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김일성주석 통일일화중에서 

미제에 의하여 강요된 조선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주체40(1951)년 8월 16일이였다.

그때 공화국북반부전역은 30년래의 큰물로 강들이 넘어 전시수송에 일정한 지장을 받고있었다.

적들은 릿치웨이의 이른바 《하기공세》를 앞두고 인민군대의 수송을 완전히 마비시켜보려고 후방에 대한 야만적인 무차별폭격을 어느때보다도 강화하고있었다. 특히 물이 넘어나는 큰 강들의 나루터에 대한 악랄한 폭격이 밤낮 쉬임없이 감행되고있었다.

그간 평양에 나와있던 허헌선생은 이날 김일성종합대학의 새 학년도 개학식에 참가하기 위하여 앞길에 놓인 홍수를 무릅쓰고 정주를 향해 떠났다.

그날 저녁 청천강을 무사히 넘은 허헌선생이 대령강나루터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밤이였다. 군용차도 실어 건네는 큰 배가 소용돌이치며 바다로 내닫는 홍수에 떠밀리면서도 믿음직하게 강한복판으로 나가고있을 때 갑자기 미제의 야간폭격기편대가 머리우에 나타났다. 적들이 강안과 강물에 수많은 폭탄을 쏟아붓는 바람에 강한복판에 떨어진 폭탄들이 터지며 숲처럼 일으키는 물기둥과 곤두서서 밀려와 덮씌우는 집채같은 물결에 의하여 불행하게도 허헌선생이 탔던 배는 뒤집히고말았다. 어두운 밤인데다가 30년래의 큰물속에서 생긴 불상사이니 어떻게 손쓸바가 없었다.

그날 밤부터 강물에 빠진 사람들의 행처를 찾는 작업이 벌어졌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있었다.

조난자들은 홍수와 함께 바다로 나갔을것인데 말그대로 넓은 바다 어느 밑에 가서 그들을 찾을수 있겠는가.

이 사실을 보고받으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허헌선생의 불상사를 통분해하시면서 바다가 아무리 넓다한들 우리 당이 아끼고 사랑하던 허헌동지를 못 찾는다는거야 말이 되는가, 어떻게 해서든지 찾아야 한다, 바다밑을 다 뒤져서라도 꼭 찾아야 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3 000여명의 군인들을 이 작업에 붙이는 조치를 즉석에서 취하시였다.

그때로 말하면 적들이 《하기공세》를 시작한 직후여서 참으로 전투원 한명이 새로왔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허헌선생을 위하여 서슴없이 그처럼 많은 군인들을 동원해주시였던것이다.

그리하여 16일만에 정주앞바다에서 끝내 허헌선생의 시신을 찾아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허헌선생의 희생을 두고 못내 가슴아파하시며 그의 딸 허정숙을 부르시여 그를 위로해주시고 허헌선생의 장례를 국장으로 거행하도록 하시였다.

국장으로 엄숙히 거행되여온 허헌선생의 장례는 9월 6일 령구를 떠나보내는것으로 마감단계에 들어서게 되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령구가 있는 모란봉지하극장으로 친히 나오시였다.

전선형편이 더없이 긴장한 이때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최고사령부를 뜨시면 어떻게 하는가고 하며 어서 돌아가시라고 애원하는 허정숙의 손을 잡아주시며 그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아니오. 아무리 어떻다한들 허헌선생이 마지막 가는 길에 내가 나오지 않을수 없지요. … 나오지 않고서는 견딜수 없어서 왔습니다.…》

그러시고는 장의위원회에서 일보는 한 일군에게 검은 완장을 가져오라고 이르시고는 팔에 검은 완장을 끼시였다.

장중한 추도곡과 함께 령구를 떠나보낼 시각이 다가왔을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선참으로 령구의 앞머리를 향해나가시였고 당과 정부의 책임일군들을 이끄시면서 맨앞에서 몸소 령구를 메시고 모란봉지하극장의 높은 계단을 오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령구가 산으로 떠나는것을 배웅하시고나서야 최고사령부로 향하시였다.

그날 오후 6시경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몇몇 수원들과 함께 허헌선생의 분묘를 찾으시여서는 분묘를 잘 관리할데 대하여 일군들에게 이르시였다.

참으로 위대한 수령님은 조국과 민족을 위한 애국적량심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품에 안으시여 믿고 아끼시며 행복과 광명의 한길로 이끌어주시였으며 죽어서도 영생하는 삶을 안겨주시는 민족의 은혜로운 어버이, 영원한 사랑의 태양이시다.

 

주체80(1991)년 11월 25일 오전 9시 30분, 《아시아의 평화와 녀성의 역할》에 관한 제2차 토론회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로 향한 북측대표단이 판문점을 넘어섰다.

대표단단장은 통일애국지사 려운형선생의 맏딸 려연구였다.

이날 오후 려연구단장은 서울 도봉구 우이동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를 찾았다.

묘소에는 이미 고인의 친척들과 려운형선생추모회 회장, 고문들을 비롯한 이 단체의 성원들 그리고 북과 남의 수많은 기자들과 안내원들이 와있었다.

고인의 친척들, 친지들 그리고 수많은 신문기자들이 줄지어선 가운데 차에서 내린 려연구는 두개의 커다란 지함을 가지고 나왔다.

류달리 눈길을 끄는 2개의 지함, 과연 그속에 무엇이 들어있을가…

주위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이윽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한데 모으며 지함의 뚜껑이 열렸다.

《아!》

여기저기서 탄성이 울려나왔다.

뜻밖에도 지함에서 나온것은 김일성화, 김정일화가 소담하게 담긴 화환이였다.

이때 려연구단장은 품속에서 붉은 댕기를 꺼내여 화환에 정중히 드리워놓았다.

그 댕기에는 《고 몽양 려운형선생을 추모하여 김일성이란 글자가 빛을 뿌리고있었다.

고인의 친척들은 물론 주위사람들이 받아안은 놀라움과 감격은 이루 헤아릴수 없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 근 반세기전에 세상을 떠난 한 통일애국지사를 잊지 않으시고 평양에서 그곳 서울까지 추모의 화환을 보내주실줄 과연 그 누가 상상이나 할수 있었겠는가.

려연구는 목놓아울면서 추모사를 읽기 시작하였다.

《…아버지가 생전에 그토록 경모해마지 않던 위대한 수령님께서 몸소 은정어린 화환을 보내주시였습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그 마음 소중히 여기시며 우리 아버지를 통일의 선각자로 애국지사로 불러주시고 오래 잊지 못해하고계시는 우리 수령님이십니다.…》

려연구의 오열은 그대로 그 자리에 참가한 모든 사람의 오열로 파급되였다.

믿음이면 이런 믿음이 어디에 있고 은정이면 이런 은정이 어디에 있겠는가. 사람의 기억이란 야속한것이여서 아무리 가까왔던 사람이라도 그와 리별하고 세월이 지나면 그 감정이 사라지는것인데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수십년전에 만나셨던 민주인사를 잊지 못하시여 그 험한 분계선을 넘어 애도의 화환을 보내주신것이다. 진정 고매한 인덕과 믿음이 그려낸 더없이 아름다운 화폭이였다.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주석의 숭고한 의리와 고매한 덕성에 대한 이야기는 남녘땅 구석구석에까지 오늘도 전설처럼 전해지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