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김일성주석과 반일민족해방투쟁사』 중에서  

 

제   1   장

19세기 후반기-20세기초의 반일민족해방투쟁사에 대한 평가

1. 민족주의의 등장

반일민족해방투쟁사의 첫 시기인 19세기 후반기-20세기초의 력사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 탄생하시기 이전시기까지의 기간을 포괄한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이 시기의 력사에 대한 자신의 조예는 혁명적가정에서 성장하시면서 터득하신것과 우리 나라 근대사의 력사적경험에 기초하여 혁명지도에서 나서는 제 문제를 연구하셔야 할 필요로부터 터득하신바를 통해서 생기게 되였다고 말씀하시였다.

김일성주석께서 회고록에서 다루신 이 시기의 력사적사변들에 대한 서술과 평가는 민족과 더불어 흘러온 이 시기의 력사에 대한 참으로 생동한 화폭들에 기초한것으로서 우리 조선근대사학계가 지침으로 삼아야 할 귀중한 과학적결론들로 빛나고있음으로 찾아보게 된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의 조선근대사는 부르죠아민족운동이 진행되는 시기의 력사로 알려져있다. 회고록에서도 역시 이 시기를 부르죠아민족운동시기로 규정하고있는것을 볼수 있다.

부르죠아민족운동이란 민족주의의 리념적영향하에 진행된 민족운동이다. 그러므로 부르죠아민족운동시기의 력사를 바로 리해하기 위해서는 민족주의성립의 력사에 대한 옳바른 리해가 선행되여야 하는데 회고록에서는 조선에서 민족주의가 어떤 특징을 지니고 형성되였으며 그 시기는 언제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과학적인 해답을 주고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민족주의에 대한 자신의 견해는 우리 식의 독자적인 해석에 그 기초를 두고있었다는것을 전제하시면서 조선의 민족주의사상의 기본성격과 특징에 대해서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우리는 민족주의를 민족해방투쟁무대에 맨 처음으로 등장한 하나의 애국적인 사조로 보았다.

원래 민족주의는 민족의 리익을 옹호하는 진보적인 사상으로서 발생하였다.

몰락의 비탈길을 굴러내려가고있던 왕조정치의 심연속에서 내우외환이 거듭되고 외세의 강요에 의한 개국의 진통으로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하였을 때 개화의 등불을 들고 <자주독립>, <보국안민>, <척양척왜>를 부르짖으며 력사무대에 태여난것이 바로 민족주의라고 말할수 있다. 민족의 자주권이 외부세력에 의해 참혹하게 짓밟히고 국토가 리권쟁탈을 위한 렬강들의 각축장으로 변하고있을 때 민족의 리익을 옹호하는 사조가 등장하여 대중의 지도사상으로 된것은 력사발전법칙에 부합되는 필연적인 현상이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317∼318페지)

주석께서 하신 이 말씀에는 민족주의의 성격적특징에 대한 몇가지의 중요한 사상이 함축되여있다.

첫째로, 조선에서 민족주의는 민족적위기가 닥친 시점에서 개화의 등불을 들고 나타난 근대적사조이라는것,  

둘째로, 나라가 개항의 진통을 겪게 되였을 때 《자주독립》, 《보국안민》, 《척양척왜》를 부르짖으며 나타난 애국적사조이라는것,

셋째로, 민족해방투쟁무대에 맨 처음으로 등장한 대중의 지도사상이였다는것,

넷째로, 민족의 리익을 옹호하는 진보적인 사상으로 발생하였다는것 등이 그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특징을 가지는 민족주의는 언제 발생하였다고 보아야 하는가?

조선에서 민족주의라는 정치용어가 처음으로 사용된것은 19세기말 단재 신채호에 의해서였으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사상적내용으로 보아 민족주의는 그보다 훨씬 이전시기에 발생한것으로 보시였다. 즉 수령님께서 화성의숙(1926년)을 다니시던 때를 시점으로 하여 반세기전에 형성되였다고 보시였다. 다시말하여 1876년 개항을 전후한 1870년대 중반에 조선에서 민족주의가 발생한것으로 보시였다.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139페지 참고)

19세기 70년대 중반기로 말하면 봉건체제의 해체과정속에서 그 체제적위기가 절정에 이르렀으며 외세의 강요로 인한 불평등적개항을 빌미로 나라의 반식민지화과정이 제도화되고있던 내우외환의 시기였다. 민족적위기를 맞게 된 이 전환적시기에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지키기 위한 여러 갈래의 애국적, 근대적사조들이 성숙되고있었다.

첫번째 갈래의 사조는 위정척사사상이였다. 이 사상은 원래는 정학(유교를 말함)을 지키고 사학(서양학문)을 물리쳐서 반침략, 반서양의 선에서 무너져가는 봉건제도와 군주권을 지키려는 사상으로 발생발전하여 반침략에서의 국가적동원사상으로 복무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그 사상도 변화하는 시대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의 사상적립지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켜 후기 위정척사주의로 재정립되게 된다. 그것은 한원진이후 리항로, 기정진으로 이어진 보수적양이주의로서의 전기 위정척사사상과 구별되는것이다. 즉 최익현을 비롯한 여러 대표적유생들이 서양의 과학기술문명을 사학으로 배척할것이 아니라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것을 주장하여 나서게 된다. 말하자면 19세기말에 이르러 전개되는 동도서기사상 즉 사상은 우리의것을 취하고 과학기술은 서양의것을 취해야 한다는 사상의 기초형태가 이 시기에 형성되게 되는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보이면서도 반침략사상은 변함없이 견지되여 위정척사의 구호는 척양척왜의 구호로 구체화됨을 보게 된다.

두번째 갈래의 사조는 동학사상이다. 동학은 1860년 4월에 수은 최제우에 의해 창시되고 7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삼남지방 전역에로 급속히 확대된 종교교리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최제우가 천도교를 동학이라고 한것은 <서학>인 천주교에 대치시켜 동방에서 사는 조선사람들의 신앙철학이라는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5권, 381페지)

반침략적, 반서방적, 반봉건적성격이 투철하였던 동학이 내세웠던 중요한 정치적구호의 하나는 보국안민이였다. 밖으로는 외래침략에 대처해서 나라를 지킨다는것이 보국이였고 안으로는 악정에 시달리는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것이 안민이였은즉 반침략, 반봉건의 민중적, 시대적요구가 집약적으로 함축되여있다는것을 잘 알수 있다. 동학의 출현과 확산은 봉건통치계급에 커다란 위협으로 되였으며 그것은 인차 비법화된 상태에서 전파되고있었으나 동학의 교리는 조선의 민족주의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였다.

세번째 갈래의 사조는 개화사상이였다. 개화사상은 민족적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독창적대응의 사상체계로 출현하였고 민족주의의 근대적성격을 뚜렷이 부각시킨 사상으로서 그 리념적지반은 19세기 60∼70년대에 형성된다.

남조선학계에서는 조선의 개화사상의 기원을 주체적으로 찾지 못하고 일본의 후꾸자와 유끼치의 문화에 드나들었던 윤치호나 박영효가 그것을 그대로 옮겨온것으로 보는 경향을 볼수 있는데 그것은 개화사상의 기원문제를 주체적으로 고찰할수 없게 한다.

개화사상의 기원은 실학사상의 계승에서부터 시작된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실학파 학자들속에서는 민족적자각과 새 문화에 대한 지향이 뚜렷해진다. 박지원과 박규수, 김정희와 강위, 정약용과 윤정기의 관계 등에서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련관성은 명백히 드러난다.

또한 세계정계에 밝을수 있었던 위치에 있던 중인출신의 오경석, 유대치, 강위 등도 새로운 개화사상의 대표자로 등장하게 된다.

주자학적립장에서 봉건적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반침략투쟁을 주장한 위정척사론과는 달리 지배층의 립장에서 출발하기는 하였으나 자본주의적상품생산과 개국통상론의 립장에서 자주독립을 보전, 강화하기 위한 개혁, 변혁을 내세운 사상이 개화사상이였다. 이 개화사상이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유길준, 김윤식 등 명문량반출신의 진보적지식인들의 개혁운동으로 이어져 갑신정변을 불러오게 된다.

개화사상은 그 시초정립시기에서부터 자주독립의 정신에서 내정을 개혁함으로써 봉건적인 나라를 급속히 개화시키고 근대자본주의국가체제로 개변시키려 했던 반봉건, 반침략사상이였고 이로 하여 개화사상은 초기민족주의사조의 구성부분을 이루게 되였던것이다.

이처럼 조선의 민족주의사상이 세갈래의 주요사조로 분화되면서 전개된것은 전체적으로는 사상의 미숙성, 운동의 미발달을 반영하는것이지만 또한 이 시기 이후에 전개된것은 반침략, 반봉건투쟁이 민족주의리념에 의해 지도되는 부르죠아민족운동의 성격을 지니게 되였음을 보여주는것이 아닐수 없는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민족주의의 형성시기가 곧 근대사의 시초나 반일투쟁의 시초를 의미하지 않는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우리 나라에서 반일투쟁이 시작되는 시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근대로부터 계산해도 조선민족의 반일투쟁력사는 70년이 훨씬 넘는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1875년 운양호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도 우리 인민은 무력으로 일본침략군에 대항해나섰습니다.》〔회고록《세기와 더불어》 (계승본) 8권, 467페지〕

이 교시에는 두가지 뜻이 포함되여있다. 조선인민의 반일투쟁이 시작된 때는 근대에 포함되는 시기이라는 뜻, 그리고 그 반일투쟁의 시초는 운양호사건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게 된다는 뜻이다.

조선에서의 근대반일투쟁은 일본이 조선을 《징벌》하여 그 땅을 탈취할것을 주장한 요시다 쇼인, 기도 다까요시 등의 초기 《정한론》이 대두하는 가운데 종래의 조일외교규범을 파괴하는 오만무례한 국교회복요구를 반대배격하는 투쟁으로부터 시작되였다. 투쟁은 《명치유신》직후인 1869년부터 1873년에 이르기까지 진행되였다. 이 기간에 왜관일본인들의 침범에 대한 단속, 부산에서 감행된 일본인 거상들의 밀무역행위에 대한 단속 등도 강경하게 진행되였는데 이것도 반일투쟁의 고리들이였다.

그후 1875년의 운양호사건에서부터 본격적인 반일투쟁이 시작되는것이다. 이해 9월 나라의 관문을 지키고있던 영종도 수비병들은 불법침입한 운양호를 상대하여 결사적항전을 벌리게 된다. 그러나 운양호사건은 조선인민의 반침략투쟁의 시초로는 되지 않는다. 반침략투쟁의 시초는 운양호사건보다 년대적서렬에서 앞에 놓이는 반《셔먼》호투쟁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고록에서 《셔먼》호사건에 대하여 적지 않은 지면을 돌리시면서 설명을 주시고계신다. 회고록에서의 《셔먼》호사건서술은 당시의 공식문서인 일성록이나 평안감영의 계록에도 올라있지 않는 생동한 사실자료를 보여주고있는데 이것은 수령님께서 성장하신 혁명가문의 투쟁경험을 담고있는것으로 하여 매우 값높은것이다.

1866년 9월초 평양에서 벌어진 《셔먼》호의 대동강침입을 격멸한 사건에 대하여 회고록이 적지 않은 지면을 돌리고있는것은 그 사건의 력사적의미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정과 관련된다.

《셔먼》호사건은 조선에 대한 자본주의의 침략이 개시되는 첫 사변이면서 조선인민의 조국수호정신의 빛나는 발현이였다. 투쟁당시 평안감사 박규수의 사건전말에 관한 공식보고에서는 《인민들과 군인들은 명령이 없어도 모이고 북을 울리지 않아도 다투어 전진하며 탄환과 화살을 마구 쏘아 그 기세가 서로 어울려 죽음을 돌보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면서 기어코 놈들을 쳐없애고말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리하여 성밑의 방어를 맡고 끝내 불배를 떠내려보내는 전술로써 씨앗도 남지 않게 몽땅 격멸해버린것은 모두가 이들 군대와 백성들이 용감성을 발휘하고 정의에 불탄데서 나온것이며 처음부터 저의 지휘와 절제가 정확했기때문은 아닙니다.》라고 지적되고있는것만 보아도 우리는 애국적용감성으로 충만된 조선관군과 인민의 조국수호정신이 매우 컸다는것을 알수 있으며 그것이 반침략투쟁사의 시초를 빛나게 장식한 투쟁이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이 시기의 투쟁에서 표현된 조선민족의 반침략의지는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내고 민족의 자주권을 되찾기 위한 민족해방투쟁의 력사에 맥맥히 이어지게 된다.

김일성주석께서는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민족주의의 정립시기와 반침략투쟁이 시작되는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시였다.

민족주의의 정립에 있어서는 그에 앞선 민족적반침략투쟁의 시기가 있게마련인것이다.

민족주의를 단순히 밖으로부터의 침략의 위협이나 외적충격이 반사적으로 조성한 사상이라고 보아서는 안된다. 반침략적민족주의는 어디까지나 외부로부터의 위협이나 압력이 민족적범위에서 위기로 뚜렷하게 의식될 때 그러한 민족적의식의 력사적근거로서의 위기에 대처하는 민족의 저항능력이 존재하는 기반에서만 정립되는것이다.

조선민족은 단군을 원시조로 하는 단일성과 유구성을 지닌 민족이며 민족국가형성이 세계에서도 가장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으므로 민족성, 민족적가치나 생활규범이 너무나 겨레의 의식속에 내면화되고 습관화되여있다. 민족적가치나 규범이 사회성원들속에 체질화되여있는 민족이였기에 조선에서는 외적충격에 의한 민족자주성의 위기가 조성되자 그에 대한 민족적저항이 즉각적으로 일어났고 그에 곧 이어서 민족적저항에 사상적규범체계를 부여하는 민족주의의 정립을 보게 되였던것이다. 근대사의 시작과 민족주의의 정립사이에 얼마간의 시간적격차가 생기는것은 이러한 사정때문이였다.

김일성주석께서는 조선에서의 민족주의의 정립과 전개과정을 깊이 통찰하신데 기초하여 민족주의가 그 발생시초부터 력사적진보성을 가졌다는데 대해 결론하시였고 민족주의일반과 부르죠아민족주의가 가지는 차이성을 엄격하게 구분해보아야 한다는데 대하여 가르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그러므로 민족의 리익을 진정으로 옹호하는 참다운 민족주의와 자본가계급의 리해관계를 대변하는 사상적도구로서의 부르죠아민족주의는 항상 구별해보아야 한다. 이것을 동일시하게 되면 혁명실천상에서 엄중한 과오를 범하게 된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318페지)

력사적으로 볼 때 신흥부르죠아지들이 민족주의의 구호를 내세우고 민족운동의 선두에 섰다 하여 민족주의가 시초부터 자본가계급의 사상이였다고 보는것은 공정한 견해라고 볼수 없다.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부르죠아민족운동시기에는 대중의 리익과 신흥부르죠아지의 리익이 기본적으로 일치하였다. 따라서 민족주의는 민족공동의 리익을 반영하는 성격을 지니고있었다.

그후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부르죠아지가 반동적지배계급으로 되면서 민족주의는 자본가계급의 리익을 옹호하는 사상적도구로 화하게 되였다.

그러므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신께서는 부르죠아민족주의는 반대하고 경계하지만 참다운 민족주의에 대하여서는 지지하고 환영한다는 소신을 밝히시고있는것이다. 그러시면서 그러한 소신은 참다운 민족주의의 기초를 이루는 사상감정이 애국에 바탕하고있는데로부터 생겨나게 되며 애국심은 민족주의자들과 민족을 위한 하나의 궤도에서 서로 화합하고 단결하고 협력할수 있게 한다는데 대하여 지적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또한 단일민족국가인 우리 나라에 있어서 진정한 민족주의가 곧 애국주의로 된다는것은 움직일수 없는 하나의 원리라고 하시면서 이런 원리로부터 출발하여 자신께서는 애국적인 진정한 민족주의자들과의 단결과 협력을 언제나 중시하셨고 그것을 혁명승리의 확고한 담보로 보시였다고 강조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조선민족주의의 애국적성격을 이와 같이 정리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이것은 청년학생운동을 하던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한평생 견지해온 견해이고 립장이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319페지)

김일성주석께서는 참다운 민족주의는 애국애족의 리념에 기초하는것이므로 그것은 발생후 애국애족의 기치밑에 나라를 근대화하고 외적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부르죠아민족운동을 이끄는데서 추동력으로 되였음을 지적하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