없이 지내도록 할데 대한 사랑의 말씀을 하시고나서 다음과 같이 계속하시였다.  

《김규식선생뿐아니라 자강도에 와있는 남조선정계인사들의 생활에 대해서도 관심을 돌려야 합니다.》

그후 김규식선생은 그이의 은정어린 조치에 의하여 만포에 있는 적십자병원에 입원하여 집중치료를 받게 되였다.

그이의 한량없는 은정에 끝없이 감복한 김규식선생은 어느날 아침 일찌기 일어나 소복차림으로 붓을 잡더니 심중의 격정을 터쳐 이런 시 한수를 지었다.

오호라!

위대하도다 현명하도다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

이내 인생을 구원해주셨소

이 한몸 죽은들 천만년 잊을손가

자애깊으신 김일성장군님!

이렇게 공화국의 품에 안겨 새 삶을 누리던 선생은 불치의 병으로 하여 애석하게도 세상을 떠나게 되였다.

이 사실을 보고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못내 슬픔을 금치 못해하시면서 김규식선생은 나라의 통일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한분이라고, 자기의 지조를 굽히지 않은 량심적인 민주인사이라고 뜨겁게 추억하시였다. 그러시고 그의 사망에 대한 부고도 내고 추도식을 잘해주도록 하시였다.

그이의 크나큰 사랑과 은정에 의하여 전쟁의 어려운 시기였지만 김규식선생의 장례식은 각계 일군들과 수많은 조객들의 참가하에 엄숙히 진행되였으며 그는 조국과 민족이 잊지 않는 애국지사, 애국렬사로 영생의 높은 언덕우에 오르게 되였다.

김규식선생이 받아안은 이 값높은 삶, 이것이 어찌 그 한사람만이 누린 삶이였겠는가.

이것은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 안긴 남조선의 애국적정계인사모두가 받아안은 복받은 삶이였다.

하기에 남조선인사 조소앙은 《미제를 비롯한 16개국 무력침략자들을 상대로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판가리하는 준엄한 전쟁의 중하를 한몸에 지니신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우리 입북인사 몇사람을 위해 이처럼 세심한 관심을 돌려주시니 그 한없이 넓은 도량과 따사로운 포옹력앞에 그저 숙연히 머리숙여질뿐이요. 진정 우리는 은혜로운 태양의 품에 안겼소.》라고 자기의 흥분된 심정을 토로하였던것이다.

실로 위대한 수령님의 품은 조선민족모두가 안겨살아야 할 은혜로운 태양의 품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