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선군의 어버이 김일성장군(2)중에서
 

 

  

 1950년 9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락동강에서의 전투는 더욱더 가렬해지고 전선형편은 시시각각으로 엄중해졌다. 락동강 좌안의 좁은 지역으로 쫓겨난 미제가 막다른 위기에 빠진 저들의 불리한 정세를 역전시켜보려고 대규모적인 《총공세》로 나왔던것이다.

이 대규모적인 공세는 한 공격집단(미10군단)을 인천에 상륙시켜 서울일대를 강점하게 하고 수원과 원주일대에 진출시켜 인민군대의 보급선을 끊게 하는 동시에 다른 공격집단(미8군)은 락동강계선에서 공세를 취하여 인천상륙집단과 련합하게 함으로써 락동강전선의 인민군주력을 《포위소멸》할것을 노린것이였다. 적들은 인천에 상륙할 미10군단이 《모루》가 되고 북쪽으로 공격할 미8군단이 《메》가 되여 가운데 있는 인민군주력을 내려친다는 의미에서 이 공세를 《스레치-함마작전》으로, 맥아더가 고안해낸 인천상륙계획은 《크로마이트 100-B계획》이라는 암호로 불렀다.  

미제는 이 모험적인 《총공세》준비를 위하여 방대한 무력을 새로 끌어들였다. 미합동참모본부가 맥아더의 인천상륙계획을 승인한데 따라 미1해병사단과 미7보병사단을 주력으로 10군단이 편성되였으며 7련합기동함대가 무어졌다. 10군단의 총병력은 약 7만명, 7련합기동함대에 망라된 함선은 미7함대의 226척의 크고작은 함선을 비롯하여 영국, 카나다, 일본의 함선 등 모두 310여척에 달했으며 비행기는 1 000∼1 200대였다. 태평양방면 륙해공군의 총병력과 지중해함대의 일부까지 출동시킨 미제는 그것도 모자라 영국, 필리핀, 뛰르끼예 등 15개 추종국가군대들까지 조선전선에 들이밀었다.

이러한 준비밑에 미제는 1950년 9월 중순 5만여명의 대병력과 300여척의 함선, 약 1 000대의 비행기를 동원하여 모험적인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는 길에 들어섰다.

적들은 상륙작전에 앞서 상륙지점을 은페하기 위한 목적으로 거짓상륙놀음을 벌리였다. 9월 5일부터 미5공군은 군산주변 50㎞이내의 다리와 도로, 철도시설에 대한 폭격을 감행하였으며 《곧 미영련합군이 군산에 상륙한다.》는 삐라를 뿌리였다. 이와 함께 9월 4일부터 인민군대의 보급선을 끊을 목적으로 서울-평양, 서울-원산, 수원, 인천 등 여러 지역에 대한 무차별폭격을 감행하였으며 군산과 목포, 포항 북쪽 장사동 등지에서 소규모상륙놀음을 벌리면서 아군의 주의를 딴데로 돌리려고 시도하였다.

미제가 이처럼 갖은 모략과 교활한 술책을 다 부렸지만 그것은 어리석은짓에 불과하였다.

천리혜안의 예지와 비상한 통찰력을 지니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 이미전부터 미제의 인천상륙기도를 간파하시고 해당한 조치를 예견성있게 취하시였던것이다.

그이께서는 벌써 8월 23일에 전선사령관인 항일혁명투사 김책에게 친서를 보내시여 전선사령부에서 언제나 2∼3개의 련합부대를 예비로 장악하도록 하시였으며 9월 4일에는 전선에 나타났던 미5해병련대가 갑자기 행처를 감춘것으로 보아 적들이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는것이 확실하다고 하시면서 시급히 새로운 련합부대와 예비대를 준비하도록 하시였다. 이와 함께 최고사령관명령으로 인천에 해안방어려단을 조직하도록 하시였으며 적들의 인천상륙기도가 확실해졌을 때에는 서해안방어사령부를 내오고 인천-서울방어부대들을 통일적으로 지휘하게 하시였다. 그리고 여기에 전선경비사령부관하 부대들과 인천-군산사이의 서해안지역에 배치되여있던 경비대, 보안대들, 경기도방어지역 군사위원회에 소속되여있던 력량을 통합시키는 등 여러가지 적극적인 대책을 세우시였다. 또한 미제가 거짓상륙놀음을 벌리고있을 때에는 그 속심을 낱낱이 꿰뚫어보시고 적들의 진짜기도는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을 제5차 유엔총회전에 강점함으로써 락동강전선의 인민군주력부대들을 《포위소멸》하고 저들의 《강대성》을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추종국가들에게 보여주려는데 있다고 까밝히시였다.

그이께서는 이렇듯 비상한 통찰력과 선견지명으로 미제의 인천상륙기도를 속속들이 간파하시고 그것을 분쇄하기 위한 대책을 구체적으로 세워주시였다.

그런데 당시 경기도방어지역 군사위원회의 책임적자리에 앉아있던 미제의 고용간첩 리승엽도당은 위대한 수령님의 명령, 지시집행을 교활한 방법으로 방해하였으며 적들에게 인민군대의 군사정보까지 넘겨주는 천추에 용납 못할 범죄행위를 감행하였다.

대렬내에 잠입한 원쑤들의 이러한 책동으로 하여 인천-서울방어는 처음부터 매우 불리한 정황에 놓이게 되였다.

당시 인천-서울지역에는 1개월미만의 훈련밖에 받지 못한 신병들로 구성된 부대들이 배치되여있었으며 그들의 무장장비도 매우 불충분한 상태에 있었다.

조성된 정황을 꿰뚫어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서해안방어사령부에 한강과 서울시가에 대한 방어를 더욱 강화할데 대한 명령을 주시고 예비부대들을 서울지역으로 진출시키시였다.

준엄한 시련을 앞둔 서울과 인천의 공기는 말할수 없이 팽팽하였다.

1950년 9월 13일 드디여 미제는 대병력을 동원하여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적들이 첫 목표로 삼은것은 인천앞바다의 자그마한 섬인 월미도였다.

인천 서쪽 800m지점에 있는 월미도는 인천시가와 방파제로 잇닿은 작은 섬이였다. 해발 105m의 피라미드형으로 된 이 섬은 인천항구로 통하는 배길을 지배하면서 길게 누운 모양이 마치 달의 꼬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월미도라고 불렀다. 서울의 관문인 인천의 최남단에 있는 월미도는 군사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적들이 이 월미도를 장악하지 않고서는 인천에 대한 상륙도 《총공세》의 목적도 달성할수 없었다.

그리하여 넓이가 약 1㎢밖에 안되는 월미도가 세계전쟁사에 있어본적이 없는 치렬한 격전장으로 되였다.

그때 월미도의 무장인원은 한개의 인민군 해안포병중대와 한개의 보병중대가 전부였으며 무장장비로는 불과 4문의 크지 않은 포가 있었을뿐이였다.

반면에 적들은 5만여명의 대병력과 수백척의 함선, 1 000여대의 비행기를 동원하여 월미도로 달려들었다.

력량상대비는 너무나도 엄청났다. 적들의 무차별적인 폭격과 함포사격으로 월미도는 온통 포연과 화염으로 뒤덮이였으며 섬의 옛 모습은 찾아볼수도 없게 되였다.

력량상우세를 믿고 기고만장해진 미제는 월미도를 단숨에 삼켜볼 심산으로 먹이를 본 승냥이마냥 악착스럽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미제는 오산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의 명령관철을 위해서라면 청춘도 생명도 서슴없이 바칠 각오를 가진 인민군전사들이 월미도를 지키고있었던것이다.

월미도를 끝까지 지켜낼데 대한 영예로운 임무를 맡은 해안포병중대와 보병중대의 영웅전사들은 섬전체가 타번지는 불바다속에서도 엄청나게 많은 적들과 맞서 영웅적으로 싸웠다. 적들은 여러차례에 걸쳐 끈질기게 덤벼들었지만 그때마다 월미도용사들의 반격을 받고 물러서지 않을수 없었다.

치렬한 격전속에 이틀이 지났다.

파도식으로 달려드는 적의 상륙기도를 분쇄한 월미도해안포중대에는 포가 한문밖에 남지 않았으며 적지 않은 전투원들이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남은 전투원들도 지치고 부상당한 몸들이였다.

그러나 월미도의 용사들은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그들은 위대한 수령님의 명령을 높이 받들고 마지막 피 한방울 남을 때까지 월미도를 지켜 용감히 싸울것을 굳게 맹세하였다.

전투가 시작된지 3일째 되는 날인 9월 15일, 련일 월미도상륙에서 실패한 미제는 비행대의 폭격과 함포사격을 더욱 미친듯이 감행하였다. 적의 비행대는 100차이상 덤벼들었으며 월미도에 놈들의 선견대가 상륙하기 전 15분동안에만도 3 000여개의 폭탄을 떨구었다.

그렇지만 월미도의 방위자들은 적들의 발악적인 폭격과 포격도 두려워하지 않고 한발자국도 물러섬이 없이 희생적으로 싸웠다. 그들은 한문밖에 남지 않은 포로 마지막포탄까지 적함을 쐈다. 여러척의 적상륙정이 또다시 물속에 처박히였다.

월미도방위자들은 최후의 결사전에 들어서면서 위대한 수령님의 건강을 삼가 축원하며 조국의 영예를 지켜 끝까지 싸울 불타는 심정과 굳은 결의를 담은 전보문을 상급참모부에 보내였다.

마지막전파가 날아가는것과 때를 같이하여 해안포중대장이 《동무들! 위대한 수령님을 위하여 돌격 앞으롯!》 하고 웨치며 앞장에서 달려나갔다. 그뒤를 따라 월미도방위자들은 일제히 적들을 맞받아나갔다. 통신병도, 위생병도, 취사원도 모두가 한사람같이 중대장의 뒤를 따라 육박전에 뛰여들었다.

9월 15일 11시경 원쑤와의 마지막결사전에로 떨쳐나서는 월미도방위자들의 우렁찬 《만세!》의 함성이 하늘가에 높이 울려퍼졌다.

이렇게 월미도의 용사들은 마지막 한사람이 남을 때까지 결사적으로 싸워 적구축함 3척을 비롯한 각종 함선 13척을 격침격파하고 적의 상륙을 3일간이나 지연시킴으로써 인천-서울지역 방어부대들에 귀중한 시간을 보장해주었다.

월미도방위자들이 세운 이 빛나는 위훈, 그것은 세계전쟁사가 알지 못하는 또 하나의 기적이였다.

과연 무슨 힘이 그렇듯 평범하고 소박한 병사들을 빛나는 위훈의 창조자로 되게 하였겠는가.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월미도방어전투가 있은 때로부터 얼마후인 주체39(1950)년 10월 10일 월미도용사들의 위훈을 높이 치하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월미도방위자들이 이 전투에서 무비의 희생성과 대중적영웅주의를 높이 발휘할수 있은것은 그들이 해방후 5년간의 생활을 통하여 자기들을 공장의 주인, 땅의 주인으로 되게 해주고 행복한 새 생활을 마련해준 조국과 인민민주주의제도의 귀중함을 가슴깊이 느꼈기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였다.

월미도방위자들이 생사를 판가리하는 결전의 마당에서 무비의 희생성과 대중적영웅주의를 높이 발휘할수 있은것은 조국과 인민민주주의제도의 귀중함을 가슴깊이 느꼈기때문이였다.

조선인민에게 있어서 조국은 곧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이시였다. 그이께서 계시여 조선인민은 난생처음으로 공장의 주인, 땅의 주인으로 되였으며 행복한 새 생활도 누리게 되였다. 해방후 5년동안의 생활체험을 통하여 조선인민은 김일성장군님이시야말로 조선민족의 운명이시고 미래이시며 그이를 높이 받들어모시고 그이의 뜻을 받들어나가는 길에 자신들의 존엄과 행복, 영예도 있다는것을 철석의 신념으로 간직하였다.

이러한 철석의 신념을 지니였기에 월미도방위자들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온몸이 그대로 육탄이 되여 결사전에로 나갔으며 세계가 경탄해마지 않는 위훈을 세울수 있었던것이다.

월미도용사들이 발휘한 당과 수령에 대한 끝없는 충실성과 조국과 인민에 대한 열렬한 사랑, 고상한 전투도덕적품성은 전쟁의 어려운 국면에 대처하여 과감히 싸우는 인민군군인들과 인민들을 크게 고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