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선군의 어버이 김일성장군(2)중에서
 

 

  

 날이 갈수록 기울어지는 전선형편에 당황망조해난 미제는 불리하게 된 형세를 돌려세우고 전조선을 강점하려는 침략목적을 기어이 달성하기 위해 저들의 지상군을 조선전선에 대량 들이밀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이해 7월초 미지상군의 선견대인 《스미스특공대》가 조선전선에 나타난데 이어 미24사단, 미25사단, 미1기병사단을 비롯한 침략의 무리들이 련이어 부산과 포항에 상륙하였으며 중땅크들과 중포들이 증강되였다. 4개의 전략폭격기련대들이 미국본토에서 극동으로 날아들었고 7함대의 항공모함전단들도 조선해역으로 기여들었다.

한편 미제는 유엔의 간판을 도용하여 자기 손아래동맹자들로 《반공십자군》도 편성하였다.

탁월한 군사전략가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적들의 무력증강으로 하여 조성된 군사정치정세와 전선정황을 예리하게 통찰하시고 대전지역에서 미제침략군을 포위소멸하기 위한 대담한 작전을 펼치시였다.

적들이 《림시수도》로 정한 대전은 령남과 호남지역을 잇는 군사전략상요충지로서 공화국남반부의 전지역을 해방하고 차후 남해안에서 벌어질 격전들을 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수행하기 위하여 반드시 디디고 넘지 않으면 안될 중요한 지점이였다.

그이께서는 대전포위작전에 앞서 먼저 전선주타격방향 련합부대들의 금강강행도하를 승리에로 조직지휘하시였다.

당시 적들은 인민군대의 반공격을 금강계선에서 어떻게 하나 저지시켜보려고 이 일대에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있었다.

적들이 《불퇴의 선》이라고 호언장담하는 이 방어진을 허물지 않고서는 대전을 해방할수 없었으며 미제의 주력을 포위섬멸할수도 없었다. 금강방어진을 허물어버리는것은 대전해방작전의 승리를 좌우하는 기본고리의 하나였다.

적들의 방어선을 어떻게 돌파할것인가.

전선사령관도, 군사위원도, 참모장도, 일군들모두가 신통한 방도를 찾지 못해 안타까와하고있을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빈 익측과 공간지가 있는 적방어의 약점을 대번에 밝혀주시고 몸소 부대별도하지역과 강행도하방법을 비롯하여 금강강행도하의 묘술을 제시해주시였다. 뿐만아니라 도하준비를 빈틈없이 빨리 하기 위한 여러가지 조치들까지 세워주시였다.

그이의 작전적구상에 따라 만단의 준비를 갖춘 인민군련합부대들은 주체39(1950)년 7월 14일 이른새벽 공주정면방향에서의 거짓도하로부터 금강강행도하를 시작하여 일제히 강을 도하하였으며 련속 적들을 소멸하면서 종심으로 전투성과를 확대해나갔다. 이튿날 대평리방향에서 진행된 강행도하도 성과적으로 진행되였다. 결국 미제의 살인장군들이 그처럼 장담하던 《불퇴의 선》은 단 이틀동안에 물먹은 담벽처럼 무너지고말았다.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밑에 금강을 성과적으로 도하한 전선주타격집단은 대전방향으로 전과를 계속 확대해나갔다.

《불퇴의 선》이 맥없이 무너져버리자 적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림시수도》인 대전만은 고수해보려고 발악적으로 책동하였다. 미제는 24보병사단의 전체 력량과 패잔력량으로 대전일대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면서 포항에 상륙한 1기병사단과 부산에 상륙한 25보병사단을 대전방향으로 기동시켜 대전계선을 고수함으로써 공세에로의 전기를 마련하려고 기도하였다. 그리하여 적의 막대한 병력과 무기, 전투기술기재들이 삼남의 황토벌을 짓이기며 황급히 대전지역으로 쏠리기 시작하였다.

세계의 통신과 방송들은 저저마다 대전지역에서 벌어지게 될 격전의 결말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예측과 판단을 내리고있었다.

그런데 대격전의 시각이 다가오고있던 이무렵 대전해방을 위한 작전계획수행에서는 예견치 않았던 정황이 조성되였다.

주타격방향에서 행동하는 련합부대들은 작전계획대로 대전방향으로 진격하고있었으나 대전 동남쪽에 진출하여 포위를 실현해야 할 련합부대가 청주 남쪽 피반령계선에서 적의 집요한 저항에 맞다들어 공격속도를 높이지 못하고있었던것이다. 이 련합부대가 지정된 계선에 도착하려면 아직 사흘이 걸릴지 닷새가 걸릴지 알수 없었다.  

포위전에서의 성과여부는 적에 대한 포위를 얼마나 빨리 그리고 철저히 하는가에 달려있다. 조성된 사태를 수습하지 않는다면 대전 동남쪽은 빈채로 남아있게 되여 포위를 실현할수 없게 되며 그렇게 되면 미1기병사단과 25보병사단이 대전으로 올라와 그곳의 적들과 합세하게 될것이였다.

이때문에 청주계선은 적아작전가들의 사색의 초점으로 되고있었다. 적들은 청주계선에서 인민군련합부대의 발목을 계속 붙잡아두려고 필사적으로 저항하였고 전선사령부는 청주계선을 돌파하려고 애썼다.

사태의 엄중성으로 하여 전선사령부는 초긴장상태에 놓여있었다.

과연 방도는 없단 말인가.

일군들이 자책감에 모대기고있을 때 몸소 포연을 헤치시고 전선사령부를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대전포위를 신속히 실현할수 있는 묘술을 환히 밝혀주시고 대전해방작전을 위한 과업과 방도들을 명철하게 밝혀주시였다.

그이께서는 대전해방작전을 성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대전지구와 린접해있는 괴뢰군부대들이 미24보병사단을 지원하지 못하게 멀리 밀어내고 견제하는 한편 인민군부대들이 대전 북쪽과 서북쪽 그리고 익측에서 적들을 압축타격하도록 하시였다.

이와 동시에 대전 동남쪽에 진출하여 포위를 진행하여야 할 련합부대가 적들의 집요한 저항으로 지체되는 경우 론산계선에 진출한 부대들의 일부 력량을 대전 동남쪽으로 신속히 우회기동시켜 적의 퇴로와 증원부대의 진격로를 차단함으로써 대전의 적들을 빠른 시간안에 완전히 포위하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만일 제2보병사단이 계획대로 대전 동남쪽으로 진출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론산-남원방향으로 공격하게 되여있는 서울제4보병사단의 일부 력량을 신속히 대전 동남쪽으로 우회시켜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증원을 막도록 하여야 합니다.》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 대전서남부의 론산계선에서 대전포위의 고리를 찾으신 이 기발한 착상!  

전선사령부의 일군들은 칠칠야밤에 해빛을 받은듯 눈이 번쩍 띄였고 앞을 막아섰던 백척 담벽이 무너진듯 앞이 탁 트이였다. 그들은 위대한 수령님의 비범한 군사적예지와  지략에 다시금 경탄을 금치 못해하면서 위대한 령장을 모신 긍지와 자부심, 승리에 대한 신심을 더욱 굳게 간직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세워주신 작전적묘책에 따라 인민군련합부대들은 곧 대전포위를 위한 작전행동을 다그쳤다.

이 시각 포항을 떠난 미1기병사단도 대전을 향하여 바삐 기동하고있었다.

누가 먼저 대전동남지역을 차지하는가에 따라 대전전투의 승리가 좌우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명령을 받은 론산계선의 인민군부대는 7월 18일 어둠이 깃들무렵 신속히 대전동남방향으로 기동하였다.

그들은 대도로를 따라가더라도 100여리나 되는 거리를 험한 산발을 타고넘어 하루밤사이에 감쪽같이 대전 남쪽과 동남쪽에 진출하여 대전-금산, 대전-영동사이의 도로를 차단함으로써 적의 퇴로를 완전히 끊어놓았다.

때를 같이하여 대평리지역에서 공격하던 인민군련합부대는 유성을 해방하고 대전 서북쪽에 진출하였으며 청주방향으로 공격하던 련합부대도 적의 방어선을 뚫고 마침내 대전 북쪽에 이르렀다.

20일 새벽에 이르러 인민군부대들은 대전시를 중심으로 한 100㎞²의 지역에 적을 몰아넣고 완전히 포위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적들은 인민군부대들이 제놈들의 후방에 진출하여 퇴로를 차단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있었다. 미24사단장놈은 대전 남쪽 구봉산에서 인민군대를 발견하였다는 수색대의 보고를 받고도 《공산군이 제아무리 날고뛰는 재간이 있어도 하루밤사이에 그곳까지 나타날수는 없다. 그것은 네놈들이 겁에 질려 제편을 잘못 본게 분명하다.》고 하면서 저들이 포위환속에 든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대전시가에 대한 공격에 앞서 먼저 기동한 인민군소부대들은 적소굴로 은밀히 뚫고들어가 중요대상물들과 유생력량들을 맹렬히 타격소멸함으로써 적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련합부대의 시가공격에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였다.

주체39(1950)년 7월 20일 새벽 5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대전시가에 대한 총공격명령을 내리시였다.

드디여 대전시가에 포위된 적집단에 대한 일대 섬멸전이 개시되였다.

총공격으로 넘어간 인민군련합부대들은 포위한 적을 대전시내 6∼7㎞²의 좁은 지역에 몰아넣고 맹렬히 타격하였다.

인민군대의 포위망이 조여들자 적들은 걷잡을수 없는 혼란에 빠져 갈팡질팡하면서 무질서하게 저항했다. 적들의 지휘체계는 완전히 마비되고 전투서렬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이번 전투에서 《시범을 보여 신뢰를 얻겠다.》던 미24사단장 띤은 대전싸움에서 또다시 졌다는것을 인정하고 사단에 퇴각명령을 내리지 않을수 없었다. 퇴각종대들은 땅크들을 앞세우고 대전-금산사이, 대전-영동사이로 빠져나가려 했으나 퇴로를 차단하고있던 인민군부대의 호된 징벌을 면치 못하였다. 여기서 간신히 도망친 띤은 병사옷을 갈아입고 산속으로 들어갔으나 얼마 못 가서 인민군 한 전사에게 포로가 되고말았다. 《상승사단》은 완전히 괴멸되고말았다.

미1기병사단이 24사단을 구출하기 위하여 급히 대전방향으로 달려왔으나 대전은 이미 낮 12시에 인민군대에 의하여 해방되였으며 영동길은 막혔고 증원을 받아야 할 24사단은 와해되여 어디에도 조직된 실체는 없었다.

이렇게 대전해방전투는 인민군대의 승리로, 미군의 참혹한 패배로 끝났다.  

우리 식의 포위전법에 얼마나 혼이 났던지 조선전쟁에 참가하였던 미군장교 페렌바크는 《실록 한국전쟁》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그들(인민군대를 말함)은 방어군을 정면으로 공격해서 그 자유를 묶고 후퇴를 불가피하게 만드는 한편 우회하거나 종심에 침투하는 방법으로 방어군의 후방에 나타나 퇴로를 차단하는 그런 전술을 썼다.

어느 특정한 시점에서 띤이건 또는 다른 지휘관이건 후방의 상황을 파악한다는것은 불가능한 일이였다. 그것은 잘 정리된 전선을 유지하는 유럽식경험을 쌓은 군사지휘관들이 이미 때가 늦었을 때까지 파악 못한 전술이였다.》

페렌바크의 이 말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대전해방작전에 적용하신 우리 식의 포위전법의 불패의 위력에 대한 솔직한 시인이였다.

세계는 대전에서의 미제의 참패를 통하여 미제의 《강대성》의 신화가 깨여지고있으며 미제는 결코 무적이 아니라는것을 현실로 목격하게 되였다.

대전해방작전이 승리적으로 결속됨으로써 인민군대와 전체 인민은 전쟁의 최후승리에 대한 필승의 신념을 더욱 굳게 가다듬게 되였으며 차후작전에서 계속 승리할수 있는 군사, 정치도덕적담보가 마련되게 되였다.

참으로 대전해방작전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의 독창적인 주체전법에 의하여 창조된 현대포위전의 위대한 모범이였다.